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예배



목  차

Ⅰ 들어가며
   1. 발제의 목적 및 범위
   2. 예배에 대한 일반적 고찰
Ⅱ 초대교회의 예배 예전
   1. 히브리인의 예배
   2. 초대 기독교적 예배 예전
   3. 예배에 관련된 초대교회의 문헌들
Ⅲ 바울서신에 나타난 예배 예전
   1. 예배의 종류
   2. 예배의 장소
   3. 예배의 날짜 및 시간
   4. 성례전
   5. 초대교회의 직분
Ⅳ 고린도 교회 예배의 문제와 그 특징
   1. 본문 고찰
   2. 고린도의 사회적 배경
   3. 고린도 교회의 예배적 상황
Ⅴ 나가며
   1. 바울과 초대교회의 예배를 정리하면서
   2. 한국교회에 있어서 시사점
☆ 참고문헌


Ⅰ 들어가며

1. 연구의 목적 및 범위

본 발제는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예배  풍속도를 통하여 당시의 콘텍스트적인 상황을 점검해 보고,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살펴봄으로써 텍스트를 좀더 치밀하게 읽을 단초를 제공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성서를 자료로 사용하며, 부수적으로 성서의 주석, 교회론, 조직신학, 예배학, 바울 사상에 관한 국내외의 저서들과 논문들, 그리고 사전류를 참고 문헌으로 하여 발제팀 간의 미팅을 통하여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팀원 각자  한 chapter를 맡아 연구하고 취합하여 한 맥락으로 정리하기로 하였다.
발제팀은 처음에는 예배와 관련된 서적 및 바울에 관련된 서적을 읽어내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각자 자기에게 할당된 분량의 책을 읽고 간단한 컴맨트를 통해 본 발제와의 유용성 여부를 판단하여 때로는 인용구를, 때로는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발제팀을 혼란스럽게 한 것은 발제의 방향 설정에 있었다. 장기간의  토론 끝에 발표 1주일을 남기고서야 비로소 예배학의 큰 틀 안에서 초대교회의 예배를 다루어 보고, 초대교회의 예배 안에서의 바울 서신에 나타난 예배 풍속도를 다루기로 방향을 설정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발제는 먼저 제1장에서 발제의 목적과 범위, 그리고 예배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을 권종현 전도사가 정리했으며, 제2장에서는 초대교회의  예배와 예전을 유대교의 성전 예배, 회당예배와 복음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예배를  이 원 전도사가 정리하고, 여기에  초대교회 예배에 관한 문헌들(예를 들면 플리니(A.D. 111-113)의 편지, 디다케,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등)을 권종현 전도사가 보충했으며, 제3장에서는 바울서신에 나타난 예배와 예전을, 예배의 종류, 장소, 날짜, 직분 및 직책, 성례전 등을 중심으로 이금남 전도사가 정리하였고, 제4장에서는 바울서신을 통해 본 예배의 풍속도를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하여 머리 두건  문제, 방언과 여러 가지 은사들, 애찬과 성찬식 등은 권오선 전도사가 정리했으며, 제5장의  결론과 교회에서의 평가는 권오선, 권종현 전도사가 다루었고, 김주열 전도사는 자료 수집을 담당하기로 했다. 총괄적 정리는 권종현전도사의 몫이었다.

2.  예배에 대한 일반적 고찰

예배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만남(로버트 E. 웨버, 예배 역사와 신학, 정장복 역)'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예배가 현대의 공동 예배에서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무지와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성경과 신학적 이해로 예배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실천을 갱신해야 한다. 성경에 있는 예배는 신구약을 통털어 영적이며 육적인 양면을 가지고 있다.

구약은 여러 형태의 예배(제사 의식)를  제시하고 있지만 신약시대의 예배에 관해 신약성경에는 체계적 진술이 없다. 구약성경의 예배는 출애굽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사건에 뿌리박고 있다. 구약 성경의 요소들은 시내산 사건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에 관한 보편적인 구조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백성들은 이에  동의한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준행위에  의하여 봉인된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며 공간과 예식들과 제사장들에 대한 거룩한 생활을 강조한다. 절기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시키며 거룩한 시간개념을 위한 무대역할을 수행한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체계적인 진술은 없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로써 예수 그리스도 주변의 사건들과 관련하여 생겨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신약성경의 예배를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유대교의 예식이나 제의의 종말을 선포하셨다. 기독교  예배의 공통자료는 그리스도 사건에 뿌리박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완전히 단일한 예배의 상이 없다는 것이다. 사도들과 사도들 직후의 계승자들이 사도적인 예배 전승을 유지하는 데 힘써 질서 있는 예배의 정립을 강조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예배는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삶이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 전체를 개인적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것으로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의 갱신이 필요하다.

그러면 기독교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기초를  둔 성육신적인 것이다.

기독교 예배는 다음의 두 가지 정의로 이해할 수 있다.(James F. White, 기독교예배학입문, 정장복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1, pp. 13-31.)

이 책에서 제임스 화이트는 예배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견해들은 다음과 같다.

풀 훈(Paul W. Hoon)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피터 부르너(Peter Brunner)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인간인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라고 했으며, 자크 폰 알멘(Jean-Jacques von Allmen)은 '예배란 인류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그 절정에 이른 구속사의 과정을 새롭게 확인하고 집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라고 했으며, 최근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배를 '하나님의 영화와 인간의 성화(1903년 교황 피우스 Ⅹ세)'로 정의하고 있다. 카젤(Casel)은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행하신 역사는 그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예배자들에게 새롭게 경험되고 예배드리는 현재에 다시금  구원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주와  더불어 사는 삶이다'라고 말한다.

요약하면,

하나는 '세상에서 부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께 응답하고자 모이는 모든 행위'라고 설명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대화하고 접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배는 회중이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드리는 회중 예배와 개인적인 헌신으로 드리는 개인 예배가 있다. 이러한 회중 예배와 개인 예배는 별도의 독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보완적인 것이며 어느 한편이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회중 예배는 일정한 형식을 갖게 되는 데 이것을 예식이라고 하며, 이 예식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성경봉독, 설교, 축도)이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찬양, 봉헌이 있다. 예식 외에 예전이 있는데 개신교의 예전은 성만찬과 세례의 두 가지만 허용하고 있지만, 카톨릭은 이 외에도, 견진, 고해, 종유, 결혼, 신품 등을 포함하여 칠성례를 예전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의 구조(Structure)는 말씀과 성례전인데 기도, 찬양, 송영, 축도, 응답 등이 성례전에 포함된다. 기독교 예배의 맥락(Context)은 교회 안에 있으며, 성도는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예배자는 응답한다. 교회의 모임은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상징 아래 현존하시는 주의 만찬을 통해서 봉인된다.



