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학



신조란 : 우리 신앙 axion, norma a normans이다.

* 상위의 규칙으로부터 규제를 받는 것이 아닌 모든 상위의 규칙이다. 곧 성경의 진리이다.

* 신조는 진리의 판별 기준이다.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오랜 신앙의 순종 가운데 얻은 신앙 의 현실적 기준이고 실질적 삶의 판단기준이다.



1. Reformed church of Creeds


개혁교회(고백교회)의 신조

* 개혁이란 : 새로운 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1) 지역 : 스코틀랜드, 스위스, 네델란드, 체고 헝가리지역


2) 영국여왕 엘리자베스는 루터란 보다 게혁교회가 더욱 개혁적이라 평했다.

- 루터란 : 천주교의 오류로 인정된 것만 제외하였다.

- 개혁교회 : 천주교에서 진리로 받아 들이는 것이외는 모두 없애 버렸다

이러한 면에서 개혁교회는 더욱 개혁적이었다.


3) 신조(Creeds)의 정의

- 어거스틴 : 신조를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모아서 하나의 허용 가능한 최소한의 체계로 요약한것

- 칼빈 : 신조를 성경의 진리 그 자체라고 말한다.

- 바르트 : 교회가 자신이 믿는 바를 명확하게 표명하기 위해서 제정한 진리의 요약이다.



1. 가장 중요한 신조


- 사도신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는 것에 대한 고백

* 기독론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하여 콘그탄티노플이 세계 1차 에큐메니칼 총회를 소집

* 325suds 호모 우시아 확정 , 381년 호모 우시아 재 확인

* 이고백서는 저주문이 포함, 381년 이 저주문을 삭제 확정함.

- 아타나시우스 신조 - 지금은 Symbolum Quicunque라고 불린다.



2. 다음 중요한 신조


- 칼케돈 신조(451년)

* 오직 아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만 있다.

* 그리스도 본성에 대한 확정을 지은 신조

* 동방교회에서는 이 고백을 특히 좋와한다.

3. 개혁교회의 일반적 특징

* 종교개혁 지역 지도

카운트 리포메이션

라인강 서부지역

루터란지역

리폼드 트데이션

스코틀랜드, 화란지역 재세례파

스위스(산골)

체코(미개지)

* 쯔빙글리는 논리에 능하였으나 실천에서 약하였다,

* 반면에 재세례파는 과격하며 급진적인 개혁운동주의였다.

* 칼빈, 바젤은 세속의 정치 제도를인정하였다.

* 재세례파는 세속의 정치제도 자체를 부정하였다. 세속정치는 우리 신앙생활의 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성화되었기에 정치제도의 불필요 주장 - 칼빈은 이를 광신자라 평함

* 재세례파에 속한 사람들은 쯔빙글리에 반대하나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우 극단적으로 실천행위가 강 조되었다.

- 이들은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여 하였다. 신앙과 세속적인 삶은 연결 고리가 없다고 주장

- 때문에 이들은 신앙적 성취와 사회적 성취의 연결적 고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화폐의 사용까지 부정한 것으로 취금하여 물물교환하였다.

* 교회의 박사들

- 서방교회 : 암브로우시스, 어거스틴, 제롬, 그레고리

- 동방교회 : 바질, 그레고리, 존 크레소스톰, 아타나시우스

신조 5강 10월 6


Calvinism


①church polity - 장로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성직자들에게 계급이 있느냐? 없느냐? 장로교에서는 계급이 없다고 여긴다. 감독주의라고 하는 것은 성직자들에게 계급을 인정하고 있다. 계급이 나눠지고 나면 그 안의 계급이 나눠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칼빈니즘에게 있어서 성직자들의 계급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목사, 부목사의 개념은 계급이 아니다. 그러나 감독과 장로는 계급이다. 우리는 모든 성직자는 하나의 계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이 성직자들의 계급을 두는 전통속에서 엄청나게 혁신적인 이야기이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군대 안에 계급이 없다는 이야기와 같다. 계급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상하관계이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이다. 이것이 당시의 당연한 교회적 환경이었다.

