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의미 (대속론)


(참고: Douglas Hall, Professing the Faith, 413-434, Marcus Borg, Meeting Jesus again for the First Time, 119-137, John Stott, 그리스도의 십자가, Daniel Migliore, 기독교 조직 신학 개론, 223-229)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전통적으로 대속 죽음(atoning death) 곧 인간의 곤궁과 죄를 해결하기 위한 죽음으로 이해 되어왔다. 그러나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곤궁과 죄를 해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교회 역사를 통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으며 이미 신약 성경 자체가 여기에 대해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곤궁과 죄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2.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로서의 그의 삶 전체 및 부활과의 연관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가 공부한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셨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비유로 보이셨으며 병자를 고치고 바다를 잔잔케 하고 귀신들을 내어 쫒음으로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게 하셨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서 양육했고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활동 중에 마침내 십자가 죽음으로 그 삶을 끝내었다. 예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한 주제를 찾는다면 그 것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십자가 죽음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3.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 나라 선포의 도중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죽음의 가능성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죽음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 죽음"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는 다만 그가 신뢰했던 '아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또 그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끝까지 선포하며 나갔다. 그는 아마 자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죽어간 구약의 예언자/의인들의 운명'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즉 역사적 예수는 처음부터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과정에서 생긴 하나의 역사적 사건 (비록 그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상 필연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도) 이었다. 예수가 처음부터 자기가 십자가에 죽을 것과 그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죽음임을 알았다는 성경의 증언(막4:15)은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초대 교회가 그 죽음의 의미를 해석하고 신앙 고백한 것이다.


5. 예수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또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계속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는 것은 예수가 소개한 하나님에 대한 한 중요한 이해를 준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은 동정하는 하나님 (compassionate God) 곧 그 사랑 때문에 고난에 참여하고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다. 사랑은 오직 고난으로만 표현된다. 사랑하게 되면 고난당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하나님과 철저히 일치해서 살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았던 예수에게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사실상 필연적이었다.


6. 초대 교회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 죽은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으로 해석하게 되었는가? 예수의 죽음은 분명 의인의 죽음이었다. 또한 그 것은 예언자의 죽음이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간 사람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은 또 하나의 실패는 아닌가? 그저 또 하나의 억울한 죽음, 의인이 반드시 승리하지는 않는다는 역사의 슬픈 법칙의 한 예는 아닌가? 실제로 예수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제자들은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뿔뿔이 다 흩어져 버렸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환멸과 절망은 그들 두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한 의인의 억울한 죽음 정도가 아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 이해하며 이 것을 전파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을까?

그 것은 첫 제자들의 부활 체험이었다. 예수의 부활 체험으로 인해 제자들은 1) 예수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2)그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와 그의 삶 전체는 옳다. 즉 예수처럼 사는 것이 옳으며 결국 승리한다. 3) 더 나아가 이처럼 살다가 죽고 부활한 이는 그저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며 더 나아가 신적 존재이라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부활의 빛에서 그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공동체 전체로 같이 성찰(reflection)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의 죽음은 대속 죽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또 그 것에 대한 대속적 해석은 그의 부활이 사실이었음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7. 그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여러 관점들이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약 성경 자체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여러 가지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양한 여러 관점들과 이론들은 그 성격상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 관점 및 이론들은 모두 신약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각자 강점과 약점이 있고 서로 보완하는 형식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취된 것을 말해주고 있다.


8. 승리자 그리스도론( Christ the Victor Theory)- 고전설

8-1. 속죄론에 대한 고전적인 책을 쓴 스웨덴 신학자 구스타브 아울렌에 따르면1) 이 이론은 초대 및 고대 교회, 동방 정교회 그리고 루터에게서 보이는 이론으로 가장 성서적인 대속론이다. 그는 이 이론이 옛날부터 있어온 고전적인 이론이라 하여 고전설(classical theory)이라 불렀다.


