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복병


우리는 목회를 성역(聖役)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거룩한 목회 사역에 있어서 성공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거룩한 욕심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다가 좌절하고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 만나는 하나의 복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침체라는 것이다. 특별히 이 영적침체는 나이와 때를 가리지 않지만 40대에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자신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커다란 일을 이루지 못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감을 겪으면서 영적 침체가 오게 된다.

건강한 사역자들이나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에게도 이 영적침체는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목회를 엉망으로 만들고 자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한번 영적침체에 이르게 되면 회복하는데 대단히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회복하지 않으면 한 인간과 교회와 공동체를 철저하게 파멸시키는 복병이 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저 해결될 것도 아니고 얼버무릴 일도, 회피하거나 변명될 일도 아니다. 이것을 회피하고 회복하지 않으면 결국은 탈진이라는 무서운 늪에 빠질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정면대응함으로 극복되어야 본인이나 양떼들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I. 어두운 그림자

성경에서도 영적침체를 경험한 지도자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든다면 모세와 엘리야일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가나안 입성 직전까지 인도한 이스라엘의 사법, 입법, 행정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홀로 지고 백성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를 돕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 있었지만 백성들은 최종적으로 모세를 의지하고 모세를 향하여 있었다. 모세는 온유함이 온 지면에 승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백성들의 불평과 대적과 원망은 그로 하여금 지치도록 했다. 급기야 가데스에서 또다시 물을 요구하면서 모세에게 대들고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민20장). 그는 극도의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그러한 그의 상태에서 그는 그만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라고 하신 명령을 어기고 지팡이를 들어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는 분노를 발하게 된다. 탈진이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라고 했던 사람조차도 인간적인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엘리야도 영적침체의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는 바알의 제자상과 아세라 선지자와 갈멜산 정상에서 대결을 청하여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보이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승리의 기세로 우상의 심장부였던 이스르엘로 달려가서 바알 종교를 완전히 멸절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세벨의 대적으로 좌절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부지할 수 없게 된다. 그는 갈멜산의 대결투에 온 힘과 정신과 영력을 다 기울여서 승리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끝일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허탈하게 된 것이다. 엘리야의 마음에 찾아온 것은 실망과 좌절과 낙담이었다. 그 때에 엘리야에게 침체가 찾아왔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인해서 엘리야는 기진맥진해 더 이상 이세벨과 싸울 힘이 없었다. 자신의 사역이 실패했다는 자괴감으로 그는 낙담하여 그곳을 도망치게 된다. 그에겐 이 탈진상태에서 벗어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재충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을 친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19:4)라고 울부짖는다. 그는 완전히 탈진했다. 죽기를 간구할 정도로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몇 년전 연세가 지극하신 어느 목사님에게서 “내가 젊었을 때에 큰 은혜를 받아 뒤늦게 목사(그 분은 50세에 목사가 되었음)가 되었는데 목사가 된 이후 10년 되었을 때 영적 침체가 온 후로 그 이전의 은혜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목회를 마치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는 그 은혜를 회복하지 못했노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후회하는 말을 들었다. 분명 영적 침체는 목회에 있어서 어두운 그림자임에 틀림없다.



II. 영적 침체의 원인

영적 침체의 첫째 원인은 성공 신드롬(신데렐라 콤플렉스)이다. 목회자는 누구든지 큰 목회를 해 보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야망은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목회자이든지 성공해야 한다는 야망 만이 아니라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특히 40대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40대는 가장 어정쩡한 낀 세대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동료들은 자꾸만 교회가 커지고 후배들은 더 앞서가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고 나이는 점차로 들어가기 때문에 조급증이 앞서게 된다.

