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학자
수많은 요직 독차지하며 특권의식으로 가득 차
이스라엘 사회 지도층은 신구약 중간 시대에 여러 변화를 겪었다.
권력은 바벨론 회복기 때 주도적 역할을 한 제사장에서 율법학자층으로 이동했다.
율법학자들은 주전 2세기 이후 새롭게 부상했다.
이들은 정부의 재판기구와 교육기구에서 가르칠 특권을 부여받았다.
또 이들은 평민이면서도 혈통을 앞세운 사제 계급과 함께 이스라엘 최고 사법기관인 산헤드린
재판관에 선임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 외에도 공공단체에서 장로, 회당장, 재판관을 임명할 때,
율법학자와 일반인이 동시에 입후보한다면 율법학자를 우선으로 선출했다.
또 1세기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이미 사제 계급이 독차지했던 수많은 요직을 상당 부분 잠식했다.
율법학자들은 국민 대다수에게 높은 신뢰와 명망을 얻었다.
전국 수많은 젊은이가 율법 강해를 듣고자 했고 유명한 문파에 들고자 노력했다.
바울도 가말리엘 문파에서 공부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도 예우와 존경을 받았다.
‘으뜸가는 자’ ‘랍비’ ‘아버지’ ‘주’라는 칭호를 들으면서 인사를 받았다.
예루살렘 상류사회에서 연회를 열면 으레 최고 상석으로 안내되었다.
율법학자의 직업
복음서에서는 율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이란 용어를 특별한 구분 없이 혼용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비유 자체는 다른 복음서에 병행 구절이 없지만,
그 도입부에 해당하는 말씀(눅10:25 ~28)은 마태복음(마22:34~40)과 마가복음(막12:28~34)에 병행 구절로 등장한다.
세 복음서 병행 구절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가 마태복음에는 ‘바리새인 중 율법사’로, 마가복음에는 ‘서기관’으로 등장한다.
결국 이 세 가지 용어를 혼용해서 썼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는 바리새인파와 사두개파 중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했다.
전통적인 사제 계급이 사두개파에 속했다면, 신흥세력인 율법학자들은 바리새파 노선에 속했다.
율법학자들은 제자들을 가르치더라도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따로 직업을 가졌다.
율법학자는 주로 전문기술을 요구하는 수공업에 종사했는데, 이스라엘 사회에서 수공업은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율법학자인 사도 바울도 천막 제조공(행18:3)이라는 수공업을 익혀 생활했다.
예수님도 당대 율법학자로서 아버지 요셉에게서 대를 이어 전수받은 목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율법학자들은 서기관 직업을 선호했다.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직종이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점 하나만 잘못 찍어도 의미가 달라진다.
따라서 공부를 많이 한 학자나 똑똑한 사람들이 서기관을 했다.
이들은 법률 전문가이기도 했고 율법을 해석하기도 했다.
상당한 지위에 올랐고, 보수도 일반인에 비해서 좋았다.
율법학자와 구전율법
묵시문학이 신구약 중간 시대에 성행했다.
율법자들은 그들의 지식을 이용해 하늘나라에 대한 비밀을 은밀히 나누는 것을 특권의식으로 삼았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온 것도 이러한 이유라고 추측한다.
하나님과 창조에 속한 비밀뿐 아니라 구전 율법(장로들의 유전, 마15:2;막7:3)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신비적 전승에 해당한다.
구전 율법은 모세오경에 기록한 성문 율법 613개를 당시 율법학자들이 구체적으로 해석한 것을 가리킨다.
율법학자들은 회당에서 구전 율법으로 강의했지만 이러한 가르침을 하나님의 비밀로 여겨 대중에게는 문서로 유포되지 못하게 철저히 금지했다.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승되었으므로 이것을 구전 율법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구약성경으로 알려진 거룩한 문서들도 당시 대중은 문서로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당시 대중의 언어가 아람어였어도 구약성경은 거룩한 언어인 히브리어로 쓰였다. 율법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본이 유포되지 못하게 했다.
하나님 창조의 신비와 구전 율법, 나아가 성경 본문을 다루는 그들은 말라기 이후에 끊어진 선지자의 상속자요, 후계자로 인정받는 단체였다.
율법학자들이 누리던 생전의 영광은 사후까지 이어져서 그들은 선지자의 무덤에 묻혔다.
▲ 율법학자는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편집하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다. 사진은 통곡의 벽 앞에서 전통 복장을 하고 토라를 읽고 있는 유다인. 제공=평화방송여행사 김원창 |
바빌로니아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조가 멸망하고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생활을 하면서부터 사제들과 경쟁하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바로 ‘율법학자’다.
