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및 예전

 

교회의 예배


초대교회 교인들은 정기적으로 안식 후 첫날(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사도행전 20장 7절에는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라고 씌어있고, 고린도전서 16장 2절에는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바울이 안식일에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군중들에게 설교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모이는 날은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이었다. 안식 후 첫날에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계 1:10)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폐해졌다. 골로새서 2:14를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세의 율법을 폐한 것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삭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는 교훈을 준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폐한 것을 지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은 두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요한복음 4:24를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in spirit)과 진정으로(진리로, in truth) 예배할지니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신령한 마음으로, 즉 온 마음을 다 해 예배를 드려야 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진리)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마음으로부터(신령으로) 우러나는 예배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예배드 리는 사람이 온 마음과 진정(진리)으로 예배드리지 않는다면, 그가 행하는 중언 부언하는 기도나 감상적인 노래 등은 참된 예배의 요소가 될 수 없다.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해 사도행전 2:42에 단적으로 나와있다. "저희가 사도 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도행전 20:7에 보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첫날에 떡을 떼었다. 떡을 떼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주의 만찬"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는 이것을 가리켜 "성례전(sacrament)"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다.

 

영어 성경에 보면 주의 첫날 앞에 정관사 "그(the)"가 붙어 있어서 여기서 말하는 주의 첫날은 매주의 첫날임이 확실하며 이것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마다 주의 만찬을 행했음을 말해주는 것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계명 중 "그"(정관사)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과 성격이 같다. 실지로 주의 날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행하신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 만찬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고, 그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즙)을 마셨다.

 

이 단순한 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항상 기도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 가운데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며(고전 14:15)"라고 말한 것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함으로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고, 그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가르치거나 설교하거나 성경 읽는 것을 통해 사도들의 교훈을 들려주는 것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바울은 드로아에서의 모임(행 20:7)을 하나 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이와 같은 설교나 가르침 속에는 정치 나 경제적인 내용을 주제로 삼지는 않았다. 오직 우리들의 영혼 구원과 관계된 내용이었다. 초대 교회 예배 모임에서 그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찬양을 했다(골 3:16). 이들이 노래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 화답하기 위해서였다.

 

신약시대의 교회에서는 마음으로 하는 노래를 말했지 악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초대교회의 음악은 모두 육성이었다. 그 당시에도 악기 음악이 성행했지만 초대 교회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악기가 교회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주후 670 년경이었다.악기를 사용하는 일이 중세 교회에 일반화되기까지는 그 때로부터 수 백년이 지난 후 였다. 또, 그 당시 악기를 다른 목적에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는 의도적으로 악기 음악이 배제된 것이 명백하다.

 

 

기독교 예배의 원형


예배의 원형이 언제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가를 추리하고 추적해 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교 예배의 원형을 찾아보고자 하나 그것이 결코 여의치 않다. 예수의 생애에서 그것을 추리하려는 의도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의 예배유형이 먼저 태동했고, 그 예배 형성의 와중에서 신구약의 정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둘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병행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교회의 태동도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예배의 출현도 예수의 부활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적인 모임에서 비롯된다. 예루살렘 다락방의 경험도 그렇고, 엠마오 도상의 경험, 갈릴리 해변에서의 경험도 그리스도의 교회와 예배의 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런 예배 경험이 결코 획일적인 것은 아니었다.

 

갈릴리 변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아 보려고 모여든 제자들의 공동체(예를 들면 Q공동체)에서는 기도와 말씀의 명상, 그리고 가르침에 역점을 둔 예배를 반복했던 흔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예루살렘 다락방에서는 다른 예배 행위도 모두 반복했지만 특히 '떡을 떼는 일'을 중요시했던 것 같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예배경험들이 확대되고 심화되면서 '말씀의 명상'과 '떡을 떼는 일'이 통합되어 하나의 예배 유형을 태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공동식사가 예배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였다. 그것은 빵과 포도주의 예식에 의해 대체되었는데, 이는 2세기 중엽의 예전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의 문서들 중 어느 것도 왜 공동식사가 주의 만찬으로부터 분리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맨 처음의 설명은 바울의 고린도 전서에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 이유가 분명하다. 고린도인들은 공동식사를 남용하고 있었다.

