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벌코프의 기독론 요약


글 / 신원균 목사



Ⅰ. 서 론


벌코프의 기독론은 인간론과 기독론의 관계 설명부터 시작된다. 인간론은 인간을 그 본래적 영광의 흔적의 일부가 여전히 있는, 하나님의 지극히 특권적인 피조물로서, 그러나 그 창조시의 권리, 참된 자유, 원의(原義)의 거룩성을 상실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피조성에 주의를 기울일 뿐 아니라, 그 죄성(罪性)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 하나님과 사람간의 “윤리적” 거리를 강조한다.


벌코프는 이것은 인간도 천사도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사실상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기독론은 부분적으로 그 같은 부르짖음에 응답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율법의 제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신인(神人)간의 장벽을 타파하고 인간을 당신과의 복된 교제의 신분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인간에게로 나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벌코프는 은혜언약에 관계된 것을 인간론 마지막에 다루고 있고 기독론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벌코프의 기독론에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특히 속죄에 관련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인간론과의 관계에서 기독론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죄성에 의해 하나님과의 멀어진 관계를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회복하였기 때문이다. 이번 벌코프의 기독론을 살펴봄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속죄 부분보다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 즉,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나머지는 대략적으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그리스도의 명칭


1) 예 수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 히브리어 여호수아(Jehoshua, Joshua, 수 1:1; 슥 3:1), 또는 예수아(Jeshua, 스 2:2; 포로기 이후의 역사서에 규칙적으로 등장하는 형태)의 헬라어 형이다. 이말은 구세주를 의미한다. 메시야의 사적인 명칭이라고 하겠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공적인 명칭이라 할 수 있으며 구약의 마수아흐(‘기름 붓다’의 의미인 마샤흐에서 파생)와 동격이다. 따라서 “기름 부음받은 자”를 의미한다. 구세대에는 왕과 제사장, 선지자가 기름을 부음 받았다. 기름 부음은 직분에 임명함을, 기름 부은 바 된 자의 신성한 관계 및 결과적인 신성불가침의 확립, 성령을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전달함의 가시적 상징이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직분에 임명되셨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의 기름 부음은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을 때와 그가 특히 수세시 성령을 받으셨을 때였다.



3) 인

이는 예수님의 가장 일상적인 칭호였다. 그는 이 명칭을 40회 이상 자신에게 적용시켰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이를 삼갔다.

보스박사는 예수님께서 이 명칭을 선호하신 것은 아마도 그것이 메시야직에 대한 일체의 가능한 유대교적 악용으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용어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자신을 인자로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은 메시야직에 그 자신의 천국 중심적(heaven-centered) 정신을 불어넣으셨다. 그리고 이로써 그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높이 고양시키신 것은 그의 초기 제자들이 그를 가장 천국적인 명칭으로 부르기를 주저했던 것과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



4) 하나님의 아들

(1) 직분적 또는 메시야적 의미

그리스도의 성질보다는 직위를 묘사는 하는 경우, 메시야는 하나님의 후사와 대표자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될 수 있었다.


(2) 삼위 일체적 의미

이 명칭은 때때로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그 자체로는 선재적 아들 됨을 가리키며, 이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과 메시야로서의 공식적 소명을 완전히 초월하는 개념이다.


(3) 출생적 의미

그리스도는 그의 초자연적 출생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호칭된다.


(4) 윤리 종교적 의미

신약에서는 이 같은 의미에서 믿는 자들에게 ‘아들들’ 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특별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이 같은 의미에서 이 명칭을 예수께 적용한다. 이 신학은 예수님의 아들 됨은 오직 윤리, 종교적인 것이며, 그 제자들보다 다소 높은 지위를 점하고 있다 해도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이름은 70인역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적용되는데, 여호와의 동격어이다. 이것은 아도나이의 번역으로 인간적 경칭을 하나님께 적용시킨 것이다.

이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 정중하고 존경하는 인사 형식, 그리스도의 신성과 권위 개념을 내포하지 않은 단순한 소유권과 권위의 표현, 권위의 최고 함축어로서 승귀된 인격을 표현하여 사실상 “하나님”과 동의어등 삼중적 의미로 쓰인다.

본 명칭의 개념 역사에서 불변적인 한 가지 요소는 권위 있는 소유권이라는 개념이다.



2. 그리스도의 관한 교리의 변화


가장 초기로부터(좀더 구체적으로 칼케돈 회의 이래) 교회는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를 신앙으로 고백해 왔다. 이 회의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인 위격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오류로 분명히 인정되는 몇몇 해결책을 타개하려 했다. 그리고 교회는 단일 위격의 양성 교리를 받아들였는데, 그 비밀을 완전히 이해해서가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계시된 신비임을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본 교리에 대한 합리주의적 공격이 끊일 새가 없었지만, 교회는 그것이 거듭 반 이성적인 것으로 언명되었음에도 확고 부동하게 이진리를 신앙으로 고백했다. 이 고백에서는 신구교가 보조를 같이 했다.


