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호칭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2:11)
글 / 윤철희
들어가면서
오늘날 사회가 급격히 변하고 사람들끼리 접촉관계도 많아진데 비하여 호칭 관계의 말들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남을 부르는 말에 있어서 무척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있다고들 한다. 특별히 인터넷과 상술적인 문화가 발달된 요즘 사회속에서, 점원이 백화점의 고객을 보고 ‘어머니’ 또는 ‘언니’라고 한다던지, 교회안에서의 예배시 ‘목사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라는 지나친 겸사의 표현 등은 타인에 대한 호칭으로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할 지칭어의 중요성이 점점 방향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1)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성도들간에도 교회 직분적 성격상의 본래적 의미에서 보다는 단순하게 상대방을 예사롭게 높이말로 여겨 통용되는 호칭이 있는데, 교회적 직분을 바로 성(姓)씨 뒤에 붙여서 ‘모 집사님’ 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흔치않게 사용한다. 대부분 상대방의 교회적 신분관계(직분)을 잘 알지 못하거나, 상대방을 처음 대면할 때면, 의례히 호칭상 부담이 없는 ‘집사님’ 이라는 교회적 직분이 호칭어로써 다반사 사용되어진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집사’ 라는 교회 직분명의 사용은,「부담없는 호칭어로써의 기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인데, 보편적으로 교회내에서든 밖에서든 성년이 된 결혼한 보통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집사님’ 이라는 호칭으로 부담없이 서로를 부르는 것이 성도들간에 갖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지칭 사용의 한 예로써, 결혼전의 미혼의 청년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형제’ 또는 ‘자매’로 서로를 부르다가, 결혼 후 어느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집사’라는 호칭으로 불려진다. 또 한 경우에는 미혼인 상태에서도 당사자가 나이가 많은 경우를 고려하여 ‘집사’라는 직분적 용어를 호칭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신분 상승이나 한 것 처럼, 사회적 직함의 성격을 갖고 이 호칭은 은연중에 자주 사용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들 사이에 모르게 게토화(ghettorized)된 교회의 직분적 명칭 사용은 상대방을 부르기 편한 호칭어로의 한 방편으로 이미 자리잡고 있고, 우리 성도들의 의식속에「부담없는 호칭어로써의 기능」으로 고착화(fixedness)되어 버린 것에서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필자는 성경에서의 성도간의 호칭이 교회적 직분에 해당하는 명칭들 보다는 ‘형제’(αδελφοs)라고 부르는 것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2) 이처럼 무분별하게 남용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바로 지적하고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였다. ‘집사’와 대비된 ‘형제’ 및 ‘성도’라는 단어의 상호 쓰임에서 필자는 이 낱말의 적절한 소제의 의미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하여 찾아 나가는 동안, 최근 들어서 부쩍이나 ‘집사’라는 말에 비하여 ‘형제’ 또는 ‘성도’라는 말의 사용이 점점 줄어들고 퇴색되어 버리는 현상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제대로 알고 바로 사용해야 할 목적으로 “기독교인의 호칭에 대하여” 라는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고, 부제(副題)로는 ‘히브리서 2장 11절’3)의 말씀을 필자의 글을 전개해 나갈 타당성 있는 근본 취지(趣旨)의 말씀으로 삼고자 한다. 아울러, ‘집사’라는 호칭의 오용과 남발의 원인은 성경적 집사직분에 대한 의식 결여 및 서열적 구조를 갖고 있는 각 교회 교단헌법상 정치제도의 문제 등으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해답으로, 성경에 주로 사용하고 있는 ’성도‘ 또는 ’형제‘라는 용어를 성도간에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호칭어로 제시하고자 한다. 