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창조주(야훼) 와 신약의 하나님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서는 하나님의 뜻과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삶의 지침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깨닫게 해줌으로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다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찾는 사람에게만 알게 해주십니다.

창조주는 세상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며 창조주와 피조물을 하나로 통일하시는 분입니다.(에베소서4장6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우리들은 신학보다는 신앙에 필요한 부분만 생각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창조주와 신약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면서 피조물인 사람과의 관계가 다릅니다.

구약에서의 창조주와 사람과의 관계는 주(主)와 종(또는 죄인)관계입니다.
신약에서의 하나님과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구약의 창조주 야훼께서는 사람에게 율법을 강요하십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죄로 다스리신다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비유하고 율법 아래 있지 말고 새로운 진리의 성령의 법 안에 있기를 강조합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성령의 법과의 차이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생활에 혼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창조주(야훼)와 신약의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면서 서로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를 통해서 기독신앙의 특수성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창조주와 사람(아담)의 관계부터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창조주께서 아담을 다른 피조물과 달리 특별하게 만드신 이유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다른 동물에게 없는 영(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靈)이 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은 사람에게 영을 주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는 사람의 영속에 하나님의 영이 연합(聯合)하여 내재하실 수 있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으로 쓰시기 위해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연합되어 있을 때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연합되어 있지 않을 경우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의 영속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를 직접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창조주 야훼 

 
하나님이 자기의 성전으로 만드신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타락했습니다.

아담의 타락사건은 창세기에 한 장의 짧은 기록에 불과하지만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의 기초로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담의 불순종을 윤리 도덕적인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과 창조적인 기준으로 해석하는 것과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집니다.

어떤 기준으로 아담의 불순종을 판단하느냐 하는 문제는 창조주와 사람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기독신앙의 내용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야훼란 창조주의 이름을 처음으로 모세를 통해서 밝히셨습니다.(출애급3장14절)

야훼(여호와)란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히브리말로 표현한 말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을 잘 생각해보면 ‘창조주’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있다’라는 말은 ‘존재’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있다’라는 말은 또 다른 존재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제외한 다른 존재는 자기가 창조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야훼(여호와)는 창조주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세상과 아담을 창조한 이후에 아담의 타락사건이 바로 뒤따라 일어납니다.
아담의 타락사건은 많은 학자들이 신학의 기초로 다루는 재목입니다.


신학자가 아닌 일반 성도 입장에서 아담의 타락사건은 두 가지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윤리 도덕적 해석으로 아담의 타락을 창조주에 대한 불순종의 죄로 판단하는 경우와 다른 하나는 타락자체를 하나님의 계획된 창조과정의 연속선상에서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후자를 창조적 해석이라 한다면 윤리 도덕적 해석과 창조적 해석은 창조주와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됨으로 신앙생활에도 서로 다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과 원죄해석은 기독교신앙의 기초와 내용이 달라지는 분기점이 됩니다.
아담의 원죄를 윤리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와 창조적 해석으로 하는 경우의 차이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구약의 야훼와 신약의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의 불순종 자체를 원죄(原罪)로 규정하는 윤리 도덕적 해석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해석은 인간중심의 법인 윤리 도덕적 판단이며 아담을 하나님이 만드실 때 성숙과정을 건너 뛴 완성된 인간으로 만드셨다고 보거나 아니면 실재 사람이 아니라 성숙된 인간의 관념적 모형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야훼 창조주는 아담과 하와를 포함해서 자기가 만드신 세상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사람의 불순종을 허락하시지 않겠다는 창조에 관한 절대원칙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악과시험을 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의 자유인격의 성숙과정을 생략하고 완전히 성숙된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면 죄가 된다는 사실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의도적으로 창조주의 명령을 범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에 대한 의도적 “불순종의 죄”로 판결하고 그 이후에 아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죄의 징계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윤리 도덕적 판단으로 보면 지엄하신 창조주가 만드신 세상의 질서를 파괴시킨 의도적 죄는 사망을 선고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한 사람의 순종은 사람의 존재 보다 더 절대적이고 우선함을 의미합니다. 창조주에게 순종하지 않는 존재는 자기 형상을 가진 아담이라 하더라도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창조주의 의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難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도 어린 시절을 통해서 성숙과정이 있었듯이 아담도 성숙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이 성숙되기도 전에 자유의지의 순종을 시험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이 죄라는 사실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순종을 시험하는 것은 철없는 아이를 우물가에 놓아두고 빠지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창조주의 전지전능에 대한 논리적 모순이 발생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것을 분명이 아시고도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것은 만드신 세상이 파괴될 줄 아시고 창조하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담의 순종이 아담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면 존재를 위해서 순종이 필요한 것이지 순종을 위해서 존재가 필요하다는 뜻이 됩니다. 창조주는 창조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의 순종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지 순종을 받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면 죽음(없음)으로 심판한다는 전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주종관계보다 더 심각한 정복자와 노예의 관계라고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성숙한 상태로 태어났다면 아담은 사람의 관념적 모형일 뿐 실재로 성장이 필요한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인격의 성숙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성숙과정이 인격형성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어린 시절을 통해서 성숙기간이 있으셨습니다.

