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문제점과 해결 과제


권위주의, 상업주의, 이기주의를 중심으로 

  
글 / 이오갑 (조직신학)

한국 교회는 백여 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성장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종교들 중의 하나로 자리잡았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도시의 곳곳마다, 건물마다 교회의 첨탑이 들어서 있고, 시골에도 면 단위, 리 단위마다 교회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서울의 아무 아파트라도 들어가 보면, 한 집 걸러 소속 교회를 알리는 표찰이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될 정도로 교회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참고. 금년 초 교회연합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개신교의 교세는 예장 통합, 합동, 기장, 고신, 기감, 기성 등 24개 주요 교단의 교인수가 1천340만 명, 교회 수는 4만2천293개, 목사 수 5만4천242명이라고 한다. 동 신문은 주요교단 외의 140여 개 군소 교단의 교세까지 합치면 교인 수 1천500만 명, 교회 수 5만 명, 목사 수 6만 명 정도로 계산하고 있다 이 같은 수치는 각 교단의 발표치에 근거한 것으로서 허수 및 과장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남한 인구 5천만명의 약 30%에 이른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인 1500만명” 2001년 1월 14일자 기사.

한국 교회가 이렇게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기까지, 신앙의 선조들이 각고의 노력을 다 해온 것도 사실이다. 구한말 전래된 이래로 교회는 민족의 수난을 외면하지 않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민중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암울한 사회를 계몽하고, 교육과 의료, 학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70년대 이후에는 사회의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기도 하는 등 역사발전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현재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것들은 감소되고 종식되기는커녕 더욱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교회의 여러 통계조사들을 보면, 개신교는 일반인들에게 주요 종교들 중 가장 나쁜 인상을 주고 있으며, 국민일보 1999년 5월 10일자에 실린 통계조사. 일반인들이 종교를 가질 경우 선택하고 싶은 종교는 기독교 22.3%, 가톨릭 37.4%, 불교 40.3%로서, 기독교가 가장 저조한 선택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성장의 감소와 영향력 감퇴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향신문 1999년 10월 3일자. 여기서 예장 합동, 통합, 기장, 대신, 합신, 기감, 기성 등 개신교 주요 7개 교단은 1998-99년도에 교회의 숫자는 559개 증가한 반면 교인 수는 9857명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인 수는 감소한 반면 교회 수만 증가하는 현상은 한국 교회가 그만큼 기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동환 [교회 거품빼기] 서울, 나침반, 1998,13-15 참조.
근래에 매스컴에 보도된 것들만 봐도,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목사들과 교인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우려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연 한국 교회에 미래가 있는가? 한국 교회가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그것이다. 아마도 한국 교회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럭저럭 미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한국 교회는 점점 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생각과 생활을 가진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교인들만의 특이한(?) 집단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이 크다. 그만큼 한국 교회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고, 이제는 그 위기를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현실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것들의 문제점들을 파악하며, 더 나가서 그 해결 방안들을 찾아보는 일은 더 이상 늦춰질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의 비판적인 작업으로서, 한국 교회를 엄격하고 냉정하게 보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자들의 어머니”인 교회를 비판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일반 교회가 아니라, 우리가 바로 거기를 통해 생성되었고 우리의 신앙과 실존이 직접 매개되어 있는 “우리” 한국 교회 아닌가.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한국 교회에 책임적일 수밖에 없고, 그 만큼 더 교회를 참되고 아름답게 이뤄나가야 하는 과제를 떠 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특히 여기서는 권위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이기주의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그 문제들이 한국 교회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 외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고, 또한 그것들은 서로 결부되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어떤 것으로부터든지 들어갈 수 있고, 그리고 어떤 것으로부터 들어가든 결국은 근본 원인이 되는 한, 두 가지 문제로 귀착된다고 추정된다. 그 근본 문제가 어떤 것인지 미리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결국은 개별적인 문제들을 차근차근 살펴본 뒤에야 더욱 잘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중요하게 보이는 현상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현재를 보고 미래의 좌표를 찾는 우리의 비판적 작업이 주로 세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수행하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1. 권위주의

작년에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 세습문제였다. 예장 합동 측의 대표적인 C교회에서는 이미 담임목사가 은퇴하면서 아들에게 목사직을 물려주었고, 감리교의 K교회 역시 아들에게 승계하기로 결정했다. 통합 측의 S교회는 직접적인 승계는 아니지만, 아들에게 신도시에 교회를 설립해주는 방식으로 지원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크고 작은 교회에서 이미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준 바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교회 세습이 가능한 것은 우리 한국 교회의 독특한 권위주의 구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 교회는 과거 수직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의 유습 때문인지 매우 권위주의적인 양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담임목사 1인 중심의 교회체제를 가지고 있고,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마치 목회의 전부인 양 노력하고 있다. 가령 중소 교회들은 목회자들이 가급적 (또는 최대한) 장로를 안 세우려고 하고, 심한 경우 “장로를 안 세운다”고 공표하거나, 후배 목사에게 “세워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는 일까지 있다. 담임목사의 지도력이 확고한 대형교회들 역시 체제나 행정을 철저하게 목사 1인 중심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모든 권한이 목사 1인에게 집중되며, 담임목사에게 순종적인 사람들만 장로나 제직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각종 회의나 기관들은 요식 행위와 절차로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풍토 속에서는 부목사가 “담임목사 한마디에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가르쳐주는(?) 일까지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신문 취재팀 편, [韓國敎會의 虛와 實 (1)] 서울, 쿰란출판사, 1993, 22.


그런 식으로 길들여지고 체질화된 구조 속에서는 담임목사가 은퇴할 나이에 이르면 얼마든지 자기 아들에게, 혹은 자기가 물려주고 싶은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구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민주적인 구조 속에서, 민주적인 투표와 절차를 거쳐서 후임자를 선정한다면, 그가 아들이건 아내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고, 도대체 시비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권위적인 구조 속에서는, 아들에게 물려주는 일은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밖에는 비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교회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현재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특히 교회내의 모든 갈등과 분쟁,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다.


