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성경개역한글 성경, 개역개정 성경의 비교

 

 

(바른 성경에 관하여... 개역개정과 개역한글의 오역을 보완하겠다는 의지로 구약학자 20명, 신약학자 15명, 국어국문학자 5명이 1999년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2009년 4월에 '한국성경공회'가 초판 발행하였습니다.) 

 

이 소책자의 목적은 한국성경공회에서 2008년 9월에 출판한 바른 성경과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개역/개정 성경을 비교하여 그 차이점들을 나타내면서, 개역/개정에 나타난 번역상의 오류들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예들 가운데는 개역과 개정이 모두 잘못된 구절들이 있으며, 개역은 옳으나 개정이 잘못 번역된 구절들, 혹은 그 반대로 개역은 잘못되었으나 개정이 옳게 번역된 구절들도 있다. 이 소책자에는 구약의 95개 구절과 신약의 18개 구절이 언급되었는데, 이것들은 많은 차이점들 중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 책에서 <개역>은 성경전서 개역한글판(1995년)을 가리키며, <개정>은 성경전서 개역개정판(2007년)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른>은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2008년)을 가리킨다.

 

 

구약

 

1. 창세기 6:2

<개역/개정>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바른> 각자 자기들이 선택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히브리어 동사 “바하르”는 “선택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개정의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2. 창세기 9:27

<개역/개정>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른> 하나님께서 야벳을 크게 하시고, 셈의 장막에 거하시며,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될 것이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하고,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며,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될 것이다.”이다. 개역이나 개정처럼 둘째 부분의 동사를 사역형(“거하게 하시고”)으로 번역할 이유는 전혀 없다. 문자적으로 번역하였을 때 둘째 부분의 주어인 “그”가 누구인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세 아들인 야벳과 셈과 가나안(= 함) 각각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둘째 부분을 개역과 개정처럼 번역하였을 때,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야벳과 가나안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을 주시는 것이 된다. 따라서 둘째 부분을 셈에 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한다면, 셈의 장막에 거하시는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둘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시며”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다.

 

 

3. 창세기 11:26

<개역/개정>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바른> 데라는 칠십 년을 살고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개역과 개정은 데라가 70세가 되는 그 해에 그의 세 명의 아들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칠십 세에 적어도 아브람을 낳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아브람은 데라가 칠십 세일 때 낳은 아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데라가 칠십 년을 살고 난 뒤, 어떤 때에 아들들을 낳았다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을 오해하지 않게 할 것이다.

 

 

4. 창세기 25:8, 17; 35:29; 49:33; 신명기 32:50

<개역/개정>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바른> 죽어 자기 백성에게 합류하니

 

여기서 개역과 개정이 히브리어 “암”을 “열조”라고 번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열조”는 히브리어 “아보트”를 번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은 백성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개역과 개정이 히브리어 동사 “아샆”을 “돌아가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동사의 기본적인 의미는 “모으다” 이다. 그러므로 “합류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5. 출애굽기 12:3

<개역>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지니

<개정> 너희 각자가 어린양을 잡을지니

<바른> 각 사람이 어린 양을 마련하되

 

개역은 12:3의 히브리어 동사 “라카흐”를 “취하다”로, 12:6의 동사 “샤하뜨”를 “잡다(=죽이다)”로 번역한다. 그러나 개정은 두 동사를 모두 “잡다(=죽이다)”로 번역하여 혼란을 일으킨다. 12:3의 “라카흐”는 개역처럼 “취하다”로 번역하거나, 바른 성경처럼 “마련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6. 민수기 23:20

<개역>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개정>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바른> 또 그분께서 축복하셨으니,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개정은 발람이 “나의 의지로 내가 그 복을 돌이키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번역하였다. 그러나 문맥에 따르면 발람이 복을 돌이키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막으셔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바른 성경의 번역을 따라야 한다.

 

 

7. 신명기 1:11

<개역/개정>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바른>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바란다

 

허락하는 것은 요청을 승낙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개역/개정의 번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요청에 따라 복을 주셨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원문은 “딥베르”로서 단순히 “말하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번역들이 택하는 바와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혹은 “약속하신 바와 같이”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8. 신명기 1:21

<개역/개정>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바른>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는 올라가서 차지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마라.

 

원문의 “하타트”는 무서워서 크게 당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겁내지 마라” “놀라지 마라” 혹은 “당황하지 마라”로 번역해야 좋다.

 

 

9. 신명기 1:41

<개역/개정>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대로

<바른>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개역과 개정은 원문에 있는 “여호와”를 빠뜨리고 번역하였다.

개역과 개정을 제외한 모든 번역들이 원문에 따라 “여호와”(혹은 “주”)를 넣어 번역하고 있다.

 

 

10. 신명기 2:36

<개역/개정>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취하지(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른> 우리보다 더 강한 성읍은 하나도 없었으며

 

원문에 따르면 이 구절은 “우리보다 더 높은 성읍은 하나도 없었다.” 이다.

이 구절의 문자적인 의미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개역과 개정은 지나친 설명을 첨가시켰다.

원문에 보다 적절하게 번역한다면, “우리보다 더 강한 성읍은 하나도 없었다.”가 될 것이다.

 

 

11. 신명기 3:4

<개역/개정> 우리가 그들에게서 빼앗지 아니한 성읍이 하나도 없이 다 빼앗았는데

<바른>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여 그들에게서 빼앗지 않은 성읍이 하나도 없었으니

 

개역과 개정에 따르면 “빼앗다”라는 단어가 두 번 나타난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두 단어가 서로 다르며, 그 중의 한 단어는 “점령하다”의 뜻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번역해야 할 것이다.

