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에 있어서 설교자가 범하기 쉬운 오류


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해석이라는 과정을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 기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 먼저 밝혀지지 않고서는 결단코 바른 설교를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신학적 훈련이 제대로 안된 설교자는 물론이지만,

상당한 훈련을 받은 사람도 해석상의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글에서 필자는 해석자가 흔히 범하는 중요한 오류 몇 가지를 언급함으로 바른 해석과 바른 설교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한다.


한 단어의 의미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오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할 때 한 단어는 성경 어디에서든 항상 같은 의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언어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오는 소치다.

가령 보통 사람으로서 20,000단어를 알고 있다고 하자.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이 정도의 어휘로도 한 사람이 한평생 표현할 수 있는 생각은 4백만 내지는 5백만 개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되려면 한 단어가 한 가지 의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면서 여러 가지 단어들과 결합해야 될 것이다.


한 단어의 의미를 항상 동일한 것으로 생각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는 상당히 많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믿는다(-n-LCJTeUU))'. 믿음(TTLCTTLS')'이라는 단어는 대개 '구원받는 믿음(saving faith)'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가 항상 '구원받는 믿음 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거짓 것을 믿는다‘고 할 때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살후 2:11).

때로는 ‘피스티스’ 가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 내용 또는 진리를 가리키기도 하고(갈 1:23), 어떤 곳에서는 믿음의 은사를 가리키기도 한다(고전 13:2)

또 로마서 3장 3절에서는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라 ‘미쁘심' '신실하심(faithfulness)'의 의미로 쓰이고 있고,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는 지적인 동의'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피스티스’나 ‘피스투오’를 '구원받는 믿음’ 하나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해석상의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사르크스(adPO)'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f1esh(육체, 육신)'라는 한 단어로 번역되고 있고, 우리말 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육신' 또는 '육’으로 번역되고 있다.

마태복음 24장 22절에서는 "·..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말씀이 사람(또는 인간)이 되어"로, 로마서 9장 8절의 "육신의 자녀"는 '자연적 출생으로 태어난 자녀(children of natural birth)"로, 히브리서 5장 7절의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는 '그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로, 유다서 7절의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행하다가'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사르크스라는 단어 그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단어가 어떤 특정한 문맥 내에서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밖에 알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단어 그 자체는 내재적으로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한 가능성 밖에 없다.

그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떤 특정한 의미는 문맥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실바(Moises Silva)는 이렇게 말한다.

'문맥은 우리가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다. 사실상 문맥이 의미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의미의 결정자로서의 문맥을 무시하고 한 단어에 항상 한 가지 의미만을 부여하는 나이브한 해석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용어가 아닌데도 전문용어로 간주해 버리는 오류

이 오류는 앞에서 언급한 한 단어의 의미는 하나라고 생각하는 오류와 연관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 고찰하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이 오류는 해석자의 신학적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적으로는'어떤 단어가 어느 한 가지 의미만을 갖는 전문용어(terminus technicus)가 아닌데 전문용어로 간주함으로 해석상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계시하다(a'n-OKaXuTTTh))'라는 단어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계시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계시'라는 단어는 분명히 전문용어이다.

그러면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항상 그런 제한적의미로 사용되는 전문용어인가? 그렇지 않다.

가령 빌립보서 3장 短절 갈은 경우를 보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여기서'나타낸다'라는 단어가 전문용어가 아닌것은 분명하다.


‘디아코노스’ 같은 단어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성경이 '여 집사라는 직분을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로 로마서 16장 1절을 든다.

여기에 보면 뵈뵈를 ‘디아코노스’라고 했고, 또 디모데전서 3장에 의하면 디아코노스 는 분명히 집사를 가리키므로 뵈뵈는 '여집사'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여 집사 직분을 가르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다 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여 집사 문제를 로마서 16장 1절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만일 ‘디아코노스’라는 단어가 1세기에 항상 '집사'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라면 로마서 16장 1절에 근거한 논증은 타당하다.

