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과 식생활
글 / 서 명 수 교수(협성대학교, 구약학)
식욕은 모든 동물의 본능적 욕구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동물은 없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도 살기 위해서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뭔가 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능적으로 내장(內藏)하고 있는 식욕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식욕의 감소, 나아가 식욕의 완전한 소멸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삶의 소중함을 생각할 때, 그리고 요즈음 유행하는 ‘잘 먹고 잘 살기’(well-being)의 관점에서 볼 때 적당한 식욕은 삶의 활력이 됨에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 것이나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영양가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영양소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다 사람의 먹을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물계 중에서 인간은 유일하게도 문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풍부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리지 않고 아무것이나 다 먹지는 않는다. 문화와 사회적 인습에 따라 기호식품과 혐오식품을 구분하여 가려먹는다. 사람이 음식의 영양을 떠나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을 구분하고, 또 먹는 방식이나 자세 등에 관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문화적으로 볼 때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식습관, 나아가 식문화에 현격한 차이가 있으며, 농경사회에서도 밥을 주식으로 하는 쌀문화와 빵을 주식으로 하는 밀문화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지구촌 시대의 ‘퓨전음식’에 의해 상당부분 극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음식문화에 서구의 음식문화가 침투한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다양한 음식문화적 요소를 가미한 ‘퓨전음식’이 대두되어 새로운 음식문화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음식문화의 본질적인 요소까지 퓨전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식습관, 나아가 음식문화에는 오랜 역사와 뿌리를 가진 종교문화적인 요소가 깊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음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사회, 종교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약시대의 주요 음식재료
1. 고기(Meat)
창세기의 제사장 전승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시 인간에게 허락해주신 먹을거리는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창 1:29)였다. 산 동물이 먹을거리로 허락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어지럽히는 반창조에 해당하는 인간의 타락과 그에 대한 심판인 대홍수 이후 노아의 정결한 번제를 받고나서이다. 채소같이 모든 산 동물을 먹되 피에는 생명이 있음으로 피를 먹거나 피가 있는 채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창 9:3-4; 참고, 레 17:11, 14; 신 12:23). 이러한 포괄적인 허락은 점차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먹을 수 있는 정한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동물로 엄격히 구별되기에 이른다(레 11). 대체로 이방종교의 제의와 관련이 있거나 유목생활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치가 덜한 동물을 부정한 것으로 분류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오늘날은 그 분류기준을 명확히 알 수 없다.
하나님께 희생제물(Sacrifice)로 드린 고기의 경우 남은 고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이 고기를 먹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다. 구약 외경인 집회서의 저작연대는 대체로 주전 2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데, 사람이 사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물과 불과 소금이며, 밀가루와 우유와 꿀, 그리고 포도즙과 기름과 의복이다”(집 39:26)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식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음식재료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고기가 빠져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구약시대에 고기가 일상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정규음식재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기가 정규음식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종교적인 이유와 더불어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잡아 주된 음식재료로 사용한다면 급격한 가축 수의 감소를 초래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요한 음식물인 우유나 치즈의 생산이 감소되어 생계를 위협할 수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에 한해 고기를 먹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청하여 송아지 고기를 대접하고(창 18:7),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을 빗댄 나단의 비유에서 부자가 자기 집에 손님이 왔을 때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대접했다는 이야기(삼하12:4), 그리고 집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쁜 나머지 하인을 시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한 것(눅 15:22-24)을 볼 때 고기는 드물게 특별한 경우에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자인 경우에는 달랐다. 솔로몬 시대의 왕실 하루 고기 소비량은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왕상 4:23)이었다. 예언자 아모스는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암 6:4-5) 사는 모습을 책망하고 있다. 이렇듯 부유한 사람들은 고기를 넉넉히 먹고 살 수 있었으나 일반 백성들은 특별한 경우에 고기를 먹었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가금류(家禽類)를 통해 육류를 섭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둘기와 산비둘기에 관한 언급이 구약성서 여기저기에 있다.