그러나 18세기말부터 이 교리는 집요한 공격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이성의 시대가 출범 하였고, 인간 이성에 명백히 위배되는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철학자와 신학자들은 각기 별도로, 양성 교리를 대신할 만한 사상을 교회에 제공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제기한 문제점의 해결에 주력했다. 그들은 인간 예수를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한 세기 동안의 심혈을 기울인 연구의 결과는 예수께서 신적 요소를 갖춘 일개 인간을 발견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를 지고한 신의식의 소유자로, 리츨은 신적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 벤트는 하나님과 부단한 내면적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인간으로, 바이쉴락은 신성으로 충만한 인간으로, 센데이는 잠재의식 속에 신성이 관류하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오늘날 하르낙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학파는 우리 주님을 단지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 바이스와 슈바이처로 대표되는 종말론 학파는 묵시적 선지자로, 좀더 최근의 부세와 키르솝 레이크로 대표되는 비종교학파는 승귀할 운명을 타고난 비할 데 없는 지도자로 인식한다.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참된 신성을 박탈하고 그를 인간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3.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


1) 신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

혹자는 구약에 신적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 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이는 다음의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시2:6-12(히 1:5); 45:6, 7(히 1:8,9);110:1(히 1:13); 사9:6; 렘23:6; 단7:13; 미5:2; 슥13:7; 말3:1.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가장 승화된 견해는 요한 복음서에서 발견된다.(요1:1-3, 14, 18;2:24,25;3:16-18, 35, 36; 4:14, 15;5:18,20,21,22,25-27; 11:41-44; 20:28; 요일 1:3;2:23;4:14, 15;5:5, 10-13,20). 비슷한 견해를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롬 1:7; 9:5; 고전1:1-3;2:8; 고후 5:10; 갈2:20; 4:4; 빌 2:6; 골 2:9; 딤전 3:16; 히 1:1-3,5,8; 4:14; 5:8등).


혹자는 오직 공관 복음만이 참된 그리스도상을 제시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제4복음서의 이상화된 그리스도상과 대립되는 참된 인간적,역사적 예수상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공관 복음의 그리스도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참된 신적 존재임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는 시종 일관 초자연적 인격체로서, 인자이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성품과 사역이 그의(신적 존재라는)주장을 정당화해 준다.


최근 들어 예수의 자의식으로 돌아가서, 그가 자신의 메시야 됨이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신학 사조가 일어났다. 그러나 복음서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참 아들 되심을 의식하고 계셨음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다음의 구절들이 이를 증거한다:마 11:27(눅10:22);21:37, 38(막 12:6; 눅 20:13);22:41-46(막 13:35-37; 눅 20:41-44); 24:36(막13:32);28:19.


2) 인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재성(영지주의)과 자연적 완전성 (가현설,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을 부인하던 시대가 한때 존재했지만, 오늘 날에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 대한 극단적 강조, 즉 그리스도 인간설이 부단히 득세해 가는 추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께 귀속시키는 유일한 신적 요소는 단지 그 인성의 완전함뿐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 같은 현대의 추세 중 일부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사람들은 때로 신적 그리스도를 경외하느라고 인간적 그리스도를 망각한다. 예수님의 인간적 성장과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인성의 실재성과 완전성을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의 참된 인성을 가리울 정도로 신성의 광채를 부각시키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으로 칭하셨고, 다른 사람들도 그같이 부리고 있다(요8:40; 행 2:22; 롬 5:15; 고전 15:21).

가장 일반적인 예수님의 자기 호칭인 ‘인자’는 그 속뜻이 무엇이든지간에 그의 진정한 인성을 명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주께서 육신으로 오셨거나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14; 딤전 3:16; 요일 4:2).



4. 그리스도의 양성의 필요성


1) 신성의 필요성

인간이 범죄하였으므로 형벌도 인간이 당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더욱이 형벌의 감내에는 육신과 형벌의 고통이 포함되는데, 이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시되 그 모든 본질적 속성뿐 아니라 타락 후 인성이 처했던 일체의 연약성도 취하심으로써 인간이 겪은 타락의 밑바닥에까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무죄한 인간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죄인이고 자기의 생명을 상실한 인간은 타인을 위해 속죄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신성의 필요성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그가 무한히 값진 희생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또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구속적으로 감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성취하신 사역의 성과를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실 수 있기 위해서이다.



5.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회의 입장


중보자 속에는 오직 한 인격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위격)의 기초가 되는 불변하시는 로고스이다. 그러나 중보자의 인격을 신적인 것만으로 말할 수 없는데 그것은 성육신을 통해서 그는 양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인격 즉, 신인(God-man)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인성 자체가 하나의 인간 인격을 구성하지 않는다. 로고스는 인간의 인격을 택하시지 않고 단순히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인격을 택했다면 중보자속에 두 인격이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다.