성도‘, ’형제‘라는 두 단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바른 성경적 의미가 풍성히 해석되어짐에 따라, 성도들 각자의 의식속에 부담없이 받아들어지고 의식적으로 자주 사용된다면, 현재 성도간에 남용되고 있는 ‘집사님’ 등의 교회(행정) 조직의 직분명 사용 대신에, ’성도‘ 또는 ’형제‘라는 말씀 안에서의 은혜적 친숙한 용어가 성도간 상호 호격적 존칭어의 의미로써 대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은 마치 세상 문화속에서 널리 시용되고 있는 ‘선생님’ 이라는 존칭된 평어적 호칭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간에도 스스로 부담감 없는 자연스러운 성경적 용어의 기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펼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도’ 또는 ‘형제’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집사’라고 부르는 호칭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성경적 본질에서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한 직분자에게 주어진 은사적이며, 사역상 소명의 직분명”이라 하기 보다는, ‘집사’라는 명칭이 ‘성도’ 및 ‘형제’ 라는 호칭보다는 더 권위적이고 특권적이며, 서열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내에서의 직분적 사명(역할)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로부터 위임받은 그 권위(εξουσια)를 은사적으로 적극 활용하여 교회를 섬기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현재 교회내, 외적으로 계속적으로 양산(量産)되고 있으며, 또한 손쉽게 어느 절차도 없이 보통적으로 시간만 지나면, 인정하고 있는 직분이 ‘(서리)집사’ 라는 무수히 많은 숫자의 ‘허울 뿐인 직분’이 있다. 원래 이것의 대부분 사역은 교회의 구제, 봉사, 헌금수납 등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극소수의 활동에만 나타나고, 교회의 주요 안건시 정족수를 채우기 위하여 간혹 형식적으로 열리는 제직회에 피동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집사직 본연(本然)의 직무에서 물러난 성도들이 ‘서리집사’라는 말로 호칭되고 있는 것이다.4)
이러한 결과물로써 우선적으로 그것이 과연 교회적 직분이라 해야 할 지 판단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5) 그렇다면, 왜 일선 집사의 직무에서 사임하거나, 은퇴한 집사를 ‘성도’ 또는 ‘형제’ 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일까? 항존직 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어서 그럴까?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직분 그 자체를 계급적인 구조의 틀에서 신앙생활의 보상적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위나 권력으로 생각하거나 명예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으려는 소위 위기의식의 한 부분이 작용한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연륜과 종교적 활동의 결과물로 얻은 훈장과 다름 아니기 때문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 직분에 있어서 ‘항존직’의 오용(誤用)을 잠깐 소개하면, 직분의 존속여부에 따라 구분해서, 화란의 개혁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직에 대하여 봉사기간을 따로 한정하여 임기직의 성격을 갖지만,6) 이것은 종신직이라는 개념과 반대되는 것으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항존직’ 이라는 것은,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하는 직분을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시대적 교회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교회가 임시적으로 만든 직분이 있는데, 전도사, 서리집사 등이 있다.7) 상당수의 많은 목사들이 항존직의 잘못된 적용으로 종신(평생)직 등의 개념을 갖는 것도 이러한 동일한 의식에서의 출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이 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루기로 하겠다.)
