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과 구약 중간 시대의 중요성

 

{1}.시대 개관 (BC.430년경 이후)

1).말라기 선지자의 예언(BC.430년경) 이후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까지 의 400년 동안은 침묵의 시대라고 묘사 되어진다

2).그러나 사실상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사건으로 들끊었으며 결코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다

3).400년동안에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고 구약의 완결된 것으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이시기에 후기 유대주의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부여하고

   그리스도의 도래와 복음선포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1.바사시대 (BC.538년경-BC.330년경)


1).페르시아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생활은 비교적 평안한 편이였다

고레스 황제가 예루살렘으로 귀국과 성전 재건을 허락함에 따라 일부 유대인들은 귀국하였다


2).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방해에 부딪히기도 했으나 그들은 다리오 대제 때에 성전 재건을 끝마쳤다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 봉헌식. 6:13.)

학사 에스라와 평신도였던 느헤미야가 유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을 다할것을 독려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를 굳건히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느헤미야 이후에도 약1세기 반동안 페르시야제국이 유대를 통치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체 자신들의 종교와 제사를 지킬수 있도록 허락받고

   있었다

이때 유대인를 다스린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진 대제사장이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사제직분과 정치적 공직의 겸임은 가까운 미래에 이것을 둘러싸고 일어날 무서운 암투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제사장직을 이에 놓고 시기와 음모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요야다의 아들 요하난 (12:22)이 성전 경내에서 자기 형제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2).므낫세 대제사장 탈락

얏두아 대제사장 (BC.395년경-BC.370년경)

므낫세 (얏두아 동생 이방인과 결혼문제로 탈락)BC.370년경-BC.354년경

요하다의 아들 요하난은 대제사장직(BC.355년경-BC.330년경)을 계승했는데

 

3).사마리아 그리심산의 성전을 짓게 된 동기

요세프스에 의하면 얏두아 동생 므낫세가 사마리아 의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이유로

므낫세가 이방여인과 결혼 때문에 제사장직을 물러날 것을 종용받자

그의 장인 산발랏이 그림신산에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 만한 새 성전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이무렵에 사마리아 성전이 그리심산에 세워졌었다

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시온산 보다 그리심 산은 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심산 성전 보다 그리심산을 더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리심산의 성전은 하스몬왕가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경에 의해 파괴(BC.134년경-BC.104년경) 되었으나

그림신산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사마리아인이 성역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인 자기들의 성역에 예배처가 복원될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했으나 구세주께서 예배처보다는 예배의 영적태도가 .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바 있다 요4:20.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산발랏이 느헤미야서 4:1.에 기록된 사람과 동일 인물일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히 이즈음에 그리심산에 성전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하는 믿을 만한 전승을 요세프스의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다

   

4).페르시아가 그리스 침략전쟁에서 실패하자 피정복민들은 독립을 쟁취하려고 동요하게 되었다

이집트가 끊임없이 페르시아의 멍예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온 반면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에 끼여 있는 유대는 예속을 면치 못했다

아닥사스3세 때 많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대한 투쟁을 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 정부는 이들을 바벨론과 카스피해 남부 연안으로 유배을 보냈다

한편 이단의 유대인의 망명자들 속에 끼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들은 나일강의 동쪽 평야에 위치한 다바네스에 피난처를 구했다

또 다른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 BC.5세기때 유대인들) 이주민의 행렬이 계속되었다

   현제 에스완 근처인 엘레판틴 섬에는 유대 용병들이 모여사는 집단 거주지로 형성되었다

이들 주민들을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으며 그들 조상의 여호와 신앙를 어기고 자신들의 성전을 세웠으며 그들 조상의 여호와 신앙에다

   이방적 요소를 혼합하였다

사마리아인 들과도 교제를 가졌다



2.알렉산더 대왕 시대 (BC.334년경-BC.323년경)


1).헬라문화의 영웅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도 대제는 마침내 단순히 권력만 광분한 독재자는 아니었다

아리스톨레스의 제자인 그는 헬라 문화의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페르시아군대를 격파하고 거기에 주둔하였다

그후 사마리아와 팔레스타인 남쪽을 통일하여 이집트로 옮겨갔다

두로와 가사가 각각 완고한 저항을 하였으나 그러한 저항이 알렉산더의 파죽지세를 꺽을수는 없었고 그의 군대는 승전의지를 드높일 뿐이였다

대제사장 얏두아 시대에 헬라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되리라는 다니엘서 예언 (8)은 정확인 실현 되었다

   

2).알렉산더의 유대인 우호적인 정책

역사가 들이 세세히 말하지는 않고 있으나 유대인과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사이에 퍽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율법을 지키도록 허락 하였을 뿐만아니라 안식년에는 조공을 면제하였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될 때에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다른 정복민들과 구별되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3).알렉산더 헬레니즘의 문명과 문화정책의 생활 혜택

이집트에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압제로부터 구출해준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그의 군대는 승승장구를 울리면서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다시 되 밟아올라가 전쟁에서 동진하여 인도의 편잡지방까지 정복해 나갔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승리려니와 알렉산더가 중동에 끼친 유산등 통치 방식보다는 헬라문화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제국의 각지방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도시들은 헬라의 문화를 좇아 생활질서를 전체적으로 갱신시키는 모델이 되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볼때 도시 건설이란 곧 생활방식을 헬라적으로 변화 시킬 웅장한 공공의 건물과 체육관 . 야외극장 같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사람은 헬라식 이름을 갖게 되었고 헬라화 되어 갔던 것이다

헬레니즘의 물질적 측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매혹적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교역과 상업이 새로운 상인 층계에 부를 안겨 주었고 학자들은 도서관과 학교의 설립을 환영하였다

   

4).헬레니즘 문명으로 인한 유대인들의 신앙의 도태.

