여호와/야훼 신명의 신론적 이해  


 

허호익(대전신대 교수)



1. 한국교회의 신명 논쟁

한국교회에서 성서의 신명에 관한 몇 가지로 논쟁이 되고 있다.
첫 번째 논쟁은 구약성서의 엘로힘(Elohim)을 하나님으로 표기하느냐 하느님으로 표기하느냐는 논쟁이다.

1933년 이후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제정으로 아래아 표기가 폐지되자 1937년에 나온 개역 성경전서에서는 유일신 인격신 사상을 잘 표상하는 하나님(하나+님)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1977년 신구교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하나님 신명은 신조어로서 어법상 정확한 신명이 아니라고 하여 한글의 보통명사로서의 신명인 하느님이므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1993년 표준새번역이나 1998년 개정개역판은 모두 하나님을 사용하였다.

둘째로 여호와냐 야훼냐하는 것도 쟁점이 되었다. 1933년 이해 여호와로 표기하였는 데, ‘여호와’ 보다는 ‘야훼’가 원래의 신명에 가까울 것이라 하여, 1977년 ?공동번역 성경전서?에서 야훼 신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3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는 여호와와 야훼의 논쟁을 피하기 위해야 구약성서와 흠정역의 전통에 따라 여호와/야훼를 주(Lord)로 번역하였고, 1998년 ?개정개역판 성경전서?에는 다시 여호와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성서의 신명에 관한 신학적 쟁점들을 살펴보려고 야훼 신명의 신론적 의미를 밝혀 보려고 한다.


2.  엘로힘 신명의 쟁점

창세기 1장 1절에는 “태초에 하나님(Elohim)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나는 …이라.”는 신명계시 어법(formular)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 직전 미디안 광야 타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불러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개역개정판)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 것이다.

이 외에도 유대인들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70가지의 하나님의 이름을 열거하였지만, 제롬은 하나님의 이름을 열 가지로 제한하였다.

“엘(El), 엘로힘(Elohim), 엘로아(Eloha), 사바옷(Sabaoth), 엘룐(Elyon), 에세르 에흐예(Esher ehye), 아도나이(Adonai), 야(Yah), 야훼(YHWH), 샤다이(Shaddai)”

그러나 구약성서의 나타나는 신명을 크게 나눠 보면 엘로힘(Elohim) 계열 복합신명 32개와 여호와/야훼(YHWH) 계열 복합신명 41개와 여호와/야훼 엘로힘 복합 신명 9개로으로 대별된다.

엘로힘(Elohim) 신명은 성서에 2500회 정도 등장하는데, 고대 근동지방에서 흔히 사용된 보통명사로서 엘(El), 일라(Illa), 알라(Alla), 엘로아(Eloah) 등으로 음운 변천하였으며 그 뜻은 강함(Strong 또는 Power)이라고 추정한다. 엘로힘 계열의 신명은 희랍어의 Theos, 영어의 God, 독어의 Gott, 한자의 神, 한글의 하느님을 뜻한다.

한글성서 번역사에서 처음으로 논쟁이 된 것은 엘로힘 신명의 번역이다. 성서의 엘로힘이 영어로 번영된 God에서 중역(重譯) 되는 과정을 통해 최종으로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정하상의 ?上帝上書? 번역서(1839)에는 하?님으로, 존 로스는 ?예수셩교문답?(1881)에서는 하느님으로, ?예수셩교셩서 누가복음 뎨자힝�?(1883)에서는 하나님으로 표기하였다.

1894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에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하던 중 신명이 쟁점이 되어 텬쥬판 500부와 하?님판 100부를 간행하였다.

1910년 선교사번역 위원회의 ?신약젼서?는 ‘유일하고 큰 분이란 뜻’으로 하?님이라 번역하였다.

