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

 

A.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

 

1. 영적 성품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대답하는데(4:24),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크기나 치수를 가진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공간적인 차원에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순전한 분이시며 존재의 본질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래서 이 존재는 덜 실제적이거나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 형태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하나님의 존재는 창조 세계의 물질적인 존재 형태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적 성품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적 성품은 하나님이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고 크기나 부분으로 규정될 수 없고 육체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으며 어떤 존재 형태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2. 비가시성(invisibility)

 

하나님의 영성과 관련된 또 다른 사실은 하나님의 비가시성이다. 하나님의 비가시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의 비가시성이란 완전한 영으로서의 하나님의 온전한 본질은 우리가 절대로 볼 수없을 것이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가시적이고 창조된 것들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계시하신 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질 전체(God's total essence)는 절대로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창조물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구약의 현현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위대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14:9)고 하셨는데, 요한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대조해서 소개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다 보는 것은 아니더라고, 우리가 보는 것이 분명하고 실제적인 비전일 것임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고대하고 열망하는 것의 완전이시오 가장 아름답고 흠모할 만한 것의 절정임을 인식할 때, 장차 올 세상에서의 가장 큰 기쁨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하나님을 뵈옵는 것임을 우리는 인식하게 될 것이다.

 

 

B. 정신적 속성(Mental Attributes)  

 

3. 지식(전지하심)

 

하나님의 지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고 영원한 행동 안에서 모든 실제적이고 가능한 일들과 자신에 관해 온전히 알 수 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지식에 완전하신 분이라고 했고(37:16), 요한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했다(요일 3:20).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을 전지(omniscience)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전지하시다고 한다. 우선 하나님은 자신에 고나해 완전히 아신다고 했다. 특히 하나님 자신이 무한하시고 한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는 더욱 경이로운 사실이다. 요한이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고 한 말에서도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문맥에서 볼 때 빛은 도덕적 순결과 온전한 지식, 혹은 인식을 모두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고 온전히 빛이시라면, 그는 온전히 거룩하시며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온전히 가득차 있다는 의미이다.또한 하나님은 모든 실제적인 것들을 다 아신다고 했는데,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일어난 모든 일을 아신다는 의미이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알고 게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아신다:(139:1-2).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위의 정의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가능한 일들’(all things possible)도 아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가능한 모든 일에 대해 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서도 연역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온전히 아신다면,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일들을 다 포함해서 그가 행하실 모든 일들을 아신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위의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하나의 단순한 행동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했다. 여기서도 단순”(simple)이라는 단어는 부분으로 나뉘어지지 않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해 온전히 알고 계신다고 의미이다. 하나님의 지식은 단순할 뿐만 아니라 영원하다. 이는 하나님의 지식은 변하거나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자아 판단력(self-determination)이 있다고 했다. 이는 우리의 선택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들을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미리 알고 계신다면, 우리의 선택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4. 지혜(Wisdom)

 

하나님의 지혜는 언제나 최선의 목표를,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한 최상의 수단을 택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결정은 언제나 지혜로운 결정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강조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특히 창조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이나 매일 매일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하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위대한 구속의 계획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십자가 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신다(고전 1:24, 30). 바울은 우리가 현재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이 복음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반영하고 있다느 것을 알았다. 그 계획에 있어서 지혜는 인간이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구원 계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살펴본 후 갑자기 벅차오르는 감격을 찬양으로 표현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하나님의 지혜는 개개인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안에 지혜롭게 역사하심으로써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자라갈 수 있게 하신다는(8:29) 사실을 확증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111:10; 9:10; 참조 잠 1:7).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슬프게 하거나 욕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의 아버지 같은 엄한 징계를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는 그의 지혜로운 계명들에 따라 살며 그에게 순종하려는 동기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진실하심(신실하심)(Truthfulness or Faithfulness)

 

