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회에서 '증거'와 '순교'


글 / 이상규 교수(고신대) 

 

시작하면서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의 서문을 썼던 윌리엄 블람리 무어(W. Bramley-Moore)는 “기독교 순교사는 실제로는 기독교회의 역사 그 자체이다.”라고 했다. 1)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는 순교자의 역사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고 고난당하게 되리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마23:34).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변증서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다.

그러나 당신들은 계속해서 광적으로…… 우리를 죽이고, 고문하고, 정죄하며 학대하고 있습니다. …… 우리들이 당신들로 말미암아 더 많이 쓰러질수록 우리의 수는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씨앗입니다(Semen est sanquis christianorum).2)

로마제국 하에서 생성된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가치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 말하자면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은 로마의 생활 풍속과 달랐고, ‘로마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 박해받기 시작했다. 곧 기독교인(nomen christians)이란 단순한 이유로 박해 받게 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보고 듣고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박해의 원인이었고 순교의 원인이었다.
  이 글에서는 ‘증거’가 어떻게 순교라는 용어로 어의 변화를 겪게 되고, 또 ‘순교’가 무엇인가를 어의적으로, 성경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논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순교가 어떠했던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순교란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행동”3) 혹은 “신앙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일”로 정의된다. 「세계기독교백과사전」(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서는 “기독교 순교자란 복음을 증거 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적의에 결과로 명을 다하기 전에  자신의 생명을 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4) 한국교회는 교회사적 이해나 신학적 검토 없이 상식적 범주에서 순교를 이해하고 있다. 이 용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순교자’ 칭호의 바른 수여를 위해서는 ‘순교’의 개념이나 용례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교회사적 용례에 대해 정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순교란 무엇인가?

1.1 어원적 고찰

우리가 말하는 순교(殉敎, martyrdom)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에서 왔고, 마르티리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투리온(μαρτύριον)은 흔히 ‘순교’로 번역되지만 본래의 의미는 ‘증언’ 또는 ‘증거’였다. 즉 말투리온는 ‘증거,’ 혹은 ‘증인’을 의미하는 동시에 ‘순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6) 또 헬라어 말투스(μἀρτυς)는 흔히 ‘순교자’로 번역하지만, 본래는 ‘증인’이라는 의미였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이를 증거 하다가 죽은 이들을 ‘증인’(μάρτυρός)이라고 표현했다(행22:20,딤전6:13 계17:6). 그래서 말트리온은 ‘증거,’와 ‘순교’를, 말투스는 ‘증인’이라는 의미와 ‘순교자’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이 다 증거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순교’라는 죽음은 ‘증거’라는 행위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이런 이해를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살펴볼 때, 마르트리온이나 말투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증거’, ‘증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순교’, ‘순교자’라는 의미로 어의 변화가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6) 이런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정경 이후의 초기 교부들의 문헌을 고찰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1.2 신약에서의 용례

  칠십인역(LXX)에서는 μάρτυς라는 단어가 60여회 나오지만 주로 히브리어 ‘에드’(דע)를 번역한 말로서 고소행위에 대한 증언(민5:13), 거짓 증언에 대한 처벌(신19:16)의 의미로 나타난다. 그러나 순교란 의미의 ‘마르투리온’에 해당하는 단어는 구약에는 없다. 


  신약에서는 μαρτύριον이라는 단어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본래 법적 개념으로서 재판석에서의 증언을 뜻하는 법률 용어였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증거’(witness)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청중들 앞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하는 행위를 의미했다. 증거하는 사람, 곧 증인은 사실이나 진실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증거한다는 의미는 실제 사실에 근거하여 있는 그대로의 사실 혹은 진실을 선언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μαρτ-에서 파생된 이 단어의 용례를 다음의 몇 가지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요1:7, ou-toj h=lqen eivj marturi,an i[na marturh,sh| peri. tou/ fwto,j,), 혹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요3:11, o] e`wra,kamen marturou/men), 또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marturou/men), 혹은 “내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i[na marturh,sw th/| avlhqei,a)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등에서 보는 바처럼 동사로 사용된 μαρτ-에서 파생된 이 용어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명사로 사용된 μάρτυς의 경우에도 보고 들은 바에 대한 증거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ma,rturej)이라”(눅24:48),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2:32, h`mei/j evsmen ma,rturej), 혹은 사도행전 22장 20절에서 스데반에 대하여 말하면서, “너(당신)의 증인”(ma,rturo,j sou)이라고 말하고 있다..