 

디다케 뿐만 아니라 플리니의 편지도 공동식사와 주의 만찬의 분리를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플리니의 시대에 공동식사는 박해 때문에 생략되었다.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 공동식사는 어떤 실제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생략되었는지도 모른다. 점차 성장하는 교회에게 있어서 점증하는 교인들을 공동식사에 다 수용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여러 개의 식탁들이 빵과포도주를올려놓은 한 개의 식탁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동식사와 주위 만찬은 주후 150년경의 저스틴(Justin)의 글에서 보는 것과 같은 단일한 예배행위로 혼합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예배의기본적인 유형은 아래와 같다. 초대교회의 예배에서 이 성경적이고 성례전적인 요소들의 균형은 불가분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어느 한 요소를 제외한 예배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대와 중세의 예배


4-5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으로 인하여 교회의 위치가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이처럼 혜택받은 상황 속에서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여러 가지 신조들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을 규정하고 보다 확고한 형태의 예배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는 고전 기독교의 시기요, 교부들의 황금기였으며,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중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로마제국의 유력한 도시들 안에서 교회 중심지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중심지들은 이 시기의 신학과 예배에 반영되어 있던 특별한 예배양식을 점차 발전시켜 나갔다. 물론 각 지역은 나름대로 독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조에 있어서는 모든 예전들이 말씀과성례전이라는 두 가지의 중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차이점이 발생하는 것은 각각의 지역 문화를 반영하는 예식과 양식에서이다.

 

 

동방교회의 예배


4세기의 예배는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특히 동방교회의 예배에 해당한다. 동방의 세계관은 미학적인 것은 사랑하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문화의 커다란 공헌은 시, 문학, 미술, 철학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관심사들은 시적인 정서와 비유 감각 및 예술적인 표현능력을 신장시켜 주었다.

 

이때 당시의 예배가 헬레니즘적인 상상력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동방의 예배에서 예배 의식적인 기호들과 상징들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잔틴(Byzantine)의 예배는 고도로 의식적이며 화려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우 신비적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의 예전에 있는 의식은 소입당(Little Entrance)과 대입당(Great Entrance)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입당은 복음서의 낭독을 중심으로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대입당은 빵과 포도주를 중심으로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대입당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강조하기 때문에 소입당보다 그 의식이 훨씬 풍부하다. 이 의식을 바탕으로 동방의 예배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된다.

 

 

준비예배(Proskomidie)


이 순서는 예배 전의 준비예배에 해당된다. 교회 안에서는 시편과 기도의 낭독이 계속된다. 세례청원자의 예배(Liturgie des Katechumen)이 순서는 초신자들. 즉 비세례자들의 예배로 찬양이 시작되고 복음서 낭독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믿는 자들의 예배(Liturgie des Glaubigen)이 순서는 세례받은 자들의 예배로서 성찬 중심이다. 교회는 양자의 모습(빵과 잔) 안에서 성례를 받는다. 물론 믿는 자들의 성찬이 진행되기 전에 성례 청원자들의 퇴장이 먼저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이 순서에 있지 않고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예배순서 사이에 여러 가지 형태의 중보기도가 동방교회 예배의 한 특색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입장행렬과 관계된 예배유형의 발전이 콘스탄티노플의 예전에서 비잔틴의 예전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동방교회) 예배 유형 발전의 큰 흐름을 좌우하고 있다.

 


서방(로마) 교회의 예배


지금까지 집약한 동방교회의 예배유형과 아주 대조를 이뤄온 것이 이른바 '로마의 예배유형'이다. 전자가 헬라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것이라면 후자는 라틴어와 그 문화를 포용한 예배의식이다. 로마의 도시에는 콘스탄틴 황제 이전에도 꽤 발전된 그리스도교 예배유형이 있었다.

 

312년(A.D)에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마자 콘스탄틴 황제는 당시 가장 보편적인 공공건물이었던 공화당(basilica)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 자신이 '그리스도교 회당'( Lateran Basilica)을 하나 건축하도록 도왔다. 후에 사도요, 순교자였던 베드로를 기념하는 사원(shrine)을 짓고, 그 외에 '바티칸 회당'(Vatican Basilica)이 증축되기에 이른 것은 로마의 예배 유형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 로마에서 발전된 특유의 요소는 사순절(Lent)을 비롯한 교회의 절기 행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교회당과 가정교회들이 이 예배의 거점이 되었다. 가정교회마다 성회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금식기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거룩한 주간의 행사를 포함한 예전적인 행사는 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부활절 주간에는 매일 로마에 있는 주요 교회당을 방문하며 그 곳의 기도회에 참여하였다. 예배 행진도 로마의 예배유형의 특성 가운데 하나였다. 비잔틴 예배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틀림없겠으나
후엔 로마 특유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중세에 이르러 서방교회의 예배유형은 초대교회의 예배의 원형에서 멀리 이탈되어 있었다.