지방의 한 면 소재지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인이 100여명 되는 교회로서, 교인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면에서 소규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목사가 승용차를 고급으로 바꾸는 문제를 빌미로 그간 목사의 전횡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교회는 목사측과 반대측으로 갈려서 대립하다가, 결국 반대 쪽 사람들이 쫓겨 나간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불미스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사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가 목사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시 같은 곳의 역사가 깊은 교회들은 오히려 장로와 당회의 권위가 목사의 권위를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장로들이 오너이고 목사는 고용사장이라는 얘기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실제로 당회가 목사의 건강하고 소신 있는 목회를 방해하는 일이 흔하다. 또한 목사가 능력 있어서 교인들의 지지를 획득할 기미가 보이면 미리 트집을 잡아 쫓아내는 일까지 일어난다. 요즘 김동호 목사의 [생사를 건 교회개혁] 서울, 규장출판사, 1999.


이라는 책이 교계에서 회자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거기서 “생사를 걸었다” 함은 장로들에게 쫓겨 날 각오를 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정도로 장로들의 권세가 막강해서, 목사가 옳은 일을 못하고, 바른 말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김동호 목사 등 여러 개혁적인 목회자들이 주장하듯이 “목사들도 임기제 하고, 장로들도 임기제 하자”는 제안이 나오게 되었다. 임기제를 기피해야 할 기득권층인 목사들 입에서 “임기제 하자”고 나올 정도니까 장로들의 위세가 얼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교단 수준에서의 권위주의 역시 심각하다. 그 권위주의 때문에 교단이 갈라지고, 어느 날 갑자기 없던 교단도 생겨난다. 가령, 총회장이라는 권위를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심지어는 일억이나 이억 원의 돈을 뿌린다는 얘기까지 심심지 않게 들린다. 그런 풍토를 방지하기 위해 선거공영제를 시행하는 교단도 있지만, 얼마 전 어느 장로교단은 총회장과 총회 임원들을 제비뽑기로 선임하기로 했다는 보도까지 나와 있다. “제비뽑기, 최선의 선거방식 아니다” 기독교연합신문 2001년 1월 14일자 기사 및 동 신문 기고 고영민, “제비뽑기는 우상숭배자들의 주술적인 방법” 참고.


제비뽑기는 선거과열과 금전살포 및 수수의 폐해로 인해 거룩한 교회가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하겠지만, 임원들을 인물과 능력에 따라 뽑는 민주적 선거를 살리는 방안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하겠다.


군소 교단들 중에는 총회장 선거 때문에 교단이 분열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자신의 계파가 총회를 장악하지 못할 경우 분리해 나와서 아예 자기들끼리 교단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수 수십 개에 불과한 교단들이 부지기수이고, 심지어는 열 개미만의 교단들도 적지 않다. 이익이나 권력집단이 아닌 교회에서, 특히 실체도 별로 없는 군소 교단에서 총회장이나 임원을 해봐야 별다른 실익이 있을 수 없다. 또 엉터리 같은 방법으로 장(長) 자리에 올라가 봐야 그렇게 명예로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총회장이나 임원을 하면 권위가 있는 것 같이 여기는 풍토가 한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우스꽝스럽게까지 만들고 마는 것이다.


권위는 자신이 권위자가 되려고 하거나 권위자연 하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예수는 그런 사람들의 권위를 우습게 만들었다. 오히려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권위를 보고 놀랐다. 그들은 전혀 권위가 없을 것 같은 예수에게서 오히려 권위를 발견하고 “저 사람의 권위가 어디서 나오는가?” 라고 물었던 것이다. 권위는 지위나 명목, 형식에서가 아니라 실제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럴 때의 권위만이 참다운 것이고, 그 외의 권위들은 허위에 근거한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이다. 그것은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에서 조롱한 성직자들의 권위, 혹은 우리 민속탈춤 같은데 등장하는 말뚝이가 조롱하고 풍자하는 헛껍데기 양반들의 권위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본질은 낮아짐에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성립자체가 하나님의 인간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 말씀이 시사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겸비와 자기비움의 존재이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 혹은 존재 의미도 바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승리는 로마의 승리, 로마의 평화와 정확히 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겸비와 봉사와 희생에서 비롯된다.


예수의 가르침도 그것이다. 그는 “누구든지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겠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했다. 또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겠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겠다”고도 했다. 이 말에 대한 믿음이 절실히 요청된다. 한국 교회는 믿음이 너무 없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내가 먼저 잘해주면 남들도 내게 잘해준다는 믿음 말이다. 내가 먼저 낮아지면 남들도 낮아지고, 내가 먼저 인정하면 남들도 나를 인정해주고, 내가 허명을 좇지 않고 묵묵히 내 일을 하다보면 그것으로 인해 받을 영광이 있다는 것을 왜 안 믿는지 답답하기 그지 없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믿음, 혹은 사람들에 대한 그런 믿음이 있다면,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지금처럼 그렇게 높아지려고 하고, 남을 이기려고 하고, 권위이건 실리이건 모두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는 욕심 사나운 행태는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권위는 권위를 갖고자 하는데서 얻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갖지 않고자 하는 데서 얻어진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실제를 취하는 일과 동일하다. 기독교의 실제, 즉 먼저 낮아지고, 남들을 섬기는 종의 도를 취하는 일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길이고 기독교인의 길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 예수의 호소이자 요청이었다. 그 말씀을 잘 따라 자기부정과 겸비와 봉사의 길을 가는 사람이 바로 참다운 신앙과 인격과 삶과 능력을 인정받고, 따라서 권위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권위만이 참다운 권위이다. 교회에서 어른 노릇을 하고, 헤게모니를 잡고, 교단장을 한다든지, 임원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참다운 권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한국교회와 같은 권위주의적 풍토 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불명예나 오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원래 기독교에는 권위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예수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낮아지고 사랑하는 데 있지, 자신의 권위를 높이거나 도모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태두가 되는 종교개혁의 전통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교개혁은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종교개혁 정신에 따르면, 성직은 특별한 신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이고, 기능일 뿐이다. 그래서 권위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외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지원용 역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서울, 컨콜디아, 1997, 32-33.


