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과 구약성서(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I. 서 론
A. 고고학(Archaeology)이란?
희랍어 αρχαιος ‘원래의, 본래의, 고대의, 옛날의, 낡은’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시작, 기원, 처음, 태초, 원천’ 등의 뜻을 가진 헬라어 명사 αρχη에서 파생된 단어임.
와 λογος ‘(사상의 구체화로서) 말씀, 진술, 연고’를 뜻하며, ‘말하다, 주장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λεγω 에서 파생됨.
로부터 나왔으며, 옛 것이나 옛 사람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B. 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의 출현
1. 르네상스 이전의 상태
르네상스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성서상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성서의 권위에 의문을 품지 않았으며, 성서 내의 기록과 이야기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2. 르네상스 이후의 변화
수많은 발명과 발견은 과학을 비롯한 기타 다른 학문들의 발전을 가지고 왔다. 따라서 기존에 표준시 되어왔던 것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으며, 고대 역사와 종교를 취급하는 기록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성서 역시 다른 고대 문헌과 같이 비평의 대상으로 놓여지게 되었고 결국 하나의 신빙성없는 고대 문서로 격하될 위기에 이르렀다.
예) 발달설(The Development Hypothesis: Graf-Wellhousen Theory)
: 헤겔의 변증법적 이론과 다윈의 진화론적 연구 방법을 도입하여 이스라엘 종교도 다른 일반 종교의 발전과정(저급종교에서 고급종교)을 거친 것으로 주장한다. 모세오경도 모세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닌 연대가 다른 4가지 자료를 편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4가지 자료를 사상 발달 순서에 따라 진화론적으로 연대를 정한 학설이다.
① 야웨문서(Jahwistic document: J 문서 - 주전 850년경)
: 야웨의 신명칭(Jahweh)을 사용하며 기록된 장소가 유다라고 추정한다.
여기에는 창조 와 타락, 죄와 하나님의 심판,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으며 출애굽 사건과 시내 광야 행진, 계명과 약속,
가나안 진입 역사가 포함되었다.
② 엘로힘 문서(Elohistic Document: E 문서 - 주전 750년경)
: 엘로힘(Elohim)이라는 신명칭이 사용되며, 기록 장소는 북왕국 에브라임으로 추정한다.
여기에는 남쪽 유다보다 북이스라엘의 전통을 더 강조하는 이스라엘 약사를 기록했다 고 본다.
③ 신명기 법전(Deuteronomy: D 문서 - 주전 621년에서 주전 400년경)
: 요시야왕 18년(주전 621년)에 성전 헌금궤에서 발견된 율법서가 신명기 12:-26:까지의 중심부와 같다는 주장(De Wette)을 기초로하여 문서 자료 연대로 정하고 이를 신명기 법전이라고 불렀다. 물론 성전에서 발견된 원 신명기 법전은 주전 621년보다 이전에 작성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 법전이 주전 621년에 발견된 이후 주전 400년경까지 몇 차례에 걸쳐 편집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④ 제사 법전(Priesterkodex or Priestly Code: P 문서 - 주전 470-400년경/포로기 이후)
: 미완성 오경(J.E.D)에 대한 역사적 주석이나 주전 6세기의 미드라쉬(Midrash)라고 할 수 있으며, 율법과 역사 그리고 제사 의식법을 종합한 것이다. 이에 대한 좀더 자세한 정보와 비판에 대해서는 다음 도서를 참고하시오.
최종진, 「구약성서개론」 (서울: 소망사, 1990), pp. 80-105.
U. Cassuto, 「반문서설」 배제민 역편 (서울: 기독교문사, 1994)
3. 성서고고학의 출현과 그 유익
19세기에 이르러 성지(The Holy Land)인 팔레스틴은 물론 이웃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성서와 관련된 많은 수의 위대한 발굴들이 이루어져 고등비평의 주장들은 근거없는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듯 성서고고학은 크게 두 가지로 성서 특히 구약성서에 도움을 주었다.
첫째로 구약성서는 고대 근동 지방의 사람들에 의해 고대 언어로 기록되었고 고대 근동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에 대한 지식은 구약성서를 좀더 완전히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로 성서고고학을 통하여 구약성서는 그 고대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가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 역사에 근거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II. 본 론
A. 성서고고학 방법론 개요
1. 발굴지 : 텔(Tell)이라고 불리우는 고대 도시의 용지이다. 이 말은 “폐허의 무더기”라는 뜻을 가진 바벨론어와 같은 뜻이다.
