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역사와 교회사 Ⅰ


제1부 초대교회

서기 64년, 로마는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거대한 불길은 로마제국 수도 거의 대부분에서 육일동안 밤낮으로 겉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이 화재로 거대한 도시의 절반이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로마의 고대 유명한 건축물들이 화염속으로 사라졌고, 공포에 사로잡힌 수만명의 로마시 민들은 집을 잃고 재산도 몽땅 잃게 되었다.

자신의 궁전 지붕 꼭대기에서 네로 황제는 이 끔직한 전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로마 시민 중 일부는 이 사건의 진위를 의심했다. 그들은 잔인하고 광적이며 미친 네로 황제가 개인적으로 이 화재를 일으켰다고 믿었다.

네로는 자신을 위대한 건축가로 착각하고, 오래된 로마시를 없애버리고 새롭고 더 웅장한 도시 즉 네로의 로마를 건설하길 원했다.


황제 자신이 화재를 계획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네로는 자신의 안전에 위험을 느꼈다.

그는 책임을 전가시킬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만 했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네 로는 새로운 종교단체 -로마의 그리스도인- 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켰다.


그것은 근거가 있는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경멸받고 비난당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대 로마신들의 숭배와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절했다.

그들이 전하 는 새로운 왕에 관한 이야기는 반역처럼 들렸고, 또한 영향력과 권력도 없었기에 희생양으 로는 완벽한 존재였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처벌을 명령했다. 드디어 피흘림이 시작된 것이다.


황제는 아무 죄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혹한 고문과 핍박을 가하였다.

어떤 이는 십자가 에 못박히고 다른 이들은 동물 가죽에 덮인 채로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사나운 개들에게 찢겨 죽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네로 황제의 정원에서 열리는 파티의 불을 밝히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해야만 하였다.


수년동안 박해는 극성을 떨쳤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통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시기가 되었다.

네로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중에는 로마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헬라어를 말하는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있었다.



제자들의 순교


수년동안 사도 바울은 여러 참된 교회에 앞으로 닥칠 박해에 관하여 여러 번 경고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하셨던 말씀을 상기시켰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 세상은 그들이 살기에 편한 곳이 아니었다.

바울 자신도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20년 이상 전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며 인내하였다.

그 러나 마침내 그의 고난이 끝날 때가 가까워졌다.


네로는 자신의 신하에게 바울의 사형 소식을 전하도록 보냈다.

잠시 후에 군인들이 도착 하여 바울을 사형집행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끌고 갔다.

바울은 검에 자신의 목을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는 오스티언 가에 묻히었다. 그때는 서기 68년 이었다. 그리고 초여름이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서기 68년에 순교하였다.

그는 수년 전에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요21:18-19).


(참고-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전통적인 이야 기는 근거가 없는 말이다.

바울서신에서는 로마에 있었던 바울사도가 로마에서 베드로를 만 났다는 기록이 한 군데도 없다.

로마 카톨릭이 베드로의 교황권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또한 베드로의 무덤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역자주)



유대인들의 반란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진리의 전파와 감독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고,

핍박받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제공 하지 못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예루살렘 역시 혼란의 와중에 있었다.


서기 66년, 식민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군사적 힘에 대항하 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눅21:20-21)를 마음에 새겼던 유대의 그리스도인 들은 산으로 도망갔다.


서기 69년 봄에 로마의 타이투스(Titus) 장군은 자신의 군대로 요단강의 동쪽부터 휩쓸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요단강의 동쪽에 있는 길리아드 산맥에 위치한 펠러시의 북동쪽 으로 피신함으로써 임박한 재앙을 모면하였다.


서기 70년 타이투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그는 성전을 불태우고 기초석까지 파괴 시켰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약110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고 수십만명의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잔혹한 재난이었다!



재림은 곧 일어날 것인가?


로마와 유대 그리고 전 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대변동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 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었을 까?


비록 많은 이들이 집을 잃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가족과 친구를 빼앗기는 고통을 당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옛날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그들의 훗날에 받을 영광을 생 각함으로써 이러한 고통을 견디었다.

모든 사태가 그들을 위협할수록 그들은 숨을 죽이고 예언의 성취를 기다렸다. 그들은 예 수님의 다시오심과 하나님의 나라의 재건을 눈에 그리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마가가 기 록한 말씀을 살펴보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 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예수님은 가시는 곳 어디에서나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소식을 주로 전파하셨다. 12제자들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보냄을 받았다(눅9:1-2). 사도 바울 또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행19:8, 20:25, 28:23,31).


1세기를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가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실재적인 국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 국가는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를 대 신할 하나님이 통치하는 참다운 국가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임할 이 나라에 대한 많은 성경 예언들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자 세히 말하곤 했다. 그들은 그 예언의 성취가 눈앞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다니엘 선지자는 인류 역사 동안 전 세계를 통치할 네개의 세계제국에 대하여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바벨론(Babylon), 메데 파사(Medo-Persia), 그리스와 로마제국이다.


다니엘은 이 지상의 왕국들이 소멸된 이후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 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 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2:44)


이 왕국이 전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로마제국을 산산조각내어 소멸시킬 것이다,. 이러한 일이 곧 일어나리라고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사2:4),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피를 흘리게 만들었던 창과 검을 쳐서 보습(쟁기)과 낫을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그 어깨에 정사를 메시리라고 여겼다(사9:6)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의 의인들이 4,000년 이상이나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리라 고 고대하였다. 서기 66-70년 사이의 사건들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이 곧 이루어지리리고 확신하였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


예수님이 땅에 계실 동안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즉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 게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간 어떤 귀인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셨다(눅19:11- 12).


후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왕이 되시려고 태어나셨다. 그러나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 예수님은 훗날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자신의 종들에게 상을 주시기 위해 되돌아 오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빌라도가 이해 한 것 이상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께 질문하였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대답하셨다(행1:7).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권능을 주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40년 이상, 제자들은 로마와 아시아 그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 언하신(마24장) 시대말의 사인이 확실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서기 69년에 내란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멸망의 기로에 놓인 것 같이 보였다. 전쟁, 도덕 적 타락, 사회현상의 대변동, 경제적 위기감, 정치적 와해, 종교적 혼란, 자연 재해 등 이 모 든 사태가 끝이 가까워진 것을 증거하는 것 같았다. 로마 사회 구조가 와해되고 있었고 부 패하고 타락해 갔다. 확실히 예수님은 이 모든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이 다니엘이 예언한 네번째 짐승(단7장)이라고 확신했다. 이 네 번째 왕국이 혼란의 와중에 있었기에 ,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해야만 했다.

