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무엇을 바꾸어 놓았나?


ㅡ 엘시 맥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세계관이라 하는데, 수세기 동안 모든 곳에는 종교적인 세계관이 있었다. 종교적인 세계관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특별히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종교와 연관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종교는 삶의 모든 측면과 상관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세속적인 세계관이 있다. 이 세속적인 세계관은 삶의 모든 측면은 종교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당신의 신앙은 사적인 문제며, 공적인 영역에서는 당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세속적 세계관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계몽주의 이후 서양 세계를 주도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그러나 칼뱅이 자라난 중세 시대나, 그가 사역했던 종교개혁 시대에는 종교적인 세계관이 있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해야 되는지에 정확하게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든 가치의 기초로 삼았다.

 

 

하나의 기독교적 몸


서구 유럽에서 종교적 세계관의 한 가지 표현은 온 사회가 하나의 기독교적 몸, 즉 “corpus Christianum”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교회의 리더들과 시민 사회의 리더들이 모두 한 가지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는 동일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태어나고 즉시 세례를 받는 것은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한 도시나 국가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한 사회, 한 교회라는 생각이 잘 작동되는 듯하다. 하지만 종종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데 특히 중세 후기에 심했다. 교회는 자신들이 모든 사회의 권위 위에 존재한다며 온전한 권위를 주장했다. 어떤 교황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영적인 권위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권위까지 주셨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중세 후기에 세속 정부는 점점 더 많은 권세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전적인 권위를 가지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결혼과 연관된 모든 것들은 교회의 임무였다. 그래서 세속 정부는 주교들에게 이러한 문제들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중세 사회는 마치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 행세를 했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맡게 되는지, 누가 어떤 것에 권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을 보여주는 한 예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생각이었다. 사제, 수녀, 수사와 같은 사람들은 거룩하고 하나님을 위해 따로 세워진 사람이며, 세속 군주들이나 부인들, 봉제업자, 제빵업자, 농부들은 세속적이고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다 기독교인이지만 한 부류는 하나님께 더 가까운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사물에, 시간에 또 장소에 적용되었다. 먼저 사물을 보면 제단과 성물은 거룩하고 화분이나 그릇들, 농기구들은 세속적이며 거룩하지 않게 여겼다. 또 시간을 보면 성인들의 기념일이나 주일은 거룩하지만 나머지 날은 거룩하지 않으며, 장소를 생각하면 교회는 거룩하고 다른 장소는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 거룩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아주 쉽게 말해준다. 그러나 때때로 거룩한 사람들이 거룩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이류 기독교인(second class Christians)이라고 느꼈다.

 


중세 후기의 성례


초대 교회 교부 성 키프리아누스(St. Cyprian)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모두 이것이 진실이라고 동의했지만 누가 혹은 무엇이 교회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동의하지 않았다. 칼뱅이 자라난 세상에서 교회는 사제들에게 성만찬을 받는 사람들로 정의되었는데, 여기서 사제들은 주교에게 안수 받은 사람들이고 그 주교는 그 위의 주교에게, 그는 또 그 위의 주교, 결국 사도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이것이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이다[때로 사제는 단순히 성례를 베푸는 자들이라는 이유에서 목회자(clergy)로 정의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만약 사도적 계승에 근거한 사제로부터 성례를 받았다면 당신은 교회에 속한 것이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 밖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성례전에 참여해야 했고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때때로 사람들은 교회에 순종해야만 할 만큼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 성사(sacraments; 개신교에서는 ‘성례’로 번역하나 여기서는 중세 가톨릭교회에 대한 설명이므로 ‘성사’로 표기함- 역자 주)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성사는 은혜의 수단으로 아무도 성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일곱 개의 성례가 있었는데 모두 다 예전적인 의식이며, 라틴어로 적법한 사람에 의해 정확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집전될 때 유효한 것이었다.