☆episcopal - 당시의 당연한 생각이었다. 계급이 있다.


②개교회 - consistory(협의) - presbytery pariss(총회) 협의기구이다.

노회와 총회의 결정에 복종하는 이유는 계급의 면에서 개교회보다 높기 때문이 아니라 개교회는 노회와 총회의 합의한 사실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부터 결정을 받아드린다. 합의한 사실이 지배한다.

칼빈의 전통에서는 결과의 정당성은 절차의 정당성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이것이 지켜져야 할 합의의 절차가 지켜졌다면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합의의 절차가 무시되었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


②secular polity

대의적, 법적 통치 - 대의원을 세워서 통치

represent - 대의원이 대표가 되어 결정한다.


③경제제도 - 아나뵙티즘처럼 극단적이진 않지만 개혁적이었다.

재세례파는 화폐거래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고, 물물교환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자도 지급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다.

화폐는 그 자치의 논리에 따라서 증식시켜 나간다. 화폐가 없었다고 한다면 분배받는 사람은 생산에 참여한 사람만 받았다. 화폐는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도박, 강도, 생산에 참여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 말라. 이런 점에서 재세례파는 화폐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화폐가 없다고 한다면 도박이 가능할까요? 도박이 거의 불가능하다. 절도도 제한된다.(쌀가마니 지고갈 수 있는 것이 제한된다)

리폰드 전통은 이것은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다. 화폐제도도 인정하고 이자도 인정했다.

그러나 단순한 삶(simple Life)을 강조했다. minimalical, hard work.

열심히 일하지만 미니말리칼한 삶을 살아야 한다.


④문자중심(文字中心)

교육을 중시했다. 그래서 칼빈주의를 주지주의라고 하였다. 지정의에 있어서 어떤 것이 위에 있어야 하느냐?

희노애락이 진리와 비진리 판단에 미추의 판단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

언제나 지성이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리폼드 전통이다.

신앙의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가장 일차적인 기쁨이 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나? 교인들에게 대접받는 것이 기쁨이냐?


⑤교회의 Unity, 평화, 안일함보다 freedom for truth가 더 중요하다.

교회의 통일성이 중요하냐? 아니면 진리에 대한 의무감이 중요하냐?

교회의 안일함에 대한 의무보다도 진리를 따라야 할 의무가 더 선행적이다.

내가 진리에 대한 의무 때문에 말할 때 교회의 평화가 깨지지 않을까? 이것이 우리의 걱정일 수 있다.

리폼드 전통에 따르면 교회의 통일성이나 평화에 서는 것보다 진리편에 서야할 의무가 더 강하다.

루터란은 개혁을 하지만 로마 천주교회가 통일성과 평화를 깨뜨리지 않은 범위에서 명백한 오류로 밝혀진 것만 빼고는 다 받아들였다. 리폼드 전통은 명백하게 진리로 밝혀진 것만 빼고 다 제거하였다.


⑥리츨같은 사람은 루터란과 비교를 해서 우리는 솔라 스크립투라

sola scriptura(솔라 스크립투라)와 sola fide(솔라 피데) 중에 솔라 스크립투라를 위에 둔다.

솔라 피데가 위에 있다고 한다면 성경 중에서도 어떠한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성경의 영감을 이야기할 때에 축자의 영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베드로서와 로마서가 더 가치가 있다. 야고보서는 가치가 적다. 솔라 피데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전통은 인식론적인 원리냐? 내용적인 원리냐? 인식론적인 원리를 따른다.

개혁전통은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Symbols(신조) - 칼빈은 성경의 진리 가운데서 성경의 진리 그 자체라고 이야기했다.

어떻게 만들어졌나?