8-3. 이 이론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우주적인 큰 전쟁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 전쟁 중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해 사탄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부활시켰고 이로 인해 사탄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죄를 지은 이후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들도 이제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8-4. 이 이론에는 몇 가지 변형된 형태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소위 속전 이론(ransom theory)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것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사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람을 돌려받으려면 사탄에게 뭔가 대가 지불을 해야 했다. 그리고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속전으로 요구함으로 예수는 죽었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사탄은 승리했다고 기고만장 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심으로 결정적으로 사탄의 세력을 꺾어 버리셨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인간은 더 이상 사탄의 영역 아닌 하나님의 영역 아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다른 변형은 예수를 소위 미끼(bait)로 보는 것이다. 주후 5세기 초반기에 널리 퍼진 다소 조잡한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후 하나님 아닌 사탄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악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악마를 그냥 없애 버리면 (바다 괴물 같은) 악마의 뱃속에 들어 있는 인간들도 다같이 죽는다. 이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형태로 보내셨다. 사탄은 예수도 그저 한 인간인 줄 생각하고 마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듯 꿀꺽 삼켜버렸다(십자가 죽음). 그러나 사실 예수의 인간적 모습은 그저 위장이었고 그 안에는 신성이 숨겨져 있었다. 예수는 이 점에서 낚시 바늘 혹은 덫이었고 사탄은 이 덫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마침내 사탄은 그 삼켰던 모든 인간들을 다 토해 놓을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사탄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


8-5. 이 조잡한 그러나 흥미 있는 설명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특정한 한 이해가 들어있다. 즉 승리자 그리스도(Christ the victor)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란 억압(oppression), 속박(bondage)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이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매일 경험하듯 우리 인생은 모두 그 무엇에 매여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억압에 대해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를 '해방자'(liberator) 로, 그의 십자가 죽음을 사탄, 악마, 악령의 힘에서의 해방으로 이해한다. 즉 이 이론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사탄에 사로잡혀 억압당하고 있던 우리를 해방한 해방자로 이해된다.


8-6. 억압에는 사회적 억압 (정치적 억압, 경제적 수탈, 문화적 소외)과 개인적 억압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특히 성 중독- 미국 사람들의 가장 대표적인 addiction (Time Magazine, June 4, 1990, 48p) ) 이 있고 이런 억압을 많이 받는 사람들, 또 그런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아주 자연스럽게 해방자로, 또 그 죽음을 해방을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게 된다.


8-7.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속박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이 속박에서의 해방자로 이해하는 이 이론은 고대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이었다. 이는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이 사회적 억압 속에 살던 노예나 하층민들- 태어날 때부터 억압 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었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매임을 풀어주는 해방자로서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늘날 이 대속론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억눌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인생의 근본 문제가 속박에서의 해방인 사람들-에 의해 주로 강조되고 있다.

가령 오순절 교회: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남미의 해방 신학: 해방자 그리스도(Christ the liberator)


8-8. 해방자 그리스도론은 분명 많은 강점이 있다. 특히 이는 억눌리는 이들에게 소망과 힘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몇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계층이 이 이론을 취할 때 그 것은 승리주의적(triumphalistic)인 이론이 될 수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부활에 대한 강조는 승리자 예수를 말하는 가운데 현재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정당화 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가령 기독교인들에게 오랫동안 박배 받아온 유대인들에게 이 것이 어떻게 들리겠는가?

또한 (아버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공격 때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가 이를 "성전(Holy War)"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쟁이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자.

둘째, 이 이론에서 구원(해방)은 인간과 관계없이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사탄 사이에서 그저 객관적으로 일어난다. 인간은 단순히 그 수혜자이다. 그러나 이렇게 객관적으로 이해된 대속론은 그 것이 어떻게 '나의 실존적 참여'를 가능케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8-9. 따라서 이 이론은 강점- 특히 인생의 문제가 속박이며 여기에서 풀려나기 위해 고민하는 이들(억눌리는 소수 집단들: 여성, 이민자, 흑인, 가난한 사람들. .)에게는 좋은 이해이다. 그러나 사회의 지배층, 기득권자들이 이 이론을 그들 자신에게 적용 시킬 때 그 것은 이데올로기(현실을 왜곡하는 거짓 이론)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이론은 다른 속죄론의 통찰로 보충할 필요가 있다.