동·서방교회가 갈라지고 난 다음부터 점차 서방교회 예배에 변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 한 예가 바로 미사(mass)이다. 미사의 근본 목적은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재현하기 위함이다. 이 희생의 재현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의로워지며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기 위함이다.

 

이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영성체의 전례는,
가능한한 주님께서 쓰신 말(words)과 행동(actions)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짜여졌다. 그러나 점점 예배가 성만찬(미사) 중심이 되었고 그 역점도 빵과 포도주를 나눔에 있지 않고 그 물질의 성체화(transubstantiation)에 미신적인 요소까지 곁들일 정도가 되었다. 미사도 이해 못할 라틴어로 행해졌고, 회중들의 참여는 별로 문제시하지 않았다. 게다가 설교는 예배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성경봉독마저도 생략되고 성자들의 생애에 관한 몇 구절을 읽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돈을 내고 미사에 참여하거나 면죄부를 사야 하는 정도에까지 전락한 예배 현실이었으니 종교개혁운동은 시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교회력의 시작


기독교의 교회력(The Sacred Calender)이라고 하는 것은 1년을 한 주기(cycle)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 즉 그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또 주로 의식교회(liturgical churches)에서는 성자(Saints) 가 된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리스도의 덕성을 배우고 기리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한 날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날을 기념하고 싶어하는 깊은 본능이 있는데, 교회력은 바로 인간의 이러한 종교적 내지 심리적인 본능으로 부터 시작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포함해서 자연속의 모든 생물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힘에 의하여 둘러 쌓여 있고, 그들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빛과 어둠이 반복되고, 일하는 시간과 쉬어야 하는 시간이 있고, 탄생과 성장과 늙음과 죽음이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계절을 감지하고, 생일과 죽은 날을 기념하여 1년을 싸이클로 하여 주기적으로 기억할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적이고도 종교적인 본능에다 유대교의 전통이 접목되어 기독교의 교회력은 시작하게 되었다고 본다. 유대교의 명절은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것이 교회력의 기초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때, 그 시작은 유월절 부터이다.

 

레위기 23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6개의 명절이 나오는데 곧 유월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그리고 초막절이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 온 이후 이 날을 교회력으로 지켰는데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날이 바로 "농업신 축제"의 날이었고, 또 그곳의 기후에 따라 비가 일찍 오는비도 있고 늦게 오는비가 있어서 (농사도 두번 추수하는 모양) 첫 과일 열매로 유월절을 지냈던 것이다. 또 첫 추수로 감사절(초실절이라고 함)을 드린후 7주가 지난 50일째 (그래서 이날을 칠칠절이라도 함) "나중에 추수한 다른 곡식으로 여호와에게 새 소제를 드려야 한다"(레 23:16)고 하여 칠칠절을 지켰다. 칠칠절이 무교절(the feast of unleavened) 이후 50일 되는 때에 지켰기 때문에 희랍어의 "50"을 의미하는 Pentecost 곧 성령강림절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기독교를 역사의 종교라고 한다. 역사 속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많이 있고, 그 사건들은 1년을 주기로 재현시켜 반복 기억하는 것이 역사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본능이다. 따라서 유대교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해서 매 7일마다 안식일을 지킨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매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고 이날을 지킨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적인 사건은 출애급 사건이다.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들은 유월절을 지킨다. 공교롭게도 유대교의 유월절은 기독교의 부활절과 그 시기가 같다. 뿐만 아니라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오순절도 자연히 기독교의 오순절과 같은 기간에 있을수 밖에 없다. 부활주일 이후 50일이 되는 날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시어 기독교에서는 성령강림 주일을 부활후 7주가 되는 주일에 지키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유월절 후 50일을 맥추 감사절로 지키는 동시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감사절로 지키고 있다. 율법을 주시는 것과 성령을 주시는 것과는 신학적으로 또 하나의 좋은 대비를 이룬다고 볼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약탈되어 이방신을 섬기게 되어 더렵혀 진 성전을 마카베오 유다 장군이 이방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성전을 되찾아 이를 재건하고,

