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입문 


기독교는 물론 신앙이라는 원칙 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히 11:6). 이 말을 쉽게 풀이하자면 이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서재에서 연구하고 실험실에서 실험을 한다고 해도 인간의 논리로써는 하나님과 우주에 관한 올바른 영적 사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진리는 오직 성서 안에서만 발견되는데,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 신앙이 많은 경우와 많은 분야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지만 결코, 그것인 불합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아가서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위대한 창조 행위를 통해서 그의 존재의 사실성과 그의 말씀의 신실성을 성심껏 추구하는 자에게 보여주시는 강력한 암시와 징조를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성서에 기록된 그의 첫번째 설교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16-17).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긍정하는 바울의 여러 가지 외적 증거 중에는 고고학이 포함될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성을 입증하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성서가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것임을 보여주고 고고학적 발굴 83건을 제시해 보기로 하겠다.

 

 

 성서와 고고학

 

 1. 창조(창 1:1)
 2. 유일신론(창 1:1)
 3. 에덴 동산(창 2:8-17)
 4. 인간의 타락(창 3:1-24)
 5. 최초의 문명(창 4:1-26)
 6. 대홍수 이전의 긴 수명(창 5:1-32)
 7. 지구 전체에 걸친 대홍수(창 6:9)
 8. 열방의 계보(창 10:1-32)
 9. 바벨탑(창 11:1-9)
10. 갈대아인들의 우르(창 11:31 ; 12:1)
11. 하란의 존재(창 11:31 ; 12:5)
12. 그돌라오멜의 전쟁로(창 14:1-12)
13. 헷 제국(창 15:20)
14. 나홀의 존재(창 24:10)
15. 족장 시대의 약대 이용(창 24:11)
16. 소돔과 고모라라는 두 도시(창 19장)
17. 기근 때 그랄의 풍부한 식량(창 26:1)
18. 라반의 염려(창 31:14-35)
19.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창 39장)
20. 지푸라기를 섞지 않은 벽돌(출 1:11 ; 5-7-19)
21. 애굽인 장자의 죽음(출 12장)
22.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 빠져 죽음(출 14장)
23. 요단강의 갈라짐(수3장)
24. 여리고 함락(수6장)
25. 기브온의 부유함(수 10:2)
26. 기럇세벨의 샘(수 15:13-19)
27. 팔레스틴의 정복에 왕벌이 이용됨(수 24:12)
28. 여호수아의 매장(수 24:30)
29. 사사기의 성읍들(삿 1:21-29)
30. 블레셋과 철제 무기(삿 1:29)
31. 드보라와 바락의 전투보고(삿 4장)
32. 기드온의 은밀한 타작 마당(삿 6:11-18)
33. 거짓 신 베릿의 신전 탑(삿 9장)
34. 기브아의 멸망(삿 20장)
35. 실로의 멸망(삼상 4장)
36.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집(삼상 10:26)
37. 요나단이 블레셋인들을 무찌름(삼상 14장)
38. 다윗의 음악(삼상 16:18, 23 ; 대상 15:16)
39. 사울의 죽음(삼상 31장)
40. 기브온 못(삼하 31장)
41. 예루살렘의 함락(삼하 5:6-10)
42. 솔로몬의 부귀영화(왕하 4:26 ; 9:26 ; 10:22)
43. 애굽 왕 시삭의 유다 침략(왕상 14:25-28 ; 대하12:2-4)
44. 북왕국의 왕 오므리의 통치(왕상 16:23-24)
45. 여리고의 재건(수 6:26 ; 왕상 16:34)
46. 갈멜 산에서의 엘리야의 승리(왕상 18장)
47. 아합의 상아궁(왕상 22:39)
48. 사마리아의 못(왕상 22:37-38)
49.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전쟁(왕하 3장)
50.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왕하 7장)
51. 예후 왕의 심판(왕하 10:29-33)
52. 여로보암 2세의 종에게 준 공식인장(왕하 14:23-29)
53. 니느웨의 회개(욘 3장)
54. 므나헴이 앗수르의 왕 불에게 바친 조세(왕하 15:16-20)
55. 웃시야 왕의 업적과 심판(대하 26장)
56. 앗수르의 왕 불, 살만에셀에게 조세를 바침(왕하 16:5-9)
57.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화폐조공을 바침(왕하 16:5-9)
58. 사르곤의 역사성(사 20:1)
59. 히스기야의 서기관 셉나의 인장과 무덤(사 22:15-16 ; 36:2)
60. 산헤립에 의한 라기스 파괴(대하 32:9 ; 사 10:29)
61. 산헤립의 예루살렘 함락 실패(왕하 18-19장 ; 대하 32장 ; 사 36-37장)
62. 산헤립의 자기 아들에 의한 피살(사 37:37-38)
63. 앗수르인에 의한 므낫세의 감금(대하 33:11)
64. 요시야의 통치 중에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책이 발견됨(대하 34:8-32)
65. 히스기야의 수로(왕하 20:20 ; 대하 32:30)
66. 히스기야의 성벽 개수(대하 32:5)
67. 느부갓네살에 의한 라기스 파괴(렘 34:7)
68. 여호야긴의 감금과 시드기야의 즉위(왕하 24:10-19 ; 25:27-30)
69. 애굽의 도움을 바라고 바벨론을 쳐부수겠다는 시드기야의 허황된 꿈(렘 37:1,5-11)
70. 그달랴와 그의 관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렘 41:1-15)
71. 예레미야가 애굽의 다베네스에 큰돌을 묻음(렘 43:8-13)
72. 바벨론 포로기 중의 유대인의 생활(렘 29:4-7)
73. 느부갓네살의 거대한 신상과 격렬히 타는 풀무(단 3장)
74.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바벨론의 거대함(단 4장)
75. 느부갓네살의 정신이상(단 4장)
76. 벨사살의 역사성(단 5장)
77. 바벨론 포로와 벨사살의 처형(단 5장)
78. 다니엘과 사자굴(단 6장)
79.에스더서와 바사 왕 아하수에로(참조, 에스더)
80. 고레스 왕의 칙령(스 1:1-4)
81. 다리오 대왕의 역사성(스 6:1-15)
82. 느부갓네살에 의해 건축된 성벽(느 1-6장)
83. 느부갓네살의 적들(느 2,4,6장)

 

 

성서와 고고학
 
 1. 창조(창 1:1)


 "태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1848-1876년 사이에, 창조사건에 대한 성서 이외의 최초의 언급이 기록된 서판이 앗수르의 황제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9-626)의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분명히 기원전 2000년 이전의 것이다. 천지창조를 주제로 삼고 있는 이 바빌로니아-수메르의 서사시는 "이누마엘리쉬"(Enuma elish)라고 명명되는데, 일곱 개의 서관에 씌어진 일곱 개의 편(contos)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이 서판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크게 왜곡되어 있긴 하지만 창세기의 창조기록과 매우 놀랄만한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그 유사점은 아래와 같다.


1) 이 두 기록은 하나같이 태초의 혼돈과 어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 또한 이 두 기록은 다음과 같이 유사한 순서에 따라 천지가 창조되고 있다. 빛, 궁창, 마른 땅, 발광체들(해와 달), 인간 그리고 하나님(혹은신들)의 안식.

 


2. 유일신론(창 1:1). 역사상 최초의 두 문명권은 애굽과 수메르 문명이다. 처음에 이 두 문명권에는 유일신 숭배가 있었다.


1) 애굽의 유일신 숭배. 이에 대해서는 탁월한 고고학저인 플린더스 페트리 경(Sir Flinders Petrie)의 증언이 있다.
2) 수메르인의 유일신 숭배


  "현존하는 많은 권위자들에 의하면, 수메르인들의 종교는 원래 유일신교였다고 한다. 가장 오랜 기록을 보건대 그들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었다. 이것은 아주 최근까지동 많은 역사가들이 인류는 원래 다신교를 숭배했으나 문명의 진보와 더불어 보다 발전된 신관(유일신론)을 형성하였다고 믿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앨버트 히마, 미시간 대학 역사학 교수, 「대학 개설 시리즈, 고대사」, p.10).

 


 3. 에덴 동산(창 2:8-17)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8-9).


 많은 고대의 민족들은 고통이 없는 아름다운 땅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 중의 하나로 중동의 '엘멜카르의 서사시'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딜문'으로 알려진 땅에 대하여 열렬하게 얘기한다. 고고학자 클리토드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엔키(에리두의 지방신, 일명 '에아'-역주)가 치명적인 저주를 불러들이는 어떤 식물을 먹기 전에는 그 땅에 출산의 고통이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그 땅은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깨끗한 곳이었으며, 사자가 다른 동물을 해치지도 않은 곳이 었고, 양과 사자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질병이 없었고, 인간은 다만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따름이었다"(「바위, 유적및 성서의 신빙성」,p. 21).

 


4. 인간의 타락(창 3:1-24).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1) 타락을 언급하고 있는 고대의 기록 아다파 신화가 앗수르 왕(기원전 7세기의 아슈르바니팔)과 애굽 왕(기원전 14세기의 아멘호텝 3세)의 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아다파는 분명히 바벨론판 아담이었다.


2) 1932년 펜실바니아 대학의 스파이서는 이와 비슷하게 실과나무를 보여주는 유혹의 도장을 발견했다. 그 오른쪽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녀는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중이고, 그녀의 등뒤에는 뱀이 있다.