 

 

12. 신명기 3:8

<개역/개정> 요단 강 이편(이쪽)

<바른> 요단 강 건너편에 있는

 

원문에서는 “요단 강 건너편 땅”으로 되어 있다. 개역과 개정은 의도적으로 원문을 무시하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문구는 요단강 동편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원문에 따라 “요단 강 건너편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3. 신명기 3:27

<개역/개정>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바른>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바라다”라는 표현은 “소원하다”를 뜻한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개정의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소원하고”라는 번역은 뜻이 통하지 않는다. 사실상 원문에는 이 단어가 들어있지 않다. 개역이나 개정은 원문에도 없으며, 한글 어법에도 맞지 않는 단어를 삽입하였다. 원문의 의미를 살린다면 “동서남북을 향하여 네 눈을 들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아라.” 일 것이다.

 

 

14. 신명기 4:7

<개역/개정>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바른>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하신 것과 같이

 

원문의 “카라”는 단순히 “부르다”를 의미한다.

이것을 구태여 “기도하다”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제한시키게 된다.

 

 

15. 신명기 11:6

<개역> 곧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열어서 그들과 그 가족과 그 장막과 그를 따르는 모든 생물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개정>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바른> 곧 이스라엘 한 가운데서 땅으로 입을 벌려 그들과 그들의 집과 장막과 그 이스라엘 가운데 그를 따르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삼켜버리게 하신 일이다.

 

개정은 그들을 따르는 것이 이스라엘인 것으로 번역하였으나, 원문에 따르면 그들을 따르는 것은 모든 생물이다.

개정은 생물(히브리어 “예쿰”)이라는 단어 자체를 빠뜨렸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바른 성경을 따라야 한다.

 

 

16. 신명기 12:11

<개역>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개정>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바른> 여호와께 바치기로 서원한 모든 아름다운 서원 제물을 가지고 가서

 

원문에 따르면, 가져가야 할 서원물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다. 개역이나 바른 성경의 번역을 따라야 한다.

개정은 개역의 문장에서 띄어쓰기를 잘못하여 발생한 착각일 수도 있겠다.(여호와께 서원하는 → 여호와께서 원하는)

 

 

17. 신명기 29:4

<개역>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개정>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바른> 오늘날까지 너희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다

 

원문에 사용된 전치사 “아드”는 “∼까지”의 뜻이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오늘날까지”라고 번역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오늘의 시점에서만 주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지금까지 주지 아니하셨다.

 

 

18. 사사기 4:5

<개역/개정> 그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바른> 드보라가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앉아 있었고

 

개역이나 개정은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살았다는 뜻으로 본문을 번역했다.

그러나 드보라가 집에 거주하지 않고 종려나무 아래 거주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야샤브”는 “앉아 있다, 살다”의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본문을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19. 사사기 6:34

<개역>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개정>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바른>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두르시니

 

흔히 “여호와의 영이 임하신다 혹은 강림하신다” 라고 할 때 사용되는 동사는 히브리어 “하야”이다.(참고 삿3:10) 그러나 여기서는 특이한 단어 “라바쉬”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옷을 입다”이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을 둘렀다.”고 번역하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린 것이다.

 

 

20. 사사기 13:13-14

<개역/개정>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바른> 내가 네 아내에게 말하였던 모든 것을 그 여자는 지켜야 한다. 그 여자는 포도나무의 소산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고,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며, 부정한 것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고 내가 그 여자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

 

개역과 개정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할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독자들은 “그”가 앞으로 태어날 삼손일 것으로 흔히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원문은 주어가 여성인 것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할 주체가 “그 여자”인 것을 명시하여 번역해야 한다.

 

 

21. 사사기 14:20

<개역>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 바 되었더라

<개정>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

<바른> 삼손의 아내는 그의 친구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삼손의 결혼식 들러리였다.

 

개정의 “친구였던 친구”라는 번역은 “친구였던 동무”라는 개역의 번역보다 더 어색하다.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리려면, “결혼식 들러리였던 친구”라는 의미로 번역해야 한다. 사사기 15:6에서도 개역의 “동무”와 개정의 “친구”를 “들러리”로 번역해야 한다.

 

 

22. 사무엘상 2:9

<개역/개정>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바른> 그분께서 경건한 자들의 발걸음은 지켜 주시나

 

개역과 개정은 히브리어 “하시딤”을 거룩한 자들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단어는 “경건한 자들” 혹은 “신실한 자들”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23. 사무엘상 2:17

<개역/개정>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심히 큼은

<바른> 그 젊은이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서 매우 큰 것은

 

원문의 “나아르”는 소년이나 청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본문에서 소년들은 엘리의 아들로서 이미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소년들”이라고 번역하기보다 “청년들” 혹은 “젊은이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24. 사무엘하 1:19, 25, 27

<개역/개정>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바른> 어찌하여 용사들이 쓰러져 있는가?

 

원문에는 복수인 “깃보림”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두 용사”가 아니라 “용사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25. 사무엘하 19:43

<개역/개정>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바른> 우리 왕을 모셔오자고 처음 말한 사람이 우리가 아니냐?

 

삼하19:8-14의 내용을 보면, 다윗 왕을 모셔오는 일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계획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바른 성경처럼 번역되어야 옳을 것이다.

 

 

26. 사무엘하 22:5

<개역/개정>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바른> 사망의 물결이 나를 휘감고 파멸의 홍수가 나를 두렵게 했으며

 

이 구절의 전반부는 시인에게 “사망을 주는 물결”을 언급하며, 후반부에서는 시인에게 “벨리야알을 주는 홍수(= 창수)”에 관해 말한다. 개역과 개정은 벨리야알을 불의라고 번역하였다. 벨리야알을 불의라고 번역한 것은 이 단어의 의미를 충분히 살렸다고 볼 수 없다. “벨리야알”은 기본적으로 “무가치하고 천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불의”와는 다른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문장의 구조에 따르면 “불의의 창수”라는 것은 시인에게 “불의를 주는 창수(=홍수)”라는 뜻인데, 시인에게 불의를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이며, 그것이 왜 시인을 두렵게 하는지 알기 힘들다. 그러므로 다수의 번역 성경들이 벨리야알을 “파멸”로 번역한다. 무가치하게 되는 것은 파멸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 벨리야알이 파멸로 번역되는 것은 적절하다. 또한 시인은 자기에게 “파멸을 주는 홍수”로 인하여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의미가 쉽게 전달된다.