높은 수준의 주거 방식과 생활이 사람들에게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다가 주었다

   다른 모든 곳에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들도 헬라문화의 이 겉모습을 만족하였고 그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바벨론 유수이전 시기에 있어서 우상숭배가 이슬라엘에게 장애물이 되었었다면 헬레니즘 이야말로 유수이후에 이스라엘 에게는 가장 유혹적이었다

오늘날 고도의 문명으로 기독교가 향락 물질에 도취되여 신앙관 타락함을 이미 헬라시대에 그 면모를 이미 보여주는 고대시대의 문명이 되었던것이였다

이당시 헬라문명의 도취가 얼마나 영적 침체을 하는지를

   앞으로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헬라문명을 그리워하며 타락하는 장면이 연출 된다

바벨론시대에 있어서 포로 압정당시 우상숭배을 강제로 탄압함으로 이스라엘에게 많은 고통과 장애물이 되었다면 헬레니즘이 자유로운 선택은 많은 유대인들로

   호응과 유혹을 받음으로 헬레니즘을 지향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만들어지기 까지 했다  

 

5).헬레니즘 철학과 성경과 혼합하려는 움직임의 타락상

BC.3세기의 한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마케도냐의 지배를 거치면 갖게 된 이들 이방 민족과 접촉으로 많은 전통적인 유대 종교 의식과 그 전통적인 본래성을 잃어버렸다

많은 유대인들이 헬라식이름을 가졌고 신비한 헬라 철학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초석의 신앙과 헬라식 철학적 지혜를 혼합하려고 하였다

(오늘날 성경을 고대와 철학과 혼합하여 연구하는 과정을 미국의 어느 신학과정을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적이 있다)

(이미 고대 헬라시대에 있었던일을 오늘날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세태에 정통의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에 저항하여 율법을 폭넓고 깊게 연구하기로 하였다

 


3.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BC. 320년경). (바벨론에서 33세로 요절하였다)


1).향후 수년동안 근동의 미래 정세는 불확실하였고 그의 장군들인 네명들은

영토 분쟁에 들어갔다

카산더 장군은 마케토니아 헬라지역을 영토을 통치하게 되었고

루시마쿠스 장군은 트리기아와 아시아 지역의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이들 두장군은 제외 된다)


2).그러나 이스라엘을 위시한 이집트와 시리아(바벨론과 페르시아 지역)을 통치할

나머지 두장군들은

이집트 을 통치할 프톨레미 장군이 남방을 통치하게 되었고

시리아을 통치할 셀류쿠스 장군이 북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3).남방왕 프톨레미왕조와 북방왕 셀류크스 왕조 끊임없는 전쟁사 (BC.250년경 시작됨)

헬레니즘의 물결이 더욱 고조될 BC.250년경 이후무렵에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의 계보간 원한관계와 영토와 권력이 맞물려 서로 쉴틈없이 싸워지만

반면에 그들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사명에 대해서는 완전히 일치 하였다

역사가 타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세상을 너무 변화 시켰으므로 그의 후대에 가서는 아무것도 그 이전처럼 될 수가 없었다의미 신중한 말이다

문명은 발달되어서는 좋으나 지난 좋은 것은 찾을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문명으로 피폐된 인간사에 대해 바라본 시각을 이미 헬라시대에 알고 있었다

   

4).남방 프톨레미 왕조와 북방 셀류크스 두왕조

처음에는 BC.320년 프톨레미 장군은 남방인 이집트을 통치 함으로 먼저 정착하여

프톨레미 왕조를 세운반면 이집트에 안정된 경제의 뒤바탕으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된다

뒤늦은 셀류쿠스는 시리아을 장악하지 못하여 이집트에 기거하다 옛날에 동료인 프톨레미 도움을 받아

.BC.311년경 시리아을 장악함으로 북방왕으로 셀류쿠스 왕조로 등극한다

BC.250년경 두제국의 정략결혼의 파극으로 시작된 두왕조는 멸망할때까지 전쟁으로 일관한다

  

 

4.프톨레미 왕조 시대 (남방왕 BC. 330년경-BC.80 년경)

(프톨레미 알렉산더 10BC.80년경에 프톨레미 왕조는 이집트에서 끝이 나다)

 

1).프톨레미 (이집트) 정세

알렉산더가 죽은후에 유대는 처음 얼마동안 알렉산더 장군중 한사람인 안티고누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곧이어 해방자라는 뜻의 이름인 소테르라 불리는 다른 장군인 프틀레미1세가 통치하게 되었다

프톨레미 1세는 BC.320년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는데 이집트에 왕국의 중심을 둔 그는 유대인들을 아주 퍽 호의적으로 다루었다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였으며 이 도시는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사상의 중심지가 었다

프틀레미 필라델푸스 2(BC.250년경)치하때 알렉산드라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헬라여로 번역하였다

이번역은 후에 70인역이 알려진것인데 이것은 히브리어 경전을 헬라여로 번역한기위해 유대에서 70인역(정확하게 각지파로부터 각각 6명씩 도합72)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2).유대의 정세 (남방왕이 유대을 통치 하던 시대상 BC.320년경-BC.196년경)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프톨레미 왕조시대에도 번영을 누렸다

이집트의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기는 했으나 지방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통치 이레로 계속하여 대제사장 책임하에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시대에 유대인 중 가장 위대했던 인물은 의인 시몬이었다

그는 그의 형제 가운데서 높으심이여 그의 백성의 영광중에 크시도다 라고 외경의 집회서에서 지극히 찬양되고 있다

그를 프톨레미1세때에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으며 가뭄과 포위속에서도 급수를 가능케 할수로 시설공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시몬은 이러한 대제사장으로서 명성과 함께 고대 유대주의의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되어졌다

그가 즐겨 암송했던 격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세상은 율법과 성스런 봉사와 자비. 이 세가지에 의존하고 있다

 

4).혼란기시대에 대제사장에 대한 이모저모  

(시몬의 인물)

그러나 의인 시몬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역사적문제로 남아 있다

시몬1세인지 시몬2세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유대전승과 설화에 전해지는 의인 시몬은 이 두인물 중 하나일것이다


( 도비야가 내력 )

프톨레미시대에 제사장 가문이었던 오니야가와 도비야가 사이에는 경합있었다

도비야가 친이집트였고 상류층계층을 대표했다

이 도비야가는 느혜미야를 몹시 괴롭혔던 암몬사람 도비야가와 관련되기도 한다2:10:4-3, 7:6-1)

프톨레미2세때(BC.250년경)의 한 파피루스 문서(두루마리 문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도비야라는 유대인은 요단 동편 암몬지역에 주둔했던 프톨레미 군대의

   기병대장이었다

현대에 이르러 고고학자들이 중앙 요르단의 아락엘엠 밑에서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은 BC.3세기 때의 거대한 능묘를 발굴해 낸바 있다

도비야가는 신약성경에의 세리와 같은 직무를 행하는 세관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오니야가 대제사장직 직위 해제)

요세푸스는 오니야2세가 프톨레미4(BC.230년경)에게 대제사장이 바쳐야 할 조공 애 액수인 은 20달란트지불을 거부하였다고 기록한다

이거절로 인하여 오니야나 대제사장은 포톨레미야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게 된듯하다