8-10.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날카로운 신학적 통찰로 인간은 세 가지 근본적인 생의 공포(the three fundamental fears of life), 곧 숙명과 죽음 앞에서의 공포(destiny and death), 죄책과 영원한 정죄 앞에서의 공포(guilty and eternal damnation), 그리고 생의 무의미와 절망의 공포(meaninglessness of life and despair)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 중 숙명과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주로 고대 세계에, 죄책과 영원한 정죄의 불안은 중세 시대에 그리고 생의 무의미와 절망은 주로 현대의 지배적인 공포라고 보았다. 틸리히의 통찰에 따르면 그리스도 승리자 속죄론은 곧 영원한 숙명과 죽음이란 고대 세계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교회의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원한 숙명과 죽음을 이기신 해방자 예수)


9. 변형된 형태의 승리자 그리스도론: 위버(Denny Weaver)의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Narrative Christ Victor Theory)


9-1. 미국의 메노나이트 전통에 서 있는 미국의 신학자 디니 위버(Denny Weaver)는 고전적인 승리자 그리스도론을 수정한 형태의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Narrative Christ Victor) 이론을 제시한다.2) 그는 고전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처럼 예수는 사탄을 극복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9-2. 하지만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사탄 (혹은 악마)을 다르게 이해하며 여기에서 모든 차이가 일어난다. 그는 미국의 신약 신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의 이해를 따라 사탄을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지상적 구조들의 총합으로 이해한다. 윙크에 따르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개인, 조직, 단체는 그 나름의 외적(물질적) 구조와 그 내적 정신으로 되어 있다. 그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나 타락하였고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 이 중 사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그 자체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악하게 된 (그러나 구속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210)


9-3. 곧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예수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사탄 곧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지상적 실체들의 총합이다. 그 것은 로마 제국, 유대의 성결 법전(holiness code), 무질서한 군중들, 잠자던 제자들, 가룟 유다, 베드로 등의 총합이었다.


9-4. 다시 말해서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예수를 죽게 한 것은 (안셀름의 만족설이나 개혁자들의 형벌 만족설과 달리) 하나님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를 죽게 한 것은 악한 구조 곧 사탄이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 했으며 이 선포는 필연적으로 사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있고 그 것을 거부하는 악한 힘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자기를 찾아오는 죽음의 위협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 하나님 나라 선포를 해 나갔고 그로 인해 죽었다.


9-5. 곧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에 따르면 예수에게는 결코 죽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한 하나님 역시 예수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를 죽이는 자들을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했다든가 혹은 예수는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안셀름의 만족설이나 개혁자들의 형벌 만족설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예수의 죽음을 원했다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예수를 처벌한 자였다고 말할 수 없다.


9-6. 따라서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예수는 결코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 직면하고 고발하고 극복하려 한 능동적인 참여자였다. 따라서 예수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때도 고난은 찾아오지만 고난 자체가 구원적(salvific) 이지는 않다. 이 때의 고난은 악을 직면하고 사랑으로 극복하는 가운데 생기는 부산물(by-product) 로서의 고난이다.


9-7. 그럼 예수는 어떻게 구원을 가져왔는가? 예수는 일생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이 나라로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 하고 그 나라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 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삶과 인격 전체를 통하여 이런 구원을 가져왔다. 이제 누구든지 이런 예수를 만나고 이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때 그는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9-8. 실상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승리자 그리스도론의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마침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서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그 설 자리를 잃어 버렸다. 곧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서 기독교는 현재의 사회 구조를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마적인 것 아닌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사라졌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이 안셀름의 만족설이었다. 안셀름의 만족설은 사회 구조를(그가 살았던 봉건시대의 사회 구조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대신 개인이 가진 죄와 죄책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집중하게 했다.


9-9. 하지만 이제 시대는 바뀌어서 전통적인 기독교 왕국 (Christendom)은 사라졌다. 세속 문화는 더 이상 기독교적이지도 복음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거부하고 나아가고 있다. 이제 이런 상황에서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곧 우리 상황이 콘스탄틴 이전 시대와 비슷해지면서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점점 중요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9-10. 이제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이 땅의 구조 속에 깃든 악마적 힘을 보면서 그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및 특히 죽음 이후의 부활을 통해 온전히 극복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이 승리를 믿으면서 세상을 변혁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구원과 윤리를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곧 구원이란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요 이 것은 곧 잘못된 구조의 수혜자로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삶을 바꾸는 것이며 또한 그 안에서 억압당하면서도 믿음이 없고 볼 눈이 없어서 그 것을 보지도 바꾸지도 못했던 삶에서 돌아서는 삶이다. 따라서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주 값진 것으로 여긴다. 그 것은 또한 제자 직에의 부름을 지극히 중요하게 여긴다. “은혜와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반역에서부터 풀어내어 하나님 나라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도록 초청할 때 이루어진다. . . 우리는 죄 속에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구할 수 있다. 우리가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회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주신데 대한 응답이다.”