하나님의 진실하심이란 그는 참되신 하나님이며 모든 그의 지식과 말씀은 참되어서 진리의 최종적인 기준 되심을 의미한다. “신실하심혹은 신빙성을 의미하는 용어인 참되심(veracity)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지칭하는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정의의 첫 부분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다른 신들은 다 우상임을 보여준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10:10-11). 예수께서도 성부께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7:3; 요일 5:20)라고 하셨다. 우리는 참 하나님은 어떠해야 한다고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셔야 하는가에 대한 완전한 생각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가지고 계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나 성품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는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모든 지식은 참되며 진리의 최종 기준이 된다고 했다.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지식에 있어 완전하시다고 했다(37:26)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그의 지식은 완전하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그의 지각과 지식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사실 외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해 그리고 창조세계에 관해 하신 모든 말씀들이 실제와 완전하게 일치한다는 사실도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씀하신다.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며(1:2), 거짓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하나님이시며(6:18), 모든 말이 다 온전히 순전하여(12:6)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30:5)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참되심은 하나님과 세상에 관한 참된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본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공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참된 사고, 즉 성경을 통해 배우고 성경으로 하여금 자연세계를 바로 관찰하고 해석하게 함으로써 배운 사고를 갖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생각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처럼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39:7)라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연구하는 모든 영역에서 실재의 본질에 관한 진리를 발견할 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진리를 발견할 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진리를 좀 더 발견한 것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임을 확인하게 되고, 진리에 대한 발견과 연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때마다 즐거워하게 된다. 나아가서 우리는 진리와 거짓에 대해 반응을 할 때도 하나님의 참되심을 본받아야 하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진리를 사랑하고 거짓을 미워해야 한다.

 

 

C. 도덕적 속성(Moral Attributes)  

 

6. 선하심(Goodness)

 

하나님의 선하심이란 하나님이 선의 최종 기준이 되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인정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의미이다. 이 정의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정의할 때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여기서 선함이란 인정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은 스스로에 의해 인정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서의 최종 기분이 되신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8:19)고 말씀하심으로 이를 암시하신 바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선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신다면, 우리는 윤리학과 미학에 있어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에 대한 정의를 갖게 된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인정을 받기에 합당하다. 창조에 관한 기사에 이 사실에 대한 증거가 극명하게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신다고 가르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참조 사145:9; 14:17). 그의 공유적인 속성을 본받음에 있어 우리도 선을 행함으로써(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아야 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행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행할지라라고 말했다(6:10).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다른 속성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 중에는 사랑, 자비, 은혜 등이 있다.

 

 

7. 사랑(Love)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히 주신다는 의미이다. 이 정의대로 한다면,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속성은 다른 사람의 선이나 복을 위해 자신을 주는 것으로서, 그의 성품의 일부를 보여 준다.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다(요일 4:8). 우리는 이 하나님의 속성이 창조 전에도 삼위일체 안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17:24)에 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삼위일체에서 볼 수 있는 바 자기를 내어주는 일은 인간과의 관계, 특히 죄인과의 관계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바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2:20)에 관해 증거함으로써 죄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사랑을 인식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주기 위해 자신을 주는 것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목적임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 기쁨을 가져다 준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그렇게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래서 그는 영원토록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62:5).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음은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서도 볼 수 있다. 요한은 이를 아주 분명하게 증거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8. 자비, 은혜, 인내

 

하나님의 자비, 인내, 그리고 은혜는 각기 별개의 속성으로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여러 구체적인 면들로 볼 수 도 있다. 하나님의 자비는 불행과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인내는 어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향한 심판을 유보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한다. 자비의 특성은 종종 고난과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다윗이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삼하 24:14)라고 했고, 은혜라는 속성과 관련하여, 성경이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본다. 이 은혜는 절대로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9:15에서 인용됨)고 말씀하셨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서의 은혜는 특히 바울의 저술에 자주 나타난다. 바울은 강조하시기를,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은 인간 노력에 의한 구원에 반대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떄문이다. 신약,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죄사함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의 결과로 설명되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 15:10)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인내(patience)도 위에 인용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구절들에 함께 인용된 경우가 많다. 구약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34:6; 14:18; 86:15; 103:8; 145:8; 4:2; 1:3 ). 우리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아 노하기를 더디 하고(1:19), 그리스도처럼 고나 중에 오래 참아야 한다(벧전 2:20).

 

 

9. 거룩하심(Holiness)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분리되었으며 그의 영광을 추구하신다는 의미이다. 이 정의는 관계적인 특성(relational quality:으로부터의 분리)과 도덕적인 특성(moral quality: 죄 혹은 악으로부터의 분리와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의 선하심에 대한 집중)을 포함한다. 죄로부터의 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을 포함하는 바 거룩이라는 사상은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거룩이라는 단어는 성막과 성막에 있는 기구들을 묘사 하는 데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장소가 거룩한 곳이었다: “여호와의 산에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24:3).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신 분으로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불린다(71:22; 78:41; 89:18; 1:4; 5:19,24 ).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의 백성들이 본받아야 할 모형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명하시기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 참조 11:44-45; 20:26; 벧전 1:16)라고 하셨다. 새 언약의 신자들은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는 명령,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라는 명령을 받았다(12:10).