그러나 디아코노스는 그 당시에 전문용어가 아니었음을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디아코노스 는 일반적인 종이나 하인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마 22:13; 요 2:5,9), 바울이나(골 1:23,25), 디모데(살전 3:2), 아볼로(고전 3:5)같은 목회자를 지칭하기도하고, 또 디모데전서 8절, 12절 등에서는 집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디아코노스 라는 단어가 전문용어라면 바울이나 디모데 등도 모두 목사가 아니고 집사라고 해야 될 것이다.


정경 완성 이후에 나타난 단어로 성경의 단어를 설명하려는 오류

이 오류는 간단하게 ‘의미론적 시대착오(semantic anachronism)'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성경 기록 당시에는 없었으나, 그 후에 어떤 특정한 단어가 나타날 때, 그 단어로 훨씬 과거에 사용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예로 드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것은 분명히 석의상의 오류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1장 16절 같은 경우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로다.

" 여기서 "능력"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뒤나미스'인데, 뒤나미스를 어원으로 해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로마서 1장 16절에 언급된 복음의 능력을 ‘다이나마이트 같은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런 설명은 타당한가? 이러한 설명은 몇 가지 이유로 볼 때 용납될 수 없다.


첫째, 이것은 '의미론적 시대착오‘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할 때 다이나마이트가 있었으며, 바울 사도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겠느냐?

다이나마이트를 설명할 때 뒤나미스를 언급하는 것은 용납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뒤나미스를 설명할 때 다이나마이트를 예로 들거나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둘째, 복음의 능력과 다이나마이트의 능력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다이나마이트는 쪼개고, 파괴시키고, 날려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파괴된 심령을 싸매주고, 찢긴 심령을 꿰매주는 구원의 역사를 가져온다.

따라서 의미론적 시대착오를 떠나서도 복음을 다이나마이트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또 하나 더 예를 들어보자.

사도행전 1장 8절에 의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여기서 "증인"이란 단어는 '마르튀스'인데 이 단어에서 '순교자(martyr)' , '순교(mar-tdom)'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런 이유로 어떤 설교자는 사도행전 1장 8절의'증인"을 순교자와 비교해서 설명하거나 순교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도 분명한 '의미론적 시대착오에 속한다.

따라서 이런 식의 해석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어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오류

어원은 올바른 석의의 적군인가 아군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o나 x로 단순하게 답변하기는 그리 쉽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어원연구는 그 존재 이유가 전혀 없는 것 같이 전적으로 배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옳다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도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어원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많은 넌센스를 야기시킬 수 있다.

영어의 'nice'는 원래 '무식하다'는 의미인 라틴어 hescius에서 왔다.

가령 'He is a nice guy(그는 좋은 친구다)"라는 문장의 원래의 의미는 '는 무식한 친구다'고 해야 옳은가?영어의 ho1y(거룩한)'도 좋은 예가될 것이다.

'holy는 who1e(온전한)'및 healthy(건강한)'이란 단어와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holy는 건강한, 건전한 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있는가?

holy와 healthy가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두 단어의 의미를 동일시하는 것은 결국 두 단어의 의미론적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요, 동시에 원래의 어원에 더해진

어미나 다른 요소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James Barr)는 히브리어의 ‘카할'과 헬라어의 '에클레시아'에 근거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동일시하거나 연계선상에 놓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10

구약 기자들이 카할의 역어로서 '쉬나고게(auvayoJvr:회당)'라는 단어보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선호한 것은 사실이지만, 카할은 종교적 집회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악한 목적의 모임(시 26:5), 시민의 집회(잠 5:14:26:26), 전쟁을 위한 모임(민 22:4) 등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원적으로 '카할이 '콜(소리, 음성)'과 연관되고, '에클레시아'가 '칼레오(KaXeco;부른다)'와 연관되어 있다든지 '에클레시아'가 '카할의 역어라든지 하는 이유만으로

양자를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죄'라는 단어에 대한 어원적 의미, 즉 ’표적을 빗 맞추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가?