율법학자를 가리키는 히브리말 ‘소페르’는 본래 ‘기록자’(서기관)를 뜻했다.
구약 성경 시대 문맹률이 높았던 시절에 글을 기록하고 해독할 수 있는 이는 사회나 국가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서기관들이 왕국의 각종 문서와 조약뿐 아니라 율법을 기록하고 해독하는 일들을 했다.
이들 서기관 대부분은 왕국 멸망과 함께 사라지거나 율법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율법학자로 서서히 탈바꿈했다.
사제들도 유배기간 중에는 전해 내려오는 율법을 기록하고 보존해서 집대성하는 서기관의 일에 주로 종사했다.
이들 서기관은 셀레오코스왕 안티오코스 4세의 폭정에 대항해 마카베오 혁명(기원전 167~164년)이 일어날 무렵부터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강조돼 서기관보다는 ‘율법학자’란 호칭으로 불렸다.
이들은 ‘토라’(율법)가 이스라엘의 보호자이며,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희망이기에 이를 탐구하고 고취하고 그 모든 교훈을 생활에 반영시켜 민족의 영적 양식으로 삼으려 애썼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엘아자르(2마카 6,18)는 유다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제시됐다.
바빌론 유배 후 널리 알려진 학자 에즈라
율법학자들은 종교법을 결정하고 이를 전달하는 법학자와 편찬자의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했다.
그들의 임무는 “주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규정과 법을 가르치는 것”(에즈 7,11 참조)이었다.
이들은 에제키엘 예언자와 요시야 임금 시대에,
그리고 유배생활 후 에즈라 예언자의 지도로 율법을 복구하고 성경을 조직화하는 대사업에 참가한 사람들로
오늘의 구약성경은 거의 이들 율법학자의 손으로 완성된 것이다.
에즈라는 바빌론 유배 이후 가장 널리 알려진 율법학자였다.
원래 사제 출신인 그는 페르시아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기원전 464~424년)에게 간청해 한 무리의 귀향민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왕은 에즈라에게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들과 판사들을 임명할 권한을 줬다(에즈 7,25-26).
에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대사제 가문이면서도 제의를 집전하지 않고 율법을 백성들에게 읽어 줌으로써 교사와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줬다(에즈 8장).
에즈라와 느헤미야기에 나오는 또 한 명의 서기관 즉 율법학자가 나오는 데 바로 ‘차독’이다.
그는 십일조로 바쳐진 곡식과 술과 기름을 보관할 창고 책임자로 사제와 레위인과 함께 임명됐다(느헤 13,12-13).
백성에게 존경받은 율법학자들은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우던 사제들과 점차 대립 위치에 서게 됐다.
바빌론 유배 이후 사제, 레위인, 서기관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일은 서로 혼합됐고, 산헤드린(공회)의 의석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확고한 계급 기반을 구축했다.
예수님 시대 시나고그는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고 성경을 해설하는 회당이었기에 여기서도 율법학자들이 사제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백성들로부터 통상 ‘랍비’(선생님)로 불렸다(마태 26,25.40.; 요한 1,38).
예수님도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랍비’ ‘랍부니’(요한 20,16)라 불렸다.
랍부니는 아람어로 랍비와 같은 의미이지만 높임말이다.
율법학자들은 재판에도 관여했다. 왜냐하면 율법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어서 송사에 관한 율법적 판단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법학자들은 행정관이자 유다인의 삶에 정통한 전문가로, 예루살렘과 그 외 지방에 봉직하는 공직자와 재판관 역할을 했다.
율법학자들은 지방에도 거주했지만(루카 5,17 참조) 주로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예수님, 본래 정신 망각한 학자들 비난
마르코와 마태오, 루카 등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율법학자를 예수님께 반대하는 집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게 된 원인 중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 대사제들과 연관돼 예수님을 반대했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율법학자의 출신 성분은 다양했다. 장인 출신이 제일 많았고, 상인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무슨 직업을 가졌건 같은 연구를 하고 같은 이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로 상호 밀접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서로 치열한 공개 논쟁을 할 때에도 이 유대는 금이 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의 학식을 인정하시고(마태 13,52), 그들과 논쟁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의 참된 부르심에 따르지 않고 부질없이 전통에 집착해 율법의 지엽적인 문제들에만 매달리고 그 본래 정신을 망각하고
있다고 비난하셨다.
서기 70년 예루살렘 붕괴 후 율법학자들은 갈릴래아 호수 남쪽 얌 네 아예 집결해 거주하면서 이곳을 종교 중심지로 삼고 탈무드 대부분을 편집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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