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알고 있어야 할 교회론


 1.교회관 인식의 중요성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섬기는 신앙인 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가졌을 때 그와의 신비적인 연합에 의해서 그와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진 신앙을 서로 고백하고 그 확인된 신앙 위에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가장 잘 이해하고 알려면 성경에서 가르침을 받으면 됩니다.

성경은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그 말씀은 교회를 말하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해 주고 있는 교회, 그러니까 성경적인 교회를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교회를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관을 확고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관을 바르게 가질 수 있도록 교회에 대하여 저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칼빈(J. Calvin)입니다.


복음의 의식이 있는 몇 몇 사람으로부터 자그마하게 피워져 있던 종교개혁의 불씨를 세상에 크게 일으킨 사람이 루터(M. Luther)라고 하면,

칼빈은 종교개혁을 완성에 올려놓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단지 당시 뜨겁게 일어나는 개혁의 불에 휩쓸려 영웅심리로 종교개혁을 주도해 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해 가시는 진리의 깨달음에 서 있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었기에,

당시 교회가 전통과 제도를 좇아서 생명 없이 외형만 갖추는 전형적인 타락의 물줄기를 타고 있었기에 이를 되돌려 교회의 본질을 회복시키는 사명에서

종교개혁가의 위치에 섰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시무하는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지닌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 위해서 열정을 다 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이 일을 위해서 목사로서의 생명을 다 바쳤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진 교회관을 그가 저술한 책인 기독교강요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강요는 기독교가 가질 신앙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것으로서 그가 어떤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모두 4권으로 되어 있으며, 교회론은 4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정통한 자로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종교의 암흑 시대에 교회의 회복을 위해 그를 준비해 두셨기에 그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우치는 지혜와 지식을 주셨으며,

이 은혜를 입고 그는 진리를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교회론은 기독교강요에 수록된 다른 사상과 함께 사사로이 저술된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어둠에 가리워지고 감추어져 있었던 진리를 해명(解明)하게 해 주셨고

또한 그 자신이 직접 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여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교회에 대한 신앙을 실증적으로 보여나가도록 하신 데

따른 하나님의 섭리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교회관을 살펴보는 것은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가장 많은 도움을 입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쏟아지고 있는 교회론에 관한 책 중에서 대다수가 칼빈의 교회론을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하여 줌으로써

다시금 어둠 상태에 있는 현대 교회에 교회 본질의 회복을 위해서 빛을 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강요 4권 제 1장 1-4항에서 바로 이 부분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의 수로서의 교회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을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토 베버(Otto Weber)가 말한 것처럼 칼빈은 "순수하고 거룩한 교회의 변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사로 사역하기 전에의 신분은 본래 로마 카톨릭의 사제로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로마 카톨릭의 교회 제도에 익숙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가 철저하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대로의 교회를 현실 세계에서 새롭게 세워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제네바에서의 목회는 그런 면에서 그가 앞으로 두드러지게 등장할 개혁교회의 성격과 모습, 방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칼빈은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과 그의 다함이 없는 신실하심 속에서 성령으로 보호를 받으며 영원히 보존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본적인 관점에서 교회론을 다룹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거룩한 하나의 교회를 믿으니, 그것은 보편적으로 선택받은 자의 수이다." "교회는 하나이니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의 수"라는 이 정의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보편적 교회를 뜻하며 이 교회가 보이는 교회로 있는 것이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요,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동일하기 때문에 동질의 거룩성을 지니지 않고서는 교회라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있는 교회 중 많은 교회를 참 교회니 거짓 교회니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 속성인 거룩성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교회의 순수성을 평가하게 되는데 거룩성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생명이 발휘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단의 공회가 되어 있기 때문에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혼잡함과 과오를 범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공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25장 5항). 그렇기에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 또한 교회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어느 교회가 사단의 공회이며, 어느 사람이 참 신자이고 어느 사람이 거짓 신자인가 하는 판단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다만 심판자의 눈으로만 알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현재로는 교회의 지체가 아닌 것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교회가 권징에 의해 어떤 사람을 교회 밖으로 쫓아낸다고 할지라도 그 판단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의 수에서 완전히 분리된 사람처럼 취급하여 실망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칼빈은 보았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의 수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교회를 구성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주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른다면 이 점을 교회는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이며 이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의 수" 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다 함께 교회원으로 있다는 것으로서 이들이 교회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나라와 종족을 초월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기 때문에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택하심에 기인합니다. 이 하나님의 택하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을 하나의 몸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 구성원 모두가 함께 생명력을 발휘하고 자라가야 하는 것이지 어느 일부분만 생명력을 발휘하고 자라가고 나머지는 그러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어느 한 사람을 교회원으로 받아들일 때는 매우 신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의 신앙이 교회의 생명으로 연합할 수 있는 것으로 검증되지 않고서는 결코 교회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로 인해서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교회를 말함에 있어서 "첫째로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의 수인 거룩한 하나의 교회가 있고, 둘째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이루고 있는 교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의 수로 구성된 것이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자들이 각 지역에서 모여 이루는 지상 교회 또한 동일합니다. 이 땅에 있는 각 교회는 천상 교회의 한 부분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 교회는 천상 교회의 현재적 임재 방식입니다. 물론 이때는 그 교회로 모인 자들의 신앙의 정당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3.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공교회