3) 또한 에스겔 1장에서 묘사된바 있는 그룹(타락때 있었음, 창3:24) 들과 메소보다미아의 옛 신전을 지키던 날개달린 사자상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그리고 애굽의 스핑크스 역시 그룹의 형상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4) 타락에 관한 범세계적 전승은 중국, 인도, 헬라 및 바사 국민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5. 최초의 문명(창 4:1-26)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 4:2).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창 4:20-22).
  고고학에 따르면 농경과 육축은 인류 문명의 시초라고 한다. 기술, 공예, 음악 및 도시 생활의 발생은 메소보다미아 구릉지대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6. 홍수 이전의 장수(창 5:1-32)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 5:27).
 벨드 블룬델 프리즘(the Beld-Blundell Prism)에는 수메르 왕들의 옛 명부가 보존되어 있다. 거기에는 8명의 지배자들 이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홍수 이전에 메소보다미아 남부의 여러 도시에서 총 241,200년 동안 통치하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짧은 통치는 18,600년, 가장 긴 통치는 43,200년이었다.
 

7. 전세계적 홍수(창 6-9장).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칠하라"(창 6:13-14).


1) 1853년, 라스만(H. Rassman)은 니느웨에서 바빌로니아의 홍수 서판을 발굴했는데, 이것은 앗수르 왕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0-626)의 도서관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이 유물 가운데 11번째 것이 길가메쉬의 서사시이다. 길가메쉬는 메소보나미아의 전설적 왕으로 그의 조상 우트나피스팀에게서 영생의 비결을 듣기 위해서 그를 찾아 떠난다. 그는 결국 그 조상을 만난다. 우트나 피스팀은 길가메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한때 수룹팍이라는 곳에서 살았으며, 거기서 나무의 신 에아(Ea)를 숭배했다고 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홍수 이야기와 자기가 그것을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신들은 회의를 열어 지상에 홍수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신들이 이렇게 말했다. '죄를 그 죄인에게 돌리리라. 오 수룹팍 사람아, 배를 만들어 네 목숨을 보전하여라. 6층으로 짓되, 각 층을 7구획으로 나누어라. 그리고 안팎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대양으로 그 배를 나아가게 하라. 배 안에 모든 종류의 생물의 씨를 실어라". 그래서 나는 배를 만들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금과 은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실었다. 나는 내 가족과 친척을 태우고 배에 오른 후에 배의 문을 닫았다. 이윽고 지정된 시간이 당도했다. 나는 그 날의 모습들을 눈여겨 보았다. 무척이나 무서웠다. 모든 빛은 암흑으로 변했다. 비가 물붓듯이 쏟아져 내렸다. 질풍노도가 인간에게 들이쳤다. 배가 흔들렸다. 신들이 울었다.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모든 인간은 신이 되어 나무토막처럼 떠다녔다. 태풍이 멈쳤다. 홍수가 끝났다. 배는 사지르 산에 닻을 내렸다. 제 7일째에 나는 비둘기를 날려보냈는데 그것이 돌아왔다. 나는 제비를 날려보냈다. 그 새 역시 돌아왔다. 나는 갈가마귀를 날려보냈는데 그것은 물 묻은 땅에 내려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깍깍 울어댔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뭍에 내려, 희생동물을 잡았다. 신들이 달콤한 향기를 맡았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핼리의 성서편람」, p. 76).


2) 길가메쉬 서사시는 고대 중동 지역의 모든 위대한 민족들의 유산이다. 힛타이트와 애굽인들은 그것을 각자 자기들의 언어로 번역했다.
3) 거의 모든 나라의 초기 토착민들에게는 우주적 홍수의 기록이 있다. 인류학자 리차드 안드레 박사는 남북 아메리카로부터 46가지, 아시아로 부터 20가지, 유럽으로부터 5가지, 아프리카로부터 7가지, 남태평양 제도 및 오스트레일리아로 부터 10가지의 홍수 설화를 설화를 수집했다.

 


 8. 열방의 계보(창 10:1-32).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창 10:1).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 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창 10:32).
 융거(M.F.Unger)는 아래와 같이 썼다.
 "이 계보는 심지어 헬라인들에게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대 문헌 가운데 유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의 그러한 계보 체계는 신화적이며, 그들에게 민족이란 오직 헬라 또는 에게 족속뿐이기 때문이다. 올브라이트(W.F.Albrigut)는 이 민족 계보표를 '놀라우리만큼 정확한 문서'라고 하였다"(「융거의 성서편람」, p. 138).
 

 

9. 바벨탑(창 11:1-9)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직흙을 대신하고"(창 11:3)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지구랏이라고 불리는 20여개 이상의 고대 신전 탑이 있는데, 이것들은 메소보다미아 남부에서 발굴되었다.
 특히 창세기 11:4의 말에 주목하라. 이 구절은 초기의 인류가 어리석게도 하늘 꼭대기까지 닿는 탑을 세우려고 했다고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대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이란 구절은 "대 꼭대기가 하늘이다"로 직역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닿도록"이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바벨탑은 사실상 점성술이나 이방의 하늘 숭배를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임이 분명하다.

 

폐허가 된 고대 바벨론의 유물들 가운데는 저변이 400피트, 높이가 153피트인 한 건축물이 있다. 이 건축물은 햇볕에 말린 벽돌로 7층까지 쌓아 올린 것인데, 이것은 당시에 알려진 일곱 행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것들을 위해 바쳐진 것이었다. 맨 아랫층은 토성의 색깔인 검정색, 다음 층은 목성을 나타내는 황색, 그 윗층은 화성을 나타내는 적색…등이었다. 이들 대에는 높다란 탑이 얹혀져 있었고, 그 정상에는 조디악(Zodiac)의 상징들이 있었다. 도널드 반하우슨는 아래와 같이 썼다. 


 "그것은 공공연하고 도발적인 사탄에로의 귀의 였으며, 마귀 숭배의 발단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성서가 여러 곳에서 해와 달과 하늘의 별에 의지하는 자들을 저주하고 있는 이유이다.
 

 

10. 갈대아인들의 우르(창 11:31  ; 12: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하더니"(창 11:31).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는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 7:2).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다. 우르는 페르시아만의 항구로 유브라데 강어구에 있었으며, 전설에 따르면 에덴 동산이 있었다는 곳에서 약 12마일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전의 시기에는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웅장한 도시였다. 그곳은 매우 비옥하고 부유한 지역에 위치하고 제조업, 농경, 해운업의 중심지로서 여기에서 대상들은 각 방향을 따라 먼 곳까지 갔으며 또한 구리와 경석을 가득 실은 배들이 우르의 항구를 떠나 페르시아만을 따라 항해하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회의주의자들은 실제 우르의 존재를 의심했다. 그러나 1922년부터 1934년 사이에 대영 박물관의 울리(C.T.Wooley)는 이 유적지를 철저하게 파헤쳐 그 신비를 밝혀냈다.


 아브라함 시절에 이 도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은 신전탑인 지구랐이었는데, 아무도 이것은 바벨탑을 본 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탑은 정방형이었고 계단식이며 단단한 벽돌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각 층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이 도시에는 신전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달의신 난나르(Nannar)에게 봉헌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 닌갈(Ningal)에게 봉헌된 것이었다.


 이들 두 신전에는 줄지어 늘어선 방으로 둘러싸인 안뜰이 있었다. 옛 터는 그대로 남아 있으며 길다란 수도관에는 역청이 입혀져 있었다. 벽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상에는 정으로 깊은 홈이 있는데 그것은 희생 동물을 어디에서 잡았는가를 보여준다. 희생동물은 신전 주방의 노상에서 요리되었다. 거기에는 심지어 빵을 굽는 화덕까지 있다. 울리는 그의 일기에다 이렇게 쓰고 있다. "무려 3800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오랜 부엌에서 다시 한번 붙이고 그것을 가동시킬 수 있었다."


  "기름, 곡식, 과일, 양모 및 가축은 굉장히 큰 창고에 저장하였고 썩기 쉬운 품목들은 신전의 상점으로 보내졌다. 많은 상품들이 성전 소유의 공장, 이를테면 사제들이 경영하는 제분소에서 제조되었다. 한 작업장에서는 12종류의 유행 의상을 생산해 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서판에는 맷돌 돌리는 소녀와 그에게 맡겨진 할당량이 적혀있었다. 갈대아의 우르는 번영하는 강력한 다채롭고 분주한 수도였다.…"(「역사로서의 성서」, 베르너 켈러, p. 42).


 "우리는 그 히브리 족장(아브라함)이 그의 어린 시절을 이와 같이 고도로 발달된 주변환경속에서 보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도시의 시민이었으며, 유서깊은 고도의 문명을 전통으로 이어 받았던 사람이었다. 가옥들은 안락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호화스럽기 조차하였다. 또한 우리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썼던 찬송가의 사본과 산술표를 발견했다.

 


 11. 하란의 존재(창 11:31 ; 12:5).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 11:31).
 "데라는…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2).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4),
 여러 가지 고고학적 자료에 의거해 볼 때, 아브라함 당시에 하란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앗수르의 문서에 따르면 그 도시는 니느웨와 다메섹사이의 최대 동서 무역로 상에 있었던 번영의 도시였다.
 

 

12. 그돌라오멜의 전쟁로
  "이들이 십 이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제 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그들을 치고"(창 14:4-5).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은 네명의 메소보다미아 왕들이 동쪽 길 옆에서 가나안의 다섯 왕들을 습격하고 그들을 굴복시켰을 때 일어났다.


  "창세기 14:5-6에 나오는 지명들, 곧 4명의 동방 왕들이 소돔을 치러왔을 때 이용했던 길은 한때 올리브라이트가 창세기 14장의 전설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정상무역로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그(A.F.Albright)는 1929년에 일련의 커다란 구릉지를 발견했다…그것들은 기원전 2000년경에 번성했던 두 도시, 길르앗과 모압의 동쪽 경계를 따라 있었다. 이것은 그것이 금과 구리가 나는 에돔 및 소돔 지역과 다메섹을 잇는 무역로 위에 자리잡고 흥성한 국가였다는 것을 입증한다"(「핼리의 성서편람」, p. 97).
 