 

(도비야가 대제사장직 )

이후 도비야가 출신인 요셉이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세관직을 맡았다

   요셉은 수세관직 해마다 (세금을 거두어들일수 있는) 자격권을 갱신 받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다녀 와야만 했기에 프틀레미왕조에 연결 될수있기에 대제사장직에

   오를 계기가 된 것으로 본다

도비야가 요셉은 프톨레미 시대의 20년동안 이 영향력 있는 직위를 계속 누렸다  

 

5).혼란기의 유대 대제사장들 (알렉산더 시대부터 마키비 혁명시대까지)

시몬1세로 (BC.320년경전후) 위대한 대제사장 은 3세기 중엽에 생존했고

시몬2세는 (BC.280년경 전후)에 실존 했다

오니야 가 (BC.250년경 전후) 프톨레미3. 이후프틀레미4세와 조공문제 발생

도비야가 요셉(BC.210년경 전후)프톨레미4

시몬 오니야3(BC.190년경전후) 프톨레미 5

야손 (BC.180년경 전후)북방왕 안토오쿠스4세 뇌물로 대제사장자리을 사다

메델라누스 (BC.170년경-BC.160년경 전후)베냐민 지파로 친헬라파 북방왕을 매수 뇌물로 대제사장자리를 사다

   (마카비 혁명에 책임을 물어 알키무스가 메넬라누스 처형 시킴)

마카비 혁명(BC.160년경 전후)

알키무두 (마카비 혁명에 가담한 정통파 유대인들을 설득 처음 약속을 어기고 처형 시킴)

요나단 (BC.150년경전후)마카비혁명 제 2인자로 외교 정책으로 대제사장자리 오르나 반열 문제로 추종자가 살해함

시몬 (BC.140년경 전후)마카비혁명 유다의 마지막 형제로 정세로 인한 이스라엘 독립을 이룩하여 대제사장 자리에 오르나 그도 반열이 아님 자신의 사위가 반란으로 두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 다

 


5.셀류크스 왕조 시대 (북방왕 BC.311 년경-BC.129 년경)


1).시리아의 통치자들은 셀류키드라고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알렉산더 제국을 계승한 국가중의 하나인 그들이 왕국이 세루크스 니카론 1세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초기 지배자들을 대부분 셀류크스나 안티오쿠스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들은 오론데스강의 안디옥을 그 수도권으로 삼았다

대제라는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3세는 BC.199년경까지 이집트와 수차례의 전쟁을 치루어 한번도 승리한적이 없는 북방은 그동안 프톨레미인 이집트로부터

   통치했던 팔레스타인을 그해에 처음으로 북방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게 됐다

요단강의 발원지인 파니온 근처의 전투에서 북방이 승리한 결과 였다 이사건은 유대 역사에 새롭게이루어 놓았다

 

2). 북방이 유대에 대한 통치 방법(BC.197년경-163년경)

그 이전이 남방의 프톨레미 왕조가 유대관습과 전승에 포용적이며 관용적이었던 반면

북방의 셀류크스 왕조는 유대에게 헬레니즘 문화을 아주 강압적으로 이식시켰던것이다

안티오쿠스 3세때 (BC.197년경 ) 팔레스타인및 유대을 처음으로 정복하게 된다

초기는 정치적탄압 중엽에는 종교적 탄압 정책을 하였다  

 

3).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BC.175년경-BC.163년경)의 시대상

북방왕으로 등극하자 팔레스타인이 그의 통치함에 들어감에 따라 유대 역사상 유래없는 신앙의 탄압의 폭정이 시작된다

그는 유대내에 남방시절 친헬라파 유대인을 규합하여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

그 당시 남방때부터 유대을 다스려오던 대제사장 오니야3세는 의인 시몬의 후손으로 정통파 유대인으로 대제사장 이였다 (마카비 혁명으로 북방왕 에피파네스 4세는

   무너진다 )( 안티오쿠스 10BC.139년경-BC.129년경 셀루쿠스 왕조는 끝나다 )


4).친헬라파들의 헬라 문명으로 신앙의 도태

그러나 헬라 문화을 지지하고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남방왕 프톨레미의 시대에는 온유정책으로 유대안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가 북방왕으로 통치권이

강압으로 바뀌자 친헬라파 들은 북방왕의 군대 권력을 이용 그들에게 데제사장 자리를 뇌물로 사서 친헬라파들이 유대의 정권을 장악한다


5).헬라파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의 직임을 매석 매직의 사건

북방의 안티오쿠스4세가 유대를 강압 통치하자 북방에 붙어서 친헬라파 유대인들은 오니야3세을 반대하고 헬라파 유대인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지지하고 친헬라파

   세상을 만들었다

야손은 거액의 뇌물을 안티오쿠스에게 주어 약속의 댓가로 오니야3세을 제거하고 야손이 대제사장직에에 오르는 성과을 이룬다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이 대제사장직을 정치적 직임으로만 생각한데 반해

경건한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것이 그근원(모세때)에서 부터 신성한 것이며 돈을주고 그직무 매매하는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것이라 생각하며 불만스러워 했다

야손은 북방왕으로 대제사장직의 직위를 받고 헬라 문화를 장려하였다

경기장에 예루살렘에 지어지고 좋은 문명을 받아들임으로 문명에 안락함에 취하여 히브리어 이름을 버리고 헬라의 이름은 흔한일이 되어 버렸다

히브리적 정통주의는 시대에 뒤진것이라 매도하며 반 계몽적으로 헬라 문화을 옹호하며 새로운 문명으로 인하여 종교의 도태의 길이며 영적 쇠퇴의 길을 택하게 됐다

 

6).이러한 물질 문명의 죄악으로 율법을 떠나는 또한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헬라파 유대인의 야손 대제사장의 친한 친구의 한사람인 메넬라우스가 등장한다

야손이 뇌물로 대제사장자리을 사는것을 보고

헬라주의자인 베냐민 지파의 메넬라우스는 베냐민 지파인데도 불구하고 야손보다더 더많은 돈과 뇌물을 안티오쿠스4세에게 지불하여 야손을 밀어내고 대사장직에

   임명되게 된다

 

7).야손과 정통파 유대인의 반란

야손이 대제사장직에 되었을때 소요했던 정통파 유대인들과 합세하여 대제사장직을 맡을수 없는 베냐민 지파의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직에 임명되자 더욱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