①가장 정치하고 가장 엄숙한 말들로 가장 경건하게 작성된 성경의 진리 그 자체다고 신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칼 바르트는 신조라고 하는 것은 가능한한 완전하게, 가장 짧은 말로서 모든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가능한한 자유롭게, 가능한 모든 모호한 것이 제게되고, 가능한한 분명하게 되도록 표현된 성경의 진리라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신조라고 하는 것은 모든 교회적인 것의 판단의 기준이다.

성경은 오직 자신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조와 함께 해석되어야만 올바른 해석이라고 하였다.

1577년 루터란 전통에 있어서도 ‘협화신조’

루터교회에서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조를 가장 중요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조를 동급으로 생각할 만큼 강조한다.

협화신조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조라고하는 것은 성경이 어떻게 이해되고,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신조이다.


②리폼이라고 하는 것은 원안 그 자체로 되돌리는 것을 개혁이라고 한다.

신조는 개혁의 방편, 과정, 결과가 된 것이다. 따라서 더 개혁적이라고 하는 것은 더 신조적이다.

이런 점에서 개혁교회를 고백교회라고 부른다.

칼 바르트는 신조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엄격하면서도 치유하는 주권과 관계된 것이다.

신조 6강 10월 13일


1.4.


①에큐메니칼 Creeds-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받아들이는 신조

제일 중요한 것이 사도신조이고, 다음이 니케아신조(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그 다음이 칼케돈 신조이고,

그 다음이 Symbolum Quicanque(퀴쿰케)(옛날에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이다.

루터란 신조는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가장 아름다운 신조, 영광스러운 신조로 좋아했다. 칼빈은 싫어했다.

Unam Sanctam - 교황(교회, 성직자)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사도신조는 서방교회에서, 니케아신조는 동방교회에서 사용했다.


②National Creeds(교단적, 국가적 신조) - 지역과 교파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신조.

아우구스부르크 신조는 루터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옆에 둘 정도로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 이후에 각 교단들은 그마다 신조들을 세워서 정체성을 세워 나갔다.

1536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조 - 1646년 웨스트민스트 신조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는 1560년에 제1스코틀란드 신조가 만들어진다.

Lowland(화란교회)에서는 1561년에 Belsic comfession가 만들어졌다.

라인강 1563년에 하이델베르크신조

불란서 개혁파들은 위그노파이다. 위그노파들은 1559년에 갈리칸 컨페션을 만들었다.

스위스 지역에서는 1566년에 2nd Helvetic Confession(제2 스위스 신앙고백)

영국의 퓨리칸들은 1646년에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 만들어졌다.

이 신조들 하나하나가 에큐메니칼신조와 연관이 있다.

종교개혁 Movement였기 때문에 솔라 피데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sola scriptura(솔라 스크립투라)가 종교개혁의 모토였다면 sola scriptura et pilosophia(필라소피아)

내가 존재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지식이다. 옆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그 다음 확실한 지식이다.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한 지식이다.

나 - 이웃 -세계 - a se가 아니가 ah aliv의 존재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들이 나온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어떻게 얻느냐? 스크립투라를 얻을 뿐 아니라 또는 솔라 스크립투라를 통해 얻는다고 보았다. 이것이 중세 전통이다.

터툴리아누스, 이레니우스 - 왜 이단이 생겨났느냐?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가 들어와서 그러했다고 생각해서 문화를 제거해 가는 일을 평생동안 하였다. 오직 “솔라 스크립투라”라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문화를 배설물로 보았다. 결합되면 부정적인 것이 생긴다.

솔라 스크립투라가 ‘에트 필로소피아’가 아니다.

이전의 교회가 솔라 스크립투라가 아니라 에트 호모를 가르쳤다.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솔라 피데가 종교개혁의 모토라고 한다면 무엇을 의미하느냐?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천주교회가 솔라 피데 엣 operibus를 강조했다.

솔라 그라티아가 아니라 솔라 그라티아 엣 inerito

신앙의 13번째 조항 - 사도신조가 모두 12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 사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고백을 하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12개의 조항으로 보았다. 그럼으로 13번째 조항으로 붙여질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이 13번째 조항이냐? 바로 sola fide라고 보았다.