끔찍한 박해와 순교 그리고 자연재해를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부활(고전 15:50-53)을 기다렸고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눅19:17-19)을 고대하였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요14:3)


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불행히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당시에 임하지 않았다.



의문점들


서기 66-70년 사이의 격변하는 사건들이 있은 후에도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으시자 그리 스도인들은 매우 당황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혼란에 빠졌고 용기를 잃게 되었다.


예수님이 재림하리라고 확신했던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의문에 빠졌다.

교회는 시련을 당하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고민스러운 결정을 해야만 했다. 어떤 그리스 도인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도 이 문제에 부딪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 이 있으리라고 믿고 오랫동안 예수님을 기다려왔다.


서기50년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 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4:15)

라는 편지를 하였다. 5년 후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그러나 죽기 직전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전과 다른 말을 하였다. 그는 현 재가 아닌 미래 시제를 사용하면서 "말세(마지막 때)"에 관한 말을 하였다(딤후3:1-2).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위에서 바울은 훗날에 받을 면류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과는 달리 많은 그 리스도인들은 낙심하고 용기를 잃었다. 그들은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재림 에 관한 약속이 어디 있는가?"라고 불평했다.


이와는 달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이들이 닥칠 문제를 미리 아시고 계셨다는 것 을 깨닫고, 그들이 어떻게 해야되는지 말씀하신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인내를 가지 고 선행을 격려하며 기다렸다. 그들은 예수님이 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 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이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을 얻을 "끝까지 견디는 자"(마24:13) 들이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요21:22)을 잘못 이해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은 사도 요 한의 시대에 언젠가는 재림하시리라고 믿었다(요21:20-23). 요한이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 라 (요한은 다른 사도들보다 오래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생각을 따랐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세대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 다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게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불안하고 평안이 없었다. 그들 은 다른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눈을 삶의 진정한 목적과 복음의 진리로부터 돌리 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거에 가졌던 긴박감을 상실하고 옳은 길에서 빗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혼돈상태에 있었고 상처받기 쉬웠다.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진리의 차이는 별로 없 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했고 또한 어느 때라도 신실한 믿음을 가 지고 준비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초기 기독교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고대 바벨론 이교의 사악한 누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다른 복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되었다. 또한 당황하고 상심한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늑대에게 먹히게 되었다.

거짓선생은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도 있었다. 서기 50년 이전에 바울은 데 살로니가 교회에 이미 진리를 대신하기 위한 음모가 진행중이라고 경고했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 라"(살후2:7)


바울은 또한 갈라디아인들에게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예수님이 전 파하신 진실한 복음을 짓밟으려 한다고 경고했다(갈1:6-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이들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후11:4)고 말했다. 바울은 그들을 "거짓사도"이며 사탄의 역군이라 불렀다(고후11:13-15).


바울은 자주 교회들에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24:4-5,11)을 상기시켰다. 적은 무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옳은 길에서 벗어나 기독교로 가장한 거짓 믿음에 속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이 사실로 나타났다. 사태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거짓 선생들이 가 르치는 잘못된 진리는 절망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을 분열시켰다. 이교의 교리와 잘못된 가르 침에 의해 당파가 생기고 그리스도인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알아채지 못했지만, 교회의 분열은 이미 수 십년 전에 거짓 누룩을 심은 한 사람의 가르침에 의한 열매에 불과한 것이었다. 지금부터 이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 도록 하겠다.



마술사 시몬


사마리아 출신의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클로디오스(Claudius)황제 시대인 서기 45년에 로마 에 나타났다. 이 시몬은 바벨론 종교의 후예인 사마리아 비밀 종교(계17:5)의 제사장이었다. 이 비밀 종교는 이스라엘이 앗수리아에 포로로 잡혀간 후 앗수르아인들에 의해 사마리아로 흘러 들어온 것이다(왕하17:24).

시몬은 여러가지 기적으로 로마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여러 잡신을 섬겼던 시민들은 그를 신이라고까지 여겼다.


로마에 가기 이전인 서기 33년에 사마리아에 있었을 때 시몬 마그우스(Siman Magus)는 기 독교인들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진실한 믿음도 없이 집사였던 빌립에 게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아직 시몬은 진심으로 전에 마술사로서 가졌던 명성과 영향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도들에게 그들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돈을 주고 사겠다고 요청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시몬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을 심하게 꾸짖고 그의 악한 행위 를 회개하라고 경고한 후, 그를 회개케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금하였다 (행8장).


몇 년 후 로마를 여행할 때, 시몬은 서구세계에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 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음모를 꾸몄다. 그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추종세력을 갖 는 것이었다. 그는 바벨론 이교신앙과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가 혼합된 자신의 가르침을 위 장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도용했다. 그는 자신의 사악한 교리를 기독교로 장식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와 의식을 이용했다.


그가 죽을 때 즈음에 시몬은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유혹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잘못 혼합된 교리에 매력을 느낀 어떤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심스럽게 교회안에 숨어 들어와 서 시몬의 가르침을 은밀히 소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희생이 되 었다. 서기 62년에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교회내에서 시몬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가 한 것을 폭로하였다.


시몬의 잘못이 나타남에 따라,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 은 그만 두었지만 계속해서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랐다. 그들은 더 이상 시몬파로 불리지 는 않았으나 여전히 그의 교리를 추종하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리스도 자신을 전파 하는 것으로 가장했으나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았다.


몇 년 후에 누가가 그랬던 것처럼 유다는 시몬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1:4)


그리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1:3)고 간곡하게 타일 렀다. 또한 사도 바울이 일찍이 예언한 것처럼(행20:29-30), 하나님의 교회라고 자처한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만심과 돈을 사랑하고 스스로 진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교가 교회안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로 이런 사람들을 분별할 수도 있었으나 어 느 경우에는 너무 미세하게 그리고 서서히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에 인식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마디로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계시


교회 안에 침투한 이교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사도 요한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12 제자 가운데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는 부지런히 그릇된 생각과 누룩의 침 투을 막았다.