텔(Tell)이라는 말은 아라비아어이다.
이 지역은 오래전에 멸망한 성읍들의 유적을 간직 하고있는 인공 언덕을 가리킨다.
2. 발굴지 혹은 발굴품의 연대 측정
: 오지 그릇의 연대 기록에 의한 측정(Flinders Petrie)과 방사선 연대(Willard F. Libby)가 대표적인 방법.
3. 발굴된 고대 토판(Tablets)에 대한 해독(解讀)
: 롤린슨(H.C.Rowlinson)은 고대 페르시아어와 아카디아어 그리고 수메르어를 해독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프랑스의 샹풀리옹(Jean Francois Champollion)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
B. 고고학 연구로 밝혀진 족장시대
1. 아브라함의 생활무대였던 우르(Ur) - 이미 주전 약 2.700년전에 제1대 왕조가 창설되었으며, 그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 신전들과 기타 다른 건물들 - 장식된 기둥. 전원 풍경을 묘사한 정교한 모자이크.
2) 정교하게 제작된 구리 숫소 유물 발견.
3) 우르의 왕실 무덤 - 이 지역에는 없는 석회석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특히 숩아드(Shub-ad) 라고 확인된 여자의 무덤에서는 금으로 만든 잔이 출토되었다. 사체의 머리는 금과 은으로 장식되었으며, 준보석급 돌들로 꾸며져 있었다.
4)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읽기, 쓰기, 산수, 지리 등을 학습하였으며, 아브라함 당시 일반 시민 들의 주택은 현재 바그다드의 하류층 사람들의 집보다 더 좋게 지어졌다. 우르를 발굴했던 울리(Sir. Leonard Woolley) 경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그는 한 위대한 도시의 시민이었으며 고대의 고도로 조직된 문명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5) 우르의 종말 - 주전 1.950년경 한창 번영 중이던 우르 제3대 왕조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아모리 족의 침략과 엘람족의 약탈로 종말을 맞게 되었다. 아브라함 일가의 하란 이주는 이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고 추측된다.
2. 마리 문서(Mari Texts) - 우르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남쪽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아모리 족은 마리(Mari: 現 Tell Hariri)에 수도를 정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지배하였다. 마리 문서들은 이 시기의 왕궁 문서 보관소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다(주전 18세기경).
1) 이 문서가 구약성서를 위해 중요한 것은 족장들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라반 그리고 요셉과 같은 이름들이 주전 2.000년경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 다는 것이다.
예) 아브라함 : A-ba-ra-ma, A-ba-am-ra-ma, A-ba-am-ra-am.
3. 누지 문서(Nuzi Texts) - 호리족(Horites)의 성읍인 누지에서 발굴된 문서로서 족장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주전 15세기경).
1) 남자는 자기 부인이 아기를 낳지 못할 때에 그 여종과 결혼할 수 있으며, 그 여종이 자기가 받은 영광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건방진 행동을 할 때에는 그 여주인으로 하여금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cf. 창세기 16:1-6).
2) 어느 부부에게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들였으나 훗날 그 부부에게 친자식이 생겼을 경우 재산 상속권은 친자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가정 수호신(드라빔)의 소유는 순수한 종교적 이유의 차원을 넘어 장자의 상속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cf. 창세기 31:19, 30-35).
3) 누지 문서에서 나타나는 결혼의 목적은 주로 출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남자 상속인이 없는 사람은 사위(데릴사위)를 양자로 택하여 자신의 상속자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위가 낳은 자식들은 외조부 생존시에는 그의 자식으로 지내야 했다(cf. 창세기 31:28,43). 심지어 노예를 양자로 들여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는 경우도 있었다(cf. 창세기 15:2-4).
4)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혼수의 하나로서 여종을 한 명씩 딸려보내야 했다(cf. 창세기 29:24, 29).
5) 아내의 지위는 법적으로 보장되었으며, 첩은 집안에서 조금 열등한 신분에 속하였다. 그렇 지만 누지의 법률은 첩의 자식이 가족 안에 남도록 명령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를 추방한 다는 것은 엄중하게 규제되었다(cf. 창세기 21:10-11).