 

13. 힛타이트(헷) 제국(창 15:20).
  "내가 말했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안 족속, 헷 족속…"(창 3:17).

1) 헷 족속은 구약성서에서 47차례 언급된다. 에서의 아내는 헷 족속이었으며(창 26:34-35  ; 36:2), 다윗의 한 신하(우리야)도 헷 사람이었다(삼하 11:3).

2) 그렇지만 19세기 이전에 헷 족속을 언급하고 있는 문헌이란 성서 외에는 없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적 비평가들은 성서를 "역사적 우화"라고 냉소하면서 비꼬았다.

3) 그러나 1906년에 이런 모든 사정이 바뀌었다. 독일의 인류학자 휴고 빙클러(Hugo Winkler)는 소아시아에서 고대 헷 족속의 수도 보가스게울(Boghaz-Keul)을 발굴했다. 이 지역에서 1만개 이상의 서판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비옥한 초생달지대 서쪽 전체를 "헷 족속의 온 땅"으로 묘사했던 것이 옮음을 입증한다(수 1:4).
 이제 많은 학자들은 헷 족속이 고대 역사 중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떨치던 세 민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홍수 이후 철기제작을 최초로 발견한 족속이다. 1925년에 세이스(A. H. Sagce)는 「헷 족속, 잊혀진 제국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헷 족속은 얼마 동안 대부분의 메소보다미아 지역을 점령했으며, 기원제 12세기에 있은 가데스 전투 이후 애굽을 거의 점령하고 람세스 2세와 평화협정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들의 제국은 기원전 717년에 앗수르인들에 의해 무너졌다.
 

 

14. 나홀의 존재(창 24:10).
  "이에 종이…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창 24:10).
 1933년 앙드레 파로(Ander Parrot)는 마리라고 하는 유브라데 강가에 위치한 메소보다미아의 한도시를 발굴했다. 바로 이 지역에서 약 2만 개에 달하는 점토판이 나왔다. 이 가운데 많은 것들이 나홀이 실재했음을 입증해준다.
 

 

15. 족장시대에 약대를 사용했다는 것(창 24:11).
  "그 약대를 성밖 우물곁에 꿇렸으니"(창 24:11).
 수년 동안 비평가들은 약대에 관한 창세기의 초기 언급이 부정확하다고 지적하고, 약대가 아브라함 시대 훨씬 이후까지도 애굽이나 가나안에 소개된 적이 없다는 주장했다. 그렇지만 고고학자 프리(J.P.Free)는 아브라함 이전에도 약대가 나타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작은 조상, 약대의 형상을 나타내는 소패, 돌 조각, 선화, 약대의 유골, 약대의 두개골 및 약대의 털로 꼰 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기원전3000년 이전의 것이었다.

 

16. 소돔과 고모라라는 두 도시(창 19장).
  "…롯은…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 13:12).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창 18:20).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창 19:1).
 우리는 다음에서 유명한 창세기 19장의 언급을 세 가지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이들 두 도시의 존재
  1968년 이전까지만 해도 성서 이외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때 로마 대학의 근동학과를 졸업한 젊은이가 이때껏 땅 속에 묻혀 잊혀졌던 고대의 문명을 발굴해 냄으로써 이제까지의 상황을 변화시켰다. 그의 이름은 지오반니 페티나토이다. 이 고대 도시의 이름은 엘바였다. 발굴된 것들 속에는 수천 개의 점토판이 있었다. 거기에 언급된 고대 도시들 중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실제로 '평지에'는 다섯 개의 자매 도시가 있었다(창 14:2). 그 다섯 도시의 이름은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및 소알이다.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소알의 맨 처음 이름이 벨라였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엘바에서 출토된 이들 서판은 이 다섯 도시들의 이름을 아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들 점토판 중의 하나는 엘바와 소돔 사이를 왕래하는 배에 실련 몇몇 곡물의 거래영수증을 기록하고 있다.


2) 소돔을 에워싸고 있던 비옥한 초생달 지역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지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1924년에 올브라이트 박사와 카일(M.G.Kyle) 박사는 미국 학계와 제니아 신학교의 공동 탐사반을 이끌고 사해의 남동쪽 어구에서 신선한 물줄기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오아시스 및 그것들의 중앙에 위치하고 사해의 수면으로부터 500피트 위에 있는 평원의 바벳드라(Bab-ed-Dra) 라고 불리는 곳에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유적지를 발견했다.

 

이것은 종교적 축제를 위해 이용된 "고지대의 예배 장소"임에 분명했다. 엄청난 양의 질그릇 조각, 부싯돌 및 기원전 2500년 내지 2000년경의 것으로 측정되는 기타 유물들이 나왔는데, 주민들은 대대략 기원전 2000년경에 갑자기 끊어졌음이 분명했다. 이 지역에 인구가 밀접하여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증거는 이곳이 마치 "하님의 동산 같이" 아주 비옥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주민들이 별안간 멸망했다는 것과 그 이유로 다른 문명이 형성되지 않은채 이곳이 줄곧 황폐해 있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이 지역의 토양과 기후를 변화시킨 모종의 엄청난 지각변동으로 멸망했음을 암시하는듯 하다.
 올브라이트와 카일 그리고 대다수 고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소돔과 고모라는 이들 오아시스에, 즉 그 물줄기 아래에 위치했으며, 그 자리(터)는 이제 사해로 덮혀버렸다고 한다.

3) 이 두 도시의 멸망
 소돔의 멸망은 "유황과 불)의 비로 인한 결과였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표현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검토하면서, 지각변동을 나타내는 징조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화산의 활동을 배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이 지진으로 인한 대폭발을 언급하고 있다고 믿는다. 레온 우드(Leon Wood)는 이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폭발의 결과로 도시에 비처럼 쏟아진 방화물질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멸망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다른 표현은 "엎다"(over tvow, 창 19:29)인데 이것은 지진 현상을 묘사할 때 알맞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그 도시가 있는 방향에서 연기가 솟아오름을 보았다는 것은 그곳에서 불이 났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곳에는 가연성 아스팔트가 풍부하다는 것이 오래전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다. 고대 작가들은 강한 유황냄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상당한 양의 유황이 이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요단 계곡은 지표면 전체에 걸쳐 거대한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지진 발생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지진을 바로 그 순간에 일으키는 것을 적당하게 여기셨다는 주장도 있을 법하다. 그리고 그 지진 때문에 가스가 섞인 굉장한 양의 유황과 그곳 주변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소금이 생성되었을 것이며, 아스팔트의 유출이 엄청나게 증가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번개가 불을 붙였을 것이며, 그리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전 도시가 모두 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데 자연이 유용할 때 또는 유용한 만큼 그것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성서는 이 점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여기서도 그러신 것 같다.
 미국의 학자 잭 파인건(Jack Finegan)은 아래와 같이 썼다.


  "문학적 지질학적, 고고학적 증거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부패한 '들의 성들'(창 19:29) 이 시해 남부의 서서히 불어나는 물 아래로 수몰된 이 지역에 잠겨 있다는 것과 그 성들의 멸망을 폭발, 번개, 천연가스의 분출 및 대화재가 수반된 대지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침강 때문에 단구 사이에 깊이 잠들어 있던 화산의 힘이 분출되었다. 반산 근처의 유단강 윗쪽 계곡에는 우뚝 솟은 사화산의 분화구들이 아직도 있다. 길게 뻗은 용암지대와 두꺼운 현무암층이 석회석의 지표 위에 쌓여 있다. 태고적부터 이와 같은 지반 함몰 지역은 지진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이러한 증거는 여러번 나타나며, 성서자체도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지질학적으로 방증이라도 하는 듯이 베니게의 제사장 산쿠니아돈(Sanchuniathon)은 그가 쓴 "고대사"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이것은 최근에야 재발견되었다. "시디무스 골짜기는 가라앉아 호수가 되었는데, 항상 증기를 보글보글 뿜어내고 있으며 거기에는 물고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 골짜기는 범법자들에 대한 복수와 죽음의 상징이 된다" 

 

"만약 우리가 배를 타고 '사해'를 건너 맨 남단으로 가면-그때 해가 정면에서 비친다면-아주 환상적인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그리고 수면 아래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곳에, 시해의 극도로 높은 염분 함유량 때문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수풀의 윤곽이 펼쳐져 있다. 희미한 초록색의 줄기와 뿌리는 아주 오래된 듯하다. 꽃이 피고 푸른 나뭇잎이 크고 작은 가지들을 뒤덮었던 그 옛날 아마도 롯의 양떼들이 그 나무 그늘 아래서 풀을 뜯었을 것이다"(베르너 켈러, 「역사로서의 성서」, pp. 94, 98).


 

17. 기근이 있었을 때 그랄에서는 양식이 풍성했음(창 26: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창 26:1) 1927년, 고고학자 페트리(W.F.Petrie)는 블레셋의 도시 그랄이 기원전 2000년경에 곡물의 대 집산지였음을 보여주는 고대의 도자기 공장을 발견했다. 기원전 2000년경이라면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때이다.
 

 

18. 라반의 염려(창 31:14-35).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삼일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창 31:19-20, 22-23).