로고스는 인성을 취하여 자신의 인격적 존재성에 참여하게 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인격적(비위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인성은 로고스의 인격내에서 그 인격적 존재를 갖는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미완성 내지는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의 인성은 그 성질에 속한 모든 본질적 특성들을 빠짐없이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 안에서 개체 곧 위격적 실재(실존)을 가지고 있다.


이 위격적 실존은 의식 및 자유 의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이들 요소가 어떤 사물로 그 같이 되게끔 하는 본질적 속성들의 총합을 의미하는 성질에 속한다는 입장이다.


정리하면 영원 전부터 신성을 소유하신 한 신적 인격체께서 인성을 취하셨으며, 지금은 양성을 모두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이 교회의 공식 교리이다.



6. 일위에 이성이 연합된 결과


1) 신성의 근본적 무변화.

신성은 성육신에서 하등 근본적 변화를 겪지 않았다. 신성은 손상을 받지 않았고 고난과 죽음에 처할 수 없고 무지에서 자유롭고 연약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성육신은 하나의 인격적 행동(personal act)이었다. 신성이 육신을 취했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이 성육신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성육신의 결과로 신적 구세주가 무지, 연약, 시험, 고난, 죽음을 당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신성 안에서가 아니라 인성을 갖추심으로써 파생적으로 그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2) 성육신의 결과인 삼중교류(三重交流)

(1) 속성간의 교류(cummunicatio idiomatum).

이것은 신인 양성의 제 속성들이 이제는 위격의 속성이 되었고, 따라서 위격에 귀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용어를 신성의 고유한 무엇인가가 인성으로 전달되었다거나 또는 그 역의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또한 양성의 상호 침투가 일어나서 신성이 인성화되고 인성이 신성화되는(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 것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한다.


(2) 업적 또는 사역의 교류(communicatio apotelesmatum or operationum)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특히 그 사역의 최종 결과가 신인적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다.

구속 사역은 이성의 협력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각 성은 제각기 나름의 특별한 동력을 가지고 사역한다. 이에 불구하고 그 결과는 구분되지 않는 단일체로서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일 위격이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3) 은사 또는 은혜의 교류(coummunicatio charismatum or gratiarum)

이 말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처음 존재할 때부터 모든 부요하고 영광스러운 각종 은사로 치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신적 로고스의 위격과 연합하는 은혜를 통해 인성은 모든 피조물들 보다 더 높이 고양되어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 특히 지성․의지․능력으로 지속적 은혜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모든 이지적 피조물 위에 높이 고양된다. 특히 그의 범죄 불가능성도 여기서 거론되어야 한 것이다.


3) 기도의 대상이 된 신인

연합의 결과로 양성으로 현존하시는 중보자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예배의 영예는 이성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며, 단지 본질상 경배 받을 만한 로고스와의 연합 때문에 인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종교적 예배의 대상은 신인인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그 근거는 로고스의 위격에 있는 것이다.



7. 그리스도의 일위성의 신비


이성이 일위속의 연합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신비이며, 바로 그 때문에 종종 부정되기도 한다.

양자는 극히 밀접히 결합되어 있지만 혼합되어 있지 않으며, 결합의 원리인 인격은 인성이 아닌 신성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의 양성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 위격(인격)에 귀속된다. 그리스도를 그의 신성을 따라 호칭하면서 동시에 인성적 측면으로 묘사하거나, 또는 그 역의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이 교리는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며 우리의 지각이 미치는 인간사 속에서는 유사성을 발견될 수 없고 인간 이성에 의해 지지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리에 대한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만일 예수님 안에 이중적 위격이 존재했다면 성경에서 그에 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위성을 지지하는 증거는 없다. 중보자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는 하나님의 삼위간에 한 위가 다른 위에게 말하고 있는 바 ‘나’와 ‘너’의 구별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예수님은 창 1:26; 3:22; 11:7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듯 자기를 칭하실 때 복수형을 사용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두 성을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지만, 그 구절들에서 오직 한 인격만을 뜻하고 있음이 극히 분명하다(롬 1:3,4; 갈 4:4,5; 빌 2:6-11).


몇몇 구절에서는 두 성이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추상적인 신성이나 어떤 신적 능력이 인성과 결합되었다거나 인성에 현현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언제나 구체적인 신성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 인격이 인성과 연합되었다고 가르친다(요 1:14; 롬 8:3; 갈 4:4; 9:5; 딤전 3:16; 히 2:11-14; 요일 4:2,3).



8. 기독론의 역사(논쟁사)


초기 기독론 논쟁은 신앙상 큰 유익을 주지 못했다. 감정이 너무 지나쳐서, 무가치한 어떤 음모가 자주 사용되어 큰 일을 저지르게 하였고 심지어는 폭력까지도 가끔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는 오류를 낳게 했을지 모르나, 그러면서도 이 논쟁들은 오늘날까지도 표준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교리를 구성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런 논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참되고, 정당한 신성, 그의 참되고 정당한 인성, 한 위 안에 있어서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 한 위 안에서 인성에서 신성을 정확히 구별하는 것 등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을 찾았다.

