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아홉족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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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홍수 이전에는 우리가 오늘날 대하는 것과 같은 뚜렷하고 독립적인 민족 집단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바벨에서 반역의 탑을 쌓은 이후로 각자의 언어와(아마 좀더 후기에 이르러서야 발생되었겠지만) 독특한 문화 및 인종적 특수성을 지닌 민족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수십 개의 민족들 중에서도 아홉 민족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영적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 같다.

 그 아홉 민족은 가나안, 수메르, 블레셋,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그리고 로마이다.

 위 민족들 중에서 마지막 로마를 제외한 여덟 나라가 이미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홉번째 나라인 로마는 아마도 예언적 부분을 떠맡을 것이다(물론 이전에 이미 로마는 역사적 역할도 감당한 바 있다). 왜냐하면 로마의 옛 제국은 다시 소생하여 무서운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Ⅰ.가나안

 

 1.소개

 

 1)가나안 족속이란 말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그 곳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들 족속 가운데는 베니게, 블레셋, 암몬, , 여부스, 아모리 및 히위 족속이 포함될 것이다.

 

 2)이들 족속 대부분은 함의 4대손인 가나안의 후예이다( 9:22-27/10:6, 15-20). 가나안 족속이란 이름은 아마도 그에게서 유래한 듯하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땅이 베니게인들에 의해 가나안이라 일컬어졌다고 믿는다. 베니게인들은 뿔고둥(mure)이라는 조개에서 추출된 자주색 염료를 얻기 위해 그곳을 왕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역은 헬라인들이 그 지역 전체를 가나안이라고 명명하리만치 유명해졌는데, 헬라어로 가나 안이란 `피처럼 붉다'는 뜻이다.

 

 3)가나안 족속들이 세운 몇몇 도시들이 있는데, 그 이름을 열거하자면, 게셀, 므깃도, 여리고, 소돔, 고모라, 예루살렘이다.

 

 4이 땅이 비옥하다는 것은 주전 1,950년경에 가나안으로 도망했던 시누헤(Sinuhe)라는 한 애굽 난민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증언을 들어 보기로 하자.

 

 "정말 좋은 땅이었다. 그곳에는 무화과와 포도나무가 있었다. 물보다는 포도주가 흔했으며, 꿀과 올리브유가 무진장 흔했다. 갖가지 열매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 있었으며, 끝없는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고, 온갖 종류의 양떼와 소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진술은 출애굽기 3 8절과 명기 8 8절 말씀과 비교할 만하다.

 

 5)아마도 가나안 족속들은 알파벳을 창안해 낸 것 같은데, 그 글자들은 모두 31자로 이루어져 있다.

 

 6)성경의 역사서에 기록된 맨 처음 전쟁은 네 명의 메소보다미아 왕들과 다섯 명의 가나안 왕들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14장 참조).

 

 2.가나안 족속의 종교

 

 1)가나안의 종교는 고대 역사를 통틀어 성적으로 가장 변태적이며,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하고 잔혹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그들의 문화와 주민과 도시를 멸절하도록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7:1-5/20:10-15/ 9:24 참조).

 

 2)가나안 족속들의 명백한 방탕을 입증하는 주요한 증거가 세 가지 있다.

 (1)하나님의 말씀( 13:13/15:16/18:20/19:1-11/ 25:1-3/ 19:14-25/왕상 14:24/ 15:12/22:46/왕하 23:7 참조)

    이들 구절은 무엇보다 우선 그들의 성적(性的) 죄를 언급하고 있다.

 (2)비블로스의 필로(Philo of Byblos)의 증언

    이 사람은 주전 100년경의 시대 상황을 기록한 베니게의 학자인데, 고국에서 고대의 종교적 자료를 수집했다.

 (3)옛 우가리트의 라스 샴라(Ras Shamra) 문헌. 1927년에 발견됨.

 

 3)가나안 종교의 으뜸 가는 신은 엘(El)이었다. 엘의 처는 아세라(Asherah)이다. 그는 또한 자기의 세 누이와 결혼했는데, 그 세 누이 중의 하나가 바로 아스다롯(Astarte)이다( 10:6 참조). 엘에게는 70인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이가 바알(Baal)이다. 엘은 자기의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아들까지도 몇명을 살해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딸의 목을 치고, 자신의 아버지를 거세(去勢)했으며, 자기 자신도 거세하고 또한 그의 일당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했다.

 

 4)바알의 누이(엘의 딸)는 아낫(Anat)이었다. 그녀는 격정과 전쟁과 폭력의 비열하고 악의에 찬 여신이 되었다. 그녀는 바알의 원수들과 싸웠다. 우가리트의 바알 서사시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막강한 권세로 도시 주민들을 쓰러뜨리고, 해안 거주자들을 때려눕혔으며, 동쪽의 사람들을 멸하였도다. 그녀는 사람들을 자신의 신전에 몰아넣고 아무도 달아날 수 없도록 문을 닫았도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의자를 집어던지고, 전사들에게는 탁상을, 강한 자들에게는 발등상을 집어던졌느니라. 그녀의 무릎에까지, 목에까지 피가 찼구나. 사람의 머리가 그녀의 발아래 나뒹굴고, 인간의 손들이 메뚜기처럼 그녀 위로 날았도다. 그녀는 그 희생자들의 머리를 장식물처럼 그녀의 등에 매달았고, 그들 의 손을 그녀의 허리 띠에 달았나니라. 그녀의 오장은 웃음으로, 그녀의 육부는 기쁨으로 가득찼노라. 이윽고 성에 차면 피의 강에서 손을 씻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몸을 돌렸노라."

 

 5)가나안 암몬 족속의 민족 신은 몰렉이었다(왕하 11:5, 7 참조). 몰렉 숭배의 중요한 의식은 아이를 번제의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유다의 두 왕 아하스와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아이를 이 살인귀 몰렉에게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왕하 16:3/21:6). 이리하여 어린아이를 살해하여 희생으로 삼는 일이 가나안 종교의 흔한 관습이 되어갔다( 16:20, 21/23:37 참조). 마칼리스터(Macalister)라는 이름의 한 고고학자는 게셀 지역 발굴 당시에 폐허가 된 가나안의 한 신전을 발견했다. 그는 그 안에서 어린 아이의 뼈가 담긴 수백 개의 항아리를 찾아냈는데, 그 뼈의 주 인공들은 네 살에서 열두 살에 이르는 아이들이었으며, 산 채로 불에 태움을 당해 죽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유형의 또 다른 끔찍한 관습은 "터를 위한 제물"이 라는 것이었다. 이는 집을 지을 때 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아이의 시체가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기 위해 벽 밑에 매장되곤 했다.

 

 6)가나안 족속들의 성적 변태를 앞에서 약간 언급한 바 있다. 가나안의 제사장들은 흔히 악명높은 동성애를 자행하는 자들이고, 여사제는 보통 매춘부였다. 이들 비교(秘敎)의 크고 작은 우상 및 다른 숭배의 대상물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성기(性器)를 돌이나 나무에 새긴 것들도 있다.