6) 누지 사회에서는 족장의 임종이 임박하였을 때에 축복을 해주는 습관이 있었다. 이런 축복 선언은 죽어가는 사람의 최후의 뜻과 유언을 나타내는데 이는 돌이킬 수도 없으며 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cf. 창세기 48:8-49).
4. 족장 시대와 모세 시대의 철기사용(창세기 4:22; 신명기 3:11 등)
이러한 사실은 비평적 학자들 사이에서 모세오경의 후기 발생설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인용 되었는데, 이들은 철기의 광범위한 사용이 주전 12세기 이전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은 이러한 주장을 뒤집는 자료를 제시해 주었다.
1) 이집트 제4왕조(주전 26-25세기경), 제6왕조(주전 23세기경), 제11왕조(주전 21-18세기경), 제18왕조(주전 1552-1306년경) 등의 무덤에서 철기류 발견.
2) 메소포타미아의 Tell Chagar Bazar, Tell Asmar, Mari 등지에서 주전 2.000년대에 제작된 철기류 발견.
3) 시리아의 라스 샴라(Ras Shamrah)에서 주전 1.500년경에 제작된 강철 도끼 발견.
출애굽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고고학적 증거물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자존심이 강한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10가지 재앙이나 홍해에서의 패배를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와 요르단 동편(Trans Jordan)을 방랑하면서 거의 유목민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때문에 아무런 행적을 남길 수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간접적인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적 실제성은 물론 그 시기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1. 출애굽 사건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들
출애굽 사건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들은 이 사건의 역사적 실제성을 증명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엇갈린 편이다.
이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객관적으로 살피고 지나가고자 한다.
1) 출애굽 전기설(주전 15세기설: 대개 주전 1.446년에서 주전 1.441년경으로 추측)
① 열왕기상 6:1 -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지 480년”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주전 966 년경) 즉, 966+480=1.446년(?)
② 사사기 11:26 - “이스라엘이 암몬에 거한지 300년이 되었다.” 입다가 암몬왕에게 한 말.
입다는 주전 1.100년경 사람으로 추정됨.
③ 꿈비석(Dream Stele) -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라고 추측되는 아멘호텝 2세의 후계자였던 투트모세 4세는 장자가 아니었다(10번째 재앙과 연관).
2) 출애굽 후기설(주전 13세기설: 주전 1.300년에서 주전 1.220년경으로 추측)
① 출애굽기 1:11 -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이 지역은 힉소스족이 이집트 북부를 통치하던 시대의 수도로서 제19왕조가 들어서서 이 지역을 재건하기 이전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② 민수기 20:-21: - “이스라엘인들이 에돔과 모압을 피해 그들의 땅을 돌아서 갔다.” 에돔과 모압 이 두 나라는 주전 13세기 이전에는 세워지지 않았다(N. Glueck).
③ 메르넵타 석비(주전 1.220년경) - “이스라엘이 황무지가 되었고, 그의 씨가 없어졌으며...”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발견된 이집트의 유일한 비석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 간음 - 함무라비 법전 129항 & 레위기 20:10; 신명기 22:22 / 사형
2) 유괴와 인신매매 - 함무라비 법전 14항 & 출애굽기 21:16 / 가장 무거운 범죄로 간주.
3) 보복의 원리 - 함무라비 법전 196, 197, 199, 200, 206, 210, 230항 & 출애굽기 21:18.19,23; 레위기 24:19-20; 신명기 19:21).
4) 차이점 : 함무라비 법전은 모세 율법과는 달리 윤리적이며 영적인 원리들이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도 높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
1) 파라오 하렘합(주전 1.353-1.319경 통치, 이집트 제18왕조 마지막 파라오)
: 그의 무덤 부조에는 이집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애걸하는 가나안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국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저들의 땅으로 쳐들어가 저들을 멸망시키고 저들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하렘합이 왕위에 등극 하기 이전 장군시절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2) 라기스, 벧엘, 벳세메스, 실로 등의 멸망이 주전 13세기에 일어났다는 고고학적 증거
: 출애굽 전기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들 도시의 멸망이 가나안 족속 혹은 블레셋과의 계속된 전쟁의 결과로 보고 있으나 후기설 지지학자들은 여호수아 시대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보고 있다.