1933년 이후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제정으로 아래아 표기가 폐지되자 1937년에 나온 개역 ?성경전서?에서는 유일신 인격신 사상을 잘 표상하는 하나님(하나+님)을 사용하였는데, 당시의 민중 기독교의 무속적 종교 혼합을 막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기 위한 의도로서 하나님과 하느님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1977년 신구교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한글의 보통명사로서의 신명은 문법상 정확하게 표기하면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성서의 엘로힘을 하느님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이라는 신명은 신의 유일성과 엄격성만을 강조한 신조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재래종교의 하느님과 성서의 하나님을 구별하려는 여론에 밀리어 1993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과 1998년 ?개역개정판 성경전서?에서도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엘로힘 신명의 번역상의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문법 또는 어법에 충실할 것이냐, 아니면 신앙적 신학적 의미에 충실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공동번역 서문에는 번역의 원칙을 “축자적 번역이나 형식적 일치(Formal Corespondence)를 피하고 내용의 동등성(Dynamic Equbalance)를 취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이라는 표기는 전자에 해당하고, ‘하나님’이라는 표기는 후자에 해당한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엘로힘 신명과 관련하여서는 복수형에 관한 논쟁에 외에는 별다른 쟁점이 없었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이므로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론의 흔적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그리고 19세기 이후는 비교종교학적인 입장에서 다신론의 잔재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신명의 복수형은 히브리어의 존귀와 위엄을 나타내는 존칭의 복수형임을 밝혀 주었다.


3. 여호와/야훼 신명의 여러 쟁점

창세기 2장 4절에는 여호와 신명이 처음 등장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대략은 이러하다”고 하였다. 구약성서의 가장 많은 회수, 즉 6800회 이상 등장하는 대표적이고 고유한 신명은 여호와/야훼(YHWH : ????)이다. 엘로힘 신명과 달리 여호와/야훼 신명에 관해서는 구약성서 신학적으로 이 신명의 계시시기, 신명의 유래와 기원, 신명의 발음, 신명의 번역, 그리고 신명의 의미에 관한 여러 논쟁을 야기했다. 먼저 이러한 여호와/야훼 신명의 쟁점들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구약성서 신학적 배경에서 여호와/야훼 신명이 갖는 신론적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신명의 계시는 신론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조직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1) 신명계시의 시기

여호와/야훼 신명이 언제부터 알려졌는지 그 시기에 대해서도 성서는 다 기록하고 있어 쟁점이 되고 있다.

J문서(남왕조)는 족장시대 이전 셋 아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고 하였고, 노아도 홍수 후에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창 9:26)고 축복하였고, 아브라함도 벧엘과 아이 중간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창 12:8)을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소위 북왕국에서 전승된 엘로힘 문서는 족장시대에는 조상들의 하나님(Elohei-abika 창 31:53, 출 3:6, 16)으로 알려진 그들의 신이 출애굽 직전 미디안 광야에서 처음으로 모세에게 여호와로 계시되었다고 한다(출 3:13). 그리고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의 공식 신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포로후기의 제사장 문서는 이 두 입장을 조장하여 족장시대 이전에는 엘로힘또는 엘으로, 족장시대에는 엘 샤다이(창 17:1, 28:3, 35:11, 43:14, 48:3, 49:25)로 자신을 알려주셨다가, 모세에 이르러서는 여호와로 계시하였다고 한다.

신명기 문서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 20:7, 레 24:11)고 하였다. 포로후기에는 신명 발음을 금기시하였으며 ‘Adonay’(나의 주)로 대치하여 발음하게 함으로서 마침내 신명을 원래 발음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2) 신명의 기원과 유래

모세에게 여호와/야훼 신명이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전제에서 이 신명의 기원과 유래에 관한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다. 모세가 미디안에 피신하여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고(출 2:21 f),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호와/야훼를 만났으며(출 3:1-15), 출애굽 후 다시 그곳에 들렸을 때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이 여호와/야훼의 위업을 찬양했으며 함께 희생제사를 드린 것(출 18:11-12)에 근거하여 여호와/야훼는 본래 미디안 족속의 신으로서 그들의 성소인 시내 산에 거처하던 신이었는데 모세가 그 성소의 제사장인 그의 장인을 통해 이 신을 알게 되었다는 미디안 가설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모세의 장인이 겐족으로 언급된 것(삿 1:16, 4:11)과 겐족이 가인의 후예이며(창 4:15), 여호와(야훼) 신앙에 열심이었던 레갑족이 겐족이었다는 점(대상 2:55)을 들어 겐족 가설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겐족이나 미디안 족이 유일신관이나 우상금지신관 그리고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계약신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다른 증거가 없으므로 단지 모세가 그들과 접촉하였고, 그들의 지역에서 여호와/야훼 신명을 계시 받았다고 해서 그들의 종교에서 기원하였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쉬미트도 미디안 가설 혹은 겐족 가설은 분명하게 입증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단정하였다.  