 

Ⅱ.수메르

 

 1.메소보다미아의 도시들 및 민족들의 기원

 

 1)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주전 3,00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함의 손자 니므롯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주도하였다.

 

 2)갈래갈래의 언어로 갈라지고 난 후에 갖가지 집단들이 중동 각지에 정착했다.

 

 3)주전 3,000년경에 두 집단의 족속들이 메소보다미아에 정착했다. 메소보다미아란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인데, 두 강은 힛데겔(티그리스)과 유브라데(유프라테스)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남으로 흘러 바사 만으로 들어간다.

 

 4)한 족속은 아카드인(Akkadians)들로 윗 계곡에 살았으며, 다른 족속은 수메르인(Sum erians)들로 아랫 계곡에 살았다. 이것이 수메르의 땅으로 알려졌다.

 

 2.두 계곡의 정치적 역사

 

 1)수메르인들이 살았던 남부의 중요한 도시들에는 에리두, 기스, 라가쉬, 라르사, 닙푸르, 움마, 우르, 우륵 등이 있다.

 2)주전 2,500-2,300년 사이에 우르의 왕들은 전 수메르를 지배하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들은 북부의 아카드인들을 침략했다.

 3)주전 2,300년 직후, 이야기는 뒤바뀌어 오히려 수메르인들이 아카드인의 강력한 지배자 사르곤에게 정복당했다.

 4)전승에 따르면 사르곤은 유아기에 바구니에 담겨 유브라데 강에 죽도록 버려졌다. 그러나 한 정원사의 눈에 띄어, 그의 보호를 받아 군사가 되었다.

 5)사르곤은 뛰어난 군사적 지도자요, 조직가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유사 이래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였고, 메소보다미아 전 지역을 통일했다.

 6)그의 사령부는 바벨론에 있었다. 그는 56년간 지배하였다. 사르곤은 위대한 입법가였다.

 7)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은 그의 강력한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수메르는 북쪽 산지의 야만인들(구티 족속)의 침입을 받아

   그들에게 복속당했다. 그들은 백년 가량 지배하였다(주전 2,170-2,070).

 8)이번에는 수메르인들이 세력을 회복하여 구티인들을 쫓아냈다. 새로운 수도는 바사만 연안에 있는 번영 일로의 항구도시 우르였다.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지배자는 덩기(Dungi)라는 사람이다. 그는 유능한 행정가로 덩기 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법전은 함 무라비 법전보다 300년 가량 앞선

   것이다.

 9)이 수메르인의 국가는 엘람 족속이라는 동방의 유랑민족에게 침입을 받아 주전 2,000년경에 멸망당했다.

 

 3.메소보다미아인들의 업적

 

 1)수메르인들은 훌륭한 건축가들이자 건설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우르 시에는 거대한 계단과 기둥과 패널을 댄 벽으로 치장된 웅대한 왕궁이 있었다. 이들 벽에는 인간과 동물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다. 귀족들은 왕궁 주위에 세워진 2층 집에 거주했다. 그들은 둥근 천장과 아아치와 돔(dome)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알고 있었다. 건축 형태 중의 하나는 지구랏(Ziggurat)신전을 지을 때 사용한 방법으로, 후에 애굽인들 이 피라밋을 만들 때 이것을 모방했다. 지구랏 신전은 탑 모양의 신전으로 한 단층 위 에 그보다 작은 단층을 계속 포개는 건축 방식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바벨탑의 모양을 흉내낸 것 같다.

 

 2)그들은 금과 은을 사용했으며, 합금, 주물, 성형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 덕분에 훌륭한 금속세공과 보석류가 나올 수 있었다.

 3)각 학교에서는 천문학, 수학, 점성술, 지도 제작 및 외과수술을 교과목으로 가르쳤다.

 4)수메르인들에게는 무수한 시가(詩歌)와 전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천지창조' `길가메쉬의 서사시'이다.

 5)수메르인들은 육진법에 토대를 둔 숫자체계를 창안하는 등, 수학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했다. 그들은 곱셈, 나눗셈 및 분수를 활용하고,

   1년이 354일로 이루어진 태음력을 사용했다.

 6)고대 수메르의 왕들은 전차를 이용했다. 그들의 군대는 잘 조직되어 있었고, 밀집대 형을 이루어 행진했다.

   그들은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역시 구리로 만든 창을 사용했다.

 7)그들은 농업에 아주 익숙했으며, 곡물, 채소, 대추야자를 엄청나게 수확하곤 했다 또한 소, , 염소와 같은 가축을 길렀다. 밭을 가는 데는 황소를

   이용하는 한편, 짐 수레와 전차를 끄는 데는 당나귀를 이용했다. 그리고 낙농업이 번성했다.

 8)수메르인들은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는 최초의 족속들이다.

 

그들은 상형 문자를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문자를 간편한 기호로 단순화하여 부드러운 점토 판에 끝이 날카로운 철필로 썼다. 이 철필은 삼각형의 촉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으 로 점토판을 긁으면 쐐기 꼴이 새겨졌다. 이 글자는 후에 설형문자, "쐐기 꼴"의 문자로 일컬어지게 된다.

 

 4.메소보다미아의 종교

 

 1)고대의 다른 문명권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종교가 이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했다.

 

 2)각 도시의 마을에는 각각의 신들이 있었으며, 그 신들의 성격은 각각 달랐다. 얽히고 설킨 복잡한 신화가 발전하였다.

 (1)어머니 신 이스타르는 사랑과 다산(多産)의 여신이었다.

 (2)사랑하는 아들 신 담무스는 봄의 신이자 꽃과 곡물을 주관하는 신이었다. 그는 또한 저승의 신이었으며, 일년 중 절반은 저승에 살다가 매년 봄마다

    이승으로 돌아오곤 했다.

 (3)바벨론 왕조가 통치하던 기간 중에, 담무스는 아모리 족속의 그와 비슷한 신 마르둑으로 대치되었다.

 

 3)바벨론인들은 천체를 숭상했는데, 그 결과 천문학과 점성술이 성하게 되었다.

 4)그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를 희생제물로 바쳤다.

 5)사제들이 주관하는 성전, 제단, 학교가 있었다.

 6)징조, 신탁, 마법이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꿈이 중요시되었으며,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2)희생제물로 구입한 양의 간장 위에 나타난 핏줄을 읽음으로써 미래를 예언하곤 했다.

 

Ⅲ.블레셋

 

 1.소개

 

 1)이 해안 족속은 그레데 섬에서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주전 1,200년경에 팔레스틴에 정착하였다( 2:23/ 47:4/ 9:7 참조). 그들은 함의 계보에서 나온 족속이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의 후손이었다(대하 1:12). 이 때문에 그들은 애굽인들과 먼 친척이 되었다.