9-11. 그리고 이 점에서 위버는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안셀름의 만족설이 구원과 윤리를 동떨어지게 생각함으로 인해 구원 받았으나 현실은 계속 유지하는 것(가령 노예 주인이 계속 노예를 거느리는 삶)과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것은 아벨라르의 감화설과 분명히 구별된다. 아벨라르의 입장은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용서 하였다고 보며 이 사랑이 분명히 나타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본다. 곧 하나님은 십자가 죽음이란 방법을 쓸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는 십자가는 실제로 아무런 특별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 것은 이미 있던 것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반면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에서의 부활로 인해 이미 악의 지배는 (객관적으로) 극복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객관적인 변화가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우주의 권력 구조 (the power structure)는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노출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어떤 개인으로서의 죄인이 부활을 인식하든 하지 않던 간에 악의 지배에 대한 하나님 지배의 명확한 승리이다”(219).


정리: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의 특성

1)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연결하여 그의 속죄적 의미를 말한다.

이 점은 만족설이나 형벌 만족설이 예수의 삶과 죽음을 분리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중요한 강점이다.


2) 하지만 여기에서는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아주 축소되어 있다. 곧 그의 죽음은 그 자체로 구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 것은 그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요 부활을 위한 전주곡에 불과하다. 과연 이런 주장이 복음서와 신약의 다른 글들이 말하는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3) 서사적 승리자 그리스도론의 강점 하나는 그 것이 ‘사탄’을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악한 실재로 인식함으로서 기독교 복음의 사회 윤리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것의 강점은 저자인 Weaver 의 말처럼 구원과 윤리를 통합하는 데 있다.


4) 위버가 비판, 극복하려는 것은 안셀름의 만족설- 특히 그 것이 가진 폭력성이다. 그 폭력성을 지적하는 가운데 저자는 비폭력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제기되는 질문: 정녕 안셀름의 만족설과 개혁자들의 형벌 만족설이 삼위일체론 적으로 설명될 때에도 그 것은 여전히 폭력적인 하나님 상을 제시하는가? 또 폭력을 정당화 하는가?


11. 희생제물의 대속론(The Atonement of Sacrifice)


11-1. 대속론의 두 번째 유형은 흔히 라틴 이론(Latin theory), 혹은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라고 불린다. 칼빈의 형벌만족설(penal satisfaction theory: 기독교 강요 2. 16)도 넓은 의미에서 여기에 속한다. 이 이론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속죄 제물(sacrificial victim) 으로 이해한다.


11-2. 이 이론은 중세기(11 세기)의 신학자 Anselm of Canterbury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의 책 Cur Deus Homo ?(Why God-man?/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는가?) 에서 안셀름은 그의 제자 Boso와의 대화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밝힌다. 이 책에서 Boso는 왜 하나님은 그저 단순히 '나는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 . .' 라고만 하면 될 텐데 왜 그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당하게 했는가? 라고 질문한다. 여기에 대해 안셀름은 "너는 아직 죄의 심각성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그의 유명한 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논지를 편다. 즉 죄와 죄책의 깊이는 하도 깊어서 그저 단순한 죄 용서의 선포로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죄는 다름 아닌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영예를 손상했으며 이 손상된 영예는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그 지극한 거룩 때문에 결코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신다. 따라서 단순한 죄의 용서 선포로는 죄는 용서되지 못하며 반드시 어떤 만족(satisfaction)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죄로 인한 하나님의 거룩성의 손상은 무한한 손상이기에 무한하고 온전한 만족이 주어져야 한다. 이 같은 무한하고 온전한 만족은 오직 신적 존재만이 줄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이 거룩성의 손상은 인간(아담과 하와)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에 인간이 여기에 대한 만족(satisfaction)을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직 하나님이며 사람인 존재 곧 인간이 되신 하나님만이 이 만족을 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 고통의 죽음을 당했고 이 희생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거룩은 만족(satisfaction)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다.