야손은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회복하기위해 군대을 일으켰고 정통파 유대인의 도움을 청했다

 

8).메넬라우스의 북방군 요청으로 이스라엘 진압과 재점령

메넬라우스는 북방의 안티오쿠스에게 병력요청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당시 이집트 남방과 대치하고 있었던 북방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효과적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 적이였다 (북방의 군사기지로 필요)

안티오쿠스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은 공격하기로 은밀한 계획을 세웠다

안식일에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했다

마침네 북방왕 시리아 군대는 유대을 점령하고 메넬라우스에 적대하는 세력들을 대량학살하였다

도시의 성벽들이 파괴되었고 새로운 북방의 요새인 아크라가 성채에 건조 되었다 

 

9).안티오쿠스4세 유대 종교 말살 정책 (성전과 각산성에 이방신 상 세움)

안티오쿠스는 정통적 유대 신앙의 자취를 일소해버릴 결심을 하게된다

이스라엘 의 하나님이 제우스의 이미지와 동일시 되었고 턱수염을 기른 이방신상(안티오쿠스와 같은)의 제당에 돼지가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행하는것과 안식일이나 유대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금지 되었다

또 성경을 필사하는 작업및 모든 율법의 준수는 잔혹하게 탄압되어졌다

심지어 엘르아살이란 나이 많은 서기관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매질을 당하여 죽게되었다

군대 힘으로써 메넬라우스는 대제사장직을 유지했으며 친 헬라파 들은 승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친헬라파들은 지나치게 극단에 흘렀으며 옛 질서를 폐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그들의 자신의 타락을 증명하는것이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게 수동적으로 죽음만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은 아니었다

 

 

6.마카미 혁명 BC.167년경-BC.142년경 (맛다디아 아들들 유다.요나단.시몬)

 

1).북방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4세의 폭정에 항거하기 위하여 BC.167년경- BC.142년경 마카비혁명이 일어났다.

박해 받던 유대인들이 기다려오던 영웅은 오래지 않아 나타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의 사자들이 예루살렘에서 24KM 가량 떨어진 모단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때 그들은 전례대로 마을의 제사장 맛다디아가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려

   유대 백성에게 본을 보여줄것을 바랐다

맛다디아가 이를 거절하자 겁이 많은 다른 유대 백성이 이방신 앞으로 나와 제사를 드렸다

격노한 제사장은 제단에 다가가 그 배교한 유대인과 안티오쿠스 사자를 살해했다

맛다디아는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이방제단을 부숴버린후 체포되는것을 우려해 고원으로 피신 그후 정통유대 주의 를 추종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맛다디아 일가에

   합세하여 헬레니즘 편승한 유대인들을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폈다

한편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도무지 싸우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군사적 약점을 노출하기도 하였다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방어조차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으로 학살 당하기도 하여 맛다디아는 안식일에 자기 방어를 위해 교전하는것을 허용될수있다는 새로운

   방침을 세우기도 했다

맛다디아는 혁명초기에 곧 사망하였다 그는 자기의 셋째아들 유다를 지도자로 추대할 것을 추종자들에게 명하였는데 그 셋째아들이 마카비(쇠망치)로 알려진 유다였다

아마도 이선택이 퍽 훌륭한 것이였던지 더 많은 유대인들이 나날이 규합되어졌고 시리아군을 댕항할 자체 군대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유다는 기습을 감행하여 엠마오에서 시리아 군과 친헬라파 유대인을 패배 시켰다

그는 노획물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갔다

마카비는 아크라를 제외한 전도시를 점령하게 되었고 성전에 들어가 거기에 설치 되어있던 이방의 모든 우상들을 제거해 버렸다

제우스에게 바쳐졌던 제단을 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릴 새 제단을 세웠으며 제우스 신상은 산산히 부수어졌다

기슬래월 25일에서 시작하여 8일간 계속되는 이봉헌 축제는 하누카 라고 하는 히브리어 광명제의 시초가 되었 이렇게 해서 성전은 모독 당한지 3년만에 다시

   회복되었다


2).BC.165년경 엠마오 전투 승리

맛디아가 죽은 후에는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an) 가 등장하는데 그는 게릴라 전투의 명수로 BC 165년 엠마오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다.


3).BC,164년경 수전절 (10:22.)

그가 첫 번째 로 한 일은 북방왕 안티오쿠스4세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케 하고, 성전을 여호와께 다시 봉헌한 것이다(BC 164).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시절 어떤 한 유대인이 Napten(성전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살려두었다가

마카비가 성전을 회복한 후에 그 불로 성전을 다시 밝히게 되었는데,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바로 수전절(The Day of Purification)이다.


4).북방군과 마카비군의 전투

그러나 평화는 짧았다

시리아 장군 루시아가 예루살렘 근처의 전투에서 마카비 군을 격퇴시키고 예루살렘도시 전체를 공략하였다  

그런데 포위도중 본국에서 위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게 도자 루시아는 유대인에게 화친을 제안했다

유대주의를 고수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들이 철회되었고 유대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5).온건파 헬라파 알키무스 대제사장 임명

메넬라우스는 제거 되었고 그대신 온건한 헬라주의자인 알키무스가 대제사장에 임명 되었다

시리아 장군 루시아은 유다와 추종자을 벌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은 파괴해 버렸다

마카비 군의 장군들을 포함하여 존경받는 서기관과 장로들과 구성된 회의가 향후의 행동방향을 결정짓기위해 소집 되었다

 

6).마카비의 화친 협상 반대와 마카비는 도시를 떠나다

이때에 마카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친이 받아들여 졌다

알키무스는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메넬라우스는 사형을 당했다

유다는 그의 추종자와 함께 도시을 떠나 버렸다

 

 

7).알카무스 대제사장의 협약 파기

한편 마카비 유다 가 염려한것이 적중하였다

알키무스 대제사장은 북방의 장군의 약속과 달리 정통파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8).마카비 유다의 전사 ( BC.160년경)

충성스런 정통파 유대인들은 유다에게고 다시금 전향하여 시민 전쟁이 재게되었으나 장비도 거의 갖추 지 못한 800명의 군대로 수많은 시리아 군대를 맞아 교전하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카비 혁명의 제일 국면이 끝나게 된다

(마카비혁명 주역)


맛다디아 제사장(최초의 전투중 사망) 과 그의 아들 들

마카비혁명.