 

 

10. 화평(혹은 질서)

 

고린도전서 14:33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다. 전통적으로 화평과 질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독특한 속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성품을 제시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동은 무질서(헬라어로 akatastasia무질서, 혼란, 요란을 의미한다)가 아닌 화평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화평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의 화평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에는 무질서나 혼동이 없이 온전하게 질서있고 정돈된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심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하나님의 화평이 부동의 상태와 상관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있는 혹은 통제된 활동과 상관 있음을 보여준다.

 

 

11. , 공의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행동만을 하시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옳은 것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모세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면서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32:4)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된 의를 드러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적절한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의와 전능하심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그것이 우리의 기쁨과 감사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의로우시지만 의를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없으셨다면,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마침내 공의가 승리하리라는 확신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2. 질투

 

영어에서는 질투”(jealousy)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너희를 질투하노니”(고후 11:2)라고 한 것이 그 경우이다. 여기에는 진실하게 보호하며 주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예를 보호하기를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나 주 너의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인즉”(20:5)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의 질투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의 질투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예를 보호하기를 지속적으로 원하신다는 의미이다.

 

 

13. 진노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공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란 그가 모든 죄를 끔찍하게 싫어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교리는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구약 성경에만 있는 것은 아닌다. 요한복음 3:36을 보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라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바울도 비슷한 말을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18) 진노는 부정적인 개념이기 떄문에 처음에는 어떻게 이 속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도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질문을 던져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란 미워할 만한 것이고 끔찍하게 싫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될 것이다(3:25-26). 시편 103편에는 하나님의 인내와 진노가 함께 언급되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견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103:8-9). 그러므로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 받게 하려고 참고 기다리시는 그의 인내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D.목적의 속성들  

 

14.의지(Will)

 

하나님의 의지는 자신과 피조물의 존재의 활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이 일어나도록 승인하고 결정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 정의는 하나님의 의지가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무엇을 하시는가를 결정하는 일과 상관 있음을 보여준다.

 

1) 일반적인 하나님의 의지

성경은 종종 발생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증거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가리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1:11)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지음을 받았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4:110 신약과 구약은 모두 인간의 권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졌음을 증거한다. “권세는 하나님께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했다(13:1)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거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들은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4:27-28) 베드로전서 3:17에 기록된 것처럼,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2) 하나님의 의지의 다양한 구분  

(1)필연적 의지와 자연의지

전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분들이 하나님의 의지의 여러 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분 방법 중 하나는 자유의지와 필연적 의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연적 의지는 하나님의 본성대로 원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필연적으로 의도하셔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원히 자신이시기를 원하시고 뜻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영원히 스스로 있을 자이니라”(3:14).

 

하나님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꼭 그리하셔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하신 모든 것들을 수행하신다. 여기에는 우주를 창조하기로 한 하나님의 결정, 청조의 세부적인 부분들에 대한 결정,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수행하시는 일이 포함된다.

 

(2)계시된 뜻과 감추인 뜻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구분을 하나님의 계시된 뚯과 감추인 뜻의 구분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의 구분을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모세는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29:29)라고 했다. 계시된 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목적에 계시되었다:“우리로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15. 자유.

 

하나님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속성을 말한다.

이 정의는 피조물 중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16. 전능하심(능력, 주권).

 

하나님의 자유가 하나님의 결정을 제지할 외적인 힘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심 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부인하는 일은 원하거나 행하실 수 없다. 그래서 전능하심을 정의할 때 "그의 모든 거룩하신 뜻"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것이다. , 단순히 그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아니라 그의 속성과 일치하는 모든 일이다

 

 

E. 개요적인 속성 

 

17. 완전성.

 

하나님의 완전성이란 하나님께서는 모든 훌륭한 것을 다 갖추고 계시기 때문에 부족하거나 갖고 싶어하시는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18. 복되심.

