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전통을 단절시킨 쯔빙글리 계열의 예배 



글 / 주 승 중 교수(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1. 들어가는 말

1500년 동안 기독교 예배의 구심점이 되어 왔던 성찬 성례전을 최초로 주일 예배에서 분리시키고 그 회수를 년 4회로 축소시켰던 개혁가의 이름이 바로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이다. 그는 중세의 주일 예배에서 사라진 설교를 매주일 회복시키고 예배순서를 대폭 간소화하고 예배당 안의 성상의 조각이나 악기들 마져 철거하는 예배의 대 개혁을 쥬리히에서 단행한 개혁가였다. 그가 쥬리히(Zurich)군대를 이끌고 군목으로 참전했다가 샤펠(Cappel) 전투에서 전사하기까지 개혁의 대열에서 활동한 시기는 10여년에 불과하지만 그는 거대한 예배개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오늘의 개혁교회를 창출시킨 개혁가였으나 예배의 차원에서 볼 때 그의 과격한 개혁은 어쩌면 혁명에 가까운 과정들을 밟았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2. 몸 말

1) 쯔빙글리의 개혁
앞에서 이미 공부한대로 루터는 자신이 주도한 종교개혁의 구심점은 성경과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었다. 그는 현실교회 안에서 겪은 영적인 갈등과 고뇌의 반복 속에서 성경의 우위성을 부르짖으면서 일어선 개혁가였다. 그러기에 루터는 교회의 역사, 특히 예배의 전통과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예배의 부분적 수정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루터와는 다른 입장에서 개혁의 대열을 형성하였다. 그는 16세기 동안을 이어온 예배의 전통과 역사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강조한 급진적인 개혁가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성향이 있기까지는 다음의 두 가지의 배경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그가 에라스무스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 보다 합리적(rationalist)이었으며, 신비적인 면은 중요시하지 않고, 주관적(subjective)이고 분석적인(analytical) 면에 치우쳤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는 기본적으로 개혁운동을 민족주의적인 바탕 위에서 정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조국 스위스가 외국 군주들을 위한 용병으로 젊은이들을 보내 수입의 원천을 삼았던 것에 반기를 들 때 의외로 기존교회와의 심각한 마찰이 발생되자 그는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사상적 배경은 루터와는 달리 기존 교회의 예배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분석에는 예배의 신비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나 실체들은 긍정할 수 없는 대상들이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예배의 주역들인 사제들의 역할이나 역사적인 유산들은 부분적인 수정보다는 전면적인 개혁의 대상들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예배관은 드디어 성찬예전이 매 주일 갖는 기독교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사실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쯔빙글 리가 다른 개혁가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 하나는, 그 자신이 성만찬 자체를 은혜의 방편(a neans of grace)으로 여기지를 않았다는 것이며, 그래서 성만찬 예번을 기독교 예배의 정규적 순서로 생각치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만찬의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성만찬을 자주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이 점은 찌빙글리가 루터나 칼빈과 비교할 때 아주 다른 점이었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신학사상은 그로부터 형성된 개혁교회로 하여금 과격한 개혁의 유산을 받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예배의 온전한 유산을 이어받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윌리엄 맥스웰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쯔빙글리 예전이 가져다 준 가장 비극적인 영향은 주일 예배에서 성찬 성례전을 분리하므로써, 더 이상 성찬성례전이 주일 예배의 정규순서가 아니라 비 주기적으로

거행하는 기념의식이 되었다는 점이다.


2) 쯔빙글리의 개혁의 긍정적인 요소들
쯔빙글리가 스위스 쥬리히를 중심하여 활동했던 개혁운동은 무엇보다도 예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심각하게 미치고 있었다. 특별히 그가 내 놓은 1523년의 [미사경본 비판]과 1525년의 [주의 만찬의 활용법]은 쯔빙글리 계열의 개혁교회 예배의 표준이 되고 있었다. 그가 시행한 개혁의 형태는 비록 예배 역사의 단절을 가져온 결과라는 심각한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 결과는 개혁교회의 예배를 주도하는 영향을 남겼다. 여기서 그가 주도한 예배 개혁의 내용중에 개혁교회가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들을 먼저 살펴본다.