각 지역 신조들은 사도신조와 연속성을 강조하고 또한 솔라 피데(이신칭의)를 강하게 표현하였다.

3번째 그룹을 모던 컨패션즈 라고 이야기한다.

18세기 이후의 신조들을 이야기한다. 자유주의 적인 신조가 나타난다. 관심이 달라진다.

고전 신조들은 주안점이 교리적인 문제에 있었다. 진리의 문제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18세기 이후의 신조들은 교리의 문제, 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였다. 전도와 선교의 문제였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다. 관심이 달려졌다.

네셔날한 신앙고백들이 교리(교의학)적인 선포에 관심을 두었다면 18세기 이후의 신학들은 실천의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관심의 변화가 있었다.

신조 7강 10월 20일

개혁교회의 The Reformed Creeds


①에큐메니칼 신조


②National(Classical) confessions(제2스위스 신앙고백, 위그너 갈리칸,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 가난한 지역

-아주 교리 중심적이다. 하나님의 창조부터 재림의 문제까지 그러했다.

교회의 정통성이 네세럴 콘패션이라고 한다면 이것에 집중해야 한다.


③Mordern confessions - 관심자체가 교리문제에서 실천적인 문제로 넘어간다. 선교, 봉사, 화해의 문제로 옮아간다. 요즘은 이러한 문제로 굉장한 자신이 있다. 지금 이러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다음에 이야기하자 라고 이야기한다.



2. The Ecumenical Creeds


에큐메니칼 신조가 모든 교회를 통일시키는 접착제(끈)이라고 하였다.

Symbolum Apostolicam(사도신조),

Symbolum Nicaeno(321)

Constantinopolita(381)(콘티탄티노플신조)

Symbolum Chalcedoneusis(칼케돈신조), Symbolum Qailangul


칼케돈신조의 특징 - 오직 아들 하나님의 신앙고백만 있다. 그리스도의 본성론은 여기에서 완성되었다.

칼케돈 신조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완성하였다. 이것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본성론은 없다.

이 4개의 신조는 우리가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Saviong Truth


에큐메니칼 신조는 아주 강력한 삼위 일체의 신앙 지식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고, 진실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 분이다. 삼위 가운데 한 분으로 계신다. 이것이 구원받기 위하기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다. 이것이 Saviong Truth이고, 이것을 에큐메니칼 신조가 강력히 말하고 있다.

칼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의 교리가 아니라 가장 궁극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진리이고, 계시된 핵심이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지식의 유일성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교회 밖에 없다.

아버지이면서 아들이면서 성령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영이시다.


2.1 사도적 신조(symbolum apostolicum) -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한 신조


2.2symbolum apostolorum-사도들의 신조

사도 신조는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없다.

주기도가 가장 완전한 기도이고, 율법 중에서 십계명이 가장 완벽한 율법이고, 모든 신조 중에서 사도적 신도가 가장 완전한 신조이다.

동방교회에서는 니케아 콘스탄트노플신조를 강조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사도신조라고만 해도 12개의 아티클로 나누었다. 12사도가 한 사람씩 고백했다고 보았다.

신조8강 11월10일

2.1 Symbolum Apostilims


주기도가 모든 기도 중의 기도이고 십계명이 모든 계명 중의 계명인 것들처럼 사도신조가 모든 신조 중의 신조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신조이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사도신조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한다.


17세기 정도까지 사람들이 사도신조 자체를 12개의 조항으로 나누어서 12사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조항씩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무관한 것이다.


사도신조를 영어로 표현할 때 사도들의 신조라고 하지 않고 사도적 신조라고 말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이 구원의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닌데 사도신조는 구원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신조이다.

이 지식 밖에 나가는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조를 Saving Knowledge라고 한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그 지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사도신조이다.

