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교 론
1. 선교의 뜻
*아브라함 카이퍼(A.Kuyper) "선교학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개종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정하신 가장 유익한 방법에 대한 탐구이다."
*전호진 "선교는 타 문화권에서 복음 전도를 위한 교회의 모든 활동, 즉 교육사업, 의료사업, 개발사업, 구제사업 등 모든 교회의 봉사 활동을 말한다."
=> "선교는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 얻지 못한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전하는데 일념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2. 선교의 당위성과 범위
1. 선교를 왜 해야하나?
목회자와 일반 교회 봉사자는 가끔씩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반문할 때가 있는데 미리 정립되어야 한다.
특히 선교사로 외국 선교에 소명을 가진 자는 반드시 선교의 당위성이 분명하게 확정이 되어야 한다.
1)선교는 성경(하나님)의 명령이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선교는 자발성이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2. 선교의 대상
1)외적으로는 불신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령을 복종함에 있어 선교의 대상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한다. 먼저는 불신자들 모두가 그 대상이다. 국내외 모든 불신자들은 선교의 대상이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행 13:47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2)내적으로는 택자들이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인생 비교
①사단의 시험이 있을 때 :
유다는 방치 상태 -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베드로에게는 꾸짖어 주심 -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②회개와 반성의 결과
베드로는 말씀을 기억하고 통곡할 수 있었다.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러나 유다는 후회하는 절망으로 자살했다
마 27: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③존재의 의의:
유다 - 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구원자로 오셨는데.....(적중은 택한 자에게만)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3. 성경의 선교 역사
선교의 본질적 내용이 시도되는 것은 성경에서 이미 출발했다.
John Stott '성경이 선교를 가르치고 성경 자체가 선교의 책'
1) 구약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세였더라'
시 66:7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 (셀라)'
시 94:10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2) 신약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갈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4. 종말론적 선교의 의의
1) 복음선교와 세계 역사의 상관 관계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 교회역사와 세상 역사의 관계
롬13장 세상의 문화를 인정하심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교회의 종말론적 과업의 중심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5. 교회사적 선교 역사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서의 소명자인 바울은 안디옥으로부터 시작하여 선교의 세계화를 펼쳤다.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야고보 순교
예루살렘은 복음의 시작 - 유대교가 개신교로 시작
마가의 다락방에서 교회가 창설(구약 광야교회-신약 예수교회로서 교회)
2) 안디옥에서 거점으로 하여 세계선교가 시작되었다
*스테반 집사의 순교이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시리아 안디옥 지역에 정착하여 안디옥 교회를 형성하였다.
*바울이 이 성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행11:26)
*구제 사업을 창시함(행11:29-30).
*전도사업에 알려진 유명한 교역자는 니골라 아가보보 바나바 니게르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바울)등인데 그중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발하여 파송하니 이것이 곧 선교 사업의 시초요 제 1대 선교사다(행6:5, 11:28, 행13:1-4).
*선교사로 파송받은 바나바와 바울은 구브로를 비롯하여 아세아 마게도냐냐 헬라 로마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많이 설립한 것이 전 세계 복음을 전파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주후 110년경에 요한의제자로 유명한 익나시우스는 이성에서 40년 간 복음운동에 충성하다가 순교를 당하였다.
*지금은 터어키의 안타키야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동양의 여왕'이란 명칭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다.
3) 예루살렘 파괴로 인해 유대인교과 기독교인은 세계로 가게되었다
막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110만명 불에 타 죽고, 9만7천 포로, 나머지는 외국으로 도망
초대교회는 로마의 집권 하에 있던 시절에 계속적인 핍박
카타콤, 로마 황제들의 핍박...
베드로 - 네로 황제 때 순교
요한 - 도미시안 황제 핍박
서머나교회감독 요한의 제자 폴리갚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한 지방 총독에게 한 그의 답변이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겼으나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32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공인 종교로 인정함으로써 박해도 종결되었다.
이슬람
모하? - 570년 출생 (아라비아 메카)
어릴 때 양친 잃고, 25세 때 14살 연상 과부와 결혼
40세 메카 근처 동굴에서 계시 받음(가브리엘?)
이슬람-순종, 헌신의 뜻
예수는 성인이지만 자신은 모세와 예수보다 우월한 선지자
해지라 - 622년 추종자들과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로 도망한 사건
622.7.16 모하메드 월력의 첫 째날 632년 63세로 아들 없이 외동딸 두고 사망
교황체제 - pop 아버지 라틴어 papa의 변형된 단어.
베드로부터 교황이라고 주장, 베드로는 로마 간 적 없음. 로마에서 순교?
440교황 레오1세는 교황 칭호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고 함.
590-604 그레고리우스1세(그레고리가 교황칭호 사용했다함).
1054년의 동-서방 교회 분열
중세 암흑시대를 거쳐
16세기 루타 종교개혁, 칼빈 개신교 창시(개혁)
선교는-로마 영국과 유럽-서구-동양-다시 이스라엘 성지로 돌아감
개신교 유럽선교의 기원 A.D. 1600 - 1800
일반적인 기대는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영적 세력이 1500년경에 시작된 세계 탐험과 식민지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카토릭과는 다르게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러면 개신교 교회가 선교 프로그램을 착수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 ?
첫째이며 가장 유력한 요소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이다. 그들은 예수의 지상명령(至上命令 : the Great Commission)이 원 사도들에게만 해당한다고 가르치고, 당시에 복음은 세상 끝까지 완전히 전파되었다고 말하고, 혹 그 후대(後代)가 복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며 그 불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며, 또한 즉각적인 소명과 함께 되어진 사도직과 특수한 기능 및 기적적인 능력은 이미 끝났고 후세에 나오는 교회는 선교사를 땅 끝까지 보낼 권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책임도 없다고 가르쳤다.
하드리안 사라비아와 져스티니안 폰 벨츠는 교회가 세계 복음화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무시당하고 멸시당했다. 한편 이상하게도 세계복음화를 가장 열렬히 부르짖은 사람은 에라스무스였다. 당시 세계선교에 이 같은 부정적인 관점이 정통 루터교 입장이었다.(예 1651년 발간된 위텐버그 신학 교수단의 공식문서) 더욱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인간의 책임을 배제한 예정론자들이 많았다.
두 번째 요소는 16,7세기의 개신교 교회의 서글픈 어려움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개신교는 카토릭에 비해 세력과 숫자에 대단히 열세였다. 또한 카토릭이 반종교개혁으로 많은 영역을 되찾은데 반해 30년 전쟁으로 타격을 받고 극심한 사회 혼란 속에서 생존의 문제에 고민해야 했던 개신교 교회는 세계복음화에 필요한 비젼이나 열정같은 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더불어 루터교와 개혁파교회의 살상전쟁은 세력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요소는 개신교의 유럽이 아시아, 아프리카 및 신세계의 선교에서 고립된 것이다. 카토릭 국가인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이 거의 한 세기 이상 바다를 석권하고 세계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그들의 국왕이 해외식민지의 기독교화에 깊은 관심을 갖은 반면 뒤 늦게 출발한 화란과 영국의 동인도회사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네 번째 요소는 로마 카토릭교회가 세계에 확대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였던 종교적인 질서가 개신교 교회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규모가 가장 컸던 모라비안 교도들 조차도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군대와 같은 훈련을 받은 예수회 선교사들에 비해 열정을 빼고 어느것 하나 변변한 것이 없었다.
대륙에서 시작
근대적인 선교 사업이 유럽에서 시작되기까지는 여러 차례의 실패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1555년 칼빈이 4명의 성직자와 프랑스 위그노 일단을 리오 데 자네이로 만에 보내 박해받는 개신교도들을 위해 영지를 개척한 일이다. 1622년 화란 동인도회사의 독려로 성직자와 선교사를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레이든에 있는 대학에 신학교를 설립한 일, 1661년 동지회의 창설자인 죠지 폭스가 3명의 동료를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한 일, 최초의 루터교 선교사로 1664년경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외친 오스트리아인 저스티니안 폰 벨츠 남작이 기아나로 항해한 일 등 다른 선교 시도도 줄줄이 실패하였다. 개신교 교회가 선교의 노력을 지속하기 전에 교회는 내적으로 새로워져야 했던 것이다.
독일의 경건주의(Pietism in Germany)
개신교 유럽의 국교회의 황량한 정통주의와 죽어버린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인 경언주의 운동은 근대적 선교 사업의 발단이라고 본다.
경건주의의 시조는 루터교 목사인 필립 스페너인데 그는 체계적인 영적 생활의 계발을 통해 자기 교회 회중의 힘없는 영적 음율을 고조시키려고 했다. 경건주의 신학은 전도의 열정이 없는 한 설교의 비젼이 있을 수 없고, 개인적 경건 생활이 없는 한 전도의 열정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회심의 체험이 없는 한 개인적 경건 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은 성직자들의 분노를 야기 시켰다. 삭소니의 대학들의 문호 폐쇄로 1694년 할레에 그들 자신의 대학을 설립하였다. 1705년 스페너의 사망이후 어거스트 프랑케는 가장 유력한 지도자였는데 그의 영향으로 할레가 경건주의의 교육센터가 되었고 18세기 선교 사업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
덴마크 할레 선교회(The Danish-Halle Mission)
할레 대학에서 형성된 첫 번째의 개신교 선교 기구가 덴마크 할레 선교회이다. 코펜하겐의 궁정목사인 프랜즈 루트켄즈박사가 1705년, 프레드릭 4세의 명에 따라 동인도에서 일할 선교사를 모으게 되었는데 덴마크 내에서 적임자를 발견할 수 없자 독일의 스페너와 프랑케를 만나 경건주의자들 가운데 천거를 받았는데 바돌로매 지겐발크와 하인리히 플뤼챠우가 바로 그들이다.