Ⅱ 초대교회의 예배 예전

1.  히브리인의 예배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예배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변하였다. 그러나 세 가지 형태는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었다. 그 첫째는 '장막'(Tabernacle)의 예배 형태이다. 이스라엘이 방황하는 때에 만든 유동 형식의 천막은 예배와 제사의 장소가 되었다. 나무로 천막의 기둥을 삼고, 가죽을 엮어 천막 포장을 만들었으며, 색을 넣어 예배하는  장소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다. 큰 제단은 '제사'를 위해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아 장막 예배는 제사(Sacrifice)가 그 중심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장막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처음이며 큰 부분은 어린양을 잡아 제사하는 성소이었고, 그 안에 있는 작은 부분 지성소는 십계명이 쓰여있는 법궤가 위치하여 있었다.

이방 종교와 장막에서의 히브리인의 예배 행위 사이의 결정적인 구별은 이방인들은 예배하는 곳에 '은상'을 두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히브리 백성들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적 사건과 그들의 민족을 세우신 역사적 사건에 관계된 십계명만을 '거룩한 곳'에 두었다는 점에 있다. 장막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비와 구속하시는 힘을 믿었던 신앙(信仰)과 그와 맺었던 언약의 관계를 되살려 다짐하는 행위였으며, 십계명이 예배의 대상은 아니었던 점이다.

두 번째 형태는 히브리 백성이 팔레스틴에 정착하면서 웅장하게 세웠던 '성전'(Temple)에서 찾을 수 있다. 성전은 유동 형식의 장막을 대치하여 예배의 중심 장소로 나타났다(B.C. 621). 그러나 바벨론 군대에 의해 처음 성전은 B.C. 586년에 파괴되었다.  파괴되기 전  성전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민족적인 종교의 중심이었으며,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도 절기를 따라 성전의 정기적인 규례를 따라 순례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정복자들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가 되어 이방 속에 흩어졌을 때 제3의 형태의 예배 장소와 형식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모여 두루마리 성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그들의 신앙을 위해 기도하는 공식적인(informal) 예배였으나, 결국 이 형식은 회당(synogogue)으로 발전되었으며, 이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기구로서 그리고 새로운 예배 형식으로 나타났다.

회당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모방한 소성전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부락마다의 종교적 센터로서 주로 성경 '읽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그 사명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또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운명 때문에 회당 안에서 비공식적인 예배를 가지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시편을 노래하는 일, 기도, 성경 낭독, 랍비(제사장이 아님)의 해석이 중요한 순서였으며, 랍비는 실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복종함으로써 여호와의 약속을 기억할 것을 촉구했다.

후기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졌을 때에도 회당이  함께 존속했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은 이원적 예배 제도를 실시해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성전은 제사를 강조함으로써 인간 구원을 상징하는 성례전적 의미를 가지로 있었으나 노래나 성전에서의 설교는 강조되지 않았다. 반면에 회당은 제사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던 이스라엘에게  영적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설교와 가르침을 강조하였으며, 이로써 예배에는 제사의 성례전적 의미뿐 아니라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의 인식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히브리적인 예배의 제사와 의식은 기독교 예배 형식을 위한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2.  초대 기독교적 예배 예전
 
처음 기독교인들의 예배는 그 형식에 있어서 성전과 회당 중심이었던 유대 전통을 얼마 동안 따랐으나, 기독교 예배의 특수한 내용 때문에 점차  특수한 형식을 모색하여 갔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떡을 나누셨던 날을 '주의 날'(Lord's Day)로 정하게 되었다. 이 날의 선택은 유대주의의 안식일로부터 구별하려던 목적이 있었으며, 매주 첫날(고전 16:2)을 정해 예배의 날로 삼았던 것이다. 

쿨만(Oscar Cullmann)은 '원시 기독교 예배'라는 저서에서 이 '주의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축하하는 날 이었으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예배를 위하여 초대 교인들을 함께 모았던 'Congregatio'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의 원초적인 내용과 시발은 제사도, 교육도, 코이노니아도 아니라 '주님의 부활' 사건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것임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날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한 행위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형식이 있었다. 그 첫째는 '설교'(가르침 포함)이었고, 두 번째는 '기도'였으며, 세 번째는 '떡을 떼는 일'(성도의 교제 포함)이었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은 처음부터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 행위의 근거와 본질이 되었던 것이다. 

첫 형식은 설교로서  설교는 구약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건까지의 구속적  사건과 이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이 그 내용이었다.

두 번째 형식인 기도는 주의 기도문을 공중이 함께 외우는 것이 상례였으나, 이 때에 기도는 세 가지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1) 부활하신 날에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을 감격하고 감사하는 일로서 과거의 살아있는 회고이다.
2) 기도는 공동체 앞에서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공동 행위 속에 친히 임재하신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의미했으며, 이는 현재적 경험이다.
3) 기도는 마지막 성찬에서  약속된 '아버지의 나라'(마 26:29 ; 눅 22:18)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과 소망의 기도였다.

기도는 인간의 탄원이거나, 욕구를 아뢰는 것이기보다는 인간과 세계를 위해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구속적 은총(예수의 부활,  성령의 임재,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감격과  감사였다는 것이 초대 교회 예배 때 드렸던 기도의 내용이었다. 

세 번째의 형식은 성례전의 행위이다. '떡을 떼었다'는 초대 교인들의 행위는 예배의 다른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쿨만(Oscar Cullmann)은 주장하기를 초대 교인들의 성만찬은 보통 식사시간에 시행되었으며 떡을 떼는 일로만 국한되었고,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처음 교인들의 성찬적 행위는, 주의 마지막 만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부활 이후 제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나타나셨던 사건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눅 24:30-36)

초대 기독교인들은 예배 행위를 위한 장소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신약성경에 보면(행 2:46 ; 5:42, 눅 24:53) 처음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하신 대로 유대의 규례를  따라 성전에 모였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이  확대되면서 그들은  '가정'에서  모이기 시작했으며, 특히  '다락방'(Upper Room)(행 1:13)은 그들의 예배 장소가 되었다.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습관적으로 초대 교회는 히브리 전통을 따랐던 때가 있었다. 성전은 제사를 위하여, 회당은 성경 읽기와 설교를 위하여 구분되었던 전통을 따른 두 가지 모임이 초대 교회에서도 있었다. '말씀'을 듣는 예배 행위(성경 읽는  일, 설교, 기도, 시편을 노래하는 일, 축복)는 한 장소에서 일어 났으며, '성찬'을 위한 예배 행위는 다른 장소에서 시행되었던 것이 저스틴(Justin, A.D. 150) 때 와서야 '주의 날'의 예배에서 함께 연합되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의 의미를 요약해 보면 다음 몇 가지로 논의 될 수 있다.

