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 항전(Battle of Masada)


A.D.70년대 초에 일어난 유대인들과 로마군의 전쟁.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지만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전하였기에, 이스라엘의 자긍심과 일체감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불리운다.


이스라엘의 마사다 유적지. 이스라엘의 사해(死海) 해안에 있는 배 모양의 구릉(丘陵)을 이용한 자연 요새지로 이스라엘 왕국의 파멸, 이스라엘 민족과 로마군과의 전쟁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곳곳에 공격 램프와 같은 로마 포위 흔적이 남아 있다.


마사다 항전은 A.D.70년 경에 일어난 유대인들과 로마군의 전쟁이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남부의 암층 지대에 위치한 고대 요새이다. 마사다의 높이는 해발 40m에 불과하지만 동쪽으로 인접한 사해가 해수면보다 400m 낮기 때문에 실제 요새의 높이는 440m 정도이며, 서쪽 절벽은 약 90m로 매우 가파른 난공불락의 지형이다.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방호벽은 1.3km이며 방호벽의 평균 높이는 3.7m이다. 방호벽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들이 있으며 내부에는 창고, 병영, 병기고, 궁정, 저수조 등이 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37-100)의 기록에 따르면 B.C.37년부터 B.C.31년 사이에 헤롯 왕(Herod, B.C.73? B.C.4 재위)이 반란에 대비하여 마사다를 요새화 했다. 마사다 요새가 유대인과 로마의 전쟁 무대가 되기 시작한 것은 A.D.66년이다. 시카리(Sicarii), 혹은 열심당(Zealots, 젤로트 黨)으로 불리는 유대인 저항 집단을 중심으로 로마군의 유대영토 주둔에 반발하는 무력투쟁이 발생했으며, 열심당원들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마사다 요새로 피난하여 그 곳을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다.


마사다 요새를 근거지로 하는 유대 저항군의 로마 정착촌 급습이 빈번하게 일어나 피해가 커지자 로마 총독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는 로마 보병군단인 제 10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 요새 주변에 8개의 진지를 구축한 뒤 공격을 시작했다. 방호벽을 파괴하는데 수 차례 실패한 끝에 로마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약 6천명의 유대인 노예를 동원하여 서쪽 측벽에 공격을 위한 누벽(壘壁)을 세웠다. 당시 마사다 요새 안에는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azar ben Yair)가 이끄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들이 남아 항전의 의지를 끝까지 불태우고 있었다. 풍부한 물과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로마군의 집요한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A.D.73년에 누벽이 완성되었으며, 약 3개월간의 공략 끝에 A.D.73년 4월 16일 마사다 요새의 성벽이 무너졌다. 마사다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적의 노예나 포로가 되느니 자결할 것을 호소했으며, 이에 동의한 저항군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결국 마사다에 입성한 로마군은 936구의 시신만을 보게 되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 뿐이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서 마사다 항전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1965년부터 1963년 사이에 독일계 이스라엘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의 마사다 유적 발굴 결과 요새 내부에는 저항의 흔적과 참수된 유골 및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마사다 유적은 유대인의 저항정신을 반영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사다 요새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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