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이후 이스라엘
1. 잇수스에서 승리한 후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애굽마저 점령해버렸다.
이때 세운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들을 이주시켰다.
유대인들의 알렉산드리아 정주는 그 후의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와 중요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2. 알렉산더가 죽은 후 7년간의 다툼 끝에 4명이 권력을 분할했다.
안티고누스는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카산데르는 마케도니아, 프톨레미 라기는 애굽과 남시리아(프톨레미의 총사령관은 셀류쿠스),
리시마쿠스는 트라키아를 차지했다.
3. 이 시기에 유대인 대제사장 의인 시몬은 프톨레미 1세가 파괴한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인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아 “교사장”으로 불리웠다. 그는 “세계는 세 가지 기초 위에 서 있는데, 율법, 예배, 사랑이 그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대제사장 오니아스가(家)와 토비아스가(家)는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 토비아스가는 친애굽적이었으며 부유층을 대표하였다.(암몬 사람 도비야와 관련)
4.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 시리아의 셀류키드 왕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왕조가 제국을 분할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애굽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를 환영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전한 한니발은 안티오쿠스를 충동하여 그리스를 침공케 했다. 이에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승리하여 그의 아우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볼모로 잡아갔다.
5. 불모생활 중 친로마파가 된 안티오쿠스 4세, 즉 에피파네스(영화로운 자)는 유대인들로부터 에피마네스(미친 놈)로 불리웠다. 이때 많은 조공의 약속으로 대제사장이 된 야손은 연무장을 세우고 청년들을 나체로 운동하게 했다. 이는 정통파 유대인 하시딤(경건한 자)의 반감을 샀다.
6. 로마는 안티오쿠스에게 애굽 철수를 명했고, 안티오쿠스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이때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공격하여 학살하였다. 이방신상이 성전 제단에 세워졌다, 이는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었다. 성전 뜰에서 음탕한 이교도의 제사가 드려졌고,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사형시켰으며, 히브리 성경 사본들을 파괴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7. 이때 모딘의 노제사장인 마티디아스는 이교제사를 강요하는 사절들을 죽이고 다섯 아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가 후계자가 되어 리시아스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성전 안의 이교도의 흔적을 제거했다. 그러나 곧 전세가 역전되어, 예루살렘의 지도자 회의는 리시아스의 강화조약을 받아들임으로 제 1차 마카비 전쟁은 끝이 났다.
8. 마카비의 형제들 중 요나단이 죽은 후 시몬이 뒤를 이어 통치했다. 이스라엘 지도자 회의는 시몬의 통치를 인정하여 하스몬 왕조가 탄생했다. 요한 히르카누스는 유대국의 세습왕으로서 아버지를 계승했다. 마티디아스의 아들들이 사망한 것과 더불어 마카비 투쟁의 영웅시대는 끝이 났다.
9. 히르카누스 정부의 등장과 함께 헬라주의자들은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헬라주의자들의 이념은 사두개파에게, 하시딤의 이념은 바리새파에게 전수되었다. 히르카누스의 자녀들은 헬라사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장자 유다는 아리스토불루스라는 그리스식 이름을 더 좋아했다.
10. 아리스토불루스가 죽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히르카누스 2세의 왕권 다툼이 일어나자 폼페이는 이 싸움에 개입하여 아리스토불루스를 패배시킴으로 유다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두메의 통치자인 안티파터(안티파스)는 히르카누스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11. 로마에게 정복당하지 않았던 파르티아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유대의 왕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파르티아인들은 곧 축출 당했고, 안토니우스는 안티파터의 아들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세웠다.
12. 헤롯은 하스몬가의 마리암네와 결혼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주전 32년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로마의 통치자로 등장하자 헤롯의 왕권은 더욱 공고해졌다. 헤롯은 건축분야에 업적을 남겼는데, 마사다 요새 등을 건축했으며, 통치 18년째(주전 20-19)에 성전재건사업을 시작하여 성전 본 건물을 일년 반 만에 완성했다. 이는 알비누스 총독 때에(주후 62-64) 완성되었으나 몇 년이 못 되어 디도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13. 헤롯의 말년은 음모와 모반으로 점철되었다. 장자 안티파터는 다른 형제들을 교살시켰고, 바리새인들은 헤롯이 성전 대문위에 세운 황금독수리를 파괴했다. 헤롯은 유대 지도자들을 죽였는에 그중에는 유다와 마티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헤롯은 경쟁적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께서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유대인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
1. 알렉산더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뭄, 두라 등의 도시들을 통하여 헬레니즘을 퍼뜨렸다. 이에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수 이전에는 가나안인들의 우상숭배에, 유수 이후에는 헬레니즘의 유혹에 노출되었다. 안디옥, 다마스커스, 소아시아에서 대규모의 공동체를 이룬 유대인들은 이웃의 문화에 감염되었다. 이로써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종합이 발전하였다.