유 다 : --게릴라 전투의 능한 혁명파 전투에서 전사한다

요나단: --외교 능력에 강한 외교정책가. 반열계열의 반란세력에 죽음을 당한다

시 몬: --기회와 운이 좋은 반면 사위에 반란으로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7. 마카비 혁명 지도자 유다 동생 요나단의 등장


1).요나단의 외교 활략 (BC.160년경 이후)

유다의 형제인 요나단은 마카비 군대 수백명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들은 전쟁을 치룬 만한 군대를 갖지는 못했으나 외교적 측면에서 제2승리를 성취해 내었다

북방의 시리아 왕조를 노리는 두 대군을 일으키고 외교로 지도해 나갈만한 재질이 요나단속에 있다고 간파했다

요나단을 지연 작전을 펴서 한편으로 승세을 보이는 후보자를 보좌하고 또 한편으로 스파르타및 로마의 조약을 맺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요나단은 통치자인 대제사장에 임명됨은 물론 시리아의 귀족이 될수 있었다

BC.153년경 에 그는 예루살렘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새로운 왕조 하스몬 왕조를 세울 기초를 만들었다 요나단은 유다의 내적 번영을 이룩하였는데

그러나 그도 대제사장에 오르자 불만의 추정자에 체포되어 죽고 만다


2).미카비혁명 지도자 유다의 동생 요나단(BC.152년경-BC.142년경)외교 능력.

그는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유대 총독이 되었다.

총독이 된 요나단 마카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제사장에 임명하게 된다.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거하는 그룹이 형성되었으니 그 사람들이 곧 에세네파로, 지금도 사해 지역에 가면 이 에세네파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3).마카비 혁명의 주도적 인물은 맛다디아 제사장 아들이였다

맛다디아는 작은 마을에 일개 제사장이였고 그의 아들 일뿐이였다

마카비 혁명을 일으킨 그아들의 공로는 막대하지만 유대인 율법인 반열이 있기에

대제사장의 자리를 마카비혁명의 주도한 형제들이 마음대로 차지함은 엄연히 유대사회 불법이였다

어쨌든 당시로선 요나단 마카비는 유대인들의 상류층에게는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고 그세력도 막강하였다

결국 발라스라는 추종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로부터 정통 대제사장이 아니라 불법 대제사장 Line이 시작되었다.

그가 대제사장에 스스로 임명될 당시

엄연히 정통 대제사장의 계열인 사독 계열의 제사장 온니아스(Onias)가 존재해 있었다.

 

4).마카비 혁명의 의의 (독립기간을 헤스모니안)

바벨론 시대부터 제국의 종속된 이스라엘로서 많은 고난을 당한후로 수백년이 지난후

마카비 혁명으로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로마의 통치가 있기 전까지 이스라엘 땅에도 독립이 찾아왔는데 이 독립기간(BC 142-BC 63)을 헤스모니안이라고 일컫는다.

헤스모님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제사장 맛디아의 가족을 일컬었으나, 나중에 유대인의 독립시대를 말할 때 사용하였다.

외경인 마카비 214:6에 이 유대 반란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때 이들을 지칭하는 명칭이 "핫시딤"(Hasidim,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핫시딤은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한 종파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카비혁명 최초 지도자 유다는 시리아 사람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싸우려고 부딪혔다가,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전투에서 전사하지만 그의 투쟁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얻게 하였다.

, 성전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8.마카비 혁명 지도자 유다 형제. 동생 시몬 역할


1).정치적 독립

그 사후 시몬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

그의 형제 시몬이 뒤를 이어 오랜 전쟁 끝에 BC.141년경 셀루쿠스 왕조로부터 완전한 정치 적 독립을이루게 된다

그의 동생인 시몬은 팔레스타인 평야 지대의 통치자가 되었다

시몬이 왕좌에 올랐을때에 꽤 늙어 있었다

그의 빛나는 승리는 외교분야 에 있었는데 그가 메데드리오를 시리아 합법적 왕으로 승인함으로써 유대인들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

이 세금의 면제야 말로 결과적으로 독립을 승인한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시몬은 아크라를 점검해왔던 시리아 주둔군을 굶어 죽게 함으로써 욥바와 뱃술의 전도시를 차지 하였다

그의 현명한 통치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의 지도다들은 시몬을 가리켜 영원한 지도자이며 대제사장직 이시니 이는 신실한 선지자가 나타날 때 까지 니이다 라고

   찬양하였다

맛다디아 막내아들 시몬은 하스몬니안이라 하는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의 조상 아스모네우스에서 하스몬에서 따온 말인듯 하다

BC,134년경 시몬과 그 두아들 은 야망에 차 있는 그의 사위에게 살해 당하였다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는 겨우 달아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2).시몬 취임 당시 시대 상황

마카비혁명 주체인 유다의 마지막 동생이었던 시므온(BC.142년경- BC.135년경)도 대제사장 겸 총독으로 취임했다.

취임 이후 시리아에 내분(Civil War)이 일어나 시리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다 빠져나가자 이스라엘은 어부지리로 정치적 회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이때부터 유대인의 자주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주 시대는 BC 63년경까지 계속 되었다. 종교적 자유는 유다 마카비에 의해, 정치적 자유는 시므온 마카비에 의해서 이뤄지게 된 것이다.


3).마카비혁명 유다 마지막 동생인 시몬 대제사장의 사위 반란

시몬의 사위가 장인 시몬과 두아들은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셋째 요한 힐카누스는 도망하여 간신히 유일하게 한사람만 살아남는다

힐카누스1세을 통하여 하스몬 왕조을 이어 나게 한다

 

4).힐카누스 1세 부터 시작된 하스몬 왕조가 다음편에서 시작됩니다 

 

 

[1].하스몬 왕조 시대 BC.134년경


{1}.시몬의 셋째 아들 요한 힐카누스1세 등장

1).마카비 혁명 일으킨 마지막 주역 시몬의 자손으로 한명만 살아남는다

마카비 혁명 주역인 유다와 형제 요나단 시몬이 죽은후 그의 명성에 따라 하스몬 왕조라 불렀다

마카비 혁명에 주역인 유다도 죽고 동생 요나단도 죽고 그형제중 마지막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시대

그역시 시몬 사위의 반란으로 장인 시몬과 두아들을 죽이는 과정에 시몬에 셋째 아들 힐카누스만 간신히 도망하여 한명만 살아 남은 사람이 힐카누스 1세이다

 

 

1.힐카누스1세 의 통치 (BC.134년경- BC.104년경)


1).시리아와 협약으로 독립을 인정

시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시리아에 종속될것과 시라아 군대 출정에 협력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요한 힐카누스의 정부를 승인하였다

요나단과 시몬의 병합하였던 일단의 연안도시를 또한 양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힐카누스의 효과적인 통치로 곧 회복되어 이두매 지역를 (에돔)과 연안 도시들이 유대 영토로 귀속되어 졌다 이 정복은 상인 계층들 에게 그들의 옛 상로를 되 찾게 해주었다

 

2).두 종파 등장 (바리새인파와 사두개인파)

존 힐카누스1(John Hyracanus, BC,135년경-BC.104년경)가 시리아군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몰아내고 사마리아(Samaria)와 이두매(Idumea)를 통합하게 된다.