초대교회에 일어난 모든 기독론적 이단들은 이 진리의 교리들에 관한 모든 요소들을 잘 갖추지 못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1) 칼케돈 회의까지의 기독론

(1) 니케아 회의까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으로,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예배의 합당한 대상으로 존중을 받았다. 따라서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그리스도상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이나 그 속에 내포된 난점들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고 논쟁의 과정속에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당시 유일신론을 특히 강조하는 유대교가 초대교회의 유대계 기독교인들에게 현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중 에비온파는 유일신론을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그들은 그를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단순한 인간으로 보았다. 그가 메시야 자격을 얻은 것은 세례를 받으실 때 그 위에 임한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알로기파도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보았고, 그리스도께서 세례시에 그의 위에 강림하여 초자연적인 권능을 부여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역동적 단일신론자들의 입장과 대체로 일치했다. 그 대표자는 사모사타의 바울인데, 예수님과 로고스를 구별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단순히 인간으로 보았고, 로고스를 비인격적인 신적 이성으로 보았다. 이 로고스는 그리스도의 세례 당시부터 그의 속에 온전히 거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했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고수하기 위해 신성을 희생시킨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영지주의자들는 물질을 영혼과 정면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영과 물질의 직접적인 접촉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인 성육신을 사건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대다수 그리스도를 천부와 동질적인 영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가 수세시에 인간 예수 위에 강림했다가 그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였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도 신성을 위해서, 신 존재의 단일성을 보전하기 위해서 인성을 부인했다. 그들은 그를 단지 한 하나님의 양태 내지는 현현으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위격의 구별을 인정치 않았다.


반영지주의자들과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신성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그를 성부에게 종속된 존재로 묘사하는 오류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터툴리안도 그랬고 특히 본체의 종속을 주장하였던 오리겐이 그러했다. 이는 그리스도를 신적 이성인 로고스와 구별하고, 하나님은 아니지만 인간보다 뛰어난 시간 이전적이고 초인적인 피조물 곧 피조물의 첫 열매로 보았던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여 아타나시우스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이고 동일 본체라는 입장을 강력하게 변호했는데, 이 입장은 321년 니케아 회의에서 공식 채택되었다. 이 과정속에서 반아리우스주의가 나타났는데 성자가 성부의 유사한 본체를 가졌다는 중도적 노선을 취하였다.


(2) 아폴리나리스주의

라오디게아의 감독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의 이성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인간이 육체와 혼과 영으로 이루어졌다는 헬라의 삼분법적인 인간관을 받아들이면서 로고스가 인간 내부의 영의 자리를 차지하셨다고 입장을 취했다. 그는 아리우스주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옹호하였고, 그가 죄의 좌소로 생각한 인간의 영을 대신해서, 로고스를 바꾸어 놓으므로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완전한 인성은 자연히 죄를 포함한 것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세 사람의 갑바도기아 신학자와 포이티얼스의 힐라리는 만일 로고스가 완전한 인성을 취하지 못하였다면 그는 우리의 완전한 구속주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죄인 전체가 구속을 받아야 하므로, 그리스도는 최소 중요 부분만이 아닌 완전한 인성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기 했으나 이것이 그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가리워졌다고 생각하였다. 닛사의 그레고리까지도 그리스도의 육신은 신성과 연합함으로 그 모든 본래의 특성을 상실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 소논쟁의 결과로 362년 알랙산드리아대회는 그리스도 안에 영혼이 있음을 단언하였다.


(3) 네스토리우스파

안디옥 학파인 몹쉐스티아의 데오돌은 그리스도 안에 로고스의 본질적 내주를 부정하고 단순히 도덕적 내주만을 인정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주와 신자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내주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 뿐이라고 보았다. 이 견해는 성육신을 인간 예수 안에서 로고스의 도덕적 내주로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안디옥 학파의 견해의 논리적 발전을 네스토리우스주의에서 볼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참되고 정당한 신성과 인성을 인정하면서, 진정한 통일을 형성하여, 단일인격을 구성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이성을 두 인격으로 보았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양성을 단일 자의식화 하는 대신에, 그 둘을 도덕적이고, 동정적인 연합에 불과하도록 하였다. 인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격의 소유자요, 하나님의 지참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경배를 받은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안에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예수의 인간인격의 진정한 경건과 도덕적인 훌륭한 모범을 교회에 남겼으나, 모든 영적 능력과 은혜와 구원의 근원이신 신적인간으로서의 구속주를 제거해 버렸다.


