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문의 의미


성문의 의미1 (느3:1-14) 


요 약
예루살렘 성은 10개의 성문과 4개의 망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갖는 신령한 의미가 있다.

양문은 하나님께 제사할 양들이 들어오는 곳으로 예배의 생활을 교훈한다.

어문은 고기가 들어오는 곳으로 전도의 생활을 보여준다.

옛문은 예루살렘 성의 처음 문으로 선한 행실의 삶이 있어야 함을 나타낸다.

골짜기문은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가는 문으로 겸손을 상징한다.

분문은 오물과 쓰레기가 나타는 문으로 회개와 성결의 삶을 예표한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능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 보자.

설 명

☆ 예루살렘 성
① 10개의 성문 ② 4개의 망대 ③ 40여명의 책임자
④ 중산층 중심으로 단결

☆ 성문의 의미
① 양문(1절) - 대제사장들이 건축 - 예배생활
② 어문(3절) - 하스나아 자손이 건축 - 전도생활
③ 옛문(6절) - 요야다와 므술람 - 선한 행실의 삶
④ 골짜기문(13절) - 하눈과 사노아 거민 - 겸손의 생활
⑤ 분문(14절) - 레갑자손 - 회개와 성결의 삶

☆ 중건된 성
- 그림 -

(강해)
이 시간에는 "성벽건축의 담당자들"이라는 제목입니다.

본문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합해서 성을 재건한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성은 10개의 성문과 4개의 망대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성벽건축은 담당공사 구간별로 나뉘어 약 40명의 책임자의 감독 하에 진행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지도자들을 중심한 중산층과 온 국민들의 단결된 충성,

그리고 가장 수고한 느헤미야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겸손 등의 감동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성문에 대한 의미에 앞서 성문의 의미를 먼저 가르쳐 드립니다.

성문이란 당시 백성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 저자 즉 시장이 있어 물건을 매매했습니다.

또 이곳에 행정과 정치와 사법기관이 있어 각종 기관의 중심지였습니다.

또 집회나 회합의 중심지요, 전쟁을 방비하는 군사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온갖 필수품들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성문이란 성도의 삶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살펴보는 성문은 바로 성도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에게서 놀라운 삶이 전개됩니다.

이 시간에는 열 개의 문 중에서 우선 다섯 가지에 나타난 문에 대한 그 신령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양문입니다.

1절에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했습니다. 

 
이 양문은 예루살렘에 가장 유력한 인물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건축했습니다.

이 문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양을 끌어들이는 문입니다.

이 문 곁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자리잡고 있어서(요5:2)

이 문으로 들어온 양들은 언제나 그곳에서 깨끗이 씻어져 준비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에도 양문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예배하는 삶이 생겨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양문에 대한 성경 기록이 다른 문과 비교되는 것은 자물쇠와 빗장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은 것 뿐이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없다면 다른 곳을 아무리 잘 쌓는다고 해도 그 성은 그 취약점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록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시간은 언제든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장들의 열심이 넘쳐서 양문만이 아니라 함메아 망대와 하나넬 망대까지 만들었는데

이 두 망대는 주로 가장 취약지구인 북쪽에서 침략해 오는 외적을 방지하기 위한 곳입니다.

망대란 높이 세워져 있어서 원수의 침입을 감시하여 미연에 방지하는 곳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배생활 잘하면 원수 마귀의 시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예배 생활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공식예배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제사를 잘 드려야 합니다.



2. 어문입니다.

3절에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했습니다.
이 문은 주로 갈릴리 바다나 요단강에서 잡힌 생선들이 이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공급되었고

근처에 어물전 시장이 있었기에 생활관습에 따라 어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은 어떤 문이겠습니까?

이 문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전도의 문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진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를 세상으로 본다면 우리는 세상에 나가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전도의 삶이 없다면 그것은 영적인 자폐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성적인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모두 외향적으로 바꾸어진다고 합니다.

어떠한 이유로든지 전도하지 않는 삶은 나만 천국가려는 이기적인 것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고 지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임을 안다면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성은 므낫세가 보수한 적이 있었습니다(대하33:14).

당시 그 문을 생선문이라고 했는데 이처럼 우리의 구령사업이 효과가 없다면 방법을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윗 왕조 기간의 어문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시대에 이 문은 예루살렘의 주요 출입구로서 강력한 승리의 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령받아 전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성령을 받아 전도한다란 외형적으로 보면 사랑과 권능의 전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전도방법이었습니다.



3. 옛문입니다.

6절에 "옛 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라고 했습니다. 