첫째로, 예배 행위(설교, 기도, 성만찬)를 통하여 성령의 임재와 만남의  경험을 가졌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령의 임재의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으로서,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실 종말의 약속을 대망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사와 사랑이었다. 예배의 궁극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이었다.
두번째로 이러한 예배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본질적인 행위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의미는 '예배'의 행위를 통해서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설교와 기도와 성만찬'의 예배 행위를  통해서 모였던 초대교회는 이방인의 회심을 위하여 세계 속으로 흩어져야 했던 선교적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예배와 선교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의 두 형식적 단면들이었다.
 
3. 예배에 관한 문헌들
 
초대교회의 예배에 관하여 문헌등의 자료가 많지 않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성서 자체이며(특히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여러 가지 외경들, 그리고 12사도의 가르침, 디다케(A.D 111-113년)의 플리니의 편지,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등의 자료와 유대교의 회당 예배  전승들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사도들과 사도들 직후의  계승자들은 사도적인 예배 전승을 유지하는 데 힘써 질서 있는 예배의 정립을 강조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성서에서 발견되는 예배 풍속은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디다케와 플리니의 편지를 살펴 보기로 한다.

① 디다케
디다케는 12사도의 가르침을 모은 글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도적 권면들과 더불어 세례와 성찬 등 성례전에 관한 중요한 진술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디다케 7:1-4까지 세례에 관한 원칙들이 천명되는데 흐르는 물에서 세례하도록 하고 만약 여의치 않으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례를 주도록 그 방법의 폭을 유연하게 한 것을 볼 수 있다.(디다케, 조병철 역)

7:1 또한 세례에 대해서 입니다.: 이것은 세례법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공적인 교육을 하십시오.

     그런 후에 흐르는 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십시오.
7:2 만약 흐르는 물이 없다면, 어떤 다른 것으로 세례를 주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찬것으로 할 수 없다면, 따뜻한 것으로 하십시오.  
7:3 둘다 할 수 없거든, 머리에 세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부으십시오.
7:4 나아가서, 세례하기 전에 세례 줄 자와 세례받을 자, 그리고 (세례)할 수 있는 어떤 이들도 금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세례 받을 자를 미리 이삼일간 금식하도록 말해야 합니다.

또한, 성찬에 관하여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성찬을  감사의 예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찬의 내용은 먼저 잔에 대하여, 그리고 빵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성찬 자격에  대하여 세례자로 엄격히 제안하고 있다.

9:1 또한 성찬에 대해서 입니다 : 이것은 감사드리는 법입니다.
9:2 먼저 잔에 대하여 : "우리는 당신, 우리의 아버지께 당신의 자녀이신, 다윗의 거룩한 가지이며, 당신의 자녀이신, 예수를 통해 계시하신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9:3 그리고 [빵에서 쪼개낸] 조각에 대해서 : "우리는 당신, 우리의 아버지께 당신의 자녀이신, 예수를 통하여 계시되어진 생명과 지식에 대하여 감사하나이다.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9:4 "[빵의] 이 조각처럼 언덕 위로 흩으셨고, 그 후에 한데 모으시고, 하나로 만드셨고, 이 땅 끝에서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함께 이끄시고 당신의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광과 권세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9:5 여러분은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의 성찬을 먹거나 마시우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에 관하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디다케는 성례전 이외에도 금식과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8:1 여러분의 금식은 위선자들이 것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지만, 여러분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십시오.
8:2 여러분은 위선자처럼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주께서 그 분의 복음으로 우리를 초대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그 날의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채무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채무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유혹에 이끌리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당신에게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8:3 여러분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에 세 차례 기도하십시오.

계속해서은혜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10:1 여러분은 그 성찬을 마친후에 이러한 방식으로 은혜를 말하십시오 :
10:2 "우리는 거룩한 아버지께 감사하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마음 속에 머무시는 거룩하신 이름이며, 당신의 자녀이신, 예수를 통해 계시된 지식과 신앙 그리고 영원함이십니다.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10:3 "전능하신 주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당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신께 감사하며 즐거워하도록 사람들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당신께서 당신의 자녀이신, 예수를 통하여 음식과  마실 것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10:4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전능하신 당신에게 감사하나이다. 당신에게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10:5 "너희 교회여,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여러분의 사랑으로 너희를  완전케 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십시오.(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사방에서 (교회)를 위해 만드신  하나님의 나라로 함께 모으소서. 당신에게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10:6 은총(그리스도의  상징)을 오게 하시며, 이 세계가 지나가게 하소서. 다윗의 하나님께 호산나. 누군가 거룩하다면, 그를 오도록 허락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로 회개하게 하라. 오 주여 오소서. 아멘.
10:7 그러나 예언자들의 경우에, 여러분은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감사를 하도록 하십시오.

이어서 예언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1:3 이제 사도와 예언자에 대해 말합니다 : 복음적 교훈 안에서 행동하십시오.
11:4 모든 사도들이 도착할 때 마치 주님인 것처럼 환영하십시오. 그러나 그는 하루 이상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11:5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 그 다음날도 역시 (하루 이상을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가 삼일을 머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 입니다.
11:6 떠날 때에, 사도가 그의 다음 숙박할 곳까지  옮겨갈 충분한 음식을 구하는 어떤 것도 용인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돈을 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11:7 한 예언자가 환상적인 발언(방언)을 하는 동안, 그를 검사하거나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으나, 이러한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11:8 그러나 누구나 환상적인 발언을 한다고 해서 예언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과 같이 행동한다면 (예언자입니다.) 그들의 행동에 의해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가 구별되어질 수 있습니다.
11:9 예를 들어, 한 예언자가 성령으로 식탁을 막는다면(mark out a table), 그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가 먹는다면, 거짓 예언자입니다.
11:10 다시,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예언자가 그가 가르친대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나눔과 구제에 대하여, 헌금에 관하여

14:1 모든 주의 날에 - 그의 특별한 날에 - 함께 와서 빵을 나누고, 감사하십시오. 먼저 여러분의 죄를 고백하면, 여러분의 예물은 순수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14:2 그의 이웃과 불화한 자들은 그들과 화해할 때까지 (주의 날에) 참석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예물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14:3 이러한 예물에 대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어느곳에서 순수한 예물로 나에게 드리십시오. 나는 위대한 왕입니다." 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 나라의 불가사의입니다."