아담의 선악과 금지명령은 자유의지의 시험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의 성숙을 위한 가르침의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인격이 성숙되기 전에 죽음의 심판을 전제한 자유의지의 순종시험은 창조주로서가 아니라 사람이 인간이 만든 윤리 도덕적으로 창조주를 유추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아담의 원죄에 대한 창조적 해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자체를 원죄(原罪)로 규정하기 보다는 선악과(善惡果)를 먹고 악에 오염된 결과 원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 변질된 상태를 원죄로 규정하는 것이 창조적

해석입니다.

명령에 불순종한 행위 자체를 원죄로 보느냐 아니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변질된 상태를 죄로 보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윤리도덕은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평가하지만 기독교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상태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하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고 변질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원죄를 규정하는 것이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원죄를 “불순종의 죄”가 아니라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불순종은 창조주의 창조 과정에서 이미 계획된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담의 타락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키워주고 자기가 태어난 창조목적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미 야훼가 계획하신 아담의 지정의(知情意)적 인격성숙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누가복음15장)허랑방탕했던 동생이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고 어긴 적이 없는 맏아들보다 아버지를 기쁘게 했던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자라고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성숙이란 지식과 실재 경험을 통해서 성숙되는 것입니다. 지정의가 미성숙한 상태에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보아야합니다.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선악과가 무어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선악과를 먹으면 왜 죽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왜 죽는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선악과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걷기위해서는 넘어졌다 일어나는 것도 배워야합니다. 아이는 말로 엄마가 아무리 넘어지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넘어지는 것은 엄마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아담에게 악과 죄와 죽음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덴동산에는 악과 죽음이 없으므로 그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야훼는 선악과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뱀을 보내서 믿음을 시험하도록 했습니다. 죽음과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아담과 하와는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보다 “결코 죽지 아니하며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을 더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선악과를 통해서 들어온 악에 하나님이 계실 처소인 자기들의 영을 오염시키고 말았습니다.

아담 안에 들어온 악(惡)은 제일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몸을 벗게 만드신 분은 야훼이십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모습을 악하다고 본 것입니다.

악에 오염된 눈으로 보면 선한 것도 악하게 보이고 선의 근원이신 야훼가 두려워 보일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야훼와 에덴동산에서 동거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스스로 야훼를 피한 것입니다. 바로 악에 오염되어 창조주와 분리된 상태가 바로 원죄(原罪)입니다.

불순종은 윤리도덕적인 행위의 죄이고 창조주와 분리됨은 변질된 상태의 창조적 죄입니다.
창조적인 죄를 윤리도덕적인 죄와 혼동하면 기독교신앙 자체를 왜곡하게 됩니다.

창조주(존재)와 분리된 상태 그 자체가 죽은(없음)것입니다. 이 죽음은 윤리도덕적인 불순종한 죄의 징계로 죽는 것과 다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악의 오염으로 창조주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죽은 것입니다. 이 상태를 창조주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과 하와는 육적인 생명을 가지고 자기는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뱀이 한 말을 믿고 창조주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원죄의 징후입니다.

이런 원죄 상태에서 아담은 광야에서 후손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후손은 악에 오염된 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원죄는 유전(遺傳)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창조주 야훼는 아담과 세상을 창조하신 후 아담의 타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속에 계시지 않는 상태에서의 인간과 창조주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구약성서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요청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허락하기 전에 사람의 영을 처소로 삼지 않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악을 경험시킨 후 오염된 영을 가지고 육적으로 그대로 살아 갈 것인지 아니면 오염된 영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한 후 다시 태어날 것인지를 사람의 자유의지 선택으로 결정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악에 오연된 육적 생명을 처리하고 나서 사람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초청받으신 후 사람의 영을 거처로 삼으시고 성령과 사람의 영이 연합한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창조주가 계획하신 사람창조의 완성입니다.

구약에서의 광야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말합니다. 구약시대는 사람의 영속에 하나님의 영이 아직 들어와 계시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창조주 야훼는 선지자를 통해서 사람에게 창조주의 뜻을 전하십니다.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가 모세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과 제사법을 인간에게 전달해 줍니다.

