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의 구조와 신학적 의미


 

1. 사사기의 3부 구조(tri -partite structure)

 

사사기를 한자리에서 앉아 일관성 있게 읽어보면 크게 서론(1:1-3:6), 본론(3:7-16:31), 결론(17 1-21:25)의 세 단락으로 쉽게 나누어 짐을 느낄 수가 있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서곡(overture), 주요 악장, 코다(coda)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도표를 통해 전체 윤곽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I. 서곡(Overture) : 사명 미완수(1:1-3:6)-심판하시는 여호와

1 이스라엘의 정복 실패(1:1-2:5)-사사시대 초기의 가나안 잔당 섬멸전

2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2:6-3:6)-사사 시대의 신학적 성찰

 


II. 주요 악장 : 징계와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들의 구원 이야기(3:7-16:31) -

사사들의 활동-죄악압제구원의 패턴이 시작됨

1 전형적 사사옷니엘(3:7-11) : 아람 왕 구산 리사다임을 이김

2 왼손잡이 사사 에훗(3:12-30) : 모압의 에글론을 쳐부숨-왼손잡이의 통치

A 소사사 삼갈(3:31)

3 여자 사사 드보라(바락)(4:1-5:31) : 가나안의 하솔 왕 야빈(시스라)을 쳐부숨-우리와 그들의 구분

4 전설적 사사 기드온(6:1-8:32) : 미디안을 쳐부숨-압도적인 승산

5 적 사사(anti-judge) 아비멜렉(8:33-9:57)-완전히 다른 어떤 것

B 소사사 돌라(10:1-2)

C 소사사 야일(10:3-5)

6 말에 능한 사사 입다(10:6-12:7) : 암몬을 쳐부숨-약속을 지키는 사람

D 소사사 입산(12:8-10)

E 소사사 엘론(12:11-12)

F 소사사 압돈(12 : 13-15)

7 꿀에 약한 사사 삼손(13 : I -16 : 31) : 블레셋을 쳐부숨-하나님을 위해 구별됨


 

. 코다(Coda) : 종교적 혼란과 도덕적 부패 : (17 : 1-21 : 25 )-일의 전말

1 종교적 혼란(17:1-18 : 31) : 미가 이야기

2 도덕적 부패(19: 1-21 : 25)

 

사사기는 이렇게 형식상의 균형을 이루도록 배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제나 동기에 있어서 매우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구조는 신학적 메시지를 구현하는 한 수단이다. 따라서 이 같은 구조가 사사기 전체의 신학적 메시지 구현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살펴보자.

 

 

정경적-신학적 의미 

 

1. 이스라엘의 비신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종주인 여호와께 불충성하고 불순종하는 백성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의 주요 악장(3:7-16:31)에는 범죄-진노-압제-부르짖음-구원-재범죄의 순환이 무려 6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 같은 반복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성격이 위기 신앙임을 잘 보여준다. 어렵고 힘들 때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다시 옛날의 불순종의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이 사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죄는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2:11-12).

 

이스라엘이 범한 악을 요약하자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렸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정말로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멀리 버리고 완전히 떠났는가? 하나님과는 완전히 결별하고 바알만 섬긴 것인가? 이스라엘은 단 한번도 이런 의미에서 여호와를 버린 적은 없다. 다른 신들을 좋고, 그들에게 절하며, 섬긴 것만 언급했을 뿐,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다는 점을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고 바알 신도 섬긴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이런 행위를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 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내 앞에라고 되어 있다. 즉 내 앞에 다른 신을 너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나를 빼놓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나와 함께 다른 신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기장 중요한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에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다. 사사기는 가나안 종교의 유혹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2. 현대에도 위세 떨치는 가나안 종교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했던 가나안 종교는 오늘도 형태를 바꾼 채 위세를 떨치고 있다. 현대는 우상을 가시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고 있지 않기에, 우상을 섬기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맹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가나안종교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지배 이데올로기 숭앙

의식으로 자연계의 주기를 지속시킴으로써 풍요를 보장받기 원한 가나안 종교는 필연적으로 자연 질서의 리듬과 조화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파괴적인 변화 대신 사회적 현상 유지를 원했던 귀족 계급의 종교로 전락될 수밖에 없었다. 가나안 종교는 지배 구조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민영진은 이렇게 말한다.