그래서 대형교회를 꿈꾸면서 열심히 달리게 되고 최선을 다하여 전력투구하게 된다. 한국교회 안에는 목회자의 인품과 신앙과 경건과는 전혀 무관하게 교회의 크기에 따라서 힘을 발휘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성공의 상징물들을 많이 거느리고 다니면서 동료목회자들을 기죽이고 있다(극히 일부이지만). 그래서 더욱 많은 목회자들이 이 성공 신드롬에 걸려서 조급해 하고 성공지상주의에 젖어드는 것 같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한다. 자신의 교회에는 조금은 버겁기도 하고 상황(context)이 맞지도 않는 많은 행사들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성공 신드롬에 걸리게 되면 조급증이 나타나고,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신학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 목회자들은 심지어 이단에게도 솔깃하여 따라가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목회의 성공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목회의 성공인가? 헌금을 많이 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이 목회의 성공인가? 아니면 교회의 힘을 빌어서 노회나 총회, 혹은 국가적으로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목회의 성공인가? 도대체 몇 사람이 모여야 성공이라고 하겠는가? 과연 목회에서 “성공”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목회는 매일 매일 승리해 나가는 과정이지 세상적인 잣대를 가지고서 성공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목회를 이러한 잣대를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따진다면 작은 읍, 면에서 간신히 자립 정도하는 목회자나, 낙도나 오지에서 미자립교회를 지키면서 몇 사람되지 않는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은 다 실패자란 말인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목회에서 어떤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둘째 원인은 메시야 신드롬(슈퍼맨 콤플렉스)이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팔방미인, 다재다능한 사람, 만물박사, 슈퍼맨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목회자를 마치 물 위를 걷는 사람(The Walk-on-Water Syndrome)처럼 만능 슈퍼맨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과제가 주어진다고 해도 막힘이 없이 해결해 주는 전천후 해결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자신의 목사를 메시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 세상적인 목회자에 대한 고정관념도 역시 목회자를 지치게 만드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목회자를 만능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모든 교인들의 요구에 목회자는 자신을 소진하고 거기에 맞추려고 안감힘을 쓰다보면 결국은 스스로를 탈진시켜 영적침체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교인들이나 사회의 요구도 엄청난 요구인데 이것은 차치하고 목회자 자신들이 또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영적 침체를 경험한 목회자들을 가만히 보면 일 중독에 빠진 완전주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헌신을 한다. 그들은 무슨 요구든 거절할 줄을 모르며 모든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애를 쓴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도 위임하지도 않는다.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혼자서 다 처리하려 하고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정해놓은 목표치(어차피 도달할 수도 없는)에 도달하지 못할 때에 자괴감을 가지고 자신은 실패자라고 자학하게 된다. 다른 사람은 다 만족하고 심지어 하나님도 기뻐하실 일을 해놓고서도 자신은 실패한 것이라고 자학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제사하려 할 때에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소리를 지르면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4-15)고 하면서 말린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셋째는 익시온 신드롬(시지프스 콤플렉스)이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영원히 회전하는 수레바퀴에 묶여 그 수레바퀴에 따라서 영원히 한 자리를 계속하여 돌아야 하는 익시온(Ixion)이 나온다. 목회자들은 다람쥐 쳇바퀴를 돌 듯이 계속하여 반복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때로는 목회가 마치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러 올려 미처 꼭대기에 닿기도 전에 다시 그것을 아래로 굴리고, 또 다시 그걸 산 위에 굴러 올려야 하는 운명을 지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와 같은 것으로도 생각되기 쉽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하는 일은 매일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다. 일을 처음 할 때는 신나게 할 수 있지만 자꾸 반복되면 결국에는 일의 창의력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스스로 변화를 주지 않으면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것이 바로 목회이다.

뿐만 아니라 목회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요구는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진다. 정당한 요구도 있지만 어떤 때는 부당한 요구를 할 때도 있고,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요구를 할 때도 있다.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애쓰다가, 또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불안 때문에 지쳐 버릴 수 있다. 무시하자니 목회가 힘들어지고, 다 들어주자니 능력의 한계 때문에 너무나도 괴롭고 힘든 일이다. 늘 긴장해야 하고 긴장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에 공격과 비난의 화살이 쏟아져 들어올지 모르는 살얼음판이다.