 

 

27. 사무엘하 24:16

<개역/개정>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바른> 그 때에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였으나 ∼ 그 백성을 죽이는 천사에게 말씀하시기를 ∼ 그 때 여호와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다.

 

이 구절에는 동일한 히브리어 “말아크”(“천사”)가 세 번 사용되어 있다. 그러나 개역과 개정은 앞의 두 번만을 “천사”로 번역하고, 뒤의 것은 “사자”로 번역하여서, 뒤의 “사자”가 앞의 “천사”와 다른 존재인 것 같은 잘못된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세 번 모두 “천사”라고 번역해야 한다.

 

 

28. 열왕기상 10:29

<개역>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도 그 손으로 내어왔더라

<개정>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에게 그것들을 팔기도 하였더라

<바른> 헷 사람의 왕들과 아람 왕들에게 무역상들을 통해 수출하였다

 

원문의 “베야담”을 개역은 “그 손으로”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베야담”의 문자적인 의미(“그들의 손으로”)를 충실하게 반영한 해석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역의 해석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이 구절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손”이라는 말은 28절에 언급된 “무역상들의 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무역상들을 통하여”라고 번역되는 것이 적절하다.

 

 

29. 열왕기하 11:12

<개역/개정>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매

<바른> 여호야다가 왕자를 모시고 나가 그에게 왕관을 씌우고 왕의 문서를 넘겨주었으며, 사람들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니

 

개역과 개정은 여호야다가 왕자 요아스에게 율법책을 주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율법책”이란 표현은 모세의 율법책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에두트”는 모세의 율법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직무와 규례를 규정한 문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왕의 문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또한 개역과 개정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는 것이 모두 여호야다가 직접 행한 일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여호야다는 면류관을 씌우고 율법책을 주는 것까지 하였고, 그 다음의 과정들 곧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는 것은 익명의 사람들이 행한 일이었다. 이것은 원문에서 주어가 처음에는 “그”였지만 나중에는 “그들”로 바뀐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30. 열왕기하 23:29

<개역/개정>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바른> 그 시대에 이집트 왕 바로 느고가 아시리아 왕에게 가려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개역과 개정은 이집트의 왕 느고가 아시리아를 공격하려고 북진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원문의 전치사 “알”이 “공격하려고”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치사 “알”이 반드시 “공격하려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알”은 단순히 “∼에게로”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또한 개역과 개정의 번역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 이 때 느고는 아시리아와 군사 동맹을 맺고 있었고, 아시리아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북진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아시리아 왕을 치고자 하여”로 번역할 수 없으며, 단순히 “아시리아 왕에게로”라고 번역해야 한다.

 

 

31. 열왕기하 25:6

<개역/개정>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바른> 리블라에 있는 바빌로니아 왕에게로

 

개역과 개정은 립나와 리블라를 여러 번 혼동하고 있다. 립나는 가나안 땅에 있는 지명이며(민33:20, 21; 수10:29, 31, 32, 39; 12:15; 15:42; 21:13; 왕하8:22; 19:8; 23:31; 24:18; 대상6:57; 대하21:10; 사37:8; 렘52:1), 리블라는 하맛 땅에 있는 지명이다.(민34:11; 왕하23:33; 25:6, 20, 21; 렘39:5, 6; 52:9, 10, 26, 27; 겔6:14) 시드기야는 하맛 땅 리블라로 압송되어 갔다.

 

 

32. 역대상 25:1, 2, 3

<개역/개정>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바른> 예언하는 자들로 봉사하게 하였으니

 

원문의 히브리어 동사 “나바”는 “예언하다”의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하다.”라는 번역보다는 “예언하다”라는 번역이 더욱 적절하다.

 

 

33. 느헤미야 1:3

<개역/개정>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허물어지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바른>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고, 그 성문들도 다 불에 탔습니다

 

성이 훼파되었다는 것은 성벽과 성안의 가옥들을 포함하여 성의 건축물들이 전체적으로 무너졌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원문은 “호마트”를 사용하여, 무너진 것이 성벽만인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므로 개역과 개정의 “성”을 “성벽”으로 고쳐야 한다.

 

 

34. 느헤미야 7:3

<개역/개정>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바른> 해가 떠서 더워지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원문의 “홈”은 “뜨겁다”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개정처럼 “높이 뜨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35. 느헤미야 7:3

<개역> 각기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개정>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바른> 보초를 세우되, 일부는 자기 초소에서 하고

 

원문의 “미쉬메레트”는 “반차를 따라서”가 아니라, 개정처럼 “지키는 곳”이나 혹은 바른 성경처럼 “초소”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도 이와 같이 번역한다.

 

 

36. 에스더 2:6

<개역/개정> 예루살렘에서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바른> 그도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혀 왔다.

 

개역과 개정은 유다왕 여호야긴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가 될 때(597 BC) 모르드개 역시 같이 포로가 되었다고 번역한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여호야긴 때로부터 110년이 더 지난 아하수에로 왕 시대(485-465 BC)에 관리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개역과 개정의 번역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 더욱이 원문에는 모르드개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잡혀온 사람의 이름을 명기하지 않아야 한다.

 

 

37. 욥기 11:12

<개역/개정>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바른>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미련한 사람이라도 지혜롭게 될 것이다

 

“허망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미련한 사람”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또한 이 구절의 뒷부분은 앞 문장의 종속절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38. 욥기 14:16

<개역/개정>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바른> 주께서 지금 나의 발걸음들을 세시지만 더 이상 나의 죄를 살피시지 않을 것입니다.

 

개역과 개정은 이 구절의 의미를 상당히 모호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이 구절을 의문문으로 번역함으로써, 욥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감찰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문이 아니라, 바른 성경처럼 평서문으로 번역해야 뜻이 분명해진다.