이 말은 성속의 구분이 분명하고, 교직제도가 엄정한 당시 교회로서는 혁명적인 발언이다. 그처럼 개신교는 성직을 직무나 역할, 혹은 기능으로써만 이해한다. 목사나 장로는 교회에서 그 일을 수행하는 종사자인 것이다. 내가 프랑스 Institut Protestant de Théologie(몽뻴리에 및 빠리 신학대학, 이하 IPT)에서 유학하던 시절 있었던 에피소드이다. IPT는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의 개신교(개혁교와 루터교) 목사들을 양성하는 학교로서 개신교 전통에 철저한 곳이다. 그 곳의 조직신학 주임교수는 나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앙드레 구넬이었다.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 중의 한 명이 구넬에게 “목사님”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구넬은 “나는 목사가 아니다. 목사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처럼 목사는 교회에서 목회를 해야 목사이지, 농사를 짓거나, 사업을 하거나,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하면 목사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것이 개신교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식으로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 한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 라는 말은 목사직이나 장로직의 위중(危重)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이해가 가지만, 진짜로 그렇게 여긴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가령 그 말이 성립되면 “한번 거지는 영원한 거지이고, 한번 창녀는 영원한 창녀이며, 한번 도둑은 영원한 도둑”이란 말도 성립되지 않는가? 일본으로 날아간 조(趙) 모(某)씨를 보니까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처럼 비인간적인 생각은 없다. 그것은 결정론적일뿐더러 운명론적이기까지 하다. 개신교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과는 공존할 수가 없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 앞에 열려진 존재이다. 그래서 그에게 결단과 책임을 촉구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그래서 선교와 교육과 목회가 가능한 것이다. 개신교적 의식과 삶 속에는, 목사였다가도 아닌 것 같으면 깨끗이 떠날 줄 알고, 장로였다가도 아니라면 다시 평신도로 백의종군하는 유쾌함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신학, 그런 사고 방식을 현실화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를 타파 하고, 참된 기독교를 세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좀 더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방안으로 다음의 세 가지 점을 제안한다.


첫째는, 안수식 또는 임직식 자체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목사 임직 뿐만 아니라 장로, 권사, 안수집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례 예배 시간에 선포와 기도,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임직이 완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래 개신교에는 목사로 임직하기 위한 특별하고도 거창한 의례가 없었다. 심지어는 안수도 하지 않았다. 가령 이후 개혁교회의 기초가 되는 1541년 쥬네브 교회법을 보면, “이전 시대의 의식들이 숱한 미신들로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목사들 중 한 명이 선서를 하고, 이어서 기도와 축도를 하는” 것으로 목사 임직이 끝난다. "Ordonnance de 1541" in Calvin, Homme d'Eglise, Paris/Genève, "Je sers"/Labor, 1936, 30.


실제로 칼빈 역시 따로 목사 안수를 받은 적이 없으며, 쥬네브 교회에 부임하는 것으로써 목사가 되었을 뿐이다. 프랑스 개혁교회에서는 안수나 안수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신학대학에서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노회로부터 임지를 배정 받아 부임하는 것으로 목사가 되는 절차는 모두 끝난다. 미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나 침례교회 같은 상당수의 교회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임직하고 있다.


목사직이 거룩한 직책이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그 거룩성과 권위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안수식과 안수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율법화, 또는 그렇게 해야만 목사가 된다는 식의 미신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안수식을 하기 위해서 금전을 요구하고, 지불해야 하는 병폐들도 암암리에 나타나고 있다. 즉 교계 일각에서는, 목사 후보자가 임직식에 순서를 맡거나 자리를 빛내줄 유력한(?) 이들의 거마비를 위해 사전에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는 것이 통례화되고 있다. 목사가 무엇이기에 거액의 돈까지 내면서 안수식을 해야 하는가? 목사 되는 것이 그렇게 특권적이고, 장래가 기대되는 일인가? 그런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어도, 복잡 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안수식을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행사하고, 헌금과 선물을 받고, 식사를 대접하는 번거롭고 거창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가? 귀중한 교회의 사람과 시간과 헌금이 그렇게 낭비되어야 하는가? 그런 의문과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목사와 장로의 임기제를 시행하자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목사나 장로가 임기가 없음으로 해서 빚어지는 문제가 심각하다. 가령 목사들은 임기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 언제 쫓겨날 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인들이나 장로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우수하고 유능한 목사라도 일, 이 년 만에 쫓겨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목사들은 그 때 그 때 교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다. 그 경우 그저 통념에나 맞는, 남들이 해서 문제가 안 됐던 식대로만 하는 몰개성, 무사안일주의라든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교인들의 구미와 취향에 맞춰나가는 천박한 인기주의, 대중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목사들이 교회를 사당화(私黨化)하여 영구집권체제로 이끌어나가게 되는 것도 임기제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경우 목회는 다름 아닌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교인들을 키우는 일이 된다. 그래서 목사는 일인 지배체제를 위해 비판적인 인물이나 세력을 쫓아내는 일도 불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알력과 분쟁, 분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장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장로들이 임기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장로들의 구성체인 당회 같은 데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목사도 그렇고 교인들도 모두 당회원을 어른으로 모시는 권위적 구조가 세워져있다. 교회들은 이제 섬겨야 하는 이들이 섬김을 받는 기형적인 모습이 되었는데, 정작 교회인들은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장로로 한번 선출된 다음에는 군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현행 제도의 문제점 때문이다.


목사, 장로 임기제를 말하는 데 있어서 흔히 묵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목사와 전도사의 임기제이다. 물론 이들에 대한 임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로교 통합과 합동 측 등 대부분의 교회에서 그들의 임기를 1년으로 못박아두고 있다. [韓國敎會의 虛와 實 (1)] 237-238.


그러나 그것은 참다운 의미에서 임기제가 아니다. 부목사나 전도사는 언제든지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의 법적 확인일 뿐이다. 그런 제도 속에서는 전도사나 부목사는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이 된다. 목사의 비서나 교인들의 심부름꾼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묘한 관계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부목사나 전도사 중에는 한 곳에서 장기간 근무하는 경우도 있지만, 임기나 겨우 채우고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부목사와 전도사는 신학교에서 6년 혹은 7년 이상 수학한 전문인이고, 장래 한국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이끌어 갈 주역들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 교회의 유급직원으로서, 일정한 역할과 책임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일한 것의 성과가 나올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하다. 즉 그들을 일년의 짧은 기간 속에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임기도 담임목사의 임기에 동일하게 하거나, 근접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군다나 부목사에게도 가족이 있고, 취학하고 있는 자녀들이 있지 않은가. 생활의 안정과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일정기간 임기를 보장해주는 일이 필수적이다.