서기 75년경에 요한은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요이1:7)라고 기록했다.

그 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났다고 말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 니라"(요일2:19)


요한은 어떤 배교한 교회 지도자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내쫓았다고 기록했다 (요삼1:9-10).


로마의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박해 기간 동안에 요한은 에게해에 있는 밧모 (PATMOS)라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몹시 놀라운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를 통하여 요한은 미래에 있을 주의 날 즉 하나님의 불의하고 죄악된 이 세상 나 라에 재앙들을 보내시고 심판하실 날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재앙들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재림하실 때에 절정에 이를 것이다.


요한이 계시를 통하여 본 일련의 사건들은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계시에는 놀랍고 거의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머리가 여럿 달 린 짐승과 거대한 군대들 이상한 새로운 무기 재앙들 그리고 끔찍한 자연재해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새로운 인식


계시록이 쓰여지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전에 믿었던 것처럼 임박한 것이 아 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전에는 희미하던 다니엘서의 모든 예언들이 이제는 분명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계시는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질 사 건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 세기 아니 천년 이상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시작을 가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 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22)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모든 인류를 다 전멸시킬 수 있 는 창과 화살을 어떻게 구할 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요한계시록은 그 해답을 제시해 준 것이다. 앞으로 미래의 어느 날에 요한이 이상한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 같은, 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초강력 무기가 전인류의 멸절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미래의 어느 날이지 초대 교회의 시대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이 다시 군대들에게 짓밟히고(눅21:20), 서기 66-70년에 있었던 것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 즉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된 후를 가르키 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다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새로 운 진리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천국이 이땅에 이루어졌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서기 96년에 요한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남은 생애 동안에 요한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계실때처럼 교회에 진정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힘썼다.

1세기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다. 믿음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마음대로 성경을 이해하려 하였다.

 

 

제2부 비진리와의 연합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하였고 로마제국에 의한 핍박은 잠깐동안 멈추었다. 그러나 많 은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잃었다.

구원받는 대신 그들은 네로 황제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 하게 된 것이다.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이 순교당했다는 소식을 들 어야만 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마지막 시대의 징조로 로마 군대에 의 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했다.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

모든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서 왕중 왕으로 재림하시는 영광의 순간을 향해 급속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림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시대에 재림하셔야만 한다고 스 스로에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분이 오시지 않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고 그 말씀이 서기 66년에서 70 년 사이에 일어난 것은 단지 인류의 마지막에 있을 예루살렘이 당할 일의 전주곡에 불과하 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끝은 아직 아니었다.


실망하고 인내심을 잃은 많은 이들이 진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그리 스도인이라 불렀지만 참 하나님의 진리에서 벗어나고 의심스러운 다른 교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단이 성하게 되고 교리의 차이로 인하여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이 가짜라고 주장하고 스스로 계시를 말하기도 했다. 전에 사도들이 말한 배 도가 실체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데 서기 68년에 바울이 순교하고 베드로가 죽음을 당한 지 30년 이상이 지나는 동안 교회는 사도 요한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있었다. 교회는 그에 의해 직접 감독을 받고 신실한 장로들이 그를 도우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세우고 교회를 세 워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에베소에서 죽자 교회 내에 새로운 분쟁이 일어났고 요한의 강력한 감독 아래 있었던 교회들은 그가 죽자 하나님이 어디에서 역사하시는지를 알지 못하고 갈 바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과 신실한 장로들의 가르침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의 사 도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말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참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 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떠나 계속 믿음을 지켰고 참진리를 확고히 붙잡아 전세계의 보이지 않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 할 것을 믿었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가지고 이땅에 평화 를 이루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계속되는 박해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의 차이에 상관없이 -그들이 배도한 자이건 신실한 자이건 간에- 그 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모든 사람은 계속해서 박해를 당하였다.

여러 신들을 섬기는 로마인들은 종교적으로 참을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에게 자신들의 신들을 섬기도록 허락해 주었다. 심지어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민족에게조 차 자신들의 종교를 믿도록 강조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경우는 달랐다. 왜냐하면 여러 이방종교가 재빨리 황제의 신격화를 수용하고 자신들의 재단에 희생제사를 드리는데 반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 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황제에게 불충성했기에 박해를 받았다.


박해를 시작한 최초의 황제인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핍박하였다. 그후 250년간 열번 정도의 큰 박해가 기독교에 가해졌다. (네로의 이름의 수값은 666이었다. 그는 적그리 스도 모형이었다-역자 주)


서기 95년경에 도미티안(Domitian)황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타이투스 장군의 형제인 베 스파시언(Vespasian)의 아들- 는 짧지만 지독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기독교인 들이 살해된 것이다.


서기 98년 마르쿠스 율피우스 트라자누스(흔히 트라잔(Trajan)으로 알려짐)가 로마 원로회 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의 눈으로 볼 때, 기독교는 로마정부에 대항하고 있기에 벌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의 통치 기간에 죽은 인물 중에 영향력이 컸던 안디옥의 교부이자 신학자였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있었는데 그는 서기 110년에 로마에서 사자 밥이 되었 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제수이트를 창설한 "이그나티우스 드 로욜라"(Ignatius De Loyola)와는 다른 사람으로서 진실한 초대 기독교의 인도자였으며 제수이트(Jesuits)를 창설한 로욜라(Loyola)의 본명은 "이니고 드 로욜라"(Inigo De Loyola)였다. 로욜라는 스페인 人으로서 1541년에서 1556년까지 살았다. -역자 주)


트라잔의 후계자인 하드리안(Hadrian:117-138)과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138-161)는 대학살을 계속 자행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가 황제직을 이어받을 즈음에, 로마제국은 전쟁과 반란, 홍수, 질병, 기근으로 거의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큰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무지한 민중들은 이 재난의 책임을 대부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시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직 황제만을 섬기도록 명령했고 법으로 이것을 정하였다. 그 결과 네로 황제 이후로 가장 심한 박해가 가해졌고 수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해야 만 했다. 이중 신학자 저스틴 마르티르(Justin Martyr)는 로마에서 죽임을 당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193-211)와 막시민(Maximin:235-238) 황제는 여전히 박해를 가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형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하고

목이 잘려 죽어갔다.