 

 

39. 욥기 19:26

<개역/개정>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바른> 나는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볼 것이다

 

원문에서는 전치사 “민”(from)이 명사 “육체”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많은 영어 번역본들처럼 “육체 안에서”(“in the flesh”) 혹은 “육체로부터”(“from the flesh”)라고 번역해야 한다.

개역이나 개정과 같이 “육체 밖에서”라고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40. 욥기 29:4

<개역> 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개정>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바른> 그 때는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내 장막 위에 있었고

 

원문의 “소드”는 “친밀함”이나 혹은 “우정”으로 번역할 수 있다.

개정의 “기름을 바르다”라는 번역은 본문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있다.

 

 

41. 욥기 30:8

<개역/개정> 그들은 고토에서 쫓겨난 자니라

<바른> 그들은 자기 땅에서 채찍으로 쫓겨난 사람들이로구나

 

원문의 동사 “나카”는 단순히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채찍에 맞아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42. 욥기 33:23

<개역>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개정> 만일 일천 천사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중보자로 함께 있어서

<바른>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한 중보자 천사가 사람에게 있어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원문의 “멜리츠”는 개역처럼 “해석자”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바른 성경처럼 “중보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또한 원문에 “중보자”라는 말이 “천사”라는 말과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개정처럼 “그 사람의 중보자”라고 번역하기보다, 바른 성경처럼 “천사 곧 중보자” 즉 “중보자 천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43. 욥기 35:3

<개역>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개정> 그대는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바른> 주께 무슨 유익이 있으며

 

개역에서는 누구에게 유익이 되는지 표시하지 않았으나, 개정에서는 “내게” 소용(=유익)이 된다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라크” 즉 “당신께” 혹은 “주님께”라는 단어가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주께 무엇이 유익이며”라고 번역해야 한다.

 

 

44. 욥기 37:20

<개역/개정>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

<바른> 어찌 삼키우기를 바란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개역이나 개정은 원문에 있는 동사 “아마르”(“말하다”)를 삭제하였다.

본문의 의미는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라는 뜻이므로 바른 성경이 옳다.

 

 

45. 시편 1:6

<개역/개정>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바른> 참으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아시지만

 

히브리어 동사 “야다”는 매우 폭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개역이나 개정처럼 “인정하다”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가 크게 축소된다. 그러므로 원문의 “야다”를 살려서 “알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영어 번역들도 대부분 “the Lord knows”라고 번역한다.

 

 

46. 시편 7:14

<개역>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개정>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바른> 그는 악으로 진통하며 재앙을 잉태하고 거짓을 낳는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어 동사 “하발,” “하라” 그리고 “얄라드”가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이 세 가지 단어들은 모두 여성의 임신과 해산의 과정과 관련된다. 개역과 개정은 모두 첫째 동사 “하발”을 비슷한 단어들인 “해산하다”와 “낳다”로 잘못 번역하였다. “하발”은 여성이 자녀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진통하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47. 시편 10:3

<개역/개정>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바른> 탐욕을 부리는 자가 여호와를 저주하며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바라크”는 “욕하다” 혹은 “저주하다”의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개정의 “배반하다”는 적당하지 못한 번역이다.

 

 

48. 시편 10:13

<개역/개정>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바른> 주님은 문책하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어 동사 “다라쉬”는 “찾는다”라는 뜻으로서, 이 문맥에서는 잘잘못을 따져서 책임을 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역과 개정의 “감찰하다”는 “감시하고 지켜본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역과 개정의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바른 성경처럼 “문책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49. 시편 19:3

<개역>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개정>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바른> 언어가 없고 말이 없으며 그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나

 

원문은 “없다”라는 부정어가 세 번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어를 두 번 밖에 사용하지 않는 개역은 본문을 지나치게 단순화 하여 원문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개정은 비교적 좋은 번역이다. 단지 “들리는 소리가 없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음성이[=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조금은 더 원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50. 시편 27:1

<개역/개정>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바른> 여호와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이시니

 

히브리어 “마오즈”는 “피난처” 혹은 “요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내 생명이 여호와 안에서 피난처를 발견한다.”라는 의미이다. 개역이나 개정처럼 “능력”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다소 왜곡하게 한다.

 

 

51. 시편 34:3

<개역/개정>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바른> 너희는 나와 함께 여호와를 칭송하여라

 

히브리어 동사 “가델루”는 여호와를 “광대하게 만들어라”는 뜻이며, 그분이 광대하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호와를 “광대하게 만든다”는 것은 히브리식 표현으로서 여호와를 “칭송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너희는 여호와를 칭송하여라” 하고 번역해야 한다.

 

 

52. 시편 34:5

<개역>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 하리로다

<개정>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 하리로다

<바른>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광채가 났으니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개역은 원문에 없는 단어 “영영히”라는 말을 불필요하게 삽입하고 있다. 또한 개정의 번역에서 “광채를 내었으니”라는 말은 어법상 어색하다. 몸의 광채는 스스로 나는 것이지, 의도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광채가 났으니”라고 표현해야 올바르다.

 

 

53. 시편 35:19

<개역>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개정> 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바른> 내 대적들이 나로 인하여 부당하게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고

 

히브리어 “쉐케르”에 대하여 개역의 번역 “무리하게”는 어색한 표현이므로, 개정이나 바른 성경처럼 “부당하게”로 고치는 것이 적절하다.

 

 

54. 시편 39:13

<개역/개정>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바른> 나를 응시하지 마시고,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를 웃게 하소서

 

히브리어 동사 “샤아”는 “응시하다”의 뜻이므로, 이것을 “용서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지나치게 의역한 것이며, 본문의 뜻을 제한할 수 있다. 또한 히브리어 동사 “발라그”는 “미소를 짓게 하다”의 뜻을 가진다. 여기서도 개역이나 개정처럼 “건강을 회복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번역자의 주관적 해석이 많이 가미된 것이다.