  "이 사건은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한 수수께끼였다. 왜 라반은 라헬이 훔쳐간 이 우상(드라빔)을 되찾는 데 그토록 열심이었을까? 그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멀고 고생스런 여로(275마일의 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라반이 살았던 메소보다미아의 북부 누시에서 나온 출토품은 장인의 가신을 사위가 소유하는 것은 사위가 제일 상속자로 선정된 증거로서 정당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야곱이 그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은 것에 화를 내고 두 사람이 경계를 설정하여 서로 그것을 침범하지 않기로 언약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야곱은 라헬이 훔쳐온 우상을 악용하지 않았으며, 세겜에서 그것들을 땅에 묻어버리도록 명령했다"(창 35:2-4). (「신판 스코필드성서」, p. 46).
 누시에서 나온 이들 서판은 라반의 염려를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1)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자기의 상속자로 삼으려했던 것(창 15:2).
2) 여종을 새 신부에게 주는 것(창 29:24,29).
3)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의 여종을 통해서 적자를 낳도록 한 것(창 16:2).
4) 약속을 확정하는 뜻으로 신을 벗어줌(룻 4:7).
 

 

19.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창 39장)
  "그후에 그 주인은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창 39:7).
 창세기 39장의 사건이 난 이후 수세기 동안 "두형제의 이야기"가 애굽에 널리 퍼졌다. 오늘날에도 대영박물관에 가보면 이 이야기의 사본을 볼 수 있다. 브뤽쉬 저「애굽사」의 영어판 편집자는 이 이야기가 바로 그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애굽의 기록에서는 결혼한 한 남자가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기의 동생에게 자기집으로 가서 씨앗용 옥수수를 가져오도록 심부름 보낸다. 그는 동생에게 자기 집안일 전체를 일임한 처지였다. 형의 아내가 그를 유혹한다. 그는 거절한다. 화가 난 그녀는 자기의 남편에게 동생이 수차례나 자기를 유혹했다고 거짓말로 일러바친다. 남편은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자 동생은 도망하는데, 그가 나중에 애굽의 왕이 된다.


 

20. 지푸라기 없이 만든 벽돌(출 1:11 ; 5:7-19).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출 5:6-7).

1) 수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굽 학자 에릭 피트는 출애굽기 5장의 기사가 잘못된 것이며, 모세(혹은 출애굽기를 기록한 사람)의 무지를 폭로해 준다고 주장했다. 이유인즉 나일강의 점토는 점성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벽돌만드는데 짚이 전혀 필요없다는 것이다.

2) 그러나 1883년 나빌이라는 이름의 다른 고고학자는 고센의 주변에 있는 텔 엘 마스쿠타에서 움집으로 보이는 것을 발굴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것을 바로의 국고성 중의 하나인 비돔(출 1:5)인 것으로 밝혀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벽돌을 만든 것이다. 그는 그성의 벽 중 어떤 것은 짚을 넣은 벽돌로, 다른 어떤 것은 짚을 넣지 않고 다른 벽돌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아냈다.

3)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다른 지역에서 파피루스 아난스타시(Papyrus Anastasi)라고 일컬어 지는 고대 애굽의 문헌이 발굴되었다. 이 문헌에는 애굽의 북방 변경에 건축물을 세워야 했던 어떤 관리의 탄식이 실려 있다. 그 서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내겐 아무런 장비가 없다. 이지역에는 벽돌을 만든 인원도 짚도 없다"(「고고학과 성서」)라는 책에서 프리의 인용, p. 91).
 

 

21. 애굽 장자의 죽음(출 12장)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치시매"(출 12:29).
 열 가지 역병(재앙)이 애굽을 치던 당시에 애굽을 다스리던 왕은 아멘호텝 2세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고 있다. 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그의 아들은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이것은 아마도 위의 성서 구절에서 설명되고 있는 이유 때문일 듯하다.
 

 

22.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 당함(출 14장)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거스려 도망하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출 14:27-28).
 아멘호텝 2세의 무덤은 완성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까닭을 위의 성경 구절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23. 요단강이 갈라짐(수3장)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수 3:13).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로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수 3:16).
 우리는 성서에서 강물이 여리고 북방 16마일 지점의 아담(현재의 다미에)에서 끊어졌다는 기록을 읽는다. 근대에 들어 세 차례 가량(1266, 1906, 1927)의 산사태가 일어나 요단강 물의 흐름을 차단했다. 1927년에 강물은 21시간 동안 정지했다. 때에 따라 성서의 기적은 자연적 시기와 일치하여 일어나기도 한다.
 

 

24. 여리고 성의 무너짐(수6장)
   "이에 백성이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수 6:20).

1) 여리고 성은 7차례 가량 무너져 내렸는데 때로는 지진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성은 무너졌다가 기원전 1500년경에 재건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리고 성의 성벽은 두겹이었는데 바깥 벽은 두께가 6피트 였고 높이는 30피트였다. 두 벽 사이의 공간은 15피트였다. 성은 지독히도 붐볐기 때문에 라합과 같은 집들이 성벽 사이의 공지에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듯하다(수 2:15). 이들 성벽은 갑작스레 무너져 내린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바깥 성벽을 타고 앞쪽으로 무너졌다. 재, 그으른 목재, 붉은 덩어리의 돌과 벽돌은 이 성이 무너질 때 화재가 뒷따랐음을 시사한다(참조, 수 6:24).

2) 여리고를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존 가르스탕(Jonh Garstang)은 재와 무너진 성벽 아래와 폐허가 된 창고에서 풍부한 양의 식품, 밀, 보리, 대추야자, 편두가 격렬한 열을 받아 숯 덩이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3) 그렇다면 정복자들은 왜 전리품을 약탈해 가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다. 이 대답은 여호수아 6:18에 나와 있다. 성전에 사용할 금과 은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빼앗지 말라는 거룩한 명령이었다.
 주 : 여기서 1896년에 발견된 흥미있는 고고학적 유물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 해에 350개의 점토판이 아마르나에 있는 애굽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아나르나 서판 또는 문서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팔레스틴 및 수리아의 여러 성들이 기원전 1400년 경에 살았던 두 애굽 왕들에게 보내는 일련의 편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들이 일단의 침략군들인 하비루 족속을 몰아내는 일을 도와줄 수 없겠는가 라고 애굽의 왕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하비루를 여호수아 당시의 히브리인들과 동일시한다. 실제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서판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25. 기브온의 부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수 10:2).
 기브온이 번영했던 것은 치밀하게 조직화된 포도주 무역이 흥성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해졌다. 1959-60년에 컬럼비아 대학의 프리차드(J.B. Prichard)가 이끄는 발굴단이 거대한 포도주 저장창고를 발견했다. 이들 포도주 창고 중 어떤 것은 포도주를 으깨 즙을 짜는 틀로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방수 덮개로 덮어져 있는 여러 개의 움들은 아마도 발효통일 것이다. 이제까지 발견된 저장실의 총 저장용량은 5만 갤론에 상당한다. 여기서 여호수아를 기만했던 기브온 출신의 사람들이 포도주 통을 가지고 왔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참조, 수 9:4).
 

 

26. 기럇 세벨의 샘(수 15:13-19)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의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수 15:19).

1) 이 구절에서 갈렙은 가나안의 도시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 그의 딸을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갈렙의 조카 옷니엘이 이를 성취한다. 그리하여 늙은 전사 갈렙은 딸의 요청에 따라 결혼 축하선물로서 그 성(기럇베셀)근처의 두 샘을 준다.

2) 고고학자들은 바로 그 지역 근처에서 윗샘과 아랫샘이 있음을 발견했다. 옛 우물의 네모진 돌레테의 유물에 새겨진 홈자국은 그 우물이 고대로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3) 발굴자들은 또한 정복 직후 곧 바로 그 도시를 점령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 도시가 그대로 썩어가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옛 가나안 족속의 도시와 새로운 이스라엘의 도시의 지층 사이에는 중간층이 전혀 없었다.
 

 

27. 팔레스틴을 정복하는데 왕벌이 이용됨.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수 24:12).

1) 이와 같은 진술은 구약성서에서 세 차례나 되풀이된다. 처음 두번은 예언으로서 진술되고(출 23:28 ; 신 7:20), 여기 여호수아에서는 그것이 성취된다.

2)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또는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성서에 없다. 우리는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에 있을 때 막강한 애굽 왕 투트모스 3세가 몇 차례나 가나안을 침범하여 그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과 다른 족속들을 무찔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투트모스 3세는 자기의 정복사업을 통하여 가나안 족속들을 약화시킴으로써 여호수아 휘하에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실제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3) 여기에서 흥미있는 사실은 고고학자들이 투트모스 3세가 착용했던 외투의 군장이 왕벌의 형상임을 알아낸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응당이 세구절 속에서 그것을 나타내려 하셨을 것이다.
 

 

28. 여호수아의 장사
  "무리가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이었더라"(수 24:30).

1) 70인역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언급을 첨가한다. "거기서 무리가 여호수아를 장사할 때 무덤에 그의 돌칼도 함께 묻었는데, 그 돌칼은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풀 때 사용한 것이라"(참조, 수 5:5).

2) 벧엘 북서쪽 10마일 지점에는 케프르 이술라 곧 "여호수아의 마을"이 있다. 이웃하고 있는 언덕받이에는 몇몇 돌무덤이 있다. 1870년, 이들 돌무덤 중의 하나에서 돌칼들이 출토되었다.

 

29. 사사기에 나오는 도시들(삿 1:21-29)
 요셉 프리(Josphep P. Free)는 아래와 같이 썼다.
 "우리는 사사기 1:21에서, 가나안 정복 당시에…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마루나 서판에서 입증된다. 이 서판에 의하면, 예루살렘 왕은 애굽의 바로에게 계속 충성하고 있었다. 성서를 보면 벧엘은 사사시대 초기에 멸망했으며(삿 1:23-25). 1924년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그 마을은 그 기간 동안에 완전히 멸망당했음이 입증된다. 한편 성서는 이와 똑같은 시기에 벳산, 므깃도 및 게셀이 번성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속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장소에서 발굴된 것들에 의하면, 그 도시들이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인들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옳음을 보여 준다"(「고고학과 성서의 역사」, pp. 141, 142).
 