  명사 μαρτυρία 혹은 μαρτύριον 의 경우도 그 의미는 동일하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marturi,a tou/ VIwa,nnou)가 이러하니라”(요1:19), 혹은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auvtou/ h` marturi,a)가 참인 줄 아노라”(요21:24)에서 볼 수 있듯이  μάρτυς (μαρτυρία, 혹은 μαρτύριον)라는 용어는 증거자, 참관인, 목격자, 혹은 증인 등의 법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μάρτυς는 기본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사도들에게 적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 어떤 특수한 존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증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증인했기 때문에 죽었지, 죽었기 때문에 이들을 증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증인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빼앗긴 이들에게 붙여진 특수한 칭호가 아니었다.  

그런데 신약의 후기 문서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야간 다른 의미로 변화되는 조짐을 발견할 수 있다. μάρτυς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지만 단순한 ‘목격함’에서 ‘고난 받음’이라는 의미로의 어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계시록 1장 5절, 혹은 3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하여 말투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충성된 증인”(o` ma,rtuj( o` pisto,j)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특히 계시록 1장 5절에서는 예수를 “충성된 증인”으로 말한 다음,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말하고 있다. 고난당하신 예수를 충성된 증인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전서 5장 1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ma,rtuj tw/n tou/ Cristou/ paqhma,twn)으로 말한 바 있는데, 특히 계시록에서는 고난받음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계시록 2장 13절에서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죽임을 당한 안디바를 “나의 충성된 증인”(o` ma,rtuj mou o` pisto,j mou)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시록 17장 6절에서는, 로마를 상징하는 바벨론에 대해 말하면서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tou/ ai[matoj tw/n martu,rwn VIhsou/)에 취한지라.”고 하여 증인의 증거를 피 흘림을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례들은 말투스라는 단어가 피 흘림의 증거, 곧 순교로 발전해 가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2. 교부문서에 나타난 순교의 개념

  앞에서 말투스 혹은 마르트리온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증거,’ ‘증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후에 ‘순교’, ‘순교자’라는 의미로 어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최초의 문서가 「폴리갑의 순교기」이다.7) 2세기의 대표적인 성자이자 순교자로 알려진 서머나의 폴리갑은 156년경 순교했는데, 그의 순교기에는 어간 μαρτ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특히 2장 2절에서 μἀρτυς가 ‘피의 증인’, 곧 순교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8)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어난 모든 순교(τα μαρτύρια  πάντα)는 복되고 고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경건해야 하고 모든 것에 대한 권능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누가 순교자들의 고결함과 인내, 주님께 대한 사랑에 경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육체의 조직이 채찍질로 갈기갈기 찢겨 몸속의 정맥과 동맥까지 드러나 보이는 고통을 견디어 냈고, 구경꾼들마저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 탄식하였습니다.9)

이 문맥에서 μαρτυρία는 피 흘림의 증거, 곧 순교의 의미로 기술되었다.
  신약정경 외에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서로 알려진 96년 경 기록된 로마의 클레멘트 서신(Epistula ad Corinthios)은 65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장에서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행한 μἀρτυς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죽음과 연결하여 말하고 있으나 여전히 ‘말-증언’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아직 순교라는 의미로 발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클레멘트 서신보다 후기인 130-40년 경 로마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허마의 목자(Pastor Hermae)에서는 순교자라는 말 대신 ‘고난 받는 자들’(παθόντες)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익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35- 117?)는 죽음을 증거의 완성 단계로 보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순교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같은 죽음에 대하여 μάρτυς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10)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140년대까지도 로마에서 순교자라는 칭호가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11) 그래서 바우마이스터는 순교자라는 칭호는 폴리갑의 순교기가 기술되기 수십 년 사이에 소아시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타 지역으로 발전된 용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12)