 

 

55. 시편 40:5

<개역>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개정>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바른> 아무도 주님과 견줄 자 없습니다. 내가 선포하고 말하려 하나 그 수를 셀 수 없습니다

 

개역이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것은 “아무도 주님과 견줄 자 없습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개정은 비교적 번역이 잘 되었으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원문에 없는 수식어들(“널리”, “너무 많아”)을 첨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첨가는 불필요하다.

 

 

56. 시편 40:6

<개역>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 하시며

<개정>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 하시며

<바른> 주께서는 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내 귀를 열어 주셨으며

 

히브리어 동사 “카라”는 “구멍을 뚫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개역과 개정은 본문에 없는 “들려주시다”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말을 끼워 맞추었다. 그러나 원문의 구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과 귀의 구멍을 뚫으시는 것이 병렬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기뻐하지 않으시고, 내 귀를 열어주셨으며”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57. 시편 111:2

<개역>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개정>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바른> 이를 즐거워하는 모든 자가 탐구하는구나

 

원문의 “다라쉬”는 “찾다”를 의미한다. 반면 개정에서 택한 단어 “기리다”는 “칭송하다”를 의미하며, 원문의 “다라쉬”와 무관하다. 그러므로 개역이나 바른 성경의 번역을 택해야 한다.

 

 

58. 전도서 1:11

<개역>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개정>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바른>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미래의 일들도 후에 올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는 개정의 번역은 의미가 불분명하다. 이 구절은 개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미래의 일은 더 미래의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59. 아가 1:5

<개역/개정>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바른> 게달의 장막과 같고 솔로몬의 휘장과 같구나

 

이 번역에 따르면 게달의 장막은 좋지 않은 것이나, 솔로몬의 휘장은 좋은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개역과 개정을 제외한 모든 한글 및 영어 성경들은 게달의 장막도 좋고, 솔로몬의 휘장도 좋은 것이라는 견해에 기초하여 번역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게달의 장막과도 같고,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60. 이사야 9:6

<개역/개정>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바른>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개역과 개정은 기묘자와 모사를 두 개의 이름으로 분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뒤의 이름들과 형태가 맞지 않는다. 뒤의 이름들은 모두 수식하는 형용사어구와 수식을 받는 명사어구가 합쳐져 각각의 이름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기묘자와 모사” 역시 합쳐서 하나의 이름으로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현대 영어 번역본들은 이와 같이 번역하고 있다.

 

 

61. 이사야 38:15

<개역>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

<개정>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바른> 나는 평생토록 조심스럽게 행하겠습니다

 

원문의 “다다”는 “천천히 걷다, 조용히 걷다”의 뜻이다. 여기에 “방황”의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조심스럽게 행하여 방황하지 않겠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한편 개역은 의미는 정확하게 번역되었으나 지나치게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였다.

 

 

62. 이사야 40:27

<개역>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개정>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바른> 내 하나님께서 나의 판결은 돌아보지 않으신다 하느냐?

 

원문의 “미쉬파티”는 “나의 송사” 혹은 “나의 판결”로 번역할 수 있다. 개역은 이 단어를 “원통한 것”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해석을 가미한 의역이다. 개정 번역에서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 원문의 “야아보르”는 하나님을 넘어 “지나가버렸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63. 이사야 41:26

<개역> 이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

<개정>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

<바른> 우리가 “그분은 의로우시다.” 말하게 하였느냐?

 

개정의 번역은 옳은 주체가 우리인 것 같이 생각하게 할 수 있다. 본문이 가리키는 바는 “하나님께서 옳으시다.”라는 것이다.

 

 

64. 이사야 42:9

<개역/개정>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바른> 보아라, 이전 것들이 이루어졌으니

 

개역과 개정은 원문에 없는 말들(“예언하다” “이미”)을 삽입함으로써 번역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번역에 포함되었다. 바른 성경처럼 단순하게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장 잘 어울린다.

 

 

65. 이사야 44:5

<개역>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개정>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바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스스로 칭할 것이다

 

원문의 “카나”는 단순히 “칭호를 붙이다”라는 뜻이므로, 개정에서 말하는 “존귀”의 개념은 포함하지 않는다.

 

 

66. 이사야 52:8

<개역> 일제히 노래하니, ...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개정> 일제히 노래하니, ...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바른>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볼 것이기 때문이다

 

바른 성경과 개역은 후반부를 전반부의 이유로 제시하지만(봄이로다 = 보기 때문이다), 개정은 후반부를 전반부의 결과로 제시한다. 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가 있으므로,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67. 이사야 54:6

<개역/개정> 곧 소시에 (어릴 때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같이

<바른> 곧 젊을 때 버림받은 아내 같은

 

개역과 개정에 따르면 이 여자는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으나, 그 후 어떤 시기에 버림을 받은 듯하다. 따라서 이 여자가 버림받은 때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원문에 따르면 이 여자는 어린 시절에 버림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젊을 때 버림받은 어린 아내같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68. 이사야 54:11

<개역/개정>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바른> 화려하게 채색한 네 돌들을 세우며

 

개역과 개정은 돌 사이에 무엇을 더하는지 알 수 없게 하였다. 원문에 따르면, “더하다 혹은 쌓다”의 목적어는 돌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화려하게 채색된 네 돌을 더하며/쌓으며”라고 번역해야 한다.

 

 

69. 이사야 57:6

<개역> 너희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이를 용인하겠느냐?

<개정> 네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

<바른> 네가 그것들에게 부어드리는 제물을 드리고 곡식 제물을 드렸으니, 내가 이런 일들을 용납하겠느냐?

 

원문의 “나함”에 관하여 문자적으로는 “용인하다” 혹은 “위로받다”의 뜻이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개정의 번역은 문맥과 맞지 않으며, 따라서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들다.

 

 

70. 이사야 63:19

<개역/개정>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바른> 우리는 오랜 옛적부터 주께서 다스리지 않은 자들처럼 되었으며

 

개역과 개정은 원문에 있는 부사구 “메올람”(“오래전부터”)을 빠뜨리고 번역하였다.