 

30. 블레셋인들과 철제 병기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삿 1:19).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창이나 칼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 갔었는데"(삼상 13:19-20).


 고고학적 증거들은 블레셋인들이야 말로 철제병기를 가지고 있던 최초의 팔레스틴 거민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헷 족속에게서 철기 제작을 배워 터득하고 있었다. 성서에 따라면, 이스라엘인들은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철제병기를 갖지 않았으며, 팔레스틴에 정착한지 200년쯤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갖게 되었다(삼하 12:31 ; 대상 29:7). 기원전 1100년 경의 철제 유품들이 블레셋 지경에서 많이 출토되었으나 다윗 시대 이전에 팔레스틴의 산지 성읍에서 그것들이 출토된 적은 없다.


 1927년, 고고학자 페트리는 가사에서 남쪽으로 8마일 떨어진 곳에서 블레셋인들의 토루 텔 젬메(Tel Jemm도)를 발굴했다. 여기서 그는 블레셋인들이 칼을 벼리는 노를 찾아냈다. 이 노는 굴뚝이 달린 용기였으며, 아마도 엄청난 고열을 방출해 내었던 것 같다.


 1927년, 고고학자 페트리는 가사에서 남쪽으로 8마일 떨어진 곳에서 블레셋인들의 토루 텔 젬메(Tel Jemmeh)를 발굴했다. 여기서 그는 블레셋인들이 칼을 벼리는 노를 찾아냈다. 이노는 굴뚝이 달린 용기였으며, 아마도 엄청난 고열을 방출해 내었던 것 같다.
 

 

31. 드보라와 바락의 전투 기록(삿4장).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삿 4:1-2).
  "여호와께서 바락의 앞에서 시스라(야빈군의 사령관)와 그 모든 병거와 그 온 군대를 칼날로 쳐서 패하게 하시매…"(삿 4:15).


 1937년에 므깃도(가나안인들의 수도 중 하나)에서 발굴작업을 벌였던 동양연구소는 기원전 12세기경의 지층에서 대화재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 성의 궁전 마루 밑에서 그들은 아름답게 아로새긴 상아와 금으로 된 장식 200점을 발견하였다. 그 중의 하나에는 가나안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일단의 포로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이들은 다볼산 기슭에서 승리하기 이전의 이스라엘인들일 것이다.
 

 

32. 기드온의 은밀한 곡물갱(삿 6:11-18).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 6:11).
 기드온이 살던 인근 지역을 발굴했던 카일과 올브라이트는 사사시대에 속하는 지충에 숨겨진 많은 곡물 갱을 발견했다(1926-1928).
 

 

33. 거짓 신 엘브릿의 신당(삿9장)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왕이되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였으나 이내 세겜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비멜렉과 그의 추종자들이 세겜 성을 치자, 세겜 사람들은 '엘브릿 신당의 보장'이라 불리는 내성으로 들어가 입구를 닫아버렸다(삿 9:46). 아비멜렉과 그의 부하들은 이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서 나무를 모아 보장 주위에 쌓아두고 불을 질렀다(삿 9:49). 1926년에 독일인 고고학자 셀린은 불탄 자국을 발굴하여 이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는 이 시기의 건물을 찾아내 이것이 엘브릿 신당임을 밝혔다. 이곳에서 출토된 도자기에 의하면, 그 신당은 기원전 1300년경에 세워졌고, 결국 기원전 1150년을 못넘기고 불에 타 없어 지고 말았음이 분명하다"(「고고학과 성서의 역사」, p. 143).
 

 

34. 기브아의 멸망(삿 20장)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삿 20:19).
 "…베냐민 사람이 돌아보매 온 성위에 연기가 하늘에 닿고"(삿 20:40).
 기원전 12세기에 이스라엘에 비극적인 내분이 일어나 열 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에 대적하였다. 열 한 지파가 승리를 거두어, 베냐민 지파의 요새인 기브아를 소각시켰다.
 올브라이트는 1922년의 발굴작업에서 기브아의 유적지를 발견했다. 그 당시의 것으로 믿어지는 이 지층에는 그 도시가 대 화재로 멸망되었음을 보여주는 방대한 양의 증거가 묻혀 있었다.
 

 

35. 실로의 멸망(삼상 4장)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삼상 4:4).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삼상 4:17).

1)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모세의 장막이 벧엘 북방 80마일 지점에 있는 한 도시 실로에 세워졌다(참조, 수 18:1  ; 19:51  ; 삿 18:31  ; 삼상 1:9  ; 3:3  ; 4:4).

2) 실로라는 도시는 분명히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기고 난 후 성막과 함께 그들에게 멸망당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 때문에 이를 허용하셨다. 멸망은 전면적이고 끔찍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참조, 시 78:60  ; 렘 7:12,14  ; 26:6). 그것은 틀림없이 사무엘 상4장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3) 나중에 궤가 되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실로에 모시지 않고 기럇여아림으로 옮겼다(삼상 7:1). 이윽고 그것은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삼하 6장 참조).

4)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수년 동안, 실로의 존재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1926-28년 사이에 네델란드의 발굴단이 실로에서 발굴작업을 폈다. 출토된 도자기에 따르면, 비단 실로는 존재해을뿐 아니라 그 규모가 상당했음이 분명하다. 결론인즉 실로에는 기원전 13세기에서 11세기까지 주민이 살았으며, 기원전 1050년부터 300년까지 아무도 살지 않았다. 올브라이트도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
 

 

36. 기브아에 있었다는 사울의 집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때…"(삼상 10:26).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곳, 그러니까 사마리아로 가는 옛 길 근처에 텔엘풀(Tell-디-Ful)이란 곳이 있는데, 그것은 "콩 언덕"이란 뜻이다. 이곳이 바로 사울의 고향이며 사울 왕국의 수도였던 기브아이다.

 

1922-23년에 올브라이트는 사울의 성채 유적을 발굴했다. 그 성채는 2층 건물이었는데, 거기에는 30×40야드 넓이의 탁트인 안뜰이 있었다. 이 언덕받이에는 갖가지 도자기류, 무수한 남비 및 철제 쟁기가 묻혀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어떤 종류의 농경이 그곳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무엘상 11:15에 묘사된 사울의 활동에 주목하라. 올브라이트는 또한 거대한 이중 벽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앉아 있곤 하던 의자 옆에 있는 벽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참조, 삼상 20:25).
 

 

37. 요나단이 블레셋군을 무찌름(삼상14장)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삼상 14:1).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려하는 어귀 사이 이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고 저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삼상 14:4). 한편의 바위는 게바를 향해 남쪽으로 있었다(삼상 14:5).


  "요나단과 그 병기를 자기 반일경 지단 안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이십인 가량이라"(삼상 14:14).
영국군 소령 비비안 길브라이트는 1차 세계대전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 구절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차 대전 중에 팔레스틴에 주둔하는 알렌비군의 여단 부관이 한 번은 촛불을 켜고 성경을 뒤져 어떤 이름을 찾고 있었다. 그의 여단은 깊은 계곡 반대편에 돌출된 험준한 암벽지대에위치하고 있는 마을을 탈뒤하라는 명령을 받고있었다. 그곳 이름은 믹마스(Mickmash)로 어디선지 들어본듯한 낯익은 이름이었다. 이윽고 그는 그 이름을 사무엘상에서 찾아냈다. 여단 부관은 곰곰히 생각해보고 틀림없이 산의 돌출부 사이에 암벽 틈으로 이 좁은 길이 있을 것이며, 그 끝에 '반 에이커의 땅'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사령관을 깨워, 둘이서 다시 한번 그 구절을 자세히 읽었다. 정찰대가 급파 되었다. 그들은 터어키인들이 드문드문 점검하고 있는 통로를 찾아냈다. 이 통로는 두개의 들쑥날쑥한 암석 사이로 나 있었는데, 둥 바위의 이름은 각각 보세스와 세네임이 분명하다. 믹마스 옆의 봉우리에 올랐을 때 그들은 달빛 아래 평평하고 조그만 들을 볼 수 있었다. 여단장은 공격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전 여단을 움직이는 대신, 야음을 틈타 일개 중대를 그 통로로 지나가게 했다. 그들은 마주친 소수의 터어키인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압도당해버렸으며 그들은 밧줄을 타고 절벽 위에 기어 올라갔다. 동트기 직전에 중대는 '반 에이커 땅'에 자리를 잡았다. 터어키인들은 아침에 일어났으며 알렌비 군에게 포위당한 줄 알고 허겁지겁 서둘러서 달아났다. 그들은 모두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고 길브라이트 소령은 결론내린다. '그리하여 수천년 후에 영국군은 사울과 요나단의 전술을 다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성공했다.'"
 

 

38. 다윗의 음악(삼상 16:18, 23 ; 대상 15:16).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줄을 알고…"(삼상 16:18).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삼상 16:23).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하여 그 형제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하매"(대상 15:16 ; 참조, 시 137:1-6).