임기제는 교회의 권위주의 타파와 민주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이다. 일부기득권층이 자신의 권익에 치우쳐서 한국 교회 전체의 개혁과 갱신을 늦추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금년부터라도 각 교단 총회를 중심으로 목사, 부목사, 전도사, 장로 임기제를 도입하려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조치들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임기제만이 목사들로 하여금 보장된 임기 속에서 소신 있고 안정되게 목회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언제나 노력하고 발전해나가는 목사상을 갖게 해준다. 장로들이 공동체를 위해 언제나 바르고 겸손하게 봉사하게 되는 것도 바로 임기제를 통해서이다. 이것의 도입을 미룰 이유나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셋째는, 원로목사 혹은 명예목사 제도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현재 이 제도는 한 교회에서 장기간 봉직하고 은퇴하는 경우 그 교회에서 원로목사나 명예목사로 추대하여, 노후 생활을 담당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평생 교회를 섬기고 헌신한 은퇴 목사와 그 가족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조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개교회의 사정과 수준에 따라 차이가 많고, 심지어 어떤 교회는 원로목사로 추대하는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기간을 채우지 못하도록 사전에 퇴임시키는 경향까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목사의 문제는 개교회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라, 교단 차원에서 더 정밀하고도 합리적으로 은급나 연금이라는 형식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실 원로목사나 명예목사제도는 불필요하고, 결국은 은퇴한 목사에 대한 대우 규정 속에서 일원화될 것이다. 혹시 특별한 공로가 있다면, 목사는 대부분의 교단의 경우 개교회가 아니라 노회나 연회 소속이므로, 그곳에서 공로를 기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목사의 공로나 명예가 개교회로부터 받는 퇴직금이나 노후생활비와 결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은퇴한 목사는 그 교회를 완전히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교회는 원로목사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점들이 많기로 유명하다. 목사가 은퇴한 뒤에도 그 교회에 남아서 신임 목사의 목회에 개입하고, 오랜 정에 묶여 있는 교인들과 접촉해서, 결국은 신, 구 목사 간의 갈등으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그런 경우 대개는 원로목사의 승리로 끝나지만, 원로목사가 있는 교회의 후임목사는 “3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로 양 목사간의 갈등은 심각하고, 대부분 후임목사가 쫓겨나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Ibid., 248.


그런 갈등을 보는 은퇴를 앞둔 목사들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지” 않기 위해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일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은퇴한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목사는 직무이고 기능이기 때문에, 그 일에서 떠나면 더 이상 목사일 수가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우상 혹은 관례상 은퇴한 뒤에도 “목사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본인은 더 이상 목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목사는 다른 사람이 목사이고, 자신은 완전한 평신도로 돌아간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의 정리(情理)상, 교인들은 오랫동안 친숙하고 존경해왔던 원로 목사에게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다. 신임목사를 원로목사에게 비교하면서 평가하게 되고, 불만을 갖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목사가 은퇴한 뒤 교회에 계속 남는 일이 없도록 제도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즉 은퇴목사는 그 교회에 출석해서는 안 된다든지, 그 교인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져서는 안 된다든지, 혹은 미국의 모 교단과 같이 교회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법적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권위직도 아니고, 명예직도 아니다. 목사가 삼, 사십 년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주의 종으로서 영광스러운 일이고, 본받을만한 일이다. 그러나 은퇴한 뒤에는 목사들 스스로가 평인으로 돌아가고, 야인으로 돌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것이 아예 풍토화되고 일반화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목사”에 “원로”까지 합쳐진 최고의 권위로써 교회를 마치 자기 교회처럼 행사하는 권위주의의 폐해를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2. 상업주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또한 상업주의이다. 상업주의란 상업적인 목표로써 모든 것을 이끌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즉 상업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상업행위는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 좋게 말하면 “너도 좋고 나도 좋으려는” 것이 상업이다. 그러나 상업은 궁극적으로는 이윤을 통해 자신이 잘되는 것이다. 상업의 목적은 자신이 더 많이 팔고, 더 번창하고, 더 큰 부를 이루는 것이다. 상업주의는 그런 상업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다. 더 나가서는 상업에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고, 부를 획득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 바로 그런 상업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회의 설교와 교육과 선교 등 모든 활동이 마치 하나의 상업행위 같이 되고 말았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러나 여러 가지 사례들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한국 교회의 상업주의 경향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현재 교회는 복음을 팔고 있고, 팔아야 하고, 팔리지 않으면 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판단일 것이다. 

   
이런 예가 있다. 한번은 신장개업을 한 식당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식당이 마치 운동장 같이 넓어서 주인에게 “식당이 왜 이렇게 크냐”고 물었다. 주인이 대답하는 말 “요즘은 식당이 크지 않으면 손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똑같은 얘기를 새로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에게 들었다. 교인도 없는데, 그리고 내가 알기로 형편도 아주 어려운 목사인데, 교회당은 50평이 넘는 상가를 얻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임대료 걱정이 되었다. 교회를 시작했다가 임대료를 못 내서 2층에서 지하층으로 내려갔다가, 결국은 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나와 강대상이며 장의자 같은 비품들 놓아둘 곳을 찾아다니는 경우를 몇 차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염려 때문에 나는 “우선은 한 20평정도만 시작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 목사의 대답이 “요즘은 교회를 크게 해야 사람들이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가난한 목사가 희생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크게 개척해야 하는 절박한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가 사람들을 오게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람들을 오게 하기 위해 다 쏟아 부어야 하는가. 심지어는 목사의 개인 전세금마저 다 집어넣었다가 까먹는 일도 있는데, 그 뒤에 어떻게 재기할 수 있을까.


절박하고 가슴아픈 예지만, 나는 거기서 교회의 상업주의의 한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식당이나 영업장이 손님들을 끌기 위해 크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게 꾸미는 것 아닌가? 손님을 받아야 헌금을 받고, 헌금을 받아야 교회가 유지되고, 교회가 유지돼야 교역자들이 안정되고 좋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 조건 속에서 교회가 차량들도 운영할 수 있고, 직원들도 채용할 수 있고, 독립 건물을 건축할 수도 있고, 기도원이나 수양관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교회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올바르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목회한 결과로써 이뤄지면 좋은 일이고, 안 이뤄져도 상관없는 일 뿐이다.