다른 한글 번역들과 많은 영어 번역들과 같이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께서 다스리지 않는 자들 같이 되었으며”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71. 이사야 66:4

<개역/개정>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바른> 나도 그들을 위해 혹독한 대우를 택하며

 

이 구절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원문의 “타알룰림”은 “혹독하게 괴롭힘”을 뜻하며, 개역과 개정을 제외하면 이 단어를 “유혹”이라고 번역한 성경은 없다. 다음 구절인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와 대구를 이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 단어는 “괴롭힘” 혹은 “고통”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72. 예레미야 1:12

<개역/개정>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바른> 나는 내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다.

 

원문의 히브리어 동사 “샤카드”는 “to watch”의 의미로서 “지켜보다.”로 번역해야 한다. 즉 이 동사는 보고 있는 행위를 가리킨다. 개역이나 개정처럼, 하나님께서 마치 약속을 지키시듯 자기 말을 지키신다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73. 예레미야 1:18

<개역>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개정>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바른> 왕들과 고관들과 제사장들과

 

원문의 “사르”는 “고관”(高官)이나 “장군”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은 단어이다. 개역의 “족장”은 혈통과 관련한 가족이나 가문의 어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원문의 “사르”에 대한 번역으로 적절하지 않다. 개정의 “지도자”라는 번역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너무 포괄적인 단어이다.

 

 

74. 예레미야 31:36

<개역> (없음)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른> 여호와의 말이다.

 

원문에 있는 “여호와의 말이다.”라는 문장을 개역의 번역에는 빠져 있다.

 

 

75. 예레미야 40:5

<개역> 유다 성읍들의 총독으로 세우신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

<개정> 유다 성읍들을 맡도록 세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

<바른> 유다 성읍들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이 그달랴

 

원문에는 “총독”이라는 단어가 없으므로, “총독”이라고 명시한 개역의 번역은 잘못되었다. 원문의 히브리어 동사 “파카드”는 “임명하다”라는 뜻이 있으므로, 바른 성경처럼 “다스리도록 임명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76. 예레미야 46:23

<개역> 그들이 황충보다 많고 계수할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개정>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바른> 비록 이집트의 숲이 빽빽하고, 그 수가 메뚜기보다 많으며 헤아릴 수 없더라도, 그들이 그것을 찍어낼 것이다.

개역이나 개정의 번역에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는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조사할 수 없다는 말은 바른 성경처럼 “빽빽하다”로 번역해야 한다.

 

 

77. 예레미야 48:7

<개역> 네 공작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취함을 당할 것이요

<개정> 네 업적과 보물을 의뢰하므로 너도 정복을 당할 것이요

<바른> 네 업적과 보물들을 의지하므로 너 또한 사로잡힐 것이며

 

개역의 “공작”이라는 단어는 날짐승인 공작새를 연상하게 하는 부적절한 단어이다. 이것은 업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원문의 히브리어 동사 “라카드”를 개역은 “취함을 당한다”라고 번역하고, 개정은 “정복을 당한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라카드”는 바른 성경처럼 “사로잡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78. 예레미야 48:41

<개역> 모압 용사의 마음이 구로하는 여인 같을 것이다

<개정>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다

<바른> 모압 용사들의 마음이 출산의 고통을 겪는 여자의 마음 같을 것이다

 

개역과 개정은 비슷하여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둘 모두 원문에 두 번 사용된 “마음”이라는 단어를 한번만 번역하였다. 원문에 따라 “마음”을 두 번 사용하여 번역하는 것이 좋다.

 

 

79. 예레미야 49:11

<개역> 네 고아들을 남겨 두라

<개정> 네 고아들을 버려도

<바른> 네 고아들을 남겨 두어라

 

대부분의 한글 번역들과 영어번역들이 개역과 일치하고 있으며, 문맥상으로도 개역이나 바른 성경의 “남겨 두라”가 옳다.

 

 

80. 예레미야 49:32

<개역> 내가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는 자들을

<개정> 내가 그 살쩍을 깎는 자들을

<바른> 내가 옆 머리카락을 깎은 자들을

 

대부분의 번역들이 머리털을 깎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개정처럼 “살쩍”을 깎는 것으로 번역한다면, 이 구절의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된다. 개역의 번역은 그 의미가 다소 불분명하다.

 

 

81. 예레미야 49:33

<개역> 시랑의 거처

<개정> 큰 뱀의 거처

<바른> 이리의 소굴

 

원문의 “탄님”은 시랑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큰 뱀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들이 “시랑” 혹은 “이리”를 택하고 있다. 특히 하솔과 관계되었음을 고려할 때 “시랑”이나 “이리”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82. 예레미야 50:11

<개역> 힘센 말같이 울도다

<개정> 군마같이 우는도다

<바른> 힘센 말같이 운다

 

원문의 “압비르”는 “힘이 세다”라는 뜻으로 힘센 동물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 전쟁이나 군대를 암시하는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이나 개역을 따르는 것이 좋으며, 다른 영어 및 한글 번역들도 바른 성경과 비슷하게 번역되었다.

 

 

83. 예레미야 50:13

<개역> 재앙을 놀라며 비웃으리로다

<개정> 재난에 놀라며 탄식하리로다

<바른> 그의 모든 재난 때문에 비웃을 것이다

 

원문의 “샤라크”는 “조롱하다, 야유하다”의 뜻이므로, 바른 성경과 개역을 따르는 것이 옳다.

 

 

84. 예레미야 52:12, 14, 15, 19, 24, 26 (비교, 왕하 25:8, 10, 11, 12, 15, 18, 20)

<개역> 시위대 장관

<개정> 사령관

<바른> 경호대장

 

예레미야서와 왕하에서 똑같이 바른 성경은 “경호대장”으로, 개역은 “시위대 장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개역개정은 왕하에서 “시위대장”이라고 번역한 단어를 예레미야서에서는 “사령관”이라고 번역하여 번역의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85. 예레미야 애가 5:12

<개역> 방백들의 손이 매어달리며

<개정>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바른> 지도자들이 그들의 손에 매어달리며

 

이 구절의 올바른 의미는 “손이 매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지도자들이 매어달리는 것”이다. 개역의 잘못된 번역을 개정이 고침으로써 바른 성경과 같게 되었다.