어떤 학자는 신약성경보다 약 8세기 전에 기록된 호메로스의 작품에 '하마르타노‘가 ’적을 빗 맞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을 신약에 사용되고 있는 '죄' 또는 '범죄하다'에 대한 숨은 뜻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실바(M.Silva)"나 오스본(Grant 0sbome)이 바르게 지적했듯이,

로마서 3장 23절은"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마르타노'는 호메로스는 물론 신약 기자들에 의해서도 표적을 빗맞추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마르타로의 어원적 의미는 문맥적인 뒷받침이 있기 때문에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도행전 8장 31절의 경우는 어떤가?

자신의 구원 문제 때문에 영적으로 너무 갈급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예배에까지 참석했지만

구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이디오피아로 돌아가고 있는 내시에게 빌립은 성령의 인도로 가까이 가게 되었다.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빌립이 "읽는 것을 깨닫느뇨?'(8:30)라고 물으니, 내시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지도한다(oS'n'yec.o)"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길'과 '이끌다'라는 두 단어로부터 왔다.

다시 말하면 지도하다'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길을 안내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경우에 어원적 의미를 사도행전 8장 31절에 적용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변하려면 어원적 의미가 사도행전 8장 31절의 문맥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본문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영적인 진리를 제대로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빌립이 도와줌으로 그 길을 찾는 내용이다.

낮선 지역에 가서 길을 몰라 헤매는 것이나 영적 세계에서 참된 길을 몰라 헤매는 것은 그 원리에 있어 동일하고,

양자의 경우에 바른 길을 안내하는 것도 근본적 원리는 동일하다.


따라서 사도행전 8장 31절의 경우에는 길 안내하다'라는 어원적 의미가 본문의 의미로서 잘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말하면, 신약의 경우는 어원 연구의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의 경우에는 헬라어로 기록된 문헌이 신약성경 외에도 많이 있으므로 어느 특정한 단어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와는 달리 구약의 경우에는 어원적 의미의 연구가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구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약 8,000개인데 이 중에 1,300단어는 ‘하팍스 레고메나(hapax legomena; 한번밖에 안쓰이는 단어)'이고,500단어는

두 번 밖에 사용되지 않고 있고, 또 히브리어로 기록된 문헌이 구약성경 외에는 굉장히 희소하기 때문이다.


어원이 어떤 단어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반드시 문맥에 의해서 철저히 통제를 받으면서 사용되어야 찰 것이다.


설교자 또는 해석자의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는 오류

석의(exegesis)라는 것은 주어진 본문에서 저자가 최초의 독자에게 의미한 바가 무엇이었느냐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본문에서 저자의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지 해석자의 생각을 읽어 넣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석의해서 설교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읽어 넣음으로 잘못된 설교를 하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오류는 대개 설교자가 본문을 연구하기 전에 강한 의도성을 가지고 있을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의 강한 의도에 본문을 견강부화식으로 끼어 맞추려 하다가 보면 이런 오류가 많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2장 13절에서 21절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은 고로 창고를 넓히고, 거기에 곡식을 잔뜩 쌓아 두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려감으로 인해 그 모아 놓은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이 비유를 가지고 자본주의 폐단을 설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본주의는 가진 자는 끊임없이 더 가지려는 욕망을 가지며, 재물을 축적하면서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제도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어떨까?이 본문은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진정한 부 또는 '하나님께 대한 부’ 가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진정한 부란 자신의 육체만을 위해 준비하는 것 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12장 13절로 21절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설교하는 것은 전형적인 '읽어 넣기식'이다.

그것은 설교자의 강한 의도성이 엿보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누가복음 10장 25절로 2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어떤가? 과거유신시절에 K목사는 이 본문을 가지고 강도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한 적이 있었다.

선한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는 강도가 바로 유신정권의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강도가 제거대상이듯이 박 정권도 타도대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그러면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하는 것은 옳은가?


본문의 초점은 강도가 아니다.

우리 주님의 절대무오한 해석에 의하면 참된 이웃이 누구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초점이다.