 

깨끗히 한 다음 성전 재 봉헌식을 드렸다. 그것이 유대 월력 아홉번째 달인 Chislev(오늘의 12월)의 25일 이었다. 그들은 이 날을 하누카(Hanukkah)라고해서 축제를 갖는데 이것 역시 우리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와 같은 시기에 온다. 유대인들이 갖는 감사절인 장막절은 9월에 있으나 기독교에서도, 비록 그 날짜는 다를 지라도 감사절을 지킨다. 이와같이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이기 때문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로 이루어진 특별한 날을 무시할 수 없고 이들을 기억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력은 1년이라고 하는 싸이클 (cycle)을 통하여 우리 주님의 구속 사업의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므로써 인간 구속 사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우리의 신앙을 더욱 강화하자는데 그 의미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와같은 역사적인 날을 유대교로 부터 전수 받았으나 그후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성자들의 성일이 교회력에 추가되어 하나님의 인간 구속사의 기념일이 인간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일로 타락하여 교회력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이로 인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성탄절과 부활절을 제외한 모든 교회력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력을 앞장서서 부정했던 사람들이 바로 Scotland의 장로교파 사람들과, 영국의 청교도(Puritan)들 이었다. 그 후 Scotland 장로교에서는 교회력에 관한 관심이 다시 커져서, 결국 1940년에는 교회력에 근거한 성서 일과가 담긴 예식서를 발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개신교회에서도 차츰 교회력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60년 제2 바티칸 공의회가 개신교에게도 공개되고, 초청됨에 따라 천주교의 예배 의식에 까지 개신교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회에서 개정한 의식서를 보면 천주교회의 의식으로 부터 대단히 큰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영향은 천주교회에서 개신교회로 만 온것이 아니다.개신교로부터 천주교로 간 영향 또한 지대하다.

 

 

주 일


기독교의 주일은 물론 유대교의 전통인 안식일로 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을 정하셨고, 이 날을 엄숙히 지키라고 십계명을 주시면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유대교는 이 날을 엄숙히 지킨다. 뿐만 아니라 이날을 엄숙히 지키는 또 다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종살이 할 때 모세가 에집트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나온 날이 바로 안식일 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더욱 안식일을 지키라고 모세는 호소 하였던 것이다.

 

(신 5:15) 이와같은 율법의 안식일이 주일의 첫날인 일요일로 바뀔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구약에 기록된 율법과 안식일과 축일에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목회와 가르침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것은 율법이 완성되었을 때 "천국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외형적인 법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 율법의 본래의 중심 사상과 정신과 내용에 충실하라고 했다. 마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정신을 잘 드러낸 예수의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안식일의 지배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지배하는 주인임을 선언하셨다.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새 왕국, 새 하늘나라"는 "주일의 첫 날"에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시작 된다고 믿었다. 이 부활 사건으로 율법이 완성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초대교인들은 매 일요일을 주께서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신 날로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그날을 거룩한 날로 지켰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종래의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도들은 계속해서 유대교의 교회력을 지켰다. 그러나 이방인으로 있다가 개종한 새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이상 유대교의 교회력이 그들에게 의미와 필요를 주지 않았다. 사도 바울도 유대교의 전통과 교회력을 엄격히 지켰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의 전통과 교회력을 지키든 안지키든 "주님을 위하여 하는 일"(롬 14:5-9)이기 때문에 그런것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가르치면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것이나 명절이나 매월 초하루나 안식일에 관해서 아무도 여러분을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6-17)고 말 했다. 사도의 시대가 끝나기 전(AD 1세기)까지 교회 신도들의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일주일의 첫 날인 일요일을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함께 모임을 가질수 있는 가장 좋은 날로 선정하였다.(행 20:7; 고전 16:2) 2세기의 신학 저술가들은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보고, 이를 유대교와 다른 상징(symbol)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주님의 유월절" (부활절)을 유대교의 유월절이 지난 후에 기념하였다.