μἀρτυς가 ‘증언’에서 ‘순교’라는 의미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는 이단이나 이단적 주장을 반박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익나타우스는 가현설론자들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순교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증인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3)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은 그리스도가 몸을 지니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인데, 피흘림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음을 말함으로서 육체가 겪는 고통을 강조하였고, 이를 통해 가현설론자들을 반박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익나티우스나 폴리갑은 예수가 실제적으로 육체적인 죽임을 당했으며, 증인들(순교자들)도 예수의 모범을 따라 피를 흘리고 실제로 죽임을 당한다고 말하면서 가현설론자들을 논박했던 것이다.  
  또 할킹(F. Halkin)은 「폴리갑의 순교기」에서 증언이 순교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몬타누스파의 광신적 경향에 대한 반박이라고 주장한다.14) 몬타누스파의 사람들은 자발적 순교를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고문이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여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못했는데, 참된 증인(μἀρτυς)은 그 증거 하는 바를 행동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 증인’에서 ‘행위 증인,’ ‘피의 증인’(순교, 순교자)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μἀρτυς는 몬타누스파의 광신적 경향을 논박하는 문맥에서 말과 행위의 일치를 강조하여 ‘말 증인’이 ‘피의 증인,’ 곧 ‘순교’의 의미로 어의변화를 겪게 되었다고 설명한다.15)


  그래서 순교는 말(증거)과 행위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개념화되었다. 그런데 이 순교는 익나티우스의 편지나 「폴리갑의 순교기」에서 보여주는 바처럼 ‘제자’(μαθητής) 개념과 ‘본받음’(μίμησις)의 개념을 결합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가 폴리갑의 순교기 17장 3항이다. 즉,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며, 본받는 사람들인 순교자들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우리도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고 동료 제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가 그것이다. 즉 순교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길이며, 그리스도를 본 받는 행위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와 함께 ‘증거자’라는 의미보다는 순교 자체를 존중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논의한 바를 정리하면 μάρτυς (μαρτυρία, 혹은 μαρτύριον)라는 용어는 본래는 증거(자)를 의미했으나 140년경을 거쳐 가면서 피의 증거(자), 곧 순교(자)를 의미하는 어의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즉 순교(자)는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앙의 증거 때문에 목숨을 바친 이들에 대한 칭호였던 것이다. 이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들로 간주되었다.
  이런 어의변화의 과정에서 2세기 중엽부터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새로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이 ‘고백자’(告白者, confessor)였다. ‘고백자’(ὁμολόγος)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증거 때문에 체포되어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목숨을 잃지 않고 풀려난 이들에 대한 칭호였다. 이것은 실제로 목숨을 잃은 피의 ‘증거자’(μάρτυς, μάρτυρες) 곧 ‘순교자’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16) 말씀을 증언하고도 죽지 못한 자들을 ‘고백자’로, 피로서 증언한 자들을 ‘순교자’로 구분했다는 사실은 죽음 그 자체가 특수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고백자’라는 용어는 특히 3세기 중반에 크게 대두되는데, 그것은 당시의 기독교 박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249년 데시우스(Decius)가 황제가 되는데, 이듬해인 250년부터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가 재임하는 기간(249-251) 동안 이전 시기와는 다른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기독교가 별로 전파되지 않았던 다뉴부(Danube) 유역 출신이었던 데시우스 황제는 제국의 번영은 옛 종교의 회복이라고 믿고 제국의 전 지역에서 기독교를 탄압했다. 그는 이교신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린 자에게는 증명서(libelli)를 발부하고, 이 증면서가 없는 이들을 박해했다.17) 이 당시는 기독교 신자를 처형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실제 순교자는 많지 않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고백자로 불리게 된 것이다. ‘고백자’의 상대적 개념으로 고문이나 탄압에 못 이겨 신앙을 버린 이들을 ‘배교자’(apostat, lapsed)라고 불렀는데, 이 배교자 처리 문제가 노바티안 분파운동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배교자’와는 달리 ‘고백자’들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 누가 순교자인가?