 

 2)아마도 그들은 팔레스틴으로 가는 도중에 헷 족속과 거대한 옛 수리아 도시 우가리트를 멸망시킨 것 같다. 주전 1,190년에 그들은 애굽을 침략하려 했으나 애굽의 바로인 람세스 3세에게 격퇴당했다. 이후에 그들은 연안 상류에 정착하였으며 팔레스틴에 자기네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

 

 3)블레셋인들은 5개 도시 연맹을 결성했다. 이 다섯 도시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이다. 각 도시는 방백이 다스렸다.

 

 4)블레셋인들은 아주 종교적이었으며, 다곤(곡물의 신), 아스다롯(번식의 신), 바알세 붑(주거의 신)을 섬겼다(삼상 5:4/31:10/왕하 1:2 참조). 바알세붑은 후에 "귀신의 왕"이란 뜻의 바알세불로 알려지게 되었다( 12:24). 블레셋인들은 자신들의 신당에서 승리를 축하했으며(삼상 31:9), 곧잘 자신들의 우상을 전장으로 모시고 다녔다(삼하 5:21).

 

 5)처음에 그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이유는 당시의 "원자탄"이라 할 수 있는 철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들은 철기 제작을 헷(힛타이트)족속으로부터 배운 듯한데, 헷 족속은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맨 처음 이 기술을 발견한 족속이다(삼상 13:5, 19-22 참조).

 

 6)블레셋인들은 엄청난 양의 맥주를 소비하는 "폭주가"들이었다.

 

 2.성경과 블레셋

 

 1)삼갈과 삼손은 블레셋 족속과 싸웠다( 3:31/13:1/15:20).

 2)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들을 격파했다(삼상 14:1-47).

 3)그들은 결국 사무엘에 의하여 바닷가로 밀려났다(삼상 7:12-14).

 4)사울은 그들에게 패하여 전장에서 죽었다(삼상 31).

 5)다윗은 그들과 싸웠다(삼상 17/삼하 5).

 6)그들은 솔로몬 치세 때에 완전히 복속당했다(왕상 4:21).

 

Ⅳ.애굽

 

 1.소개

 

 1)메소보다미아와 마찬가지로 애굽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민족이다. 애굽은 주위를 둘러싼 천연 방벽의 보호를 받았다. 북쪽에는 바다, 남쪽, 동쪽, 서쪽에는 사막이 있었기 때문에 애굽은 침략해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2)애굽 문명은 진실로 나일강의 선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 강(6,500km)은 남아 프리카의 빅토리아호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3)또한 바람 때문에 강의 왕복 항해가 용이하였다. 북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흐르는 물을 타고 쉽게 항해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바람을 이용하여 쉽게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4)지리적 위치 때문에 나일강 상류의 애굽은 남쪽에 위치한 반면 나일강 하류의 애굽은 북쪽 나일강의 삼각주에 위치했다. 삼각주에 이르러 나일 강은 7개의 지류로 나뉘어 지중해로 들어갔다.

 

 5)윗 애굽(Upper Egypt:남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흰 왕관을 썼고, 아래 애굽(Lower Eg ypt:북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붉은 왕관을 썼다.

 

 2.애굽의 왕조들

 

 주전 3,300년에서 시작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치세(주전 330)에 이르는 시기는, 주전 3세기 경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의 분류에 따르자면, 정치적으로 30개의 왕조로 나뉜다.

 

 3.애굽 역사 개요

 

 1)초기 왕조 시대-주전 3,000-2,700. 1, 2왕조. 수도는 멤피스(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 19:13/ 2:16/46:14, 19/ 30:13, 16 참조).

 메네라는 이름의 지배자가 30개 왕조의 초대왕이었으며, 아마도 이 사람은 창세기 10 6절에 나오는 미스라임이었던 듯하다. 미스라임은 함의 둘째 아들이었다.

 

 2)() 왕국-주전 2,700-2,200.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임. 이 시기에 거대한 피라밋이 건축되었다.

 

 3) 1 중간기-주전 2,200-2,000. 7왕조부터 제 10왕조까지임.

 

 4)() 왕국-주전 2,000-1,800. 11왕조부터 제 12왕조까지임. 수도를 더베(성경의 표현을 따르자면 `'. 46:25/ 30:14-16 참조)로 옮김. 이 시대는 무덤을 예 술적으로 꾸미던 때였다.

 

 5) 2 중간기-주전 1,800-1,600. 13왕조부터 제 17왕조까지임. 힉소스 왕조(아시아의 방백들)가 주전 1,674년에서 1,567년까지( 15-17대 왕) 통치함.

 

 6)() 왕국-주전 1,600-1,100. 18왕조부터 제 20왕조까지임. 애굽의 국력과 부가 절정에 이른 시대. 이때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에 있었으며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

 

 7)제국 이후의 시기-주전 1,100-300. 21왕조부터 제 30왕조까지임. 이 기간 중에 22명의 시삭이 지배했다(삼상 11:40/14:25-27/대하 12:2-12). 26왕조 때에 느고가 통치하였다(왕하 23:28-30, 33-35/대하 35:20-24/36:4/ 46:2).

 

 바사의 지배-주전 525-332, 프톨레미의 시기-주전 300-30, 알렉산더 대왕-주전 332-323, 프톨레미 1-12-주전 304-51, 클레오파트라-주전 51-30.

 이들 일곱 시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기에 일어난다.

 

 4.중요한 사건 개요

 

 1)고 왕국(주전 2,700-2,200)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의 왕국.

 (1)최초의 피라밋이 바로 조세르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이 건축물은 메소보다미아의 지구랏을 모방하여 개량한 것이라 생각된다. 조세르는 제 3왕조의 왕이었다.

 (2) 4왕조의 쿠프(Khufu 혹은 Cheops)는 대 피라밋의 건설을 설명했다. 헬라인들은 이 피라밋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완성하는 데는 20년에 걸쳐 10만 명이 동원되었다. 피라밋의 저변은 230m이며 하나에 2.5톤이나 되는 석회석을 쌓아 지은 것이다.

 (3)같은 제 4왕조의 바로인 카프르(쿠프 왕의 아들)를 위해서 거대한 스핑크스가 건축되었다. 그것의 모양을 보자면, 몸은 사자이고 머리는 바로였다. 몸의 길이는 73m, 높이는 20m, 얼굴의 너비는 4m이다.

 (4) 6왕조의 페피 2세는 고왕국의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그는 90년 이상 권좌에 있었으며 그가 죽은 직후에 고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200년간(주전 2,200-2,000) 애굽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다. 줄곧 침략자들이 사막을 건너 쳐들어와서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야심을 품은 세 일가가 정권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통에 수리(水理) 계획 및 건축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내란이 발생하였다. 이 시대는 때때로 봉건시대라고도 불리며, 7왕조부터 제 10왕 조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족장 아브라함은 이 시기에, 즉 주전 2,084년경에 애굽을 방문하였다( 12:10-20).

 

 2)중왕국(주전 2,000-1,800)

  11, 12왕조가 이에 해당된다.

 (1) 11왕조의 아멘호텝 1세는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그와 후계자들은 국가를 재건하고 세계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2)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도 중왕국의 마지막 때인 주전 1,897년경이었으며( 37) 그의 아버지 야곱이 애굽으로 옮겨간 것도 대략 이 시기에 해당하는 주전 1,875년경이었다( 46).