III. 예방이 만병통치약

특별히 목회자를 침체시킨 것이 목회자 자신의 책임도 있지만 대개는 교회의 책임인데도 불구하고 일단 영적으로 침체한 목회자들을 교회에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 목회사역 현장에서는 사임을 요구받는 사역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 더욱 목회자들을 불안하게 하고 침체로 내몰고 있다. 한번 탈진하게 되면 목회의 모든 방향성을 상실하게 되고, 매사에 기쁨이 없어지게 된다. 또 목회를 지속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목회자의 영적 침체를 어떻게 해결하며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는 나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목회자는 자신이 어떠한 기질의 사람이며 자신의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목회자는 자아를 인식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다가 목회를 마치게 될 것이다. 목회자가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한계를 모르면 그의 사역에는 한계가 오게 된다.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개의 목회자들은 소명감 하나로 모든 것이 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목회는 소명감도 있어야 하겠지만 소명감 하나로 풀어가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한 예술이다. 따라서 자신의 기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사역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남을 따라서 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만의 장점을 개발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 “하면 된다”는 것은 철학이지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공 신드롬과 메시야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나님은 결과만을 가지고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는 나 자신을 세우라는 것이다. 목회자의 탈진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고갈인데, 영적·지적·육적인 고갈이다. 이것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목회자에게 오는 영적 침체의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물론 영적인 고갈일 것이다. 목회자는 먼저 자신의 영적인 필요에 민감한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영적인 고갈을 당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설교에 은혜를 받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다른 사람이 하는 설교보다는 자신의 설교를 가장 많이 듣고 사는 사람이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은혜를 받으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준비해야 한다. 실제로 강단에 서서 설교하면서도 내 설교에 내가 은혜를 받아야 내가 살 수 있다.

둘째는 지적인 고갈을 채워야 한다. 지적 고갈은 영적인 고갈로 바로 이어지게 된다. 이 지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세미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나 세미나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 나아가는 법을 체득한다면 몇 배의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독서법을 체득해야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약점은 성경에 관한 책이나 신학에 관한 책을 주로 읽고 조금 나은 목회자라면 예화를 위하여 몇 권의 책들을 더 읽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가지고는 지적인 고갈을 채울 수 없다. 필자는 매일 신문을 두 종류 이상 꼼꼼히 읽는다. 특히 사설과 논설기사는 거의 빼지 않고 읽고, 때로는 광고도 유심히 살펴본다. 틈틈히 동서양 고전들을 읽고, 시집이나 수필집이나 소설류, 특히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을 가급적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시사월간지, 주간지, 현대의 과학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읽는다. 특별히 모든 서적을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최신간들을 다이제스트해 놓은 신문을 많이 활용하면 많은 책들을 읽은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예를 들면 문화일보나 동아일보).

셋째로 목회자는 자신의 건강관리에 힘을 써야 한다. 체력이 저하되면 우선 당장에 끈기있게 앉아서 연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체력이 저하되면 기도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체력 저하는 곧바로 영적인 고갈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체력이 영력”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40대에 병원에 입원하거나 요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혹사를 당하여 병원신세를 지거나 일찍 죽는 것도 하나님께 불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는 100미터 경주나 며칠 동안 이루어지는 대회가 아니라 마라톤이며 한 시즌 내내 치뤄지는 장기 레이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약에 건강을 의존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피로를 풀려고 사우나에 가거나 잠을 자는 것은 당장에는 좋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에 도리어 해가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셋째는 짐을 서로 나눠지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또 엘리야 신드롬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돕는 사람이 없고, 오직 나만 홀로 남았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일을 자신 혼자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도 교회를 혼자서 이끌어 갈 수는 없다. 따라서 업무를 효과적으로 분산하는 법을 배워서 동역하는 목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사실 목회자들에게 이 점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일이 담임목회자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는 현상일 것이다. 권한을 이양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목회적인 스트레스를 줄이는데 대단히 좋은 방법이다.

필자는 대개의 일들을 부교역자들에게 일임을 하고 있다. 부교역자들이 자신이 알아서 마음껏 일하도록 한다. 처음에 방향을 잡아주고 일단 결정된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위임하고 중간보고와 결과보고는 받되 간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예 말하기를 내가 맡겨준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직접 회계하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설혹 때로는 잘못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있는 법이다. 내가 해서 효과적인 일이 있고, 다른 사람이 해서 효과적인 일이 있다. 유능한 사람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도 목회이며 목회를 조력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넷째는 가정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영적 침체에 이르는 것은 가정 사역의 실패에서도 기인한다. 따라서 목회자의 가정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가족간의 대화를 되도록 많이 가지라고 권고하고 싶다. 끊임없이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모와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로 목회자에게 전가됨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미국의 목회자들과 대화해 보면 가족과 목회 중에서 택일을 하라고 하면 가족을 택한다고 하는 분들이 대부분임을 보고 놀랐다. 심지어 가족들만 아는 전화를 따로 가지고 다니면서 가족의 필요를 언제나 채워주는 목회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고 더욱 놀랐다.