데시우스(Decius:249-251) 황제는 기독교를 완전히 없애기로 작정했다. 전 제국내에서 끔찍 한 피흘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밸러리안(Valerian:253-260) 황제 시대에는

 더 가혹한 박해가 있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언(Diocletian:284-305) 황제에 의해 시작된 박해는 그 어느 때보다 매우 심했다. 이것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워버리기 위해 시작한 체계적인 박해였다. 그 리스도인들을 향한 디오클레티언 황제의 증오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서기 303년에는 황제만을 경배하라는 칙령이 선포되었다. 황제의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그들의 개인 재산을 몰수하였고, 모든 집회는 금 지되었다. 교회는 흩어지게 되었고 성서의 기록 문서들이 파손되었다.


이 완고하고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모든 고문도구와 온 갖 방법이 동원되었다. '기독교의 전멸'을 기념하기 위한 주화가 만들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도망갔다. 갈리아(Gaul), 스페인, 영국과 라인(Rhine)지역을 통치하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러스(Constantius Chlorus)는 자 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를 금지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했고 그의 장군들은 그의 행동을 칭찬했다.



내란(Civil War)


디오클레티언 시대에 정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는 한 사람이 다스리기에는 로마제국의 땅덩어리가 너무 넓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큰 제국 을 더 잘 다스릴 목적으로 디오클레티언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나누어서 자신의 친구인 막시 미안에게 제국의 반을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제국은 둘로 나뉘어졌다. 디오클레티언이 동로마를 다스리고 소아시아(Asia Minor)의 니코 메디아(Nicomedia)를 수도로 정했다. 막시미안이 서로마를 통치하게 되었고 북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밀라노를 수도로 세웠다.


이 두 황제는 자신들의 통치를 돕도록 케사르(Caesar)라는 명칭을 가진 보좌관을 선출했다. 이들이 황제의 뒤를 이어서 제국을 통치하게 되고 차기 케사르를 선출하도록 하였다. 디오 클레티언과 막시미언에 의해 선출된 케사르들은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 클로 러스였다. 이들이 국경지역의 군대를 지휘했다.

심한 병을 앓고 난 후, 디오클레티언 황제는 서기 305년 3월 1일 황제직에서 퇴위했고 그는 막시미언도 자신처럼 황제직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하여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권력을 승계했다. 갈레리우스가 동로마, 콘스탄티우스가 서로마를 통치했다.


그 다음 해에 스코틀랜드 픽트人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길에서 콘스탄티우스가 갑자기 사 망하자, 그의 군대는 차기 황제로 아들인 콘스탄틴을 추대하였다(콘스탄틴(Constantine)은 겉 으로는 기독교人인척 하였으나 비밀리에 당시 바벨론신앙의 로마형태인 태양신, 솔(sol)을 믿고 있었으며 지하에 숨어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어 멸절시키기 위해 기독교에 자유를 주었을 뿐이며 로마식 혼합기독교인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주었고 그가 본 십자가 형상은 앵크십자가로서 고대 바벨론의 태양신 숭배 형상이며 섹스심볼이었다. -역자 주). 디 오클레티안이 바라는 순조로운 승계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 8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내란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로마제국과 기독교 역사를 뒤바꿔 놓을 무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의 공인


서기 312년 디오클레티안에 의해 9년 전에 시작된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 시대에 로마의 감독은 일반적으로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로 인식되었는데 감독은 "pope"(라틴어의 papa<아버지>에서 유래된 단어임)이라 불렸고

그 이후로 교회내에서 오랜동 안 사용되었다. (이 명칭이 로마의 주교만을 위한 것으로 제한된 것은 9세기 부터이다)

밀티아디스(Miltiades)는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지도하는 감독이었다.


밀티아디스 이전에 로마교회에 있었던 300여명의 감독들은 거의 전부가 순교하였는데 심 한 박해 아래 있었던 밀티아디스도 더 나은 소망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기 312년 10월 29일, 밀티아디스는 집 밖으로 나서다가 콘스탄틴 황제가 자기를 기다 리고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많은 무장한 군인들이 콘스탄틴을 호위하고 있 었던 것이다.


밀티아디스 집에 오기전에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의 이복형제이자 경쟁자인 막센티우스 (Maxentius:막시미안의 아들)를 로마근처에 있는 밀비안(Milvian)다리에서 패배시켰다. 이 중 요한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콘스탄틴은 왕위를 지키고 서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면 콘스탄틴은 로마 기독교인의 지도자를 개인적으로 박해하는데 자신의 승리를 사용 하려 했을까?

황제는 밀티아디스의 측근인 실베스터(Silvester)의 통역으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밀티 아디스가 들은 내용은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여는 서곡이었다. 세계 역사상 그와 같이 극적인 사건은 없었다.



십자가의 환상


밀비안 전투 바로 직전에 콘스탄틴은 한 환상을 보았다. 하늘에 불타는 듯한 앵크 십자가 형상이 나타나고 그 위에 "In Hoc Signo Vinces"(이 표시로 승리하라!)라는 글자가 쓰여져 있 었다. 이 환상에 깊은 감동을 받은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상징으로서 'r'(이것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X.-Chi와 P.-Pho의 첫자를 포개어서 상징화한 것이다)를 사용하게 했으 며, 군대의 기장과 방패에 새기도록 명령했다.


이제 전쟁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막센티우스는 전쟁에 패배하였 다. 이 중대한 싸움의 승리는 콘스탄틴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고,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맞 이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공인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으나 죽을 때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로마에 거대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거기에는 콘스탄 틴의 승리를 신의 뜻이라고 기록하였다.


곧이어 콘스탄틴은 밀라노 칙령(313년)을 공포하고 기독교 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섬 기도록 허락했다.

콘스탄틴은 화려한 라테란(Lateran) 궁전을 로마의 주교에게 기증하였고 밀티아디스가 314 년 1월에 죽은 후, 실베스터가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황제는 관직에 많ㅇ느 기독교인 들을 참여시켰고 교회건물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정말로 사태가 바뀐 것이다! 황제들에 의해 수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온 교회는 이제 황제 와 친구가 된 것이다. 기독교는 이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한 이것은 전 로마 제국의 모든 사건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이러한 상황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정말로 꿈같은 일이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새로운 상황에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3세기 이상이나 예수님의 다시오심과 구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멸망과 예수님이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열심히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박해가 끝나고 교회는 권력을 갖게 되고 존경받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박해에 관한 많은 예언들을 보았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교회 가 번창하고 땅에서 환영받으리라고 예언하신 적이 없었다. 어느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교 회가 이 땅에서 번창하고 권력을 갖게되리라고는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가?"라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의문을 품었다.