직분에 대하여

15:1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주님께 칭찬듣는 자 곧, 친절하고, 관대한 신앙을 가지며, 열심하는 감독과 집사를 세우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들에 대한 그들의 목회가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15:2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들을 경멸해선 안됩니다. 예언자들과 교사들을 따라 그들은 여러분 가 운데에서  명예로운 자리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라나타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6:5 그러면 인류는 불타오르는 시험에 닥치게 되고, 많은 자들이  멀리 떨어지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을 지키는 자들은 그 재앙에서 구원받을 것입니다.     
16:6 바로 거기에서 진리(그리스도의 상징)의 표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첫째로 하늘을 펴는 듯한 표적과, 둘째로, 트럼펫 소리가 날 것이며, 셋째로, 모두가 죽음 중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죽음의 부활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16:7 "주께서 오시며 그와 함께 그의 모든 성도들이 (오도다).  그러면 세계는 주께서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② 플리니의 편지
플리니의 편지는 당시 비시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가 황제 트라얀에게 보낸 편지를 말하는데 이 편지 안에 기독교 예배와 관련된 두 개의 의식이 발견된다. 이러한  의식들은 매주 일요일에 이루어졌는데 그 첫 번째는 해  뜨기 전에 있었던 의식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과 성만찬을 통해 죄악을 삼갈 것을 맹세하였고, 하루 일과 후에 두 번째 의식으로 다시 만나 흠없는 공동의 식사를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William D. Maxwell,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8, pp.21-24.)

비시니아의 총독 플리니는 비 신자였으므로 그가 전하는 의식들은 표면적인 것이었을테지만 그의 편지를 통해 우리는 몇가지 사실을 발견한다.

첫 번째 의식에서 불려지던 찬송은 교창이었다는 것과, 이들은 정해진 날 즉, 일요일에 모였다는 사실이다.

③ 저스틴 마터의 변증서(William D. Maxwell,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pp. 26-30.)

A.D.140년경 저스틴 마터가 안토니우스 황제에게  보낸 기독교 변증서에서도 주일(일요일) 예배에 관하여 개략적인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성찬에 관하여, 그리고 예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에 …… 모인다. 이 때 사도들의 서간이나(바울 서신 등) 선지자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그 후 집례자는  성경 말씀을 강론하고 권면한다. 다음에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 온다.'

여기서 저스틴 마터는 성찬에 대한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는데 철야기도회가 그것이다. 성찬을 준비하기 위해 철야 기도회를 가졌던 것이다.

④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
'이집트 교회 규범'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서에서 초대교회의 예전의 모습들이  다수 발견된다. 이 문서에서 예배는 말씀예전과 다락방 예전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며, 성찬예식의 순서들이 명확히 언급된다. 예배의 내용(Content)은 예수 그리스도이다.-구약의 성취,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이다. 예배의 구조(Structure)는 말씀과 성례전인데 기도, 찬양, 송영, 축도, 응답 등이 성례전에 포함된다. 예배의 맥락(Context)은 교회 안에 있으며, 성도는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예배자는  응답한다. 교회의 모임은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상징 아래 현존하시는 주의 만찬을 통해서 봉인된다.



Ⅲ. 바울서신을 통해 본 예배 예전
 
1. 예배의 특징
 
초대교회에는 예배형태를 세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아람어 게통의 기독교 예배요, 둘째는 헬라적인 기독교 예배이다.

① 아람어 계통의 기독교 예배
아람어를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의 예배와 동일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전"과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행2:46). 아람어 계통의 기독교 예배는 성전예배의 연속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전의 기도 시간을 준수하고(행3:1), 성전을 복음 선포의 장소로 사용했다(행3:11-26, 4:12-13).(예배의 역사와 신학, 로버트 E. 웨버 저, 정장복 옮김, 한국장로교 출판사)

② 헬라적인 기독교 예배
ⓐ 헬라적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유대교 의식을 거부한데서 그 특징을 찾을수 있다.
회당의 회원들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스데반을 비난하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6:13-14). 헬라적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성전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폐기되었고 구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 헬라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유대교  제사 의식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바쳐진  유월절 양으로 간주하였으며(고전5:7, 롬3:25, 엡5:2),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 대치된  것으로 생각했다.(고린도전서 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들은 또한 새 성전인 교회를 구성하는 백성들을 "왕같은 제사장"으로 호칭하였다(벧전2:9).

ⓒ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있어서 자유를 유지하려는데 큰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교육이 필요했다.

초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실례는 오순절이 지난 26년 혹은 27년 후인A.D. 50년 중반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인 황홀경 현상(the ecstatic phenomena)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방해할 정도로 극도의 무질서를  야기 시키면서까지 교회의 예배에서조차 황홀경 속에서 하는 말들(enthusiastic utterances)을 마구  해댔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충고한 것이다(고전14:23, 14:40).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고린도전서 14:23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바울은 그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기를 그치라고 명하지  않았다. 단순히 방언이 예배에서 적절한  위치를 차지해야만 한다는 점과 방언과 통역이 차례대로 질서 있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로버트 웨버, 예배학, 김지찬 역, 생명의 말씀사)

2. 예배의 내용

바울은 우리에게 예배의 순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의 주요 측면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계시, 지식, 예언, 교훈의 말씀 (고전14:6)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혹은 통역(고전14:26)
        기도, 찬미, "아멘"하는 것, 감사 하는 것(고전14:13-17)

고린도전서 마지막 부분에는 마라나타(Marana tha, 16:22)라는 생소한  아람어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주여  오시옵소서'가 더 좋은 번역이며, 이 구절은 예수께 드리는 간구 기도라는 것이 매우 확실해 보인다.  마라나타는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당 예배 의식에서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을 '주'로 부르게 된  사람들이, 이제는 이와 동일한 신적 칭호를 메시야인 예수께도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또 "전체를 위하여"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로버트 웨버, 예배학, 김지찬 역, 생명의 말씀사. 고린도전서 12:7-11 ;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그리고 방언들 통역함)

바울문서에 나타나는 예배의 순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Willian D. maxwell, 예배의 발전과 그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P17-18.)