11-3. 이 같은 이해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유발한다. 과연 이런 하나님 이해가 성경적인가? 그의 손상된 영예의 회복을 위해 희생 제물을 요구하고 마침내 그 아들 그리스도를 죽이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깊은 동정의 하나님(compassionate God)이기보다 이교적, 가학적(sadistic) 신, 곧 안셀름 시대의 무자비한 봉건 영주의 상이 반영된 왜곡된 신이해 아닌가? 이 같은 의심에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안셀름 식의 형벌 만족설(penal satisfaction theory)를 거부한다.3) 가령 Joanne Carlson Brown은 1) 이런 이해의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악마에 불과하다. 2) 예수는 억울하고 무력한 희생 제물로 이해된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잔혹한 유아 학대(child abuse)에 불과하다. 3) 예수의 고통을 통해 구원이 주어진다면 이는 고통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여 그렇지 않아도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특히 여성들)에 대한 고통을 정당화 한다.4)


11-4. 반면 복음주의 신학자들 가령 죤 스토트(John Stott)는 몇 가지 오해만 제거되면 형벌 만족설이야말로 가장 성서적인 대속론이라고 주장한다. Stott에 따르면 1)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또한 거룩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에 관한 이 두 가지 주장은 다 함께 유지되어야 한다. 2) 인간의 죄는 하나님 안에 깊은 긴장을 일으킨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또한 거룩한 분- 그 죄를 차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 포르사이스). 3) 따라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만족(satisfaction)/ 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 4) 인간은 이 같은 만족을 줄 수가 없다. 이에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스스로를 죽이는 길을 택하셨다. 이로 인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고 아들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당했다. 즉 십자가 죽음이야 말로 하나님 안의 갈등- 그 거룩과 사랑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4) 따라서 십자가 위의 하나님은 결코 잔혹한 악마가 아니며 그리스도도 무력한 희생자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다. (John Stott, 그리스도의 십자가, IVP).


11-5. 안셀름의 만족설은 중세기 사람들의 삶의 고민을 반영해준다. 즉 당시 세계 (특히 유럽)가 그리스도교화 됨으로서 고대 이교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불안이었던 숙명과 죽음 앞의 불안은 많이 극복되었다. 그리스도 교회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숙명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데 많이 성공했고 이로 인해 해방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숙명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신학에서의 상황의 중요성). 그러나 이제 인간 삶의 다른 고민 곧 죄책과 영원한 정죄의 문제가 주도적인 것이 되었다. 이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됨에 따라 이 하나님이 과연 자기에게 은혜로우신 분인가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세기 (특히 말기)와 종교 개혁 시대 때는 죄와 이 죄에 대한 영원한 정죄에 대한 불안이 아주 극심할 때였다. (이 점에서 청년 루터의 죄책으로 인한 깊은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다시 중세기의 지배적인 불안은 죄책과 영원한 정죄의 불안이었다는 폴 틸리히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11-6. 안셀름의 만족설은 중세 이후 지금까지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전체에 걸쳐 가장 주도적인 대속론이 되었다. 이 이론이 너무 주도적이 되었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거의 예외 없이 이 관점에 의해 해석되어 왔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대속론이 있다는 것을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것 역시 그 자체의 강점과 약점을 가진 한 이론에 불과하다. 그 강점으로서 1) 이 속죄론은 우리의 모든 죄악은 이미 용서 받았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용납 받았다. 이제 우리는 새 출발할 수 있다는 놀라운 용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2) 우리의 과거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고 선포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준다.


11-7. 반면 이 대속론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1) 이 대속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저 죄와 죄의 용서의 반복으로 축소시킬 위험이 높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적극적이 되지 못하고 항상 죄를 의식하는, 소극적, 수동적인 것이 된다. (교회 예배 때의 대표 기도를 생각해 보자)


2) 안셀름의 만족설은 십자가 죽음에 까지 이르게 했던 예수의 구체적인 삶과 행위(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 것은 오직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따라) 예수가 신인(하나님이자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는 점에만 관심을 가진다. 즉 이 이론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구체적인 삶과 가르침 아닌 하나님과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간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만 발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을 탈 역사화 하며 또한 개인주의화 하고 있다. (추상화, 탈 역사화 되면 당연히 개인주의화 된다). 곧 이 이론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의 윤리(세상 안에서의 삶)이 분리되어 있다.