4.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멸하라고 하신 원인은?
: 성서상에는 그 원인으로서 가나안 족속의 종교, 우상숭배, 도덕적 타락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가나안 족속의 신(神)들과 종교 의식은 우가리트 문서(Ugarit Texts : 現 라스 샴라 (Ras Shamra)의 발굴과 해독으로 잘 알 수 있다.
1) 가나안 족속의 예배 형태 : 본질적으로 다신(多神) 숭배 예식의 저급한 형태였으며, 예식의 진행에 있어서 매우 음탕하고 타락된 유흥적인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보수적인 성격의 이집트와 바벨론까지 유입되었다.
2) 타락된 형태의 사례 : 종교적 열정을 예식적인 매음 행위로 표현하는 것 가나안 신전의 여사제들은 단적으로 종교적 창녀들이었다. 이들이 신전을 참배하는 사람들과의 성적 관계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신전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 뱀 숭배, 어린 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행위(미가 6:7), 방종적인 행동 등.
cf. 출애굽기 23:9 -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는 행위.
D. 왕국시대 - 사울시대에서 남유다의 멸망까지.
1. 블레셋 족속과 철기 문화 - 이들은 소아시아 및 기타 지방과의 동맹을 통해 철기 문화와 접촉하게 되어 이스라엘인들보다 더 우수한 무기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cf. 사무엘상 13:22). 나아가 이스라엘의 철기 문화 는 전적으로 블레셋에게 종속되어 있었다(사무엘상 13:19-21).
1) 사무엘상 13:20의 RSV(Revised Standard Version)역
: “the charge was a pim for the plowshares and for the mattocks, and a third of a she-
kel for sharpening the axes and for setting the goads.”
위에서 ‘a pim’이라는 단어는 주전 3.4세기경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던 번역자들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으며, 흠정역(KJV)에서도 단지 ‘with mouth’라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번역을 난외주로 붙여 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의 팔레스틴을 발굴 하던 중 ‘pim’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많은 수의 석제(石製) 문진(文鎭) 책장 혹은 종이 쪽이 바람에 날라가지 않게 사용하는 물건
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무게는 각각 2/3 세겔이었다. 따라서 ‘a pim = 2/3 세겔’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2) 한 핌(a pim)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 - 보리 대두 한 말 가량, 밀 소두 한 말 가량, 양털 4 파운드 가량, 70장의 구운 벽돌 등을 구입 가능.
2. 난공불락의 요새 예루살렘(사무엘하 5:6)
1) 지리적 여건 - 원래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의 도성으로서 현재까지도 결코 말라본 적이 없는 두 개의 우물이 근처에 있었으며, 깊은 계곡에 둘러쌓여 있다.
2) 예루살렘의 지하 수로 - 이 수로를 통하여 다윗의 휘하 장수 요압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사무엘하 5:8; 역대상 11:6).
3. 솔로몬의 성전(The First Temple)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대해서는 성서의 기록 외에는 그 동안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팔레스틴 주변의 페니키아와 시리아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성전의 윤곽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1) 시리아 북부의 텔 타이나트(Tell Tainat)에서 발굴된 한 성전의 기초안과 솔로몬의 성전 기초안의 유사성
① 자립한 두 개의 기둥을 문의 양 측면에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는 입구를 시작으로 성소, 제물이 놓여있는 곳으로 제일 안쪽에 지성소가 위치하였다(역대하 3:17). 이 외에도 기둥 들이 있는 현관 모양과 삼목으로 주름잡힌 내부 조각 그리고 상감으로 꾸며놓은 장식, 천장 바로 밑에 들창들을 끼워놓은 것 등이 페니키아의 그것과 유사하다.
② 페니키아의 성전 모형 및 그림들 역시 두 개의 자립기둥을 보여준다.
2) 이스라엘 성전과 페니키아 성전의 유사성을 갖는 이유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해 두로 (Tyre)왕에 의해 이스라엘에 파견된 공장(工匠)에서 발견된다(역대하 2:13-14). 때문에 솔로몬의 성전은 그 당시에 성행하던 종교적 혼합주의를 나타내기도 한다.