 
이 문은 어문과 에브라임문 중간에 있는 문으로(왕하 14:13) 스가랴는 이 문을 처음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문은 선한 행실을 상징하는 문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행실의 변화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최초로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에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이 본래적인 형상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처럼 성도는 예수 믿고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선한 행실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상을 가득히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상에 땅 많은 것도 좋지만 하늘의 땅이 없다면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최소한 일생에 교회 하나는 지어야 하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혹은 일생에 선교사 한 사람은 돕고 혹은 나의 도움으로 주의 종 한사람이 배출되도록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옛문이 어문과 에브라임문 사이에 있는 문입니다.

어문이 전도의 상징이라면 에브라임문은 권능의 상징입니다.

먼저 왜 어문 곁에 있는가? 그것은 성도들의 선한 행실이 전도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행실은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도 될 수 있지만 잘못하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방해하는 경우는 없겠지만 고치지 않은 행실 때문에 장애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만 주문한다면 욕심을 버리고 늘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과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거기에 머물지 말고 이 세상에 무언가 느낌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왜 또 에브라임 문 곁에 있는가? 에브라임은 권능과 권세의 상징입니다.

이 지파에서 능력자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심령이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야 선한 행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될 때 만이 성도는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힐 수 있습니다.



4. 골짜기문이 있습니다.

13절에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거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일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했습니다.
골짜기문은 예루살렘과 동쪽 감람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는 문입니다.

이 문은 서쪽 해안 지방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입니다. 

 
이 골짜기문은 겸손의 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진정한 겸손이 옵니다.

이 문을 통해 내려 가면 기드론골짜기가 나타납니다.

이 골짜기는 두 종류의 물이 흐르는데 그것은 빗물과 함께 생수가 흐르는 곳입니다.

나중에는 히스기야가 예루살렘 성내로 끌여들여서 흐르지 않게 되지만 본래는 기혼의 생수가 이 골짜기로 흐르는 곳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시되 장마비와 같이 외적인 성령충만도 주시고 생수와 같이 내적인 성령충만도 주십니다. 

 
또 이 문은 창14:17을 보면 "샤웨골짜기 곧 왕곡"이라고 했듯이 왕의 골짜기입니다.

이 곳에서 멜기세댁이 롯을 구하고 전쟁에 승리하여 돌아오는 아브람을 축복했습니다.

이처럼 겸손하면 영적인 권세를 입혀주십니다. 또 이 곳은 예루살렘의 공동묘지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겸손하게 자기를 십자가에 낮추고 아주 나를 장사지내야 합니다. 

 
혹은 아사왕이나(왕상15:13) 히스기야나(대하29:16) 요시야(왕하23:4) 같은 선한 왕들은 이 곳에서 우상들을 불살라버리기도 한 개혁의 장소였습니다.

이처럼 겸손이 놀라운 것은 겸손하면 놀랍게도 죄가 이겨집니다.

이 골짜기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시에 건너갔던 곳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주 건너가셨던 곳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가 이 골짜기까지 내려온 것은 좋았는데 아주 건너서 멀리 아기스에게 도망간 종 찾으러 갔다가 처형을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겸손을 떠나면 죽는다는 교훈입니다.



5. 분문이 있습니다.

14절에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했습니다. 

 
이 분문은 성 안의 온갖 오물과 쓰레기가 나가는 곳입니다.

이 문을 나가면 힌놈의 골짜기라는 쓰레기 버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을 나가면 언제나 쓰레기가 타는 연기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신약에서는 이 모습을 지옥에 대한 묘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을 외면한 인생 쓰레기들은 모두 이 곳처럼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이 문은 회개의 상징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온갖 불신앙적이고 추하고 악한 것들은 항상 회개하여 온갖 죄악된 것들이 성령의 불로 살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을 레갑의 아들인 말기야가 중수했다는 사실입니다.

레갑족속이란 경건하기로 유명한 겐족속을 가리키는데 아주 철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죄 짓지 않기 위해 안정된 정착생활을 멀리하고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악을 멀리하고 악기를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레갑족속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35장에 관리들이 술로서 그들을 시험하지만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 분문을 가장 경건한 레갑의 아들이 건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레갑족속을 통해서 진정한 회개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더구나 레갑의 아들 말기야는 '여호와는 왕이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회개란 단순히 용서를 구하는 차원을 넘어 날마다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으로 나의 왕을 삼는 성화적인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란 세례요한의 외침처럼 회개의 열매를 맺는데까지 나가야 하고 세례요한처럼 예수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만약 이 분문이 없다면 성내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로 넘쳐나서 전염병이 창궐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적이 A.D.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포위 당했을 때였습니다.

당시 주민들은 오물로 인한 전염병으로 죽은 수효가 많았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고통과 죽음만이 기다린다는 교훈입니다. 

 

<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무너진 마음의 성을 쌓으십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양문을 쌓고 전도하는 어문을 쌓고 선한 행실의 옛문을 쌓고 겸손의 골짜기문을 쌓고 회개의 분문을 쌓으십시다.