 

 고왕국 말기를 점철하였던 격동과 전쟁의 상황이 다시 중왕국 말기에 만연하였다. 주전 1,700년 직후 힉소스 왕조로 불리는 일단의 침입자들이 수리아와 아시아에서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 옮겨와 북 애굽(아래 애굽)을 정복하였다.

 

 힉소스 족은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양쪽 날이 있는 단검과 칼을 사용했다. 활의 몸체는 두 겹으로 되어 있어 강력하고 화살 촉은 놋이었다. 훈련관 무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애굽인들로서는 그들의 대적이 될 수 없었다. 힉소스 족은 피라밋과 관계된 모든 일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신들을 소개했으며, 애굽어를 단순화시키려고 했다.

 

 이 두번째 중간기 전체는 제 13부터 제 17왕조까지 주전 1,800-1,600년 간의 시대이다. 이 시기, 즉 주전 1,730년경에 히브리인들에 대한 탄압이 애굽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1). 주전 1,580년에 애굽의 한 병사 아모세(Ahmose) 1세가 반 란을 일으켜 가증스런 힉소스의 침입자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3)신 왕국(주전 1,600-1,100)

  18-22왕조가 이에 해당한다.

 (1)아모세 1세와 후계자들은 애굽을 재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격렬한 민족주의 정신이 곳곳에 충만했다. 애굽의 히브리인 탄압이 시작된 것은 이 시기며, 바로 이와 같은 이유(값싼 노동력과 모든 외국인들에 대한 의심)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따라서 출애굽기에 언급된 모든 바로는 이 유명한 제 18왕조로부터 시작한다.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자.

 

-출애굽기 1 8절의 "요셉을 알지 못했다" "새 왕"은 아마도 투트모세(Thutmose) 1세인 듯하다(주전 1,539-1,520년경). 모세는 주전 1,525년에 태어났다.

-출애굽기 2 5절의 "바로의 딸"이란 핫셉수트를 가리킨다. 그녀는 모세를 길렀고, 남편 투트모세 2세가 죽자 애굽의 왕위를 모세에게 넘겨 주려고 했다.

-출애굽기 2 15절에서 모세를 죽이려 했던 바로는 핫셉수트의 의붓아들 투트모세 3세였으며, 그는 왕후를 지독히도 미워한 나머지 그녀를 폐위시켰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핫셉수트의 친구였던 모세 또한 자연히 투트모스 3세의 노여움을 받게 되었다.

-출애굽기 5 1절의 열 가지 재앙이 기세를 떨치던 시기의 바로는 아멘호텝 2세이다. 이 바로의 무덤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14 8-31절에서 설명 하고 있는 듯한데, 여기서 우리는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를 건너려다 그 중간에서 수장(水葬)되고 말았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 게다가 그의 아들조차 애굽을 다스리지 못했다. 아마도 출애굽기 12 29절은 이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으며, 여기서 우리는 바로가 유월절에 내린 죽음의 재앙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기록을 대하게 된다.

 

 (2)이 시기의 더욱 중요한 지배자들은 유명한 제 18왕조에 속한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 바 있는데, 신 왕국 시대의 몇몇 왕들은 다음과 같다.

-아모세 1

  18왕조의 첫번째 지도자. 힉소스 왕조를 쫓아내는 데 힘썼으며,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핫셉수트

 모세를 기른 장본인이자 애굽의 왕위와 더불어 여신의 지위에 오른 최초의 여왕. 그녀는 두 개의 면류관을 썼으며, 거짓 수염을 길렀다.

-투트모세 3

 핫셉수트의 의붓 아들로 그녀를 격렬히 증오한 나머지 폐위시켰다. 투트모세 3세는 애굽의 모든 바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바로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애굽의 알렉산더 대왕, 혹은 애굽의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그의 제국은 수단에서부터 북부 수리아에까지 뻗쳐 있었다. 그는 모세가 40세에 애굽을 탈출했을 때 애굽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그는 나라를 지극히 안정되게 하고 죽었기 때문에 애굽은 당시 수십 년 동안 그 강력한 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아멘호텝 2

 열 가지 재앙 당시의 애굽 왕.

-아멘호텝 3

 그의 치세 때에 애굽 제국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대제 아멘호텝 3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멘호텝 4

 그는 아크나톤(Akhnaton)이란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 애굽의 다신교를 태양 신 아톤(Aton)만을 섬기는 유일신교로 뜯어 고치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열 가지 재앙 당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권세에 영향을 입은 듯하다.

 아멘호텝 4세는 네페르티티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다. 이 한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하여 옛날부터 허다한 그림과 조각이 제작되었다. 아래 내용의 고대 기록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엘 아마르나 서판이 발견된 것은 주후 1,880년 이다). 여기에는 하비루(Hapirus)라고 하는 침략 족속을 내쫓기 위해 애굽의 도움을 구하는 팔레스틴의 가나안 왕들로부터 애굽 왕 아멘호텝 4세에게 보내는 멧세지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비루 족속이 사실상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이었다고 생각한다(그렇지만 이 설은 다수의 주장이 아니다).

-투탄카톤

 그는 아멘호텝 4세의 양자였다. 주후 1,922년에 그의 무덤이 하워드 카터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이 무덤에는 금만 해도 7,000만원어치 이상이 묻혀 있었다. 투탄카톤의 미이라는 세 개의 금곽 안쪽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커다란 석관에 누워 있었다. 시체는 또한 네 개의 나무입힌 외곽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주전 1,361, 열 살에 등극하여 19세에 사망했다.

-람세스 2

 그는 최후의 강력한 바로였으며, 67년간 재위한 가장 자부심 강한 왕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 기록상 가장 오래된 협정을 헷 족속과 맺은 사람이기도 했다(주전 1,250년경).

-람세스 3

 그는 주전 1,190년에 일어난 유명한 해전(海戰)에서 블레셋을 격파한 것으로 기억되는 왕이다.

 이후부터 애굽은 줄곧 내리막길로 치달린다. 이외의 성경 역사에 나오는 중요한 바로 를 들자면, 26왕조의 느고 2, 즉 느고 왕을 들 수 있다. 그는 경건한 유다 왕 요시야를 살해했으며(왕하 23:29), 주전 605년에 일어난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인들에게 참패당했다( 46:2 참조).

 

Ⅴ. 바벨론

 

 1.소개

 

 1)주전 2,000-1,800년 사이에 메소보다미아는 엘람 족속이라 불리는 일단의 동방인들에게 지배되었다( 10:22/14:1, 9 참조). 엘람 족속이란 오늘날 흔히 페르시아(바사)인 들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다.

 

 2)주전 1,760년에 엘람 족속들은 유브라데 강 서쪽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에 의해 메소보다미아에서 쫓겨났다. 이 침입을 주도한 승승장구의 아모리 장군은 함무라비였다. 이 인물로 더불어 고() 바벨론 왕국이 시작되었다. 그가 죽자 그의 제국은 분열되어 근 100년 동안이나 지리멸렬한 상태로 있다가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의 갈대아 군인에 의해 신(즉 두번째) 바벨론 왕국이 수립된다.