(4) 씨릴파

알렉산드리아의 씨릴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반대하였는데, 그는 로고스는 인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으나 동시에 그는 신인안에서 유일한 인격적 주체가 되셨다고 하였다. 또 그는 로고스가 인성을 취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 이성은 그를 자신의 어떠한 변화도 없이 로고스의 한 인격안에서 불가분리의 연합을 하였다고 가르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성이 그 속성들의 상호 교통을 통해서 하나로 단일화 되었다고 강조하고 또 그리스도의 위를 마치 합성적 통일체인 듯이 말하는 표현들을 하고 있다.

그는 성(性. phusis)라는 말을 로고스에만 적용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적용하지 않았으며. 또 이 말을 실체(實體. hypostasis)의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성육신 후에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하나의 신인성만 있다고 하는 교리를 그에게 더하게 할 근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성론자들이 중보자에게는 위도, 성도 하나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때 그에게 호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5) 유티쿠스파

유티쿠스는 신성 안에 인성이 흡수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성이 혼합하여, 결과적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일종의 제3성으로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적인 속성이 신적 속성에 동화되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몸과 동질일 수 없으며, 정당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448년 콘스탄티노플 회에서 정죄받았다.


(6) 칼케돈 회의

이 회의는 주후 451년에 소집된 세계교회회의로 그리스도의 위의 교리에 관한 유명한 진술을 공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성교부들의 뒤를 따라, 아무 이의없이 사람들을 가르쳐 다음과 같이 신앙 고백케 한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참신이시고 참인간이시며, 참 영혼과 참 육체를 소유하셨으며,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으시다. 만사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되 오히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며, 신성에 따라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후일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따라, 신모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유일하신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로서 이성을 소유하셨으니, 이를 혼합되지 않게, 불변적으로, 분활할 수 없이, 또는 분리할 수 없게 소유하셨다. 연합으로 인하여 양성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한위 안에 동시에 있어 두 인격으로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았다.



2) 칼케돈 회의 이후의 기독론

칼케돈 회의 이후 씨릴과 유티쿠스의 지지자들을 일성론자라 하였다. 그들은 연합 후의 그리스도의 성을 혼성적인 것이었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구별된 이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구별된 이성은 필연적으로 이중인격을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신자의 위 안에서 인격적인 실제가 되셨기 때문에 그것은 비인격적인 아니라, 인격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동방교회의 기독론의 최고봉이었던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침투 즉 신적 속성이 인성에 전달되어 인성이 신화하는 일이 발생하므로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고난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인성을 로고스의 일개 기관이나 도구의 위치로 격하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양성간의 협력이 있고, 한 위가 각 본성으로 행동하고 의지를 나타낸다것을 인정하였다.


서방교회에서는 우르펠라의 주교 펠릭스가 양자설을 변호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신적본성(로고스)면에서는 문자 그래로 하나님의 독생자로 간주했지만, 인적 측면에서는 단지 양자로 선택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인자가 잉태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위의 단일성 안으로 올려졌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인격의 단일성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설은 그리스도의 위의 단일성을 더욱 위태롭게 하였기에 794년 프랑크푸르트 대회에서 정죄되었다.



3) 중세기의 기독론

중세에는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강조, 각종 속죄론, 미사 교리의 발달 등의 다양한 영향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굳게 고수하고 있었다.

토마스아퀴나스는 몇 가지 새로운 논점을 부각시켰는데, 그에 의하면 로고스의 위격은 성육신에서 합성되었으며, 인성과의 연합은 인성이 독립적인 인격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로고스와의 연합으로 이중의 은혜를 받았는데 인성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여 심지어 예배의 대상이 되게한 단회적 은혜와 하나님과의 관계 면에서 인성을 지탱하게 하는 지속적 은혜이다.



4) 종교개혁기의 기독론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하등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지 않았다.

로마 카톨릭이나 개신 교회나 모두 칼케돈 회의에서 공식화된 기독론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들간의 견해차는 있었다.


루터파는 속성간의 교류를 주장하였는데 그리스도의 양성은 제각기 상대편으로 침투하며, 그의 인성은 신성의 속성들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전능, 전지, 편재의 속성들이 성육신 당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전달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융합을 함축하고 있다. 신적 속성이 인성에 전달될 경우, 인성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편재와 전지의 속성은 인성과 병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같은 전달은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초래하는데, 성경은 양자를 엄격히 분리시키고 있다.


개혁파 신학에시도 속성간의 교류를 가르치지만 인식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개혁파 신학은 성육신 후에 양성의 제특성이 그리스도의 한 위격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위격은 전지하지만 동시에 단지 제한된 지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고, 편재하지만 또한 일정한 시공간에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1566년에 작성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에서 개혁파 입장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이고 동일하신 우리주 예수 안에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양자는 밀접하게 결속 내지 결합되었다(양성의 특성들은 안전하게 그대로 보존되면서)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둘이 아닌 한 분 우리 주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이 고난을 당하였다거나 그리스도께서 그 인성으로 아직 세상에 계시며 또한 모든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5) 19세기의 기독론

18세기말이 되면서, 좀더 가깝게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에서 출발하면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점차 증대 되었다. 그리하여 신학적이고 신 중심적이었던 기독론이 점점 인간학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기독론이 되었다. 초자연적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양성 교리는 신적 인간교리로 대체 되었다.