참 성경진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시 오셨 을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권정치


계속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관념에 대한 재평가가 계속되었다. 321년 콘스탄틴 은 오래된 태양의 날(Day of the Sun, Sunday)을 금하고 대신 일곱번째 날을 안식일(Sabbath;유 대인들은 금요일 오후 6시부터 토요일 오후 6시까지를 안식일로 지켰다)로 대치시켰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새로운 명령에 따라 이것을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어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그만 두어야만 했다(365년 라오디게아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안식일' 지키는 것을 금하였다).


324년에 황제는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의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고 일년 전인 323년에 콘 스탄틴은 동로마 황제를 패배시켜 단일 황제가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서구세계에서 공인된 종교가 된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 일치를 가속화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콘스탄틴은 325년에 로마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모집하여 비밀회의를 열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여러 교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공의회가 비티니아(Bithynia)에 위치한 니케아(Nicea)에서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에는 두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 지와의 관계였다. 이 논쟁은 아리안 논쟁(Arian Controversy)이라고 불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Arius)는 예수님이 창조된 인간이며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공의회는 그를 비난하고 아리안파를 쫓아냈다.(그러나 이 들의 가르침은 여러 지역에 퍼졌다. 후에 코트족과 독일인이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이때 기 독교란 아리안 파를 말한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유월절의 정확한 날짜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소아시아에 살던 그리스도인- 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는 히브리의 니산월 14일을 예 수님이 죽으신 날로 기념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와 서유럽의 교회들은 예수님의 죽 음 대신에 부활을 더 강조했고 그들은 일면에 한번 유월절을 기념했는데 그 날은 항상 일요 일이었다.


공의회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더 이상 예수님의 고난만을 되새기는 날 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로마는 최초의 일요일을 이전에 지키던 관습에 따라, 보름 달이 춘분점을 지난 첫날로 하였다. 후에 독일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이 날은 "Easter"(부활절)로 불리게 되었다 (부활절(Easter)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고난당하시고 3일 후에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배도했던 고 대 로마 카톨릭이 만든 절기로서 "이스텔"이란 용어는 고대 바벨론의 여신 세미라미스 (Semiramis)의 앗시리안식 이름인 "이스텔"(Ishtar)의 다른 형의 발음으로서 봄철에 생명이 싹 트는 시기가 이스텔 여신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때이다. 다산을 뜻하는 여신이며 닭이 알 을 낳는 것처럼 많은 생산을 뜻하는 여신인데 이 여신을 기념하는 시기가 부활절(Easter)과 혼합되어 오늘날 부활절에 계란을 먹는 이교풍습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다 -역자 주).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 새로운 칙령을 받아들였고, 이들이 기독교의 주요 세력이 되었고 세상도 그들이 참된 기독교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 부했고 핍박을 피해 유럽의 산과 소아시아로 피난갔다. 역사의 기록에서는 사라졌지만 이들 은 참 하나님의 교회로서 믿음을 지켜나갔다(이들을 재침례교도(AnaBaptist) 라고 한다. 이들 의 신앙은 <재침례교도의 역사>(요단출판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역자 주).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내의 일치를 받아들였고, 이전에 믿던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단일 정부, 단일 황제, 단일 교회가 이루어졌고 한 신만을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교회 자체 -기독교화된 로마제국- 가 그렇게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인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서서히 이루어지며 콘스탄틴의 밀라노 칙령은 이것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인 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세상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 진리에 위배되며, 기독교의 참된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아무리 겉모습을 바꾼다 할지 라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당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역자 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로마제국과 전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수 만, 아니 수백만 명의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와 정치와의 연합은 이와 같이 하여 준비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후 수 세기 동안 문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교회와 정치의 대립


콘스탄틴 대제는 337년 5월 22일 사망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야 이마에 물을 떨어뜨리는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틴이 죽은지 25년이 지난 후,

그의 조카인 쥴리안(361-363)이 왕위에 올랐는데 쥴리 안의 삼촌은 신앙을 거부하고 예전에 섬겼던 고대 신들의 숭배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배교자'라고 불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미워했으나 유대인들은 보호했고 예루살렘에 자신들의 성전을 세우도 록 허락했다.


쥴리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과 여신들 숭배는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페르시아 원정길에서 쥴리안이 죽은 후,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에서 현격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94년 데오도시우시(378-395) 황제는 모든 제국내에서의 고대 신들의 숭배를 정식으로 금했 다. 데오도시우스 시대에 있어서 교회의 힘은 밀란 추기경인 암브로세(Ambrose)와 관련된 사건에서 가장 잘 나타나있다. 성격이 포악한 데오도시우스는 반란을 일으킨 보복으로 데살 로니가 주민 7,000명의 학살을 명하여 아무 죄도 없는 데살로니가인들은 데오도시우스가 보 낸 코트족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말았다.


후에 황제가 밀란에 있는 어느 성당에 들어가려 했을 때, 추기경 암브로세는 문에서 그를 저지하고 학살에 대한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비록 개 인적으로 그 사건을 후회는 했지만, 황제는 그러한 굴복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신을 실추시 키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여덟 달 후에 데오도시우스는 마침내 군중 앞에서 암브로세에 게 겸손하게 용서를 간청하게 되었다.


390년 크리스마스 날에야 비로서 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데오도시우스는 통 합된 로마를 다스렸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죽은 후,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넘어갔다. 호노리우스(Honorius)는 서로마를 다시리고 아카디우스(Arcadius)는 동로마를 다스렸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통치를 위해 분류했지만, 이 분할은 영속적인 것이 되고 말아 동서로 마는 점차 사이가 벌어졌고 다시는 연합되지 못했다.



바바리아인들의 침입


점점 강대해지는 코트족과 게르만 부족은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수세 기 동안 로마인들은 바바리아 유목민들과 전쟁을 벌여왔다.