3.1. ‘말 증언,’ ‘행위 증언,’ ‘피 증언’

  초기 기독교에서 순교자 혹은 고백자들은 상당한 영광을 누렸으므로 순교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익나티우스의 경우에서 보는 바처럼 순교는 ‘그리스도를 본받음’(imitatio Christi)의 절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교회 공동체에서 순교에 대한 지나친 열망이 있었으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자발적으로 순교당하고자 하는 이들을 경계하기도 했다. 광신적인 몬타니스트들은 순교를 자청하는 일까지 있었다. 오늘의 천주교회의 시성(諡聖)이나 성일, 혹은 축일에서 보는 바처럼 순교자들에 대한 경외심은 숭배로 발전하였고, 성인시 되기도 했다. 이런 풍조 때문에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윤색되거나 과장되어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18)  
  이런 점 때문에 누가 순교자이며, 순교자라는 칭호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하는 순교자 개념정리가 요구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고민의 흔적이  「폴리갑의 순교기」 제 4장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당시 교회의 일반적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폴리갑의 순교기」에서는 ‘순교자’를 다음의 3가지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19)

  1. 단지 ‘말 증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증언으로 고통을 감수한 ‘행위 증인’만이 진정한 순      교자이다.
  2. 순교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이 순교를 정당화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은 구분되어야 한다. 진정한 순교자는 주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자이다.
  3. 순교를 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며 허용된다. 그러나 진정한 순교자는 자발적으      로 순교하려 나서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순교를 적극적으로 피하지도 않는다.

초기 기독교는 박해의 체험을 통해 순교의 의미를 보편화했는데, 순교는 특히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 증거 혹은 증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를 확증하기 위해 임의로 받아드리는 죽임이다. 말하자면 순교는 무엇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볼 때 초기 교회가 이해했던 순교자의 조건은 다음가 같았다.

첫째, 순교는 육체적 생명이 끊어지고 참으로 죽어야 한다.
둘째, 그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증거하는 진리에 대한 박해에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그 죽음을 자의적으로 받아드려야(voluntary acceptance of death)한다.

즉, 순교는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인 증거를 행하고, 이를 확증하기 위해 주어진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때문에 왜 죽었는가를 고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의 와중에서 기술한 시편 35편 23절,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를 주석하면서 “(죽음)이라는 형벌이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지 않고, 그 (죽음의) 이유가 순교자를 만든다.”(Martyrem non facit poena, sed causa)고 했다.20)

3.2. 순교 개념의 확대

  처음에는 ‘피 흘림의 증거’를 ‘순교’로 간주했으나 점차 순교 개념은 확대되기 시작한다. 그 시기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으나 3세기 초부터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순교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리겐은 “말과 행위로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진리를 증거 하는 이는 순교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했고, 키프리아누스는 “한 순간에 고통을 당하는 이는 오직 한번 승리한다. 그러나 언제나 고통 중에 머물고 끊임없이 고통과 투쟁하는 이는 매일 새로운 순교의 관을 쓴다.”고 했다.21) 말하자면 3세기를 거쳐 가면서 순교자는 피 흘림의 증거자일 뿐 아니라, 복음적 삶 곧, 청빈, 순종, 정절 등 세상과 구별된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행위도 순교로 간주하는 영적 순교개념이 대두된다. 특히 박해의 시대가 종결되고 기독교의 자유가 주어지자 피 흘림의 순교는 그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소멸되자 이런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3세기 「사도 전승」(Traitio apostolica)을 썼던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d. 236)와 3세기 중엽의 로마의 주교였던 코르넬리우스(Cornelius, d. 252)는 실제로 순교하지 않았으나 순교자로 불려지기(顯揚)도 했다.22) 이런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였으므로 일반화된 경향은 아니었고, 후에는 순교자 칭호는 수도사들에게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의미에서 순교자는 항상 두 가지 요건,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공적인 증거와 그 증거로 인한 불가피한 죽음을 인정받아야 했다. 이것은 그 이후의 교회사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4. 초대교회에서의 순교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 하에서 300년간 박해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는 첫 30여 년간 유대교의 박해는 받았으나 로마제국의 물리적인 박해는 없었다. 그러다가 AD 64년을 경과해 가면서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 박해는 313년(동부 323년)까지 계속 되었다. 물론 간헐적인 자유의 기간이 있었지만 64년 네로의 박해로부터 250년 데시우스(Decius) 황제까지 박해는 주로 지역적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정부의 박해정책에 근거하기 보다는 비 법률적인 폭력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250년 이후는 로마제국의 정책에 의한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박해가 행해졌다. 