힐카누스1세는 이두매인들을 종교적으로 핍박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 종파가 등장하게 된다.

 

3)바리새 파

바리새파는 헬레니즘에 반대하였던

바리새파 중에는 핫시딤(마카비가 게릴라전을 벌일 때 마카비를 따라다녔던 경건한 사람들을 지칭)의 후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들로서 나라의 위신을 보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다.


4),사두개 파

비교적 헬라적 성향이 강하였던 사두개파이다.

한편 사두개인(Sadducees)들은 자신들을 사독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대제사장 으로서의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5).힐카누스1세 전통적 유대교 강압정책

강압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힐카누스는 이두매인 들에게 할례를 장려하고 유대 신앙을 받아들일것을 강요하였는데 이는 후기 유대교가 반대하게 된일이었다

맛다디아의 손자가 그 정복인에게 종교적인지 일치를 종용한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칼한일이 아닐수 없다

힐카누스1세는 사마리아에도 출정하여 그림심산의 성전을 파괴 하기도 했다

유대군대의 승리를 민족주의자들은 환영한것은 사실이지만 초기 마카비 시대에 가졌던 종교적 열성은 더 이상 명확하게 찿아볼수 없게 되었다

BC.104년경 요한 힐카누스가 사망하기 까지 영토는 전국경이 확대 되고 있었다

마카비 투쟁은 이미 오래 전일로 지나가버리고 새로운 경쟁자들이 다투고 있었다


6).헬라 문명의 병폐와 신앙적 도태한 후손들

힐카누스1세는 자신은 율법을 고수하였다

마카비 시대의 정통파들은 기독교 이전과 신약시대에 바리새인으로 되었다

과거의 헬라주의자들은 배척당하였으나 그들의 사상은 사두개인들 가운데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힐카누스1세는 신앙의 율법에 헌신적이었으나 그의 자녀들은 전통적인 히브리사상에 거의 공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후손들은 자신을 귀족으로 간주했으며 철저한 정통파 바리새인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아이러니 칼 하게도 마카비의 후손이 철저히 헬라화 되었던것이다

힐카누스 사망이 남은 자녀들간의 분쟁을 재촉하여 장자인 유다가 형제들 가운데 승리를 거두었다


 

2.아리스토 볼로스1세 폭정.BC.104년경-BC.103년경.


(힐카누스1세 장자)

1).힐카누스1세의 장자로 히브리어 이름은 유다 이다 (헬라 문명 인한 도태)

유다라는 히브리어 이름보다 헬라식 이름인 아리스토 볼로스라는 명칭을 더좋아하였던 그 형제중 3명을 옥에 가두고 그중에서 2명을 굶어 죽게 하였다

또 다른 한명은 궁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겨우 일년 남짓했던 통치 기간중에도 아리스토 볼로스는 유다의 영토를 레바논산 북편까지 갈릴리 지역이 점령되면서 이 지역이 유대땅으로 영입되게 된다.

이 갈릴리 지역은 원래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땅이었으나 바벨론 포로 이후 이방인의 땅이 되었다가 그에 의해 다시 회복된 것이다.

이 아리스토 볼로스1새 때부터 왕이란 칭호가 사용되게 된다.

그의 생애는 술과 질병. 그리고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끝없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채 곧 끝나버리고 말았다

 

 

3.알렉산더 안네우스 1.(BC.103년경-BC.76년경.)

(힐카누스1세 차남)


1).아리스토 볼로스1세가 죽을때 그의 형제중 단 한명만이 감옥에 갇힌 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힐카누스 1세의 아들이며 아리스토 볼로스1세의 형제이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이 요나단 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는 헬라식 이름인 알렉산더 안네우스로 알려져있다 (헬라 문명 인한 도태)


2).알렉산더 안네우스 1세 정책

그도 영토 확장정책을 계속해 펴나갔다

오다의 경계는 팔레스틴 해안을 따라 확장되어나가 이집트 국경과 트랜스 요르단 지역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다윗왕과 솔로몬 시대의 영토와 크기가 같았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여기에 팔레스틴 전지역과 이집트 경계에서부터 갈릴리 호수북부 훌라호수까지 포함된다

트랜스 요르단의 베르아도 알렉산더 안네우스에게 굴복하여 아스글론을 제외한 해안평야의 도시들이 그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

하스몬 왕국에 병합된 지역들은 대부분 빠르게 유대화되어 갔다

이두매(암몬)가 유대인의 생활에서 중요한역활을 하게 되었고

갈릴리 또한 유대주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독립시대 중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다윗, 솔로몬 시대에 차지했었던 영역까지 되찾은 시기인 것이다.


3).사마리아의 저항

그러나 사마리아가 동화되지 않고자 저항하였고 아볼로니아와 스구디아와 같은 도시는 약간의 유대적 요소를 가지기는 했으나 그들의 비 유대적 성격를 계속 지켜

나갔다

 

4).알렉산도 안네우스 1세의 바리새인 (정통파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알렉산더 안네우스가 바리새인(정통파 유대인)들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멸시를 가한 사건을 기화로 일어날 당파적 분쟁이 내란을 부르게 되었다

바리새파와 결별하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는다


5).바리새인들의 알렉산더 안네우스1세에 대한 반란의 모의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안네우스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렇게 해서 유다의 독립은 한동안 불안정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후에 바리새인 들은 곧 문제에 심각성을 깨달아 시리아의 화친을 파기하고 외세의 간섭없이 자유롭고 자신들의 주관대로 살아 가게 될 유대국가를 원하게 되었다

 