 

 

86. 에스겔 14:19

<개역/개정> 내 분을 그 위에 쏟아

<바른> 내 분노로 그 위에 피를 쏟아

 

원문에 있는 “피”(히브리어 “담”)라는 단어를 개역과 개정에서는 삭제해버렸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피”라는 말을 넣어서 번역해야 한다.

 

 

87. 에스겔 16:52

<개역> 네가 네 형과 아우를 논단하였은즉

<개정>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유리하게 판단하였은즉

<바른> 네 자매들이 유리한 판단을 받게 했으니

 

히브리어 동사 “팔랄”은 문법적으로 위의 번역들을 모두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유다가 사마리아와 소돔의 죄를 직접 판단하였다기보다는 유다가 그들보다 더 죄를 지어 사마리아와 소돔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판단을 받게 되었음을 뜻하는 구절로 이해해야 한다.

 

 

89. 에스겔 18:10-11

<개역/개정>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치 아니하고

<바른> 그 아들이 ∼ 이것들 중에 하나를 형제에게 행하고

 

개역과 개정은 “그가 행치 않는다.”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그렇게 번역하기 위해 본문에 없는 단어인 “선”을 삽입해야 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가 행한다.”로 번역해야 한다. 또한 개역과 개정에서 삭제해버린 원문의 “아흐”는 “형제”라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90. 에스겔 40:5, 9, 11 등

<개역/개정> 척(길이의 단위)

<바른> 규빗

 

척은 30cm를 뜻한다. 그러나 원문의 “암마”는 규빗을 뜻하는 말로서 약 45cm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척”이란 단위는 모두 규빗으로 바꾸어 번역해야 한다.

 

 

91. 다니엘 12:10

<개역>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개정> 악한 자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되

<바른>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나

 

개정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번역하나, 원문의 의미는 바른 성경이나 개역처럼 처럼 악한 사람은 누구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92. 호세아 5:14

<개역/개정> 나 곧 내가 움켜 갈지라.

<바른> 내가 ∼ 그들을 찢고

 

개역과 개정의 “움키다”는 히브리어 동사 “타라프”를 번역한 것인데, 이 동사는 바른 성경처럼 “찢는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93. 호세아 5:14

<개역/개정> 나 곧 내가 움켜 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바른> 내가 ∼ 그들을 찢고 떠날 것이므로 내가 빼앗더라도

 

이 구절의 원문에는 동사가 3개 사용되는데, 원문의 순서대로 적으면 “찢는다”(개역과 개정에서는 “움키다”), “가다” 그리고 “빼앗다”(= “탈취하다.”)이다. 개역과 개정은 “탈취한 뒤에 간다.”라는 의미로 번역하였으나, 본문의 순서에 따르면 “찢은 뒤에 간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의 “찢고 떠날 것이므로”라는 번역이 올바르다.

 

 

94. 호세아 9:8

<개역>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개정>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바른> 선지자는 나의 하나님과 더불어 에브라임을 파수하는 자이나, 새 잡는 자의 그물이 그의 모든 길에 있고

 

문법적으로는 위의 번역들이 모두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른 성경의 것으로서 선지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에브라임을 파수하는 자라는 것이다.

 

95. 요엘 2:28

<개역/개정>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바른> 너희 자녀들은 예언하고

 

원문의 동사 “나바”는 “장래 일을 말한다”라는 것보다 “예언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개역이나 개정처럼 번역한다면, 예언이 장래 일을 말하는 것에 국한된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

 

 

96. 스가랴 8:10

<개역>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개정>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풀어주게 하였느니라

<바른> 이는 내가 모든 사람이 서로 이웃을 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개정과 칠십인경을 제외한 모든 번역들은 전치사 “베”를 “서로 치다”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해석이 문맥과 문법에 가장 적절하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과 개역의 번역이 좋다.

 

 

신약

 

1. 마태복음 7:7-8

<개역> 7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 8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개정> 7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 8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바른> 7 찾아라, 그리하면 발견할 것이며 ... 8 찾는 이는 발견하고

 

개정은 개역의 “찾을 것이요”를 “찾아낼 것이요”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의 의미는 찾으므로 만난다는 것을 뜻하지만, “찾아낼 것이요”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발견한다는 느낌을 준다. 본문의 의미는 구했으므로 은혜로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의 노력으로 찾아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개정의 번역은 은혜의 역사를 인간의 행위로 변경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바른 성경은 이점을 분명히 하여 “발견할 것이며”라고 번역했다.

 

 

2. 마태복음 17:25

<개역> 세상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개정> 세상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바른> 세상 왕들은 관세나 주민세를 누구에게서 받느냐?

 

개정은 “정세”를 “국세”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하지만 25절의 헬라어 단어는 인구조사, 호적등록, 혹은 그에 기초한 ‘인두세’를 뜻하는 것으로 인구조사를 하여 사람에게 부과하는 ‘주민세’를 의미한다. 국세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한 개역의 ‘정세’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로서 의미가 모호하다. 결국 바른 성경의 “주민세”가 더 적절하다.

 

 

3. 마태복음 18:22

<개역>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개정>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바른>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해 주어라

 

개정은 개역의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바꾸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의 본래 뜻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성경번역의 일반적인 원칙은 특별한 강조나 도치가 없는 한, 가능한 한 어순을 따라 번역하는 것이다. 바른 성경과 개역의 번역을 따라야 한다.

 

 

4. 마태복음 23:17

<개역>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개정>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바른> 어리석은 자들과 맹인들아, 어느 것이 더 크냐?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어리석은 자들과 그리고 눈먼 자들이여”가 된다. 개정은 분명하게, 개역은 다소 모호하게,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어리석으면서도 눈이 먼 사람들”이라는 한 종류의 사람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여 번역해야 한다.