성경적 직분에 대한 계급화 현상은 필자가 얼마전에 어느 모임에서 가진 대화 속에서 잘 드러난 사례(事例)가 있다. 필자의 친구와 P씨 라는 교수와의 짧은 대화를 잠깐 소개하면, P씨는 필자의 친구에게 “현재 교회에서 어떠한 직분이십니까?”, (친구) “저는 일반성도입니다.”, P씨가 이어서 하는 말이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아직도 일반성도입니까”, “집사도 되고, 빨리 안수집사를 거쳐, 장로까지 올라가야지 않겠어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 하는 말이 “저는 일선에서 물러난, 일반 성도입니다. 그냥, 형제님! 이라고 불려 주세요! ”... 이들의 주고 받고 한 대화속에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한국교회에 만연된 직분적 계급구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날 필자는 이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또 다른 위기의식을 안타까운 가운데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의 직분제도는 서열적 계급 구조처럼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를 증명이나 하는 것처럼 우리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제대로 된 교회의 성경적 바른 직분관을 배우지 못한 관계로 ‘성도’ 또는 ‘형제’ 라고 부르는 것보다 ‘집사’ 또는 그 이상의 직분을 더 좋은 것으로(?) 인식하고 기준삼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선출 때를 보라! 필자의 이러한 예증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직분에 대한 지나친 선호와 남용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동 떨어진 이 시대속에 던져진 또 하나의 세속화된 교회의 일탈된 비성경적 직분관의 표류를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제, ‘집사’ 라는 직분명이 왜 이토록 쉽게 성도간의 호칭어로써의 기능으로 자리잡아 이와같이 만연히 불리어 지는 현상은 한국적 문화의식 구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한국사람의 의식속에서 상대방를 부를 때, 이름이 아닌 직함(타이틀)을 중요시하는 한국적 특수한 문화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교회직분명을 사용하는 현상도 대부분 언어학적 측면에서 경어(敬語)의 작용으로서의 ‘존중의 표현’ 이라는 호칭어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기독교인들간에도 전통적 동일한 사고 방식속에서 교회의 직분적 명칭을 불려주는 것이, 또는 부름을 받는 것이 자신이 속해 있는 인간사회 구조의 관계면에서 계층적 위신으로 대접받음으로써 덜 기분 상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배려의 차원이라는 긍정적인 또 다른 면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관계상 긍정적 효과적 기능을 갖춘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내 그리스도인들은 이름과 함께 불리어 지고 있는 교회적 직분명을 분별없이 남용할 수 있는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대신하여 다른 호칭을 사용하면 안되는가? 라는 대안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 찾는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 신앙의 삶과 도리에 있어서 제일의 준칙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집사’ 라는 경어적 표현이 인간사회 관계에서 아무리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성경적인 원리상에서 그 직분의 속성이 제한적이고 한시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우리도 그 원리를 쫓아 그대로 순종하며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질적 속성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성경말씀의 원리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결코 인간은 타락하여 지고 말것이다.
성도간의 이와 같은 교회의 직분(용어)의 일탈적 원인은 교회 직분에 대한 오늘날 성경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 있거나, 일부내용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적 가치관을 먼저 앞세우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일탈 행위는 성경의 권위에 앞서서, 사람의 처세술의 한 방편으로 소위 ‘집사’ 라는 자존적(自尊的) 직분명칭으로 뒤 섞여 포장된 위선적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야누스적 병리 현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성도’라고 혹은 ‘형제’라고 부르면, 그 당사자는 그 풍성한 의미조차도 모른 채, 매우 듣기 싫어하거나 이제 막 신앙생활을 하는 초신자에게 불려지는 호칭정도로 만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호칭들을 꺼린다. 직분에 사용되는 명칭을 더욱 선호하고 계속적으로 그 직분을 유지하고 대접받기를 원한다.