첫째로, 그는 기독교 예배에서 사라진 하나님의 말씀이 자국어로 행하여 진 설교를 통하여 철저하게 선포되어지고 해석되어지도록 하였다. 여기서 중세교회의 미사에

의하여 잃어버린 말씀의 예전을 회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남기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는, 중세 교회 예배의 현장이 사제의 독무대로서 사용된 언어나 의식의 거의 대부분이 회중과의 진정한 소통(communication)이 없었기에 회중은 언제나 관객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기 위하여 쯔빙글리는 의식보다 말씀에 회중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는데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셋째는, 그는 성인숭배를 비롯하여 가시적인 성상들이 회중들에게 우상화 되어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예배 안에 깊숙히 들어와 있는 각종 성상과 성자 축일을 비롯하여 각종 의식에 사용하는 성구(聖具)들을 소멸하였다.

넷째로, 중세교회가 성찬 성례전을 신비의 대상으로 여기고 여기서 회중들이 미신적 신앙을 타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즉 성만찬에 있어서 그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따라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부인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은 후일 개혁교회 예배의 본질이 되었다. 이 본질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예배의 형태로부터 완전히 다른 줄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결과는 동방교회나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롯하여 심지어 루터 계열과도 예배의 교류가 단절된 길을 걷게 되었다.


3) 쯔빙글리의 개혁의 부정적인 면
그러나 쯔빙글리가 주도한 예배가 가져온 부정적인 면이 또한 적지 않다. 특별히 전통적인 예배의 줄기를 벗어나서 진행되었던 다음의 문제들이 최근에 이르러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먼저는, 무엇보다도 앞에서 본대로 기독교 예배가 처음부터 지켜온 말씀의 예전과 성찬 예전의 두 축을 분리시킨 점이다. 부패한 중세의 교회가 말씀의 축을 외면했다면 쯔빙글리는 그 잃었던 말씀의 축을 회복하고 대신 성찬예전을 축소시킨 비극적인 우를 범하였다.

둘째는, 기독교 예배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높이 들어내는데 있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들려주는 예배의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그것도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은혜의 방편인 성례전 보다는 설교자의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에만 귀를 기울이게 하는 [듣는 예배]로 지금까지의 [드리는 예배]를 종식시켰다.

셋째는, 기독교 예배의 15세기 동안의 역사와 전통의 맥을 거의 단절하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쯔빙글리는 새로운 전통의 수립에 나섰다. 기존 교회의 예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이론과 전통을 세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개혁교회 예배의 전통과 역사성의 결여를 심각하게 초래하였다.

넷째로, 예배를 통한 기독교의 신비한 경험이나 식어진 영성의 성장보다는 그는 인문주의자로서 철저히 모든 예배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서 검토되었다. 이로서 개혁교회는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예배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다섯째로, 언어로 해결할 수 없는 메시지의 전달 수단을 완전히 파괴시켰다는 점이다. 그 동안 교회가 언어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하여 각종 상징과 음악과 절기 등을 활용하였다. 거기서 예배자들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와 감사와 찬양이 허다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것을 모두 배척 또는 축소하고 순수한 언어와 문자에만 의존하였다.

끝으로, 그는 성찬 성례전을 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어야 할 단수한 기념식과 같은 범주에 머물게 하였다. 단순한 '이성과 합리'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그의 기본 사고 구조가 "나를 기념(Anamnesis)하라"는 말씀의 뜻이 '회상과 재현'이라는 사실에는 거의 접근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의 개혁교회가 전통적인 기독교 예배의 성찬성례전과 호흡을 함께 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쯔빙글리의 예배개혁은 이상과 같이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남기는 매우 특수한 것이었다. 현대의 예배신학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는 그의 예배개혁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4) 쯔빙글리의 개혁된 예배 의식
쯔빙글리는 1523년에 미사 예식에 대한 첫 수정본으로 [미사 경본 비판](An Attack upon the Canon of the Mass)를 발간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미사 전문(Canon)에

대해서 공격하면서, 봉헌 기도로서 이 전문은 너무 지지부진하고, 모순되며, 회생 제사적 개념을 갖는 부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는데 동의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말씀의 예전 순서에 해당되는 부분은 그대로 보전하였으나, 성서일과(lectionary)가 간단하게 되고, 성자 축일에 관련된 기도문이나 성경 본문, 기타 순서들은