 

하나님의 복되심 은 하나님은 자신과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모든 일에 심히 만족해 하심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는 하나님의 복되심이 나 행복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기에 합당하신 초점으로서의 하나님의 인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은 완전하게 행복하시며 그 자신 안에 기쁨이 충만하심을 이 정의는 강조한다

 

 

19. 아름다우심.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모든 바람직한 것들의 총체가 되게 하는 속성이다. 이 속성은 이미 언급한 여러 속성들 가운데 내포되어 있었고, 특히 하나님의 완전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20. 영광.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둘러싸고 있는 창조된 광명을 가리킨다. 이 속성은 다른 속성들과 같은 의미에서 속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세계에 드러내실 때에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창조된 광명한 빛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실질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탁월 하심에 대한 지극히 적절한 외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성품(비공유적) 

 

1. 하나님의 속성의 분류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논할 때,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한다.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지만 본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분류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비공유적 속성(incommunicable attributes: 하나님만 소유하고 있는 속성들)과 공유적 속성(communicable attributes: 우리와 함께 공유하는 속성들)으로의 분류방법을 채택하기로 한다. 비공유적 속성의 예로는 하나님의 영원성, 불변성, 무소부재 등을 들 수 있다. 공유적 속성으로는 사랑, 지식, 자비, 공의 등을 들 수 있다.

 

2.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이름

 

성경에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을 묘사해준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들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묘사들이다.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6:9),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성품을 정확하게 인식하며,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들을 소개하는 이 모든 이름들은 하나님의 참된 속성의 일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 우주에 있는 것들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에 관해 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신론에서 자연으로부터 취한 하나님의 이름들을 길게 열거했다. 하나님은 사자(31;4), 독수리( 32:1), 어린 양(53: 7), 암탉(23:37), 태양(84:11), 계명성(22:16), (27:1), 반석(32:4), 방패(84:11) 등으로 비유되었다. 바빙크는 인간의 경험에서 취한 이름들의 목록을 열거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신랑(61:10), 남편(54:5), 아버지(32:6), 목자(23;1), 의원(15:26)등으로 불렀다. 또 인간의 감정이나 인간의 지체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 모든 구절들을 위와 같이 정리한 것은 첫째,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인가 계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특히 더욱 온전하게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둘째,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아는 모든 것은 인간의 경험과 공통된 사건이나 일을 계시하기 때문에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사 우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의 위대함을 나타내도록, 즉 그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이 언어가 상기시켜 주어야한다는 것이다.

 

B.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1. 독립성(Independence)

 

하나님의 독립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나 다른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와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 속성은 때로는 자존성(aseity)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41:11)고 하셨다. 요한복음 17:5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삼위 사이에는 영원 전부터 완전한 사랑과 교제, 그리고 교통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독립성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지칭하신 표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즐거워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실이다.

 

2. 불변성(Unchangableness)

 

하나님의 불변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 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 완전성, 목적 그리고 약속에 있어서는 불변하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행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각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신다

 

1) 성경에 나타난 증거  

102편에서 우리는 땅이나 하늘처럼 영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과 하나님을 대조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기 전부터 존재하셨고, 그것들이 없어진 다음에도 존재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변하게 하시는 원인이시면서도, 그 변화와는 대조적으로 언제나 동일하신분이시다. 헬만 바빙크는 하나님이 그의 존재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을 유지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변치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하나님과 동일할 수 없음을 이사야를 통해 증거하신 바 있다.(46:9-11)

 

2)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기도 하시는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변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다든지 혹은 그의 백성이 기도나 회개(혹은 둘 다)를 할 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이미 선포하셨던 대로 심판하지 않기로 하신 사건들을 성경에서 접할 때 우리는 의아해 할 수도 있다.(32:9-14 ; 왕하 38:1-6 ; 3:4,10 참조)

 

3) 하나님의 무감각성에 대한 질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논하면서 하나님의 무감각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은 죄악된 정욕이나 감정은 소유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혀 감정을 가지고 게시지 않다는 생각은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상충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고(62:5), 슬퍼하신다(78:40; 4:30). 원수에 대한 진노가 타오르기도 하시고(32:10),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시며(103:13),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기도 하신다(54:8; 103:17).

 

4)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으로부터의 도전  

하나님의 불변성은 최근에 과정신학자들에 의해 종종 부인되곤 했다. 과정신학이란, 과정과 변화가 참된 실존의 본질적인 면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존재하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야한다는 신학적 입장이다. 과정 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찰스 핫트숀은 하나님도 우주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경험하심으로 지속적으로 변해간다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실존에 변화를 줌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중요성이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을 위해 만드시고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5)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시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동시에 인격적이시다. 하나님은 인간이나 피조 세계의 한계에 구속받지 않으신다는 점에서 무한하신다. 그분은 자신이 만드신 것보다 위대하시고,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하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에게 순종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로 인하여 즐거워하신다.