인도에서 15년을 지냈던 지겐발크는 안식년인 1715년에 유럽각지를 여행하면서 트랑케발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그는 덴마크와 영국의 국왕의 대접을 받았고 거기서 유력한 청년 진젠돌프를 만났는데 진젠돌프는 후에 모라비안 선교운동의 아버지가 된 인물이다. 1719년 그가 사망할 때 선교부는 덴마크, 독일, 영국, 심지어 뉴잉글랜드에 많은 동지들을 갖게 되었다.
모라비안 선교회(Moravian Missions)
1467년 연합형제단을 형성한 월도파와 모라비안의 존 후스 추종자들이 반종교개혁으로 거의 소멸되고 남은 사람들이 1722년 삭소니로 이주하여 진젠돌프 백작의 배려로 그의 영지에 정착하므로 흔히 헤른후트(Hernhut : The Lord's Watch)라고 알려진 이 지역은 세계를 돌며 선교 운동을 일으킨 그 근원과 센터가 되었다.
니콜라우스 진젠돌프는 스페너애 의해 복음을 들어 회심하였고 할레에서는 프랑케의 입문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혈통과 신앙고백에 있어 열정적 경건주의자였다. 얼마되지 않아 지도자로 인정받은 그는 1737년 모라비안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1730년 코펜하겐을 방문한 진젠돌프 백작은 선교사를 원하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리랜드 출신의 두 에스키모를 만나고 그들의 요청에 깊은 감동을 받아 헤른후트에 돌아오자 사람들 앞에 호소하였고 이를 계기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선교는 1732년 버진열도의 덴마크령 성 토마스섬의 흑인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다.
1733년엔 그린랜드, 1734년엔 버진열도의 성 크르와섬, 1735년엔 수리남, 1737년엔 황금해안과 남아프리카, 1740년엔 북미 인디언, 1754년엔 쟈마이카, 1756년엔 안티구아 등 1732년부터 1760년 사이에 226명의 모라비안선교사들이 외국에 들어갔다.
그들의 선교사역이 20년 이내에 지난 2세기동안 영국 교회와 개신교가 수행한 것보다도 많은 선교 사업을 실천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계복음화의 과제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책임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인식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책임 수행이 공동체의 "공동적인 과제" 임을 절실히 의식하고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사업이 공식적인 교육이나 신학적 배경을 거의 갖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경이로운 것이다.
거의 240년이 지나서도 모라비안교도들은 여전히 세계 각처에 선교사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주요 근거지는 서독, 영국, 덴마크 및 미국이었다.
1797년에는 네델란드선교회가 발족하였고 19세기에 와서는 약 15개의 대륙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독일의 선교회들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통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며, 현재 독일 계통의 선교회는 1,300여개에 달한다.
복음적 각성(The Evangelical Awakening)
대륙의 선교 운동이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서 비롯된 것처럼 복음주의 각성에 대한 영국 선교 운동도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닌 한 사건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 복음주의 각성의 위대한 설교자 웨슬레가 개인적으로 진젠돌프와 모라비안 형제들을 만난 것과 휘트필드가 프랑케의 글을 연구한 것이 두 측면 사이의 연결점이라 할 수 있다.
웨슬레는 회심을 체험한 직후부터 전도사역을 시작했는데 40년동안 하루 평균 3-4회의 설교를 감당했으며 그의 천재적인 조직력으로 인하여 위대한 감리교회가 형성되었으며 그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파멸되어 가던 영국을 건지고, 케리에 의해 출항된 근대적 선교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초기 영국 선교회(Early British Missions)
1792년에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윌리암 케리와 더불어 시작한 선교를 영국 선교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전에 이미 세 선교기관이 있었는데 원래 북미의 식민지 형태 내에서 운영하도록 의도된 기관들이었다.
첫 번째는 1649년에 창설된 뉴 잉글랜드의 복음 선포회로 북미의 인디언들과 더불어 조직된 것으로 존 엘리오트를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여 메사추세츠의 인디언들을 위해 독립 전쟁이 발발하기 까지 반세기를 헌신하였다.
두 번째는 기독교 이해 증진회(SPCK)로 1698년에 성공회와 함께 하나의 독립적인 선교회를 발족하였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토마스 브레이였는데 이 기관은 원래 신세계 백인 이주민들의 종교생활을 돕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다. 그러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선교기관이 되었다.
세 번째는 해외 복음 선포회로 세계적으로 SPG로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기관으로 영국교회의 초기 선교 100년 동안 거의 유일한 선교회였다. 자매선교회로는 교회 선교회가 있었다.
SPG는 역시 토마스 브레이가 발족에 역할을 감당했으며 1701년 두가지 목적으로 왕실의 허락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목적은 첫째 종교 교육의 결여로 이단 종교에 흡수될 위험이 있는 해외의 영국 거류민의 영적인 문제를 돕기 위한 것이며, 둘째는 처음에 이교도들이던 토착 원주민들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SPG는 대단히 엄격한 예산으로 상당히 소극적 활동을 하였다. 그렇지만 식민지 미국에 있어 성직자와 선교사들을 위해 절실한 필요를 잘 충족시켜 주었다.
영국과 미국 개신교 선교의 기원 A. D. 1750 - 1850
개신교 선교운동은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암 케리에 의해 출항되었다. "위대한 세기(Great Century)"가 발단되기까지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의 공헌이 많았다. 윌리암 케리에게 더욱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제임스 쿡 선장의 여행이었다.
종교적 요소도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과 미국에서 발생한 복음적인 각성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케리 이전부터 사실상 선교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들은 영국에서 있었다.
1719년 아이삭 왓츠의 선교적 찬송가를 비롯하여 챨스 웨슬러의 동료들이 선교적 테마를 말하였고 1723년에는 페이슬리의 로버트 밀러가 "기독교 선포와 이교도 전복사"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이교도인들을 회심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써 중보기도를 호소하고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영국의 어느 곳에 가든지 기도모임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요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을 회심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1746년의 7년"기도대회"는 신세계의 조나단 에드워드로부터 회신을 받았고 그 다음 해에 에드워드에 의해서 모든 신자들에게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기도제목이 선포되었다.
40여년 후 1783년 에드워드의 소책자를 읽고 난 죤 서클리프는 영국의 모든 침례교회와 교역자들이 이교도회심을 위해 매월 첫 월요일을 연합 기도일로 정하도록 제안하게 되었다.
이즈음 윌리암 케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14세에 구두 제조 견습공이 된 케리는 18세에 회심하고 영국교회를 떠나 "이의자(異意者)들의 무리"라는 곳에 참여하여, 즉각 인근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후에 그는 침례교인이 되었고 26세에 죤 서클리프, 죤 라이랜드, 및 앤드류 풀러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교사였던 부친과 조부의 영향으로 향학열이 대단하였는데 손에 잡히는 책을 모조리 탐독했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및 화란어까지 배웠다.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으로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해외에 관계된 서적을 모두 읽었는데 구드리의 "지리학 입문", 죠나단 에드워드의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를 읽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덴마크 할레선교회, 뉴 잉글랜드의 죤 엘리오트, 및 모라비안 선교사들도 친숙히 아는 처지였다.
케리는 1792년 87페이지에 달하는 "이교도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조사"라는 책을 출간하였는데 최상의 확신에 찬 선교적 호소를 하고 있는 이 책은 기독교 역사애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교회사에 끼친 영향은 루터의 95개조항과 나란히 설 정도로 귀하다. 그는 결코 책상 머리에만 앉아 있는 전략가가 아니었다.
행동으로 즉각적 수행했고 그 목표는 선교사를 해외에 파견 할 수 있는 어떤 기관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사방에 수많은 장애물들이 널려 이었다. 1792년 10월 2일 저녁 12명의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위도우 윌리스의 넓은 집에서 모여 이교도 복음 선포를 위한 특별 침례교 연합회를 구성하였고 레이놀드 호그가 회계로 앤드류 풀러가 총무로 뽑혔다.
이 선교회는 개인 헌금으로 재정을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하는 일에는 난제가 수북하였다. 아내의 거절과 아버지의 몰이해 등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1793년 6월 13일 인도로 출항하였고 40년 간의 선교는 계속되었다.
영국과 미국에 케리의 노고와 편지를 통하여 많은 선교기관이 창설되었다. 즉 런던 선교회, 스코틀랜드와 글라스고우 선교회, 네델란드 선교회, 교회 선교회, 영국 해외 성서공회,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 미국 침례 선교 협회, 미국 성서공회 등이 있다.
미국의 선교
사무엘 밀즈는 1802년 어느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4년 후 윌리암즈대학에 입학하여 거기서 선교의 불을 붙였고 결국 그 불꽃은 땅끝까지 번져 나갔던 것이다.
제임스 리차드스, 프란시스 로빈즈, 하비 루미스, 고든 홀, 루터 라이스 등, 당시의 형제회로 알려진 그들이 캠퍼스 근방 단풍나무 숲에 자주모여 기도와 토론시간을 가졌는데 어느날 폭풍으로 건초더미 곁으로 옮겨 기도를 계속하였고 끝난후 그들이 미국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서명하였는데 그들은 그로부터 "건초 그룹"이라 알려졌다.
졸업후 일부가 앤도버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후에 져드슨, 밀즈, 노트, 및 뉴엘은 탁월한 져드슨의 지도로 선교 문제 연구소를 조직하였다. 1810년 6월 28일 매사추세스 회중 목회자 총회에 참석한 그들은 선교 사업에 자신들을 투신하고자 하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해외 선교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10년 9월 5일 파밍톤 1차회의에서 14개조항의 회칙을 채택하고 새로운 사업의 지원을 위해 기독교 대중에게 보내는 글을 준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개신교 세계 선교의 거의 70%를 담당하고 선교 재정의 80%를 맡게된 미국의 해외 선교의 소박한 시작이었다.