가나안의 농경 문화가 만들어 낸 신들, 가나안의 봉건 제도를 합법화해 주는 신들, 토지의 사유화를 합법화해 주는 신들, 지배하는 자유인과 지배당하는 농노 사이의 신분 구분을 합법화해 주는 신들, 많이 버는 이는 언제나 많이 차지하고, 적게 버는 이는 늘 모자라는 그러한 차별 경제를 합법화해. 주는 신들이 바로 가나안의 신들이다. 이러한 신들을 숭배한다는 것은 곧 그것이 옹호하고 있는 지배자 정신,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다시 그들에게로 예속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바로 이런 지배자 정신, 지배 이데올로기가 들어와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교회가 섬기는 정신보다는 남을 지배하려는 정신을 가질 때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가? 한국 교회의 기적적 성장만을 믿고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아니면 고난의 종의 사명을 교회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브라이트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가 고난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받으시는 그리스도 즉 우리의 평안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시는 그리스도를 원하는것은 아닌가?

 

(2) 혼합주의

가나안에서 농경 생활로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됨에 따라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바알을 의지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섬길 때 여호와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현대인들이 종교와 과학을 서로 다른 분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와 바알을 나란히 섬긴 것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신앙과 바알 종교가 상호 배타적이거나 모순된다고 보지 않았다. 여호와는 이 영역(역사)의 주인이시고, 바알은 저 영역(땅의 비옥)의 주인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실제로 민중의 신앙에서 이 두 종교를 공존시키려는 강한 경향이 있었다. 고고학 발굴 결과에 의하면 변방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의 여신인 아스다롯의 작은 상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동시에 돈을 섬기는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맘몬을 섬기면서도 그리스도만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혼합주의적 신앙 행태는 여호와께서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자기 백성이 다른 것에 충성을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더욱이 자연의 영원한 순환과 다산과 풍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가나안 신들과는 달리 여호와는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사건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다. 여호와는 바알처럼 풍요를 관장하지만 자연계의 변화에 따라 죽고 사는 그런 신은 아니다. 여호와는 자연의 주기적 반복이 아니라, 인간이 서로 접촉하며 사는 무대, 불의로 고통받는 이들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회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분이다.

 

가나안 종교에서는 신들을 지배하고 통제해서라도 풍요와 다산을 보장받기 원한다. 그러나 여호와 종교는 풍요와는 관련 없이 오직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언약의 요구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삶의 풍요와 다산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발견하기보다는 사회 가운데서 정의와 공의 가운데 하나님의 실아 계심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풍요와 다산의 유혹 앞에 이스라엘은 정의와 공평이 넘치는 거룩한나라를 형성하지 못했다. 사사기의 이런 모습은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3. 안식의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민족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신과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근 국가들을 들어 그들을 징계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두 방면에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침략해 오는 외국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2:14-15).

, 가나안의 요새화된 도시들에서 완강히 반항하는 가나안인들을 더 이상 아내지 않으셨다(2: 20이하), 이 가나안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시험하도록 방치하신 것이다. 외침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징계하려는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용하셨다. 결국 이로 인해 박해와 큰 고통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안식”(rest)의 땅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불안”(unrest)의 시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사 시대가 진전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 즉 여호와에게 충성하면서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 건설은 한 보도 진전하지 못하고 완전히 정지되고 말았다. 여호와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맹세대로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셨으나, 이제 이스라엘이 불순종함으로 남은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외국의 침략까지 당함으로써,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사무엘과 다윗왕을 통해 구속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하나님 나라는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것이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사무엘상하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그의 소명을 완수하는 데 완전 실패하였음은 물론, 결국은 약속된 안식을 누리지 못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있음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호수아서의 핵심 주제인 땅의 선물이 이스라엘의불순종으로 인해 상실될 수도 있음이 사사기에 음울한 복선으로 깔려 있다. “그 땅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18:30, 한글 개역은 땅 대신 백성”).

 


4. 왕이 없는 사회

 

(1) 공식의 이중적 의미

그렇다면 사사 시대가 이런 흔돈상을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사기 기자는 그 이유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데서 찾고 있다. 흔히 이 구절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 구절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모두 함축된 것으

로 해석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이 누구나 자기의 눈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평등 사회요 각자 책임을 지는 사회라는 긍정적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회라는 부정적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2)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

우선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못 된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다가 자유인이 되었기에 왕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그 누구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지만 여호와께서 해방시켜 자신의 품꾼()으로 삼았던 차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바 나의 품군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 것이라(25:42).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25:55).

 

그렇다면 이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비록 전에는 애굽 왕 바로를 섬기던 노예였지만 이제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되는 무한정한 자유인이 된 것은 아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품꾼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호와의 종이 된 것이다. 결국 이 둘을 합치면 자유롭게 된 종”(freed slave)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왕이 없는 해방된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에 자유롭게 된 종으로서 여호와를 섬기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며살아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었다. 이런 면에서 사사 시대는 여호와만을 왕으로 모시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였는지 모른다.

