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종말의 의미 



글 /  이준원 교수 

 

 

1. 시간의 의미

 

역사에 관한 문제는 결국에는 시간의 문제로 연결된다.

인류는 나면서부터 시간에 의하여 제약되고 시간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결국에는 시간에 의해서 그 존재를 상실해 버리고 만다. 이같이도 강력하고 극복할 수 없는 시간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시간은 미래(not yet)에서 현재(now)에 이르러 과거(no longer)로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그러한 시간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일방통행만 있다. 인간에게 주는 슬픔이 「세상에서의 가장 깊은 원천」(K. Heim;Zeit und Ewigheit, 1927, p.555)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언제든지 변화와 흐름을 가져오며 자유를 주지 않는다.

 

그 동안 철학에서는 몇몇 학자들이 나와 이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토론했다. 예를 들면 베르그송 (Bergson)은 시간에 대한 깊은 철학적 고찰을 했고, 짐멜(G. Simmel)과 하이데거(Heidegger)의 「존재와 시간」은 현재 지성인으로 하여금 시간의 문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했다.

 

인간의 본질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이 자연의 경과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고 영원토록 반복되는 윤회의 바퀴를 타고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간이 해를 「원적 시간개념」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간 이해는 고대의 종교적 철학적 신화에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생각이다. 그러한 해석에 의하면 시간은 반복적이 아니라 과도적인 것이며 이 과도적인 시간은 무시간을 향한 계속적인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실제로 있는 것은 무시간(timeless)뿐이다. 시간이 가지는 본질적인 시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 자체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시간 이상의 무엇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시간 이상의 것은 무시간적이거나 초시간적인 것이라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주로 서양 사상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사상이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약 500 B.C.)의 유(有)의 사상이나 비유(非有)는 절대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사고와 존재의 동일체이다. 존재하는 것은 생성이나 소멸이 없고 유일의 부동부종(不動不終)한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형태 (nunc aetemae-분할 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Plotinus)와 그후의 서양 정신사의 관념론은 이러한 시간 이해에 속한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시간이 가지는 시간성을 극복하면서 그러나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영원자이신 신이 시간에 대해서 역사하는 섭리와의 관계하에서 시간을 이해코자 한다. 기독교신학의 시간 이해에 의하면 시간은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다. 시작에서부터 종말에 이르는 시간의 길이를 생각한다. 시간의 시작은 창조요 그의 종말은 구원의 완성이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적(線的)인 시간 이해는 유대교적인 것이다. 기독교 시간 이해의 특징은 이와같은 창조에서 재림의 사이를 흐르는 시간의 선상에 영원자의 성육신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침입했다고 보고 이 침입을 통해서 영원과 시간이 접촉하여 영원은 영원대로 있고 시간은 시간대로 있으면서 그 시간이 영원을 배태(잉태)하고 있는 이러한 것으로서의 시간을 생각한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역사안에서 시간성을 입으시고 단일회적인 사건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신학은 역사의 모든 사건을 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해한다.

 

기독교 신학은 역사를 영원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시간적인 존재로 본다. 따라서 여기에는 시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시기에 대해서는 통일된 해석이 없다. 과거에 여러 학자들이 성경에 상징적으로 표현된 구절을 토대로 그 시기를 계산하여 보았으나 이때까지의 예언은 하나도 적중한 것이 없다.

 

현실의 인간을 실존적으로 이해할 때 그는 종말론적으로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오늘에 살면서 사실은 어제나 내일에 사는 것이 인간의 실존상태가 아닐까?

 

우리는 성경을 보거나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보거나 시간의 본질을 보거나 자연법을 보거나 역사에는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종말이 언제 있을지 그것은 카이로스요 신의 섭리에 매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역사의 종말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는 것과 그 종말이 오늘의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이 종말은 역사와 신의 섭리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2. 종말의 의미

 

마지막 부분에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소망이며, 앞을 바라다보며, 앞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재를 혁신하고, 변혁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이란 단순히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매개체이며, 관건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안에 모든 것들이 놓여 있다.

 

성경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씀으로써, 시간적으로는, 아주 먼 옛날 태고의 원시인이나, 고도로 발달된 첨단과학의 문명속에 살아가는 20세기의 현대인이나,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해뜨는 방향과 해지는 방향에 사는 수많은 지구촌의 사람들과, 종별적으로는, 금발머리에 우유빛 피부를 가진, 노란 눈과 파란 눈의 늘씬한 서양인이나, 조대(釣臺), 흙(검정흙)으로 분장한 듯, 오골계(뼈까지 검정닭) 모양 새까만 곱슬머리의 흑인들과, 짝달만한 체구에 엷은 오렌지색 피부를 가진 동양인을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씀이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세계와 인류의 운명의 궁극에 대한 교리이다.