 고고학자 톰슨(J. A. Thompson)은 아래와 같이썼다.
  "우리가 성서의 기록에 의할 때 다윗에 대해서 갖는 가장 간명한 인상들 중의 하나는 음악가이자 성전 음악을 체계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대상 25장). 팔레스틴은 동방에서 수세기 동안 음악이 매우 널리 흥성해온 지역이라는 것은 이제 분명하다. 기원전 1900년 경, 애굽의 예술가들은 교역용 노새와 물건을 가지고 자기들 나라를 찾아온 팔레스틴 유목민들의 모습을 그려 놓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수금처럼 생긴 현악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약 1550년경부터 시작하는 애굽 신왕국의 기념비들은 다양한 형태의 음악이 가나안에서 들어온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성서와 고고학」, p. 98).
 

 

39. 사울의 죽음(삼상 31장).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성벽에 못 박으매"(삼상 31:9-10).
벧산은 이스르엘과 요단 골짜기의 합치점에 위치 벧산은 이스르엘과 요단 골짜기의 합치점에 위치한 길보아 산의 정동쪽에 있다. 1921년에 핀셔(C.S.Fisher)와 펜실바니아 대학 박문관 소속의 다른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기원전 1000년경의 지층에서 아스다롯 신전과 다곤 신전의 유적을 찾아냈다. 
 

 

40. 기브온의 못(삼하 2장).
  "…아브넬과…이스보셋의 신복들은…기브온에 이르고…요압과…다윗의 신복들도 나와서 기브온 못가에서 저희를 만나 앉으니 이는 못 이편이요 저는 못 저편이라"(삼하 2:12-13).


1956년에 엘지브(el-Jib, 기브온의 현대식 이름)에 있는 토마토 농원 아래서 컬럼비아 대학의 프리차드(J.B.Prichard)교수는 당시에 유명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브온 못을 발견했다. 그는 직경이 30피트, 깊이가 30피트에 이르는 원형 수갱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수직으로 임반까지 파들어간 것이었다. 내벽을 파서 만든 비탈길이 나선형으로 맨 밑바닥까지 나 있었다. 통풍구와 채광창이 나 있는 구불구불한 계단 아래로 45피트를 내려가야 바로 그 못 즉 물탱크에 닿았다. 그것은 단단한 석회석을 끌로 파서 만든 것이었다. 물의 분출을 가로 막고 잇던 잡석들이 제거되자 바위틈으로부터 새어나온 물이 300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 거대한 수조를 채우기 시작하였다.
 

 

41. 예루살렘의 함락(삼하 5:6-10)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그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리하였으므로…"(삼하 5:7-8).

1) 여기에 나오는 '수구'라는 말을 두고 논쟁이 잇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갈고리"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이 갈고리로 성벽을 타고 올라감으로써 성을 함락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여기의 "수구"란 다윗이 발견한 비밀 수로를 가리키며, 그의 군대가 이 통로를 타고 성으로 들어갔다고 믿는다. 만약 후 자가 사실이라면, 그 수로는 1867년 영국의 육군대위 워렌이 발견한 것이다.

2) 베르너 켈러는 이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썼다.
  "암석으로 된 비탈이 기드론 골짜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의 동편에는 '아인 싯디마리암'이 있다. 이 지명의 뜻은 '동정녀 마리아의 샘'이다. 구약시대에 이곳은 '분수'라는 뜻의 '기혼'이라 불리웠는데, 예나 변함없이 그곳은 예루살렘 주민의 주요 급수원이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조그만 사원의 유적지를 지나 지하실에 이른다. 서른 발자국쯤 더 내려가면 작은 웅덩이에 이르는데 여기에 암반 한 가운데서 새어나오는 맑고 깨끗한 물이 고이는 것이다.


1867년에 워렌 대위는 순례자들 틈에 끼어 마리아가 어린 아들의 강보를 빨았다고 전해져오는 저 유명한 샘을 방문했다. 바로 이 때에 워렌은 으스름한 황혼녘인데도 천정에서 어둠에 가리운 공동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암벽에서 몇 야드 바로 위쪽에 있었다. 워렌이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어느 누구도 그 이전에는 그것을 모르는듯 했다.


 호기심으로 가득찬 그는 다음날 사다리와 긴 밧줄을 가지고 다시 처녀의 샘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의 앞에 모험에 찬, 그리고 약간 위험스런 탐색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품어보지 못했다.


 샘 뒤에는 좁다란 수로가 처음에는 수평으로 뻗어 있다가 얼마쯤 가서는 수직으로 꺾여 암벽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워렌은 노련한 등반가였으며, 이런 형태의 통로를 등반하는데는 정통해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한손 한손 위쪽으로 더듬어 올라갔다. 40피트쯤 올라갔을 때 수로는 갑자기 끊어졌다. 워렌은 어둠 속을 더듬어 결국 좁은 통로를 찾아냈다. 그는 두 발과 양손으로 기어서 그 길을 따라갔다. 도중에는 번번히 바위가 놓여 있어 길을 막았다. 얼마 후 그는 앞에서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곳은 다가가보니 둥근 천장의 방이었다. 거기에는 오직 항아리와 병들만이 먼지 속에 나딩굴고 있었다. 간신히 암반 틈 사이를 비집고 빠져 나왔을 때 그는 한 낮의 밝은 태양 빛을 받으며 성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었다. 처녀의 샘은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한 참아래에 있었다.


 1910년 팔레스틴 탐사기금의 후원을 얻은 영국 출신의 파커는 이곳을 더욱 세밀하게 탐사한 끝에 놀라운 이 설비가 기원전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하였다. 옛 예루살렘의 거주자들은 그들이 포위당했을 때 그들에게는 목줄이었던 그 샘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암반을 뚫고 통로를 만드는 엄청난 대 역사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워렌은 호기심 때문에 3000년 전에 다윗이 예루살렘 성채를 급습하는데 이용했던 통로를 발견했던 것이다"(「역사로서의 성서」, p. 190).

 

42. 솔로몬의 부(왕상 4:26 ; 9:19 ; 9:26 ; 10:23).
 "(솔로몬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는데"(왕상 9:10).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 가 엘롯 근처에 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왕상 9:26).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 지라"(왕상 10:23).


 솔로몬 시대와 연관있는 고고학적 발견은 아주 주목할만하다. 올브라이트 교수는 솔로몬 시대야 말로 팔레스틴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번영한 시기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어마어마하게 큰 보물창고가 있었다는 증거가 하솔, 므깃도, 벧세메스 및 기타 당시의 교역 중심지에서 나오고 있다. 솔로몬이 상당한 동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성서에 의거할 때 분명하다(왕상 7:46). 당시 성전에 소용된 모든 놋기구를 만들자면 수 톤의 구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팔레스틴의 요단 지역에 광산 및 제련소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고고학자 넬슨 글루크(Nelson Glucck)는 아래와 같이 썼다.


  "나는 아드마 북쪽, 특히 옛 숙곳 지역에 있는 구릉지대에서 광석의 용재를 발견했다. 솔로몬 시대에 요단 계곡 전체는 새로운 성전을 치장하는데 소용될 정교한 철제 기구를 제조해내는 산업활동으로 흥청거렸다"(「요단강」, p. 146). 톰슨(J.A.Thomson)은 이렇게 썼다.


  "성서에서 솔로몬이 홍해에 항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과…여기에 항구가 실재하였다는 사실이 에시온게벨에서 행해진 발굴로 입증되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그 도시는 그곳에 항구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가득 차 있다. 첫째로 해상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물품들, 이를테면 구리와 철 못, 갖가지의 밧줄, 조각, 타이르 조각이 있다. 또한 거기에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왔던 것조차 발견된다. 어떤 것들은 애굽에서 온 것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아라비아 남부에서 온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그곳이, 바다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성서와 고고학」, p. 106). 
 

 

43. 애굽 왕 시삭의 유다 침범(왕상 14:25-28  ; 대하 12:2-4).
  "저희가 여호와에게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2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을 취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니"(대하 12:2,4).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시삭은 제21왕조의 창건자였다. 1938-39년에 타니스에서 금가면을 쓴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더베에서 발견된 그의 승전비에는 그가 함락시킨 이스라엘과 유다의 도시 이름들이 수록되어 있다.
 

 

44. 북왕국 오므리의 통치(왕상 16:23,24).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년 동안 치리하니라 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좇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왕하 16:23-24).


 하바드 대학의 고고학자들은 사마리아를 발굴하고 오므리 궁전의 터를 찾아냈다. 그들은 오므리 이전의 인물을 찾아내지 못했으며 이 사실은 그가 바로 그 성의 창건자임을 못했으며 이 사실은 그가 바로 그 성의 창건자임을 입증했다. 그의 이름은 저 유명한 모압 석(Moahites stone)에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에 오므리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유명했다는 것은 1세기 이후에 건립된 살만에셀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오므리 이후에 이스라엘은 대적들에게 비투후무리(Bit-Humri, '오므리 족속'이란 뜻)로 통했다.


 

45. 여리고 재건(수 6:26 ; 왕하 16:34).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 6:26).


  "그(아합)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 16:34). 융거(M.F.Unger)는 아래와 같이 썼다.


  "여리고 성의 재건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뒷받침된다. 최근에 있었던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 성읍이 함락된 것은 아득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증거물들의 해석에 있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성서는 여호수아때로 부터 아합시대까지는 그 성에 대한 정복전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확실성이 입증된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아합 시대의 유물들은 히엘이 그 도시를 재건했음을 보여준다(「융거의 성서편람」, p.220).
 