교회의 목표가 숫자를 늘리고, 건물을 세우고, 차량을 운행하고, 수양관을 짓는 데 있다면,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에 최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와 목사들이 바로 그것을 목표로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정도로 한국 교회는 상업주의화 되고 만 것이다. 

 
그런 상업주의는 한국 교회를 망쳐놓는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이다. 상업주의는 목사들도 망가뜨리고, 교회도 망가뜨리고, 심지어는 복음과 진리마저도 망쳐놓는다. 그래서 결국은 한국 기독교와 기독교인 전체를 왜곡시키고, 기독교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게 된다.


모 광역시의 한 목사는 설교로 교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가 인기의 비결을 가까운 목사들에게 털어놓은 일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J와 K 등 두 명의 목사의 설교 유형과 방법, 동작, 억양 등을 철저하게 연구 분석해서 소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때는 많은 목사들이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를 거의 그대로 본뜨다시피 설교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이 아닌데도 경상도 사투리로 설교하는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목사는 말씀을 연구하고, 거기서 현재 공동체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명과 책임을 갖는다. 목사의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에 비추어서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죄와 오류와 무력함을 보게 하고,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래서 자유와 생명을 얻게 하고, 참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도 다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목표이다.


그래서 목사는 항상 더 겸손하게 연구하고, 기도하고, 성령의 깨우쳐주는 역사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의 마음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할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설교를 들으러 오게 할까, 어떻게 하면 은혜 받게 할까...” 하는데 기울어져 있으면, 그 목사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에게 잘 팔리는 말씀의 장사꾼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고 목사의 사업은 성공을 거두는 일이다. 그런 풍토 속에서 설교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말씀은 감춰지고 사람들이 듣고 싶은 얘기들로만 일관되는 만담 내지는 이런 저런 교훈담이 되고 만다. 거기에 기독교의 무슨 생명이 있을 것이며, 무슨 능력이 있을까. 상업주의는 기독교의 중심을 망가뜨리는 마성적인 오류일 뿐이다. 

 
목사들의 설교뿐만 아니라 목회의 여러 가지 활동들 역시 상업주의에 물들어서 기독교의 참 모습을 왜곡시키고 있다. 교회는 하나의 교회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여러 개의 교회들로 존재한다. 즉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우주적 교회와 지역적 교회의 긴장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요는 각 교회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신학과 특색과 방법을 포함한 나름대로의 문화를 가지고 있고, 또 가져야 한다. 개신교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서 지역교회들의 다양성을 폭넓게 인정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령 깔뱅은 교회의 표지 문제를 다루면서, 성례전과 말씀이 올바로 시행되는 한 모두 정당한 교회로 간주해야 하며, 그 둘 외의 어떤 다른 것을 엄격하게 판단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분란을 가져오는 일을 경계했다. Institution 1559/60, IV, 1/9, 12.


그런데 한국 교회들은 상업주의의 폐해로써 나름대로의 전통과 문화를 잃어버린 쓰라린 손실을 겪었다. 그런데도 그 손실을 손실로서 느끼지도 못하는 무감각한 마비상태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 교회는 “누가 해서 잘됐다” 하면 곧바로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초기 부흥회 운동은 일제 치하의 민중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면서, 많은 사람들을 복음화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길선주 목사나 김익두, 이성봉, 박재봉 목사와 같은 초기 부흥사들은 순수한 열정과 희생으로 민족을 복음으로 이끄는 데 최선을 다한 분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부흥회도 상업화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완상 편,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가]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48.


부흥회를 하면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고, 재정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장로나 교인들 사이의 알력 같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등 일석삼조로 간주되면서 부흥회가 부흥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60년대 이후 순복음 교회의 성공으로 자극을 받은 한국교회는 말씀 중심의 차분한 사경회가 아니라 열광적인 형태의 부흥회가 주도하게 되었다. 더 나가서 그런 형태, 그런 분위기는 부흥회를 넘어서 일반 예배까지도 침범했다. 그래서 대예배시에도 통성기도를 하고, 박수치며 찬송하는 교회들이 늘어났다.


심지어는 전통적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예배를 자랑했던 장로교회들도 거의 순복음인지 장로교인지 모를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날 장로교 예배의 깊은 영성과 신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말씀 중심의 조용하고 이성적인 그리스도의 교회 같은 경우도 통성기도를 한다거나, 밴드를 동원해서 열광적인 찬양을 하는 예가 많아졌다. 그 교회의 아름다움, 그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복음의 해석과 삶의 방식을 우리는 이제 어디서 찾을 것인가? 장로교회는 장로교회대로, 감리교회는 감리교회대로, 루터교나 성공회, 구세군, 그리스도의 교회... 그 모든 교회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선조들이 열성을 다 바쳐서 세웠고, 자신들의 삶과 마음을 거기에 담아왔던 자기들의 교회를 상업적인 이유에서, 돈이 안 되고 사람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 손쉽게 내버릴 수 있는 것인가.


부흥회뿐만 아니라 경배와 찬양, 제자훈련 등의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 역시 기존의 한 두 교회에서 성공하면 자기 교회의 조건이나 특성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따라하는 것들의 사례이다. 몇 년 전에는 빈야드 집회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쓰러뜨리는” 집회로 알려진 그 운동을 국내 목사들이 카나다까지 건너가서 서로 먼저 배워오려고 경쟁을 벌였고, 그 결과 우리 나라에서도 “쓰러뜨리는” 집회가 확산된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카나다 연합교회 총회장을 역임한 이상철 목사와의 한 대담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떤 젊은 목사가 토론토에 와서는 “빈야드를 배우러 왔다”고 하면서 “지금까지는 써먹을 것 다 써먹었는데 하나도 들어 먹히는 것이 없으니까 이제는 빈야드를 배워서 얼마간 써먹어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상철 목사와의 좌담” [말씀과 교회] 11호(1996년 11월) 84-85.

최근에는 상업주의에서 가장 악질적인 피라미드식 판매 조직기법까지 받아들여, 교회의 구역이나 조직들을 다단계 판매조직과 같이 운영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심포지움 - 21세기와 한국교회”의 참석자 손규태 교수와 김경호 목사의 지적, [신학사상] 110호, 2000년 가을, 15, 25.