6).알렉산더 안네우스1세의 바리새인 처형

그러나 알렉산도 안네우스1세는 반란의 주모자들을 색출하여 800명의 바리새인들을 처형하였다


7).알렉산더 안네우스 1세의 참회와 미망인 살로매에게 남긴 유언

전설에 의하면 안네우스는 죽기전에 자신의 참해를 뉘우쳐서 그 아내 살로매 알렉 산드라에게 사두개인의 충고을 멀리하고 바리새인을 가까이할것을 명하여

   통치권을 그에게 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전설이 역사적 근거를 지니지는 못했을 지라도 알렉산드라가 바리새인에게 호의적으로 전향한것은 사실이다



4.미망인 알렉산드라 살로매 통치 (BC.76년경-BC.67년경)


1).두왕의 미망인 이며 두아들의 모친 살로매

알렉산더 안네우스1세 미망인

아리스토 볼로스1세와도 결혼을 했고 이어 알렉산더 안네우스1세와도 결혼했던 살로매 알렉산드라는 하스몬왕가에 두통치자의 미망인으로서 7년간을 다스렸다

 

2).두아들에게 권한을 나누어 주고

왕위에 오를때 70세였던 그녀는 두아들 에게 왕의 권한을 나누어 주었다

장자인 힐카누스2세는 대제사장이 되었고

둘째 아들인 아리스톨 볼로스2세 는 군의 총수가 되었다

왕의 권한을 각각 나누어 주었다

미망인 산드라 사후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정파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3).산드라의 오빠 벤세타는 바리새인 지도자의 화친 정책

한편 그녀의 오빠인 시므온 벤 세타는 바리새인들의 지도자 였는데 이점이 유다 주의의 적대 당파들 사이의 화친을 유지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4).알렉산드라의 바리새인 대한 우호 정책과 성과 사두개인 불만

알렉산드라의 치하에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생활에 건설적으로 공헌할기회를 갖게 되었다

많은 영역에서 특히 교육에서 바리새인들은 특출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시므온 벤세타가 산헤드린(유대국가회의)의 의장일때 제정되었다

광범위한 초등교육제도의 성립과 실시로 인에 유대의 큰 마을이나 촌락및 도시에서 교양있고 학식있는 사람을 길러내게 되었다

이 교육이 히브리 성경에 그 중심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5).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간의 내분 조성

당의 분쟁의 상처가 알렉산드라 재위 기간에 다 치유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새로이 획득해낸 여러측면의 권력에 만족했으나 반면 사두개인들을 권력을 갖지 못한데 대하여 분개하고 있었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것은 바리새인들이 알렉산더 안네우스가 자기들의 지도자를 대량학살했던 사건에 대하여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사두개인들이 피를 흘리게 되었고 또내란이 일어났다


 

5.미망인 알렉 산드라 사후(BC.67년경이후시대)


{1}.알렉산드라의 두아들 정권 전쟁

1).장자 힐카누스2세와

바리새인들은 장자이며 정식 후계자인 힐카누스 2세를 옹위하였다


2).둘째 아리스토 볼로스2

사두개인 들은 (알렉산더 안네우스와 알렉산드라의)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 볼로스 2세를 계승자로 추대하였다

②아리스볼로스는 군인이었고 제국이 팽창과 세계적인 권력을 꿈꾸는 무리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2}.알렉산드라 사후 두형제의 정치 대결 시작(BC.67년경-BC.41년경)


1,장자 힐카누스2세가 대제사장과 왕위의 등극과 하야 (BC.67년경)


1). 그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힐카누스2세가 대제사장으로 왕위로 올랐다

동생 아리스 볼로스 2세는 사두개인과 함께 군대 힘으로 권좌를 찬탈한다

그 동생 아리스볼로스2세가 사두개인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 올때 힐카누스2세도 바리새인도 아무도 방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2.아리스토 볼로스 2세 왕위와 대제사장직 등극(BC.67년경-BC.63년경)


1).힐카누스2세의 도주

힐카누스2세는 그 왕권을 아우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게 되었고 아리스토 볼로스가 2세가 강제적으로 왕위와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아리스토 볼로스의 장자인 알렉산더와 힐카누스의 외동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는 등 짧은 평화가 있었지만 힐카누스는 도망하였고 이두매 총독인 안티파티가

   그를 지지 하였다

 

2)이스라엘은 형제간에 정권다툼의 내란에 위협에 흔들리고 있을때 (BC.63년경)

폼페이가 유대를 평화롭게 유지한다는 명분아래 더나아가 로마가 품은 야심을 실현시키기위해 그의 로마 군단을 이끌고 등장한다

동생에게 쫓겨난 힐카누스 2세는 로마의 폼페이 장군(Pompeyus BC.63년경)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결국 폼페이 장군이 군대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이때부터 로마의 점령시대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2]. 로마군의 유대 점령시기 (BC.63년경-AD.135년경)


1.로마군의 예루살렘 침략 (BC.63년경)


1).유대 아리스토 볼로스2세 는 로마의 전쟁

폼페이는 아리스토 볼로스2세가 로마에 항복하지 않을 것을 알아 차렸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한 지 3개월만에 요새를 함락시키고 도시내로 진군해들어 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일만2천명의 유대인 학살했다

폼페이와 그의 부하들은 성전 지성소에 까지 침입했으나

값비싼 비품들과 설치물에는 손대지 않았고 예배를 계속드릴수 있도록 허용했다

유대는 이제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며 유대의 독립은 멀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유대는 로마의 시라아 행정구역으로 부속되어졌고 해안도시와 사마리아 지역및 요단 동편의 비유대인의 거두하던 도시들을 잃게 되었다

 

2).이두매 총독 안티파터의 야심 (아들 헤롯을 유대 왕으로 추대 음모)

힐카누스 2세의 요청에 의해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교활한 정치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안티파터란 인물이다.

원래 이두매 사람인 그는 힐카누스 2세 편에 기생하며 이두매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3).이두매 총독 안티파터 로마에 대한 충성과 야심

이후 로마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로마 정권에 붙어 폼페이와 손을 잡고, 폼페이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스리도록 도와주었다.

후에 시이저가 더 강해지자 시이저와도 손을 잡았다.