 

46. 갈멜산에서의 엘리야의 승리(왕상18장).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은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나오게 하소서"(왕상 18:19).
고고학자 톰슨은 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아합이 엘리야와 다퉜다는 이야기는 근대의 많은 고고학적 발견으로 그 사실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당시는 지독한 한발이 있었던 때였다. 이 한발은 헬라 작가 메안더의 글을 인용한 요세푸스의 기록으로도 입증되는데, 메안더의 글은 어떤 베니게(페니키아)인의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가나안의 대도시인 고대 우가릿이 자리잡고 있던 라스 샤므라와 몇몇 성전들이 들어 서 있던 곳에서 발견된 서판들은 위의 이야기들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바알 신의 모습을 매우 소상하게 우리에게 아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바알은 무엇보다 우선 다산의 신이었다. 그는 계절을 주관했으며, 폭풍과 비를 다스렸다. 땅에 가뭄이 들었다면 그것은 바알의 작용 때문이었다. 바알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상태를 덜기 위해서 그에게 간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갈멜 산 위에서 엘리야는 경멸조로 이러한 신앙의 무익함을 드러내 보였다(왕상18장). 바알이 실패할지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의 말에 따라, 즉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비가 내렸다.


 또한 이 이야기에는 살펴보아야 할 다른 측면이 있다. 히브리 본문에 따르면 열왕기상  18:19에는 두 신이 언급된다. 즉 바알과 아세라(흠정역에서는 'the groves'로 번역됨)이다. 우가릿에서 발굴된 문서에 따르자면, 바알의 배우자였던 아세라는 정욕적 여신이었다. 그녀는 바알처럼 이스라엘에 선지자 사백인을 두었다(왕상 18:19). 이 구절의 흠정역은 다음과 같이 개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바알의 선지자 사배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성서와 고고학」, pp. 124-125).
 

 

47. 아합의 상아궁(왕상 22:39).
  "아합의 남은 행적과 무릇 그 행한 일과 그 건축한 상아궁과 그 건축한 모든 성은 이스라엘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22-39).
  1908-1910년에 있는 하바드 대학의 탐사반은 사마리아에서 이 궁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 벽은 상아로 입혀져 있었다. 정교하게 아로 새겨진 부벽, 장식틀, 용기, 침상의 조각들이 수천 개나 있었다.
 

 

48. 사마리아의 못(왕상 22:37-38).
  "왕이 이에 죽으매 그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 장사하니라."
 고고학자들은 사마리아 궁 안뜰 북안에서 연못을 발굴했다. 그 규모는 가로가 33피이트 세로가 17피트였다. 위치로 보아 그 연못은 말을 물먹이고 병거를 씻는 곳으로 이용된듯하다.
 

 

49. 이스라엘과 모압의 전쟁(왕하 3장).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왕하 3:5).
 이 장은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엘리사의 초자연적인 간섭에 의해 이 전쟁에서 패하였으며, 승리에 날뛰는 이스라엘 군을 보고 좌절한 나머지 자기의 맡아들을 모압 족속의 신인 그모스에게 제물로 바쳤다.


 1868년, 사해 동쪽 20마일 지점에 있는 디본으로 파견된 독일 선교사 클라인(F.A.Klein)이 저 유명한 모압석을 발견했다. 이 돌의 높이는 3.5피트, 폭은 2.5피트, 두께는 1피트로 메사가 세운 것인데, 내용은 열왕기하 3장의 전쟁을 언급한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시피, 그는 전혀 다른 이야기는 기록하고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반란을 올바르게 얘기하고는 있지만, 전쟁의 결과를 바꾸어 마치 자기가 승리를 거둔 양 꾸며 놓았다.
 

 

50.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왕하 7장).
  프레드 라이트는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열왕기하 7:2에서 왕의 신하는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라고 묘사되고 있다. 열왕기하 7:17-18도 똑같은 사람을 의미한다. 미국표준 개역성서는 'lord'라는 말 대신 'captain'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 관직의 성격이 무엇이냐를 두고 예전부터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 '세째'(the third)를 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문제의 인물이 서열 3위의 관리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앗수르의 기념석에 그려진 그림은 이제 이 히브리어를 선명하게 풀이해 준다. 그 그림을 보면, 앗수르의 전차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는데, 한 사라마은 전차를 모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전차의 뒷쪽에 연결된 가죽끈을 쥐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람은 살아있는 전차의 등받이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전차의 뒤에 서서 그는 전차가 우툴투툴한 길을 달릴 때에는 타고 있는 나머지 두 사람들이 뒤로 떨어지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왕의 병거에서 '세번째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왕이 궁에 있으며 출정하지 않았을 때에는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였다"(「성지 고고학요론」,pp. 49-50).
 

 

51. 예후의 정죄(왕하 10:29-33).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31).
  "이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서 이스라엘을 찢으시매"(왕하 10:32).


 1845년에 발견된 살만에셀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를 보면, 왕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유대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오므리의 아들(후찌라)예후로부터 짐이 은, 금, 금대접, 금잔, 성배, 금꽃병, 납, 홀, 창자루를 조공으로 받았노라."
 

 

52. 여로보암 2세의 종의 공식 인장(왕하 14:23-29).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 일년을 위에 있으며"(왕하 14:23).
사마리아에 있는 여로보암의 아름다운 궁이 발굴되었다. "여로보암의 종 세마"의 벽옥 인장도 출토되었다. 그 인장에는 장엄한 사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53. 니느웨의 회개(욘3장).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욘 3:5). 이 장에는 기록상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영적 부흥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및 구약성서의 다른 책)에 실린 다른 어떠한 물질적 기적도 놀라움과 범위에 있어서 이 영적 기적에 비견할 수 없다. 후에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그의 전 세대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장차 격렬한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41).
그렇지만 성서를 흠잡기 위해 안달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여기에 기록된 바와 같은 니느웨의 영적 부흥이 세속 역사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득의 만만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세속역사도 요나서에 기록된 거룩한 영적 부흥이 진실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때에 니느웨에서는 종교운동이 일어나 사람들이 다신교에서 유일신(니느웨 사람들은 이 신을 느보라고 불렀다)숭배로 옮겨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느보는 바벨론의 세 신 중에서 아들에 해당하는 신이었다. 느보란 "선포자, 선지자"란 뜻이다.


 그는 세 신중 주 신의 마음과 뜻을 선포하는 자였다. 그는 또는 지혜의 신이요, 창조자요, 천사들의 주관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느보가 애초에는 유일한 최고의 신으로 숭배되었었다고 믿는다. 니느웨의 지배자 아달 니라리 3세(기원전 810-783)는 모종의 유일신 숭배를 옹호했다고 한다. 만약 회개가 요나의 전도 결과로 이 시기에 일어났다고 회개가 요나의 전도 결과로 이 시기에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일컫는 그 민족 특유의 이름을 사용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회개를 전파하지 않았으며, 엘로힘(우주의 삼위일체적 창조자, 창 1:1)의 이름으로 전파했다.
 

 

54. 므나헴이 앗수르의 왕에게 바친 화폐조공(왕하 15:16-20).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서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5:19-20).


 므나헴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통치기간 중에 앗수르의 위협이 심각해졌다. 불(역사에서는 디글랏 빌레셀)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로 이동했을 때, 므나헴은 그를 돈을 주고 돌려보냈다. 출토된 디글랏 빌레셀의 연대기에는 다음과 같이 사실이 적혀 있다. 


  "므나헴에 대해서 말하건대, 짐이 그를 눈보라처럼 위압하며 그가 한 마리 새처럼 꽁무니를 빼더니 내 발 앞에 무릎을 꿇었도다. 짐이 그를 다시 그의 자리로 되돌려보내고 짐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노라."


 열왕기하 15:20에 나와 있는 금액 50세겔은 현재 노예 한 명의 평균 가격이라 알려져 있다. 므나헴은 그의 백성 각 사람에 대해 노예 한 명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자유인이 되게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또한 그의 연대기에는 웃시야, 아하스, 베가 및 호세아의 이름도 언급되어 잇다. 이들은 성서에 자주 나오는 북왕국 및 남왕국의 왕들이다.

 

55. 웃시야 왕의 업적과 심판(대하 26장).
  "또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대하 26:10).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 26:16).
 "웃시야 왕이 죽는날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대하 26:21).


 1958년 히브리 대학의 부총장 마이클 에브너리(Michael Evenari) 교수는 관개시설, 수조, 요새가 갖춰진 유대의 몇몇 굴의 자취를 발굴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웃시야 시기의 것이었다.


1959년, 히브리 대학의 아하로니(Aharoni) 교수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2마일 떨어진 곳, 즉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목 라헬 언덕에서 유대의 한 궁전을 발굴했다. 그것은 넓이가 250×150피트로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궁처럼 포대가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솔로몬 시대의 축성 양식처럼 세겹으로 된 문이 있었다. 안뜰의 3면은 건물로 에워 쌓여 있었는데, 두 면은 거주자용이었고 건물로 에워 쌓여 있었는데, 두 면은 거주자용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창고용이었다. 이와 같이 장대하되 외떨어진 곳에 있었던 집이 과연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나병환자 웃시야의 궁이었음에 틀림없다).


 

56. 앗수르의 왕들, 곧 불, 살만에셀 및 사르곤에 의한 이스라엘의 함락(왕하15,17장).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온 땅에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왕하 15:29-30).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왕하 17:3).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왕하 17:24).


 우리는 이들 앗수르의 왕들이 새겨 놓은 서판을 보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짐이 오므리 족속과 그의 온 백성들과 함께 그들의 물건을 앗수르로 옮겨갔노라. 그들이 자기네들의 왕 베가를 왕좌에서 밀어냄에 짐이 호세아를 그들의 왕으로 삼았도다. 또 짐이 그에게서 금 10만달란트와 은 일천 달란트를 받았도다"(불의 서판).


  "제 일년에 짐이 사마리아를 손에 넣어 27,290명을 포로로 얻었도다. 조공을 바치지 않았던 다른 지역의 백성들을 짐이 사마리아로 이주 정착시켰노라"(사르곤의 서판).
 