초창기부터 이 위원회는 해외 선교 뿐 아니라 국내 선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제2차 총회(매사추세스의 워세스터)에서는 "본 위원회가 본 대륙내의 이교도 선교에도 관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표하게 되었다. 1817년에 시작하여 1883년까지 계속되면서 선교 사업은 많은 인디언을 상대로 수행되었는데 15개 부족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해외 선교는 맣은 당면한 어려움 가운데도 런던 선교회의 지원과 협력으로 버마를 최초의 선교지로 정하기로 작정하였다.
제3회 년차 총회는 1812년 9월에 하트포드에서 개최되었는데 위원회에서는 선교 활동에 필요한 네가지 분야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즉 (1) 고대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 (2) 원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 (3) 고대 기독교 교회권에 속한 사람들 및,(4) 이슬람교에 속한 사람들 등이다.
위원회에서 정식 선교사로 져드슨, 노트, 뉴엘, 홀 등의 4명을 임명한 것은 제2차 연차 대회 때였다. 재정에 문제가 되었지만 1812년 2월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눠 미국을 떠난 그들은 4개월만에 인도에 도착하였고,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선교는 다른 지역에도 신속히 진행되었다. 1816년 실론, 1820년 근동, 1830년 중국, 1834년 마두라 등이다.
한편 1812년 2월 6일 살렘의 성 전에서 앤도버 신학교 출신의 동료 4명인 뉴엘, 노트, 홀, 라이스와 함께 안수를 받았던 져드슨은 살렘과 켈커타 사이에서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꿔 도착하자마자 윌리암 워드에 의해 침례를 받고 솔직한 태도로 회중 위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미국에 있는 침례회에서 사역을 계속하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1814년 5월에 기구가 조직되었는데 현재의 미국 침례교 해외 선교회가 바로 이것이다.
져드슨은 이 선교회에서 최초의 가장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 후 동인도 회사에 의해 인도를 떠나 랭구운으로 갔는데 1813년 7월 13일 제2의 미국 선교를 발달 시키게 되었다. 그외에도 많은 선교단체들이 계속해서 구성되었는데 1819년 감리교 감독 교회, 1821년 개신교 감독 교회, 1831년 장로 교회, 1837년 복음 루터 교회 및 기타 다수의 교단에 의한 것들이었다.
동양과 서양에서의 새로운 출발(1600 - 1800)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교 선교에 참여하게 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희랍정교회(Orthodox)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의 선교는 로마 카톨릭에 의하여 이루어진 노력들과 비교할 때 희미한 불빛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동방교회는 소아시아를 거쳐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심장부까지 밀고 들어온 이슬람의 진출과 이교도들인 타타르족의 러시아 진출 등 양차의 대 타격으로 그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풀의 함락은 동방제국의 몰락일 뿐만 아니라, 희랍어-교회의 위대한 선교 역사의 종언을 뜻했다.
19세기에 와서 이 교회들은 그 지역 국가들의 정치적인 독립과 더불어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교활동은 러시아가 정신을 수습하여 그 독립성을 다시 주장하고 공격적이며 확장적인 그리스도교 세력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오랜 후에 재개되었다.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인한 하나의 결과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민족의 참된 통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고난의 공동 피해자들인 슬라브족, 스칸디나비아족, 핀족등 여러종족들이 공동의 원수에 대한 저항으로 단결의 토대를 마련케 되었다.
물론 타타르족 지배하에 있던 이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383년 페름교구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수년간 그곳에서 활약한 스테판 차르프가 가장 유명한 선교사였다.
타타르족은 본래 무슬림교도가 아니었다. 1세기후에 무슬림이 되었지만 광신적이지도 남을 핍박하는 열심도 없었다. 그러나 볼가강 유역의 새로운 칸국들의 강경함은 선교적인 열성과 마주치게 되었고 급기야 1454년 콘스탄티노풀의 함락으로 러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태도와 이슬람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때부터 모스크바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도시를 "제 삼의 로마"라 부르며 비잔틴 세계의 후사와 투사가 되었다. 이반 3세(1462-1505)는 콘스탄티노풀의 마지막 황제 요안네스 팔래올로구스의 조카를 두 번째 왕후로 맞이하였다.
그때부터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자신을 비잔틴 왕계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그는 이제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를 응징해야하는 제 2의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래서 뇌제(雷帝) 이반 4세(1533-84)가 1552년에 카잔의 타타르 칸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은 그에게 하나님의 성전(聖戰)이었던 셈이다.
일단 팽창작업이 개시되자 러시아 세계의 지리적인 확장은 놀라울 만큼 신속히 전개되었다. 1586년 토볼스크 시 건설, 1619년 예니세이 강 횡단, 1632년 현재의 야쿠츠크의 근처에 있는 레나 도달, 1648년 최초로 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데지네프는 이스트 케이프를 돌아 베링해협을 발견하였다.
러시아 교회의 첫 번째 활동은 새로운 개척지로 쏟아져 들어가는 러시아 교인들의 요구에 대한 최소한의 공급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런 신개척지는 세 개의 종교가 경쟁을 하고 있었다. 마술 혹은 샤마니즘이라 불리는 종교를 신봉하는 물활론자들과 티베트식 불교인 라미교, 그리고 이슬람이었다.
시베리아를 기독교화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은 겨우 피오트르 대제의 치세중에 시작된 일로 1700년 6월 17일 우카즈(제정러시아의 칙령)를 공포하여 구체화 되었다.
종교적목적과 정치적목적이 함께 추구된 것이다. 러시아선교의 특징은 거의 예외없이 교회와 국가간의 유착이 너무 깊기 때문에 구성요소 속에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1. 서 시베리아의 선교
1702년 1월 4일에 필로페이 레스친스키가 토볼스크 감독에 임명되어 1721년까지 많은 실망을 맛보며 오스티크아족, 보굴족, 야쿠트족, 그외의 지역부족들을 개심시켜
나갔다. 선교사의 부족과 필로페이의 사망으로 더 큰 혼란에 빠진 선교사업은 실베스터 골로바키 감독의 부임과 함께 새로운 부흥이 시작되었다.
2. 중국 선교
17세기 말부터 일부 군대 탈영자를 포함한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북경에 거주해 왔다. 쇄국정책의 중국이 거절한 러시아 사제의 북경거주가 허락된 것은 키아크타조약(1227년)에서 러시아 황제가 몽고에 대한 중국의 정당한 주권을 인정해 주고 보상으로 얻은 것이었다.
사제의 수는 네명으로 제한되었고 러시아 선교회는 18세기를 간신히 끌고 갔다. 전반적으로 예수회 수도사들과 그들의 후계자들과의 관계는 순조로왔던 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빈곤과 영향력의 부족으로 이전에 로마 카톨릭이 누렸던 지위 그리고 그들이 황제의 총애로 확보할 수있었던 안정성과는 너무도 서글픈 대조를 보여 주었다.
선교회는 선교하는 일 외에도 연구소로도 봉사하였다. 18세기만해도 상당수의 저명한 동양학자들이 여기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나 초라한 시대였다. 1795년에 보고된 북경교회의 교인 수는 25명의 러시아인과 10명의 중국인에 불과했다.
3. 칼묵크 선교
우랄산맥의 동남쪽 고원지대에 살고있는 유랑 민족인 칼묵크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추장선출을 둘러싼 분쟁에 러시아인들이 개입함으로써 처음부터 크게 체면을 잃었다.
러시아인의 지원을 의도하고 세례를 받았던 추장후보에게 사제 한사람을 배정하여 선교하려던 수도승 니코딤 렌키이비치(1673년생)의 노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된 칼묵크족에게 정착지를 제공하려는 노력도 결국 허사였고 유목을 좋아하는 그들이 러시아 생활방식에 젖어 이중적 생활을 하는 라마교도적 모습을하고 있다는 것이 1780년 주임 신부 추보브스키가 보낸 보고의 내용이다.
4. 볼가강 중류지역 선교
이 지역의 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보상과 호의의 결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표면상 성공적이었다. 피오트르대제는 세례받은 자들에게 군복무를 면제하는 특권까지 추가하였다. 1701년에서 1705년까지 3,638명의 체르미스족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들이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이 1730년대에 밝혀졌다. 그것은 세례자 명부가 정확히 작성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혜택이 제공될 때마다 그 혜택을 받을 마음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세례를 두세번씩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 선교는 카잔의 정력적인 총주교 루크 코나세비치(1738-55)의 재임기간에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가 세운 "새 신자의 사무소"의 보고에 의하면 1741년에서 1762년 까지의 20년간에 추바쉬, 체르미스, 오스티아크 및 그 밖의 부족에서 430,550명이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단 한명의 이교도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무슬림을 신앙하는 타타르족은 감언이설과 위협을 다같이 거부하였다. 세례받은 사람은 8,310명에 불과했다.
5. 동 시베리아 선교
1682년에 13명의 선교단이 "레나와 다우리아에 있는 외딴 도시들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코사크족의 습관을 받아들여 토인들을 사서 세례를 준 후수도원 토지에서 농노로 일하게 하였다. 그래서 몇교회가 생겨났다.그러나 이 선교사들을 대치시키는 후속 지원이 없어서 1733년 첫 번째 선교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1727년 이르쿠츠크가 독립교구로 승격되었고 첫 감독인 인노센티 쿨치스키가 4년동안 재임했으며 1805년 교회는 그의 남긴 거룩한 인상을 기려 성인으로 공인하였다.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인물은 시릴 바실리에비치 수카노프(1741-1814)였다. 이 평신도는 전생애를 다우리아의 퉁구스족들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유목민들의 사이를 쉴새없이 오가며 그들의 진정한 사랑을 얻어 1776년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신앙뿐 아니라 농업과 수공업의 기술을 가르치고 좀더 정착적인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또 자신의 직함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그는 이르쿠츠크에가서 미카엘 미트케비치 감독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자신이 선택한 땅으로 돌아와 헌신하였다.