이제, 필자는 교회직분에 해당하는 호칭 사용이 무의식적으로 너무 지나치게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주요한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교회 직분에 대한 의미와 그것의 역사적 태동에 대하여 몇가지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선적으로 성경에서 제시된 직분적 의미와 명칭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과 같은 이 상태의 지나친 교회 직분명칭의 오용된 현실을 필연적으로 계속하여 맞이하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라는 호칭적 의미와 주안에서 ‘형제’ 라는 의식속으로 다시끔 성경에서 풍족히 제시하고 있는 그 수혜적 명칭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 직분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이 땅가운데 내신 ‘목사’, ‘장로’, ‘집사’ 로서 삼직제를 말하고 있다.8) 초대교회의 성격은 제도적이고 계급적인 구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형제들의 역동적 동역사역을 강조하는 교회였다. 초대교회는 직분 중심의 교회라기 보다는 오히려 은사중심의 교회라 할 수 있다. 교회안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동역자들 이었으며, 이런 이유로 인하여 교회 안에는 더 높은 자도 없고 더 낮은 자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른 자들 중에 계급적인 직제가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다.9)
성경은 교회를 유기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고 있으며, 이 몸에 속한 모든 지체는 서로 다른 각각의 기능들을 수행함으로써 역동적인 유기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사도로,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직분적 은사가 주어져 있다.10) 이런 몸으로서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지체에게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주어졌는데 성령의 은사도 역시 몸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차별이 없는 것이었다. 다만, 교회 안에서의 사역상의 기능적인 면에서 구별이 가능한 것 뿐이다.11)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 제국교회(콘스탄틴)이전 시대의 '트라얀(Trajan, A.D.98~117)'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에 7교회에 보내는 편지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독‘과 ’장로‘를 구별하고 특히, 감독이 없이는 교회에서 행하던 실행들을 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감독의 권한을 강조하게 되었고, 2세기 말엽부터 이단들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참된 교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키프리안(Cyprianus, Cyprian, A.D.200~258)' 시대에 이르러서는 외형적이고 유형적인 교회 조직체를 찾고자하는 경향과 기독교 공인후의 교부시대에 가서는 드디어 계급중심의 성직제도가 강조되기 시작함으로 교회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라는 계급적 직분이 생겨났고, 이런 직분적 구조는 교회사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오직 성경’ 이라는 모토(motto) 아래서 종교개혁이 단행되었고, 이 시대적 요청을 통하여 루터와 칼빈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성직자들이며, 은사적으로 부여된 사역에 관한 일을 제외하고는 우리들 사이에 어떤 구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간에는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개혁의 외침이 교회역사 속에서 확인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지금 이 시대에도 믿음의 선배들이 지켜온 신앙의 유산을 마찬가지로 계승, 발전 적용시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적 현실은 어떠한가? 각 개교회에서는 계급적 서열구조로 직임이 부여되고 일부에서는 교회직분을 돈으로 주고 사는 만행이 시행되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성도 위에 집사, (서리)집사 위에 안수집사, 안수집사는 장로로 피택을 위한 교두보로, 전도사(조사), 전도사 위에 강도사, 강도사는 목사의 진입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로 말씀선포의 강도권이 주어졌다고 의기양양 떠들고 있다. 각 교단(정치) 헌법은 이런 방식의 교회직원의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아이러니컬 하게도 각 교회내 계급적 서열 구조의 모습을 띠고 적절히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상호 유기적인 공동체적 교회로 세우는 방편으로서의 제도가 아니다. 그때 그때 만들어진 각 교단의 교회정치는 필요 요청시에 따라서, 대형교회에 억지 춘향이의 옷 마춤격으로 조직적인 교회 행정 운영의 편의를 위하여 성경에도 없는 편승적으로 만들어 놓은 부수적인 직분들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직분은 개인이나, 단체나 혹은 교회들이 자기 취향에 의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것인데 말이다.12) 이러한 차별적인 직분명들이 성도간 ‘집사’ 라는 호칭의, 남발의 원인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한번 언급하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역사적 장로교회(개혁교회)의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이다. 이에 반해서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직분들은 강도사, 전도사, 서리집사, 안수집사, 은퇴집사, 권사, 은퇴권사, 권찰, 부목사, 공로목사, 원로목사, 은퇴목사, 원로장로, 은퇴장로, 찬양사, 상담사 등이 있다.13)