이런 흐름의 선두주자인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인성이 이상적 완성의 단계까지 승화된 새로운 피조물로 간주하였다. 헤겔의 그리스도관은 그의 범신론적 사상체계의 일부였다. 그에 의하면 성육신은 단지 인종적 발전 과정의 최고 단계였다.


겸허설을 주장하는 케노시스주의자들은 “자랄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였다”(빌 2:7)라는 의미를 로고스가 문자 그대로 자신을 인간의 차원에까지(완전히 혹은 일부분) 축소 내지 무력화시키심으로써 인간이 되셨고, 그후 지혜와 능력을 증가시켜 마침내 다시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이론은 삼위일체 교리에도 위배되고, 하나님의 불변성과 또 역사적 예수에게 신적 속성이 있다고 말하는 성경의 여러 구절과도 상반된다.


도르너는 이 견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 대신 점진적 성육신론응 제안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대한 특별한 수용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성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의 자기를 내어주심의 원리인 로고스가 이 인성과 결합하셨는데, 결합 정도는 점차 증가하는 인성의 신성 수용도에 따라 단계마다 결정되었고 부활에 가셔서 최종 단계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성육신을 단순히 인간의 출생으로 보았고, 또 이 인간이 잉태와 출생에서 점진적으로 신인이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을 파괴하였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연합을 두 인격의 결합으로 구성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였다.


알브레히트 리출은 기독론의 출발점을 사역에 두고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 위격의 존엄성을 결정 짖는다고 하였다. 그는 일개 인간이었지만 그가 이룩한 업적과 행한 봉사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그에게 정당하게 신적 속성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교훈, 모범, 독특한 감화로써 인간을 구원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으로 호칭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사실 사모사타의 바울의 이론의 재현이다.


현대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대신 신인간의 범신론적 동일시가 자리 잡았다.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신적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속에 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와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8. 그리스도의 신분


그리스도의 신분 교리는 17세기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루터파에서 발전시켰지만 곧 개혁파 진영도 이를 채택하였다.

하지만 신분의 참된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의견을 달리했다.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보았고 개혁파는 중보자의 인격으로 보았다.

중보자의 신분 개념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으로 점차 신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 비하의 신분

비하 신분의 본질적․핵심적 요소는 천지의 주재이시고 최고의 입법자이신 분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율법의 계약적․형벌적 조항을 이해하고자 스스로 율법 아래 속하신 사실에 있다.

루터파 신학은 그리스도의 비하를 8단계로 보지만 개혁파 산학에서는 일반적으로 5단계로 말한다.


(1) 성 육 신

인성을 입으신 분은 삼위일체 신이 아니라 제 2위 신이었다. 그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표현보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 성육신에서 삼위 각자가 능동적으로 일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육신의 이유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데에 있다고 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견해를 지지했으며, 개신교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성육신이 불가피해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몇몇의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은 정반대의 견해를 주장했다.

성육신같이 엄청난 사실은 우연적일 수 없으며 사람의 우발적이고 독단적인 행위의 결과인 범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의 계획이 있는데, 여기에는 태초부터 죄와 성육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육신은 죄로 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쁜 뜻대로 일어난 것이다.


(2) 고 난

그는 전생에 동안 고난을 받으셨다. 그의 고난은 성별된 고난으로 끝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가혹해졌다. 그는 육신과 영혼모두 고난을 받으셨다. 육체와 영혼이 모두 죄의 영향을 입었으며, 형벌은 양쪽에 모두 부과되었다. 더욱이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영육간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3) 죽 음

죽음은 단지 죄의 자연적 귀결에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사법적으로 부과된 형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삶의 좋은 것들과 행복을 거두시고 그 대신 진노로 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와 같은 사법적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중보자에게 사망의 형벌을 내리셨으니, 왜냐하면 후자가 자원하여 인간의 범죄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4) 장사 지냄

그의 장사는 단순히 예수께서 실제로 죽으셨음 입증할 뿐 아니라, 구원받을 자들에게서 무덤의 공포를 제거하며, 그들을 위해 무덤을 성화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5) 음부로 내려가심

이것을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후에 구약의 성도들이 그의 구속의 계시와 적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선조 림보로 내려가셔서 복을 전하시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욱체는 무덤 속에 있지만, 영혼은 음부에 다시말해 의인들의 영혼의 거처인 낙원에 내려가서 진리를 보다 완전히 설명해 저셨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실로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2) 승귀의 신분