첫 번째 성사는 세례였다. 모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아야 했는데 이는 세례를 받지 않고 죽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었다(영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 상황에서 즉각적 유아세례는 중요했다- 역자 주). 세례는 모든 사람이 아담에게서 받은 원죄를 씻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례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교회는 누구든지 세례를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종종 병약한 아이들을 받은 산파들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주기도 했다.


아이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면 대부모(godparents)와 친구들을 초대하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 아이가 나이가 들면 견진성사(confirmation; 개신교에서의 입교)를 받게 되었다. 주교만이 견진성사를 베풀 수 있었다. 견진성사 때 주교는 아이에게 손을 얹고 기름을 붓는데, 이는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으로부터 강한 능력을 받기 위함이었다.


만약에 주교가 게을러서 자기 교구의 마을들을 방문하지 않는다면 견진을 받아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견진성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견진성사는 믿음에 관한 일정한 지식을 갖는 것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교는 성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 설명할 수 있느냐를 테스트하지 않고 성사를 행하는 것 자체가 은혜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세례와 견진성사가 한 번 받는 것이라면 다른 두 가지의 성사, 즉 고해성사와 미사는 자주 행하는 것이었다. 세례가 원죄를 다루지만, 사람은 자라면서 자범죄(actual sins)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그 죄들을 해결받기 위한 다른 성사가 필요했다. 고해성사는 바로 죄인들을 구해주는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고 사죄함을 받았다. 그리고 ‘보속행위’(죄를 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는 작은 죄에 대해서는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중대한 죄에 대해서는 순례를 가는 것 등을 요구했다)도 있었다.


사람들은 미사에 가서 성찬을 받기 전에 고해성사를 끝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만약 자신들이 ‘고해성사에서 죄를 잊어버리면 어쩌나’,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면 어쩌나’ 하며 염려했다. 그리하여 성찬을 받는 것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일까’ 염려하여 자주 성찬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모든 사제들은 매일 미사를 집전했다. 비록 사제들이 그 성찬을 받은 유일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미사에 참여하기만 해도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미사에는 참석하지만 성찬은 구경만 했다.

어떤 때는 사제와 그를 돕는 자들만이 미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은 성찬을 받도록 되어 있었고, 그것은 보통 부활절 전 한 주간이었다. 성찬을 받는다 해도 평신도들은 떡만 받았는데 이는 성찬을 받는 중에 그리스도의 피인 포도주를 흘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성사로는 신품(ordination), 혼배, 그리고 종부(extreme unction)성사들이 있다. 신품성사는 후보자를 축성하여 성사를 집례할 특별한 거룩함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제나 주교만이 고해성사, 미사, 그리고 종부성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면, 주교만이 견진성사나 신품성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 혼배성사는 결혼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하고 연합하는 것을 유효화하는 성사였다. 비록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혼배미사를 원했지만 사제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 번째 성사인 종부성사는 임종 직전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사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의 보통 수단이었다.


대부분의 성사들은 신품성사로 자격을 갖춘, 그리하여 높은 지위를 가진 기독교인이 된 사제들이 집전했다. 그들이 가진 특권 때문에 사제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갈등이 종종 있었는데, 이는 사제들은 종교적으로나 시민법적으로 전혀 다른 법 아래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죄를 지은 목회자들은 세상 군주가 아니라 주교만이 재판할 수 있었다. 성찬에서도 목회자(clergy)만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지 않았던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어떤 주교들은 세속 군주이기도 해서 교회의 권세뿐만 아니라 세상의 권세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종종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남용했다(예를 들어, 칼뱅의 아버지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어떤 사람을 빚 때문에 출교할 경우). 그들 중 일부는 독신 서약 혹은 청빈 서약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많은 교구 사제들이 매우 가난했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진짜 사제가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교구의 일을 대신 하기로 고용된 대리였다. 종종 각종 남용은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연유되기도 했지만 (잘못된) 제도의 결과였는데,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갈등을 초래한 이유들이었다는 것이다.