성문은 안전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잘 쌓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만족하게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문의 의미2 (느3:15-32)  


요 약
계속하여 성문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면 샘문은 성령충만의 신앙으로 이 물이 제사와 왕의 동산에서 쓰이듯 성령의 씻으심과 인격의 열매를 교훈한다.

수문은 말씀충만의 신앙으로 성경 이해에 어둡고 깊지만 느디님 사람들처럼 생명의 말씀을 길러 올려야 한다.

마문은 말들이 지나는 문으로 기도의 선한 싸움을 암시한다.

동문은 재림신앙의 상징인데 재림의 현재적 의미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나타나는 성화신앙이다.

그리고 함밉갓문은 감옥문으로 그리스도 심판대의 예표이며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함을 교훈한다.

설 명

☆ 성문의 의미
⑥ 샘문(15절) - 골호세의 아들 살룬 - 성령충만한 생활
⑦ 수문(26절) - 느디님 사람들 - 말씀충만의 생활
⑧ 마문(28절) - 제사장들 - 기도의 선한 싸움
⑨ 동문(29절) -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 - 재림신앙 및 성화신앙
⑩ 함밉갓문(31절) - 금장색 말기야 - 충성하는 생활

☆ 포로귀환시대 유대영토
- 그림 -

(강해)
지난 시간에 예루살렘성의 10개의 문 중에서 5개의 문의 의미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간단히 복습하면 양문은 하나님께 제사할 양들이 들어오는 곳으로 예배의 생활을, 어문은 고기가 들어오는 곳으로 전도의 생활을,

옛문은 예루살렘의 처음 문으로 선한 행실의 삶을, 골짜기문은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가는 문으로 겸손을,

그리고 분문은 오물과 쓰레기가 나가는 문으로 회개와 성결의 삶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이러한 생활이 되어진다는 교훈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능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 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나머지 5개의 성문의 신령한 의미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6. 예루살렘 성문에는 샘문이 있었습니다.  

15절에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으며 문짝을 달며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가의 성벽을 중수하여 다윗성에서 내려오는 층계까지 이르렀고" 했습니다. 

 
'샘문'은 '분문'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m 정도에 위치했으며 그 바로 앞에는 '실로암못'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느헤미야가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을 만큼 크게 무너져 내린 곳이었는데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하여 이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이 곳이 샘문인 이유는 그 문밖의 실로암못으로 불리우는 셀라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못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부분의 성을 이중으로 수축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어서 물은 생명과 같았고 더구나 성전에서 사용할 물을 공급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곳이었기에 대적들의 훼파도 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명보다 중요한 샘문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 문은 성전에 물을 공급한다는 점에서 생명의 성령을 상징합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생명적인 삶이 성취되어진다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므로 생명따라 사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 따라 살아가면 모든 일상의 삶까지도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성령충만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 물은 성전에 제물들을 씻기 위해서 쓰였듯이 성령은 죄도 씻습니다.

슥13:1에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했습니다. 

 
또 이 샘물은 수량이 많아서 넘쳐서 왕의 동산으로 흘러 들어가 동산에 온갖 열매로 풍성하게 했습니다(아6:11).

이처럼 성령의 샘물은 성도들의 심령을 옥토로 만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1) 하신 그 아름다운 심령도 성령받은 심령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강팍한 사람도 은혜만 받으면 변화됩니다.

그리고 이 물은 왕의 동산에 흘러들어가 온갖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는데 왕의 동산의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인격의 성령의 열매를 가리킵니다(갈5:22-23). 

 
그러니까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위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잠14:2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충만의 뿌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요셉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다니엘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충만했고 고넬료도 여호와를 경외하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려면 무엇보다 겸손히 나를 낮추고 날마다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40:28-31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마치 이 샘문이 열려야 백성들이 살 듯이 성령충만이야 말로 영적 생명과 관계되는 중요한 문입니다. 

 

7. 수문이 있었습니다.

26절에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하여 동편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어민 망대까지 미쳤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에 수문이 나오는데 샘문은 무엇이고 수문은 무엇입니까? 샘문은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장소라면 수문은 주민들의 식수가 공급되는 장소입니다.

이 곳을 느디님 사람들이 건축했는데 영어개역성경(RSV)은 이를 `성전 수종자'(temple servant)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수아시대에 이스라엘에 의해서 멸망받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여호수아를 속이고 언약을 맺은 기브온 족속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를 속이고 목숨은 건졌지만 그 대가로 나무 패며 물긷는 자들이 되었습니다(수 9:23-27).

느디님이란 '주어진 자들'이라는 의미인데 그 까닭은 레위인들을 돕도록 그들에게 드려졌기 때문입니다(민8:20). 