배제되었다. 음악적 요소들은 과결할 정도로 축소시켜 버렸다. 성경 봉독과 설교는 자국어도 진행하도록 하였다. 성만찬 예전에 있어서는 봉헌송과 수르숨 코다가 없어지고, 대신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이 노래로 불리워지는 동안 성물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예비 기원과 쌍투스는 그대로 보존하였다. 그러나 미사 전문(Canon)은 네 가지 기도로 바뀌어졌는데, 그 길이는 본래의 미사 전문과 비슷하거나 약간 짧을 정도였다. 성찬 제정사(the Words of Institution)는 고린도 전서 11장 23-26절까지의

말씀을 낭독하게 되는데, 이것은 로마 미사 예식의 제정사보다 한 절이 더해진 것이었다. 성찬 제정사 후에는 주님의 초청(invitation)이 있었는데, 내용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찬 참여가 있고, 시므온의 찬가가 불리워진 후 간단한 성찬 후 기도(post-communion prayer)로써 예배라 마쳐진다.

쯔빙글리가 1525년 봄 스위스 쮜리히에서 발간한 독일어 예식은 그의 급진주의적인 입장을 더욱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의 만찬의 활용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후에 쯔빙글리 계열의 예배에 있어서 표준이 되었다. 그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먼저 앉은 자세로 성찬을 받는 형식(sitting communion)이 여기서 유래되고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쯔빙글리 자신이 중세 교회가 했던 것보다 더 자주 성만찬을 거행하도록 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성만찬을 일년에 네 번--부활절, 성령강림절, 가을, 성탄절--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가 남긴 예배의 순서와 그가 목회하고 있었고 개혁의 중심지로 삼고 있었던 쥬리히의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교회의 오늘의 예배순서를 소개한다.


쯔빙글리의 예배순서(1520년대)


기 원
기 도 문
서 신 서
영 광 송(교창)
복 음 서
설교
죄의 고백
사도신경


* 이상의 순서가 쯔빙글리에 의해 매주일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예배순서이다.

다음의 순서는 일년에 4번 성찬 성례전을 포함할 때 사용되었던 순서이다.

말씀의 예전
봉 헌: 성물의 준비
기 원
기 도 문
서 신 서
영 광 송(교창)
복 음 서
사도신경
성찬성례전
권면
성찬단 성별
주기도문
입례기도
성찬 제정사
성체 분할
집례자 영성체
배찬 및 성찬 참여
시편 교송
성찬 후 기도
폐회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쯔빙글리의 예배 의식은 종교 개혁시의 예전들 중에서도 가장 간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예배 음악의 문제인데, 음악은 1525년 쯔빙글리의 예배 의식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대신에 시편송을 교창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후에 이것은 회중들 대신에 두 사람의 부제의 의해 실제적으로 수행되었다. 아무튼 쮜리히는 음악을 폐지한 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은 과거 예배 의식에서 성가대에 의해 불리워진 수준 높은 음악 대신 회중들의 찬송으로 대체하였다. 쮜리히는 예배 속에서 음악을 배제하려는 극단적 입장에 빠지게 되었고, 회중 찬송(congregational song)이 소개되어지게 되었다.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예배순서(1997)

(그로뮌스터 교회는 쯔빙글리가 개혁 당시 목회하였던 교회로서 지금도 그의 개혁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예배로 나아감 오르간 전주
성가대 응답송
예배의 말씀과 인사
찬송
경배 시편봉독
찬송
기도
선포 복음서 봉독
찬송
설교(설교자가 본문을 읽음)
오르간 간주
찬송
중보의 시간 알림(기도가 필요한 사람과 일들)
중보기도(침묵으로)--오르간 연주
주님의 기도
파송과 축도 파송의 말씀
축도
찬송
오르간 후주