가령 이런 증언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을까. “어떤 대형교회에선 약 70명의 전도인을 두고 있다. 대부분 이들은 성서학원이나 신학교를 거치지 않은 평신도 출신이거나, 2-3개월의 전도훈련만을 마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담임목사 단독으로 선발한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교구담당전도사로서, 심방과 전도를 통하여 새 신자를 끌어들이는 일이다. 이들은 타 교회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자기 교회와 담임목사를 선전하면서 새 교인을 무조건 끌어들인다. 또한 신유, 축복, 평안, 출세, 성공, 소원성취가 자기 교회에 오기만 하면 쉽게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응답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이렇게 해서 일정기간에 교인수가 증가하면 월급에 약간의 보너스가 가산되고, 반면에 교인수가 줄거나 정체되면 당회의 결의도 없이 당회장의 말 한마디에 해직되고 만다...” 강성두,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교회연합신문, 2001년 2월 4일 시평. 문장은 다시 다듬은 것임.

그와 같이 잘 팔리는 물건을 갖다 놓고, 많이 팔아야만 한다는 식의 상업주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팔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저급한 상업주의가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복음과 진리에 대한 순수성도, 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는 자기부정의 십자가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교회가 잘되기 - 세속적인 의미에서 -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는 교회, 사람들을 모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모으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와 행태가 지배하는 교회, 그래서 “꿩 잡는 게 매다”는 식의 목회로 일관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 존립할 수 없다. 그것은 외형만 교회이지 사실상 기업이나 상업체로서, 목회가 아니라 마케팅이고, 목사가 아니라 경영자이며, 임직(안수)증은 사업자등록증이나 개업면허라고 해야할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들이다. 복음은 값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짜(gratuit)이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이 은혜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는 사람들은 감격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우리 개신교의 출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난 자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예배하고,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자발적으로 사랑하고, 자발적으로 헌금하고,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데서 교회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대가 없이 주셨다. 교회 역시 대가 없이 주는 곳이다. 말씀을 주고, 은혜를 주고, 사랑을 주고, 자유를 주고, 참된 삶의 기쁨을 주는 곳이다. 그러면 교회는 된다. 아니, 그래야 교회가 된다. 교회가 대가를 기대하기 시작하면 벌써 그 교회는 상업적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대가를 목표로 무슨 일을 계획한다면 벌써 상업주의가 된다. 현재 교회들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 교회만은 그렇게 안 한다”는 신념이 요청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바로 이 말씀이 상업주의의 대로를 가는 한국 교회에 던져진 주님의 말씀이 아닐까. 

         
교회가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사람들이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힘과 돈과 열성을 모아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의 목표를 위해서 사람들을 총동원한다든지,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는다든지, 사람들을 교회에 예속시킨다든지 하는 일도 모두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들을 섬기도록 자리 매김을 해야 한다. 상업주의 교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교회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힘을 주고, 돈을 주는 수단, 그래서 자기를 영화롭게 할 수단으로밖에는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의 목표는 세속적인 성공에 있지 않다. 교회를 통해서 세속적인 성공을 지향하는 목사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큰” 교회 목사가 되려는 것은 세속적 욕망이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고,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는 것도 세속적 욕망이다.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고,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 자체는 목사의 고유한 직무이다. 그런데 “많은”이 들어가면 벌써 목회를 통한 자기성공과 자기상승의 의도가 나타난다. 참된 방식으로 작은 일에 충성한 결과 큰 일을 맡고, 큰 교회를 담임하게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큰 일과 큰 교회를 목표로 해서 뛰는 것은 참된 목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한국 교회를 상업주의의 병폐로부터 되살리기 위해서는 목사들이 참다운 교회관과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교회가 진정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목사는 어떤 존재이고,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끊임없는 자기 물음과 성찰 속에서만 교회를 참된 방향으로 개혁해나가는 의지와 노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전제 위에서, 좀 더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호봉제, 또는 목회자의 생활 및 자녀 교육, 노후 보장제가 시급히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프랑스 유학 시절, 불어권 아프리카에서 온 목사들과도 친분을 많이 가졌다. 그들과 대화하는 중에, 우리가 생각할 때 미개하고 가난하다고만 여겨졌던 아프리카의 교회들도 대부분 호봉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 개신교회도 철저하게 호봉제이다. 그들의 급여는 개 교회가 아니라 총회에서 집행된다. 지급액은 목사의 결혼 여부, 가족 수, 나이 등에 따른 적정한 기준 위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나라 교회들처럼 목회자들의 생계를 원시적으로 방치해놓은 경우가 없다. 생활의 문제를 순전히 목사 개인의 능력에 맡겨 놓는 것은 무책임할뿐더러 위험한 일이다. 최저 생활이 안 되는 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한이 맺히고 악에 바친 목사가 돈 되고 사람 되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하게 될 위험이다. 목회를 장사나 사업처럼 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혹시 호봉제가 당장 도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면 잠정적으로, 혹은 중간단계로서, 목회자 생활 및 자녀 교육 보장제를 도입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보장해주어야, 소신을 세울 수 있고, 소신과 원칙 속에서만 참다운 교회가 이룩될 수 있다. 

 

3. 이기주의

며칠 전,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올랐다. 거친 표현이 걸리지만 가능한 그대로 인용해본다. “‘불신 지옥 예수 천당’이란 커다란 피켓을 설치하고, 여러 명의 기독교 광신자들이 와서, 탑골 공원 정문 앞에다 아주 큰 스피커와 마이크를 설치해두고, 돼지 멱따는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하고 하더라. 약속한 사람이 늦게 나와서 나는 삼십 분이나 그곳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주말 오후를 즐기려 공원에 나온 사람들의 고막을 스트레스로 가득 채우고 평안해야 할 마음속에 짜증과 욕설을 일으켰다. 나도 정말 참을 수가 없었는데, 마이크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너무 짜증이 나서 ‘저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도 이기적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중요하고 진리가 중요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그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상 모든 질서를 다 무시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논리로, 기회만 된다면, 하나님을 내세워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면, 그런 논리로 세워질 그들의 세상이 과연 편안하고 아름다운 곳일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우리들의 세상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약속과 절차가 있는 것인데, 막무가내 식의 전도와 그런 독선적인 파시스트들을 연상시키는 행동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탑골 공원에서 생긴 일”, 안양고 홈페이지 재학생 게시판. IP Address : 192.168..114.1. 2001/2/5 13:28:15

남들을 고려하지 않고 무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은 편하고 좋을지 몰라도, 남들이 볼 때 그는 자기만 아는 무식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알게 모르게 공동체에서 배척되고 무시되기 마련이다. 또한 그의 생각이나 사상이 아무리 좋아도 공동체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이 고등학생이 겪었던 일을 한, 두 번 씩 안 겪어본 사람이 드물 정도로 기독교의 노방전도 행위는 시끄럽고 요란하다. 그것은 대중들과 사회 환경에 대한 침해이다.