 

중세 후기의 설교


설교는 어떠했는가? 사실상 중세 후기에는 개신교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설교가 있었다. 그러나 설교가 예전적 삶의 중심은 아니었다. 목회자와 사람들은 미사에서 설교가 있는 것을 좋아했지만 미사는 설교 없이도 완전하고 효과적인 은혜의 수단이었다. 대부분의 사제들은 설교자로 잘 훈련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칼뱅처럼 대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설교 핸드북을 사용했는데 이 책들은 모두 라틴어 서적이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이 설교 샘플들을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해야만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미사를 드릴 때 성경은 라틴어로 읽혔다. 어떤 설교들은 성경에 대한 것이었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는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었다.


만약 본문이 어려운 경우에는(시편 137편처럼) 교화할 수 있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기에, “네(바빌론의)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시 137:9)을 그리스도의 바위에 작은 죄를 내어다 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많은 설교들은 성경에 직접 근거하지 않았다. 그 설교들은 사람들에게 선한 도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예가 되는 몇 가지 주제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곱 가지 대죄(seven deadly sins), 일곱 가지 중요 덕목(seven cardinal virtues), 일곱 가지 자비의 행동(seven acts of mercy), 죄를 고백하는 바른 방법, 혹은 축일을 정하고 기념하는 성자들의 기적에 대한 설교들.


교구에서 설교를 듣지는 못할지라도 경건생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은 항상 있었다. 성인들, 특별히 하늘의 여왕으로 그려지고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는 사람들이 필요한 안전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인생은 힘들고 질병과 죽음, 사고, 기아와 역병 그리고 전쟁으로 가득 차 있다. 성인들이야말로 죄인들을 돕는 최고의 옹호자, 즉 죄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자들로 여겨졌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중세 후기의 세상은 철저히 위계질서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청원을 해야 했는데 이는 그 높은 사람이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그의 소원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내가 청원할 것이 있다고 해서 바로 가장 높은 사람에게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 외에도 성지순례라든가 금식, 또는 다른 종류의 헌신적 행동들이 있었는데 이는 사람들을 세상의 위험에서 보호하고 영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얻도록 돕는 것이었다. 정의상 가장 거룩하게 사는 방법은 항상 기도하는 수사나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수사나 수녀는 매일 매일 시편을 읽으며 기도했기에 평신도들은 종종 이렇게 거룩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여 일종의 기도 형태로 만들어진 짧은 기도문을 반복적으로 외웠다. 수도원의 수사들이 시편 150편 전체를 외웠다면, 평신도들은 묵주를 가지고 아베 마리아 기도를 150번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생활을 인도하는 종교적 권위들은 교회에 의해 주도된 성경과 이성 그리고 성령의 집합체였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은 종교적 지식과 권위의 한 근원이었다. 그러나 자연 이성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을 이해하도록 하신 것이다. 성령은 지상의 교회가 구원에 관한 가르침에 있어서 잘못되지 않도록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교회의 권위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학식이 높으면서 목회자 학자들이나 가브리엘 비엘과 같은 교사에 의해 지원받는 목회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즈음 서유럽에서 교육의 수준이 올라가고 있었고 이것은 경건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상 로마 제국이 초기 중세 사회의 도래와 함께 붕괴된 후에 교육이 급격하게 쇠락한 바 있었다. 수도원과 다른 목회자 공동체에서만 교육이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명하기 위해 땅에서 일해야 했고 교육을 장려했던 도시생활도 매우 급격하게 하강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들은 늘어나고 상업은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강을 따라가는 교통수단은 육상 교통수단보다 쉬웠다.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교육의 수준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사뭇 제한적이었지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교육은 라틴어를 배우는 목회자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니었고, 평신도들이 상거래를 위해 자기 말로 읽고 쓰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늘어가는 도시와 문명(literate) 인구는 교회와 개인적 목적을 위하여 증가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은 교회의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상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교회의 온갖 남용과 그 가르침의 부적절함에 (한때는 자신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점점 더 불만을 갖게 되었다. 15세기 중엽 유럽을 찾아온 금속활자의 ‘발견’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자극했는데, 이는 교회와 사회에 대한 더 많은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결국 목회자든 평신도든 개혁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칼뱅이 태어나기 수백 년 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때로 종교개혁가들은 자신의 교구를 개선하려는 주교였고 어떤 때는 수도회였는데, 이들은 수도회의 규칙을 지키는 데 점점 나태해져가는 수도회를 보면서 더 순수한 수도원적인 삶의 형태를 회복하고자 했다. 때로는 더 거룩한 삶을 경험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 하던 평신도거나 평신도 단체이기도 했다. 때로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설교를 제공하고 싶어 하던 학자이기도 했다. 14세기 말엽의 한 개혁 운동은 현대적 경건(Modern Devotion)이라고 불리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가장 유명한 대표는 토마스 아 켐피스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 운동은 일종의 신비적, 종교적 공동체생활 운동으로 목회자와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교회가 처방한 여러 경건활동보다 더 내적이면서 영적인 것을 추구했다. 그들은 교회가 요구한 이러한 활동들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더 성경적인 설교와 성경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 개인들과 그룹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은 설교에 만족하지 않고 목회자만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성경을 직접 들고 읽으며 성경을 설교하고 싶어 했다. 영국에 있던 이런 그룹은 롤라드(Lollards)였는데, 이들은 14세기 학자 존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제들의 주된 과제는 설교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 불가타 성경(The Vulgate)을 영어로 번역했다. 이것은 성사를 통해 은혜가 전해진다는 가톨릭교회의 중심 되는 신학적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었다. 목회자들 역시 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의 수중에 성경이 들어가는 것은 그들을 이단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걱정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목회자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했다.