        1부   회당 예배로 계승하여 발전하게 된 순서
                성경낭독 (딤전4:13, 살전5:27, 골4:16)
                시편과 찬송 (고전14:26, 엡5:19, 골3:16)
                기도 (딤전2:1-2)와 회중의 아멘 (고전14:16)
                설교 또는 강론 (고전14:26)
                신앙고백 (고전15:1-4, 딤전6:12)
                헌금 (고전14:1-2, 딤후9:10-13, 롬15:26)
        2부   주님의 만찬 (고전10:16, 11:23)
                봉헌기도 (고전11:23, 14:16, 딤전2:1)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회상 (고전11:23, 25, 26)
                중보기도 (요17)
                거룩한 입맞춤, 혹은 평화의 입맞춤 (롬16:16, 고전16:20, 살전5:26, 벧전5:14)

거룩한 입맞춤(The kiss of peace, 롬16)은 중보를 끝마치고 헌금으로  이어주는 사랑과 일체감의 따뜻한 표현이다. 예배시 남자와 여자는 회당에서 처럼 구분되어졌으며, 남자는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았으나 여자는 천을 쓰도록 하였다(고전11:6-7) 또한 기도시의  자세는 서서 하도록 하였다(빌1:27, 엡6:14, 딤전2:8)

3. 예배의 날짜 및 시간
 
초대교회 교회력에 관한 최고의 증거는 A.D. 57년경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서신 가운데서 찾아볼 수가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명절을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고전5:7-8). 이 언급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유월절 기간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축하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성전에서 몇몇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대상23:30)과 다니엘이 하루에 세차례 기도했다는 사실(단6:10)을 알고 있다. 기도 시간으로 하루를 구분하는 풍습은 초대 교회 공동체로 전해졌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행3:1)고 적고 있다. 누가는 또한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육시더라"(행10:9)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공동체  중심의 조직화된 매일의 예배가 있었다는  직접적 증거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기도의 습관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하루 중 특정한 시간마다 기도를 드리는 풍습을 계속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로버트 웨버 저, 예배학, 김지찬 역, 생명의 말씀사)

4. 성례전(세례, 주의 만찬)

① 세례
세례가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씻음'이라는  생각이 입증(고전6:11; 엡5:26;  딛3:5)되었으나 세례가 옛 생활에 대한 죽음과 새로운 창조를 상징하는  '죽음의 바다 속에 잠김'이라는 사상이 세례의 신학에서는 훨씬 더 강조된다. 이 비유는 세례통에 들어가기 전의 옷 벗음과  물에서 나와서 새 옷을 입는 것과 연결된다. 그러한 옷 벗음과  다시 입음은 때때로 죽음과 새 생명(롬13:14,  골3:3)이라는 문맥에서와 바울의 사상에 나타난다(갈3:27, 골3:9). 그 전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세례에 연관되어 있다.(골2:11-12, 엡4:21)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고, 또 깨끗케 함이 상징이라고(고전1:13, 6:11, 엡 5:26)했다. 이러한 바울의 세례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랄프 마틴 저, 초대교회예배, 오창윤 역, 은성출판사)

ⓐ 바울은 성례의 미신적 사용을 배척한다.
고린도인들은 어떤 중요한 인물들에게 세례받는 것이  매우 큰 유익이  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고전1:13-17) 그러나 고린도전서 1:16,17과 10:1-17에 나오는 세례와 주의 만찬의 의미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어떠한 마술적 사상도 가르치지 않고 또 그 성례들이 어떠한 특별한 능력을 준다는 인상도 전혀 나타내지 않음을 보여준다.

ⓑ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로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말하였다(고전12:13, 갈3:27)

ⓒ 세례는 자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를 요구한다(롬6:1-4)

ⓓ 세례라는 외적 행위에  대한 완전한 내적  의미의 설명은 로마서  6:3이하와 골로새서 2:12에서 발견 되는데, 이 두 본문은 모두 죽음과 부활이라는 문맥 속에서 그 성례의 의미를 분명히 말해준다.
                골2:11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골3:5 "육체를 죽이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갈라디아서 3:27절은 바울의 사상을 간단하게 요약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또, 에베소서  5:14 절은 세례기도로 생각될 수  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② 주의 만찬
식사와 주의 만찬과의 관계는 고린도전서에 잘 나타나 있다(11:17-34). 주의 만찬을 나눔에  있어서 바울은 우리 주의 죽으심을  공동체 친교의 중심부분으로 강조하고(고전11:23-26),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 볼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고전11:27-30) 진지함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 곳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성만찬을 대연회와 실제로 연결시키고 있었음"이 의심할 여지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적어도 고린도 교회에서만큼은 이 성만찬 예식 안에도 몇몇 폐습이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의 행동을 비난한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음으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전11:20-22)

아마도 식사를 먼저하고, 다음에 주의 만찬을 갖는 순서로 진행된 듯 하다. 어떤 고린도 교인들은 식사 때의 즐거움을 너무 만끽한 나머지, 진지한 자세로 주의 만찬을 참여할 수 없을 만큼 술에 취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집에서 먹으라고 충고한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 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34).