 

 2.고 바벨론 왕국

 

 1)주전 1,760년 함무라비는 티그리스-유브라데 계곡을 점령하고, 유브라데 강가에 수도 바벨론을 세웠다.

 

 2)바벨론의 주신(主神)은 마르둑이었다. 함무라비는 마르둑의 지상 사자(使者)임을 주장하여 통치권의 신성(神性)을 수립하였다.

 

 3)그는 바벨론 제국의 창설자일 뿐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의 편찬자로도 알려져 있다.이 법전은 바벨론의 생활 중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국면을 규제하는 약 300조항의 법률집이다. 그러나 함무라비가 이 법률을 입안한 것은 아니며 약 300년 전에 수메르의 덩기가 이미 입안했던 것을 함무라비가 법률화하여 요약한 것이다.

 

 4)고 바벨론 제국은 그의 치세 중에 번영일로를 걸었으며, 그는 42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죽었다. 주전 1,708년 그가 죽은 직후에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일단의 전사들인 헷 족속이 메소보다미아를 점령하자 고 바벨론 왕국은 멸망했다. 헷 족속은 헷의 후예이다( 10:15/23:3-20/27:46 참조).

 

 5)대략 170년 동안 헷 족속이 바벨론 영토를 지배했으나, 주전 1,530년 그들은 메소보 다미아 북부에 살고 있던 구스족(Kassites)에게 복속당했다( 2:13/10:8 참조). 그들은 이 지역을 근 400년 동안 지배했으나, 앗수르와 엘람인들에게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3.신 바벨론 왕국

 

 1)주전 620년경, 갈대아인들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인들이 초토화시켰던 바벨론을 재건했다. 앗수르 치하의 고 바벨론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갈대아인들이 메소보다미아 남단에서 건너왔다. 이들은 나보폴라살이라 하는 인물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나중에 그는 바벨론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직후 그는 메소보다미아 북부 전역을 장악하고 있던 메대 왕의 딸과 그의 아들이 결혼하도록 주선하였다. 주전 612년 나보폴라살의 유명한 아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인과 메대인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공략했다.

 

 2)반란은 성공하였으며, 이 결과 신바벨론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3)주전 606년 느부갓네살은 저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에서 눈의 가시로 남아 있던 애굽을 격파했다. 느부갓네살은 도망하는 애굽인들을 쫓아 서쪽으로 예루살렘까지 추격했다. 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하여 짧은 시간에 그쳤다. 그는 주전 605 8 15일에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최소한 세 번은 포위 공격한 후에 그 성을 전소시켰다.

 

 그 세 번의 공격은 다음과 같다.

 (1)주전 605

 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여호야김(요시야의 아들)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으며, 성전 보물 일부를 약탈하고 왕족을 바벨론으로 잡아갔다. 이들 중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있었다(대하 36:6, 7/ 1:1-3).

 

 (2)주전 579

 그는 다시 예루살렘에 와서 나머지 보물을 가져가고, 이와 더불어 선지자 에스겔, 왕 여호야긴(여호야김의 아들), 십만 명에 달하는 왕족, 관리, 주요 인물들을 포로로 끌고갔다(왕하 24:14-16). 이 일은 주전 597 3 16일에 일어났다.

 

 (3)주전 586

 그는 또 다시 와서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주도한 반란을 응징했다. 이때 예루살렘 방벽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전소되었다. 시드기야의 아들은 살해되고, 시드기야 자신은 눈알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거기서 그는 여생을 마쳤다. 그리고 나서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시를 개수하는 광범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4). 이리하여 바벨론이 그의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도시를 두른 방벽의 높이는 90m였고, 두께는 25m였다. 이 벽은 정방형으로 도시를 둘렀으며, 한 면의 길이 는 14km에 달했다. 내부 면적은 500,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의 뉴욕시의 크기와 맞먹었다.

 

 바벨론은 노아의 4대손 니므롯에 의해 창건되었다( 10:8-10). 수차례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 도시는 세상에 알려진 가장 호화스럽고 웅장한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잘 세워진 그 도시는 38㎟에 뻗쳐 있었으며, 유브라데 강이 그 도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 도시가 높이 106m, 두께 26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전한다. 더구나 방벽의 밑부분은 굴착을 저지하기 위해 지하 10m까지 연장했으며, 폭은 여섯 대의 전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성벽 위에는 전략적인 위치마다 모두 250개의 망대가 있었다.

 

 이 거대한 성벽 바깥에는 커다란 외호, 즉 성 주위를 둘러싼 수로가 있었는데, 그 수로에는 유브라데 강의 물이 채워졌다. 이 거대한 외호는 적군이 쳐들어 오는 것을 막아내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무릇 바벨론 성을 공략하자면 성벽으로 다가서기 전에 이 물웅덩이를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성벽에는 놋으로 된 100개의 문이 있었다.

 

 바벨론은 안전한 요새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저 유명한 바벨론의 가공 원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정원은 넓이가 36㎞로 대지 위에 여러 계단을 차곡차곡 포개놓은 형태였으며 하늘로 높이 90m가량 치솟아 있었다. 관람객들은 폭 3m의 계단을 통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 이 가공원은 사람을 짓누르 듯했다. 탑 자체의 밑바닥은 한 면의 폭이 91m였다. 바벨탑에 가까운 거대한 마르둑 신전은 유브라데 계곡에서 가장 유명한 성소였다. 거기에는 적어도 22t 이상 나가는 벨(Bel)의 금상과 금 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에 벨과 아스달의 황금 신상, 두 금사자, 길이 12m, 4.5m의 금탁자, 높이 5.5m의 정금 으로 된 사람의 상이 있었다. 바벨론은 문자 그대로 금의 도시였다( 14:4 참조). 바벨론에는 이스달 신전이 53개이고 제단이 180개 있었다.

 

 4)느부갓네살은 주전 562년에 죽었다.

 

 5)허약한 사람들에 의한 몇 단계의 짤막한 치세기를 거친 후, 나보니두스가 느부갓네살의 뒤를 이었다. 나보니두스는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했으며 주전 556년부터 539년까지 권좌에 있었다. 그는 왕위가 싫어지자 왕권을 아들 벨사살에게 맡기고 바벨론 시를 떠나 동쪽으로 물러갔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역사상 최초의 고고학자가 되었다.

 

 6)주전 539 10 13, 바벨론 시는 메대와 바사 동맹군의 손에 들어갔다. 벨사살은 살해되고, 신 바벨론 왕국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5장 참조).

 

 7)바벨론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이 발전했다. 바벨론인들은 훌륭한 건축자들이었다. 저 유명한 가공원도 느부갓네살이 자기의 고향 메대의 산을 그리워하는 아내 아메티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건축한 것이다. 또한 그의 왕궁은 넓이가 12㎟였으며, 향연장은 폭이 19m, 길이가 52m로 면적은 1020㎞였다.