프로이드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의 여러 신들의 제사를 폐지하고 태양신 아톤(Aton)만을 신으로 숭배한 아케나톤왕(Akhenaton 1364-1347)의 일신교(Atonism)의 영향을 받은 모세가 여호와(야훼) 일신교를 발전시켰다는 가설을 주장하였으나, 갓월드는 “두 종교의 내용이나 사회 구조면에서 볼 때 아톤숭배와 야훼숭배 사이를 연결시킬 수 있는 교량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브라이트도 “야훼 신앙은 본질적 구조에 있어서 도무지 이집트 종교와 닮을 수 없었다”고 반론하였다. 무엇보다도 모세 시대(기원적 약 1210-1290)에는 이미 아켄나톤의 개혁의 흔적이 바로의 궁전에서 사라진 이후이므로, 이 역시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반박되었다.

마리 문서의 발굴로 이 문서에 등장하는 인명 중에 야휘(yawhi)나 야후(yahu) 복합어가 많은 것에 착안하여 여호와(야훼)는 원래 우르 제3왕조 때부터 아모리인들이 섬기던 신이라는 가설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아람어의 야휘(yawhi)나 야후(yahu)는 고유명사의 신명이 아니라 ‘be’ 동사의 미래 명령형(junctive)일 뿐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 외에도 여호와(야훼)가 14세기 이전에 에돔의 신으로 숭배되었다는 주장도 제기 되기도 하였다.

3) 신명의 발음 : 여호와냐 야훼냐  

유대인들은 제3계명의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 성전에서 아주 특별한 때에만 여호와/야훼 신명을 사용하였으며, 성전 멸망 후 회당에서는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성경을 읽다가 신명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YHWH)라는 글자가 나오면, 우리가 선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함자(銜字)로 부르며 기휘(忌諱)한 것처럼 ‘나의 주(Adonay)'로 바꾸어 읽었다.  

이런 전통에 따라 기원전 3세기에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도 여호와를 아도나이로 읽었고 그런 까닭에 '나의 주(kyrios)’로 번역하였다. 주후 6세기경 유대인 맛소라 학파가 구약이름, 발음할 수 없는 이름”으로 불렀다.

종교개혁시대와 와서 1518성서에 모음을 병기(倂記)하기 시작했는데, ????(YHWH) 신명의 정확한 모음을 알지 못해 ‘Adonay’(나의 주)로 대신 읽었고, 그 자음 'a(e), o. a’를 차용하여 여호와(????, Yehowah)로 표기하였다.
일찍이 교회교부들은 ‘????(YHWH)’라는 신명을 ‘성사문자(聖四文字, Tetragrammaton)’라 하여 “말해지지 않는 이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년 갈라티누스(Peter Galatinus)가 ‘아도나이(Adonay)’의 모음 'a(e), o. a’를 차용하여 라틴어로 여호와(YeHoWaH)로 할 것을 제안하고 후에 미국 ?표준번역 성서?(1901)는 예호바(Yehovah)로 표기 한 후로 우리말 ?구역?(1911)과 ?개역?(1938/56)은 중국어 성경의 “야화화(耶華和)”와 미국표준번역의 예호바(Yehovah)를 따라서 여호와라 썼다.

19세기 이후로 구약성서의 여러 사례에 대한 내적 증거와 고대 근동지역의 고고학적 증거와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저술에 표기된 신명에 대한 외적 증거들을 통해 YHWH(????) 신명의 발음 문제를 규명하려고 노력한 결과 원래의 발음이 야훼(Yahweh)일 것이라는 가설에 도달하였다. 이 가설이 여러 학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이 야훼 신명이 ?예루살렘 성서?(1966)에 의해 처음으로 채용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여호와’보다는 ‘야훼’가 원래의 신명에 가까울 것이라 하여, 1977년 ?공동번역 성경전서?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3년 ?표준새번역 성경전서?는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였고, 1998년 ?개정개역판 성경전서?에는 다시 여호와로 표기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호와는 성서의 성사문자(????)의 정확한 발음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아마 어법적으로는 야훼가 더 정확한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이 100년 이상 여호와를 사용하여온 신앙적인 전통 때문에 여호와 신명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한 쟁점이 분명하여진 이상 이 글에서는 이 앞으로는 편의상 야훼 신명을 사용하기로 한다.  