그런데 지상에 흩어져 있는 각 지역의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서 세상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온전한 몸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자라갑니다. 이는 두 가지 개념입니다. 하나는 교회의 각 구성원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까지 그 믿음이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한 모습을 갖게 되기까지 교회가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에 구원받은 자의 수가 충만히 채워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자라감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공교회(가견적 교회)의 필요성입니다. 이미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의 수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을 말하였지만, 이 공동체의 각 지체가 교회로 연합하여 공교회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과연 얼마나 갖고 있느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교회성만 생각하고 공교회를 이루지 않는 무교회주의자들도 있으며, 공교회를 이룰지라도 단지 종교인으로서 갖는 지극히 조직적이고 제도적이며 예배 의식(禮拜儀式)이나 교회적 활동의 방편으로 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공교회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지하고 나태한(게다가 변덕스럽기까지 한) 속성이 있는 고로 우리의 마음에 신앙이 생겨난 후 그 신앙이 점점 돈독해지고 목적을 향해 가는 데에는 외부로부터 도움이 필요하다." 그는 교회원이라면 그 누구도 교회의 보살핌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자라갈 수 없다고 파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원은 끊임없이 교회로부터 양육 받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교회에 전적으로 내맡겨야 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교회원의 믿음의 양육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외적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제 멋대로 살며 장성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잘 양육을 받아 온전한 상태에 이르러 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원을 교회의 양육 아래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원이 교회 이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는 영적으로 자랄 수 없기 때문에 교회에 두시고 그곳에서 양육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어머니가 우리를 태 중에 잉태하여 낳은 후 우리를 밤 낮 가리지 않고 돌보며 젖 먹여 길러주시고, 좀 더 자라서는 교육을 받게 하여 자라게 하시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교회원을 성숙한 신자가 되어 신앙의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를 돌보고 인도하지 않는다면 이 외에 우리가 생명으로 향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교회의 품에 맡기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원은 공교회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평생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공교회로 연합하여 그 속에서 자라 가는 삶을 살지 않는 한에는 우리의 구원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선지자 이사야(사 37:32)와 요엘(욜 2:32)이 증거하듯이 사죄나 구원을 바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누구든지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확실해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영의 양식을 업신여기는 자마다 영적으로 굶어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에스겔도 하나님께서 경건한 생활로부터 내어 쫓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들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겔 13:9). 또 그 반면에 참된 경건으로 돌아오는 자들은 예루사렘의 민족 중에 등록될 것임을 이사야 56장 5절, 시편 87편 6절은 말씀합니다.