 

또 지방 교회에서는 순교자의 죽은 날을 "영원으로의 탄생일"로 정하고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하는 전통이 시작 되었다. 왜냐하면, 순교자들이야 말로 교회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를 증거한 사람들이라고 생각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인 "주일"은, 곧 그리스도께서 말세에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바로 그날이라고 생각 하였고, 우리의 구속자시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이 넘쳐 흐르는 약속의 나라로 들어가는 "영원에로의 탄생일"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일은 교회력의 핵이요, 기본이다.

 

이날은 일주일의 첫날이요,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막 16:2)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제 8일에 함께 모였고, 성만찬을 가졌으며, 얼마 후에는 예배까지 갖게 되었다(요 20:26). 사도 바울도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주일의 첫 날에 모임을 갖는것으로 했고(고전 16:2), 그러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타난다.(행 20:7) 씨리아어(Syriac)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이날을 일요일이라고 했지만
희랍어(Greek)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이날을 "주일"(the Lord's Day)이라고 했고(계 1:10),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뜻인 "Dominica"라 했다.

 

150년경 순교자 유스틴(Martyr Justin)은 그의 Apology에서 "기독교인들은 시내에 살든 시골에 살든 모두 해의 날(일요일)에 한곳에 모입니다. 우리가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 이유는 이날이 한 주의 첫날이요,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빛을 창조하신 우주 창조의 날이요, 바로 이 주일의 첫날에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사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의 Constantine 황제는 321년 기독교인들의 예배일을 휴일로 선포 하였다. 일요일은 성경에서도 대단히 의미있는 날이다.


①하나님이 빛을 창조한 날이요,

 ②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만나를 나리신 날이요,

③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께서 부활하신 날이요,

④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나려주신 날이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에도 주일을 지키는 것은 엄격했다. 많은 순교자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의 규칙이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지 않고 살수 없다" "성찬을 거절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주님으로 부터 끊어 버리는 것이다. 주일의 성찬은 주님과 함께 드는 것이요, 형제들과 함께 드는 것이다" 라고 증언한것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주후 9세기 부터 서방교회에서는 성자의 기념일을 지키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졌다.

 

수요일과 금요일


기독교에서는 수요일에 저녁 예배를 드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감리교인 경우 속회를, 장로교인 경우엔 구역예배를 또는 철야기도회를 갖는다. 이와 같은 전통도 유대교회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의 날로 정해서 지켜 왔다. 3세기 중엽에 기독교에서도 금식의 날을 수요일과 금요일로 택 했다. 수요일은 주님께서 배반 당하신 날이기 때문이고, 금요일은 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이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에서는 금식이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그러면서 수요일의 금식이 없어졌다. 다만 사순절 때에만 수요일의 금식과 금요일의 금식이 철저히 지켜졌었다. 현대 기독교에서 수요일에 기도회를 갖고 금요일에 구역예배 또는 속회를 갖는 것과 금요일 철야 기도회를 갖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금식을 하던 전통이 금식 대신에 기도회로 그 모양이 달라진 것이다.

 

부활절 기독교에는 이동 명절과 고정 명절이 있다. 크리스마스는 고정 명절이어서 12월 25일을 고정으로 지키고, 부활절은 이동명절이어서 매해 그 날짜가 변동된다. 부활절의 날짜가 변동됨에 따라 교회력의 많은 날이 또한 달라진다.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는 336년 또는 354년에 시작 되었고, 부활절은 기독교가 시작된 첫 해 부터 시작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가장 오래된 명절이 바로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유월절이라고도 말 하는데 그이유는 부활절이 유대교의 유월절과 같은 계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두 명절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급기 12장을 보면 "흠이 없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유월 (passover)하여 그 집의 장자를 구해 준 것" 처럼, 기독교에서는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가 속죄의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죄악의 죽음에서 구원 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안식일 까지 죽음속에서 안식하시다가 안식일을 지내고 일주일의 첫 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심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은 이날을 "주의 날"이라고 하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매 일요일에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매 일요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로 주일 모임을 갖게 되었고, 안식일 대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이때 부터 시작 되었다. 그럼으로 초대교회에서는 매 일요일을 "주의 날"로 지켰고, 부활절을 대 명절로 지켰으며, 매 주일 드리는 주일 예배는 소명절, 즉 작은 부활절로 지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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