4) 신명의 번역

야훼 신명의 번역도 큰 쟁점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도 여호와를 ‘아도나이’(Adonay: 나의 주)로 읽었고 그런 까닭에 희랍어로 ‘ 주(kyrios)’로 번역하였다. 다른 번역도 이 예를 따랐다. 라틴어 불가타역은 주(Dominus)로, 루터는 독일어역(1534년) 역시 주(der Herr)로 번역하였다. 영어로 번역된 흠정역(Athorized verson, 1611년)은 거의 7000번이나 등장하는 야훼 신명 중 단지 4구절(출 6:3, 시 83:18, 사 12:2, 26:4)을 제외하고 모두 ‘God과 Lord’로 번역하였다.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는 데에 대하여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 큰 반론이 제기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성서에서 자기 이름을 삭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만일 당신이 저자라면, 당신이 저술한 서적에서 서슴없이 당신의 이름을 삭제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낄 것입니까?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의 이름을 그분의 영감 받은 책에서 삭제함으로써 결국 중대한 문제를 야기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표준새번역(1993년)에서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였다가 여러 반론에 부딪쳐, 개역개정판(1998년)에서는 다시 종전대로 여호와로 번역하였다.


4. 야훼 신명의 의미

야훼 신명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논쟁은 더욱 복잡하다. 성서에서 야훼신명의 의미를 설명한 곳은 단 한번 등장한다. 모세를 택하여 자기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러 가도록 파송하면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칭호니라.”(출 3:13-14 개역개정판)

따라서 여호와(야훼)(YHWH)의 의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ehyeh 'asher 'ehyeh)라는 문장의 정확한 뜻의 규명을 통해 밝혀 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하여진 것은 ‘에흐예’(ehyeh: I be)라는 단어의 어원과 시제상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에흐예는 히브리어 ‘하야’(hayah: to be)동사에서 파생된 형태이므로, 에흐예를 어떤 시제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다양한 번역 가능하게 되었다.

1) 현재적 의미(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에흐예를 단순동사 미완료형인 현재형으로 번역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가 된다. 70인역의 이러한 번역을 희랍 교부들이 선호하여 여호와(야훼) 신명을 뜻을 ‘자존자’(ego eimi ho on)로 이해하였다.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 영원한 존재자라는 뜻이다. 현대에 와서 아이스펠트는 이러한 번역을 받아 들여 고대인들이 자기 이름이 상대방에게 알려지는 것을 자기의 정체가 파악 정복되는 것으로 간주한 경향(창 32: 29, 삿 14:17-20)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은 인간에게 파악될 수 없는 신비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 “나는 나다”라는 동의어 반복(tautology)을 통해 그 의미를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해석하였다.

드보는 이와 반대로 야훼 자신을 은폐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체를 더욱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야훼 신명을 계시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출 3:14절은 “나는 참으로 유일하게 존재하시는 분”(I am the truly, only Existing one)으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고, 이 구절을 출 33:19과 관련시켜 하나님은 자신을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로서 분명히 알려 주었다고 하였다. 이로서 야훼 신명의 계시가 야훼 자체를 은폐하기 위한 것인지 드러내는 것이지 논쟁이 제기 된 것이다.  

2) 미래적 의미(나는 스스로 있을 자로 있을 자): 폰 라트(G. von Rad)는 에흐예를 하야 동사의 미래형으로 번역하여 ‘나는 스스로 있을 자로 있을 자(I will be that which I will be)’라 하였다. 존재한다(to be)는 것을 절대적 존재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작용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훼란 이름의 뜻은 정태적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존재로서 ‘활동하는 존재’이며 ‘영원히 존재하게 될 자’를 뜻한다고 하였다.

3). 사역적 의미(나는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자): 알브라이트(W. F. Albright)는 하야(hayah) 동사의 히필 미완료형에서 야훼가 유래했으므로 그 뜻은 ‘존재하게 하는 분’(the one who causes to become) 즉 창조자, 성취자라고 한다. 존 브라이트(J. Bright)도 하야 동사를 사역형으로 보아 ‘나는 존재하게 하는 자(I causes to be what comes in to existence)’로 번역하고, 야훼는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분’으로서 창조자의 뜻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군주 시대 이전의 이스라엘에서는 강하게 부각되지 않았던 일반적인 창조의 개념을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갓월드는 여기에 함축된 창조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삶에 있어서 새로운 현실들을 창출하는 것, 즉, 야훼는 백성들을 노예 상태에서 이끌어 내고 부족 상호간의 자율적인 안전을 가져다주는 분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고 하였다.