 

 

5. 마가복음 1:3

<개역>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개정>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바른>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분의 좁은 길들을 곧게 하여라

 

개정에서 언급된 “오실 길”은 “좁은 길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개역의 “첩경”은 지름길이라는 뜻으로서 문맥에 맞지 않는 번역이다.

 

 

6. 마가복음 1:10

<개역/개정> 물에서 올라 오실쌔

<바른> 물에서 막 올라오시니

 

개역과 개정은 물에서 급히 올라왔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맥에 따르면 이 구절은 “물에서 올라오시자마자 곧”이라는 상황을 가리킨다.

 

 

7. 마가복음 1:12

<개역/개정>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바른> 곧 그분을 광야로 내보내시니

 

원문의 “에크발로”는 “몰아내다” 혹은 “내보내다”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기서는 개역과 개정이 당시의 상황을 지나치게 강하게 묘사하였다. 왜냐하면 “몰아내다”라는 표현은 “나가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우는 대상을 억지로 내보낸다.”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강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기꺼이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광야로 내보내시니”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8. 마가복음 3:3

<개역/개정>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바른>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여기서 “한 가운데”는 서있는 장소가 아니라 이동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일어나 한 가운데로 나오너라.”라고 번역해야한다.

 

 

9. 마가복음 4:1

<개역/개정>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바른>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셨다

 

원문의 “아르코”는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개역과 개정은 모두 “시작하셨다”를 생략했다.

 

 

10. 마가복음 8:11

<개역/개정> 예수께 힐난하며

<바른>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여

 

개역과 개정은 원문의 “아르코”(“시작하다”)를 빠뜨리고, “쉬제테오”를 “힐난하다”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쉬제테오”는 여기서 “논쟁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처럼 “논쟁하기 시작했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11. 누가복음 8:29 (마 8:16/ 막 1:23; 5:8, 13)

<개역/개정>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바른>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본 절에 “귀신”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개역과 개정에 일관되게 “귀신”이라 번역되고 있으나, 헬라어 단어는 “더러운 영”(evil spirit)이다. “귀신”과 “더러운 영”이 교호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눅 8:27, 30, 32, 33, 38= “귀신,” 29절에서는 “더러운 영”), 이 둘을 서로 구분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 8:16(개역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의 경우 역시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그 영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다 고치셨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12. 요한복음 19:39

<개역> 니고데모도 ...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개정> 니고데모도 ...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바른> 니고데모도 ... 백 근쯤 가지고 와서

 

개정은 “리트라”란 단위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지 않았다. 한 리트라는 영어 단위로 한 파운드이고, 327g으로 약 한 근쯤을 나타낸다. 만일 단위를 헬라어 원문 단위로 통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모든 단위를 일관성 있게 고쳤어야 하는데, 그런 원칙 없이 변경되어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바른 성경과 개역처럼 “백 근”으로 표기하는 것이 낫다.

 

 

13. 갈라디아서 2:6

<개역>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저 유명한 이들이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개정>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 저 유력한 이들이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바른> 그 유명하다는 자들 중에서 ... 그 유명하다는 자들은 내게 더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개정은 “유명한 이들”을 “유력한 이들”이라고 바꾸어 번역하였다. “유력”이라는 단어는 권력의 핵심에 있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1세기 정황을 비추어 볼 때, 바른 성경과 개역의 “유명”이 더 적절한 번역으로 보인다.

 

개정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라고 해석을 첨가하였는데, 이는 문맥을 인지하지 못한 번역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갈1:16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맥은 의무를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게(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다”는 말은 바울이 이미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더 가르쳐 준 것이 없다”는 뜻이지 개정처럼 “어떤 의무를 더하여 주지 않았다”라는 뜻이 아니다.

 

 

14. 갈라디아서 3:4

<개역/개정>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바른> 너희가 이같이 많은 것들을 헛되이 경험하였단 말이냐?

 

이 번역은 원문의 동사 “파스코”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이 동사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 절들의 문맥과 관련하여 번역해야한다. 따라서 바른 성경과 같이 “많은 것들을 헛되이 경험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15. 갈라디아서 3:18

<개역>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개정>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바른> 하나님께서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본 절을 번역하면서 개정은 “은혜”라는 말을 빼어 버리고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하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은혜적 성격”을 흐려놓는 좋지 못한 번역이다. 이 문장에 사용된 동사 “카리조마이”는 “은혜로 주셨다”이다. 본문 어간에 들어있는 “은혜” 개념을 부각시키는 바른 성경과 개역이 정확하고 좋은 번역이다.

 

 

16. 갈라디아서 3:24

<개역/개정>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바른> 그리하여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가정교사가 되었으니

 

원문에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이란 표현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께로”라고만 명시되어 있다. 또한 “우리를”이란 표현도 없고 “우리들의”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에 사용된 전치사 “에이스”(“∼께로”)는 자주 시간적인 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본 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그리스도의 때까지 우리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17. 요한일서 1:9

<개역/개정>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바른> 그분은 신실하고 의로우셔서

 

개정은 옛말을 현대어법에 맞게 수정한다는 번역원칙을 제시하면서도 9절의 “미쁘시고” 라는 단어를 현대어로 바꾸지 않았다.

 “미쁘시고”의 헬라어 단어 “피스토스”는 “신실하시고”로 번역함이 더 적절하다. 참고: 엡1:1, 골1:2, 고전4:17

 

 

18. 요한일서 2:10

<개역/개정>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바른> 그 사람 안에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없다

 

같은 단어를 일관성 있게 번역하지 못한 경우이다.

원문의 “스칸달론”은 “거리낌”보다는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혹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란 뜻으로 여러 곳에서 번역되었다.

 

 

자료원: http://www.kyeyak.ac.kr/library/bbs/zboard.php?id=gongi&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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