  로마제국에서 종교는 합법적 종교(religio licita)와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로 구분되었는데, 황제 숭배와 로마 신들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종교는 불법의 종교로 간주되었다. 황제들은 자신을 ‘우리의 주님이자 신’(dominus et deus noster)으로 부르게 하여 황제들은 신격화되었고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기독교신자들은 황제숭배를 반대했으므로 다신교적 배경에서 무신론자(αδεοι)라는 비난을 받았다.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불법의 종교로 간주되었고 탄압을 받았다.

2.1. 초기 순교자들

1, 2세기 대표적인 순교자들로는 트라이얀 황제 재임시였던 115년경 순교한 안디옥의 익그나티우스(?-115), 피우스황제(138-161) 때 순교한 폴리갑(69?-155?), 아우렐리리우스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저스틴 등이 있지만, 유세비우스는 그의 「팔레스틴의 순교자들」(The Martyrs of Palestine)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프로코피우스(Procopius)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총독 앞에 끌려왔을 때 그에게 네 황제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 “즉시 참수되었다.” 곧 이어 팔레스틴에 있는 교회 감독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처형의 위험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총독은 고문을 통해 저들이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다.23) 유세비우스는 그의 책 2장에서 안디옥에서 체포된 로마누스(Romanus)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심판관이 그에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죽게 될 것을 통보하자 그는 즐겁고도 만족스럽게 선고를 받아드리고 끌려 나갔다. 그는 기둥에 단단하게 묶였고, 그 주변에 나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을 붙일 준비를 갖추고 황제의 명령만 기다렸다. 이 때 로마누스는 “불은 어디 있느냐?”고 외쳤다. 이렇게 말할 때 그는 또 다른 고문을 받기 위해 황제 앞으로 끌려갔다. 곧 그의 혀가 잘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그의 당당함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환란 중에서도 종교를 위해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24)

이 책 8장에서는 가자(Gaza)의 다른 경배자와 함께 체포되어 막시미누스(Maximinus)에게 끌려간 용감한 발렌티나(Valentina)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심문관이 다른 그리스도인 여성을 야만적으로 고문할 때,

그녀 앞에서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비인간적인 고문을 보고 참을 수 없어 그녀는 용기 있게 군중들 가운데서 외쳤다. “당신이 우리 자매를 얼마나 더 잔인하게 고문 하려는가? 이 말을 듣고 분노한 막시미누스는 그 여자를 즉시 체포하게 했다. 발렌티나는 군중들 앞으로 끌려갔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도록 요구했다. 그녀가 거절하자 강제적으로 제단 앞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힘껏 그 제단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제단은 불길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이렇게 되자 심문관은 격분하여 야수처럼 변하여 그가 이전에 했던 고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을 시작했다.25)    

이상과 같은 초기 순교자들의 기록에서 보여주는 순교자들의 용감한 태도, 확고부동한 인내는 요세비우스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덕성의 증거였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과학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 담대함과 고문을 이기는 용기는 심리적 이상 현상, 곧 마조키즘(masochism)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했다.26) 특히 도날드 리들은 이들 순교자들은 고통을 사랑했고, 고문과 같은 고통을 통해 성적 희열을 느끼고 심지어는 죽음을 동경(libido moriendi)했다고 해석했다.27)

