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하나님의 형상 

 

국어사전에 보면 “본체(本體)”란?‘사물의 정체’를 의미하고, “형체(形體)”는?‘물건의 생김새나 그 바탕이 되는 몸체’를 의미하며, “형상(形象)”은?‘사물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 혹은 마음과 감각에 의하여 떠오르는 대상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표현함. 또는 그런 형태’를 의미한다고 돼 있습니다. 또 “모양(模樣)”은 ‘겉으로 나타나는 생김새나 모습’을 의미하고, “모습”은?‘자연이나 사물 따위의 겉으로 나타난 모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즉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사람도 만드셨습니다(창 5:1~2). 여기서 ‘모양이 같다’는 말은 겉으로 나타난 생김새나 모습이 같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즉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사람도 만드셨습니다(창 5:1~2). 여기서 ‘모양이 같다’는 말은 겉으로 나타난 생김새나 모습이 같다는 말이 됩니다.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이렇게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고후 4:4, 골 1:15)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며(빌 2:6),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아버지 품속에 독생 하신 아들이 나오실 때만 볼 수 있습니다.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ποστ?σεω?)의 형상(χαρακτ?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3)

 

이때 하나님의 아들을 “본체의 형상”이라 했는데, 이때 “본체(?ποστ?σεω?)에 해당하는 단어는 ‘위하여(?πο)’와 서다(?στημι)’의 합성어로 돼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확실한 것’, ‘실상’, ‘믿던 것’, ‘기탄없이’ 등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정체’를 의미하는 ‘본체’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9:4)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고후 11:17)

 

그리고 3절의 “형(χαρακτ?ρ)은 갈라디아서 4장 19절의 ‘형상’이나 골로새서 3장 10절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일부 성경(새번역)은 ‘모습’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 단어는 성경의 다른 곳에는 쓰인 예가 없으므로 뭐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형상보다는 ‘모습’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μορ?ωθ?)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ε?κ?να)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에서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했는데, 이는 만유의 후사가 되시고 또 창조자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실제 하나님의 모습을 갖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 믿던 하나님의 실상은 곧 실제 모습은 예수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빌립보서 2장의 “본체”는 어떻습니까?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분이라 했습니다. 또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μορ??ν)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μορ??)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여기서는 같은 단어 모르페(μορ??)가 ‘본체’와 ‘형체’로 각각 번역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는 모두 ‘형체’란 단어로 통일해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μορ??)는 본래 내적 특성과 성품을 겉으로 그대로 드러난 모습, 곧 외적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특성과 성품을 지니신 그가 사람의 모습으로 그 속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특성과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신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면 그대로 그의 성품이, 곧 그의 생명이 나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 따라 그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의나 성품을 그대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과 성품이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도록 만든 모든 조건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그의 모양대로’입니다.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위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 하였는데, 이때 ‘취할 것’이란 말은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얻은 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시고, 또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을 형체를 입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6] 그는 하나님의 형체(μορ??ν)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나 [7]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을 형체(μορ??)를 입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느니라. [8]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빌 2:6~8, 한글킹제임스성경)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된 것이 하나님과 맞서는 행동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곧 동등해도 무방한 그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가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을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말은, 곧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인데(요 1:14), 이는 달리 말하면 그가 여자에게 나셨다는 말입니다. 그가 이같이 되심은 아들로 충성하기 위함인데, 이것만이 구원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μοι?ματι)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5~6)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9)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받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시고, 또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려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신 것입니다.

위의 ‘본체’와 ‘형체’에 해당되는 단어(μορ??)를 영어 성경에서는 대부분 (form)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새번역성경에서는 이를 ‘모습’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6장 12절과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도 쓰였는데, 이때도 (form)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2~13)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말은 그의 (form)을 이룬다는 말인데, 이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자세나 태도를 취해 그와 같은 (form)을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예정하셨는데, 이제 우리는 내 낮은 이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되도록 그분께 온전히 복종해야 합니다. 여기서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나 “형체와 같이” 하는 말은 곧 형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συμμορφ?? = συν + μορφ?).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ε?κ?νο?)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αυμμ?ρ?ου?)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α?μμορ?ον) 변케 하시리라”(빌 3:21)

 

모르페(μορ??)와 그의 파생어들이 개역성경에서는 ‘모양’(막 16:12), ‘본체’, ‘형상’, ‘형체’ 등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으나 단어 통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형체”나 “(form)”으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모르페(μορ??)와 같이 소마(sw/ma)도 ‘형체’로 번역된 곳이 있는데, 이 또한 혼란이 예상되므로 구분이 필요합니다. 소마(sw/ma)가 대부분은 ‘몸’으로 번역되었고 일부는 ‘시체’ ‘육체’로 번역되었으니, 이 경우도 그 단어의 고유 의미를 살려 번역함이 마땅합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ε?κ?να)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고전 15:40)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sw,mata)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7~38)

 

성령이 형체(swmatikw/|)로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2)

 