3) 이 이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현세 아닌 내세와 주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4) 하나님을 무엇보다 먼저, 지켜야 할 율법 부여자로, 또 그 감독관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둡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 된다. (

보수적 장로교의 분위기)


4) 어떤 사람은 별로 죄의식을 갖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간다. 이런 사람을 '복음화' 시키려면 먼저 그를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과연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5) 특별히 죄를 그저 '개인적으로 이해함으로 죄의 구조적 특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오늘 우리의 상황 곧 술, 담배 거짓말, 도둑질은 죄로 인식하지만 인종 차별, 성차별, 경제적 수탈, 자연 파괴 등은 죄로 보지 않는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 이 대속론은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보기 어렵게 만들며 또 잘못된 목양으로 이끌 수 있다. 가령 잘못된 사회 구조 속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이 대속론에 근거해서 너의 문제의 근본은 죄 때문이다. 그러니 회개 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목양이며 결국은 극복되어야 할 사회구조를 정당화시키는 '아편' 역할을 하는 것이다.


6)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 인생의 근본 문제는 죄와 죄책감의 문제보다 생의 속박이나 무의미성일 수 있다. 특별히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불안은 틸리히가 말한 대로 고대의 숙명과 죽음의 불안이나 중세기의 죄책이나 영원한 정죄의 불안이 아니라 생의 무의미와 절망의 불안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오직 이런 관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목회 적으로 부적절할 뿐 아니라 풍요한 기독교 믿음의 내용을 한 가지 측면으로만 축소시키게 된다.


7) 또한 이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2000 년 전의 나사렛 목수가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다. 이제 그를 믿으면 죄 용서 받고 구원 얻는다. . .는 것은 많은 비신자들에게(또 신자들에게도)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주도적이었던) 대속론도 그 자체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고 다른 대속론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12. 하나님의 사랑의 증명으로서의 대속론 (The Atonement of Demonstration)

12-1. 대속론의 세 번째 주요 유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 증명(demonstration)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이 유형의 대속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고전설의 속박에서의 해방이나 만족설의 죄에 대한 대속 죽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 전달로 본다. 이 유형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 하셨고 우리를 모든 곤궁에서 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미련하여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에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을 보이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고 이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감화되어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온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이론은 중세기의 피터 아벨라르(1079-1142)에 의해 형성되었고 19 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도덕 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 이란 형태로 발전되었다.


12-2. 아벨라르는 고전설이 '사탄'을 너무 중시하고 있다고 거부한다. 또한 안셀름의 만족설이 1)아들의 죽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은 기독교적 하나님이 아니다 2) 너무 극단적으로 비관적인 인간 이해이다 (인간이 그렇게도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가?) 3) 설혹 안셀름의 만족설이 옳다고 해도 '어떻게' 인간이 그리스도 사건에서 자기의 죄책이 해결되었음을 '체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자기 아들을 죽게 할 정도로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볼 때 사람들의 마음에는 감동과 경외가 생기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즉 십자가는 속박에서의 해방이나 속죄 제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다.


12-3. 따라서 이 대속론에 있어서 인간의 곤궁은 속박(고전설)도 죄악(만족설)도 아니고 무지이다. 그러나 이 때의 무지는 그저 지적인 무지가 아니라 전 실존적 무지, 도덕적 무지이다. 따라서 그저 지식의 전달로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며 죽음의 고통으로 표현되는 엄청난 사랑 앞에서만 인간은 자기의 곤궁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 이론은 고전설이나 만족설과 달리 대속의 사건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랑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직접 일어나기 때문에 주관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2-4. 이 유형의 속죄론의 강점은 고전설이나 만족설과 달리 인간의 실존적 참여를 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원은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변화와 결단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그 것은 내가 참여 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반면 고전설이나 만족설과 달리 이 유형의 대속론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고전설에서는 십자가는 사탄의 속박을 극복한다. 만족설에서는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화해시켜서 인간 구원이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유형의 대속론에는 이런 것이 없다. 십자가는 그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나타나는 자리일 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결단인데 이는 너무 인간에게 무게를 많이 실어주는 것 아닌가?


12-5. 이 유형의 또 다른 강점은 (제대로 이해되고 적용될 때) 현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생의 무의미, 버려짐의 느낌, 삶의 천박성( 그 날이 그날인 삶)에 대한 답변을 줄 수 있다는 데 있다. 참으로 진정한 사랑만이 잃어버린 자기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가져올 수 있다. 사랑 안에서 삶은 그 피상성을 극복하고 진정 깊어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유형은 현대인들, 특히 산업화, 물질문명, 풍요의 문화 속에 생의 깊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의미성, 권태, 절망에 깊이 병들어 버린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유형이다. 그러나 이 것은 또한 (값싼 감상주의적 사랑으로 변질 될 위험이 있다.