영국 교회 지도자들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교의 허락 없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은 중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했고, 1409년부터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 초기에 보헤미아에 있던 또 다른 그룹은 후스파였는데 이들은 모든 것을 성경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큰 관심 중 하나는 성찬 시 평신도가 빵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받을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부 평신도에 의해 주도되었든 대부분의 평신도들에 의한 것이든, 이러한 주장들은 교회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사실 롤라드나 후스파, 또 다른 그룹들은 모두 이단으로 정죄되었거나 핍박을 받아 지하로 숨었는데 그렇다고 그들의 사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인문주의


개혁의 다른 운동은 인문주의였다. 이것은 지적인 개혁이었지만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문주의자들은 성경과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 원어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교사가 적었기 때문에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읽는 것이 헌신된 기독교 학자들 가운데 퍼져가고 있었다. 그들이 성경을 원어로 읽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교회가 해석해온 구절들이 유일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교회의 해석이 실제 원어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전통 교회와 교회가 주장하던 신학과 영적생활에 대한 이해에 큰 도전이 되었다.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은 교회 안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교회와 분리되지 않고는 (물론 이들이 교회 자체와 분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개혁을 이룰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주 관심은 교회의 실천이라고 믿었다. 또 다른 이들은 필요한 주 개혁의 대상은 교리라고 보았다. (16세기가 동터올 무렵) 서유럽 전체에 개혁의 기운은 무척 컸고 무엇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막상 개혁 운동이 힘을 받기 시작했을 때 그 많은 공통의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차이 또한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새롭게 개혁되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냐는 것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개혁자들


전통 교회와 분리해야겠다고 느낀 개혁자들 중 ‘개신교도’(Protestant; 항의자)라고 불린 사람들은 은혜와 구원 그리고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는 것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믿음만으로, 은혜만으로 의로워짐”이라는 유명한 가르침의 핵심과 관계되었다.