 

 

Ⅵ. 앗수르

 

 1.소개

 

 1)앗수르인들이 고대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한 족속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야수와 같이 잔인한 행위를 통해 정복하고 지배했다. 그들은 주전 1,200년경에 메소보다미아를 지배했다.

 

 2)그들은 피점령국 사람들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썼다. 싸움에 진 나라의 백성들은 고국을 떠나 앗수르에 노예로 끌려갔다. 그리하여 그들의 고국은 그곳에 살기를 희망하는 이방인들의 소유가 되기 마련이었다.

 

 3)앗수르인들은 성벽파괴용 무기를 개발했는데 그것이 바로 공성퇴 및 다른 장비들이다.

 

 4)그들은 또한 "파발" 제도의 창시자들이다. 왕은 이와 같은 "통신체계"를 통해서 각지의 방백들과 긴밀한 연락망을 유지했다.

 

 5)그들은 수로, 계단, , 아아치가 있는 신전과 왕궁을 건설했다. 왕을 위해서 거대한 왕궁이 건축되었다. 코르사밧에 있는 사르곤 2세의 저택은 대지 면적이 100,000㎞로, 200여개의 커다란 방이 들어서 있었고, 한꺼번에 8,000명의 손님을 유숙시킬 수 있었다.

 

 6)앗수르의 수도이자 가장 중요한 도시는 니느웨였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있는 도시로 고대의 큰 도시 중의 하나였다(아마도 가장 큰 도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성벽에는 높이 60m의 탑이 1,200개 있었고 성벽의 높이는 30m였다. 또한 그 폭은 세 대의 전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또 둘레의 길이는 96km, 그 성의 면적은 60만 명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곡물이 자라기에 충분했다. 크세노폰의 말을 빌리자면, 그 성벽의 기초는 마광석으로 되어 있었고, 그 폭은 4.5m였다 한다. 그 성 안에는 0.4㎟ 이상의 정원을 갖춘 궁전이 있었다. 궁전의 지붕을 떠받치는 들보는 백향목이었으며, 이 들보를 지탱하는 것은 삼나무 기둥이었다. 백향목 기둥에는 아름다 운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고, 갖가지 형상을 조각한 은제 혹은 철제 머리싸개가 보강 되어 있었다. 궁전의 입구 곁에는 돌로 된 거대한 사자와 숫소가 버티고 있었다. 문은 상아, 은 또는 철로 입힌 삼나무와 흑단으로 되어 있었고, 방 안의 부벽은 석고를 바른 후에 조각을 아로새긴 것이었다. 그 벽돌에는 설형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가공원은 값비싼 식물과 희귀한 동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신전과 궁전, 도서관 및 병기 창과 더불어 이 도시의 부를 자랑했다. 이 모든 것들은 이방 노예들의 강제노동으로 이 루어졌다.

 

 2.앗수르의 중요한 왕들

 

 1)디글랏빌레셀 1(주전 1,114-1,076)

 초기의 가장 강력한 왕들 중의 한 사람. 세상의 지배자로 자칭했으며, 몸소 거대한 물소 네 마리, 코끼리 열 마리 그리고 사자 120마리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2)앗수르나시팔(주전 883-859)

 이 왕으로 더불어 거대한 대외 침략 정책이 추진되었다.

 

 3)살만에셀 3(주전 858-824)

 이 왕은 성경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의 기록에 따르자면, 아합 왕이 그와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앗수르나시팔의 아들이었다.

 

 4)디글랏빌레셀 3(주전 746-728)

 이 앗수르 장군은 왕위를 찬탈하고, 살만에셀 3세가 죽은 뒤로 8년 동안에 걸쳐 줄곧 퇴보한 제국을 부흥시켰다. 그는 곧잘 성경에 등장한다(왕하 15:29/16:7, 10). 이스라 엘과 유다가 분쟁할 당시에, 유다 왕은 어리석게도 외국의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자 곧 디글랏빌레셀이 이스라엘로 침입하여, 요단 동편에 살고 있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지파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잡아갔다(왕하 15:29, 30). 실제로 이 왕은 앗수르의 군대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투부대로 만들었다.

 

 5)살만에셀 5(주전 727-722)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를 포로로 잡아 감금하고(왕하 17:1-6), 사마리아를 포위 공략하던 중에 사망했다.

 

 6)사르곤 2(주전 721-705)

 사마리아에 대한 포위 공략을 매듭지은 살만에셀의 장군. 그는 이사야서 20 1절에 등장한다. 후에 암살당했다.

 

 7)산헤립(주전 705-681)

 사르곤 2세의 유능한 아들. 아버지가 죽었을 당시에 산헤립은 바벨론의 방백이었다.

 그는 후에 바벨론이 반란을 시도하였다는 이유로 그 성을 파괴했다. 사르곤 2세는 주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스기야에게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사자를 보내사 예루살렘을 건지셨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천사는 십팔 만 오천 명의 앗수르 군대를 살해하였다(왕하 18, 19/대하 32/ 36, 37). 산헤립은 후에 자기의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8)에살하돈(주전 681-669)

 자신의 아버지 산헤립이 파괴한 바벨론을 재건했다. 에살하돈은 위대한 왕이었으며, 추측컨대 아마도 그가 유다 왕 므나셋를 잠시 동안 바벨론에 감금시킨 장본인인 듯하다(대하 33).

 

 9)앗수르바니팔(주전 668-626)

 그는 다양한 외국인들로 하여금 왕국령 북부의 인구가 한산한 지역으로 이주하게 하였으며, 그들이 그곳을 차지하도록 방관했다. 이곳이 바로 사마리아 족속의 발상지이다 (왕하 17:24). 그는 앗수르 최후의 막강한 왕이었다. 그의 왕국은 그가 죽은 이후 15년간 존속했을 따름이다. 수도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멸망했다.

 역사를 보건대 바벨론 침략군의 왕 나보폴라살은 3년 동안 앗수르의 니느웨를 포위했으며, 그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이 때문에 니느웨 성 안의 앗수르인들은 기뻐 날뛰었으며 주연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연히 티그리스의 강물이 둑을 넘어 거칠게 니느웨 성벽을 두들겨댔다. 곧 성벽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바벨론인들이 밀려들어갔으며, 그 오만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니느웨의 파괴는 너무 처절해서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 들어갔을 때 옛날에 그 웅장한 도시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도시는 주후 184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발굴되었다.

 

 

Ⅶ. 바사(페르시아)

 

 1.소개

 

 1)바사인들은 대략 220년 동안(주전 550-330)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닌 제국을 유지했다.

 

 2)그들은 가장 훌륭한 통치 체제를 수립했으며, 로마 제국 이전으로서는 가장 막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정치체제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왕국은 총독 관구로 불리는 21개의 도로 나뉘어 있었다. 그들은 법률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였으며, 심지어 왕까지도 그것에 복종했다.

 

 3)그들의 주요 도시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이다.