4) 동행과 협조의 의미(‘나는 너와 함께 있을 자’) : 부버는 에흐예를 하야 동사의 미래 시제로 해석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겠다는 야훼의 약속(출 3:12, 4:12, 15, 6:7, 33:19)과 관련시켜 “내가 너와 함께 일을 것이다(I will be with You)로 번역하였다. 고스츠(G. W. Gosts)는 예흐헤를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 ehyeh' immakh)는 동행 약속 및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출 4:15)하신 도움의 약속과 연결하여 ‘함께 있을 자’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고 약속의 보증자요 동행자로 해석하였다. 존재하시는 그가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이다.  

5) 제의적 의미(‘오, 그대여’) : 야훼 신명의 어원을 동사에 찾는 것을 거부하고 제의에서 사용한 감탄사 ‘오, 그대여’(Ya-hu)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도 제기 되었다. 고대 아람어 감탄사 “야”(Ya: 오!)와 3인칭 남성대명사 “후”(Hu: 그분)의 결합형태인 Ya-hu의 고대 형태인 Yahuwa가 축소되어 Yahwea/Yahweh라는 신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빙켈은 야훼의 이름을 “그분”으로 규명하는 것은 신상을 금지한 이스라엘의 계명과도 일치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야훼의 이름은 “우리가 발음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그분”이라고 하였다. 야훼 신명은 본래부터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히 어떤 고유 명사로 표현할 수 없어 단순한 감정적 외침이나 제의적인 부르짖음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맥카티는 “어떻게 예배 때에 사용된 신에 대한 감탄사 겸 인칭대명사가 신의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6) 하와(hawah) 동사적 의미(넘어뜨리는 자) : 다른 해석자들은 출애굽기(E문서)가 야훼를 히브리어 동사 하야(hayah)에서 파생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상 야훼의 자음들은 동사의 어근 hwh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므로, “치다, 넘어뜨리다, 또는 때려눕히다”의 의미를 지닌 아람어 하와(hawah)와 상관이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따라서 야훼는 “치거나 넘어뜨리는 분” 즉 폭풍 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트발트는 비록 성서 후기 시대의 용례이지만 하와(hwh) 동사도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므로 하야(hyh)와 하와(hwh)가 다른 의미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5. 야훼 신명의 신론적 이해    
  
야훼 신명의 신론적 의미를 조직신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부룬너(E. Brunner)와 바빙크(H Bavink)와 베버(Ott Weber) 등이다.
특히 부룬너는 “YHWH"라는 4문자(Tetragrammaton)를 희랍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의 전통에 따라 자존자로 번역함으로서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고 이를 계시론적으로 해석하였다.

바빙크도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의 이름처럼 신인동형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인격의 묘사요, 그 자신의 계시라고 하였다.
베버는 야훼 신명을 신비신학의 전통에 따라 아레오바고의 디오니시우스와 아퀴나스에 의해 주장된 신명(神名) 언표불가능성으로 이해한 것을 비판하고 야훼신명의 언표가능성(Yahweh's nameablity)의 근거를 새롭게 해명하였다.
따라서 최근의 구약성서신학에서 밝혀준 야훼 신명의 여러 의미와 부룬너와 바빙크와 베버의 견해를 종합하여 전통적인 야훼 신명의 이해를 재조명하고 야훼신명의 신론적 의미를 새롭게 밝혀보려고 한다.

1)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계시하신 하나님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나는… 이라.”는 신명계시 어법(formular)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야훼신명을 희랍철학의 존재론에 기초하여 자존자(自存者)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원동자(原動者),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를 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부룬너는 야훼신명의 의미를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자존자로 해석한 것은 치명적인 오해라고 한다. 야훼 신명은 그의 존재론적 속성을 밝히기 위한 의도로 알려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려는 목적에서 알려주신 것이므로 계시론적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룬너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메시지의 중심에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개념이 내재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핵심에 위치한다. “YHWH"라는 4문자는 그 존재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하여 알려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한 것이며, “절대자 하나님이 아니라, 계시의 하나님을 강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는 곳에서만 알려진다. 야훼 신명의 계시는 이러한 자기 계시를 떠나서는 그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라고 하였다. 바빙크도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계시한다.”고 하였다.

야훼 신명의 계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 인간이 지어서 부른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듯이 하나님에게 하나의 이름을 지어 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다 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자신에게 하나의 이름을 지으시고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신명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계시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부룬너는 무엇보다도 계시의 역사 가운데서 처음으로 다른 나라의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구별 짓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야훼라는 사실에 있다고 하였다. 무수한 신들의 존재가 당시의 사고 체계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참된 신의 고유한 이름이 필수적인 것으로 요청되었던 것이다.