그의 아들을 언제인가 틈을 노려 유대왕으로 등극시키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4).유대 힐카누스 2세 등극 (BC.63년경-BC.41년경)

힐카누스2세는 갈릴리와 이두매및 베레아를 포함하는 유대인의 지배자라는 칭호로 불리어졌으며 다시금 대제사장직을 인정되었다

동생 아리스토 볼레스2세에게 왕과 대제사장을 빼앗긴후 비록 로마군 도움으로 독립을 잃었지만 동생에게 그 자리를 도로 찾아 왔다 (아마 그 한을 풀었으리라 본다)

그는 매년 로마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5).아리스토 볼로스 2세 아들 알렉산더 3세의 반란과 진압

아리스토 볼로스2세는 그의 아들과 함께 폼페이의 승리를 장식하기 위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로마로 끌려갔다

포로로 끌려가는 도중 (호송도중)그의 아들 알렉산도3세는 간신히 도주하여 부친을 대신하여 힐카누스2세를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으나 힐카누스2세는 로마군의

   도움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6).아리스토 볼로스2세와 힐카누스2세 왕가의 내분이 계속되여 일삼고 있는동안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 는 유대인의 정치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는 아리스 볼로스2새에 대해 몹시 반대하였는데 이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힐카누스2세는 안티파터를 매우 의지하고 신뢰하였으므로 유대를 사실상 지배하는자는 바로 이 안티파터였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증오한 만큼이나 안티파터의 세력을 혐오하였다

이두매 총독 안티파터의 계략은 힐카누스의 사후 안티파터 아들 헤롯을 유대왕으로 추대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이두매 지역은 명목상으로 유대에 귀속되어 힐카누스2세의 왕이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결코 유대에 동화 되지도 않았으며 자신들의 오랜 적대감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족인 총독 안티파터를 신뢰하고 자신들의 통치권자인 유대왕에게는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7).로마 정권의 급변화

로마의 줄리어스 시이저가 암살되고 일단의 위기가 밀어닥치자

안티파터와 그의 아들은 세금을 열성적으로 거두어 들여 카시우스의 새성권에 바침으로써 충성을 보였다

안티파터의 아들인 해롯은 언제가는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는 밀약을 받고 유대지방의 수세관의 직위에 올랐다

로마의 안토니가 부루터스와 카시우스를 빌립보에서 패퇴시키자 아시아는 또다시 새정권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헤롯은 재빨리 안토니에게도 뇌물을 주어 새로운 충성을 다짐했다

한때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했던 동부지역은 로마에게 한번도 정복하지 않았던 파르티아 족속이 점거하고 있었다

 

8).파르티아 족속 의해 예루살렘 침공과 아리스토 볼로스2세 아들 안티고누스를 왕과 제사장으로 등극 (BC.41년경-BC.38년경)

파르티아 족속의 예루살렘을 침공해 아리스토 볼로스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았다

이두매 총독 이였던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은 힐카누스의 사후 자신이 계승하려 했던 왕위를 빼앗기자 로마로 피신 하였다 (로마에 대한 반란 사건이였다)


9).로마군의 개입으로 파르타인 족속에 대한 공격으로 예루살렘 탈환

거기에서 헤롯은 안토니의 환심을 얻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 칭호가 파르티아인이 쫓겨가기 까지 명목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파르타인이 쫓겨간후

헤롯은 로마군대와 함께 승전고를 울리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좌에 올랐다

헤롯은 37년에서 4년까지 통치했으며 그동안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었다

 


2.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C.37년경-AD.4년경) 안티파터의 아들이 로마에 의해 유다 왕으로 등극


1),헤롯왕의 통치

그는 아버지 못지 않게 교묘하게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아들이고,

로마 사람들에게 종을 바친 사람으로 유대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았으나, 로마사람들에게는 충직하다고 알려졌다.

그는 산헤드린(유대 국가회의)의 자격을 격하시켰는데 그 이유는 산헤드린의 구성 요인이 대개 사두개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산헤드린뿐만 아니라 대 제사장의 직분까지 격하시키면서 한편으론 바리새인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2).헤롯의 사생활

그는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하며, 열 명 정도의 부인을 두었다고 알려졌다

그에게 도합 열명의 아내가 있었는대 아구스도 황제는 그의 사생활을 가리켜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것이 낫다 고 논평했다

돼지는 불결한 동물인 관계로 도살하지 않는 반면에 헤롯은 자신의 계획에 방해되거나 그 충성여부가 조금이라도 이상스러우면 자기 아내와 자식들도 가차 없이

   살해해 버렸던 것을 가리킨 말인것이다 그 잔악성은 널리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3)헤롯의 번영기 (BC.25년경-BC.14년경)

헤롯의 번영기라고 할수 있는 BC.25-BC.14년경 에는 로마(가이사)와 유대인의 요구사이에 조심스럽게 중도적 노선을 취하여 유대 신하들이 헤롯을 몹시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신하들에게 호의를 얻고자 노력했다

전국토를 걸쳐 도시를 세우거나 재건하는가 하면 요새와 목욕탕. 공원. 시장. 도로. 및 헬라의 사치스런 문화시설을 세웠다

사마리아를 아두도를 기념하여 세바스터라는 새이름으로 명명하였고 트라톤 망대에는 가이샤라는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다

헤롯은 이 가이사랴을 열 개의 망대를 가진 성벽과 제방으로 보호되는 항구도시로 발전 시켰다


4).헤롯의 정책상 성전 건축 (BC.18년경 시작과 중단)

그는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개축했으나 결국 완성엔 이르지 못하였다.

헤롯왕때 BC.18년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라는 큰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요 건물은 제사장들이 1년반 동안에 걸쳐 건축했으나

또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개축하는 일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이들은 이를 오해하여 헤롯 대왕에 의해 성전이 다시 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성전에 복잡한 재건물과 구조는 알바누스 AD.62년경-AD.64년경 시대 이르서야 완성되었으며

10년 채 못되어 AD.70년 경에 디도의 군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5).예수그리스도 탄생 (BC,4년경)

그의 잔인성은 여지없이 드러나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스스럼없이 자행한 것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는 자신을 능가하는 유대인이 왕이 탄생할 것을 두려워 해서 예수가 탄생한 즈음에 베들레햄에서 태어난 영아를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다

헤롯이 정말로 그당시 영아들을 살인 했는지의 여부는 성경외의 문헌으로 고증되지 못하나

헤롯이 죽지 직전에 그가 가졌던 유대인이 왕이란 칭호에 도전하는 한분이 막 탄생하였었다

헤롯이 아무도 애곡해 주는 이 없는 죽음을 맞음으로써 신구약시대의 막이 내리고 신약시대로 옮겨가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통하여 바로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그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 동안을 침묵으로만 일관하지 않으셨고 성서의 땅에 메시아가 오실 수 있는 배경과 환경을 조성하셨다.

신약시대의 도래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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