 

 4)그들은 과거 앗수르인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파발" 체제를 이용하였으며, 22km마다 역점을 두었다. 이와 같은 제도 덕분에 변경 지방의 소식도 십 일 이내에 왕의 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5)많은 사람들은 바사의 왕궁이야말로 이때까지 세상에서 지어진 건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6)바사의 중요한 교사는 주전 600년경에 태어난 조로아스터(Zoroaster)이다. 그는 선(빛으로 나타남)과 악(어두움으로 나타남)으로 이루어진 이원론(二元論)을 발전시켰다. 조잡한 형태로나마 조로아스터는 의로운 자들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악한 자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장차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도 가르쳤다. 조로아스터는 비록 이교도이며 많은 오류를 저질렀지만, 노아의 홍수 이후에 위와 같은 성경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세계 종교를 창시한 이교도 중 최초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바사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민족에게 각자 고유한 종교 제도를 지키도록 허용하리만치 아주 관용적이었다.

 

 7)바사인들은 개를 매우 좋아했다. 고대의 다른 어떤 문명권에서도 바사에서 만큼 개가 좋은 대우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개의 부릅뜬 눈이 악마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개를 때리는 것은 일종의 죄였으며, 강아지를 소홀히 다루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를 소홀히 다루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2.연대별로 살펴본 바사의 역사

 

 1)주전 550년에 바사의 한 장군이 메대를 정복하고 이들을 바사인들과 연합시켜 최강의 전투부대로 만들었다. 이전에 그들은 메대의 지배를 받아왔었다.

 

 2)이 바사인의 이름은 고레스 대제로,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주전 547, 그는 엄청난 부자로 소문난 리디아의 왕 크뢰수스(Croesus)를 정복했다(리디아는 지중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나라였다). 고레스는 낙타 부대를 이용해서 이 전쟁에 승리했다.

 

 3)이 후에 그는 동쪽으로 인도 국경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영토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나서 바벨론으로 향했다. 주전 539, 그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느부갓네살을 처형하였다( 5장 참조).

 

 4)수년 후 고레스는 유대의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였다( 1장 참조). 그는 주전 529년에 전장에서 죽었다. 고레스라는 이름은 성경에도 나온다( 1-5/ 44:28/45:1/ 1:21/6:28/10:1 참조).

 

 5)그의 뒤를 이어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즉위하여 애굽을 정복한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그의 통치 중에 칙령에 따라 잠시 동안 중단되었다( 4:7-11 참조). 캄비세스는 자기에 대한 반역 음모를 알고 자결했다.

 

 6)다리오 대제(주전 522-486)가 무너져가는 제국을 떠맡아 법과 질서를 회복했다. 다리오는 아주 잔인했다. 바벨론 성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는 성의 지도자급 주민 삼천 명을 처형했다. 그렇지만 캄비세스가 중단시켰던 성전 재건은 계속하도록 허락했다 ( 6:1-12 참조).

 주전 490년에 다리오 대제는 기병과 보병 6,000명을 태운 600척의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가 헬라 문명을 정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헬라 장군 밀티아데스에게 마라톤이라는 조그만 평야에서 참패를 당했다. 숫자상으로는 바사가 엄청나게 우세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인들은 그들의 적을 에워싸고 마치 무르익은 곡식을 베는 것처럼 그들을 쓰러뜨렸다. 마라톤 전투는 "역사상 가장 큰 100개의 사건"이라는 윌리암 드윗(William A. DeWitt)의 책에 여섯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7)다리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주전 486-465)가 이어 즉위했다. 그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왕 아하수에로이다. 주전 480년 봄,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십만 명과 수백 척의 배를 거느리고 다르다넬즈(the Dardanelles) 해협을 건넜다. 역사를 보면 크세르크세 스는 화려한 색깔의 깃발을 들고 늠름하게 행진하는 그의 군대를 보고 울었다고 한다. 부하들이 왜 우느냐고 묻자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짐은 이 모든 군사적 영광이 순간에 불과할 따름이며 곧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오늘 이 자리에 참전했던 모든 사람들은 기껏해야 백 년도 못 가서 죽고 말겠지. 짐도 물론 그렇고 말이야."

 곧 이어 재난이 엄습해 와서 크세르크세스는 바다의 격렬한 태풍에 휘말려 400척의 배를 잃었다. 실의와 분노로 그는 허리띠를 풀어 성난 파도를 쳤다.

 헬라에 도착한 그의 오만한 바사 군대는 테르모필레라고 불리는 험준한 산길에서 하루 종일 진군을 저지당했다. 여기서 레오니다스라는 헬라의 대장과 그의 용감한 스파르타 군대 300명이 24시간 동안 침략군 전체의 진군을 막고 엄청난 손실을 입혔기 때문에, 훨씬 전력이 약했던 헬라군은 질서정연하게 안전한 곳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결국 포위망을 돌파하여 아테네를 모두 태워버렸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 대다수는 살라미 섬으로 피난한 이후였다. 그리하여 바사 왕은 살라미를 향해 돛을 올렸다. 그의 군대가 도망한 아테네 시민의 숫자보다 최소한 세 배 이상 많았기 때문에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보다 숫자는 작았지만 더욱 민첩한 헬라의 전함들은 자유자제로 공격했다. 얼마 후 그는 당황한 눈으로 오만한 그의 해군이 참패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일개 패잔병이 되어 바사로 되돌아갔다. 그의 남은 부대는 나르도니우스 장군이 통솔했다. 그로부터 일 년 후인 주전 479년 나르도니우스는 플라테아 결전에서 패배했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이리하여 바사 제국은 일대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풀러(J. F. C. Fuller) "서양의 주요 전쟁들"에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쟁들 가운데 살라미 해전과 플라테아 전투를 끼워 놓고 있다.

 

 8)아닥사스다(주전 465-423)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통치자이다( 7:1/ 2:1 참조).

 

 9)다리오 3(주전 335-331)

 바사 제국은 다리오 3세의 짧은 통치기간 중에 알렉산더 대제에게 멸망당했다.

 

 

Ⅷ. 헬라

 

 1.배경

 

 1)주전 546년부터 479년까지 헬라의 도시국가들은 끊임없이 바사의 침입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침략은 살라미와 플라테아에서의 승전 이후 잠잠해졌다.

 2)이 두 전투 직후 헬라는 페리클레스(Pericles/주전 461-429)라는 아테네의 민주적 지도자가 주도하는 황금기를 맞는다. 이 시기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유명한 사람들이 다수 배출된다.

 (1)헤로도투스(주전 485-425):역사의 아버지.

 (2)히포크라테스(주전 460-370):근대 의학의 아버지.

 (3)소크라테스(주전 469-399):철학자.

 (4)플라톤(주전 427-347):철학자.

 (5)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철학자.

 (6)데모스테네스(주전 385-322):역사상 가장 위대한 웅변가들 중의 한 사람.

 3)그렇지만 황금기도 짧은 기간에 그쳤다. 헬라의 대표적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도시 간의 무력 대립은 세 차례에 걸쳐 일어 났는데, 이것이 이른바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이다(주전 459-404).