구약시대에 일반 백성들은 생선 역시 넉넉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이 지중해와 맞닿는 해안지역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선 공급이 어려웠고, 다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2. 과일(Fruit)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과일은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이다. 올리브는 기름을, 포도는 포도주나 포도즙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무화과는 일반 백성들이 무척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백성들은 여행할 때 말린 무화과를 가지고 다녔다(삼상 28:18; 30:12; 대상 12:40). 드물지만 사과에 관한 언급도 나타나며(욜 1:12; 아 2:5), 석류도 식용으로 사용되었다(민 13:23; 20:5; 신 8:8).
3. 채소(Vegetables)
팔레스틴 지역은 그 기후로 인해 식생(植生)이 풍부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 비해 채소의 종류도 다양하지 못한 편이다. 광야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먹었던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이 눈에 선하다고 불평하는데(민 11:5), 이들이 그리워했던 채소 중 참외만 구약성서에 단 두 번 언급되어 있고(사 1:8; 렘 10:5 렘 10:5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들(우상들)은 오이밭(미크샤)의 막대기(토메르 רꗮꚠ) 같고, 말을 할 수 없으며…”로 되어 있는데, 한글번역성경의 렘 10:5에는 ‘오이’라는 단어는 나타나 있지 않다. 민 11:5의 채소목록 중 ‘오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크샤’(הꚂꙓꗬ)인데, 한글번역성경의 사 1:8에는 ‘참외(밭)’로 번역되어 있다. 한글번역성경에서 민 11:5의 ‘참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밧티아’(ꖙיꖱꔨꔣ)이다. 영어번역성경들에서 ‘미크샤’는 cucumber로, ‘아밧티아’는 melon 또는 watermelon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한글번역성경에서 사 1:8의 ‘참외(밭)’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크샤’이므로 ‘참외(밭)’을 ‘오이(밭)’으로 고쳐 읽는 것이 원뜻에 부합하며 일관성이 있는 번역이 될 것이다.
), 나머지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물론 성서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재배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마 일상의 식탁에 빈번히 오르는 채소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데, 그러나 부추와 파는 두루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다 중요한 채소류는 콩종류로 끓여 진한 수프를 만들 수 있었고, 밀가루와 섞어 빵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다.
4. 곡물(Cereals)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고기류와 채소류의 부족은 상대적으로 곡류음식(cereal food)의 비중을 높여주었다. 이집트 사람 시누헤(Sinuhe)의 여행기는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에는 보리와 밀이 풍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리와 밀은 그 어떤 곡물보다도 식생활에서 중요한 음식재료였는데, 특별히 보리가루와 밀가루는 빵을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재료였다. 조를 재배하기도 하였고, 귀리를 밭의 경계지역에 심기도 하였는데(사 28:25), 필요할 때는 이것들로 빵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겔 4:9). 그런가 하면 이것들을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벗겨낸 후 먹기도 하였다.
구약시대의 음식의 의미
구약시대에 음식은 단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대부분의 고대 사회에서 음식은 사회·경제적인 차원과 더불어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었듯이 구약시대도 그렇다.
1.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음식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모든 음식재료는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일차적 또는 이차적 산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자 인간 생명의 주관자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는 모든 음식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해당한다. 광야시대에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것으로 내려주었고, 약속의 땅에서는 밀과 보리와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 열매와 꿀을 부족함 없이 먹게 하였다(신 8:7-9; 수 24:13). 이것은 분명 언약의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주신 약속의 선물인 것이다. 인간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음식을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차적인 생명유지의 차원을 넘어 때로는 사회적 화목과 화친을 위해 먹고 마시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맺으며 먹고 마시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명심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망각할 때 그들은 여지없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던 것이다.
2. 화친(和親)의 수단으로써의 식사
일상생활 속에서 음식은 친교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쌍방간에 화친의 의식이 필요할 때 함께 식사를 나눔으로써 화친의 의식을 갖기도 하였다. 재산문제로 서로 의심하고 갈등을 겪던 야곱과 라반은 서로 재산분할에 관해 협약하고 같이 식사를 나눔으로써 협정을 마무리 지었다(창 31:54).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화친의 조약을 맺기 위해 마르고 곰팡이 난 빵을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여호수아에게 ‘집에서 나설 때는 따끈한 빵이었는데 여러 날 오는 동안 마르고 곰팡이가 난 것’이라고 속이는 장면의 이면에는 화친의 의식 때 같이 식사를 나누던 풍습이 놓여있다(수 9). 그들은 단순히 여행길에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빵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화친의 식사를 위해 빵을 준비했던 것이다. 다윗이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려다 왕의 식탁에서 같이 먹게 한 것은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에서라기보다는 절친했던 친구 요나단과의 영원한 우정 또는 친교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행위이다.