2.2. 순교자의 수

  기독교가 제국에서 공인받기 이전까지 로마제국 하에서 순교한 자의 수는 얼마나 될까? 고대사회는 통계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천명 이하였을 것으로 추산한다. 유세비우스가 예시하듯이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잔인한 고문과 처형을 받아드리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이들이 박해와 고문에 직면하여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28) 비록 64년 이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지만 데시우스(Decius)황제의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박해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이 로마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폭도들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박해가 심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리겐(Origen, 185?-254?)은 “전체 순교자 수는 적었고, 순교는 가끔 있어 온 일로서 열거하기도 쉬운 일”29)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데시우스 황제 이전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글 켈수스 반박문이 기록됐을 때가 248년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의 박해와 순교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가인 프렌드(W. H. C. Frend)에 의하면 순교자 수는 “수천 명이 아니라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30)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 55/56-117)는 그의 「연대기」(Annals)에서 네로가 “엄청난 수”(ingens multitudo)의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했다고 기록했으나, 마르타 소르디(Marta Sordi)는 이 말은 수백 명이 희생자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타키투스의 표현은 그 당시 일어난 기독교 탄압에 대한 심각한 분위기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31) 로드니 스타크도 이 견해도 동의했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실제로 박해한 경우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고, 체포된 이들은 감독들이나 지도적 인물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의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32) 


  데시우스황제 치하에서의 박해를 지역적으로 검토해 보면,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에집트의 도시들과 마을에서도 ‘상당히 많은’(very many) 그리스도인들이 피살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오직 17명의 희생자들을 거명하고 있을 뿐이다.33) 팔레스틴과 시리아의 경우 오리겐이 체포되었고, 감독인 알렉산더(Alexander)와 바빌라스(Babylas)가 처형되었다는 기록뿐이다. 소아시아의 경우 겨우 10여명의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 키프리아누스의 서신과 다른 기록은 카르타고에서의 상황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데시우스의 통치하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희생된 18명의 순교자와 17명의 고백자 명단이 남아 있다.34) 이러한 정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프렌드는 로마제국 전역에서의 희생자 수는 천명 대에 이르지 못하고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2.3. 순교자들에 대한 숭모

  고백자들은 물론이지만 순교자들은 교회 공동체에 의해 상당한 칭송을 받았다. 순교자들에 대한 특별한 영예와 숭모를 보여주는 일예가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인 「순교자 행전」(Acts of Martyrs), 「폴리갑의 순교기」(The Martyrdom of Polycarp), 그리고 「페르페투아와 펠리시타스의 순교기」(The Passion of St Perpetua and Felicity) 등에 나타나 있는데 이들의 용기 있는 증언, 불굴의 의지, 죽음 앞에서의 담대함은 신적 능력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순교기에는 슬레인(Craic J. Slane)의 지적처럼 상당한 과장이 불가피했다.35) 순교자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경모는, 앞에서 지적했지만, 후일 순교자에 대한 숭배로 발전하게 된다. 


  순교(처형)는 공적으로 행해지기도 했지만 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점 역시 순교자들을 특별한 인물로 간주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때로는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집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경우에도 순교 예정자는 특별한 관심과 존경을 받았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2세기 중엽의 익나티우스(Ignatius of Anthioch)의 순교였다. 트라이얀황제 치하에서 체포된 그는 안디옥에서 처형되지 않고 10여명의 로마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가 주요 도시를 지나갈 때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은 익나티우스를 만날 수 있었고, 익나티우스는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거나 설교할 수 있었다. 익나티우스는 로마로 가는 여정에서 자유롭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현존하는 7통의 서신은 초기교회의 상황을 헤아리게 하는 소중한 문헌으로 남아 있고, 이 문서가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다각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36)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순교를 위한 영적, 심리적 준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익나티우는 자신이 순교자로 기억되기를 기대하였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제자의 길이자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두려워한 것은 원형 경기장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신자들의 노력으로 석방될까하는 염려였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순교의 길을 막지 말라고 호소하였다.