본문에서 어떤 여행자가 강도를 만났다는 것은 이 비유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그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어려움에 빠져 있다는 것이 본질적 요소다.


그 어려움이 실족으로 인한 부상일 수도 있고, 짐승에게 공격받음으로 인한 부상일 수도 있고,

질병으로 인한 곤경일 수도 있는데 주님은 그냥 강도를 도입하신 것에 불과하다.

강도 그 자체는 본문에서 부수적 요소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것을 본질적요소로 승격시켜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하는 것은 올바른 석의에 입각한 설교가 아니다.

설교자의 강한 의도 때문에 본문의 의도가 왜곡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 굴복시켜야 한다.

설교자의 '선이해'나 편견이 본문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왜곡시키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법적인 오류

헬라어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야기되는 오류는 상당히 많다.

여기에관한 자세한 논의는 카슨(Donald A.Carson)의 탁월한 저서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여기서는 가장 흔히 오류를 범하는 단순과거(또는 부정과거)

문제만을 간단히 취급하고자 한다.


헬라어 동사 가운데 단순과거만큼 많은 오해를 받는 동사도 없을 것이다.

헬라어 문법가들은 헬라어 동사의 시제를 언급할 때 시간적 요소보다 행동의 종류(Aionsart)를 더 강조한다.

즉 현재시제는 현재라는 시간적 요소보다 진행적인 행동을, 완료시제는 과거라는 시간적 요소보다 완성된 행동을 나타내는 면을 더 강조한다.

그러면 단순과거는 어떤 종류의 행동인가? 많은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단순과거는 ‘영단번 시제(once-for-all tense)'라고 하여 이 시제가 쓰이면 그 행동이나 사건은

단 한번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면 과연 단순과거는 그러한 시제인가?


예를 들면, 필립 휴즈(Philip E.Hunghes)는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 계시의 종결성을 여기에 사용된 두개의 단순과거(XaX-n, Xd Xr)에 근거해서 논하고 있다.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결론은 신학적으로 타당하지만 그것이 단순과거 시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단순과거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밖에는 말하지 않는다.

문맥이 허락하면 단순과거가 영단번의 행동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시제 그 자체에 근거해서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순과거 자체는 그러한 시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약성경에 나타난 단순과거를 모두 영단번 시제로 해석하면 전혀 뜻이 안 통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12장 12절의 ‘복종하여' , 마태복음 6장 6절의 '들어가’ ,요한일서 2장 24절의 ‘들은’. 고린도후서 11장24절의 ‘맞았으며’,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살아서' '왕 노릇하니', 히브리서 11장 13절의 '죽었으며',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2절의 향하여' , 요한일서 5장 21절의 ‘멀리하라', 에베소서 2장 7절의 ‘나타내려' 등은 한번으로 끝나고 다시 반복이 안 되는 영 단번 시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설교를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설교를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바른 설교는 바른 해석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오류는 바른 해석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른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문맥이다.

설교자는 항상 본문의 문맥을 바로 파악함으로 바른해석을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할 것이다.


문맥을 떠난 해석은 본문에 대한 횡포다.

해석학적으로 그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범죄 행위다.

<설교학소사전/ 전통성을 지닌 설교>설교가 전통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신앙공동체의 전통 속에 놓여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설교는 구름 같은 증인들에 둘러싸여 준비되고 전달되는 생이며,

주제에 있어서나 갈등하는 문제, 신앙의 확신, 믿음과 찬양에 관한 구절의 인용들에 있어서도 의도적으로 신앙공동체의 전통에 이어져 있다.


전통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규범적인 것,

즉 성경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해서 살아온 삶까지도 포함한다.

어떤 기독교 공동체도 자기들이 무엇이라고 주장하든지 간에, 성경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자기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그 신앙을 이해하고 또 그대로 살아보려고 애쓴 무수한 사람들의 삶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설교」(후래드 크래독 지음, 김영일 옮김, 컨콜디아사,1989), p 186.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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