그것을 사실의 형태로, 그리고 간결(단순)한 성경의 용어로 사용되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지식들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지식은 하나밖에 없다.

세계의 주된 아티클들이 있고 나머지 아티클로 나눌 수 있다.


세계의ㅣ 주된 아티클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중심적인 지식이고, 나머지의 지식들은 성도, 교회, 부활, 영원한 삶으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아티클은 아들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Saving Knowledge 중에서도 아들 하나님에 관한 것이 가장 중요한 chief article이다.

삼위일체적 진리 -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론이라고 하면은 신학적 주제들 가운데서 굉장히 사변적이고, 신앙의 삶 가운데서 비현실적인 신학적 주제로 생각하고 있다.

삼위일체가 우리에게 제대로 이해되느냐? 이해되지 않느냐?가 우리의 삶에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잇다. 신학적 이슈가 변화할 수 있지만 삼위일체적인 진리를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존립에 있어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삼위일체 진리가 고백되느냐? 고백되지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어떤 살마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예배가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임재가 하나님의 임재와 똑같고,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기도가, 아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아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그리스도의 임재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의 문제가 하나의 신앙의 삶을 제대로 사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의 삼위일체에 대한 문제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문제가 다르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같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삼위일체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이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임재는 여기에 성령의 임재도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리스도의 임재=하나님의 임재,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하나님께 대한 예배,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적 진리를 가장 먼저 천명하고 있다.


사도신조는 추상적인 신앙논문이 아니라 교회 존립과 관련되어 있는 교회의 실존적인 고백이었다. 이 고백이 어린아이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성경적인 용어로 천명되어 있는 것이 사도신조이다. 이것은 어린이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최고의 신학자에게도 더욱 고상하게 하고, 모든 시간 공간안에 있는 참된 교회를 연합시키는 끈이다.


신학자들은 신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생각하면서 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불신자가 신자가 될 때에 중간에 개입하는 것이 세례이다.


불신자가 신자가 될 때 고백하는 것이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삼위일체적 고백을 하는 공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가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려면 삼위일체적 지식을 고백해야 하였다.


삼위일체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세례식문들이 발전해서 사도신조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도신조

신조학 영문 아티클

맥그라스 : 예수는 주님이다.

예언은 성취 되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였다.

그는 다윗의 씨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경에따라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시키시려고 죽으셨고 땅에 묻히셨고 제 3일에 일어나셨고 그는 높혀 져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산자와 죽은자의 주님으로서 그가 세계의 사람들의 심판자, 구원자로서 다시 오실것이다.


이그나티우스

만약 누군가가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말을 한다면, 그 말을 듣지 말아라

예수그리스도는 다윗의 줄기에서 나오신자이고, 마리아로부터 출생하신 자이며 그는 진실로 태어나서 먹고 마셨으며 그리고 실제로 본디오 빌리도에게 고문을 받으시고 십자가 상에서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죽은자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기가 아니면 듣지 말아라


에피스툴라 아폴로토롬

세계의 주재자이신 아버지를 믿고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위로자이신 성령님을 믿고 건룩한 교회를 믿고 죄의 용서를 사죄를 믿습니다.


순교자 저스틴의 증언

모든 믿는자들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처음부터 영원한 분이며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자이시며 제작자이산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종이신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장차 인간과 함께 하실것으로 예언자들에 의해 미리 예언돤 분임을 믿습니다.

구원의 선포자 이시고 모든 참된 지식의 교사이신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서머나 교회 장로 고백

우리는 진실로 한분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압니다. 아들 하나님을 압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것처럼 고난을 받고 죽으신 것처럼 죽으시고 제 3일에 부활하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죽은자와 산자를 심판하실 하나님임을 압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가 전해진 것을 믿습니다.


Der Balyzeh Papyrus

신앙은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의 독생자 아들을 믿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독생하심을, 성령을 믿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믿습니다.