즉 “하늘에 속한 형체”는 ‘하늘에 속한 몸’으로, “장래 형체”는 ‘장래 몸’으로, “성령이 형체로” 하는 말도 ‘성령이 몸으로’ 하는 식의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 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형상은 ‘아이콘’ 혹은 ‘이미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이미지, 곧 아이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ε?κ?ν)니라”(고후 4:4)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ε?κ?ν)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 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이 형상을 원문에는 에이콘(eivkw.n)이라 하였는데, 이 단어는 본래 ‘…와 같다’는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이를 영어로는 이미지(image)라 하는데, 새번역성경에서는 ‘형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이콘이미지이시므로, 내게서 그분의 이미지가 보여지고 나타나야 합니다. 내 이미지가 아닌 그분의 이미지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지으신 자의 이미지를 좇아 지식에까지 새로워져야 하며, 마침내는 저의 같은 이미지로 화해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ε?κ?να)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ε?κ?να)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주님의 이미지를 갖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주님의 이미지가 없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그 이미지가 없거나 그 이미지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개역성경에서 ‘형상’(히 10:1), ‘화상’(막 12:16, 눅 20:24), ‘우상’(계 13:14) 등으로 번역돼 있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ε?κ?ν)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ε?κ?να)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ε?κ?να)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렇게 에이콘(이미지)를 ‘형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무방하나, 그럴 경우 다른 데서 ‘형상’으로 사용되는 이데아(eivde,a 혹은 ivde,a)는 다른 말로 바꾸어 쓸 필요가 있습니다. 곧 ‘모습’, ‘외양’, ‘나타남’ 등으로 바꿔 써야 합니다.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eivde,a)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 28:2~4)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사람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창 5:1~2). 여기에 보면 ‘형상’과 ‘모양’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image)을 따라 우리의 모양(likeness)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likeness) 곧 자기 형상(image)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1~3)

 

여기서 ‘형상’은 ?-렘(tzeh'-lem, image)이란 단어인데 대개는 ‘형상’(창 1:27; 5:3; 9:6), ‘우상’(겔 7:20), ‘석상’(삼상 6:5)으로 번역되었고, 예외적으로 ‘그림자같이’(시 39:6)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를 70인역에서는 모르페(morfh/|)가 아닌 에이콘나(eivko,na/|)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때 ‘모양’은 히브리어로 드무트(d'mooth, likeness)라 하여 ‘같다’는 의미를 지닌 다마에서 나왔습니다. 대개는 ‘형상’(창 5:1, 3), ‘모양’, ‘식양’으로 번역되었고, 일부에서는 ‘같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이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즉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이미지로 지음 받았고, 사람의 몸은 흙에서 취하였으니 마침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네솨마)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네페쉬)이 된지라”(창 2: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여기서 ‘생기’는 ‘산 기운’, ‘산 호흡’을 의미하고, ‘생령’은 ‘산 생명’, ‘산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보면, 살게 하는 기운(호흡)을 코에 불어 넣으니까 산 사람 곧 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영적 존재로 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전 15:45~46)

 

사람은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고,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갑니다. 즉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혼(혹은 神, 7307)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5397)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루아흐, 7307)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 42:5)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7307)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의 (7307)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7307)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19~21)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7307)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여기서 “혼”으로 번역된 것은 아주 이례적이라 경우로 봐야 합니다.

이 두 구절을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는 ‘짐승의 혼’을 ‘짐승의 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19] 이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닥치는 일이 짐승들에게도 닥침이니, 곧 한 가지 일이 그들에게 닥치는도다. 하나가 죽는 것처럼 다른 것도 죽으니, 정령, 그들 모두가 한 호흡을 가졌도다. 그러므로 사람이 짐승보다 월등함이 없으니, 이는 모든 것이 헛됨이라. [20]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왔고 모두가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도다. [21]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19~21)

 

“그때에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곳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

 

이 ‘루아흐(ruach)’는 성경에 ‘마음’, ‘심령’, ‘영(혹, 神)’ ‘바람’, ‘숨’, ‘호흡’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돼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이나 ‘신’으로 많이 쓰으고 있는데, 하나님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신’(출 35:31), ‘여호와의 신’(삿 3:10; 14:6, 19), ‘성신’(대상 12:18; 28:12)으로 쓰이고 있고, 천사를 의미할 때도 쓰였습니다(왕상 22:21~23, 삼상 16:15~23). 많은 경우 ‘바람’으로 쓰이고 있습니다(창 8:1, 출 14:21).

승의 혼은 루아흐(ruach)입니다. 그래야 그들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교회는 만물 위에 있고 만물을 충만케 하는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엡 1:22~23). 이제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될 때 각종 짐승 중에서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그날에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사 65:25).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9)

 

[6]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이렇게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합 2:14), 하나님은 사람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시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됩니다. 그곳에는 짐승의 잔인성마저 다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모든 들짐승이 하나님을 존경하게 됩니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겔 34:25)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20)

 

하나님은 이 같은 일을 위해 짐승과도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는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리 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도 그분의 말씀을 들어 순종합니다.

 

“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호 2:18)

 

[3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32]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33]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3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35]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시 105:31~35)

 

우리가 ‘고양이는 영물(靈物)이다’ 할 때 그것이 영적 존재라는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신령스러운 짐승’이란 의미로 쓰는바, 이렇게 짐승도 루아흐로 지었다는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큰 관심은 하나님의 이미지로 지으신 우리 영혼에 있습니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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