2. 70인역 -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가장 큰 업적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주전 250년경 토라번역을 필두로 하여 나머지 정경들과 외경도 번역되었다. 이는 오리겐 시대에 70인역(셉투아긴트)이라고 명명되었다. 70인역은 유대인과 비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신약성경이 인용하는 대부분은 70인역에서 나온 것이다.
3. 알렉산드리아의 비유법 -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은 그리스 사상과 조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아리스토불루스와 필로가 대표적인 비유해석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은 완전히 주관적인 것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등의 안디옥 학파는 문자적인 성경해석을 주장하였다.
유대인들의 종파
1. 바리새파
1) 바리새파는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시절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바리새”는 헬레니즘의 영향으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의식과 청결에 관한 율법을 준수했다. 주전 1세기 동안 두 명의 바리새파 교사가 학파를 구성했는데, 힐렐은 온건한 율법해석을 지향했으며, 샴마이는 엄격한 율법해석가로서 로마에 적대적이었다. 샴마이학파의 입장은 후에 젤롯당으로 표현되었다.
2)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성경 자체의 수준으로 높였다. 생활과는 거리가 먼 헌법(토라) 보다는 보통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구전법을 더 잘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는 율법의 가르침을 준수한다는 종교적인 교만으로 변질되었다. 이들은 야생식물까지 십일조로 바쳤지만, 동시에 빈궁한 자들을 압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2.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귀족들과 대제사장들로 구성된 종파이다. 이들은 부활, 영,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구전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정경을 토라에만 국한하였다. 또한 폐쇄적으로서 대제사장과 귀족일가 이외에는 아무도 사두개인이 될 수 없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당하자 사두개파는 종언을 고했다.
3. 엣세네파
엣세네파는 바리새파와 같이 핫시딤의 신앙고백을 계승했다. 그러나 유대교를 거부하고 쿰란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자급적인 수도생활을 하면서 성경과 다른 책들을 연구하고 복사했다. 이들은 불멸은 믿었지만 육체부활교리는 믿지 않았는데, 이는 물질은 악하다는 헬레니즘 사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엣세네파의 가르침은 예수님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4. 사독파
사독파는 1910년 솔로몬 쉑히터가 Fragments of a Zadokite Work(사독파 저작의 파편들)라는 연구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주전 2세기 초 영적성향의 제사장들이 세속을 떠나 “사독의 아들들”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5. 젤롯당(열심당)
에스키아스의 유다스의 지휘아래 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고 충성하는 것을 죄로 간주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사다 전투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종언을 고했다.
6. 묵시문학
1) 헬레니즘 시대의 마지막 2세기와 기독교 시대의 최초 1세기 동안 묵시(apocalypse-드러남)라고 불리우는 비밀스럽고 신비한 계시의 문학양식이 발전했다.
이 형식들은 이사야, 에스겔, 요엘, 스가랴, 요한계시록과 같은 문헌들에 나타나있다.
묵시문학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가혹한 통치 하에 위로를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악인들에 대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에 오래된 권위를 가진 이름을 빌려서 비유적인 표현을 이용했다.
국가는 바다에서 나온 용으로, 사람은 동물들로, 유대인은 양이나 가축으로, 유대인 지도자는 어린 양 또는 황소 등으로 표현했다.
2) 묵시문학에는 “오는 메시야”의 개념이 주제이다.
이는 “기름부음 받은 자”, “의인”, “인자”등으로 호명되었다.
터무니 없는 상징주의, 과장된 국수주의, 수치계산 등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된다는 신념과 이 목적들을 실현할 다윗의 자손의 강림에 대한 확신이 깔려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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