다섯째는 시간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시간이 부족함을 호소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들 속에서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우선순위를 분간하지 못하고 무엇이든지 닥치는 일을 하다가 정작 중요한 일을 만나면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피터 드러커는 목회자와 같은 사역자들에게는 중요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위임할 것은 위임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만 찾아서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개의 목회자에게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다. 그래서 그 누가 부탁을 하든지 거절하지 않고 모든 일을 다 받아들인다. 그러나 목회자는 메시야가 아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을 만들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그러한 요구가 올 때에 거절할 줄 아는 지혜도 배워야 한다. 목회자는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 밖의 일들을 거절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사실 목회에 있어서 거절할 줄 아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사실 거절할 줄 모르는 목회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교회를 서서히 병들어가게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섯째는 여가를 적절하게 활용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목회자에게 있어서 안식은 가장 필요한 것이다. 대개 영적 침체를 겪는 사람들을 보면 일중독에 걸려서 여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한가할 때에 시간을 내서 광야로 나가서 쉬시기도 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예수님도 쉴 때는 적절하게 쉬어가면서 일하신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역에서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능가하는 초능력자가 되기를 갈구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광야로 물러나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광야로 물러나 있어야 할지 모른다.

때로는 사역지를 떠나 멀리 여행을 떠나 휴식을 취하고 피로를 풀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혀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외국의 휴양지에 다녀오든지 아니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방문하는 일이다. 단지 여행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회복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필자는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자동차를 가지고 어디든지 정처없이 떠나는 버릇이 있다. 2-3일을 아무런 생각없이 쉬면서 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 동해안 해안선 도로를 한없이 질주해 보기도 한다. 시간이 정말 없다고 하면 워커힐을 경유하여 양수리로 해서 춘천에 한번씩 다녀온다. 그리고 몇 시간이고 흐르는 물만 쳐다보면서 시간을 낚으면서 앉았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또 한가지 방법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거나 취미활동에 자신을 며칠 동안 맡기는 것이다. 외딴섬에 가서 어부들과 함께 이야기를 한다거나 깊은 시골에 들어가서 며칠을 농부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일하고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가를 즐기는 것은 사역의 연장이지 결코 죄가 되는 것도 태만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VI. 즐기는 것이 능력이다

이렇게 우리가 필사의 노력을 한다고 해도 계속되는 사역과 스트레스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때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사역들이 기다리고 있을 때가 있다. 또 때로는 목회자들이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압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명이라는 족쇄에 묶여서 거기에서 탈출할 수도 없다. 정말 쉴틈도 없이 밀려드는 사역을 감당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고 대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 가시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종종 아내에게서 목사님들이 제일 믿음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을 듣는다. 아내가 하는 말은 ‘목회자들이 너무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목회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때까지 엎드리는 것이 믿음인데 모든 것을 다 자신이 해결하려고 드는 모습을 보고서 말이다. 그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려고 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목회는 하나님의 성역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사(同事)를 해야지 혼자서 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필자는 “내가 염려한다고 안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염려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늘 즐겨 사용한다. 이 말은 내게 주어진 모든 일을 즐기자는 것이다. 우리는 힘든 일을 만날 때에 시야가 좁아진다. 왜냐하면 그 일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시야가 좁아지면 일을 자칫 그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을 즐길 때에는 시야가 넓어진다. 느긋하게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게 되어 실수를 줄일 수 있다. 필자는 설교 준비하는 것과 강의를 준비하는 것과 집필하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 수 없다. 설교하고 강의하는 일은 몇 시간을 계속해도 신바람이 나서 지칠 줄을 모른다. 오히려 더 힘이 나고 활력이 솟는 것을 매번 느낀다. 교회의 모든 행사도 단순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서 이번 일로 인하여 어떤 것을 주실 것인지 기대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자체를 늘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원래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결코 아니다. 매사에 정확하고 꼼꼼하고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던 메시야 콤플렉스에다 엘리야 콤플렉스까지 걸린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을 체험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역에서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 즐기면서 하고 있다. 목회 자체를 즐길 줄 알 때에 비로소 영적 침체라는 깊은 늪은 우리를 비켜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어차피 피할 수 없거든 즐기는 것이 최고의 약이다. 즐기는 법을 터득한다면 언제나 사역의 현장이 감사와 기쁨으로 넘치게 될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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