‘계약/언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리트’(תיꙞꔶ)인데, 종종 ‘먹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바라’(הꙜꔯ)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성경에 보면 “소금언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 중 제사장 아론의 몫에 관한 규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언약이니라”(민 18:19). 또 하나님께서는 소금언약으로 다윗 왕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주었다고 역대기는 기록하고 있다(대하 13:5). “소금언약”(covenant of salt)은 “영원한 언약”(permanent covenant)을 의미하는데, 계약의 당사자들이 같이 소금을 먹는다는 것은 상호간의 충실(loyalty)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고 말씀하신 것은 이와 같은 구약의 언약사상과 맥을 같이 한 것이다. 서로 화목하여 같이 식사를 나누는 좋은 사이로 지내되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히 화목의 관계를 지켜나가라는 명령인 것이다.
3. 종교적 계약/언약의 수단으로서의 식사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역사적인 관계에서 같이 나누는 계약식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공동식사는 계약체결의 한 의식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본래 미디안의 제사장이나 출애굽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세에게 나아와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출 18:11)고 고백하고 하나님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친 후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제사음식(떡)을 먹는다.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께 번제와 희생제물을 드리고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같이 식사를 나누는 것은 사회적인 화친을 넘어 종교적인 계약의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장로들과 더불어 종교적인 차원의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하여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모세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과 같이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한 후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출 24:9-11). 이것은 분명 종교적 의미의 “계약식사”(covenant meal)이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처럼 식사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성경은 다만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계약식사”를 의미한다. 이처럼 거룩한 종교적 의식으로서의 계약을 체결할 때 같이 식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구약성서의 공생공식주의(共生共食主義)
어느 시대나 가난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에 대한 깊은 배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인간적인 것이다. 구약성서는 사회적 약자로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를 촉진하는 가르침을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의 품삯 지불을 해진 후까지 미루어서는 안 된다(신 24:15).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품삯을 당일에 주지 않으면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이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수할 때에 곡식 단 하나를 모르고 밭에 놓고 왔더라도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그냥 밭에 남겨두어야 하고, 포도를 수확할 때에도 모조리 다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신 24:19-21). 배고픈 자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이웃의 포도밭에 들어갈 경우 그릇에 따 담아가지고 나오는 것은 안 되나 배불리 따먹을 수 있으며,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가 손으로 이삭을 딸 수는 있으나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 23:24-25). 사람이 아무리 굶주린 상태라 할지라도 한번에 먹을 수 있는 포도의 양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으며, 낫으로 베지 않고 손으로 따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까고 알맹이를 먹을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계명들은 밭의 주인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배고픈 자를 배려하는 공생공식(共生共食)의 정신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식생활과 반성
음식이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흔히 먹는 문제를 육체의 일로 치부한 나머지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고상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는 인간을 영과 육의 통합적인 존재, 즉 ‘네페쉬’로 보지 않고 희랍적 사유의 한 특징인 육에 대한 영의 우위를 강조하는 관념이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별 고통을 겪지 않는 부유한 사람들의 입에서 ‘뭘 그까짓 먹는 일가지고!’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배고픔의 고통과 설움을 뼈저리게 느껴본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 먹을 것이 없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먹는 문제를 그렇게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소위 8장 2절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상위 20%의 부유층이 부의 80%를 장악하고, 80%의 사람들이 부의 20%를 나누어 가지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 주변에 절대빈곤층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식생활 행태를 보면 부끄럽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음식점마다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포만감에 젖어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먹을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악덕 상혼(商魂)이 판치고, 진실한 식탁공동체의 친교수단으로써의 식사가 아니라 왜곡된 식욕의 충족을 위한 식생활의 폐단을 보게 된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 음식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생명의 에너지원인 음식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친교와 화친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생각하며 먹고 마시는 감사와 경건에 찬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겠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마 15:11).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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