토요일 오후 같은 때 명동 거리를 나가보면, 거의 10미터 간격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이 마이크를 들고 외쳐대는 걸 볼 수 있다. 수많은 노점상인들과 가게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성들과 찢어지는 음악들 틈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유난히 크다. 수많은 인파들 중에서 거기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오히려 짜증을 내고 속으로 불평하거나 욕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된다. 그들이 한번 외칠 때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수명씩 수십 명씩 더 떨어져나가는 것이나 아닌가 염려스러울 뿐이다.


자기 목표만 생각하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은 맹목적이고 위험하다. 그들은 자기를 성취하기 위해 남들을 포함한 자기 외의 모든 것들은 무시해버린다. 또한 자기만 되면 된다는 생각, 남들이야 어쨌든 자기 목표만 달성하고, 자기 뜻만 관철시키면 된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처럼 이기주의적인 것은 없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 자기밖에는 안중에 없는 사람들,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남들을 위하는 것 같은데 깊이 들여다보면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들... 유독 그런 사람들이 한국 교회에는 많은 것 같다. 실제로 한국 교회에는 이기적인 행태가 만연해있고, 그것 때문에 일반 사회인들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고 가슴아파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런 일들이 일부 광신자들이나 교회 주변의 이름 없는 이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번듯한 목사나 아예 교회단위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파트와 주택들이 밀집한 곳에 위치한 서울의 모 교회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평판이 나쁘다고 한다. 교회가 주차장이 비어 있는데도 막아놓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교회 교인들은 주일날 동네 곳곳에 주차하면서도, 자신들 주차장은 주중에 막아놓고 있다는 것이 다. 주민들이 주차할 곳이 없어 골목을 몇 바퀴씩 돌아야 하는 현실에서 텅 비어 있는 교회 주차장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자명한 일이다. 교회가 사회에 돌려준다는 차원에서 자신들이 안 쓰는 만큼은 개방하는 것이 사회에도 좋고, 교회에도 좋지 않을까. 남들을 배려하는 그런 마음, 그런 여유가 없이 강단에서 어떤 설교를 하고,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교회 버스가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은 속히 없어져야 할 교회 이기주의의 표본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교회 버스는 먼 곳에 사는 교인들을 자기 교회로 실어 나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긍정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너무나 크다. 모 대형교회는 버스를 다른 교회 앞에 주차해놓고 교인들을 태우다가 실랑이가 벌어진 적도 있다. 모 교회는 서울 강남지역에서 안양에 있는 두 가정의 교인을 데려오기 위해 40인승이나 되는 대형버스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김동환, [교회 거품 빼기], 73.


그런 식으로 교인들을 자기 교회로 나오게 하려고 버스까지 보내면서 배려하는 것은 교인들의 신앙에도 좋지 않고, 전체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자기 교인이라고 할지라도 먼 곳으로 이사갔으면 그곳의 가까운 교회를 정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어디를 가든 자기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하면, 그것처럼 당혹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한 교회 성도가 직장 문제로 강원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담임목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부득이 못나오게 돼서 죄송하다는 요지로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불쑥 화를 내면서 “무슨 소리냐. 요즘 비행기가 좀 많으냐. 강릉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이면 올 수 있다. 교회를 옮기지 말고 더욱 충성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Ibid., 63-64.


어디를 가든 자기 교회를 나와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를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교회 이기주의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버스가 더욱 문제인 것은 그것이 자기 교인들만 오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 교인들까지도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대형교회들은 현재 한편으로는 목사와 교회의 명성을 내세우고, 또 한편으로는 대형 버스라는 편리한 수단을 이용해서 기존의 군소 교회들의 신자들을 어렵지 않게 끌어 모으고 있다. 시골에서 목회하는 한 제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그런 현상은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니라 시골에서도 군 소재지에 있는 대교회가 주일이면 면이나 리 단위까지도 전부 버스를 운행함으로써 가뜩이나 적은 시골 교회 교인들이 손쉽게 교회를 떠나는 가슴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기독교 사회문제 연구소가 1982년 비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중의 한 결과를 보면,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 보다 더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한 사람이 17.5%에 불과한 반면 ‘그렇다’고 답변한 사람은 31.7%이나 되었다고 한다. [韓國敎會의 虛와 實 (1)], 100에서 재인용.
그같은 결과는 매우 우려할 만한 것이다. 가장 이타적이고 자기 희생적이어야 할 종교가 그 사회에서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상태라면 과연 그 종교가 그 사회에서 얼마나 더 존립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심과 우려를 씻을 수가 없다. 이후, 그와 비슷한 조사들은 기독교에 점점 비우호적일뿐더러 나쁜 방향의 결과를 나타내주고 있다.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1998년 한국 갤럽에 의뢰,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교회 사회활동 안 한다”가 87.6%나 되는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국민일보, 1998년 10월 17일.


역시 같은 단체가 이듬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반인들 생각할 때 기독교는 “교세 확장에 치중하고”(76%) “헌금 등을 강요하는 경향을 가진”(70.8%)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특성을 가장 크게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Ibid., 1999년 4월 14일.

그래서 한국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기주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기독교는 이기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니, 이기주의와 싸우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이기주의를 가장 심각한 죄로 인식한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위하는 이기심은 형제의 관계, 더 나가서는 공동체를 파괴시킨다. 그것은 공동체에 단절과 대립, 경쟁과 분열을 가져온다. 거기에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참다운 평화나 사랑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사람들에게 참 자유와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런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교회가 어떻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본회퍼는 “교회는 오직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이 교회이다”라고 말했다. 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München, 1970, 415, W. Huber, Kirche, 이신건 역 [교회],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0, 126 재인용.


