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와 함석헌도 親日派인가?

김기철의 동서남북

광풍(狂風)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먼지가 가라앉기 전에 따져봐야 할 일이 있다. 지난달 총리 후보에 올랐던 문창극씨를 '친일파'로 몰아 도중하차시킨 사건이다. 문창극씨가 총리가 될 자격이 충분했는지 여부는 따질 필요가 없게 됐다. 하지만 3년 전 그가 교회에서 한 강연을 문제 삼아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 총리 후보 철회를 요구한 역사학자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당시 이곳저곳에서 문 후보를 공격했기에 주목받진 못했지만 한국역사연구회와 한국사연구회, 한국근현대사학회 등 한국사 관련 단체 7곳은 '한국 역사학계가 국민께 드리는 글'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문 후보자의 발언은 제국주의 역사관으로 비판받았고 이제는 극복됐다고 여겨진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일제의 식민사관, 그리고 극단적 반공국가주의 역사관을 신앙적 차원으로까지 내면화한 상태에서 한 망언"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사 학회들이 문제 삼은 대목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 지는 것이 우리 민족의 DNA"라고 했다든가 "일제의 식민 지배는 조선 왕조 500년을 허송세월한 우리 민족의 탓" "8·15 해방은 독립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했다는 강연 내용이다.

그런데 항일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던 1910년 쓴 논설 '20세기 신국민'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에는 예부터 놀고먹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아 서생(書生), 환족(宦族), 토호(土豪) 등… 집안 전체가 놀고먹기만 하여 아무 힘없는 농·공·상가(家)의 이익을 빼앗으니 국민을 좀먹는 자가 다수이다.' 단재는 이 글에서 '근면성 부족' '진취력 부족' 등 당시 조선인의 자질을 비판했다. 더 나아가 '한국 동포는 굳세고 용감함이 가장 결핍한 국민' '공공심이 거의 없는 국민' '한국은 예부터 이기심이 굳으며 타인을 배타하는 성격이 많은 나라'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문씨가 강연한 내용보다 수위가 높으면 높았지 결코 덜하지 않다.

1970년대 이름난 저항운동가였던 함석헌 선생도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조선이 망한 이유를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라고 했고, 38선을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했다. '38선은 하나님이 이 민족을 시험하려 낸 시험문제다. 아마 마지막 문제일는지 모른다. 이번에 급제하면 사는 것이고, 낙제하면 영원히 망하고 말 것이다.'

신채호와 함석헌을 친일파라거나 시대착오적 역사관을 가졌다고 비난하는 국사학자들은 없다. 망국과 분단의 위기를 겪은 지식인들이 민족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 쏟아낸 고언(苦言)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문씨가 신앙 고백 차원에서 한 1시간짜리 교회 강연을 의도적으로 또는 역사와 종교에 무지해서 멋대로 짜깁기한 KBS는 그렇다 치자. 성실한 연구자들이라면 이 강연이 신채호나 함석헌과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역사연구회 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KBS의 편향과 오류를 바로잡기는커녕 문 후보 끌어내리기에 앞장섰다. 한국사 분야 대표적 학회들이 시정잡배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며 정치 싸움에 끼어드는 건 꼴 사나운 일이다. 무엇보다 학회 회원들이 이런 성명을 내는 데 동의했는지, 또 성명문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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