그러나 때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은혜나 믿음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둘 다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을 새로운 통찰력이 되게 한 차이는 ‘만으로’(alone)라는 말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였다. 믿음은 교회에 의해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고 그에 따라 선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은혜란 그러한 선한 행위와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고 하나님은 은혜를 거저 주신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만약 사람들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잘 사용하면 더 큰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배웠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 안에 있는 것’(what lies in them)으로 행할 수 있었고,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다. 개신교도들은 믿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믿음의 내용)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했다. 개신교도들은 은혜는 단지 하나님의 선물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데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순전한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에만 근거한 것으로, 죄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의롭게 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존조차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다음의 설명이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한 컵의 물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파란색 잉크를 그 물속에 넣어 물을 파랗게 만들었다. 이것이 ‘전적 타락’이다. 사람의 모든 면은 죄로 물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른 스콜라 신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육신과 비교하면 원죄로 인해 그렇게 나쁘게 변질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면 다른 개신교 개혁자들처럼 칼뱅 역시 인간의 모든 면은 동일하게 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물은 완전히 파랗다는 것이다. 이신칭의란 마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시야와 파란 물 사이에 필터로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을 그리스도를 통해 보시고 죄인을 그리스도처럼 정결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또 재생(regeneration)과 성화(santification)의 관점에서, 성령은 비록 이 생에서 온전히 맑게 할 수 없을지라도 파란 물을 점점 덜 파랗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과 은혜로 의로워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서우면서도 자유로운 것이다. 중세 후기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는데 구원에 대한 이 불확실성은 상당히 심각한 영적 문제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가르침의 중요성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확신을 가져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해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의 약속을 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구원에 대해 불안해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쉴 수 있는 소식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인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분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 교회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혜란 안수 받은 목회자에 의해 집전되는 성사에 의해 오는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성사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목회자도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종국을 보기 전에 믿음과 은혜로 의로워지는 사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겠다.



성경만으로


개신교 개혁자에게 중심 되는 종교적 권위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들은 성령은 성경의 진리를 인간에게 계시하는 분이며, 성경만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임을 믿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와 성령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말하면 이것은 성령의 목소리가 된다고 말해왔다. 개신교도들은 이에 저항하며 성경과 성령이 하나로 얽혀 성령이 사람들에게 구원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개신교 개혁자들도 교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교회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지상의 도구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과 특별히 목사들(ministers)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모든 지적 능력을 동원하여 성경을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원어로 성경을 읽기 위해 성경 언어를 배우는 것과,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적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는 매우 잘 알려진 표어지만 보기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다. “성경만으로”는 사실 여러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말의 중심 되는 사상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종교적인 지식의 근원은 성경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자연 혹은 인간의 이성, 혹은 교회 전통에서 구원의 지식을 찾을 수 없고 성경에서만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만으로”가 성경이 모든 지식의 백과사전이라든가, 모든 지식의 근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16세기 개신교는 성경을 지질학에 관한 교과서로 보지 않았고 천문학을 배우기 위해 창세기를 읽지는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만으로”를 말하는 사람들조차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성경이 ‘구원을 얻기 위한 지식’의 유일한 권위라는 것이다. 다음의 예에서 이 말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에게 성경은 하나님이 순전히 그분의 은혜에 의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용납하시며 자유롭게 하시는 통찰력의 근원이었다. 루터에게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알아야 할 것에 대한 유일한 권위였다. 어떠한 교회 전통도 다른 것을 추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규칙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예전의 순서나 교회의 직제 혹은 영성 같은 것들을 성경에서 베껴올 필요가 없었다. 그것들은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교회에 그림을 기증하는 것이 어떤 공적을 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한, 교회 안에 양초를 둔다거나 그림을 계속 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재세례파들은 “성경만으로”를 성경은 기독교인의 삶의 모든 측면에 하나님의 지시를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어떤 재세례파는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모든 소유를 공동화하라고 가르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4~5장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주었기 때문이다. 재세례파들은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개혁주의’(Reformed) 혹은 ‘칼뱅식’이라고 불리는 해석은 루터와 재세례파 중간이었다. 루터파처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은 구원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의 유일한 근원이 된다고 말했다. 또한 성경이 교회와 성도의 생활에 질서를 잡는 데 필요한 바른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가 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주석가들은 십계명에서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하는 것은 교회에 그림이 없어야 된다고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루터파가 교회에 그림을 건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림을 거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말했다(이들은 가정이나 공공장소에는 그림을 걸었다. 다만 종교적인 장소에 사용되는 것을 금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또한 성경에서 목회를 어떻게 조직화하고 공예배 형태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바른 방법을 찾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교과서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교인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공동자산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인사제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고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가져온 효과 중 한 가지는 거룩함과 거룩한 것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면(의롭게 되었지만 동시에 죄인인 상태), 같은 사람이 거룩하면서 동시에 세속적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사람, 혹은 사물, 혹은 장소, 혹은 시간을 거룩하다고 또 하나님을 위해 성별되었다고 구분하고 다른 것은 거룩하지 않다고 구분하는 대신,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선이 각 사람과 각 사물을 관통하고 있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로 따로 구분하는 것이고 세속적인 것은 하나님을 반항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당시에 이러한 변화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자유케 하는 것이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믿음과 은혜로만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진정한 차이란 없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았고 같은 법 아래에 있었다. 이것은 만인사제라는 가르침으로 연결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다. 어떤 지상의 사제도 필요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교회는 항상 교회와 시민 사회의 리더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시민 사회의 리더는 종교적인 권위가 없었다. 만인사제설에 관한 개신교의 새로운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종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시민 사회의 리더는 자기 백성들을 도덕적으로 감찰할 책임이 있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전통 교회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개신교도들은 목회자를 가지는 것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목회자가 할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즉 하나님께 중재하는 것이 주 업무였던 사제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가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독 군주들에게 빈민구호나 교육, 도덕적 감찰, 그리고 다른 것들을 다루는 실제적인 영역에 대한 새로운 종교적인 권위를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가들이 설교하는 것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만인사제설은 영성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평신도나 목회자에 관계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관계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혁의 필요성