교회가 남들을 위한 존재가 아닐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할 수 없고, 아가페의 사랑을 가르칠 수도 없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설교, 모든 활동, 모든 선교는 바로 타자를 위한 삶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에 비추어서 날마다 자신의 이기심을 꺾고 진정으로 타자를 위해 사랑하고 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교회가 시대와 인간을 위한 참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한국 교회의 이기주의 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교회와 교인들의 근본적인, 그리고 지속적인 자기 변화가 요구된다. 이기주의는 인간의 가장 뿌리깊은 죄성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단지 여기서는 이기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 우리가 논의한 것들과 관계해서 - 두 가지만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의 버스 운송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각 교회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효과가 기대되기 어렵다. 각 교단적인 차원에서 교회법으로 제정하거나 기타 총회의 결의로써 규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마침 올해부터는 백화점들이나 대형 수퍼마켙의 셔틀버스들도 운행이 금지되지 않는가. 일반 사회에서도 대형 업체들의 횡포 때문에 군소 상인들과 군소 운송업자들이 피해보는 것을 막고 있는데, 교회에서 그것을 간과하고 있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교회야말로 더 가난하고 더 어려운 이들의 처지를 우선적으로 돌아보는 곳 아닌가. 작은 교회들, 동네 교회들의 평화와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 큰 교회들의 싹쓸이식 버스운행은 조속히 금지돼야 할 폐단이다.


둘째, 노상 전도에서 확성기를 쓰거나,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연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이다.

현재 노방 전도인들의 막무가내 식 전도는 효과가 없을뿐더러 역효과만 나고 있다. 그런 방법은 여러 가지 전달 수단이나 매스컴이 없었던 옛날 방식일 뿐이다. 요즘은 각종 신문, 잡지, 서적 등 문서류와 방송과 T.V., 인터넷 등 부작용 하나 없이 전도할 수 있는 방법이 널려있다. 굳이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 전도할 이유가 없다.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부당하게 침해받는 일 아닌가? 우리 나라처럼 시끄럽고 요란한 나라가 없다. 소음에 의한 침해가 마구 일어나고 있는 데도, 거기에 대한 규제가 없다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이 문제는 “소음 금지법” 같은 사회법으로 제정될 수 있도록 기독교에서 앞장서서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결론에 대신해서

이상과 같이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을 권위주의, 상업주의, 이기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고, 거기에 대한 대책도 제시해보았다. 그러나 대책은 하나의 대책일 뿐이고, 특히 제도적이고 법적인 대안은 사실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제도나 법률이 미비해서 발생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상의 미비점들 때문에 문제가 더 쉽게 일어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사람이라고 본다. 한국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참된 교회를 사모하고, 그것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를 가지면 사실 법이나 제도상의 문제는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법이나 사사로운 규정들이 없어도 교회를 사랑하고 사회를 올바르게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한국 교회를 더 없이 아름답고 모범 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문제가 된다. 한국 교회의 문제들이 왜 발생하는가? 목사와 평신도를 포함한 한국 교인들 때문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한국 교인들의 무엇 때문인가? 나는 한국 교인들의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e)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기중심주의는 거기로부터 수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하는 가장 밑바탕에 깔린 하나의 근본악이다.


실제로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 권위주의나 상업주의, 이기주의들이 모두 철저한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자기가 높아지고 군림하려는 것(권위주의), 자기가 큰 교회의 목사가 되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것(상업주의), 자기만 알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는 것(이기주의) 등이 모두 철저한 자기중심적 죄성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즉 그것들은 모두 자기를 중심에 놓고 최고로 여기면서,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를 절대화하고, 자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기를 비판하지 않는 그런 자기중심주의의 여러 현상들인 것이다.


그런 자기중심주의는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 자체이다. 그 자기중심주의는 전통적으로는 교만(orgueil) 혹은 욕망(concupiscence)으로 설명된다. 그것에 물든 인간은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여기면서, 어디서나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그에게는 기준점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이 세운 선한 질서를 뒤집어놓는다. 심지어는 자신을 신의 위치에까지 격상시킨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자기에게 좋은 것, 자기를 위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다 해도 되는, 별다른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구 하는 그런 존재가 된다. 그런 자기중심적 욕망, 자기중심주의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고,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하게 만드는 자기 상승과 자기 확대, 더 나가서 자기 절대화의 가장 치명적이고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다. 이점은 내가 깔뱅의 죄론을 연구하고 나서 얻은 통찰이다. L'Anthropologie de Jean Calvin, Thèse de Docteur en Théologie présentée à l'IPT, 1992, 154-155.

한국 교회는 그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진실로 하나님 중심주의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주의로 나아가지 않으면 미래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지금, 회개와 신앙과 중생의 역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회개와 중생은 한번 해봤으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믿고 회개하고 교인이 된 다음,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직분 맡고... 그러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한번 믿고 중생한 뒤 교인은 되었지만, 교회 안에 들어와서 다시, 세상에서 그랬듯이, 자기가 대접받고,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가 최고가 되려는 감춰진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경우 참된 의미에서 신자라고 하기 어렵다. 교인이 된 다음에도, 그리고 인생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이 이룬 것보다는 이루지 못한 것과 잘못 이룬 것을 보고 참회하면서, 오직 주의 용서와 자비에 의존하는 신자들만이 참다운 신자들이다. 그런 사람들만이 믿음과 중생과 회개가 바르게 이루어진 신자들이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중심이 어떤가 하는 점이다. 중심이 비어있고, 중심이 열려서 거기에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신앙, 이타적인 믿음이 중요하다. 그것은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와 믿음과 중생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래서 날마다 다시 그 사건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열고 자신이 날마다 죽고 새로 태어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지속적인 회개와 거듭남의 역사만이 한국의 그리스도인을 참된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고, 그 결과 한국 교회들이 그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좋아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참다운 회개를 통하여, 그 근원으로부터의 자기변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들이 변혁되고 올바른 방향에서 힘차게 성장 성숙해나가는 길이 거기에 있다. 그것이 바로 문제가 없는 한국 교회,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을 어렵지 않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건강체인 한국 교회가 되는 가장 근원적인 방법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그런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기조 위에서, 합리적이고 시의 적절한 제도개혁과 법규제정들이 이루어질 때, 한국 교회는 그 중심에서부터 그리고 드러나는 다양한 모습들 속에서 참되고 아름다운 교회를 구현해나가게 될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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