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


Ⅰ. 들어가는 말  

 

예수가 선포한 중심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ՂՁՓՉՋՅՉՁ ՈՅՏՕ)였다고 하면, 바울이 선포한 중심적인 주제는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의(ՄՉՊՁՉՏՓՕՍՇ)의 개념은 구약과 유대교적 맥락에서는 약자를 돕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의 의미, 그리고 여러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었었고,

또한, 바울의 "하나님의 의"의 개념 역시 많은 해석과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의" (ՄՉՊՁՉՏՓՕՍՇ ՈՅՏՕ)는 그 의미의 해석이 계속 있어왔고, 또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의해서 다양한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므로 본 발제에서는 "의"에 대한 성서적 고찰을 시작으로, 지금 다루어지는 바울의 로마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까지 성서적인 면과 신학적 해석 면에

있어서의 의미와 내용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범위를 제시하면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많은 학자들의 논쟁점이 되고있는 속격 해석의 문제. 둘째, 바울의 하나님의 의는 바울 자신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구약 및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 문제. 셋째, 각 학자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통하여 로마서 1장 16-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중심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Ⅱ. 하나님의 의의 어원적 해석

   

"하나님의 의"(ՄՉՊՁՉՏՓՕՍՇ ՈՅՏՕ)에서 "하나님의"(ՈՅՏՕ)라는 소유격 형태의 정확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학자들의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1) 주격적 속격 : ՈՅՏՕ를 주격적 속격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주시요,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크레머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그는 ՄՉՊՁՉՏՓՕՍՇ ՈՅՏՕ를 (ࠗࠃࠕ)의 관점에서 , 즉 계약을 지키는 양당사자간의 행동을 가리키는 관계개념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논증하였다.

 

케제만은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 바울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6:33과 야고보서 1:20에 독립적으로 나타나며 구약에서는 신명기 33:21로 소급될 수 있고 또 유대교에서 지속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의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구약과 유대교 일반에 있어서처럼 하나님의 활동을 표현하는 어구, 즉 자존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어구인 것이다. 케제만은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승리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의"의 개념 안에서 능력과 선물의 분리할 수 없는 연관성을 강조했다.

 

케제만의 이와 같은 해석은 한편으로 의(ՄՉՊՁՉՏՓՕՍՇ)를 순수한 선물이나 죄인의 해방선언과 새로운 복종의 기초로서의 부수적 문제로 보는 인간중심적 관점의 편중성을 지양한다. 다른 한편 일방적인 신 중심적인 관점도 지양한다. 즉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인간의 응답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2) 대격적 속격 : 대격적 속격으로 이해하는 경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로서 인간이 가지는 의를 의미한다. 이 해석은

종교개혁 이전에 ՄՉՊՁՉՏՓՕՍՇ ՈՅՏՕ ԇ'분배적 정의'라는 지배적 해석에 반하여 루터가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리더보스는 롬1:17과 3:21에 나타나는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닌 인간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서 그의 심판 앞에 타당한 그런 속성이라고 정의하였다.

 

3) 기원적 속격 : 불트만의 경우 속격을 기원의 속격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의"의 특성을 구원선물, 즉 오직 은혜로 값없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라고 한다. 왜냐하면 의는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아브라함이 그 의가 약속을 받는데 전조건이었던 것과 같이(롬4:13) 지금은 신앙이

의를 얻는데 타당한 것이 되었다.(롬1:17). 지금 의로 여겨지는 자들에게 구원은 주어진다(롬5:1). 그러므로 의와 구원사이의 연관성이 확고하므로 의 자체에 이미 구원선물의 성격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콘첼만의 경우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주격적 속격에 대한 해석을 고려함이 없이 속격 구조의 주격적 의미를 철저히 거절한다. 그에 의하면 바울이 "하나님의 의"란 용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 자신의 의를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문제 즉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를 얻을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보른캄 역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시는 의이다. 하나님은 죄인인 자에게 자신의 의를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그의 의를 창조하심으로 인간은 생명을 갖게 되었다.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동일하며 믿음을 통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이다.