실로 저는 여러분의 사랑이 도리어 저에게 좋지 않는 일을 하게 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물로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목적을 이루는 일은 쉬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승리를 이루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제발 하나님을 위해서 저의 피가 뿌려지도록 내버려 두십시오.37)

특히 익나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히려 맹수들을 유인하여 그들이 저의 무덤이 되게 하십시오. 또한 제가 죽었을 때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도록 맹수들이 제 몸의 어떤 부분도 남기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저의 몸을 볼 수 없게 될 때 저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가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 될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그리스도께 간구해 주십시오. 저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여러분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지만 나는 죄수일 뿐이지요. 그들은 자유자였지만 저는 이 시간까지 노예일 뿐입니다. 내가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그 때 비로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자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묶인바 된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 용서를 구하는 것은 나는 무엇이 진정한 경건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제자가 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떤 것도 시기하여 방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38)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순교자에 대한 특별한 존경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가 「폴리갑의 순교기」이다. 폴리갑은 156년 화형을 당했는데,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유골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수습되었고, 순교기에서는 “그의 거룩한 육신”은 “금보다 더 값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39) 이 순교기의 기록자는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은 매년마다 폴리갑의 뼈가 묻혀 있는 곳에 모여 순교자의 생일을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축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는 “축복된 폴리갑은……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명예와 위엄과 왕권이 대대로 영원할찌어다. 아멘”으로 끝맺고 있다.40) 