4. 오므리 가(家)의 상아 보물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가문의 부귀와 영화를 말해주는 상아(象牙) 유물들은 미국 고고 학자들의 사마리아 발굴 작업에서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화판 양각의 형태로 야자나무, 백함, 사자, 사슴, 스핑크스 그리고 날개달린 사람 모습들을 그리고 있으며, 상아 상감으로 장식된 한 침대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이들 상아 유물들의 세공 솜씨는 특히 페니키아의 특색으로 되어 있었으나, 성격상으로는 이집트적인 것이었다. 아뭏든 이러한 발굴의 결과로 열왕기상 22장 39절에서 언급한 아합의 상아궁 건축에 대한 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
5. 성서에서 언급한 사건과 주변 국가 역사적 기록의 중복
1) 앗시리아 사르곤 2세(주전 722-705년경)의 콜사밧(Khorsabad) 연대기 中
: “나는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27,290명이나 잡아 갔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전차들을 50대나 거두어들였다...”(열왕기하 18:9-11).
2) 앗시리아 산헤립 연대기 中
: “나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던 유다인 히스기야에 대해서는, 그의 강력했던 성읍들 중 46개 와 그 이웃에 있던 좀더 작은 성읍들을 내가 포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나는 그를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그의 왕도인 예루살렘 성에 가두어 두었다....”(열왕기하 18:14)
cf. 히스기야의 도수관(열왕기하 20:20; 역대하 32:30). 이 도수관에 대한 Dan Gill의 새로운 학설.
3) 유다 왕국의 최후 - 라기스(Tell ed-Duweir)에서 발굴된 18개의 도기 조각들(주전 589년).
문서들 중 대부분은 라기스의 북쪽에 있는 한 군사기지로부터 ‘호사이 아’라는 사람이 라기스의 요아스에게 보낸 지급 공문서들이다.
: 그 내용은 아즈카(Azekah)가 이미 바벨론 사람들에게 함락되었음을 암시하면서 자신들은 비록 아즈카의 신호는 다시금 볼 수 없지만 아직도 라기스의 신호만은 주목하고 있다는 기별이다(cf. 예레미야 34:7).
4) 바벨론에 위치한 느부갓네살의 왕궁 폐허에서 발견된 서판들의 내용 中
: 이방 고용인들과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로 데리고 온 왕족들에게 황실 창고에서 분배하여 준 양식에 대한 기록인데, 그 중에는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 그리고 그들의 한 유대인 개인교사가 기름과 술의 수령인(受領人)들로 나타나 있는 문서가 있었다.
5) 유다 왕국이 멸망하던 시기의 아람어 편지 한 장 - 이집트에서 발견.
: 블레셋 족속의 한 도성 아스글론(Ashkelon)으로 추측된다.
의 왕 아돈(Adon)이 기록하여 파라오 호프라(Hophra) 파라오 호프라는 포위당한 예루살렘을 돕기 위하여 왔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예레미야 37:5).
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여 내려 오고 있다는 것과 그 군대가 아스글론 동북방 35마일 지점에 위치한 아벡까지 진격하여 왔음을 알리고 이집트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되어있다(예레미야 27:2-11).
이 문서의 중요성은 아람어로 기록된 초기 외교 서신이라는 점에 있다. 이로 인하여 다니엘 서의 아람어 부분(단 2:4-7:28)과 에스라서의 아람어 부분(스 4:8-6:18; 7:12-26)이 후기의 환상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던 비평가들의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E. 포로기 시대(The Exile Period)와 포로기 이후 시대(The Post Exile Period)
1. 바벨론 제국의 종말 - 벨사살의 실제성 문제
: 벨사살이라는 이름은 정경 다니엘서 5장과 외경 바룩서를 제외하면 어느 고대 문서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벨론 제국 말년의 바벨론 설형문자 문서들이 해독되자 벨사살이 바벨론 마지막 황제의 황태자임이 밝혀졌다. 벨사살의 아버지는 나보니두스(주전 556-539 년경)로서 자신이 즉위한 지 3년만에 아들 벨사살을 섭정으로 세우고 자신은 아라비아에서의 전투를 위해 떠났으며 타이마(Teima)에 처소를 정하였다. 따라서 벨사살은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제국 전체에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다니엘 5:30). 한편 느부갓네살이 벨사살의 아버지라고 언급한 다니엘서 5장 18절의 내용은 아들과 손자를 가족관계 속에서 상호 교환적 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당시 근동의 상황을 반영한다. 사실 벨사살의 어머니 니토크리스는 느부갓네살의 딸이었다.