 
그럼 이 나무패고 물긷던 느디님 사람들이 지은 수문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충만을 가리킵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말씀이 깨달아지는 축복이 임한다는 교훈입니다.

이곳으로 많은 물들이 들어오듯 성도들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을 입어야 합니다.

그들이 장작을 패듯 우리는 성경 말씀을 쪼개고 쪼개서 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 내야 합니다.

또 어둡고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도무지 알지 못할 것만 같던 성경 본문에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석하여 말씀을 길러올려야 합니다. 

 
즉 성경은 먼저 문자로 기록된 것이기에 문자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그 배경은 무엇인지 장작을 패듯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어두운 우물같은 심령을 깨우쳐 주시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양면성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학자적인 해석만이 다가 아니고 성령의 감동만이 다가 아닙니다.

두 가지가 병용되는 것이 올바른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이 문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공중 집회시 이용되었습니다(느8:1).

이 수문 앞광장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부흥운동의 특징은 말씀을 통한 부흥운동입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백성들이 이곳에 모여서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율법을 듣고 그 의미를 깨닫고 모두 울기도 하고 즐거워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 읽어 들린 말씀의 의미를 밝히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금식하고 회개하는 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말씀충만의 수문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회개해야 제대로 회개가 됩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개혁자들이 나타났지만 여로보암 금송아지 죄가 회개되기는 잃어버린 율법책을 성전에서 찾은 후부터였습니다.

우리들도 말씀의 신앙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8. 마문이 있었습니다.

28절에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했습니다.
이 마문은 동쪽 성벽에 있었던 한 문으로서(렘31:40), 말(馬) 혹은 말을 탄 사람들이 들어오던 문이었습니다.

이 '마문'은 솔로몬의 옛왕궁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마문 위 북쪽으로 뻗은 성벽은 제사장들이 증축했습니다.

그 맞은 편에 제사장들의 집이 있었습니다. 

 
여기 마문은 기도의 선한 싸움을 상징합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면 기도하게 되어진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날에 이 문을 통하여 군대가 나갑니다.

그런데 그냥 군대가 아니라 신속하고 강력한 마병대가 나갑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기도처럼 신속하고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상담은 한계가 있습니다.

구제불능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처럼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에는 불가능이 없으므로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엡6:18-19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하라고 교훈합니다.


기도 잘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기도 잘해야 하나님의 손길의 도우심을 크게 받습니다. 기도는 마병대의 전쟁과 같아서 참으로 능력있는 것입니다. 

 

9. 동문이 있습니다.

29절 중반절에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했습니다.
여기 동문지기란 문구 속에 동문이 나오는데 동문은 바로 성전 앞에 있는 문으로 성문인지 성전 건물에 속한 문인지(겔 40:6, 10)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문 지기가 레위인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성전을 출입하는 문과 관계가 깊은 성문 혹은 성전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해가 뜨면 제일 먼저 이 문을 통해서 성전 안에 빛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이 동문은 재림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재림에도 현재성과 미래성이 있습니다.

현재성이란 성령을 통하여 영적으로 현재도 오시고 계심을 가리키고 미래성이란 역사의 종말 그 날에 완전히 재림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먼저는 예수의 형상이 우리 심령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즉 동문처럼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는 우리 심령에 나타납니다.

나아가 재림하실 때 성령께서는 죽은 혹은 죽을 육체까지도 영광의 형체로 변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문은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 고대와 아울러 성화의 생활을 암시합니다. 

 

10. 함밉갓문이 있습니다.

31절에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고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누에 이르렀고" 했습니다. 

 
여기 함밉갓문은 소집문(RSV), 점호문(공동번역)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학자들의 대체적인 주장은 감옥문으로 봅니다.

그리고 금장색이란 금과 같은 쇠를 다루는 철공을 가리킵니다.

이런 금장색이 문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튼튼한 문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금장색 말기야가 이 문과 또한 마주 대한 성벽 부분 그러니까 최초에 제사장들이 양문을 건축한 부분 그러니까 동쪽 성벽이 끝나는 지점까지를 건축했습니다. 

 
이처럼 이 문은 인간의 역사가 끝나고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예표하는 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모든 선과 악, 충성과 불충성이 가려지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으로 확정되고 불신자는 영벌에 처해 질 것이며 충성된 자는 상을 받고 불충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함밉갓문이 성도에게 교훈하는 바는 주의 일에 충성하자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이 문은 금 다루는 금장색이 만들었듯 충성된 성도들에게는 귀한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충성을 다하십시다. 

 

<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샘문과 수문과 마문과 동문과 함밉갓문 즉 성령충만 말씀충만 기도생활 성화생활 충성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다섯 문을 포함한 열 개의 성문을 잘 갖추어 영적으로 더욱 승리하고 풍요로운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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