바울은 기독교의 축제인 성찬에서 거룩에의 요청과 유월절 의식을 잊었음을  상기시킨다(고전5:7,8). 유월절 축제 때, 모든 유대인 가정에는 누룩이 흔적도 없이 치워지고 집안의 모든 구석과 틈까지 청소되어 '깨끗하다'고 선언되어야 그 엄숙한 의식은 거행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이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의 '옛 생활'은(롬6:6, 엡4:22), '벗어  버려'져야 한다(고후5:17). 왜냐하면 그가 구속의 명절을 지킬 때마다(고전5:8)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가 순전하고 거룩한 삶에로 그를 초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성찬의 자리에서 보이지는 않으나 임재해 계신 주님과 결합되듯이, 우리는 또한  그의 백성들과 연합되어 있다. 이것이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하는 고전10:17의 의미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이다.(롬12:4,5, 엡4:4-6, 골3:15) 바울은 성찬을 분열한  사람들에게 화합을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 한다.(고전10:14-22) 바울이 주의만찬에 관해 물려 받음 전통은 이런 말씀을 담고 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전11:24,25). "너희가....주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Ⅳ. 고린도 교회 예배의 문제와 그 특징
 
바울의 고린도 복음사업은 행18:1-18에 설명되고 있는데 바울은 이 도시에서 18개월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때가 AD50년 가을부터 52년 봄이 아니었던가  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동안 교회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유대개종자들과 이방 개종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유스도가 있었는데 이는  자기집을 바울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 복음 전도를 마치고 에베소로 건너가게 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린도에 남겨두고 떠났다.{기독교대백과 사전1, pp845-846 기독교문사, 1993, 서울}

하지만  이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어 바울은 그에 답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중 고전  11-14장은 예배문제에 대한 회신을 보내는데 이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의 에배의 요소와 그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의  요소는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 애찬 및 성만찬, 그리고 방언과 예언의  은사등이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요소들에서 문제가 일어났고 이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는 바울을 보면서 고린도교회 예배의 성격을 추측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본문에 나타난 문제들을 고찰하고, 다음으로 고린도교회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을 고찰해보고 예배의 제요소가 문제시  되게되고 그에 조금은 강한  어조로 회답해야만 하는 바울의 입장을 추론해봄으로 바울의 조언이 고린도 교회와 현대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추론해 보려고 한다.  
 
1. 본문고찰
 
1)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고전11:2-16) 
예배 때에 여자들이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써야 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반드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수건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여자들은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쓰고 공식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자유로운 고린도 여인들 중에는 이러한 사실을 아예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 노예출신 여자나 간음한 여자는 머리를 깍아야 했다. 이에 수건을 안쓰는 것은 바로 머리를 깍은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천한 여자로 치부되었던 것이다.{{크로스 종합주석 p.526 로마서-고린도후서, 도서출판 시내, 1992,서울}}

2) 애찬식 및 성찬식의 문제(고전11:17-34)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음식을  가지고 교회로 가서 공동식사를 했다. 즉 사랑의 잔치(애찬)를 했다. 그러나 부자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포식하고 자기들보다 가난한 동료 그리스도인을 허기진 채 내버려두는 우애 없는 행동을 책망한다. 이들은 애찬 후 성찬식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애찬에 관한 부분에서 빈부의 격차가 있는 애찬을 행함으로서 교회와 거룩한 예전을 모독하였음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애찬 후 성찬식을 하는데 그  거룩한 만찬에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고 책망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성만찬의 제정에 대해 상기시킨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함께 교회에 모였지만 분쟁과 분파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애찬을 즐겨했는데 교인들은 각자 집에서 음식을 장만해와서 교회에서 공동식사를 했었다. 그런데 有無相通하던 초대교회의 정신을 잊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따로따로 식사를 하는 등 심각한 차별의식이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자들은 애찬석상에서 자신들이 사서 갖고  온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였다.

다음으로 성찬식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로 애찬식에서 범죄한  상태로 전혀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 없이 경솔한 심령을 가진 상태에서 성찬에 임하는 누를 범하고 있다. 이에 바울은 성찬식 참여하는 자는 앞서 자기반성이 필요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피 흘린 사실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며 죄에 대한 회개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자신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임을 말한다.

3) 방언과 예언을 비롯한 은사들
은사들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을  분별함, 방언을 말함, 방언을 통역함의 은사들이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초대교회 내에는 영적 은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은 주로 공중 집회에서 사용되었는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경건의 정신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여된 채 공중 앞에서 그것들을 자기의 의로 과시하는 듯 이를 행한다.

사도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방언을 최고의 은사로 알아  서로 방언하기를 갈망했고, 그렇게 방언을 함으로써 자신의  예언과 방언의 상대적인 가치를  논하여 방언은사가 지닌 한계성을 가르쳤다. 인간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함으로 모임을  혼란하게 하고있다고 하고 절제하고 오히려 예언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리고 예언을 할 때는 한꺼번에  말할 것이 아니라 한사람씩 차례대로 말하라고 하고 있다.
 
위의 문제들을 종합하면 고린도 교회는 예배에 있어 여자들은 수건을 써야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쓰지 않는 자들이 있어 혼란스러웠고 애찬식 즉  공동식사가 있었는데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차별함으로 오히려 서로가 분열하고 있었다. 이로써 주의 떡과 잔을 나누는 애찬식 후 성찬식은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을 잊은 상태라고 한다. 여러 가지 은사가 있었던 고린도 교회는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서 두드러진 문제가 있었는데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서로 앞다투어 하려했고 예언 또한 그러하였기에 고린도교회는 서로 경쟁하게 되므로 혼란스러웠었다.

2, 고린도의 사회적 배경

고린도 교회의 예배의 문제와 그 특징들은 매우 역동적이고 격렬한 성격이 있음을 우린 느낄 수 있다. 이토록 강력한 문제가 대두되고 이 문제를 오로지 문제로만 다룬 바울은  무슨 의도일까? 문제를 잠식시키는 데에만 급급한 바울, 조용히 시키고 질서를 잡는다고  교회의 다음 상태를 당사자들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당사자인 고린도 교인들은  어떤 타격을 입었을까? 또 그 영향은 지금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런 문제들을 추론하기  위해 고린도 교회의 사회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고린도는 세계적인 대도시로서 상업 공업분만 아니라 사치와 방종으로도  유명하였다. 이곳은 고린도만과 지협에 위치한 살기  좋은 아름다운 곳으로서 아티카와  펠로폰네스를 잇는 육상의 주요 체류지였다. 더욱이 북쪽 레케움 항구와 동쪽으로 10km까지 뻗은  겐그리아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아드리아해와 에게해 사이에 있는 상업의 화물  집산지였다. 고린도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다. 고린도는 주전 3세기에 아가야 동맹의 주도자로 로마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했고 이 전쟁에 패해 주전 146년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후 고린도는 1세기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으나 시이저가 주전 44년에 선포한 칙령에 따라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바울이 선교할 당시의 고린도는 로마의 속주 아가야의 수도로서 과거의 멸망을  딛고 일어나 무역의 중심지로 상업적 번영을 회복했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에베소서에 이어  그 크기와 영향력에 있어서 중요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고린도가 이와 같이 세계적인  상업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양면에 바다가 있어서 동서 양쪽에 항구를 가지고 동방과 서방을 향한 무역항이었기 때문이다.{이희봉, 바울의 여성이해,p36, 서울신학대학원 1994}}

고린도에는 지중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유대인들이  정착하고 있었으며 당시 고린도 인구는 노예에서 해방된 자. 퇴역군인, 그리스도교인, 노동자,  기업가 등을 포함하여 50여만 명이 살고 있었다.