베버도 야훼 신명의 계시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분함으로서 자신을 알게 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야훼신명의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언표가능성(Yahweh's nameablity)의 근거로 이해하였다. 로마서에 나오는 이교도들이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알고도 경배하지 않은 것이 흠으로 비친 데 반해, 여기에서는 그 신을 알지도 못한 채 예배하는 것이 문제로 떠오른다.  

프롬(Erich Fromm)은 모세에게 신명(神名)으로 계시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문장은 제 2?3 계명과 관련시켜 내 이름은 無名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은 궁극적으로 그의 이름 말하기를 금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상의 참된 본질은 이름을 가지는 것이므로 우상 숭배자는 이름이 없는 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야훼 신명은 “인간은 신에게 어떤 극한적인 한정사를 붙여도 안 된다는 원리를 제시한 것”이며, 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기초에 있는 통합성과 관계되는 ‘이름이 없는 절대자’라는 성숙한 일신론의 표현이요 가장 발달한 단계의 신관이라고 하였다.

2) 여호와(야훼) 신명과 하나님의 인격성의 계시

성서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계시할 때 ‘야훼’라는 명시적인 이름으로 계시하였다고 한다.  야훼 신명의 계시는 하나님이 익명이나 무명이나 미지의 신이 아니라, 명시적인 이름이 있는 야훼 하나님임을 뜻한다.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부룬너는 야훼신명 계시를 통해 하나님과 모세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그(야훼)는 하나의 사물(It)이 아니라 원형적인 당신(Thou)으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모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사유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유와 인식의 대상이 된다. 즉, 사유되어지는 사물이거나 인식되어지는 사물이므로 그것은 인격이 아니다. 인간도 우리가 그를 단지 사유할 때에는 진정한 인격이 아니다. 인간도 그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말할 때, 당신으로서 그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 보일 때, 우리에게 인격이 되는 것이다. 이름의 표명은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인격적 관계와 교제가 이루어진다.

베버도 야훼는 인격으로서 행동하는 분이라고 하였다. 더군다나 야훼 신명 계시의 상황은 모세를 부르시는 소명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의 이름을 부른(출 3:4) 다음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할 것이라고 약속한 후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바빙크도 성경에서 이름은 그것을 포함하는 인격의 묘사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으로 자신과 우리를 매우 분명하게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바르트도 하나님은 자신은 당신과 그분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고 하였다.
모세의 소명과 신명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을 부르고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둘 사이의 인격적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존 캅(J. Cobb, Jr)은 히브리인 들이 ‘야훼’를 ‘나(I)’로서 이해한 것은 인간의 수공에 의해 만들어져서 특정한 장소에 놓여져 있는 신상(神像)과 다른 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시편은 우상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4­8).

그러나 인간이 제작한 우상과 달리 “하나님은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나(I)로서 이해되었다.” 말을 주고 받는 것은 지식과 의지와 정서를 통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말도 못하는 신,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무능한 신은 인간에게 아무런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없는 죽은 신인 것이다. 그래서 ‘야훼’의 의미를 ‘큰 나’로 해석하고 ‘너’인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계약이라고 하였다. ‘나는 나’라고 인간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인격성을 드러낸다. 존 캅은 자신의 이름을 말로 알려주는 하나님의 특이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야훼의 인간에 대한 관계는 구두(口頭)를 통해서 였다. 명령하기도하고 약속하기도 하면서,…대화와 복종을 통하여 나타난다. 간단히 말해서 야훼는 보여지는 분이 아니고 들려지는 분이다.”

야훼신명 계시를 통해 맺게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연종교의 ‘나와 그것’의 물질적 도구적 관계가 아니라 ‘나와 당신’의 영적,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여야 한다(신 6:4­5).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와의 계약의 관계를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 영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3) 계약의 상대자인 여호와(야훼)의 신명의 계시  

야훼 신명의 계시 역사적 상황은 하나님과 이 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의 채결과 불리 될 수 없는 것이다. 야훼는 역사의 하나님이며, 절대적인 의미에서 계약의 하나님이다. 모세를 불러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그와 동행 할 것(출 3:12)과 그를 도와 줄 것(출 4:12 등)을 약속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해방시켜 그들을 계약의 상대자로 택하시려고 자신의 이름을 계시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 개역개정판)  