터툴리안

신앙의 규칙은 첫째 전능하싵 창조자 하나님을 믿고,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출생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3일에 부활하시고 하나님 가슴에 영접되시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장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우실 것이고 육신의 부활을 통해서 심판하는 아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11월10일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식 :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

삼위 일체적 지식 : 교회가 형성되었을때 교회의 기준과 교인의 기준을 나눌 때 삼위일체의 지식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단과 정통의 기준, 세례를 주기 위한 전제적 신앙 고백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을 받았다.

* unitaria - 일위 일체론

* binitaria - 이위 일체론 ( 삼위일체로 각 위한 전단계의 과정으로 이해)

* trinitaria - 삼위일체론(궁극적 신앙고백의형태)

* Forma Romana Ventus -->750년에 Prminius에 의하여 Forma Recepta(사도적인 신조)가 완성되었음

- 샤를마뉴는 왕국을 통일 하기 위하여 신앙적 통일 을 염두에 주고 신앙 고백서를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고백서, 사도적 신앙신조를 만들었다.(알파벳의 소문자 만듬-샤를마뉴)


표준본의 내용


전능하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지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 가셨고(부쳐는 삭제됨을 주장, 그러나 칼빈은 삭제에 대한 부분을 반대 하였다.

아주 강력하게 반대 기독교 강요 2권 16부 8장-에서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압축된 신앙고백에서 이부문을 빼면 의미의 전달이 불 분명하기 때문에 반대)


* 아퀴나스-

Limbus patrum -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 연옥에 가지 전에 머물렀던 곳

Limbus pueorum - 세례를 받기전에 죽었던 어린 영혼들이 머물렀던 곳

칼빈은 두 부류의 구원받은 자에 대하여 구벽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부라함,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갔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의해 겪었던 영적 고통을 표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에는 지금의 신앙고백과 같다.


교제 : 원 의미는 전달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전달은 은혜의 전달을 말한다.

원시적 로만 고백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사오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시고 장차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사오며,

* 신앙고백서에 가장 중요한 진리는 삼위일체적 진리라 할 수 있다.

이 삼위일체의 진리는 믿는 자들만이 알 수 있고 자연으로 부터는 절대 알지 못하고 오직 성경으로만 알 수 있는 진리이다.

세상의 철학과 진리로는 삼위일체의 진리를 발견될 수없다.

모든 교회의 진리를 관통하는 이 삼위일체 진리는 오직 성경으로만 발견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자유(육체와 이성)를 주었지만 오직 선택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선물은 신앙의 선물이다.

추가로 신앙(삼위일체의 진리)을 선택된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 신앙의 선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다.

금시조 소설 내용 요약필요 : 아름다움을 찾아 가는 내용

1) 스승 : 정신수양의 결과물.

2) 제자 : 아름다움 그 자체.

삼위일체의 가장 처음에 사용했던 사람


- 갑바도키아 교부들 : 바질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그레고리

신성의 단일성에 대한 개념은 익숙한 개념이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경의 관계를 증명하는데 매우 힘들엇다.

즉 위적 구별을 주장할 수 있을까의 문제다 첫 번째 이슈였다.

이는 신성의 단일성에서 아버지, 아들, 성경의 실체적 구별의 관계를 증면하엿다.

한 인격의 안에 구별되는 양태(존재양식)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개의 실체적인 위(인격)이다.

세 개의 신적인 인격체인데 이는 한 몸(体)이다.

갑바도키아의 주장을 넘어서면 삼신론과 유일신론에 빠지 우려가 있음에 어거스틴은 이를 다시금 삼위일체의 법위안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였다.


unitarian - 유일신적인 사상 오직 하나님만을 인정

Binitarian - 두 개의 신적 퍼슨으로 존재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러나 이 입장이 여기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것을 고백하는 입장은 뉴마토기안이다.

삼위일체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Trinitrian - 진정한 삼위일체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신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성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모든 유신론이 Unitrian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으로만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하나님만 존재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이다. 몰몬교도 마찬가지이다.