 

 

Ⅲ. 하나님의 의의 성서적 배경(구약성서)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의에 대해서는 의의 구원적 특성과 의의 징계적 특성을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 의에 대한 용어들은 (ࠗࠃࠕ)과 (ࠄࠗࠃࠕ)이 나타난다. 폰라트의

경우, 구약에서 나타난 "의"는 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으로서, 어떤 윤리적, 법적, 심리적, 종교적 혹은 영적 규범에 따르는 행동이나 처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신성이나 인간성에 의해 지시받는 행위가 아니며 또한 어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적절한 활동이나 이웃사람들에 대한 공정한 봉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의"는 그 관계가 인간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이든 관계의 요구를 이행 또는 충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자가 자신을 발견하는 그 때 마다의 공동관계는 어느 정도 그 자체가 규범이며, 이 모든 것 위에 야웨가 이스라엘에 제공했던 공동관계가 군림하게 되는데, 이 공동관계의 요청들을

옳게 대하는 자들이 옳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의의 행동을 하신다. 그래서 야웨의 의는 그의 선하심, 자비, 공의, 구원, 자유, 영광 및 진실성들을 그 평행어로 갖는다. 예컨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하심으로 그의 의를 입증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의는 현재적 구원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Ⅳ. 하나님의 의의 유대적 배경  

 

유대주의에서는 법정적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심판을 (묵시사건) 저쪽 세상에로 옮김으로써 그 의미를 수정한다. 두 번째 특성은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개인의 위치가 문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두가지 발전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의미를 세밀하게 다루었다.(솔로몬의 시편과 희년서에서).

둘째, 그 반대로 적극적인 구성요소들이 발전되었다. 즉 의는 곧 계약에 대한 신실성이라는 뜻과 자비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1) 구원 선물로서의 의(구원을 얻게 하는 조건이 되게 한다는 의미)  

신앙(԰ՉՓՔՉՒ)이전의 인간이 죽음에 빠진 인간임에 비해 신앙(԰ՉՓՔՉՒ)하의 인간은 생명을 얻은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생명을 얻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신에게 맡기고 '자기를 얻는데서 시작이 된다.

 

바울의 경우, '의인됨'은 생명을 받는데 전제가 된다. 즉, 구원, 생명을 받는 일이 그 조건으로서의 인간의 의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의는 구원, 즉 생명을 받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의인(義認)은 생명을 얻는데 타당한 조건이 된 것이다. 이 두 단어, 의와 구원 사이의 연관성은 아주 확고하고 필연적이기 때문에 의 자체에 이미 구원 선물의 성격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의((ՄՉՊՁՉՏՓՕՍՇ)와 생명(ՆՙՇ) 사이에는 전제와 결과로 존속하는 확고한 연관성이 있다.

 

 

2) 법적, 종말론적 개념으로서의 의  

의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그 중 윤리적 의미(정직함) 으로도 쓰이며, 법적 의미로도 사용이 된다. 그런데, 구원 조건 또는 구원 내용의 표지인 (ՄՉՊՁՉՏՓՕՍՇ)는 법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개인이 가진 의(ՄՉՊՁՉՏՓՕՍՇ)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 의를 선언하는 다른 사람의 판결에서, 그가 책임을

지는 심판대 앞에서 가지는 의이다. 인간은 그러한 자로 인정받을 때,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인정(認定)이 문제될 경우, 즉 그가 "의인(義認)되고", 그에게 "정당함이 선언될"때 의를 가지거나 정당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죄하다는 점이 아니라, 그런 자로 인정된다는 점이다.

 

이제 경건한 자가 신의 의롭게 하는 재판 선고를 종말론적 심판에서 기대했을수록 그만큼 더 의의 법정적 개념은 종말론적으로 되었다. 여기에서 유대교의 관점과 바울의 관점의 중요한 차이점이 발생을 하는데, 바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신의 판결의 전제가 되는 조건들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바울은 "율법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어는 단순한 순수 미래의 의미가 아니라, 격언적(논리적)미래로, 혹은 현재형의 서술은 순수현재가 아니라, 무시간적인 교훈의 현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법정-종말론적 의를 그는 이미 현재에서 인간에게 선언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는 고전6:11에서 고린도인들에게 "너희는 의롭다함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나타나다" 또는 "작용하다"에서는 그것이 인간들에게 또는 그들을 위해 수행되는 사건을 문제삼기 때문에 사람들 측의 이해와