 

(3) 섬김 없는 자유로 전락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자유를 남용하여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유만 있었을 뿐, 섬김이 없었다. 민영진이 사사 시대를 섬김 없는 자유의 시대로 규정짓는 것은 옳다. 섬김 없는 자유가 결국은 이스라엘의 내부 붕괴와 외침에의 무방비 상태를 노정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첫째, 이스라엘은 이방의 압제에 대항하는 여호와의 전쟁에 일심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드보라와 바락이 철병거 군대 장관 시스라와 전쟁할 때, 드보라와 바락이 거룩한 전쟁 나팔을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르우벤 지파는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선호하여 찬반 양론 끝에 불참하였고

길르앗과 단과 아셀 지파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였다. 시스라의 압제 아래 시달린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들이 앞장을 서고 에브라임, 베냐민, 잇사갈 지파들이 지원병을 보낸 것이 고작이었다. 여호와의 봉신인 이스라엘 12지파는 종주이신 여호와의 전쟁에 마땅히 참여해야 함에도 각자 자

기 소견에 옳은 대로행동하며 언약의 의무에 순종하지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유를 상실하고 이방인의 종으로 전락하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둘째.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함으로 말미암아 지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에 라는 표현은 모두 공동체 내부의 혼란과 관련되어 나온다. 왕이 없이 해방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은 모두 제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하여거룩한 공동체 안의 평안마저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사사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존보다는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는 이스라엘의 독립심(Israel's sense of independence from God)으로 인해 나타난 역사적 결과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사사기의 특징은 이런 자기 중심성( self-centeredness )이다. 주요정복 전쟁에서 적들을 이기고 승리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한 결과로 보기보다는 자신들이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무엇이 그들에게 최상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안다고 믿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 사고로 인해 사사 시대는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무정부 상태, 흔돈 상태를 연출하고 말았다.

 

(4) 왕의 필요성

결국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내부적 혼란과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지상의 왕의 중개적 통치의 필요성을 인식하시고 왕을 주시기로 하였음을 암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네 번이나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라는 후렴구를 반복함으로써, 내레이터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방안을 암시하고 있다. 이 후렴구는 왕 아래서는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비록 이스라엘인들은 진정한 자유 의식을 상실한 채 열방(가나안의 다른 나라들)처럼 되고자 하는 의식으로 점점 바뀌어 갔고 이것이 후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이 열방처럼 왕을 요구하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지만(삼상 8 : 5).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언약적 통치를 중개하기 위해 왕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비평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사사기의 본론은 반왕조적 경향을, 부록은 친왕조적 경향을 드러내어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사기 기자가 왕정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여호와의 왕권을 가로막고 이 왕권에 대항하는 왕권에 대해서 만이다. 즉 여호와의 왕권을 부인하는 지상의 왕권에 대해서만 비판적인 것이다.


 

5. 여호와만이 진정한 사사


이런 음울한 배경 가운데서 그래도 강렬한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것은 사사기가 이스라엘의 유일한 사사는 여호와 한 분뿐이시며, 그가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사라는 히브리어 명칭은 사사들의 이야기 가운데서는 여호와께만 사용되고 있다. 물론 제 2서곡에서 사사들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으로 사사라는 용어(쇼페트)가 사용되었지만, 개별 사사에게 사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은 없다. 서론을 제외하고는 사사라는 명사는 입다가 암몬 왕과 외교적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여호와의 명칭으로 한 번만 나온다(11: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사사이신 여호와’(예호바 하쇼페트, 한글 개역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11:27),

 

사사기의 저 유명한 주인공들에게 명사로 사사로 칭하지 않은 것은 단지 역사적 우연은 아닌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온 세상을 홀로 다스리시는 사사이시기 때문이다. 사사기는 사사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의 행동의 의로우심을 선포하고 있다. 대사사이신 여호와는 인근 국가의 외침과 내부적 혼란으로 이스라엘을 견책하실 뿐 아니라, 사자들을 보내 경고하시고 달래시기도 하신다. 게다가 인간 사사들을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인간 사사들은 왔다가 간다. 그러나 영원하신 사사이신 여호와는 오늘도 온 세상을 홀로 다스리신다. 여기에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


 

6. 인간 사사들은 보통 사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홀로 구원의 행위를 드러내시지 않고 인간 사사를 이용하신다. 여기에 사용된 사사들은 별다른 인물들이 아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영웅들인 사사들을 보라. 왼손잡이 암살자 에훗, 여선지자 드보라, 머뭇거리는 농부인 기드온, 첩의 아들인 입다. 섹스 중독자인 삼손이 아닌가? 사사들은 평범한 신자들과는 전혀 다른 불세출의 영웅들이 아니다. 물론 사사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전 2세기에 예수 벤 시라(Jesus Ben Sira)는 사사들을 매우 이상화하고 있다.