2.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 - 고레스왕의 조서(역대하 36:23; 에스라 1:2-4; 6:3-5).
: “...에서 앗술(Ashur)과 수사(Susa), 아가드(Agade), 아스눈낙(Ashnunnak), 잠반(Zamban), 메투르누(Meturnu), 데리(Deri) 그리고 구스 땅 영역과 티그리스 반대편에 있는 성읍들... 그 성읍들 안에 거하고있는 산들까지 내가 그들의 지방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그 곳의 모든 주민들을 모아서 그들을 그들의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3. 엘레판틴 파피리(Elephantin Papyri) - 주전 500-400년경.
1) 에스라서를 위한 중요한 단서 제공: 엘레판틴 문서들은 주전 5세기의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성서에 인용된 페르시아 공문서 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줌으로 에스라서의 인용 문서가 진정한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에스라 6:6-12; 7:11-26).
2) 유월절에 관한 다리우스 2세의 칙령에는 엘레판틴(이집트 상부)에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과 관련되는 자신들의 규칙 모두를 세심하게 주의하여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절기가 이르면 깨끗이 하여야 하고, 니산월 15일과 그 달 21일은 무교절 첫날과 마지막 날 에는 일하지 말아야 하며, 그 절기 7일 동안은 음주는 물론 누룩이 든 것이면 집에 있는 무엇이든 먹어서는 안된다.”
4. 에스더서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고고학적 증명들
: 사실 에스더서의 역사적 진실성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불가능하다. 다만 에스더서에 반영된 상황들이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 결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에스 더서의 저자가 페르시아 궁중의 습관과 규례는 물론 궁전의 구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1) 니푸르(Nippur)의 상업문서 보관소(Business Archieve)
: 이 곳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닥사스다 1세 당시 유대인들이 매우 부유한 생활을 하였으며 페르시아 사람들의 호의를 얻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포로의 신분 이었던 유대인들의 이러한 생활은 이전에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 한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그 이전 상황에 잘 부합된다.
2) 에스더서의 상황 당시의 설형문자 서판 - 베를린 박물관 소장
: 운그나트(A. Ungnad) 교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 박물관의 미간행 서판들을 연구 하던 중 ‘마르두카(Marduka)’- 모르드개(Mordecai)를 바벨론 문자로 옮긴 것-라는 남자에 대한 문서를 발견했다. 이 사람은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통치 기간 중 수사(Susa)의 고위 관리임이 밝혀졌는데, 그의 작위 시피르(Sipir)는 그가 유력한 고문관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에스더 10:2-3).
5. 느헤미야의 원수 세 사람 - 사마리아의 산발랏, 암몬의 도비야, 아라비아인 게셈(느 2:19)
1) 산발랏 - 엘레판틴 파피리 중 한 서판에서 언급되며, 다리우스 2세 당시 페르시아 속령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다.
2) 도비야 - 요르단 동편에 위치한 암몬 종족의 궁전 폐허 부근의 바위 절벽에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이 두번 새겨져 있다. 이집트에서 발견되었으며 프톨레미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제논 파피리(Zenon Papyri)에는 도비야 종족 하나가 언급되어 있으며 이들이 이집트와 광범위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3) 게셈 - 아라비아 서북쪽에서 발견된 리히아족의 비문과 나일강 동부 델타에서 발견된 같은 시대의 은그릇에 새겨진 아람 비문에서 그의 이름이 확인되었다. 이 자료들에서 알 수있는 것은 그가 하나의 유력한 추장이었다는 것이다.
III. 결 론 - 고고학을 통한 구약성서 연구시에 주의할 점.
고고학이 성서를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고고학의 증언이 성서를 성서되게 하는 척도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성서의 기사는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학문적 결론을 초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들의 연구 결과라도 성서의 권위를 넘지는 못한다. 고고학은 단지 성서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도입된 보조학문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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