12-6. 이 이론의 문제점은 인간의 고통(속박)과 죄의 심각성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이 대속론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무지는 정녕 심각한 인간 실존의 문제이다. 그러나 또한 고통과 죄 역시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이다. 이 대속론은 그러나 이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그로 인해 개인적, 사회적 어둠의 깊이를 제대로 못 보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대속론도 다른 두 대속론과 함께 그 자체의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고 다른 두 이론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13) 이상의 세 대속론은 인간의 곤궁과 하나님의 해결에 대한 구약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이야기 곧 출애굽 이야기, 바빌론 귀환 이야기, 제사제도 이야기와 잘 부합된다.


13-1. 그리스도 해방자 대속론(고전설)은 구약의 출애굽 이야기(The Exodus Story)와 잘 부합된다. 출애굽 사건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또 뒷날 오경이 형성되었다. (구약 안의 가장 오래된 전승의 하나인 신6:21-23). 출애굽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신년제의 때 매년 반복되었고 이를 통해 출애굽은 그들의 조상들이 경험한 일일 뿐 아니라 지금 이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같이 경험하는 사건이 되었다. "지금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서의 출애굽: 60만 명의 뜻)


출애굽 이야기는 그 성격상 속박, 억압, 해방, 여정, 목적지의 이야기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 파라오 아래에서 억압당하는 노예였다. 정치적으로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며 문화적으로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삶 역시 억압당하며 매여 있는 삶이다. 우리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규범에 의해) 억압당하며 또 심리적으로 환경적으로 억압당한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억누르는 파라오가 있다. 즉 출애굽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은 억압의 애급 살이이다. 우리는 모두 속박의 땅에 매여 있다. 즉 우리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억압이 우리의 문제라면 그 해결책은 '해방'이다. 이 해방은 홍해 통과, 광야 생활의 불안 및 유혹(황금 송아지), 새로운 언약의 백성이 됨 율법 수여)등을 통해 이루어지며 40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 가는 길은 하나님을 향한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해방의 목적지이지만 또한 해방의 과정 중에 함께 가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 해방은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해방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 전체를 통해, 특히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하였다.


13-2.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해 (감화설)는 바빌론 포로와 귀환의 이야기와 부합된다. 바빌론 포로기는 주전 587년에 시작되어 주전 539년 사이의 약 50 년간에 이른다. 출애굽 이야기 다음으로 바빌론 포로와 그 귀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 바빌론 포로 경험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것은 모든 친숙하고 정다운 것들과의 단절- 낯선 곳에 그저 불안스럽게 노출됨을 뜻한다.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 낯선 땅으로 끌려온 사람들, 상실감, 무력감, 자기 정체성의 혼란, 삶의 무의미성, 주변부 인생, 혼동, 여기에다가 구체적 억압과 멸시로 고통당하는 삶을 뜻한다.


13-3. 바빌론 포로기 이야기처럼 우리 삶도 역시 고향의 상실, 삶의 무의미성, 피상성(그날이 그날인 삶), 하나님이 없는 삶, 시온에서 떠나온 삶,(시137:1ff) 내 삶에 가치를 주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삶, 에덴에서 쫓겨난 삶(창3장은 바빌론 포로기 때 기록되었다)으로 특징된다.

바빌론 포로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고향으로 돌아감(시온으로/ 에덴 동산으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외된 나, 삶의 무의미와 반복되는 일상에서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다. (사40:3-4, 29-31). 돌아감은 회복이며 회개이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우리 삶의 무의미성, 피상성, 절망을 극복하셨다. 특히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줌으로 인해 생의 무의미와 피상성, 또 절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셨다.


13-4.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죄의 용서를 위한 희생 제물로 이해하는 대속론(만족설)은 구약의 세 번째 큰 이야기인 제사장 이야기(priestly story)와 잘 부합된다. 제사장 이야기는 출애굽이나 바빌론 포로기 처럼 특별한 사건에 관한 기술은 아니고 이스라엘의 신앙의 내용을 규정지었던 성전 건립 및 그 곳에서의 제사 예식과 연관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문제를 속박(출애굽)이나 실향(바빌론 포로) 아닌 죄와 죄로 인한 죄책 및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한다. 즉 여기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지은 존재요, 따라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해한다. 제사장 이야기는 죄, 죄책, 용서의 이야기이다.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정죄를 그의 삶 전체, 특히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해결하신 분으로 이해된다.