창조주 야훼께서는 선악과를 통해서 악을 가르쳐 주셨고 그 다음에 죽음을 가르치십니다. 죽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율법과 속죄제사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주실 때 이를 잘 지키면 천대까지 복을 주시고 지키지 않으면 삼사대까지 죄를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다고 송사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이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너희들은 그 영이 악에 오염되어 이미 죽은 상태이며 죽은 상태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무덤에 회칠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야훼께서 율법과 제사법을 왜 주셨는지 그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은 동물과 달리 영이 있는데 그 영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할 처소이며 그 영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지 않고 악에 오염된 상태는 죽은 상태이고 이 상태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은 악에 오염된 영으로는 지킬 수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희생제사법은 영이 악에 오염된 육적생명은 번제로 장사지내야 한다는 야훼의 처리방법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여기까지가 율법과 제사법의 목적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천대까지 복을 주신다는 뜻은 육적 생명을 제사법으로 장사지낸 후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성령을 다시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영이 죽은 상태는 야훼 앞에서는 죽은 상태임을 알게 하고 복을 주신다는 뜻은 다시 태어나는 생명을 다시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의 창조주 야훼와 사람의 관계는 죽었으나 살았다고 착각하고 사는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죽은 자식을 살리기 위한 첫 단계는 죽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죽은 상태에서 율법을 잘 지킨다 해서 그 상급으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깨닫고 스스로 번제의 장례를 치러야합니다. 그런 후 새로운 생명을 받아 거듭나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 까지가 구약의 야훼가 아담의 후손을 훈련하고 성숙시키기 위한 교육 과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야훼와 사람의 관계는 주(主) 와 종 또는 죄인(罪人)의 관계입니다.



신약의 하나님(성령) 

 
이제부터는 신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담의 창조 목적은 아담의 영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처를 정하시고 아담의 영과 연합하여 세상을 창조 목적에 따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즉 아담을 성전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담을 창조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아담 안에 들어가시기 위해서는 아담의 자유의지에 의한 초청이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담이 악과 죽음을 알고 난 뒤에 하나님의 성령을 택할 것인지 악에 오염된 상태로 그대로 있을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하셔야합니다.

만일 아담과 그 후손이 하나님의 성령을 택할 경우에 율법의 사망선고를 받아드리고 번제의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이 장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악에 오염된 육적 생명을 장사지내면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의 영을 주셔서 영적으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신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바로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된 것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창조주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거듭남입니다.

여기서 다시 아담의 선악과 시험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이 원죄라고 규정한다면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창조주와 인간은 항상 주인과 종의 관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알고도 어기고 모르고도 어기고 살면서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죄인으로 살아야합니다.

이는 신약의 거듭남의 이전의 구약적인 삶입니다. 이런 상태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바로 윤리 도덕적 신앙입니다. 이는 바로 기독교인이 기복신앙이나 율법신앙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의 신앙생활 방식입니다.

기독교적으로 올바른 순종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영 안에 계셔서 나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은 사람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지키시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으로 거듭나기를 원하고 선택하는 것뿐입니다. 성령님과 나의 영이 하나로 연합된 상태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창조주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유일신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안에 계심으로 나와 하나로 연합되신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예수님의 지체로서의 교회로 하나가되게 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의 율법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이 완성되며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로 하나님의 자녀신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육적생명이 끝나면 영적생명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죄에 대한 구약의 입장은 율법과 규례를 어기는 것이 죄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과 규례가 없다면 죄를 죄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로마서7장7절)

그러나 신약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을 이루셨으므로 율법으로 죄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신약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합니다.(요한복음16장9절)

기독교인이 아닌 입장에서는 구약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역사와 종교문화서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택해서 창조주와 인간과의 관계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알게 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구약으로 보여준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모습과 언어로서 인간들에게 가르쳐주고, 인간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어 구약의 율법과 제사의 목적을 완성하셨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장사지낸 자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고, 그 부활의 영으로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음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과 성령의 법 

 
구약시대는 창조주 야훼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아담의 타락은 창조질서의 파괴로 보기보다는 창조의 완성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윤리 도덕적으로는 불순종의 죄라고 할 수 있으나 창조적으로는 아담의 자유의지의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한 야훼의 계획된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덴 동산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같은 장소에 만들어 두신 것은 사탄을 이용하여 창조의 파괴가 아닌 완성을 위한 비밀한 계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담의 불순종 자체를 원죄로 본다면 사람은 항상 야훼의 종으로 살아가야합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윤리도덕은 사람이 만든 법입니다. 윤리 도덕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율법과 성령의 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가르쳐주기 위한 법입니다.

여기서 죄란 행위로 지은 윤리도덕법에 의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율법은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지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법입니다.

사람의 영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키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법이란 사람의 영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 즉 성령님 자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법이란 사람의 영속에 계신 하나님 자신임으로 하나님 스스로 하시고자 하시는 데로 우리는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직접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림을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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