이것들의 대부분 성격은, 직분이 가지고 있는 실효성, 즉 진정한 교회를 위한 항존직(恒存職)직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섬김의 봉사성이 전혀 없는 것들이다. 말 그대로 의미 자체가 없는 것들이다. 혹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직분들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나, 필자의 생각은 이미 “목사, 장로, 집사”라는 제도에서 변용되어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직분들은 원래적 고유직분(교회)에 충실하였다면, 나오지 않을 것들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들에 의하여 편의적으로 만들어진 무수히 많은 ‘허울뿐인 명칭(title)적 직분’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타이틀(Title)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개신교회(Protestant Chuch)와 로마 카톨릭(The Roman Catholic Chuch)의 성직(聖職) 제도14)가 갖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무슨 차이점이 있는 지를 알아보고 과연 이것이 성경적인가를 자문하여 보기를 바란다. 이미 주후 2세기에 이르러, 교회안에서 교권체제가 차츰 자리를 잡으면서 집사 등, 직분의 본래적 의미가 변질되어 버렸다.15) 오늘날, 작위든 부작위든 일부 사역자들은 허울 뿐인 직분명을 매개체로 하여 상대적으로 친히 하나님께서 제정하여 불러주신 ‘성도(聖徒)’라는 호칭을 평가절하 및 폄하 시킴으로써 또 다른 이기적인 목적으로 직분을 수단삼아 악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직위적 타이틀을 명분삼아 교회내 독점적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점에서 하루 빨리 성경적인 용어로 개선되어야 함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성도간에 다반사 호칭되고 있는 ‘(서리)집사’ 등과 같은 직분적 이름들은 이제 시급히 개선될 것으로 기대되는 제도(교회정치)를 바탕으로 하여, 마땅히 없어져야 할 직분적 명칭들이다. 한국교회의 왜곡된 직분에 대해서는 이제 말씀의 원리에 따라 새롭게 정리해야 하며 각 직분들의 고유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16)
맺으면서
이제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 간에 사용되는 호칭으로 ‘성도’와 ‘형제’ 라는 말이 있다. 먼저 ‘형제’(헬,αδελφοs/아델포스; 히,הא/아흐) 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이다. ‘형제들아’ 라고 시작하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말속에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한 지체의식을 가졌으며, 그를 통해 복음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을 ‘형제’ 라는 말을 증거로 하여 하나님 나라의 권속(가족,일원)으로서 끌어 안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형제’의 의미를 찾아보자. 신약의 마가복음 3장 31절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사역초기에 제자들이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라는 말에, 대답하기를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17) 바울과 예수님은 직분명 사용에 대하여 또는 그와 비슷한 차서적(次序的) 등급을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는다. 따라서, 서열적 의미로 관념화 된 직분적 명칭(호칭)을 왕왕 사용하고 있는 지금과 대비하여 이러한 내용들(각주17번)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관계로 그 안에 어찌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또 다른 호칭어로 사용될 ‘성도’(헬, 하기오스/히, 카도쉬) 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나오는 말씀 구절을 인용하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도의 지칭이 곧 ‘성도’ 이고, 이 호칭은 적어도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 시대까지 일반적인 지칭으로 계속 사용되어진 것으로 확인된다.18) 이 호칭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함을 입은 하나님께 받쳐진 특별한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성도’로 부르심은 입은 자들(고전1:2)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사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바로 그 용어(거룩/헬,앙겔로스)가 우리에게 선언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었고 구약의 성도들과 동료 시민이 되었다.19) 과거에는 그들이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20) 곧,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그분의 독생자 안에서 아들이요 딸인 것이다.21)
여기서 ‘에드먼트 클라우니’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오늘 이 시대 우리가 왜 ‘성도’ 라는 호칭을 마당히 사용하여야 하는지를 당연히 지적하고 있기에 충분하다.
인용하여 보면,『혹여나, 그리스도인 사이에 ‘성도(聖徒)’ 라고 부르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스테인글라스 창문, 메달들, 그리고 자동차의 계기반에 많이 나타나는 영어로는 모두 ‘Saint’ 로서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가는 ‘저는 성자(성도)가 아닙니다.’ 라고 자주 확신 있게 말한다, 그가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그의 과거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며 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입시키기 위함이다. 성자(성도)됨을 우습게 여기는 이런 조소의 이면에는 인간됨의 의미를 외면하려 하는 죄책감이 숨어 있다. 반역자인 우리는 성자(성도)를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곧, 성자(성도)란 테레사 수녀처럼 존경을 받을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인간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22)
그렇습니다. 성도(聖徒) 라는 말은 이미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은혜적 호칭을 우리는 마다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참으로 귀한 호칭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면 이 칭호를 듣는 순간, 이 땅 가운데 삶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소망으로 향하게 하는 삼위의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주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 아멘.