6. 캄차크 선교 : 거의 발견 당시부터 캄차크 반도는 군사 기지와 유형지로서 사용되었다. 최초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거한 사람은 대수도원장 마르티니안이었으나 1717년에 살해되었다. 캄차크반도의 진정한 사도는 이오아사프 초툰세브스키였다. 초기는 평판나쁜 러시아인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반도를 선교사들이 둘로 나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2년후에 보고서는 토착 그리스도인들의 수준이 러시아인 이주인보다 높다고 되어있다. 1748년 11,574명의 교인수를 보고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착지로 생각되는 그 지역에 특별한 선교활동이 필요치않다고 보고했다.
주민의 반란으로 수도사 1명, 학생1명, 목사2명이 희생되었다. 1766-7년 겨울에 천연두 전염병으로 4명의 사제를 포함하여 주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이때에 교회가 입은 타격은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충분히 치유되지 못했다.
7. "아메리카" 선교 : 1728년 덴마크 태생의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이 정확한 판단을 가지고 아직도 자기이름으로 불려지는 그 해협을 건넜다. 알류우샨 열도는 1743년에 발견되어 1766년에 러시아 영토로 병합되었다. 1770년에 러시아 상인 셀레코프가 이섬으로 무역선을 파송하였는데 기독교 선교사업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이 평신도의 기업적 모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787년에 셀레코프는 상원과 교회 회의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이 응락되어 대수도원장 이오아사프 볼로토프가 4명의 수도사와 2명의 집사와 2명의 평신도 수도사를 대동하고 1794년 1월 24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였다. 기독교에 대단히 우호적인 그들이 한 겨울 세례받은 사람의 수가 코디아크 섬 한 곳에서만도 6천명이 되었다.
1796년 보고된 그리스도인 숫자는 1만명에 가까웠으며 선교사업은 아메리카 본토까지 확대되었다. 1797년 4월 10일 이오아사프는 이르쿠츠크에서 감독으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돌아가던중 배가 침몰하여 부풀었던 소망은 성취되지 못하였고 그 후 몇 년동안 보드카 술과 질병이 알류우샨의 단순한 백성들을 크게 괴롭혔다.
러시아의 확장 과정은 책략과 위압, 뇌물과 영웅적인 열성, 그리고 사도적인 단순성과 즐겨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려는 정신이 이상하리 만큼 혼합된 역사였다. 2세기에 걸친 수고의 최종적인 인상은 러시아 교회가 아직도 중세에 속해있다는 아니면 그보다도 더 옛 시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 혼돈스러운 시대의 혼란과 어두움으로부터 19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취의 일부가 솟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종교 개혁의 프로테스탄트 세계는 선교에 대해 생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생존이 보장될 때까지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1685년 루이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함으로 말미암아 신교도들의 생존은 다시 위태로워졌다.
또 그들은 상호간 신학적 차이를 극복하기 보다는 어디에서나 명예스럽기는 하지만 맹목적이고 무모한 열성을 가지고 끝없이, 완고한 루터파 대 필립주의자, 루터파 대 개혁교회, 예정설의 칼빈파 대 아르미니안파, 앵글리안 대 청교도와 독립파등으로 분열하여 논쟁을 일삼음으로 정력을 낭비하였다.
이런 내면적 약점 말고도 유럽 이외의 광대한 세계와의 접촉을 갖고있지 못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해양로를 완전 장악하여 정치적 종교적 제국주의를 수립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더욱이 독일인들의 활동은 대부분 국내에 제한되어 있었는데 Cuius regio, eius religio 즉 그의 영토안에서 만 국가일과 식민의 영적 안녕을 통치자가 책임진다는 지리상의 테두리 속에 완전히 폐쇄된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17세기에 와서 영국과 화란이 대 해상세력으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기류의 변화는 대단히 느리게 진척되었다. 17세기말 로마 카톨릭의 논객이었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네는 참된교회의 18가지의 특징중에 그 교회의 선교 활동을 포함시키고 선교활동이 전혀 없던 프로테스탄트를 힐난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자신들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하였다. 세계에 복음을 꾸준히 전파하여 나아간다는 사상은 루터에게 낯설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글에서 모든 가능한 증거를 다 모은다 해도 너무나 적은 양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 게르하르트는 아드리안 사라비아 와의 논쟁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사도들로 끝났으며, 이미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게 재차 복음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16세기에도 희미하나마 세가지점에서 선교사업의 출발을 내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푸스 바사가 1559년 이후 자국의 북쪽 변방에 아직도 이교도로 남아있는 랩족에 대한 선교사업을 장려했다. 독일 귀족 한스 웅나드 본 존넥크가 중심이 된 한 그룹이 남 슬라브어로 된 책들을 보급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원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577년부터 1581년까지 콘스탄티노풀에서 지낸 벤첸슬라우스 부도비츠 본 부도바는 1614년에 체코어로 쿠란에 대한 비판서를 폈으며 한 명의 투르크인을 개종시킨 것으로 보고 되었다.
개신교회의 선교는 영국과 화란의 상업적인 모험의 성취로부터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기 시작한다. 세계적인 천재 휴고 그로티우스는 극동지방을 항해하는 화란 선원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의 개설서인 [ 기독교의 진실성(1627) ]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1622년 화란의 동인도회사에 의해 레이든 신학교가 설립되어 1633년까지 12명의 목사를 교육시켜 당시 화란령인 인도네시아와 실론에서 봉사케했다. 화란의 선교는 로마 카톨릭의 방식을 그대로 좇았다.
화란의 목사들은 동양에 거주하는 화란인들의 영적 안녕을 보살피는 공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토착인들의 개종을 위해서도 일했다. 17세기말 화란은 자바에서 10만, 암본에서 4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종자들의 신실성에는 개선의 여지가 상당히 많았다.
1688년 신약성경이 말레이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동남아의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1624년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인수한 대만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려는 진지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쳉쳉-쿵(鄭成功)이 거느린 중국 해적들에게 화란이 쫓겨나고 시도는 허사로 끝났다.
한편 영국에서도 식민지의 원주민에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고 1583년 험프리 길버트 경에게 허가한 특허장에는 "영국민을 통하여 기독교 문화의 감화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들을 감추어 두었던 것 같다"고 하면서 가련한 이교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성공회의 노력은 성과가 크지 못했다. 이 고귀한 목적의 지속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1632년 마사츠세츠주 록스베리의 목사가 된 장로교도 존 엘리오트(1604-1690)의 경우가 최초였다.
그는 즉각 이로쿼이의 피쿼트족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개종한 인디안을 위해 "기도하는 마을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엘리오트는 "모히이칸"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1661년에 신약, 1663년에 구약이 출판되었다. 엘리오트 사후 인디언을 위해 봉사한 제일 유명한 사람은 데이빗 브레이너드(1718-47)였다. 브레이너드는 죽었으나 최고의 경건을 지향한 그의 감동적인 글에서 영감을 발견한 윌리암 케리와 헨리 마틴과 같은 사람들의 생을 통하여 그는 계속 살아있다.
1701년에는 성공회 외방 복음 선포회(Anglican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왕실의 특허장을 받은 법인 협회로 설립되었다. 35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헌신적이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다. 1735년 뉴욕주 포트 헌터 수비대 사령관의 보고를 판단할 때 적지 않은 성공이 따랐던 것 같다.
유럽대륙의 교회가 선교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한 역사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서 비롯되었다. 16세기의 "성령운동", 로마 카톨릭의 신비주의, 영국 청교주의의 개인적인 개심의 강조 이 모든 것들이 경건주의의 기원과 관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경건주의 최초의 뚜렷한 표현은 필립 자콥 쉬펜너의 [ 경건한 소원 1675 ]이라는 책을 통하여 나타났다.
그의 목적하는 바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들을 상호 덕을 세우고 격려해 주는 여러개의 그룹으로 모으려 했던 것이었다.
경건주의가 교회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할레의 치이겐발크와 헨리 플뤼차우는 유럽에서 인도에 보내진 최초의 비 카톨릭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은 현지 덴마크 주민들의 적개심, 퉁명스럽고 불쾌한 총독으로부터의 계속적인 들볶임, 유럽인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기 위해서 파견된 덴마크 성직자들의 악의, 코펜하겐의 오해와 편견들, 상류 카스트의 미움, 하류 카스트의 관심 부족, 로마 카톨릭의 모멸적인 적대감 등, 끝이 없는 어려움들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인내로 극복하며 5개의 선교원칙에 따른 선교형태가 나타났다.
1. 교회와 학교를 병행하여 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려면 그들의 글자로 기록된 말씀을 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치이겐발크는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714년 완결하였고 구약도 죽기 전 까지 룻기까지 진전시켰다.
3. 복음은 주민들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하여 전파되어야 한다.
치이겐발크는 실제로 그들 종교를 세밀히 연구하여 신랄히 비판받고 1867년에 1세기 반이나 지나 출판되었던 [ 말라바르 신들의 신통기 ] 유럽에 있는 본부에 보냈다.
4. 목적은 명확히 개인적인 개심이어야 한다.
5. 가급적이면 속한 시일 내에 교역자를 가진 인도 교회를 출현시켜야 한다.
이곳에서 선교의 기초를 세운지 3년밖에 되지 않는 1709년에 치이겐발크가 보낸 편지에는 완전한 교회 조직이 되기위해서는 선교지역의 교인 한 사람에 필히 "신품권" 을 부여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실지로 최초의 인도인 목사인 아아론이 1733년에 안수를 받았다. 1백년 선교에 안수받은 목사의 수는 고작 14명이었다. 치이겐발크가 사망했을 때 트랑크바르에는 350명의 기독교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루터교회는 남인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이었다.
오래지 않아 선교사들은 트랑크바르란 조그만한 세계에 갇혀있는 일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덴마크왕은 자기가 보내는 돈은 오직 트랑크바르의 사업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 외의 어느곳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누구의 영토냐(Cuius regio)의 원칙은 신성 불가침이었다.