이제 이 부족들이 로마제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십년동안 많은 부족들이 로마의 경계를 넘어와 서 평화적으로 정착하였다. 많은 독일 민족이 로마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어떤 이들은 궁전 에서 봉사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자 이러한 독일인 중 한 사람이 왕자 호노리우스(Honorius)의 후견 인이 되었다.

그 사람은 반달족(Vandals, 5세기에 서유럽에 침입하여 로마를 약탈한 게르만의 한 종족 -역자 주) 출신의 스틸리코(Stilicho)였다. 그는 바바리안 족들의 공격을 여러 번 막 아냈다.


이 바바리안 족들 중에서 가장 골치아픈 민족은 서고트( Visigoth)족이었다. 스틸리코는 이 탈리아 반도를 침입한 서고트 족을 쫓아버렸다.


그러나 호노리우스는 로마를 그렇게 여러 번 구해준 장군을 시기하여 408년 8월에 스틸 리코를 암살하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또 한번의 침략을 야기시켰다.

값비싼 대가에도 불구하고 서고트 족의 알라릭은 409년에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다. 다음 해에 그들은 다시 로마를 공격하여 410년 8월 로마를 정복했다. 그 후 6일동안 로마는 살 육과 약탈을 당하였다. 800년 역사상 최초로 로마가 외국 군대의 손에 넘어갔다.

 

그것은 매우 충격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롬(Jerome: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음)은 베들레헴에서 이 소식을 듣자 이러한 글을 썼다.

"슬픔을 참을 수가 없고 눈물이 앞을 가려서 글을 쓰기가 힘들다. 전 세계를 호령하던 도 시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다니! 흙더미 위에 세워졌던 로마가 멸망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 어지지 않는다"


서로마제국의 패망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그러나 제국의 왕위를 지키는 황제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최소한도의 의식을 행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로마제국은 이어져갔다.


알라릭은 도시를 정복한 후 얼마후에 죽었다. 로마는 서고트인들에게 거주지로서 가장 부 유한 지역을 내주었다. 5세기 중엽에 바바리아인들이 서로마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 다.



교황의 평화 중재


모든 야만민족 중에서도 훈족(흉노족)이 가장 사나운 민족이었다. 이 유목 민족은 중앙아 시아로 세력을 펼쳐 나갔으며 유명한 아틸라(Attila)라는 인물이 이들을 지도했다. 그 시대에 그는 흔히 '하나님의 회초리'(Scourge of God)라고 불렸다.


451년 아틸라는 게르만의 서고트족이 다스리는 갈리아(Gaul, 고대 켈트 사람의 땅으로 지 금의 북이탈리아×프랑스×벨기에 등을 포함함 - 역자 주)를 침입하였다. 로마의 아에티우스 (Aetius) 장군은 서로마와 서고트 족들을 모아서 칼론(Chalons) 근처에서 아틸라에게 대항하 였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들 중의 하나였다. 아틸라가 싸움에서 패배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아틸라의 힘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다음 해인 452년에 아틸라는 큰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침략했다. 로마의 저지선은 곧 무너졌다. 로마까지의 길이 아틸라 앞에 열려 있었고, 로마 시민들은 최악의 사태를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로마는 살아남았다. 아틸라는 자신의 손안에 로마를 움켜지기 직전에 실패하였다. 로마로의 행군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때에 로마의 주교는 레오(Leo)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력한 아틸라를 만나기 위해 북 쪽 지역에 있는 포강(Po River)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두사람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이루 어졌는지에 관한 문서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서움을 모르는 외교가인 레오는 '하나님의 회초리'(아틸라)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틸라 를 설득하여 로마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틸라는 얼마 후에 죽었다. 훈족은 더 이상 유럽을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 로마를 건진 레오의 행동으로 인하여 주교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시민 정치가 더 이상 통치의 역할 을 수행하지 못하자 교회가 이것을 대치하게 되었다.


역사에 의하면, 레오 대제가 교황권을 확고하게 만든 교황이라고 한다. 레오가 이탈리아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레오는 모든 성직자들을 감독할 수 있는 로마 주교(교황)의 지상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5세기 초에 북아프리카의 히포 지역 주교인 어거스틴은 "로마가 말할 때, 모든 논쟁은 끝 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다. 451년에 열렸던 칼세돈(Chalcedon) 공의회에서 레오는 다음 과 같은 글을 공포하였다.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씀하신다. 다른 것을 믿는 사람은 파문당해 마땅하다."

교황권은 그리스도에 의해 베드로에게 넘겨졌다는 것과 교황이 베드로의 권한을 이어받는 다는 교리가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455년 6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왕인 젠세릭(Genseric)이 로마를 차지하였다. 레오 교황 의 중재로 젠세릭은 로마 시민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그들의 재산을 요구했다. 레오의 평화적인 중재역할은 로마제국에서 뿐아니라 교회내에서의 교황의 권한과 특권을 더욱 확고 하게 만들어 주었다.



로마의 몰락


로마는 점점 쇠퇴하여 갔고, 교황의 노력만으로는 로마를 구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단지 의식을 행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서부유럽의 왕들은 대부분 교황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의식을 행하는 존재로 남아있던 위치도 빼앗기게 되었다.


476년 어린 소년 왕이 로마의 왕좌에 않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로물러스 아우구스투스 (Romulus Augustus)로 로마의 창건자 로물러스(Romulus)의 이름과 황제(Augustus)의 이름이 함께 들어있다. 그가 로마의 마지막 황제이다.


독일의 오도아세르 장군은 더 이상 꼭두각시왕을 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476년 9 월 4일 로물러스 아우구스투스를 왕위에서 쫓아냈다. 서서히 진행중이던 로마의 몰락은 드 디어 종결되었다.


서로마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되었고 로마는 멸망하였다. 황제의 자리는 비었고 동로마황제 인 제노는 오도아세르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서로마에 거의 영향 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며 오도아세르는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서로마의 멸망으로 고대역사는 끝을 맺었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대부분의 서 부유럽은 독일의 게르만 출신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이중 다수가 로마의 기독교 즉 카톨 릭에 반대하는 아리안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그들은 아리안 기독교국가 가 아닌 카톨릭 국가를 세우고 싶어했다.