‘집사’ 등의 교회 직분명 사용을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직분적 평어로써 고착화되어, 이미 남용되어 있는 오늘의 이 혼란한 시점에서, 필자는 이제부터라도 이상과 같이 2가지 용어인 ‘형제’와 ‘성도’로 각각 혼합하여 부르기를 간곡히 제안드리는 바이다.
끝으로 정리하면, 기독교인의 호칭에 대한 문제는 성도간의 자의적 편의에 의하여 성경말씀의 진리의 깨달음이 없이 무차별함 속에서 분별이 없는 가운데, ‘집사’ 등의 호칭이라는 포장언어로 남용과 오용에서 무의식적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오늘의 이런 풍토는 교회를 위한 성경적 직분의 은사 개념이 부족한 결과에서 나와진 것이며, 필요에 따라, 교회정치라는 제도의 틀속에서 편의적으로 만들어진 비정상아적 타이틀적 직분명인 것이다. 원래, '여호와 증인‘ 이라는 영문의 ’The Lord's Witness' 이라는 말도 기독교인들이 선호하는 좋은 의미에서의 말(개념)이었다. 마찬가지로 ‘보편의 교회’인 'Holy Catholic Chuch' 이라는 말도 같은 개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모두는 하나는 ‘여호와 증인’ 이라는 이단에서, 또 하나는 ‘천주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말씀의 본질이 심히 왜곡되어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변용되어 가는 이 안타까운 현실 목도(目睹)하면서 혹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보배롭고 아름다운 ‘형제’요 ‘성도’ 라는 말을 버리고 다시한번 ‘집사’ 라는 신조어적 명칭으로 우리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레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시점에 우리 모두는 서 있는 것이다.
<글을 쓰고난 후기>
위의 글을 읽고난 후, 몇분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었습니다. 현재 교회가 서리집사라는 제도를 수용하고 있는 마당에 그 직분의 명칭을 문제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직분적 호칭이 ‘성도로 또는 형제로 부르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고 하면, 이는 그들에게만 국한하지 말고 장로와 목사에게서도 그렇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서리집사, 목사, 장로 등등의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비성경적인 서열구조에 해당하는 용어적 호칭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써 ‘형제’, ‘성도’ 라는 용어를 호칭어로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시급한 것은 성경적 교회직분을 바로 앎으로써 교인들의 의식수준을 높여 배운 바의 그 도리(지식)에 확신하는 가운데 교회가 바른 직분적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면, 집사, 목사, 장로 라는 명칭이 교회(예배당)내에서든 교회(예배당) 밖에서든 불리어 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마는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직분(명) 제도는 성도 각자가 갖는 교회(직분)의 의식 수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교회 직분(명)에 대한 교회의 충분한 가르침이 있어야 할 것’ 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성도 각각이 바른 신앙안에 서 있다면 향후, 점진적인 변화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직분명에 따른 호칭에 대한 문제는 성도간 각자의 의식구조에서 갖는 비성경적인 계급구조를 나타내기 때문이고, 살펴본 바와 같이 직분명 자체에 대한 것은 전혀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로서의 직분명은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교회(직분) 인식에 대한 것이 없이 교회내(외)에서 세상적 직위(함)과 같은 성격으로 왜곡되고 변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필자는 우리 모두에게 ‘성도’요 ‘형제’ 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1) 우리말의 예절 204p 조선일보사,국립국어연구원 고려원미디어 출판사
2) 바울서신서의 대부분은 ‘형제들아!’ 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었고, 직분적 명칭은 교회를 위한 각 은사의 적용에서 불리어 지고 있다(에베소서4장).
3)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브리서2장11절).
4)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 제2편 정치, 제8장 집사,권사 제59조(서리집사의 선택)에서는 서리집사는 진실한 무흠세례교인(입교인) 중에서 25세이상 된 자로 당회가 임명한다.‘라고 되어 있다.