이 고린도의 문화는 이들이 가지고 들어온 다양한  문화들로 혼합되어 있었고 여러 종교들로 인해 신전들이 널려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풍요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은 성행위가 포함된 주술적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신전제의에는 100여명 이상의 여사제들이  참여했으며 그 여신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었다. 이로 성적 문란의 풍조를 낳았다.{유재인, 바울서신에 나타난 여성이해, p.21 서울신학대학원. 1994}

또 이시대 유대적, 헬라적, 로마적 문화의 여성들은 권위적인 가부장적 문화를 이루고 있어 여성들은 대부분 수건을 쓰고서야 외출을 할 수 있었다.

3, 고린도 교회의 예배적 상황

주후 1세기경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오순절의 열성 때문에 자발적이고 직접적인 계시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  어떤 고정적인 형식이 없었고 짜여진 형식에  의한 예배의식도 없었다. 자유롭고도 격정적인 예배가 진행되었다. 방언, 예언, 애찬, 성찬, 등등의 예배의  요소들은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 졌다. 더 나아가 여성들도 지도력을  가지고 가르치(11:5)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적 민중 그리스도인들의 참여가  어느덧 부자들로 인해 침해를  당하고 여성들이 자유롭게 수건을 벗고 지도력을 발휘하자 이것 또한 쾌락주의적인 견유학파의 자유주의 자들에 의해 역이용되어 버리고 말았다. 예배는 자발적인 참여가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언하는 자나 방언하는 자들은 이것을 욕심 내는 사람들에 의해 그만 퇴색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문제를 바르게 조절해 줄  것을 고린도 교회는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요청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이일을 매우 가슴  아파하며 방문하기 보다 또 정확한  문제 파악을 하기 전에 그 편지 그대로 받아 회신을 하며 고린도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규정해 버리고 만다.

머리에 수건을 벗는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써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이는 유대사회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고,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를 벗어보려는 의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애찬식의 음식문제를 "서로 다투니 집에서 먹고 오라"고 원천봉쇄하고 나선다. 방언이나 예언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고 자제하려고 하는 등 매우 정형화된 예전을 알려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사도바울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데는 그가 견제하려는 적대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적대자들은 다름 아닌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가하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다(6:12) 이들은 고린도 상황에서 볼 때 쾌락주의적인 견유학파의 전승을  담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나 음식문제에  있어서나 자기들 스스로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은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들었다. 특히 예배 시에 심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여성들이 지도력을 가지고  수건을 쓰지 않고 자유롭게  참석하자 극단적인 자유를 표방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의 문제가 전체가 무질서하게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예배의 풍조에 대해서 세심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Ⅴ. 나가는 말

1. 바울과 초대교회 예배를 정리하면서

바울 서신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을 치열한 전투적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부적인 적과 외부적인 반대자들 사이에서 바울은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신학으로 이들에게 때로는 변증하기도 하며 때로는 강권하기도 하고, 때로는 호소하기도 하며 자신의  상황을 타결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배에 관한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위협과 오해의 현실에 바울은 내몰렸다. 전통적인 유대계 기독교인들로부터는 회당 예배의 전통을 유지하라는 압력을 받았을  터이고, 이방 기독교인들에게서는 그  들의 풍습이 반영된 예배를 요구받았을  것이다.

회당예배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구약의 예배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후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벨론군이 예루살렘을 침범하여 성전을 파괴했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국 땅 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히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제물을 드릴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의 예물을 대신하여 포로민들에게 허용된 것이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였다. 기독교 교회예배의 기초 또는 원형이 유대교의 회당예배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회당예배는 A.D. 제 1세기  말엽부터 한 고정된 예배형식에 의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 순서는 첫째, 쉐마의 낭독이다. 쉐마의 낭독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종의 "신조"에 해당하는데, 쉐마라는 말은 신명기 6:4-9의 첫말이 "쉐마"(들으라!)라는 말로부터 시작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쉐마"라는 말로 부터 시작되지는 않으나 "쉐마"에 포함된 구절은 신명기 11:13-21과 민수기 15:37-41이다. 이 세개의 구절을  낭독하므로 회당예배는 시작된다.

둘째, 18개의 기도문(쉬모네, 에스레)낭송이다. 이 기도들은 시편과 예언서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각 기도의 주제는 1) 조상들에 관한것, 2) 권능에 관한것, 3) 주의 이름의 거룩함에 관한 것, 4) 이해 또는 지식에 관한 것, 5) 회개에 관한 것, 6) 사죄에 관한 것, 7) 구원에 관한 것, 8) 치유에 관한 것, 9) 풍년을 비는 것, 10) 흩어진 백성의 귀향을 비는 것, 11) 올바른 심판의 회복을 위한 것, 12) 배교자의 심판을 비는 것, 13) 이방인 개종자에 대한 축복, 14) 예루살렘과 시온에 관한 것, 15) 기도 응답을 비는 것, 16)  예배에 관한 것, 17) 감사에 관한 것, 18) 평안의  축복이다. 이 기도들은 모두 "일어서서"드려졌는데, 안식일과 축제의 날에는 앞의 세 기도(1-3)와 뒤의 세  기도(16-18)를 낭송의 형식으로 드려졌는데 앞의 세 기도와 뒤의 세 기도 사이에 제 4기도로부터 제 15기도까지의 기도들 (12개)  중에서 그 날에 맞는 기도 하나를 선택하여 삽입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기도들은 끝날 때 회중의 "아멘"회답으로 끝이 난다.

세째, 성서본문의 낭독과 통역이다. 낭독은 "율법"에서부터와 "예언서"로부터 최소한  3절씩 낭독하였고 통역자가 낭독자 곁에 서서 매절 매절 아람어와 희랍어로 통역을 하였다.

네째, 설교와 교훈이다. 설교나 교훈은 반드시 성직수임을 받은 사람이  해야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방문객에게도 교훈을 줄만한 능력이 있으면 설교의  직능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의 회당에서 성경낭독과 설교를 맡으셨던 경우(눅 4:16-21)나 사도 바울이 안디옥의 회당에서 설교를 하였던 것(행 13:15-42)은 그것을 입증해 주는 좋은 예이다.