 


제3부 로마제국의 재건 시도 


로마제국이 멸망하다!

당시까지만 해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로마제국이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 게 되었다.

전세계를 정복했던 제국이 이제는 오히려 정복을 당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통치자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되었으나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의 난공불락의 요새 덕분에 계속 고대 로마제국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때 동로마의 황제는 제노(Zeno)였다.


오도아세르는 표면상으로는 제노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했으며 제노는 이탈리아를 자신의 통치관할구역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아드리드해 연안의 일부 지역에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고 실제로는 오도아세르가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확고히 잡고 있었다

(그가 전이 탈리아 반도의 지배자였다).


오도아세르는 통치형태를 로마를 본따서 조직했고 초기에 그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이유는 오도아세르가 아리우스(Arius)학파의 교리를 추종하는 아리안 기독교인이었고 이와 반대로 이탈리아 국민들은 카톨릭 신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서기 429년부터 반달족들이 북부 아프리카를 통치했는데 이곳의 상황도 이탈리아와 비슷 했다. 반달족들은 로마의 정치형태를 자신들의 통치체제에 수용하였다. 반달족들도 역시 아 리안 기독교인들이었으며 이들은 종종 이탈리아 제국내의 카톨릭 신자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서로마를 침입한 아리안 기독교를 믿는 야만인들의 발아래 곤란을 당 하게 된 것이다.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로 교회는 절대적인 시민들의 지지를 받 고 있었으나 이제 상황이 최악의 상태로 바뀔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서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보기싫은 아리안 이교도들(반달족)을 몰아내기 위해 무슨 방도를 취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새로운 왕 


서기 476년 오도아세르는 마지막 로마황제를 퇴위시켰고, 같은 해에 데오도릭(Theodoric) 이라는 이름의 젊은 귀족이 동고트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데오도릭은 남동부 유럽에 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진 바바리안 출신의 왕이었다.


동로마 황제인 제노는 이 야심만만한 데오도릭을 경계했고 사나운 동고트족들이 자신의 제국을 침략할 것을 두려워하여 데오도릭을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해 주었다. 이 때가 서 기 488년 이며 제노는 데오도릭을 달래어 동고트족의 위협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데오도릭은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와 자신이 오도아세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고 발표했고 490년 가을이 되자 데오도릭은 거의 모든 이탈리아 반도를 자신 의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일부 이탈리아 도시들은 오도아세르 휘하의 군수비대가 장악하 고 있었기 때문에 데오도릭은 이러한 요새들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비밀 음모 


비록 데오도릭은 개인적으로는 아리안 기독교의 교리를 지지했지만 이탈리아의 로마 카톨 릭 성직자들의 지지로 왕이 된 입장이었다.

카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은 오도아세르보다는 데 오도릭이 통치아래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은 이탈리아의 모든 카톨릭 신자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 다.

이들은 헤룰리(오도아세르의 충실한 부하)와 그 외 오도아세르에게 여전히 충성을 하고 있는 모든 군인들을 단번에 제거할 계획이었다.


이 음모의 비밀은 잘 유지되었으며 정확한 계획표대로 진행되었고 헤룰리는 불시에 기습 을 당하였다. 단 한번의 공격으로 고트족들도 할 수 없는 일을 이탈리아의 카톨릭 교도들이 이룩한 것이었다. 당시의 역사가가 기록한 대로 '끔찍한 이 대학살'은 헤룰리의 군사적 힘을 완전히 멸절시켰다.


평야지대의 전투에서 패한 오도아세르는 로마의 북부에 있는 라벤나 요새로 철수한 뒤 포 위되어 거의 3년을 버티다가 493년 드디어 항복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493년 3월 5 일 데오도릭은 오도아세르를 자신이 머무는 레벤나로 초대했고 많은 고민 끝에 오도아세르 는 그 초대에 응했다.


그러나 오도아세르가 성의 문에 도착하자 두명의 데오도릭 군사가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았 고 덤불속에 숨어있던 다른 병사들도 그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대 가 누구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오도아세르가 자신들 앞에 홀로 서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 였다. 병사들이 머뭇거리자 데오도릭이 스스로 나서서 날이 넓은 칼로 오도아세르를 머리부 터 칼로 내리쳐서 두동강이를 내어 버렸다.


이 음모의 성공으로 데오도릭은 로마의 막강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이탈리아에 강력한 왕 국을 세웠다. 데오도릭은 옛 로마의 문화를 존중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이 사용하던 정치형 태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데오도릭과 그의 후손들은 아리안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그들 도 역시 근절되어야만 한다고 로마 카톨릭의 성직자들은 생각했다.

데오도릭은 526년 10월 30일 라벤나에서 죽었다. 데오도릭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만 있 었기에 왕국은 데오도릭의 손자들이 분할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새로운 로마 


한편으로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서서히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서 쪽이 야만족들의 발아래 굴복해 갔지만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327년 새로운 로마제국의 수도를 거대한 규모로 짓기 시작했고 이름을 'Nova Roma(새로운 로마)'라고 불렀다. 이 도시는 고대 그리스의 비잔티움市가 있던 곳에 건 설되었다.


서로마가 멸망하자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로마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데오도릭을 이 탈리아의 왕으로 임명한 동로마의 제노 황제의 뒤를 이어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491- 518)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저스틴(Justin;518-527)이 그 뒤를 이었다.


527년 10월 -데오도릭이 후계자가 없이 라벤나에서 죽은 지 일년 된 때- 에 새로운 황제 가 동로마의 왕좌에 앉게 되었다. 후사가 없었던 저스틴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저스티니 언(Justinian)이 동로마의 황제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저스티니언은 거의 40년동안 동로마를 다스렸다.


저스티니언은 당시 45살로 날카로운 기지를 가진 대단히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저스티니언에게는 데오도라(Theodora)라 불리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저스티니언은 황제가 되기 4년 전인 523년에 그녀와 결혼했었다.