  오늘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당대의 사람들이 순교자들을 거룩한 인물로 기억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 저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기 때문이다.41) 이 점은 순교자들이 특별한 영예를 누렸음을 보여준다. 순교자들은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상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영광을 누렸다. 익나티우스가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각 도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영접을 받고 칭송을 받았듯이, 로마에서 순교당할 자들 또한 동일한 영예를 누렸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아다나시우스의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The Life of St. Antony)에 잘 나타나 있다.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순교의 의미, 개념, 성경적 용례, 초대교회에서의 순교 이해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이 글에서 전통적 입장의 순교, 순교자 개념을 제시했지만, 순교나 순교개념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여지가 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이사를 신으로 신격화하거나 숭배를 요구하지 않으며, 어느 특정 종교만을 신봉토록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 믿는 바를 관철하려고 할 때 박해가 없을 수 없다. 이제 박해의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과거의 순교자들은 종교적 불관용의 상황에서 자기가 믿는 바를 증거하고 수호하기위해 순교자의 길을 갔으나, 이제는 사회적 부조리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희생자 혹은 순교자의 길을 간다. 정치범으로 죽은 본훼퍼나 흑인해방운동을 위해 죽은 마틴 루터 킹의 경우가 그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형태의 희생자 혹은 순교자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순교개념은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1) "The History of Christian martyrdom is, in fact,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tself." The New Encyclopedia of Christian Martyrs (John Hunt, 1984), IX.
2) Tertullian, Apology 50.
3) 이희승, 「국어대사전」(민중서림, 1981), 1738.
4) “A Christian Martyr is a believer in Christ who loses his or her life, prematurely, in a situation of witness, as a result of human hostility." David B. Barrett, George T. Kurian, and Todd M. Johnson eds., World Christian Encyclopedia: A Comparative Study of Churches and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 2nd ed., 2 vols. (NY: Oxford University Press, 20201), 1:29.
5) μαρτ-에서 파생된 용어의 용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Gerhard Kittel, Garhard Friedrich, 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4 (Eerdmans, 1974), 474-508을 참고할 것.
6) μαρτυς는 “기억하고, 어떤 아는 것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는 사람”(one who remembers, who has knowledge of something by recollection, and who can thus tell about it)을 의미한다면, 동사 μαρτυρειν은 “증거하다”(to bear witness to something) 혹은 “증인이 되다”(to come forward as a witness)는 뜻이며, μαρτυρία는 “증거를 행함,” μαρτύριον는 ‘증거, 증언’을 가리킨다.
7) 폴리갑의 순교기는 폴리갑이 사망한 뒤 서머나교회 공동체가 프르기아 지방의 필로멜리움 공동체에 보낸 편지형식의 기록인데, 기록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폴리갑이 순교한 뒤 1년 이내에 기록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기록은 최초의 순교기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에 대한 변증적 의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교자들을 기리며 순교자를 본받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기록되었다. 폴리갑의 순교기, The Martyrdom of Saint Polycarp, Bishop of Smyrna as told in the Letter of the Church of Philomelium 는 LCC vol. 1, Early Christian Fathers, 149-157에 게재되어 있다.
8) 폴리카루푸스(하성주역주), 「편지와 순교록」(분도출판사, 2000), 118.
9) 위의 책, 129.
10) Craic J. Slane, Bonhoeffer as Martyr (Brazos Press, 2004), 44.
11) 폴리카루푸스, 119.
12) Theodore Baumeister, Die Anfänge, 259.
13) 위의 책, 260.
14) F. Halkin, Une nouvelle Passion, 150-4.
15) 폴리카르푸스, 120.
16)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5.2.2-5.
17) 현재까지 발견된 증명서로는 강우량이 적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하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알락산더(Alexander) 섬에 사는 72세 가량의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있는 사타부스(Satabus)의 아들 아우렐리우스 디오게네스(Aurelius Diogenes)가 알렉산더 섬의 희생제물 위원회에 제출함. 본인은 지금뿐 아니라 어느 때에라도 항시 귀하의 면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고, 희생을 드리고 먹는 제 규칙에 따라 신들에게 희생을 바쳤습니다. 귀하께서 이것을 증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본인 아우렐리우스 디오게네스가 본증을 제출합니다. (관청의 글씨로) 나, 아울렐리우스 시루스(Aurelius Syrus)는 디오게네스가 우리와 함께 희생을 드렸던 것을 증명함.”
18) Craic J. Slane, 36.
19) 폴리카르푸스, 121-2.
20) "men are made martyrs not by the amount of their suffering, but by the cause in which they suffer" Augustine, Letters, 89.2; New Catholic Encyclopedia, 312.  루터는 이 말을 재세례파에 대해 비판하면서 사용한 일이 있다.
21)  Cyprian, Epistle, 37.1.
22) B. S. Easton, The Apostolic Tradition of Hippolytus(Archon Books, 1934), 16.
23) Rodney Stark, The Rise of Christianity (Harper Collins, 1997), 163.
24) Srark, 164-5.
25) Stark, 165.
26) 이런 해석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로는 Donald W. Riddle, Karl Menninger, Theodore  Reik, E. R. Dodds, Arthur D. Nock 등이다.
27) Donald W. Riddle, The Martyrs: A Study in Social Control (1931), 64.
28) The Martyrs of Palestine (1850 ed.)
29) Origen, Contra Celsum, III, 8.
30) W. H. C. Frend, Martyrdom and Persecution in the Early Church (Baker, 1965), 413.
31) Marta Sordi, The Christians and the Roman Empire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86), 31.
32) Stark, 180.
33) Albert Ehrhard, Die Kirche der Märtyrer (München, 1932), 66-8, Frend, 413.
34) Cyprian, Epistle, 22. 2-3 (CSEL., iii. I, 534-5).
35) Craic J. Slane, 34.
36) 익나티우스의 서신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익나티우스의 서신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William R. Schoedel, Ignatius of Antioch (Fortress Prss, 1985)와 Robert Grant, Ignatius of Antioch (NJ: Nelson, 1966) 등의 논저가 있다.
37) Epistle to the Romans, 1946.
38) 이냐시오스(박미경 역주), 「일곱편지」(분도출판사, 2000), 87-89.
39) 폴리카르푸스, 179.
40) 폴리카르푸스, 185.
41) Stark,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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