5) “현재 한국교회의 서리집사는 회중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 직분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섬기기 위한 직분자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서리집사는 헌법상 교회에서 직분자로 인정받고 있다. 서리집사는 제직회에 참석하여 교회의 중요한 의결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으로 보아 이해하기 어렵다. ”-교회 직분에 관한 바른 이해 -이광호 목사 2004.12.2 총신WBS 특강내용중
6)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 81P - 개혁교회 장로의 봉사 임기 허순길 저. 총회출판국
7) Ibid. “대한예수교장로회헌법 제2편 정치, 제4장 교회의 직원 제23조(임시직)”/ 필자의 견해는 헌법에 나타나는 임시직은 엄밀한 개념에서 항존직과 반대되는 의미가 아닌 것이라고 본다. 이 때의 임시직분은 교회의 터로서(엡2:20,고전3:10,계21:14) ‘사도’,‘선지자’,‘복음 전하는 자’들로서 복음과 교훈의 터를 다 닦은 후에 없어진 직분이다.
8) 에배소서4:11, 행20:28, 딤전5:17, 행6장, 빌1장, 딤전3장
9) ‘평신도신학’ 이란 무엇인가? 칼빈대학교 노재관 교수의 자료실
10) 에배소서 4장 11절~13절, 딤전 3장
11) ‘Ibid. 평신도신학’ 이란 무엇인가?
12) “이처럼 교회는 세 가지 직분 체제를 갖습니다. 하지만 이들 직분이 교회 안에서 계급의 차이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직분은 수평적인 것이며 상호 보완적인 것입니다. 교회에 직분이 있는 것은 기능상의 차이이지 신분상의 서열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서 서리 집사 다음에 안수 집사로, 안수 집사 다음에 피택되어 장로가 되라는 식으로 서열 구조를 허락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주신 직분에 당신의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때 이 권위는 개인적 권세가 아니고 교회적 권세입니다”.
- 장수민 목사의 정치기관으로서의 교회중에서, http://cafe.daum.net/keeper77 글쓴이의 카페주소, 신학에 관한 글(손인락 집사 발췌 정리: 한국교회와 각 세계개혁교회간의 장로제도 비교)
13) Ibid.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헌법 제2편 정치 1장 원리,제3조: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제4장 제2조: 교회직원, 교회의 항존직(恒存職)은 시무기간을 70세까지로 장로, 집사, 권사를 두고 있다.”
14) “천주교회는 1명의 교황(pope) 아래, 178명의 추기경(cardinal)을, 그 아래 대주교(bishop)를 대주교 아래는 신부(father)와 수녀(sister)를 두고 있는 성직자(clergy)와 평신도(layman) 라는 이중적 계급구조를 갖고 있다.”
15) Ibid. “개혁교회의 목회와 생활” 99P. 허순길, 총회출판국
16) “강도사, 서리집사 등 더 이상 불필요한 직분들은 과감하게 폐지할 수 있어야 하며, 공로목사, 원로장로 등 명예직분은 당연히 없애야 한다. 그리고 직분자가 사임하거나 퇴직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반성도로 돌아가야 한다. 특히 목사의 경우 퇴직 후 더 이상 목사 직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아직도 목사라 생각하고 있다면 교회에서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 교회 직분에 관한 바른 이해 - 이광호 목사 2004.12.2 총신WBS 특강내용중
17) 예수님의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권속(형제) 의식은 마가3:35절(내 형제요,자매요,모친이니라), 누가8:21절(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마태28:10절(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요한19:27절(보라, 네 어머니라), 히브리서2:11절(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등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18) 새 성경사전(New Bible Dictionary), 68P. 기독교문서선교회 출판사
19) 에배소서2:19절
20) 베드로전서2:9~10절
21) 에배소서3:14~15절, 베드로전서1:3절, 요한일서3:1절
22) “교회” 에드먼드 클라우니 95P. IVP출판사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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