소유의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ՁՐՏՊՁՋՕՐՔՅՓՈՁՉ에 의해 표시되는 것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곧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ՄՉՊՁՉՏՓՕՍՇ)의 현재성에 관한 그의 주제로 법정적-종말론적 의미를 이 의에서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의 역설은 바로 신이 (믿는 자에 관한) 그의 종말론적 심판의 판결을 이미 지금 선포한다는 것,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현재라는 것, 혹은 현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사람에게 선포한 의는 윤리적 완전이라는 의미에서 "죄없음"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죄를 "간주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죄없음"이다. 신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고 "정당하게" 여기면 인간은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일"뿐 아니라 그는 실제로 정당하다. 이런 결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종말론적 실존에 옮겨졌고 사실 이미 죄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성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ՄՉՊՁՉՏՓՕՍՇ)의 현재성은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작용하는 구원사에 의해 "계시"되었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구원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인바,

신은 이를 통해 옛 세계 진행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세대를 시작한 것이다.



3) 의의 현재와 미래의 문제

바울에게 있어서 의라는 것은 현재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희망으로 이해되던 것을 바울은 오히려 현재의 현실성,

또는 동시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종말론적 생명(구원)이 희망의 대상이기는 하나 그렇더라도 특정한 방식에서 이미 현재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제시하는 의는 미래적이면서 그러나 이미 현재적인 구원의 특유한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4) 바울의 하나님의 의의 개념

이제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대립은 (ՄՉՊՁՉՏՓՕՍՇ)의 현재성에 관한 그의 주장뿐 아니라 훨씬 더 결정적인 주제 즉 자유를 명하는 신의 선고에 결부된 조건에 관련된

주제로 발전을 하는데, 이 조건은 유대인에게 자명한 것인바 율법의 실천, 율법이 명하는 "일들"의 실천이다. 이에 대해 바울의 주제는 부정적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는 ՐՉՓՔՉՒ 는 "자랑"(ՊՁՕ՗ՇՓՉՒ)에 대한 철저한 대립이라는 것이다. "자랑"(ՊՁՕ՗ՇՓՉՒ)에 대한 철저한 포기가 ՐՉՓՔՉՒ의 태도인 것이다.


바울은 그의 일들이 아니라 그의 ՐՉՓՔՉՒ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에 관련시켜서도 그에게 "자랑"(ՊՁՕ՗ՇՓՉՒ)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의(ՄՉՊՁՉՏՓՕՍՇ)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의 공로에도 의를 요구할 권리가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근원을 신의 은혜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작용하는 그의 은혜로운 행위에 두고 있다. 이 신의 "은혜"(카리스)는 역시 그의 노력을 긍정하는 자로서나, 그의 힘을 지원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물음으로서 즉 그가 자신을 완전히 신의 행동에 내맡기려는가 - 다시 말해서 자신을 신 앞에서 죄인으로 이해하려는가라는 물음으로서 그를 만난다. 바로 그 까닭에, 즉 이 의(ՄՉՊՁՉՏՓՕՍՇ)는 오로지 신의 "카리스"에만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ՄՉՊՁՉՏՓՕՍՇ ՈՅՏՕ) "신의 의", 신이 선사한, 약속한 의인 것이다.

 

 

Ⅵ. 결론


바울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서의 하나님의 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하나님밖에 있는 의로서 말씀 안에서 경험되고, 말하여짐으로써 체험되는 의이다.

듣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정말 의로워졌다는 것을 깨달으며, 또 새로운 삶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변증법은 언어적 용법의 변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의가 구원의 한 조건으로 나타나는데, 또 한편으로는 구원의 혜택 그 자체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현재의 선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선물로 나타난다.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서술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복음은 보편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 복음은 아담으로부터 시온에 임하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의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 그 복음은 예수의 보내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으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복음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은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이방인을 멸망시키시기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사귐을 나누는 생명을 주기로 하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기독교 이야기 > 기독교 용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지문서란?  (0) 2017.09.12
교회 직책등 영문 용어  (0) 2017.09.11
도그마 [dogma]  (0) 2017.09.08
토라와 용어들  (0) 2017.08.30
소원과 소망을 구별할 수 있는가?   (0) 2017.08.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