 이 전쟁 후에 스파르타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2.알렉산더 대제의 등장

 

 1)주전 338. 마게도냐 출신의 한 사람이 헬라를 정복했으나 이 년 후인 주전 336년에 암살당했다. 그의 이름은 마게도냐의 필립이었다(주전 380-336).

 2)필립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제가 즉위했다. 이가 곧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복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된다. 그는 당시 20세였다. 그는 바사를 정복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즉시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다.

 3)주전 334년에 그는 소아시아와 중동 사이에 있는 헬레스폰트해(다르다넬즈 해협의 옛 이름)를 건넜다.

 (1)그는 주전 334년에 그라니쿠스에서 바사군을 무찔렀다.

 (2)그는 다시 주전 333년에 그들을 대패시켰다.

 (3)그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두로 지방을 항복시켰으며, 애굽을 정복했다. 거기에 그는 알렉산드리아 시를 건설했다.

 (4)그는 주전 331년에 아르벨라에서 바사를 영원히 멸망시켰다.

 4주전 327년에 그는 인도로 쳐들어갔다. 또한 그는 이때 바벨론 성읍을 복구시켜 예전 의 영화를 되살렸다. 그러나 그는 인도에서 서른두 살의 나이로 죽었다.

 5)그의 강대한 제국은 네 명의 부하 장군들에 의해서 분할되었다.

 (1)프톨레미-애굽을 지배함. 클레오파트라는 이 혈통 출신이다.

 (2)셀류쿠스-수리아를 지배함. 이 수리아에서 악명높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주전 176-163)가 나왔다.

 (3)카산더-헬라와 미게도냐를 지배함.

 (4)리시마쿠스-소아시아를 지배함.

 

 

Ⅸ. 로마

 

 1.로마 제국의 형성

 

 1)전승에 따르면 로마의 창건일은 주전 753 4 21일이라 한다. 키케로(Cicero)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로마의 창건자는 로물루스이다. 로물루스는 39년간 통치했으며, 그 후에 신비스럽게 사라졌는데, 전설에 의하면 하늘로 들리워 올라갔다고 한다.

 

 2)주전 338년에 로마는 이태리 반도 중앙을 관할했다.

 

 3)그러나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으며, 카르타고는 주전 146년에 멸망했다. 포에니 전쟁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 1차 포에니 전쟁(주전 264-241)

 (2) 2차 포에니 전쟁(주전 218-202)

 이때 한니발이 활약했다. 그는 코끼리로 주전 218년에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의 두 대군을 무찌름으로써 로마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또한 그는 주전 216년에 칸느에서 적군을 참패시켰다. 마지막으로 그는 주전 202년에 자마(Zama)에서 스키피오(Scipio)라는 로마의 장군에게 패하였다. 그리하여 로마는 지중해의 지배자가 되었다.

 (3) 3차 포에니 전쟁(주전 149-146)

 카르타고 시가 함락되고 불에 탔다.

 

 4)로마의 유명한 장군 폼페이는 주전 63년에 팔레스틴을 정복했다. 이후 로마에는 내란과 불안의 시기가 잇따랐다.

 

 5)그때 로마 제국은 줄리어스 시저를 통하여 그의 유명한 갈리아 전쟁 기간 중에 안정을 이룩하여 견고해졌다(주전 58-51). 주전 44년 3월 15 시저는 로마에서 암살당했다.

 

 2.신약성경 시대로부터 멸망까지의 역사

 

 1)로마 제국은 옥타비아누스 시저(이는 줄리어스 시저와 다른 인물로 아우구스도 가이 사라고 불린다)에게 넘어갔다. 그는 주전 42년에 빌립보에서 브루터스와 카시우스를 패배시켰다(이 두 반란자는 줄리어스 시저를 살해한 사람들이다). 주전 31년 옥타비아 누스는 악티움(Actium)에서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애굽을 로마의 속국으로 삼았다. 이때 로마 제국은 권력과 영광의 절정에 도달했다. 주 예수께서 태어나신 것은 바로 이 옥타비아누스의 통치 때였다( 2:1). 옥타비아누스는 주전 31년부터 주후 14년까지 통치했다.

 

 2)옥타비아누스의 뒤를 이어 디베료 가이사(Tiberius Caesar/주후 14-37)가 즉위했다. 세례 요한과 구세주의 사역은 모두 이 시기에 행해졌다.

 

 3)갈리굴라(주후 37-41)

 그는 `작은 구두'라고도 불렸다. 그는 극악무도한 미치광이가 되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는 사도행전의 초기 시대에 즉위했다.

 

 4)글라우디오(Claudius/주후 41-54)

 그는 아내에게 독살당했다. 그의 통치 때에 바울이 위대한 전도여행을 하였다.

 

 5)네로(Nero/주후 54-68)

 8년간의 정상적인 통치 후에 네로는 미친 괴물로 변해버렸다. 그는 로마를 불태우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를 불태웠다는 누명을 씌워 무고하게 살해하였다. 베드로와 바울이 그의 통치 중에 순교하였다. 주후 68년에 네로는 자결했다.

 

 6)로마의 장군 베스파시안(Vespasian/주후 68-79)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들에게 예루살렘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주후 70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7)그가 죽자 디도(Titus)가 즉위했다. 그는 주후 79년에서 81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폼페이가 베수비오 산의 화산 폭발로 인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8주후 81년에 도미티안(Domitian)이 즉위했다. 그는 사도 요한을 밧모 섬으로 유배보냈다( 1:9).

 

 9)열 명 이상의 로마 황제들이 공통적으로 한 일이 있다. 그것은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는 것이다!

 

 10)마지막으로 주후 284년에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이 즉위했다. 그의 통치를 고비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극악무도한 박해자였다.

 디오클레티안은 로마를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리시키고 막시미안(Ma.imia n)을 임명하여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는 305년에 물러났다.

 

 11)디오클레티안이 왕위를 물러날 때, 두 사람이 왕위를 두고 싸웠다. 하나는 그의 아들 막시미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콘스탄틴(Constantine)이었다. 누가 로마를 지배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주후 312년 로마의 외곽에 있는 `밀비안 다리'라는 곳에서 일단락 되었다. 여기서 콘스탄틴은 그의 권력경쟁자를 무참하게 패배시켰다.

 

 12)313년에 콘스탄틴은 저 유명한 "관용령"(the Edict of Toleration)을 내렸는데, 이는 사실상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관하기도 했다.

 

 13)콘스탄틴의 조카 배교자 쥴리안(Julian)이 자기 숙부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기독교를 내쫓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363년에 한 정쟁터에서 죽어가면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오 갈릴리인이여, 그대가 결국 이겼노라!"였다.

 

 14)데오도시우스 대제(Theodosius/주후 378-395)

 기독교의 열렬한 옹호자인 그는 디오클레티안이 예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로마를 동서로 분할했다.

 

 15)450-455년 사이에 훈족의 아틸라와 반달족들이 이태리와 로마를 약탈했다.

 

 16)476,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폐위당 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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