Old Roman Creeds 2-3세기에 교회 안에 퍼져 있었다. 이것이 발전해서 사도신조로 발전하였다.

Forma Recepta가 만들어졌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조들 - 처음에 세례를 받기 위해 받아들어야 할 최소한의 지식이었다.

savingknowledge -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가르치고 이 지식을 가르쳤다.


무엇이 구원의 지식이냐? 삼위일체적인 신앙이다.

현재 삼위일체론하면 현실적인 것과 별로 관계없는 사변적인 신학의 주제로 생각하고 있다.


러나 교회가 처음 형성되었을 때 무엇이 교회이냐? 무엇이 구원받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냐? 교회 생활과 현실생활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하냐? 동일하지 않느냐? 동일한 것으로 고백한 것이 세례문이다.


2위 일체적인 세례문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 안에 삼위일체를 포함하고 있는 2위일체이다.

binitarian-2위 즉 아버지와 아들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적

유니테리안 (2위일체)- 몰몬교,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직도 2위일체이다.

unitarian은 2위 일체론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포르마 로마나 베체스이다.

Forma Romana vetas 여기에 근거해서 사도신경이 750년에 Pirminius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양한 사도신경의 버전들이 있었다. 이것을 750년에 피르미니우스가 표준으로 만들었다.

사도 저작설은 교회 중세까지 믿어졌지만 근세이후(종교개혁 이후)에는 사도적인 신조라고 사용하고 있다.


Charlesmaluo(샬레마뉴)-이 사람은 통일 시킨 다음에 자기가 다시 회복한 서로마 지역의 통일성을 유지되기 위해서 ①신앙의 면에서 정체성이 확보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신부들조차도 무엇을 믿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고 보았다. 통일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의 통일성을 확보해야 했고, 모든 교회들에서 사도신경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포르마레컵타를 지킨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신경이 달라졌을 것이다. 샬레마뉴가 이것을 공포한 다음에 카톨릭교회도 따랐다. 이러한 점에서 샬레마뉴는 공헌이 크다.


지난 시간에 숙제를 내주었다. 읽어 오는 것..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몇번째 줄인지 모르는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크레도~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투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임페르마란 말이 나온다.

지옥에서 가장 가까운 부분을 임페르마(lnferma) limbo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시고)가 빠져있다.

우리 사도신경에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를 왜 뺐는지 공부해라.

루터나 칼빈도 이것을 중요하게 빼서는 안된다고 하였다.(칼빈의 2권 챕터 16 섹션 8부터 3~4장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

부처 같은 사람만 빼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부처의 생각은 무덤이라고 하는 말이나 페르나라고 하는 말이 동의어로 반복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생각해서 없애도 된다고 하였다.

칼빈은 반복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음부로 내려갔다고 신앙고백해야 한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들의 교제와


(교제라기 보다는 전달이다. 주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전달이다. 주님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전달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은혜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다. 전달해 주는 것이다.)

죄의 사죄와(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비슷한데 차이를 이야기하셨는데 원형이다.(Old Roman이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사오며(천지를 만드신이 빠졌다.)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출생하셨다.(성령과 마리아를 함께 다루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고난을 받았다는 내용이 빠졌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제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고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는 믿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이 역시 삼위일체적 진리이다. 이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삼위일체론 - 기본적인 이해가 있을 것이다.


mia ousia trecs

una substontia tres personal

영어 one substans three persons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칼빈은 우리는 이것을 자연으로부터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

자연이나 철학이나 문학으로부터 알지 못하고 성경으로부터만 알 수 있다.


궁극적인 자유의 선물인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삼위일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능력을 주셨고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란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선택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이라고 칼빈은 말하고 있다. 교회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지식, 구원으로 인도하는 결정적인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아 우시아의 트레이스 포스타스(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 가장 먼저 사용하였다.-바질,)


이들은 신성의 단일성의 개념을 만들었다.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실체적으로 삼위의 구현이라고 하는 것은 신성의 단일성과 모순되지만 고백되어져야 하는 고백이었다.