중세 후기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개혁이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중 어떤 이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관계를 끊지 않고 교회에 남아 일했다. 그러나 루터나 츠빙글리, 칼뱅과 같은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기존 구조 안에서는 필요한 개혁을 일으킬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갈라져 나왔다. 사실상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교회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 지상 교회는 믿음과 은혜로만 의로워지는 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 믿었다. 루터나 츠빙글리처럼 우리가 흔히 듣는 종교개혁자들만 전통 교회에 대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다. 많은 개인들은 로마가 더 이상 참 교회가 아니라고 믿었다. 로마와 갈라선 사람들은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데 일치했지만 참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달랐다. 그래서 그들은 나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개신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믿음과 은혜로만 의로워진다는 것이 핵심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루터나 칼뱅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만으로”를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권위로 읽었다. 그리고 우리가 전적으로 죄의 권세에 매여 있고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나님이 다 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로마교회와 갈라선 다른 개혁자들은 원죄에 대한 생각을, 인간의 의지는 죄에 묶여 있다는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 혹은 악을 선택하는 데 자유롭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차이가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곳은 다름 아닌 교회와 세례에 관한 교리였다. 재세례파(Anabaptists; 그들의 적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라고 불린 이들은 교회는 오직 선택된 자들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선택된 자들이란 믿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하며, 사회를 떠날 위험부담도 감수할 수 있는 자들이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고 선택된 자들만으로 구성된 참 교회로 신약성경을 따라 살아갈 것이 기대되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만이 죄인을 회개시키고 변화시킨다고 믿는 개신교도들은 인간은 누가 선택받은 자고 누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들(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섞여 있는 지상의 교회와 함께 일해야 한다고 믿었다. 개신교도들에게 지상의 교회는 복음이 바르게 설교되고 성례가 올바르게 집전될 때 진짜 교회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교회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자녀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을 교회에서 키우면서 그들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믿음을 가르쳐주는 것은 합당한 것이었다. 교회론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개신교도들과 ‘다시 세례하는 사람들’(rebaptisers)이라고 불린 사람들 사이에 중요한 분열을 이끌었다. 각 그룹의 영성 또한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개신교도들 사이에도 또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종교적 회화를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는 경우에서 봤듯이, 특별히 “성경만으로”를 교회의 조직에 적용하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또 다른 차이점은 개신교도들이 받아들인 다른 성례인 성만찬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특별히 이 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각 사람은 그리스도와 주의 만찬의 관계에 대한 다른 편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루터는 성찬이 그리스도가 떡과 잔 ‘속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 임재하시기 때문에 은혜의 수단이 된다고 믿었다. 한편 츠빙글리는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떡과 잔은 감사와 기념이며 믿음의 징표이지 은혜의 수단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나눔은 개신교도들에게 성례적 은혜와 영적인 실천을 이해하는 방식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망명자 칼뱅