13-5. 구약의 세 가지 중요한 이야기들은 신약 성경에 와서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서 통합되며 또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종류의 속죄론과 연관된다. 즉 인간의 곤궁을 속박으로 보고 그 해결을 해방자 되신 하나님에게서 보는 출애굽 이야기는 대속론 중 승리자 그리스도론과 부합된다. 인간의 곤궁을 실향, 의미 상실, 삶의 표피화로 보고 그 해결책을 귀향(삶의 의미를 찾아감)으로 보는 바빌론 포로기 이야기는 대속론 중 '하나님의 사랑의 표명으로서의 대속론'에 부합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문제를 죄와 그로 인한 정죄로 보는 제사장 이야기는 대속론 중 안셀름의 만족설과 부합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세 가지 근본적인 삶의 문제인 (폴 틸리히의 말을 빌리면) 숙명과 죽음의 공포, 죄와 영원한 심판의 공포, 삶의 무의미와 절망의 공포를 극복하신 분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구약의 연장이며 또 그 완성이다.



대속론 정리


1. 대속론은 그리스도의 삶 전체, 특히 그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인간의 근본적인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가? 에 대해 답변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그 자체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그의 삶 전체, 또 그의 부활사건과 연관되어서 이해되어야 한다.


3.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단지 한 의인의 죽음이 아니라 정녕 인간의 곤궁과 죄악의 해결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삼위일체의 두 번째 하나님 되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론적, 삼위일체론적 맥락 안에서만 대속론은 의미를 가진다.

4. 인간의 근본적인 곤궁은 속박과 죽음/ 죄책과 영원한 정죄/ 생의 무의미와 절망이다. 세 가지 대표적인 대속론- 고전설, 만족설, 감화설은 각각 인간의 세 가지 곤궁을 예수께서 어떻게 해결하셨는가를 각각 설명한다. 교회사에서는 주로 안셀름의 만족설(칼빈의 형벌설) 이 주도적이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이론 사이의 균형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5. 실상 신약 성경은 예수의 죽음을 묘사하는 데 20 여 가지가 넘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사용하고 있다.5) 그런데 예수 죽음의 서로 다른 면모들을 드러내고 있는 이 이미지들은 때로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된다. 곧 성경이 증언하는 대속론은 무척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의 통일된 대속론(atonement theory)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면서 설명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교회사에 나타났던 대속론들은 성경이 말하는 여러 이미지들 중 하나 혹은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몇 가지 이미지들만을 선택함으로서 나름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 주도적이었던 속량/갈등(ransom/conflict) 모형 (곧 구스타브 아울렌이 부르는 승리자 그리스도론)도, 중세기의 안셀무스와 개혁자 칼빈에 의해 대변되며 서방 교회 전통에 가장 큰 영향을 지금도 미치고 있는 만족/대리 형벌 모형(satisfaction/penal substitution model)도, 아벨라르에게 시작되어 근대 신학에서 각광받았던 도덕 감화설(moral influence)도, 그 밖에 그로티우스나 요한 웨슬리의 통치 모형(the governmental model) 도, 또 최근의 주목할 만한 몇 가지 대속 이론들 역시 그들 나름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든 신비를 하나로 통합하지는 못하고 고작 성경이 말하는 예수 십자가의 몇 가지 면모만을 반영할 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다채롭고 또 논리적으로 서로 충돌하는 이미지들을 하나로 일관성 있게 설명해 내는 이론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성경 본문이 말하는 서로 충돌하는 대속의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함 없이 그저 견디고 있어야 할 것인가? 그렇다. 어쩌면 소극적으로는 논리적 모순을 견뎌 내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다양한, 서로 충돌하는 의미들을 통합함 없이 있는 그대로 참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적극적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 죽음의 여러 측면들 중 오늘 이 시대에 보다 적실한(relevant) 것들을 찾아내고 그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즉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오늘 우리 시대에 또 내가 속한 공동체에 좀더 필요한 대속론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신학의 상황성).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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