 

6) 하나님의 불변성의 중요성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이 처음에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변하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면, 이 교리의 중요성이 좀더 선명해질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 변하실 수 있다면(그의 존재, 완전함, 목적, 약속에 있어서) 그 변화는 결국 더 좋아지든지 더 나빠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불변하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무너져 버리기 시작하고, 우주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동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지식은 궁극적으로 의지하기에 합당하신 인격체이신 - 그는 그의 존재, 완전함, 목적 그리고 약속에 있어서 절대로 그리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3. 영원성(Eternity)

 

하나님의 영원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시작이나 끝, 혹은 순간의 연속이 없고 모든 시간을 똑같이 생생하게 보신다. 그럼에도 시간 안에서 사건과 행동을 관찰하신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불변성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불변하신다면, 시간도 하나님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해야한다. 즉 시간이 하나님의 존재, 완전함, 목적, 약속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1)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 시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는 사실을 시편 90:2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하나님이 언제나 게시거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는 여러 구절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참조 4:8).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현재의 존재(I AM)이시다. 하나님에게는 존재하기 시작한 때가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신 비물질적인 영이시라는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셨을 때 시간이 시작되었고, 순간과 사건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2)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동시에 생생하게 보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간을 동시에 보신다는 사실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시편 90:4에 보면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천년 전에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을 마치 우리가 어제의 일을 기억하듯이 기억하실 수 있다. 창조 이후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마치 방금 일어난 일과 같을 것이고, 영원한 미래에 수백만 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의식 속에서 언제나 선명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고 그 모든 것을 현재로 보실 수 있다.

 

3) 하나님은 시간 안에서 사건과 행동을 보신다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정의를 시간 안에서 사건과 행동을 관찰하신다고 마무리지어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창조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시간에 따라 일어난대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관찰하신다.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역사하시고 각 시점에서 다르게 행동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다.(17-30-31 참조) 구약에서 미래를 예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시간의 한 시점에서 예언을 하시고 나중에 또 다른 시점에서 그대로 이루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또한 더 넓은 의미에서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시간을 통해 취하신 행동에 대한 기록이다.

 

4) 우리는 언제나 시간 안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공유할 수 있을까? 특히 앞으로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시간이 여전히 존재할까? 우리가 제한된 피조물인 한,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천국에 있는 생명나무는 달마다 실과를 맺힌다고 했는데(22:2), 이는 시간의 흐름과 시간 속에서의 사건 발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경험하는 영생이란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종류의 영생이 아니라, 다만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 안에서의 경험을 가리킨다.

 

4. 편재성(Omnipresence)

 

하나님은 시간과의 관련해서 무한하실 뿐만 아니라 공간에 있어서도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는 편재성(偏在性)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 될 수 있다: 하나님은 크기나 공간적인 차원을 갖지 아니하시며, 모든 공간에 자신의 전 존재로 현존하시며, 또한 각각의 상이한 장소에서 상이하게 행동하신다.

 

1) 하나님은 모든 곳에 편재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어디에나 계시다고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구절들이 있다. (23:23-24)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성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한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139:7-10) 다윗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 인격체로서 모든 공간에 존재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하나님은 공간적인 차원을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가 모든 공간에 편재하신다고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그 어느 공간에도 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크기나 치수 없이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물질이나 사물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셨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임재해 계시지만, 피조물과는 엄연히 다르다.

 

3)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거나 보호하시거나 벌주시기 위해 임재하실 수 있다 

종종 하나님의 편재성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에 계실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준다. 사실 지옥이란 하나님의 실존의 반대, 혹은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다른 장소에 다른 방법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 혹은 하나님은 그의 창조 세계 가운데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르게 행동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해결될 수 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 임하기도 하신다.(9:1-4 참조) 또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거나 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주를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운행되도록 하기 위해 임재하신다. 이러한 경우 그리스도의 신성은 어디에나 편재해 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임재하신 경우도 있다.(16:11) 성경이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 언급한 대부분의 경우는 복을 주기 위한 임재를 가리킨다.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의 처소로 택하신 곳이 이 땅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천국이라고 부른 한 장소를 택하셨는데, 이 장소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그의 성품과 축복을 나타내는데 핵심이 되는 곳이다.

 

5. 통일성(Unity)

 

하나님의 통일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각각 다른 시간에 강조된 다른 하나님의 속성을 본다. 모든 속성은 온전하게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모든 성품에 관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고 성경은 전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 존재가 그의 모든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그는 온전히 사랑이시며, 온전히 자비로우시며, 온전히 의로우시다.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모든 존재에 대한 진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각 속성은 단지 하나님의 전체적 성품의 일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속성에 있어 완전하도록 완전히 통일되고 하나가 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며 그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은 모든 그의 속성들과 일치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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