신명의 계시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택하기 위해 그들과 계약관계를 맺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와  관계되어 있다. 따라서 야훼 신명의 계시는 판넨버그가 비판한 것처럼 무시간적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계시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미디안 광야에 은둔 중인 모세를 구체적으로 만나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의 해방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실 자로서 자신을 역사의 한 가운데에 계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한 것이다. 그는 선택하고 부르시는 분이며, 거절하고 심판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결정적인 행동이 야훼의 신명 계시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름을 통해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그의 이름을 계시한 것이다. 그는 모세를 통해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실 것을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이름의 개념에 계약의 개념이 첨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백성과의 계약을 통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고 선언하신다. 이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현실화된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계약의 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야훼 하나님은 그에 의해 특별하게 택함을 받은 자와의 파트너 관계(parternership)를 맺으시고 그의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 그 관계를 지속시켜 가신다.

따라서 신명의 계시는 시내산 계약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아려진 계시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연종교에서는 풍요와 다산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신성화하고 홍수와 한발의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였기 때문에 신인관계는 무시간적이다. 신인관계의 역사적 계기가 전무하다. 엔더슨은 “야훼는 태양신, 폭풍신, 풍요의 신들과 같은 자연의 신이 아니다. 역사가 바로 그분의 활동 무대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종교로 알려진 히브리종교는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적 소명에서 비롯된다. 시내산 계약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백성 전체를 부르신 역사적 소명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활동 무대에서 하나님과의 인간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는 공동체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God of Israel)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이 된 것이다. 모세를 중재로 야훼와 전체 백성이 계약을 맺은 것이다. 자연종교에서처럼 신의 편애를 받는 특출한 개인이 신에게 순응하는 개인적 의존관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후손 전체와의 공동체적인 계약관계인 것이다.
또한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은 조건적이며 쌍무적인 관계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많은 종주권 조약의 사례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구원하여 주신 무한한 은혜가 베풀어졌기 때문에 그 은혜(Gabe)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여야 할 과제(Aufgabe)가 주어진 것이다.

또한 이 계약 안에서 배타적인 신인관계가 요구된다. 시내산 계약은 다른 신을 두지 말고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들거나 섬기거나 절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계약체결  자체가 야훼를 섬기느냐 섬기지 않느냐의 결단의 촉구였다. 야훼 하나님은 그의 계약의 파트너에게 전인적이고 절대적이며 배타적인 헌신을 촉구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되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출 34:14).

하나님과 이스라엘 계약공동체 사이의 이러한 특수한 계약적 신인 관계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가나안 자연종교나 신성에의 참여를 갈구하는 희랍철학의 신인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계약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전향적인 신인관계라고 할 수 있다.
  
4) 야훼 신명의 계시과 은폐의 역설  

성서에는 무수한 이방 종교의 신명들이 등장한다. 가장 널리 사용된 엘(El)이라는 신명은 보통명사로서 권능(power)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나안의 무수한 신들은 모두 고유한 명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알(Baal, 민 22:41 등)은 주인 소유자 남편, 아스다롯(Ashtaroth, 삿 2:13 등)은 아내, 모압의 그모스(Chemosh, 민 21:29 등)는 불(fire), 블레셋의 다곤(Dagon, 삿 16:23 둥)은 고기(fish), 바벨론의 마르둑 즉 무로닥(Merodach, 렘 50:2 등)은 담력, 몰렉(Molech, 레 18:21 등 )은 통치자 왕을 뜻한다.  희랍과 로마의 데오스(Deos)와 제우스(Zeus)는 산스크리트어 div(빛나다)와 deva(빛나는 하늘)에서 유래했으며 그외의 모든 신들읨 명칭은 모두 명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God과 Gott는 good 또는 gut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天이나 우리나라의 하느님은 하늘을 뜻한다.