종종 개신교 개혁자들을 나열할 때 ‘루터, 칼뱅, 츠빙글리’로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바른 순서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같은 나이지만 칼뱅은 그들보다 25년이나 어렸다. 그가 개신교도가 되었을 때는 이미 많은 것들이 일어난 후였다. 로마에 대한 개신교적인 반응은 많이 정해졌고 로마와 갈라진 개신교도들 사이의 분열도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러니까 칼뱅은 개신교도들이 이미 분열되었을 때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할 수 있었던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칼뱅은 완벽한 2세대 개혁자였다. 신학적 통찰력은 다양한 형태를 갖는 법이다. 칼뱅은 루터와 같이 개척자적인 개혁자는 아니었지만 조직화와 사상과 문장력의 명쾌함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개신교는 칼뱅이 없이는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종종 말하는데, 이는 그가 새로운 교회 세계의 조직화를 모양 지우고 그것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것들 중 하나는 교회의 독자성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새로운 개신교를 외부의 도움 없이 시 정부로부터 독립한 자율적인 공동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칼뱅은 대부분의 개신교 개혁자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는 망명자였다. 루터는 색소니 출신의 사람이었다. 츠빙글리는 독일계 스위스에서 태어난 독일계 스위스인이었다. 부처는 알사스 출신이었고 크랜머는 영국 사람이었지만, 칼뱅은 그의 인생 대부분을 망명자로서 살았던 전례가 거의 없는 개혁자였다. 그는 제네바시에서 영주권자였기에 선거를 할 수도 없었다(제네바시는 그의 생애 끝 무렵에 가서야 시민권을 주었다). 오늘 우리는 제네바와 프랑스는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칼뱅 당시는 그렇지 않았고 언어조차도 분명히 달랐다. 칼뱅이 해야 했던 모든 것은 입을 여는 것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곧바로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망명자로서의 이러한 경험은 교회의 신약성경 모델은 자체법과 자율성을 갖는 것이라는 그의 이해와 합쳐져 교회와 영성의 가르침에 매우 독특한 성격을 부여했다. 칼뱅은 그의 신앙과 그의 집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는데 그것은 그의 영성을 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비록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그에게 집, 가족, 그리고 생명까지도 포기하게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교회와 사회가 분리되지는 않더라도 교회를 시민 사회로부터 구분하는 그의 교회론과 함께 칼뱅이 이해한 기독교적 삶의 영성은 순례자와 같은 것으로 핍박받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교회가 나름의 구조를 갖는다는 그의 가르침은 가톨릭 국가에서 소수 그룹인 기독교인 공동체는 자신들 나름의 종교적 생활을 조직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망명과 순례 경험의 강도는 칼뱅을 따르는 교회들이 그들의 신앙을 빼앗고자 하는 어떤 권세나 사람들에게도 저항하는, 군사적인 영성을 발전시키도록 만들어주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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