이 시점에서 S.P.C.K가 나서서 다른지역의 선교사들을 지원하기로 동의하였다. 그 당시 상당히 에큐메니칼한 태도로 "영국 선교구"에서 일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여러 경우에서 자신들의 기능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본래 덴마크 국왕에 의하여 파송된 독일선교사들인데 고교회의 S.P.C.K에 의하여 인수되었고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뜻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동시에 영국 군대와 영국인 공동사회의 전속목사로 시무하고 있는 것이다.
남인도에서 48년간을 봉사한 크리스챤 프리드리히 쉬바르츠(1724-98)는 그 가운데 우뚝선 선교사다. 그는 말기에 탄조레 왕국 의 실질적 디완(수상)의 궁정의 영국 특명대사로도 출입했는데 매우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선교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여 탄조레교회는 그의 지도아래 2,000명을 가진교회로 성장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사후 당시 인도의 여러지역에서 선교사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던 동인도회사가 그들의 경비를 들여 마드라스의 포르트(Fort)교회에 쉬바르츠의 기념관을 세운 사실은 이상한 일이며 그의 은고를 입은 젊은 라자(인도의 왕) 사라보지도 대리석 기념비를 세웠다.
사실 그의 말년은 서글픈 생애였다. 유럽의 선교적 열성이 쇠퇴해지고 교회가 선교구들을 적절히 지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두가지 사건이 그의 사망직전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윌리암 케리의 벵갈 도착과 인도에서 최초로 프로테스탄트의 대중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코펜하겐 선교대학의 첫열매의 하나는 한스 에게데의 그리랜드 선교(1722-36)였다. 그는 온갖 고생을 다하여 에스키모어를 배웠으나 이언어가 기독교 진리를 표현하기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에게데가 그의 천성적인 교만을 극복하고 그의 양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 것은 1733년에 유행했던 그 끔찍한 천연두 때문이었다.
1734년 다시 덴마크에서 돌아온 아들 파울로 인하여 그리랜드 선교는 활기를 띠었고 일종의 종교적 부흥이 디스크만 일대에 일어났다. 파울은 그들과 함께 자랐기에 그들의 말을 잘했다.
1731년 친젠도르프 백작이 코펜하겐에 와서 에게데에게 세례받은 2명의 에스키모인을 만나고 그리랜드의 선교가 포기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즉각 헤른후트의 그의 신앙의 형제들을 불러 이 난국을 극복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는 후에 1737년 형제교회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았으며 그 나름의 경건주의를 발전시켰는데 십자가에 달린 구세주에게 깊이 헌신할 것과 그의 의지에 철저히 굴복하고 헌신할 것을 강렬하게 요구하였다.
1732년 8월 21일 모라비아 교회는 선교의 첫발을 내디디었다. 1733년 5월에는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그리랜드에 도착하였다. 모라비안들은 에게데의 약점을 들추었다. 에게데를 공격했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던 모라비안 가운데 한 선교사는 1740년 선교방식을 크게 변경시킨 사실과 그 변화의 경과를 기록하였다.
아프리카의 단 하나의 고립된 사례는 S.P.G선교사로 5년간 뉴 저지에서 일했던 토마스 톰손이 1751년 흑인에게 봉사하기위해 현재의 가나로 불려지는 황금해안으로 떠났다. 선교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그가 보내 영국에서 공부한 12세의 3명의 아프리카 소년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필립 퀘이크가 1759년 1월7일 세례를 받고 1765년 최초의 성공회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50년 이상을 "선교사, 학교장, 교리교사"로서 봉사한 후 1816년에 사망하였다.
미국의 경우는 당시 선교지였다. 그래도 보스톤 회중교회의 저명한 목사 코튼 메더는 할레 대학의 프랑케, 그리고 트랑크바르의 선교사들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신학자인 동시에 부흥사이며, 후에 프린스톤 대학의 총장으로 일했던 조나단 에드워드(1703-58)는 선교의 계획을 자신의 중심적인 관심으로 삼고 그것을 선교를 위한 "전세계적인 기도 협약"이라는 사상에 연관시키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이 정신이 에드워드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국 그는 이 계획을 한권의 책으로 정리했는데 이 책이 바로 "성경의 약속들과 말세에 관한 예언들에 의거하여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의 출현과 신앙부흥을 위해 특별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명한 의견의 일치와 눈으로 볼 수 있는 연합을 촉진하기 위한 소박한 시도"이다.
1748년 초판된 이책은 계속해서 재판되면서 개별 및 집단적인 기도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지평을 확장시키고 또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6. 선교의 다양성(방법론)
1. 국내선교
시골, 낙도지방 등
2. 국외선교
미전도종족 현황은?
세계 총 24,000종족이 있고 그 중 13,000은 전도 된 종족이고 11,000종족이 미전도종족으로 남아있다고 보고 있다(이슬람권4,000 힌두권2,000 불교권1,000 부족3,000 기타1,000) 미전도종족 인구는 24억이며 주로 10/40 창문 지역에 살고 있다.
-90년대 통계 현재(2004)는 6,000~8,000정도의 미전도 종족이 남아있다고 본다.
세계의 가장 중요한 종교인 이슬람교,흰두교,불교가 이 지역을 압도하고 있다.
극빈자 10명 중 8명이 이지역에 살고 있어 10/40 지역은 영적 빈곤 지역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빈곤 지역임을 볼 수 있다.
3. 문화선교
문화란 무엇인가? (What is the Culture?)
I. H. Richard Neibuhr 의 견해 (CHRIST AND CULTURE)
1) 문화의 주요한 특징
(1) 문화는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문화는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문화의 요소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하는 것이다.
- 문화는 사람들이 받고 또 물려주는 사회적 유산이다.
(2) 문화는 인간의 성취이다.
-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노력해서 이룬 것 (강은 자연, 그러나 운하는 문화다!)
- 그러므로 문화는 언어, 교육, 전통, 신화, 과학, 예술, 철학, 법률, 의식, 신앙, 발명, 기술 등을 포함한다.
- 또한 문화의 선물은 그 받는 사람 편에서 애쓰는 것이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다.
(3) 문화란 가치의 세계이다.
- 인간의 성취물(문화)은 다 어떤 목적들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 그러나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적 가치지향은 위험하다.
(4) 모든 문화의 특징은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이 구하는 문화의 가치는 단 하나가 아니다.
- 사람은 많고 성과 계층에 따라 가치가 다르기에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가 다원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2) 그리스도와 문화간의 대화에 대한 전형적인 모델들
(1) 그리스도와 문화는 서로 대립된다.
- 양자택일의 문제
(2) 그리스도와 문화사이에 근본적인 일치가 있다.
- 그리스도는 인간문화사에서 영웅,그의 생애와 교훈은 최대의 인간 업적
(3) 그리스도는 문화의 그리스도이며, 동시에 문화 위에 있다. (종합형)
- 그리스도는 문화적 열망을 성취시키고 진정한 사회 기구를 회복한 분이면서도 그에게는 문화에서 산출된 것도 아니요 문화에 직접 공헌하는 것도 아닌 무엇이 도 있다는 것
(4)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의 이중적 불가피적인 권위를 인정, 동시에 양자간의 상반성도 인정
- 기독교인들은 평생동안 서로 합의되지 않는 두 권위에 동시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긴장성 속에 놓이게 된다.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각자의 문화와 사회 안에 있는 인간을 변혁시키는 분이다. (어거스틴, 칼빈)
II. Lloyd E. Kwast 의 견해
(PERSPECT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중 " UNDERSTANDING CULTURE"에서)
문화를 조망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문화의 핵심에 접근해 가면서 이해도의 층을 시각화하는 일화성에서 온 외계인이 지구를 관찰한다는 상황을 설정해놓고 문화를 설명
1) 문화란 행동양식 ( BEHAVIOR)
- 어떤 것을 행함에 있어 양식화 된 모습(the patterened way of doing things)
- 문화는 강력 접착제와 같이 사람들을 함께 결속시켜 끊을 수 없는 연속성과 정체감을 부여하게 된다.
- 정체감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즉 행동양식을 통해 뚜렷이 나타난다.
2) 문화란 가치 (VALUES)
- 무엇이 "좋은 것 (good)" 이며 무엇이 "유익한 것(beneficial)" 이며 무엇이 "최선의 것(best)" 인가를 선택하는 것
3) 문화란 신념 ( BELIEFS)
- 문화 속에서 "무엇이 참인가(What is true)?"라는 질문에 대한 답
- 문화 속의 가치는 임의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면에 내재된 신념체제를 반영한다
4) 문화란 세계관 (WORLDVIEW)
- 문화의 가장 기반이 되는 "무엇이 실제인가(What is real)?"라는 질문의 대답
- 모든 문화의 핵심에는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신념체계가 형성되고 실제적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낳게 된다
- 타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종종 세계관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으므로써, 노력한 만큼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좌절할 때가 있다.
타문화권 교회
1. 마 28:18-20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대하여 비교적 포괄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장(Christ's Claim), 그리스도의 명령(Christ's Command), 그리스도의 약속(Christ's Promise), 지상명령의 목표(Goal of the Great Commission), 그리고 지상 명령의 성취방법(means)에 대하여 논하라.
가. 그리스도의 주장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v.18)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모든 권세를 우리 주님께서 가지고 계심을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주체가 주님이시기에 그가 모든 복음전파 사역을 주장하시며 총괄하시는 분인 것이다.
나. 그리스도의 명령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v.19-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고 가신 명령이다. 우리가 있는 곳이나, 가는곳 어디서나 이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며 본을 보여 행하게 하는 일들이 있어져야 한다.