개혁 신학은 그리스도의 승귀를 4 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1) 부 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다시 사셨고 영육이 재결합되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육이 생명이 있는 유기체로 재결합하면서 인성이 영육 면에서 공히 그 원초적인 능력과 완전성을 회복했고, 심지어 더욱 높이 승화되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반초자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먼저 제자들 무덤에서 시체를 도적질한 후 부활했다고 선전하는 교묘한 속임수를 행하였다는 허위설, 예수께서 진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단지 기절하신 것인데 죽으신 것을 오인되었다고 하는 기절설, 제자들이 흥분된 심리 상태 속에서 구세주와 그의 귀환만을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자기들이 그를 보았다고 실제로 생각하게 되었거나 제자들이 본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계속 복음을 전파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기적적으로 보이신 참된 객관적 환상이라고 주장하는 환상설, 고대 근동 종교의 신화 속에는 부활 기사와 유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부활기사가 이교 신화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신화설이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 측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 생존으로서의 의미를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의 신앙에 아무런 참된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2) 승 천

승천은 중보자의 위격이 그 인성을 좇아 지상에서 하늘로 가시적으로 올라가신 사건을 말하고 그것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지역이동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은 단순한 장소 이동에만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인성의 좀더 진전된 변화도 포함한다. 이제 이성이 천국적 영광의 충만함으로 진입했고, 천사의 생활에 완전하게 적응하게 된 것이다.

루터파의 승천관은 개혁파와 다른데 그들은 이를 지역 이동이 아닌 상태 변화, 즉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 당시에 전수받은 신적 속성을 완전히 향유하고 활용하심으로써 영원히 편재하시게 된 것으로 간주한다.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이것은 상징적 의미로 중보자가 교회와 우주에 대한 지배권을 받으신 것과 그에 합당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우편에 앉으신 동안에 그의 성령으로 교회를 통치하고 보호하시며, 또한 그가 임명한 직분자들을 통해 다스리신다. 그는 부단히 그의 제사 사역을 적용하시며, 이를 죄인들의 칭의와 성화에 유효히게 하신다. 더 나아가 그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항상 중보하시며 그들이 그를 완성된 희생 제사에 근거하여 용납되고 세상에서 완전하게 보호되며 그들의 기도와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간구하신다.

성령을 보내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오순절날 실현되었다. 그날 이후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여러 모양으로 우리의 큰 선지자로서 역사하신다.


(4) 재 림

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과거의 사건으로 보고, 그의 재림 약속은 그가 성령으로 강림하셨을 때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정말 재림하셨으며, 오늘날 성령으로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영적 재림이었고, 이에 반해 성경은 그리스도의 육체적․가시적 재림을 대망하도록 가르치고 있다(행 1: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고 그의 백성들의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이다.



9. 그리스도의 직분


그리스도의 사역은 관례적으로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의 세 직분으로 나뉜다.

초기 교부들 중 몇몇이 이미 그리스도의 상이한 직분들에 관해 언급했지만, 중보자의 세 직분을 구별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신한 사람을 칼빈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삼중적 직분을 위해 기름 부음받으신 사실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삼중직과 사역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로 설명된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원래의 인간은 선지자, 제사장, 왕적 존재였고 지식과 오성, 공의와 거룩함, 그리고 하등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았다. 죄는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되실 필요가 있었다.


1) 선지자직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파송된 사람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선지자가 되기 위한 구성 요건은 신적 계시를 타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소명과 지시에 있다.

선지자는 백성들의 목양적인 훈계자이며, 특히 윤리적․영적 측면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지자직을 직접적으로 곧 구약 시대에는 주의 천사로서, 그리고 성육신하신 후에는 그의 교훈과 모범으로써 수행하셨다. 또한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교훈을 매개로하여, 오늘날에는 복음 사역자들을 도구로 하여 신자들 안에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

자유주의는 교사로서의 예수님 상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위대한 선생에 불과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현대신학은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에 대해 강조한다.


2) 제사장직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백성들을 위해 말하고 행동할 특권이 있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가기 위한

요건인 의식의 준행을 강조했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은 이중적이었다.

그의 최우선적 사명은 세상죄를 속하기 위해 온전히 충분한 희생 제사을 드리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성경에 의하면 속죄의 동인은 대리적 속죄로써 죄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서 발견된다. 이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근거하고 있다. 버림받은 죄인들에게 피할 길을 제공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요3:16). 그리고 이 길이 하나님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롬 3:26) 하기 위해서 본질상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요청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었다.


속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구러뜨리고 그로 하여금 죄인과 화목케 하려고 의도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남과 죄인을 화해시킨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죄인편의 반사 행동을 가져오며, 그 덕분으로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여 멀어지면 그 자신이 하나님께 보상할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오직 범죄에 결부된 형벌을 영원히 받음으로써만 자신의 죄를 속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남께서 엄격한 공의로써 요구하셨을 일이고, 만일 죄인에 대한 사랑과 긍휼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더라면 이를 요구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대리자로 세우셨고, 이 대리자가 죄를 대속하고 인간을 위해 영원한 구원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통례상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양자를 구분함에 있어서 분명하게 알 것은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양자는 구세주의 일생의 모든 시기마다 동반적으로 나타난다. 양자는 부단히 상호 침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고난과 죽음에 내어주신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측면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복종하여 생활하신 것은 그의 수동적 순종의 측면이었다. 그가 종의 형체로 행하신 것은 그의 고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개혁파의 입장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리고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들만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의 구속 사역의 혜택을 실제로 베풀어 주신 사람들만을 구원하려는 목적에서 죽으셨다는 말과 동일하다.