다섯째, 축도의 순서로 민수기 6:24-26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축도는 주로 제사장에게  위임되어졌으나 제사장이 출석치 않았을 경우에는 평신도가 축도를 할 수 있었다. 이 점도 매우 혁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교인에게도 경사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어느 쪽의 문제 제기에 대하여도 변증해야할 상황에 처했음을 발견한다. 특별히 고린도 전서를 통해 이방교회의  여러 가지 예배 풍속도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Ⅱ장에서 살펴본  초대교회의 예전(말씀 예전과 다락방 예전)에서 본질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지엽적인 문제들, 예컨데  머리두건이라든지 방언이라든지 혹은 거룩한(평화의) 입맞춤이라든지 하는 문제들에 고린도 상황을 반영하고자 하는 바울다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고린도 교회 예배의 문제에 대해 사도바울과 다른 견해의 회신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사도바울은 그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여러 가지 예배 풍속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현실은 좀더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상황에서 고린도 교회에 발생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두건을 쓰라고 하는 등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전통사회와 부딪히지 않고 신앙의 부작용을 최대한 막으려는 자유주의자를 향한 견제 등 또 자기가 세운 교회를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책임의식 등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지나친 견제를 던지게 한 것이 아닐까?

이 바울의 견제는 지금 현대의 교회에도 여지없이 작용하고 있다. 여성들의 지위가 남성들의 비해 현저한 차이가 나고 소수인 남성이 다수인 여성 앞에서 지배하고 있다. 여성은 교회에서 수건을 써야만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유교적 사회에 걸맞게  우리교회의 여성의 지위는 잘도 장착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밥상공동체는 돈이 많이 들고 음식을 만들기 힘이 든다는 이유로 이젠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그저 식당에서  한끼 떼우기식의 나눔 정도가 되었다. 이것  역시 사도 바울이 "집에서 밥 먹고 와"!라고 한데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또 방언이나 예언은 어느덧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 숨을 죽이다 못해 그만 사라져 가고 있다. 바울이 말한 '절제! 절제!'에서  온 문제가 아닐까?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지 말라니?

지금 우리가 고린도 교회에 회답을 한다면 난 이렇게 쓸 것이다.(권오선 전도사의 의견)

첫째,  수건을 써야하는지 문제에 대해 : "수건이 우리의 자유를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누구든 원하는 데로 하십시오 쓰든 안쓰든, 단 쾌락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둘째, 애찬식 문제는? : "더욱 더 음식을  많이 가져오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껏 나눠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참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셋째, 방언과 예언의 문제는? : "마음껏 방언하고 예언하십시오 소리 외쳐 하십시오 그러나 싸우진 마십시오"
    
2. 한국 교회에 있어서의 시사점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의미에 대한 상실을 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예배란 개인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한 상태에서 절대자 앞에 나아가 그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된다. 여기서 우리가 개혁을  말함은 개혁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함이 아니요 기독교에서의 참 개혁과 예배의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하고자 함이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개혁을 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우리는 text인 성경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개혁을 말할 때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예배의 모습을 찾아봐야 한다.

성경을 비추어 볼 때 예배는  말씀 예전과 다락방 예전{{) 제 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의 예전이 구성되어서 예배형식을 어느정도 갖추기 시작했다.

  ☞ 말씀의 예전 1) 예언서, 서신, 복음서의 귀절 낭독, 2) 성서 귀절에 기초한 교훈과 권고, 3) 공동기도(연도의 형식으로 했을 것임), 4) 시편과 찬송

  ☞ 다락방 예전 1) 평화의 입맞춤, 2) 봉헌: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 성물을 들여오는 일, 3) 성별기도(창조, 섭리, 구원에 대한 감사) 4) 주의 고난의 기념(후에 아남네시스(anamnesis)로 알려짐), 5) 자기봉헌과  함께 헌금함, 6) 떡과 포도주의 선물을 축복하기 위한 말씀과 성령의  기원(후에 에피클레시스(epiclesis)로 알려짐), 7) 중재기도, 8)  회중의 아멘, 9) 성체 분할식, 10) 분병과 분간, 11) 집례자에 의한 해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다락방 예전에 대한 의미를 상실해 버린 채 말씀 예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에 몰입하고 있다. 그것도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승과는 다소 괴리된 채로 각 개교회의 신앙적 관점에서 제기된 예배의 풍속을 그저 습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제창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무엇인가? 좀더 원문의 의미를 살린다면  '성령과 진리의 예배'로 번역되어야 할 이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배(성령도  하나님이요, 진리도 하나님이다(진리=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장소도 시간도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예배, 즉 삶 속에서의 예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이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전이요 교회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지체적 삶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이러한 예배에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이 항상 강조되는데(조태연·차정식·유태연, 뒤집어 읽는 신약성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p.200-210) 성령의 임재를 망각하고 예배의 예식을 형식적이고도 도식적인 것으로 전락시킨 결과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보는 중세의  종교 타락기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고  보면 종교 개혁 후 또  다시 성령의 임재의 부인과 더불어 습관적,  관습적인 예배가 성행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은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 말하고 있는 예배는 그 교회적 상황에 충실하되 그리스도의 복음(약자와 빈자를 구제하는)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며, 그 예배적 본래 목적에  합당하도록 예배 드리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예배의 갱신 운동이 일어나고  잇음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들도 또한, 일시적 유행처럼 번지고 잇는데  문제가 있으며, 개교회의 상황적 분석보다는 피상적인 정보에 의한 무분별한 적용의 문제점을 보이고 잇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예배 갱신이 또 다시 하나의 예배의 포맷만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성령님을 최대한 존중하고 도우심으로 예배하는 것이며 긍국적으로 삶으로써 예배를 드리는 일일 것이다.  
 
롬 12:1b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권오선 전도사의 마지막 멘트 :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자유할 수  있는 기회가 무책임한 방종주의 자들에 의해 깨어질 수 없고  사도바울의 회신에 의해서도 빼앗길 순 없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예배,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예배, 지난날 다윗이 춤추다 바지가 다 내려갔던 것과 같은 자유함이 보장된 예배는 우리현대 교회와 사회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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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김석한, 개혁주의 예배 신학개론, 양서원
  5.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6.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7. James F. White, 기독교 예배학 입문, 정장복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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