다. 그리스도의 약속 :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v.20)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셔서 인도하시며 주관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라. 지상명령의 목표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v.19)
제자를 삼으라는 분부가 이 후에 나오는 세 분사들의 목적어가 되는 것이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며 지키게 하는 모든 것의 결국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마. 지상명령성취 방법 :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것"(v.19-20)
가서라는 것은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총칭할 수가 있다. 우리가 타문화권에 갈수도있고 아니면 아니면 국내에 있는 외국인이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저들의 주로 시인케 하며 말씀을 가르쳐 성숙시켜서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일에 주관자가 되시는 분은 우리 그리스도 주님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교회성장 학자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 제일 효과적인 단일 전도 방법
"하늘 아래서 가장 효과적인 단일 전도 방법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선교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들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교회 설립을 통하여 복음이 더 새롭게 그리고 보다 진취적인 방법으로 전파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3. 챨스 부룩(Charles brock)은 타문화권 선교사들은 적어도 세가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가. 당면 목표(Immediate Objective) : 현지인들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게 하는일이 선교사의 가장 먼저 해야할 문제이다. 복음을 통한 개종이 이루어져야 한 다.
나. 중간 목표 (Intermediate Objective) :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현지인들의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토착교회를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치, 자립, 자존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게 하며, 처음부터 스스로 자립하게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확장되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 궁극적 목표(Ultimate Objective) : 그들이 교단을 만들거나 혹은 기존의 다른 여러 교회가 서로 교통, 연합하여 서로 협력하면서 복음사업을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4. 복음전도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관심 사이
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관심은 복은 전도의 결과이며,
나. 복음전도의 수단(교량)일 수 있으며,
다. 복음전도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복음전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며 사회를 정화시키고 참된 갈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이나 가정이 있는 사회는 변화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동반자가 되어주면서 그 사회를 인도해 나가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복음 전파자들과 믿는 사람들에게 있다. 사회밖에서의 교회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의 교회가 되어져야 한다.
5. 도날도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은 교회성장의 4가지 유형
가.내적성장 : 수적 증가 없이 기존 맴버가운데서 일어나는 성장이다:a)영적으로 성장하며; b)조직적(유치부, 성가대, 청년부...)으로 성장하고; c)명목상의 신자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나.확장성장 : 교회가 가까운 이웃들로 부터의 숫자적인 성장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a) 먼저 생물학적 성장(결혼, 출산,...)을 들수 있다; b)전입 성장(이사를 통하여 타교인이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게 된다)이 있게된다; c)같은 언어와 문화권안에서의 사람들의 개종으로 확장이 될 수 있다.
다.개척성장 : 현재 교회에 있는 사람이 그 교회에서 떠나서 새로운 지역에 가서 개척하는 것을 통한 성장을 의미한다.
라.선교성장 :이것은 지리적 차이보다는 문화적 차이가 있는 타문화 선교에로의 성장을 말한다.
6. 와그너(C. Peter Wagner) 는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야할 필요 5가지
가. 교회 설립은 성서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와있는 많은 예들을 볼수가 있다.(엡1:9-10)
나. 교회 설립은 교단의 생존을 의미한다: 성장하는 교회마다 교단이 성장한다. 교회 개척 이 없이는 교단이 성장할 수가 없다.
다. 교회 설립은 새로운 지도자의 지도력을 증진시킨다: 교회 설립을 통하여 새로운 지도 자가 발굴되며 지도력이 개발되어진다.
라. 교회 설립은 기성교회의 새로운 자극을 주어 활성화시킨다: 일하는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과 교회를 자극하여 움직이며 일하게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
마. 교회 개척은 효과적이다: 피터 와그너가 말했듯이 교회개척이 복음전파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 16:18절에 친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것을 보며, 사도들과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운 것을 볼 때 교회개척이 가장 효과적인 것임을 알수가 있다.
7. 랄프 윈터(Ralph D. Winter)는 1974년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대회에서 전도의 4가지 유형
전도의 4가지 유형들은 다음과 같다:
1) E-0 :(Internal) 이것은 전도에 있어서 문화적 차이가 0 %인 것을 뜻한다.
2) E-1 :(Extension) 이것은 전도하는데 있어서 문화적 차이가 조금있는 것을 말한다.
3) E-2 :(Expansion) 이것은 전도하는데 있어서 문화적 차이가 있는데 유사성이 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시아민족들을 들 수 있다, 일본, 중국,...)
4) E-3 :(Bridging) 이것은 전도에 있어서 전혀 다른 문화권을 뜻한다. (남미, 아프리카,...)
E는 전도(Evangelism)를 뜻하고 E-0, E-1, E-2 E-3 은 전도에 있어서 문화적 차이(culture difference)를 뜻한다.
전 세계 255나라와 약 24,000 종족(말과 문화가 다른)에게 복음화 하기 위해서는 E-2,나 E-3 차원의 선교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미전도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E-2,나 E-3 의 전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파송하고 기도하며, 물심양면의 지속적인 후원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전 세계를 품는 선교의 안목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8.토착교회
복음이 전해지지가 않았던 그런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현지인들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가르킨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토착교회를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들을 할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 자치: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안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나. 자립: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이 주권안에서 스스로 해정에 대한 결정을 하며 처리하게 하며,
다. 자존: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전도하며 확장되어질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한다. 중국의 삼자교회처럼 정부에 의하여 조정되어지며 이용당하는 교회 는 토착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주권안에서 복음이 전파되어지고 회심이 이루어지고 그들만의 교회가 그곳에 세워질 때 이것을 가르켜 토착교회라고 할 수 있다.
9. 찰스 부룩(Charles Brock)에 의하면 교회개척에 있어서 4가지 필수 요소
가. 성령의 사역(슥 4:6; 행 1:8) 교회 개척은 사람의 힘이나, 노력이나, 지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나. 하나님의 말씀(롬 1:16,17; 벧전 1:23) 교회 개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기초가 되어지며,
그 말씀에 의하여(순종하여)모든 것이 진행되며, 결정되어져야만 한다.
다.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개척자, 씨뿌리는 자(딤전 2:20)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말씀(복음)을 전파할 준비된 전파자가 있어야 한다.
이에 따른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교육,후원...)
라. 토양(마13장) 교회가 개척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복음이 잘 뿌려질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잘 준비 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회를 개척하는데 있어서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그분의 때에 맞추어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10. 선교부와 현지교회 간의 관계 발전 4단계
가. 개척자 단계
현지에 교회가 없기에 전도자가 스스로 모든 것들을 해결해야 하는 단계이다. 전도로 시작하여, 성경공부 인도, 설교, 심방,... 이단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리더쉽이다.
나. 부자 관계의 단계
개척자 단계에서 전도하여 개종한 새 신자들이 생겼으며 그들로 인한 현지 교회가 생겼 다. 이제는 부모로서 어린아이들을 양육해야 할 단계이다. 이때는 명령이나 지시보다 는 자립심을 키워 주는데 힘써야 한다. 주로 선교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단계이다. 이때는 이들을 잘 키우기 위햐여 가르치는 은사가 필요하다.
다. 동반자 관계의 단계
신앙안에서 어린아이가 이제는 성장하여 성인이 된 단계이다. 이때는 서로가 동역자로서의 관계가 되어지는 것이다. 성인대 성인으로서의 태도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 단계 에서는 선교사나 선교부가 너무 간섭을 해서는 안되고 서로가 동역자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나아가서 그 들로부터 배척을 당할수도 있는 단계이다.
라. 동참자 관계의 단계
이 단계는 동참자로서 선교부나 선교사가 도와주는 단계로 변한다. 그것도 그들이 요구 할때이며 만약 그들이 싫다면 물러나 주어야 할 단계이다. 이제는 스스로가 충분히 성장한 교회로서 스스로가 지도력을 발휘하는 단계인 것이다. 현지인이 요청하면 있고 아니면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교와 토착화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문제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복음이 희랍-로마 세계에 전파되었을 때 이미 복음과 헬라문화의 만남이라는 토착화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선교 사역에 있어서 토착화의 원리에 대한 관심은 근년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주제를 다룬 책들과 논문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사상 금년(1991년)6월호는 "한국 토착화 신학 논쟁의 평가와 전망"을 특집으로 싣고 있다.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의 필요성을 보다 깊이 인식하게 된 것은 개신교 선교가 서구의 식민지 확장과 때를 같이 했으며,서구 선교사들이 서구 문명의 이식을 복음전달과 동일시한 과오와 관련이 있다. 서구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신생 독립 국가들이 되면서 탈 서구화와 민족 자존의 근거를 위해 그들의 전통 종교를 핵으로하는 전통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서구 선교사들은 떠나고 기독교는 그들의 문화의 일부가 아닌 서구인들의 종교로 간주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지의 불안을 느낀 선교사들과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I.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의 개념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란 말의 본래적 개념은 다양한 문화의 모자이크 현상을 이루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지금은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이 그 의미가 많은 변천과정을 거쳐 복음과 삶의 자리인 전체 상황과의 관계로 포괄하는 용어가 되었다.
기독교의 상황화는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곳, 기독교 역사가 오랜 서구 사회에도 그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문화와 자연환경이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으므로 변동한 상황에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상황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는 타문화권 복음 전도에 관련된 것으로 보고 논의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는 전도 방법, 성경번역,교회 정치,교회당 건축 양식,예배형태,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관습의 수용문제,다른 종교들과의 관계, 토착적 신학의 형성, 신학교육과 지도자 육성 방법,교회와 선교회와의 관계정립 등 문제들과 관계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토착화를 주로 신학의 토착화와 관련된 것이다.
II.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
선교에 있어서 토착화 문제는 복음과 문화와의 만남, 곧 복음과 그것을 수용할 사람들의 문화 전반과의 관계성 정립의 문제라 말할 수 있다.
토착화란 복음이 문화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청된다.
복음을 감정적 차원과,평가적 차원에서 정확하고도 쉽게 전달되어져 기대한 결과를 효과적으로 산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토착화라 말한다.
모든 문화는 복음 전달을 위한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누구든지 자신의 문화를 바꾸지 않고는 그 안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성숙한 제자가 될 수 있다. 타문화권 전도자들은 그 문화를 적절히 사용하여 복음 진리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수용적이고 보다 더 저항적인 문화가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문화와 우열을 말할 수는 없다.
복음의 수용성과 저항성도 늘 변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문화들 가운데는 완전한 문화도 없으며, 저주 받아야 할 아주 못쓸 문화도 없다.