이처럼 신에 대한 가장 추상적인 이름도 일의적이고 명사적이며 신인동형론적이다. 윙엘(E. Jungel)은 이러한 신인동형론적 신 이해에 대한 비판은 소크라테스 이전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와 크세노파네(Xenophanes)에 의해 제기되었고, 위 디오니시우스, 다마스커스의 요한, 아퀴나스 등에 의해 이어졌다고 한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신이 누구인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으며, 아퀴나스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지지(無知之知) 즉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는 명제를 신 인식에 적용시켜 “인간이 신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신인식이다.”고 하였다. 윙엘은 서양신학사의 이러한 전통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궁긍적이고 진정한 세상의 신비”요 “언표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진정한 신은 인간의 한정된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노자는 “도를 도라고 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이미 변함없는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부를 수 있을 때 그것은 이미 변함없는 이름이 아니다”고 하였다. 절대적인 존재는 하나의 이름으로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트켄슈탄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서는 침묵하라”고 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단지 아덴사람들이 섬겼던 익명(匿名)의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이거나, 철학자들이 말하는 절대침묵의 무명(無名)의 신이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未知)의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야훼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신 신이다. 그러므로 베버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하나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며,  하나의 이념이거나 궁극적으로 이름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성서의 하나님은 실제로 야훼라는 하나의 거룩하고 영원한 이름을 가진 신이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은 희랍의 형이상학자들이 생각해 낸 ‘이름 없는 신’이 아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신’이 아니다. 미래주의자들이 상상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이 아니다. 야훼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이미 알려 주신 분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해서, 하나님에 대해 침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말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빙크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이름”은 “우리가 그를 말하는 이름이” 된다고 하였다. 구약성서는 “존재하다”(to be)와 “불러지게 된다”(to be called)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지는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하나님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판넨버그는 “출 3:15의 진술에 따르면 야훼라는 이름의 전달은 인간이 그의 이름으로써 하나님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때에는 그가 그 자신에게 붙인 이름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지신 분일 뿐더러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고 그를 찬양하게 하였으며, 그와 계약을 맺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철학자들의 무명의 신이나, 신비주의자들의 익명과 미지의 신은 사유의 대상이 될 뿐 기도와 찬양과 계약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야훼신명이 신명으로서 특이한 것은 그 신명 자체 속에 신명의 언표불가능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이름 야훼는 그 형태에 있어서 한정적인 명사형의 이름이 아니라 서술적인 동사형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야훼라는 신명에는 일의적이고 명사적인 의미가 없다. 동사적이고 서술적인 이름이다. 따라서 시제에 따라 현재형, 미래형, 사역형, 동행형 등 여러 의미로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갓월드는 야훼 신명의 어원이 모호하고 신비에 싸여 있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침묵과 신비를 주장한다고 하였다. 인간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 야훼의 의미가 역설적이게도 명사적으로 한정할 수 없는 언표불가능한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룬너는 야훼라는 거룩한 이름의 의미는 “나는 신비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자, 정의하거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이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이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의 그의 이름 가운데서 신비한 존재로 남아 있는 분이므로 그의 이름이 거룩한 이름(시 103:1, 105:3, 111:9 등)으로 통칭된다고 하였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이름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자체로 표현하는 이름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출 3:15)이라고 하는 대신에 “이것은 나의 비밀된 이름” 즉 문자대로 하면 “나의 이름은 감추어졌다”라고 읽었다고 한다.

바르트 역시 “나는 나다”(출 3:13 f)라는 신명 계시는 사실상 그 내용에 있어서 “나는 그 누구도 언표할 수 없는 진실한 이름을 가진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졌다 하여도,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그 이름을 통해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된 이름은 참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은폐됨(the hiddenness even of the revealed God)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피조물의 이름이 아니므로 영원하고 거룩하고 영광된 이름이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야훼 신명의 계시가 야훼 자체를 은폐하기 위한 것인지 드러내는 것이지 논쟁이 되었다. 아이스펠트는 야훼 신명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은폐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였고, 드보는 그 반대로 하나님의 존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계시된 것으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야훼로 알려 주셨지만, 그 이름의 의미는 여전히 비밀로 은폐되어 있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 십자가 사건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감추인 의미를 밝히려 하였고, 바르트는 신인식론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은 감추인 하나님(Deus Abscunditus)이라는 역설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성과 은폐성의 역설은 그의 이름 야훼 신명의 계시 속에서 더욱 원초적인 형태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으로, 그 뜻을 헤아려 알 수 없는 이름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희랍교부들이 야훼라는 이름을 “I am He who is"로 정의한 것은 ‘정의할 수 없는 이름’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이름은 이름할 수 없는 이름으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대상의 법주에 들어오는 대상이 아니므로 개념적으로 정의 할 수 없다는 사상은 아다나시우스, 힐라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어거스틴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따라서 신에 대한 언표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신의 무명성(無名性)이나 익명성(匿名性)의 철학과 신에 대한 언표가능성을 주장한 신인동형론적 시도 사이에서 야훼 신명의 계시는 이 양극단을 피하는 제3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야훼의 신명은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한 언표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자신 인간에게 자신의 이름을 언표하여 주신 것이다. 따라서 야훼 신명의 계시를 통해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이름”이 비로소 알려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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