5) 예배로부터 자유를 추구한 재세례파
쥬리히를 중심한 쯔빙글리의 진보적인 예배개혁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그의 개혁이 설교와 성경연구를 통하여 성경의 권위와 복음이 강조되고,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 요소들을 물리칠 때 대단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개혁이 국가와 연계성을 가질 때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면서 독자적인 개혁의 길을 걸었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재세례파(Anabaptist)들이다. 이들의 초기 지도자였던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은 "말씀의 전달자 쯔빙글리는 말씀을 저버리고 그의 발아래 짓밟았으며 포로로 만들어 버렸다."는 심각한 저항을 하면서 그가 스위스의 형제단(Swiss Brethren)을 조직하고 완전한 자유교회를 지향하고 나서면서 새로운 교회의 형태인 재세례파를 이끌게 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형제단 또는 메노나이트(Mennonites)라는 교파명을 가지고 유럽 각지에 번져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국가적인 제도권 아래서 주어진 유아세례와 같은 것은 강제력에 의하여 주어진 세례라고 규정하고 어린이의 신앙적 무의식은 세례의 효력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부모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이어받은 전통사상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신앙에 의한 종교의 선택과 교회의 형성을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주된 관심은 성만찬이었고 세례에 대한 부분은 깊은 토론과 관심의 내용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계열의 개혁자들은 교회의 보다 완전한 정화를 추구하면서 그들은 유아 세례의 시행이 교회의 개혁에 지대한 방해가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든지, 혹은 다른 계열의 개혁자들에 의해서 행해진 유아 세례를 세례로 인정하지 않고 이들은 공적으로 신앙고백을 한 성인들의 세례를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사상은 자연적으로 전통적으로 이어온 예배의 내용과 형태를 거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배의 순서는 자신들의 의향대로 정하고 개인적인 신앙의 명상과 표현을 오히려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찬 성례전은 부정기적으로 갖게 되었다. 이들은 예배의 일정한 틀이나 격식을 외면했기에 예배순서로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오직 이들은 모여서 말씀을 중심하여 은혜를 나누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에서는 성경봉독과 그 말씀의 해석, 그리고 찬송과 기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신앙생활과 예배형태는 개신교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았으나 오히려 이러한 박해를 통하여 그들은 매우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돈독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들은 비록 장엄한 예배나 사제의 돋보인 예전적인 활동들이 없었으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질과 신앙의 본은 대단하였음을 다음의 서술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의 외적인 공동의 삶을 바라볼 때에 그들은 전혀 비난할 것이 없다. 거짓말, 사기, 맹세, 투쟁, 거친 말, 무절제한 과식과 과음, 외부로 나타난 개인적인 자기 과시 등은 그들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겸손과 인내, 강직, 겸손함, 절제, 솔직함이 있을 뿐이다.

이상과 같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을 추구했던 이들은 주로 스위스, 남부 독일, 홀랜드와 같은 유럽의 각 지역에 번져있었다. 이들이 추구했던 자유교회의 특성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전통과는 거의 담을 쌓고 어느 단체나 국가의 간섭이나 지배를 배제하면서 개 교회가 독자적인 노선을 자유롭게 펼쳐갔었다. 이들의 신앙생활에서 예배와 관계된 부분들에 나타난 특성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이들은 국가와 연관된 교회의 조직과 영향 아래서 제정된 통일된 예배의 형태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예배의식(Public Worship)의 필요성까지 거부하고 철저히 개교회 중심으로 예배행위를 자유롭게 가지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강조하였다.

둘째로, 이들은 예배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으로서 말씀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이들의 설교는 은혜를 추구한 성경공부와 같은 주해설교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이들의 설교자는 성경 말씀을 회중들의 삶에 바르게 선포하고 교육하고 적용할 수 있는 학자적 지식과 교양을 중요시하였다.

셋째로, 이들은 철저히 유아 세례를 거부하고 성년이 되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서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받은 유아세례는 모두 무효가 되고 이름그대로 '다시 세례를 받는 무리'들로서 개신교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넷째로, 이들은 국가와 동일한 보조를 취하지 아니함으로 받은 극심한 핍박과 순교를 통하여 굳어진 신앙을 찬송으로 승화시켜 많은 작사 작곡을 남기었다. 중반까지 개신교에 사용한 찬송가의 상당부분이 지금도 이들의 찬송이 차지한바 있다. 특별히 이들은 이러한 찬송을 애송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공동체 정체성을 확인하여 나가게 되었다.

다섯째로, 이들의 성찬 성례전은 매우 비예전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성직제도를 부정하고 지교회에서 선택한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목사로 추대하고 성례전을 진행시키도록 하였으며 성찬예전의 시기는 쯔빙글리처럼 일년에 4회 정도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 성찬예전의 신학은 기념적인 예전으로 해석되었고 삶의 성화와 사랑에 강조점을 두어 자신들의 공동체를 공고히 묶게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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