(2)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그리스도의 지상의 대제사장이었 뿐 아니라 동시에 특히 천상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오늘날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

그의 중보 사역은 성소의 금단 위에 날마다 드려진 분향으로 예표되었다. 끊임없이 올라가는 향연은 이스라엘의 기도를 상징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예표였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그 필수적인 기초를 이루는 그이 속죄적 희생과 분리 될 수 없다. 양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두 측면일 뿐이며, 또한 양자는 하나로 융합된다고 하겠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있다는 것은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중보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종종 주목하였다.


속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보도 법적 요소가 있다. 사탄은 항상 선택받은 사람을 고소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참소에 대해 그의 완성된 사역을 보이심으로써 대처하신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보혜사요 대언자로서, 그들에 대한 일체의 고소에 답변하신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심직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행하는 봉사를 성화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할 때에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가 미처 간구하지 못한 것도 간구해 주시며, 우리를 노리는 대적에서 보호하기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믿음이 멈추지 않고 끝까지 승리하도록 기도하신다.


그리스도는 그가 대속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또한 오직 그들만을 위해 중보하신다. 그의 기도는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올리는 탄원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께 하는 당당한 요구이다. 그의 중보적 기도는 실패함이 없다. 그는 그가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받을 만한 공로를 이르셨고, 이 점에서 그의 기도가 유효성에 대한 확신이 근거하고 있다.



3) 왕 직

(1) 그리스도의 영적 왕직

그리스도의 왕직은 영적 왕국과 관련되어 영적인 왕직이다. 이 영적 왕직은 은혜의 왕국, 곧 그의 백성과 교회에 대한 그의 왕적 통치를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들의 심령과 생활 속에 정립된 중보자의 통치권이다. 또한 그의 백성들의 구원이라는 영적 목적에 직접적․즉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성령에 의해 통치된다는 점에서 이 왕직이 영적이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은혜의 왕국은 하나님의 창조역사에서 기원하지 않는다. 그의 구속적 은혜에 기원하고 있다. 이 왕국의 시민은 오직 구속받은 자들만이 그 같은 명예와 특권을 누린다. 이 왕국의 실재성은 신자의 내면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전에 중보자적 왕으로 임명되셨고,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가 성육신이전부터 중부자로서 통치하도록 허락받으셨어도, 그는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기까지는 공개적으로 또한 정식적으로 그의 보좌에 앉아 그이 영적 왕국을 출범시키지 않으셨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적 왕직은 비록 세계의 종말로 그 행사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겪겠지만, 그 근본적 특성에 있어서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2) 우주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직

우리는 권능의 왕국이라는 용어를 신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를 다스리시고, 만유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섭리적․사법적으로 통치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우주에 대한 그리스도의 왕직은 그의 영적 왕직에 종속된다. 하나님의 영적 왕국을 세우고 통치하며 모든 적대 세력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무이다. 그는 이것을 세상에서 수행하셔야 한다. 따라서 세상이 쉽사리 그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으로 들리우심 받았을 때 우주에 대한 이 왕직을 정식으로 위임받으셨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왕직은 원수들에 대해 완전히 승리하고 심지어 사망이 철폐되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Ⅲ. 결 론


그리스도의 관한 문제는 삼위일체 논쟁가운데 나왔다. 신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질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 하는 결정은 즉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생기게 하였던 것이다.


주후 451년 칼케돈 회의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회의 신앙을 공식화하였다. 그러나 이 공식적 진술은 대체로 소극적이며, 많은 이단 사설들에 대항하여 단지 진리의 보수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초대 교회의 신앙을 명확히 진술하고 있지만, 그 속에 포함된 신비 곧 자연적 설명이 불가능한 비밀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성일인격의 교리는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이것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자신이 하나님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 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한결같이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기에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를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 물론 우리가 난해한 성경의내용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아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이성일인격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참되고 정당한 신성을 전제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부인했고, 어떤 이들은 그의 참되고 정당한 인성을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논박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위의 단일성은 강조하되, 판이한 이성을 무시했고,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성의 판이함을 역설하되, 그 위의 단일성을 희생시키기까지 했다.


모든 설명은 실패하였고 칼케돈 신조 이후에도 몇 군데 세부 설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이 신조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칼케돈 회의에서 공식화되고 우리의 표준적 신앙고백서속에 있는 본 교리를 주장하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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