 

사사들 역시, 각기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의 마음이 결코 불충성한 적 없었네.

주님께 등돌린 적 한 번 없었으니 그들을 기억하는 자 복 있으리!

그들의 뼈 무덤 가운데 다시 살아나며 유명한 이름들 다시 그들의 자손들 가운데 살아나리.”

(집회서 46:11-12)

 

벤 시라는 사사들에 대해 이들이 결코 주님께 등돌린 적 한 번도 없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사사들은 마음이 불충성한 적이 정말로 한 번도 없었는가? 순진한 사람들은 흔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사기 성경 기자에게 있어서 이런 칭찬 일변도의 칭송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성경 기지는 사사들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에훗은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바락은 이스라엘 군대 장관이었으나, 혼자서는 대적과 싸우기를 싫어하였다. 따라서 드보라에게 함께 가자고 요청하였다. 물론 이로 말미암아 시스라의 목을 여인의 손에 넘기고 마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범하였다. 기드온은 불의 용사였으나 동시에 두려움에 가득 찬 인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여러 번 양털 뭉치로 하나님의 임재를 시험하지 않았는가? 입다는 어떤가? 창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잡류들의 두목이었던 자가 아닌가? 여호와를 이용하려고 서원을 잘못한 것으로 인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지 않았는가? 삼손은 사자보다 강한 용사였지만 꿀(이방 여인/이방 문화)에는 한없이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는가? 이들은 모두 신앙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실수를 범한 자들로 그리고 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다”(11: 33-34). 우리도 이들같이 무지하고 순종하길 싫어하며 불순한 동기를 지닌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케 되고 의롭다 함을 얻고 거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 여호수(예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중보하시는 왕이 부재한 상황에서(25:14-30; 19:12-27). 하나님 나라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인가? 사사기는 유사한 입장에 놓인 우리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신학적인 메시지

 

사사기서의 주제들과 중심적인 사항들은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들을 네러티브 형태로 제공해 주고 있다.

 

1. 은혜와 율법, 조건성과 무조건성.


신명기적 역사(여호수아-열왕기서) 전체를 통해서 내레이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탐구하고 따져 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및 그의 명령에 복종하라는 그의 요구가 그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들을 압도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이 백성에게 바치고 있는 전적인 관심 및 그가 족장들에게 준 은혜로운 약속들 때문에 그가 그들의 죄를 어느 정도 간과할 것인가? 신학자들은 율법이 은혜보다 앞선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라는 식으로 양자간에 우선순위를 정하려고 하지만 사사기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사기서가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은 조직신학이 아니라 관계의 역사이다. 사사기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고 있는 관계는 조건적이자 무조건적이라는 역설을 남겨 놓는다. 그는 자신의 은혜를 거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의 약속들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순종과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한다. 전체의 네러티브를 끌고 나가는 동인은 바로 이 양자 사이의 긴장이다.

 

2.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자 주인이셨다(8:23). 그러나 선민에 대한 그의 통치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질 것인가? 사사기서는 비중앙집권제적인 통치가 비록 국가의 지도권이나 전쟁 문제에 하나님께서 간헐적으로 개입하시는 식의 축복을 누린다 할지라도 결국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젠가는 왕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17:14-20). 그리고 사사기서는 왕정체제로의 변천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다. 왕정체제, 즉 이미 권력 남용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왕정체제(9)가 과연 다르게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인가? 이 책은 왕정체제라는 다음의 불가피한 단계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다. 달리 어떻게 이스라엘이 땅을 보존하고 그 안에서 계속 거할 수 있을 것인가? 왕정제도가 결국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인가? 무정부주의적인 상태를 종결지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나라가 야웨에게 순결하게 충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줄 것인가?

 

 

신약으로의 접근

 

사사기는 얼마나 人間群像을 잘 집대성하고 있는가? 사사들은 정말 이상한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망설이는 농부, 여자 선지자, 왼손잡이 암살자, 쓸모없는 떠돌이, 성적인 것에 집착하는 나실인 등이었다. 이 하향적인 이야기에 나오는 중심인물들의 약점들과 실패들을 먼발치에서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해지지 않도록 바울은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고전 6:11)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얽히고 설킨 동기들을 가진 우리들 역시 그들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고전6:11)을 입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의 모든 흠집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진 신앙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11:32-33) 한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저지른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은 바뀌어지지가 않았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고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는 증인들의 허다한 구름 중의 일부이다(12:1-2).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싸움을 대신 싸워 이기신 분, 하나님에 의해 일으킴을 받으시고 그의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신 분을 필요로 한다. 우리 역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들을 대신 얻어주실 지도자, 우리의 신앙을 완전하게 하실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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