칼빈은 교회로서의 생명을 지닌 자와 공교회와의 관계성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기를, "하나님이 성부로 여겨지는 자들에게는 또한 교회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관계적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도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입니다.

공교회가 성도의 어머니로 있는 관계는 성도의 양육을 위하여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에게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세우시고(엡 4:11), 그들이 맡은 직분의 임무를 충실하게 잘 수행하여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도록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일은 교회의 이중적 사명의 한 측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하여 교회에 목사를 세우시고 천국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구원 얻은 자들이 믿음에 있어서 진리 안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일치되어 가며 바른 질서 속에서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중에 더욱 온전히 자라가게 하기 위해서 목사요 겸하여 교사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에 다양한 직분을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서 목사와 교사의 직무가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갔는데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를 돌보아 보살피는 것과 함께 가르쳐 기르는 의무와 그 권리가 공교회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교회의 교육 아래 두셨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여 교육의 목표인 장성한 자의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목사는 천국의 교리를 설교하는 직분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전부 다 온유한, 또 순전한 정신을 가지고 이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도록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교회에는 목사와 교사 외에도 장로와 집사가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도록 감독하고 섬깁니다. 이 모두는 공교회가 성도의 어머니의 위치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있는 일입니다.


4. 신앙의 영적 교제가 있는 곳으로서의 교회

성도는 (공)교회의 품에서 양육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성도간에 신령한 교통(交通)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간에 신앙의 영적 교제가 활발 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는 형제들간에 우애 있는 사귐이 있듯이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을 하게 하시는데 곧 믿음의 형제와 자매에게로 이끌어서 신앙의 영적 교제를 갖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십니다.

이 성도의 신령한 교통은 교회의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로 삼는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회"를 믿으며 또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신령한 교통은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로 세운 이 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우리가 진리 안에서 성장하며 피차 일치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시고 서로 사귐을 갖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인 지체 개념에서 그 의미가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지체 개념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성도의 교통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몸의 성격을 띠는 것은 성도간에 친밀한 연합을 갖는데서 있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로 모임을 갖고서 서로 같이 있다는 데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 각 사람에게 주신 그 다양한 은사가 서로 사귐을 갖는 이 실질적인 성도의 교통으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성도의 어머니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것은 필수적으로 결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의 유일한 아버지이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확신한 사람들은 형제애로써 함께 결합되며 유무상통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성도가 교회의 품에서 양육을 받으며 또한 성도간에 교통을 가져 신앙의 영적 유익을 얻는 것은 상호 의존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인 성도는 독립적이나 독자적이지는 않습니다. 각 지체는 서로를 돕고 의존하면서 공존합니다. 이것이 유기적인 생명체의 특성입니다. 교회는 단지 조직체가 아닌 유기체입니다. 조직체는 공동체에서 홀로 떨어져 나가 있어도 존재하지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유기체는 생명이 없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이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고서 그 안에서 상호질서(相互秩序)를 가지고서 상호의존(相互依存)합니다. 교회의 질서와 다스림이 있고 상호 협력과 섬김이 있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을 받았으며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소망도 하나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한 분이며,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입니다.


또 우리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우리 모든 지체들을 꿰뚫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이십니다"라고, 그리고 15-16절에서는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따라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휘에 따라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 지체는 각기 다른 지체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 온몸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현대어 성경). 모든 성도는 교회의 품에서 양육을 받으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상호질서 속에서 상호의존하며 협력적 관계에서 한 몸으로 성장해 가는 생명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5. 성교회

교회를 우리는 "성교회"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이란 교회의 속성 차원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는 죄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인 만큼 죄와 상관없는 삶,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의로운 삶을 사는 것에서 그 거룩성을 볼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교회의 거룩성, 곧 교회다움은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에게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 그러니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 부르심을 받아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고 교회의 품에서 양육을 받으며 성도간에 신령한 교통을 갖는데서 보게 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