아들은 분명히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의 임재는 아들의 임재와 동일하다.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성의 단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개념에서 받아들이기 쉬운 개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이 위적 구별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이 문제를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다.

삼위의 실체적인 구별이 너무 지나치면 삼신론으로 나갈 수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쉬운 오류가 한 사람이 아버지요, 자녀요, 선생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은 퍼슨의 구별이 아니요 존재의 양식의 구별이다. 이런 식으로 하는 오류가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 삼위의 실체적 구별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가 구별되는 퍼슨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퍼슨의 구별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퍼슨이 가지고 있는 세 개의 상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개의 위다. 삼위일체 자체가 태의 구별을 반대하고 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의미이다. 신성의 단일성은 다른 노력이 없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을 서로 다른 퍼슨의 구별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세분이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 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리우스는 이것을 비난한다.


삼위일체론은 정통 삼위일체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공헌했던 사람이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이 다시 확립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함으로서 정통의 삼위일체를 확립하게 하였다.

신조(1117)


삼위일체론의 지식: 신앙의 삶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무엇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지식인가에 대하여 삼위일체 진리가 바로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라 판단하였음 가장 실질적이고, 본질적이고, 절박한 지식이었다.


어떠한 사람이 신앙공동체에 들어오기 위하여 잣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 진리이다. 신앙생활은 바로 삼위일체진리에 대한 삶이 되어야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이러한 절박한 지식이 아니라 신앙 생활의 일부분으로 조금은 가치가 낮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효력을 가지는 지식으로는 변함이 없다.


* 신앙의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바로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이다

* 현재 교회에서 신앙인의 본질을 구분할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를 못하다. - 현대 목사

- 이러한 것보다는 친교와, 봉사, 구제에 관심을 더 갖기 때문이다.

- 초대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잇는것이 현대의 교회의 현실이다.

*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우리의 신앙과 같다고 볼 수 없다.


1) THESIM(유신론) -

monotheism(일신론), -

성서적지식, - unitarian : 신적인 분은 한분임을 주장 일위일체적입장)

binitarian : 이위 일체적 입장

trinitarian : 삼위일체적 입장 - 오직 이 진리를 가진 사람만이 우리와 같은 입장에, 신앙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이 지식이 바로 saving knowledge 비성서적지식(이슬람

                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henotheism(신들의 질서관계), - 그리스 신화사상

polytheism(다신론) - 그리스 신화사상



2) DEISM(이신론) - 비 인격적인 존재로 신을 인식함. 자연의 법칙과 같이 비 인격적인 신으로 인식함. 그 초월적 존재가 비인격적인 신으로 인식한다. - 아리스토탈레스, 플라톤, 아인스타인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들은 신을 비인격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

* 교리적 신학훈련의 필요성 : 절대적 진리의 모습이 얼마만큼 정확히 알고 있고 교회가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되기 때문이다.

* 구원의 의미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판단을 이룰 수 있는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임을 말한다.

person = 자신의 의지와 감정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하나님, 천사, 사람등을 말한다)

이를 인격이라기 보다는 위격으로 번역이 타당함

고로 하나님도 인격적, 위격으로 3위로 판단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3부분의 3person으로 말한다.

3위일체 용어채택한사람 : 갑바도키아, 교부들(바질, 그레고리, 닛사의그레고리)

mia ousia treis hopostasia

una sbustantia tree Person

one substance three Person, 3person이지만 일체임을 말함

이를 態의 구별이 아니라 位의 구별을 바로 말해야 한다.

자칫잘못하면 양태, 삼태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보편적 형상(form) : 장소의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개별자와 질료는 비례적이고 이를 만지거나 현실에 있으므로 현상계라 하며 이는 국지적이다, 머무는 곳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형상이라는 것은 공간적으로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이라 한다.

플라톤은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나눈다.

플라톤은 보편적 형상이 영원히 불변한다고 생각하였음

보편적 본질(essens)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