데오도라는 하층계급 출신이며 과거에는 배우이자 댄서에 불과했었다. 데오도라의 아버지 는 히포드롬 서커스단에서 곰을 훈련시키던 사람이었고 그녀가 한때 창녀였다는 소문이 끊 임없이 나돌았다. 이것에 대한 논쟁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어쨌든 그녀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데오도라는 모든 면에서 명실상부한 동로마의 여왕이 되었다. 여왕으로서 데오도라의 도덕성은 나무랄 것이 없었고 저스티니언이 죽기 전까지 21 년동안 그의 훌륭한 배우자요, 충고자였다. 데오도라는 매우 영리하고 용감한 여성이었고 그 녀가 없었다면 저스티니언은 황제의 자리를 지켜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복하라! 


저스티니언은 황제자리에 오르자마자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스포츠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서로 다른 선수들을 열광적으로 응원하였다.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전차경기였는데 전차경기선수들이 입는 웃옷의 색깔을 따서 청팀과 녹색팀으로 나뉘어졌다.


532년 이 두팀의 응원단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 양편의 주모자들이 처벌을 받게 되었 는데 이것에 앙심을 품은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정부를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사태가 커짐에 따라 정부도 양편으로 나누어지고 방화, 살인이 시 전체에서 자주 발생하 였다. 수천명이 살해되었고 반란군들은 'Nika(그리스말로 '승리'라는 의미)'라고 외쳐댔다. 이 러한 이유로 이 반란은 'Nika Riots(니카 반란)'이라 불리운다.


저스티니언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며 수도를 포기하고 배로 피난가기로 결심했다. 그러 나 마지막 순간에 데오도라 여왕이 그를 설득했다. 데오도라는 남편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돌려 놓았다. "저는 여기에 남아 이곳을 내 무덤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녀의 확고부동 한 태도는 저스티니언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도 남기로 결정했다.


저스티니언은 벨리사리우스(Belisarius)를 3,000명의 군대와 함께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하 도록 하였다. 반란군들은 무참히 무너져 내렸으며 벨리사리우스는 하루만에 30,000명을 죽였다.


저스티니언의 왕위는 보존되었고 역사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불타는 야망 


저스티니언은 자신의 선조들이 야만족들에 빼앗긴 서로마의 영토를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꿈은 과거와 같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시키는 것이었고 저스티니언은 자신이야말로 통일된 로마제국의 참다운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스티니언은 종교적 통일없이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마 나 동로마의 대부분의 종교는 기독교였으나 초기의 형태와 같지는 않았으며 교리의 차이로 인해 동서로마의 종교체제는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


저스티니언은 신학교리를 통일시키고 양쪽의 종교지도자들을 화해시킴으로써 비잔티움과 이탈리아간의 정치적 재결합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는 정치와 종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 생각했다.


이 당시에 가장 큰 신학적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고 믿었다(이들을 '영지주의 자'라고 부른다).


교황의 감독아래 있던 서로마는 이 영지주의 교리를 믿지 않았으며 451년 칼세돈 공의회 는 이 영지주의는 이교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계속 이어져 내려갔으며 동로마의 교회는 카톨릭 정교회와 영지주의를 믿는 교회로 나뉘어졌다.


제노 황제와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영지주의를 지지했고 이것 때문에 콘스탄티노플과 로 마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지주의는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서도 지지를 받았 다.



종교적 난제 


518년 저스틴이 황제직을 계승함으로 말미암아 교황과의 관계가 새롭게 재개되었고 로마 와의 대화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동로마의 고위성직자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칼세돈의 결정을 지지하는 화해의 편지에 서명했다.


칼세돈의 권위는 이와 같이 다시 세워지게 되어 잠시동안이기는 하지만 동로마와 서로마 의 교회가 화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영 지주의는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저스티니언은 개인적으로 칼세돈 공의회의 내용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완고한 영지주의자 들을 교회와 연합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저스티니언은 약간의 성공만을 거두었을 뿐이다.


저스티니언의 노력은 데오도라 왕비에 의해 무산되었는데 데오도라 왕비가 영지주의 교리 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536년에 데오도라는 로마 감독인 비질리우스(Vigilius)와 음모를 꾸몄다. 비질리우스는 교 황이 될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마의 카톨릭 교회를 영지주의를 지지하는 방향으 로 유도하는 일을 돕겠다고 데오도라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데오도라는 칼세돈 공의회 의결 사항을 폐지시키는데 교황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비질리우스를 돕겠다고 하였다.


다음해인 537년 비질리우스는 교황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황을 이용하려던 데오도라는 곧 실망하게 되었다. 많은 반대압력으로 말미암아 비질리우스는 데오도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수년 동안 영지주의에 관한 논란은 종교세계내에서 계속되었고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저스티니언 황제는 이 문제를 종결짓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553년 5월,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교황이 소집해서 열린 5번째 전교회의 공의회) 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 제기된 의제들은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으며 마침내 공의회는 동 방 정교회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조금씩 수용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에 동의했으나 영지주의자들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내용이 과거 칼세돈 공의회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 비질리우스는 공의회의 칙 령을 받아들일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주위의 압력으로 마침내 554년 2월 공의회의 판결을 승인하는 공식문서에 서명했다.


이 결과 저스티니언 황제는 비질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고 또한 교황권을 확고히 한 국사칙령(國事勅令-국가의 기본법을 이루게 됨)을 내렸다. 그러나 교황 비질리우스는 로마로 가는 여행 도중에 죽었고 새로운 교황으로는 저스티니언의 지지 를 받은 펠러기우스가 선출되었다.


저스티니언 황제의 국사칙령은 교황의 지상권을 강화시켰고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는 종교와 정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당시에 교황권은 동로마 황제보 다 밑에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저스티니언 황제가 죽은 이후에도 제국은 여전히 다른 종교적 교리로 말미암아 나뉘어져 있었고 동서교회의 균열은 점점 깊어갔다. 저스티니언 황제가 살아있을 때에는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야만인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통치 기간동안에 제국의 영토는 거의 2배로 늘어났다.

저스티니언 황제는 565년 11월 14일에 죽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83세였고 그는 38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제국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3년이 지난 후에는 게르만족인 롬바르트가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이탈리아의 절반정도가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또 다 시 동로마 황제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된 것이다.


동로마를 끊임없이 위협해 온 적 중의 하나는 페르시아였고 아랍의 모하메드 때문에 동로 마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그후 역사의 무대는 점차 서유럽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강력한 프랑크 왕 국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저스티니언 황제의 노력은 그가 죽은 이후에 유럽의 여러 왕들에게 계승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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