인간은 주어진 사회적 및 자연적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문화로 만든다. 그리하여 그 문화러 공유하며, 전달하고, 변화시킨다. 모든 문화는 타락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죄성이 반영된다. 그러나 문화 가운데는 긍정적인 것들도 많이 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가능하게 하고 가치 체계와 어느 정도의 질서로 제공한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모든 문화에는 인간의 이기성이 만든 악한 구조와 관습들이 있다. 노예 제도,인종차별,일부 다처,억압과 착취,매음,마약,전쟁 등이 바로 모든 문화가 지닌 병적 요소이다. 복음은 이런 악습들을 정죄하며 배격한다. 그러나 혁명적인 방법이 아닌 복음적인 방법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의 토착화는 문화의 긍정적인 면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활용할 뿐만 아니라, 비인간화 시키는 악한 구조와 폐습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복음의 예언적 기능은 복음 진리를 대항하는 신념과 가치체계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복음이 비성경적인 원리와 가치를 수용할 때, 복음은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비판적인 복음의 토착화를 시도했던 아프리카에서는 이교주의와 혼합된 독립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이교주의 (Christopa- ganism)라 부른다. 토착교회가 되는 것은 이교의 원리와 가치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복음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 양자간의 관계 정립을 위해 씨름해야 한다.
III. 선교란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세계복음화가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진전될 때 복음의 씨를 지구상의 모든 문화 토양에 심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새로운 교회가 형체를 갖게 되며,갓난 아이처럼 의존적인 존재가 출생하게 된다. 선교에 의해 탄생된 새로운 교회는 그 문화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되며, 그 문화의 순수한 부분으로 여거지게 된다.
동시에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 살며,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충분히 자립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토착 교회이면서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보편적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다. 선교 사역의 열매로써 이런 토착교회들이 이 지구상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토착 교회를 통해 그들의 민족이 복음화되며, 그 교회는 다른 문화권에 그들의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원하신다. 토착교회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문화 안에 뿌리를 내려 문화 상황에 적절한 독특한 형체를 이루면서 선교 사역으로 세워지게 되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서,그리고 성령의 조명안에서 그들의 문화 상황에 적절한 성경 번역,교회 정치,예배 형태,지도자 양육,전도 방법 등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토착화 교회가 말할 때 그것을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과로 자치 자급,자전의 능력을 가진 교회를 의미한다. 백여년 전에 헨리 벤(Henry Venn,영국교회 선교회 총무)은 선교의 목표로 자급(Self-supporting),자치 (Self-governing),자전(Self-propagation)의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토양(문화,종족)에 복음의 씨를 심어 토착 교회로 세우는 것이다.
맥가브란(Danald A.Mcgavran)박사의 "교회성장"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선교의 대치할 수 없는 목표는 모든 문화권에 교회를 세우며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도바울이 보여준 선교 사역의 모본드 가능한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여러 곳으로 찾아가서 자급,자치,자전하는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바나바 또는 실라와 함께 때로는 두세 사람과 함께 선교 팀을 이루어 선교여행을 했다.
그는 지중해 연안지역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행한다. 에베소를 제외하고는 한 곳에서 2년 이상 머문적이 없다.때로는 몇 주간 밖에는 머물지 못했다. 그러나 각처에서 그가 떠날 때는 언제나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지역 교회를 이룰 수 있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3주간이라는 짧은 기간에 자치하는 교회로 세울 수 있었다. 그의 선교 사역에서 새로워진 교회들을 위하여 안디옥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에 사역자나 제정적인 지원을 요청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오늘날 여러 곳에서 수행되고 있는 선교 사역의 양상은 신약 성경적 방법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어떤 지역에서는 선교사들이 10년,20년,또는 50년 이상 일을 해왔지만 여전히 교회가 자립하지 못하고있다. 선교사들은 여전히 파송 교회에 재정적인 지원 요청과, 사역자들의 증원을 요청하고 있다.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착교회를 세우는데 실패한 요인으리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착 교회를 세운다는 선교 목표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Melvin I.Hodges는 그의 책[The Indigenious Church]에서 선교사들이 토착교회로 세우는데 실패한 원인은 여섯가지로 꼽았다.
첫째로,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지 못했다.
둘째로, 토착교회 설립 대신에 선교 센타를 세우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세째, 선교지에 선교사들이 너무 많이 파송되어 일자리를 다 차지하므로써 선교지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위치와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네째, 선교지 주민들의 심리학과 방법을 선교사들이 수용하는데 실패하고 모든 일을 자기 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다섯째,과다한 선교 자금이 들어와 그것을 의존케 하므로 영적인 약화를 초래하여 새로운 회심자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섯째, 회심자들을 너무 어리게 보았으며, 무책임한 자들로, 신뢰할 수 없는 자들로 보고 과잉보호한 나머지 그들의 활기찬 믿음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헌금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였으며, 그들도 전도지들을 활용하지 못했다.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가 선교사들을 의존하면 할수록 더 많은 선교사들과 선교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그 결과는 토착교회 발전을 크게 저해하게 된다. 선교사들은 선교지 교회들로 하여금 선교사나 선교비로 의존하기 보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므로 그들의 교회를 자립하는 교회로 발전시킬 수 있게 해야한다.
전도방법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선교사들은 전도에 있어서 토착적인 방법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인식했으며 시도했다. 서구 선교사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전도할 때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다년간의 연구경험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형성되어진 복잡한 철학적 신학적 표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아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신학적 진리를 쌓으려면 그들의 언어와 생활방식으로 표현해야만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맥가브란 교수는 하나의 재미있는 예화를 소개한다. 20세기 초엽에 어느 선교사는 불신자들이 흔히 "그리스도인이 될 때 얻게 되는 10가지 이익"이라는 전도지를 그 지방어로 만든적이 있었다. 그 10가지 요점을 모든 마을의 회중들에게 암기하게 했다. 그것은 효과적인 전도의 무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얻게 되는 10가지 이익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불신자들보다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전도 방법의 토착화이다. 그곳의 모든 농부들은 많은 자녀 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의 성적 타락이 매독과 임질 등의 성병을 창궐시켰으며,그것이 높은 육아 사망율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이잇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얻게 되는 이익에 관해 전통적 신학에는 이런 진술이 없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지역 상황에서는 그것이 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 방법의 토착화이다.
IV. 신학의 토착화가 필요하다.
토착화된 신학이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 문화 상황에 적절하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성경적인 입장을 견지해야만 한다. 만일 토착화된 신학이 세속적이며 다신교적인 사상과 너무 밀착하게 되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성경적인 혼합주의가 되고 말 것이다. 토착화된 신학은 그것이 기독교 신학이 되려면 먼저 성경적으로 건전해야 하며, 동시에 문화 상황에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수용할 수 있는 신학의 토착화는 모든 신학의 원천이 성경에 합치되며, 동시에 수용자의 생활형태와 언어로 교리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신학의 토착화는 토착화 자체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토착화를 통해 계시된 진리가 의미의 굴절없이 바르게 전달되고 쉽게 이해되며 학습과 실천에 있어서 효과적인 것이 되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학의 토착화 과업은복음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수용자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지,복음의 본질적 의미로 굴절 내지 포기하면서까지 문화화할 때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신학의 토착화(또는 상황화)의 필요성은 요청되고 있다. 신학의 토착화는 필요한 것이면서 동시에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성경적 진리를 가리울 수도 있다. 초대 교회 시대 이래로 유럽, 아세아,아프리카,기타 모든 대륙의 모든 문화권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고백해 왔다. 이 교리는 명백한 성경적 교리이며 모든 세기마다 고백되어온 전통적 교리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의 종교적 상황에 알맞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을 순전히 인간들의 저작물로만 본다.
요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귀절이 있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헬라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지, 예수님은 그같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세계의 종교 상황에 알맞게,오늘의 세속화된 지적인 구조와 사고 형태에 맞추기 위해서 유니테리안적인 용어로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는 신 의식이 뛰어난 사람이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성경적 진리로부터 떠나버린 것이다. 그것이 상항에는 적절한 것으로 보일런지 몰라도 (실제로는 인간 상황에도 맞지 않음)성경적인 신학은 아니다.
한국교회 역사 정리
1627. 네덜란드 벨트브레(Jan T. Weltvree) 일본으로 교역차향해중 제주 앞바다에 표류
1653. 하멜(Hendrik Hamel) 일본으로가던중 제주에표류 36명 제주감영에 압송
1816. 맥스윌과 홀 군함을 이끌고 군산부근정박, 조대복에게 한문성경 전 함.
1832. 7. 귀츨라프(네덜란드선교회), 충청도 고대에서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함.
1874.10. 로스선교사 첫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상인 백홍준 부친에게 한문 신약전서를 전함
1866. 9. 2 토마스선교사 대동강에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 순교함
1880. 백홍준, 기독교서적 휴대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882.10. 6 서상륜,영국성서공회의 한국최초의 권서로 한국으로 파송받음
1883.10. 로스선교사 요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출간
1884. 9.20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1884.11. 로스, 윕스터와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 12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줌
1885. 1.21 스크랜톤(Dr.W.B.Scranton)선교사(의사) 한국을 향해 뉴욕을 출발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한국 인천에 입국함
1885. 4. 5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창립
1885. 4.10 알렌에의해 광혜원 설립(국립병원으로 설립,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함)
1885.10.11 알렌 선교사 집에서 외국인 12명이 한국 최초의 성찬식 거행
1886. 5.31 이화여학교 설립.(서울 정동에서 미감리회 여선교사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설립)
1886. 6. 8 배재학당 개교함
1886. 7. 노춘경, 국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음
1887. 1.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언더우드선교사에게 세례받음
1887. 9.27 새문안교회, 로스와 한국인 신자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
1888. 4.28 금교령 법령.(천주교에 전교를 금지한다는 법령)
1889. 토론토대학 YMCA파송한 게일, 독립선교사 팬윅(Malcom. C. Fenwick) 내한
1889. 10.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 데이비스(j. h. dAVIES)목사 부부와 메리(Mary) 파송
1890. 4. 데이비스 전도하며 부산으로가던중 과로와 천연두, 폐렴으로 한국땅에서 순교
1895. 7. 3 한국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설립
1897. 5. 예수병원 설립.남장로회 한국 여선교사인 의사 잉골드에 의해서 설립 개원됨.