 

(1) 여기에는 다르지만 구분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죽음, 부활, 중간상태, 영원불멸과 같은 「개인의 운명」과 주의 날, 세상의 종말, 심판, 새 세계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역사의 운명」이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종말론은 위의 주제들을 내포하면서 조직신학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해 왔으나, 금세기 들어 성경신학의 강조로 인해 기독론과 인간론과 교회론까지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려고 함으로써 이제 종말론은 기독교신학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2) 구약에서의 종말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최후에 축복이 온다는 사상이 점차로 심판의 사상과 결부되어 여호와께서 임하시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사상으로 발전되었고 이것이 바벨론 포로기에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으로 진전되었다. 신약에서는 구약의 사상을 이어 받아 예수를 메시야로 간주하고, 그가 온 초림을 종말의 시작으로, 재림을 종말의 완성으로 본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관한 책으로서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 천년왕국이 있은 다음에 최후의 심판이 있고 그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룩된다고 말하고 있다.

 

(3) 종교개혁가들은 신앙을 미래적 약속에 대한 것으로 이해 했고 하나님 나라의 교회의 완성과 구원을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8-19세기에 와서 성경적 종말신앙은 상실되고 세속화되어 종말은 문화나 세계사 자체의 완성점으로 이해되었으며 일종의 역사철학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바르트로 인해 교회의 종말론은 다시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으며 특히 슈바이처의 「종말론적 윤리」사상은 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사건과 하나님의 약속, 즉 신앙의 현실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4)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개념이 종말론적 묵시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고 그 관점에서 본 예수의 윤리를 종말론적 윤리라 한다. 따라서 불트만의 「실존론적 종말론」,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 디베리우스의 「종말론적 자극」등이 등장했다. 결국 종말론과 예수의 윤리적 교훈과의 관계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미래적인 것으로 볼 수 있고,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으로 본다면 그 윤리는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며, 예수의 윤리가 종말론과 관계되어 있다고 본다면 그 것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질서로 간주될 수 있다.

 

천하에 범사는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은 이룰 때가 있으며,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전 3:1).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여진 것이요, 그후에 심판이 있다(히 9:27). 이것은 천정(天定)의 법칙이다.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공통적 법칙이다. 이것을 가리켜 개인적 종말이라고 말할 것이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다. 그날에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벧후 3:10).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진행될 심판에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주적 종말이라고 말할 것이다(계 19:11-12).

 

하나님의 경륜중에 있는 역사의 중심은 구속사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구원역사가 완성되면 사실상 이 세상 역사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성취될 것이다.

 

이러한 종말관은 성경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조명된 기독교의 종말관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종말관은 자연과학, 일반적인 철학, 심리학, 인류학, 과학, 역사... 등에서 말하는 자연주의적 인본주의 종말관과 구별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성경이 계시하는 종말론적 진리의 빛 앞에서 사람의 궁극적 행방을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종말론이란 신학적으로 정의할 때 「마지막 일들」(헬라어로는 '에스카타')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 개개인과 관련된 것이며(죽음, 부활, 심판, 내세가 포함된다), 이 세계도 관련된 것이다.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end of the world)이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에 보면「종말론」을 히브리어로는 베아하리트 하야밈으로 표기했다. 이것을 번역한 LXX(70인역)에는 헬라어로 「엔타이스 애스카타이스 에매라이스」(in the last or latter days)로 표기하였다. 이것은 「마지막 날 또는 금후(今後)」 (hereafter)를 뜻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종말론이란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로 표현될 때 이 의미속에서 발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심판과 구원이 연결되어져야 한다(Charles Harold Dodd, According to the Scriptures, Nisbet, London, 1952, p.129). 그래서 이 말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적이 「역사의 마지막」(end of history)때에, 또는 예상되어지는 세계의 마지막 때에 완성되느냐 한되느냐를 말할 때에 사용되어야 한다.

 

종말이란 무엇이며 종말론적 희망의 적합한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역중에서 고난과 승리가 없었더라면 완전한 종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신약에서 말하는 「종말」은 실제적으로는 「마지막 사람」(the Last one)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과 나중」(The First and the Last)이라고 호칭하는 것으로도 비교할 수 있다 (계 1:17, 2:8, 22:13).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망을 완전히 성취하셨고,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셨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정적 사건의 결과이다. 이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일어난 일이다. 결정적 사건은 분명하지만 그때(time)는 분명치 않다. 예수님의 사상과 메시지는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이라는 의미는 그의 날에 대한 노골적이며 계시적인 의미를 예시하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종말론을 파괴한 것같이 보이지만 죽음은 이것을 확립한 것이고 천국의 선언인 것이다.

 

마가복음 13:26을 보면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볼 때 의심할 것도 없이 인자가 오는 곳은 지구이다. 이는 그를 볼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때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elect)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게 된다(막 13:27)  초림때에(first coming) 예수님에 의해 그의 사역은 완성되었고 종말의 시대는 시작된 것이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역사의 주(Lord)님이 되셨다는 예수님의 호칭이다.

 

예수님의 재림때에 주님은 세상을 심판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세에서 부활을 경험하게 되며 반대로 그를 거부했던 사람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 3:18). 실현된 부활과 심판은 신자들의 장래 완성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심판을 강조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을 동일시하며(요 12:31) 신자들은 이미 구원(영생)을 얻은 것이다(요 3:16). 또한 마지막 날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얻어진 유효한 부활을 하게 된다(요 6:39 이하). 그때는 요한복음 5:28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 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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