1897. 5. 2 고양읍교회 설립. 미국 남감리회 초대선교사 리드박사가 설립의 동기임.
1898. 9. 캐나다장로교회 그리어슨(R. G. Grierson),푸트, 맥레선교사 파송
1900. 9. 9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약젼서> 출판기념예배 드림
1901. 5.14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김창식, 김기범)
1902. 6. 아펜젤러, 목포의 번역자회의 참석차 여행중 선박충돌사고로 순교함
1906. 현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창립총회(대화회), 교단명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함
1907. 5.30 김상준 정빈 양씨가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다.
1907. 6. 감리교 협성신학교 개교
1907. 9.17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 선교사 33명모임 (한국최초의 목사 7명을 장립)
1908. 3. 1 한국인 목사 길선주 주례로 최초의 세례식 거행
1908.10. 8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1909. 7. 1 구세공보 창간.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10. 2.15 구세군사관학교 개교(한국에 개전된지 17개월만에 사관학교 개교)
1911. 3.13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 설립하다.
1911. 9. 대구 남문교회에서 열린 제5회 조선노회에서 7개노회 조직 결의
1911.12. 4 경기충청노회 성립.경성부 새문안교회에서 성립되었음.
1912. 2. 1 한국교회 주일학교 위원회 설립
1912. 9. 1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
1914. 1.19 한국 최초의 유치원 이화유치원 개원
1915.12. 7 기독신보 발행. 일제치하 교회신문 1937년까지 속간됨.
1916. 9. 2 경북노회 분립. 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 경남노회를 분립할 것을 허락받음.
1919. 2.26 한국기독교 연합공의회 조직
1919. 3. 1 삼일독립운동이 전국전국으로 전개됨
1919. 3. 1 금주동맹회 절제운동.1930년 YMCA를 중심으로 절제운동이 일어남.
1919. 4.15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발생
1922.11.20 기독교양재여숙 창립(경성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사회교육기관)
1922.11.25 기성 교단기관지 "활천" 창간호 발행
1923. 8.18 한국 YWCA연합회 결성
1924. 9.13 경기노회 충청노회와 분립
1925.10. 1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 평양신학교 부임
1926.11.14 서울에서 토마스목사 순교 60주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설립
1926. 2.18 기독교연구회(한국YMCA) 창립(서울교회 중진들이 민족운동 목적)
1928. 7.24 청년 면려회 제3회 하계대회 및 정기총회(연세대학교)
1929. 2.27 성결교회 제1회 연회가 소집되고 교회법을 제정하다.
1931. 9.11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봉헌(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추진)
1931. 5.29 기독교증험론 발행(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발행함)
1931. 6.14 한국에서 최초의 여자목사 안수(기감 여선교사들)
1933. 1.20 기독교세계 창간(기독교감리회의 교회기관지)
1934. 6.14 한국감리교선교 선교50주년기념식(배재학교)
1935.12.22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창립(최태용목사 중심으로 한국인들에 의해 조직된 교단)
1936. 5.25 천주교에서 신사참배 성명서 발표
1936. 7.19 기독교보 발행(주간으로 1936.1.14 창간된 <종교시보>를 개제하여 발행함)
1937. 4. 1 그리스도교 한국선교회 설립(내한한 존 체이스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
1938. 2. 8 주기철목사 평양감옥에 구금됨
1938. 2.12 장로교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8. 9.10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함
1938.10. YMCA, YWCA를 해산시키고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종속시킴
1938. 8.16 기독신문 발행(1942년 4월 23일까지 발행된 개신교 각교파의 연합신문)
1939.11.15 기독교문답 발행(이동욱지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발행)
1941.12.31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연합회 창립
1942. 4.29 기독교신문발행(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합동기관지)
1943. 9. 일제 주일밤예배, 삼일기도회 금지령
1944. 4.21 주기철목사 순교
1946. 4. 기독교조선성결교회 제1회 총회
1945. 8.15 일제하에서 해방됨
1945. 9. 1 출옥성도들 교회재건운동 시작, 북한장로교회 재건
1946. 1.17 기독공보 발행(기독교공보의 후신으로 1951년 부산 피난시절 복간됨).
1947. 5. 1 기독교신문 발행(초교파 주간신문 순복음을 주장)
1948. 4.20 기독교박물관설립(한국기독교박물관은 김양선목사가 교회사자료를 수집 개관)
1948. 5.31 대한민국 국회 첫 개회를 기도로 시작함
1948. 6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 개교
1951. 1. 9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창립(6.25사변 중에 조직된 국내기독교 연합기관)
1951. 9.1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개교
1952.12.15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목사 부산과 서울에서 전도집회
1953. 4.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창립총회
1953. 5. 한국선명회 창립과 함께 구호사업 개시
1953. 7.28 기독교문화사 설립(기독교 출판기관. 김성준목사)
1953.11.13 기독교어린이문화관 창립(초교파 어린이 문화사업 및 출판 사업기관)
1954.12.15 기독교방송(CBS)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으로 방송 개시
1956. 9.15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발행
1956.12.23 극동방송 개국(복음주의 연맹선교회에 의해 개국)
1956. 3.15 기독교문화 발행(기독교 계간잡지)
1957.11. 1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립
1958. 5.10 한국예수교오순절교회 창립
1958. 9. 1 국방부 군종과 발족
1958. 4.19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설립(그리스도교회무악기 선교사 체셔를 중심)
1959. 9.24 제44회 장로회총회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리됨
1960. 5. 20 기도 발행(세계문서선교회의 한국지부인 한국가정문서선교회의 기관지)
1961. 9. 1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광주시 대신동 이사무엘선교사와 Sarah Barrry선교사 설립
1962. 8.31 기독교근로전도회, 한국 설립(불우한 근로자와 불우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함)
1963. 4.28 금주의 설교 발행(기독교명설교집편찬회에서 편집. 발행)
1963. 4.23 기독교구국연합전도회 창립(기독교연합기구)
1963. 6. 3 기독교오순절협동교회연합회 창립(국내 오순절교단으로 박덕종목사에 의해 창립됨)
1964. 1.21 기독교인권옹호상담소 창립
1965. 1. 4 기독신보 발행(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 기관지)
1966. 3. 1 기독교사회윤리위원회 창립(부산기독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
1967. 개편찬송가 간행
1968. 2.24 예수교 한국독립교회 연합회 총회 창립
1969. 1.10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창립(기독교단체.기독의료인,기독실업인,교역자 주축)
1972. 5.29 군복음화후원회 설립(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영락교회에서설립)
1975. 8.31 기독교선교에 관한 서울선언 창립
1978. 2.16 기독교서점협의회, 전국 창립(한국기독교서점 연합기구)
1979. 9.15 기성 교단창립 70주년 기념회관인 "성결회관" 준공
1981. 1.29 100주년 기념사업회 규약확정 20개 교단과 연합기관 참가
1981. 4. 9 한국찬송가공회 창립. 한국 개신교 통일찬송가 사업을 위한 교파연합기관.
1983.10. 한국찬송가공회에서 개신교가 함께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 발행
1984. 8.15 한국 개신교 백주년 선교대회(여의도 광장에서 예배 드림)
1984. 8.31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개관
1986.12.10 한국컴퓨터선교회(KCM) 창립
1987. 9.28 제77차 침례교 연차 총회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발족
1988. 9. 9 제1회 한국디아스포라 세계대회(서울영락교회)
1988.12.10 국민일보 창간(1일 16면 발행)
1989. 4.28.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설립(원로목사 10여명의 제창으로 창설됨)
1989.10. 8 제1차 의료선교대회(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개최
1991.11.5-8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2. 2. 4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창립
1992. 8.15 92세계성령화대성회 여의도광장에서 개최
1995. 5.15-17 제2차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5. 5.17-25 95세계선교대회(GCOWE'95) 기독교21세기운동본부 주최로 서울에서 열림
1996. 8. 5-10 선교한국 '96(한양대학교) 1998.8.3-8 '98(부천 실내체육관)
1997. 5.30 기성 교단창립 90주년기념대회 중앙교회에서 개최하다.
1987. 8.10-13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개최(기독교사단체연합 강원대에서)
1998.12.15 기독교방송 표준 FM 개국(주파수 98.1MHz, 출력 10KW), 21 일 대전방송 개국
1999. 5. 5 침례교선교 110주년 축하집회(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1999.10.12 기독교대책위원회 단군상건립 중단요구
1999.11.30 대한성서공회 무역의 날 '수출의 탑'수상(105개언어로 전세계 성경의 20%공급)
1999.12.23-25 영적 각성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교회비전 큰잔치'(성탄절 기념행사로 열림)
2000. 8.14-18 2000년 세계선교대회 (KWMA주최 서울에서 개최)
토마스 선교사 이야기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두 차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처형된 영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사에서 '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된 토마스 선교사가 그 분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케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한 데다가 ,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와의 불화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지만, 선교회의 반응은 경멸과 적의 그리고 불신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스코트렌드 성서공회 , 윌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암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 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바로 한국선교여행을 계확하였습니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2개월 반동안 한국해안가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있었습니다. 그의 한국말과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 지면서, 프랑스 함대가 그를 통역관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함대는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면서 토마스의 한국행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땅에 도착하였습니다. 1866년 8월 16일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것입니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제너렬 셔먼호와 한국 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런 긴장 속에 제너럴 셔먼호의 발포사건과 이현익의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반감을 사면서 사태는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며칠 더 버틴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조선의 화공이 전개되었고, 배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 일행은 뭍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다.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 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헛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이 후 ,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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