 

57.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화폐조공을 받침(왕하 16:5-9).
  "아하스가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자 왕의 아들이라…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앗수르왕이…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왕하 16:7-9).


 출토된 디글랏빌레셀의 서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짐이 유대의 아하스로부터 금과 은과 납과 주석과 아마포를 조공으로 받았노라. 다메섹을 쳤고, 르신을 죽였으며, 그의 관리들을 산채로 말뚝에 찔러 죽이는 형에 처했노라."
 

 

58. 사르곤의 역사성(사 20:1).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사 20:1).
 근대 고고학이 출현하기 전에는 사르곤이라는 이름이 이사야서를 제외한 고대 문헌 어디에서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이것을 으례껏 성서의 또 다른 "역사적 대실책" 이라고 꼬집어 대곤 했다. 1843년, 고고학자 폴 에밀보타가 니느웨의 남단 코르사밧에서 거대한 궁전을 발굴하자 그들의 조소를 별안간 쑥 들어가버렸다. 그 건물은 사르곤 제국의 사령부로 밝혀졌다. 이 발굴 이후의 다른 발굴에 따르면, 사르곤은 앗수르의 왕 중에서도 가장 정대한 왕임이 분명했다. 그의 기록 중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적혀 있다.


  "앗스돗의 왕 아주리는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을 작정이었다…짐은 격노하여 곧장 전차에 올라 기병을 거느리고…아스돗을 치러갔으며…그곳을 포위하고 공략했으며…그들에게 내 멍에를 씌워 주었다."


 

59. 히스기야의 서기관 셉나의 봉인과 무덤(사 22:15-16 ; 36:2).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사 25:15-16). 


  "앗수르 왕이 라기스에서부터 랍사게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되 대군을 거느리고 히스기야 왕에게로 가게 하매…서기관 셉나…가 그 에게 나아가니라"(사 36:2,3).
1935년 스타키(J.L.Starkey)는 라기스에서 셉나의 이름이 새겨진 돌인장을 발굴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히스기야 시대의 것이었다. 또한 대영박물관에는 히스기야 시대에 속하는 셉나의 무덤에 있던 석히석제 상인방이 있다. 그것은 고대 히브리어로 새겨져 있다. 60. 산헤립에 의한 라기스의 파괴(대하 32:9 ; 사 10:29).
  "그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그 온 군대를 거느리고 라기스를 치며"(대하 32:9).


 역사가 베르너 켈러는 아래와 같이 썼다.
 "라기스에서 있었던 끔찍한 전투를 사솬 부분까지 극적이며 생생하게 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대영박물관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2650년전 산헤립의 명령에 따라 목격자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부조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대영박물관이다. 헨리 레이야드 경은 니느웨의 폐허에서 이 고귀한 예술품을 구해냈던 것이다.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 라기스의 흙탑과 흉벽 위에서 유다의 방어자들은 이를 악물고 싸웠다. 그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에게 화살을 내던지고, 불이 붙은 횃불-고대 세계의 화염탄-을 집어던졌다. 얼굴, 곱슬머리, 짧은 턱수염까지도 쉽사리 알아 볼 수 잇다. 오로지 소수만이 얼굴이나 몸을 가릴 수 있는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
 성벽 밑에서는 앗수르인들이 각종 무기로 격렬하게 공격을 가한다. 산헤립은 정평있는 공격 전술을 모두 사용하여 부대를 전개시키고 있다. 모든 앗수르인들은 철저하게 무장하고 있으며,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들고 있다. 공병대가 흙과 돌 그리고 베어낸 나무로 성벽을 올라타는 비탈길을 급조해냈다.

 

 역사상 최초의 탱크라고나 하여야 할 수 있는 공성 장비가 성벽을 향해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공성탱크는 대포의 포신처럼 뾰족하게 깍은 공성퇴가 전면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 장비에는 세 사람이 올라탔다. 사수가 엄폐된 집 뒤에서 활을 쐈다. 그리고 한 병사가 퇴를 몰아 성벽에 부딪치면, 성벽의 돌과 벽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머지 병사는 연기나는 화염탄을 끄기 위해 바가지로 물을 퍼서 공성탱크에 끼얹었다. 여러 대의 탱크가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성벽의 기초를 받치고 있는 암반 틈새로 굴이 뚫린다. 이 공성탱크 뒤로 보병과 궁수가 따르는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방패잡이들의 엄호를 받으며 활을 쏘거나 공격을 퍼붓기 위해 무릎을 꿇거나 몸을 구부리고 있다. 맨 처음 남녀 포로들이 선두에 내세워진다. 생명없는 주검들이 뽀족한 말뚝에 처형당한 채로 매달려 있다. 영국의 고고학적 제임스 레슬리 스타키는 라기스 성채의 성벽 유적지를 발굴했다. 앗수르인들의 공성탱크가 만들어 놓은 구멍과 균열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역사로서의 성서」, pp. 258-259).


 

61.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략 실패(왕하18-19장  ; 대하32장 ; 사36-37장).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가라사대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사 37:33,35).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사 37:36).
 자, 위에서 산헤립의 유다 침략에 관한 성서의 기록을 읽어 보았으므로, 다음에서는 당시에 쓴 산헤립 자신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유다인 히스기야로 말하건대, 그가 짐에게 복종하지 않았도다. 짐이 그의 마흔 여섯개의 거점 도시와 성채 및 부근의 무수한 소읍을 포위 공략하였으며, 잘 다진 비탈과 공성퇴를 이용하여 그것들을 손에 넣었다…짐이 그를 그의 왕도 예루살렘에 가두기를 마치 새장 안의 새처럼 하였다."
 

 

62. 아들에 의한 산헤립의 피살.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들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고 그 아들에 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사 37:37-38).


산헤립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인 에살핫돈은 이 일을 한 서판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 형제들은 굳게 결심하였다. 그들은 신들을 저버리고 악을 도모하며 폭력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왕위를 얻기 위해 엄친 산헤립을 죽였다."
 

 

63. 앗수르인에 의한 므낫세의 감금.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장관들로 와서 치게 하시매 저희가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간지라"(대하 33:11).
 고고학자인 라이트(Fred Wright)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은 므낫세가 바벨론으로 잡혀갔다는 것 때문에 성서의 내용에 의문을 가졌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앗수르의 수도는 니느웨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에살핫돈의 아버지인 산헤립은 바벨론 시를 무참히 파괴함으로써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고학은 고고학의 발견이 없었다면 일련의 이야기 가운데 공백으로 남았을 부분을 메꾸어 준다. 그것은 에살핫돈이 바벨론을 재건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기록한 것 가운데서 에살핫돈은 자신이 바벨론 시를 재건하고 이를 장엄한 도시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한 비문에서 므낫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는 수리아의 왕과…유다의 왕 므낫세를 소환하여 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했다'. "(「성지 고고학 요점」, p. 49).
 

 

64. 요시야의 통치 중에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책이 발견됨(대하 34:8-32).
  "요시야가 위에 있은지 십 팔년에…그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려 하여…사반과…마아세야와…요아를 보낸지라"(대하 34:8).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대하 34:14).
 융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고학은 성전을 수리하던 자들이 성전에서 작업중 이러한 문서를 발견할 수 있었던 흥미있는 이유를 시사해 준다. 이러한 발견은 석공과 목수의 작업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5경의 이러한 사본은 솔로몬이 성전을 세울 당시(기원전 966) 그 모퉁이돌에 놓여졌을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석조물에 있던 책이 발견된 것이다. 고고학이 입증하는 바에 따르면, 오늘날에 있어서도 행해지는 것처럼 고대에 있어서는 건물의 기초에 문서를 놓는 관례가 있었다.


 가령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의 왕 나보니두스는 그보다 수세기 전의 고대건물의 기초위에 묻어둔 문서들을 다시 찾아내기 위해 그것을 기꺼이 파헤쳤다. 그는 메소보다미아 남부 지역에 있는 심파르의 샤마쉬 신전에서 이 일을 행했다"(「고고학과 구약」, p. 281).
 

 

65. 히스기야의 수로(왕하 20:20 ; 역하 32:30).
  "히스기야가…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왕하 20:2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역하 32:30).
 고대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급수원은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성전 동편에 위치한 기혼의 샘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히스기야는 성읍 외곽에 있는 기혼의 샘물에서 성읍 안에 있는 실로암 못이라 불리우는 특별한 물 저장고에 물을 끌어들이는 커다란 수로를 만들었다. 견고한 바위를 깎아 만든 길이 1,777피트의 이 수로는 성서의 모든 시대에 있어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노역자들은 정을 이용하여 양편에서 지그자그 모양으로 작업해 나가 마침내 중간에서 만나도록 하여 깊이가 평균 6피트인 수로를 팠다. 실로암 못은 넓이가 30피트였다.


고고학적으로 히스기야의 수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실로암 쪽의 수로 끝에서 약 10피트 떨어진 곳의 수로 벽에 고대 히브리어로 아름답게 새겨진 6줄의 비문이다. 1180년에 두 명의 아랍 소년이 놀고 있었다. 그때 그 가운데 한 명이 그것을 발견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수도를 뚫는 일이 완공되다. 이제 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 비문에 기록한다. 일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바위를 뚫어 양측에서 서로를 향해 작업을 진행해 간다. 그리고 3규빗만 뚫으면 될 곳에 왔을 때 각자는 상대편의 소리를 들었다." 이 비문은 후에 암벽에서 정으로 파내어졌고 터어키 정부는 이것을 이스탐불의 고고학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66. 히스기야의 성벽 개수
  "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퇴락한 성을 중수하되 망대까지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대하 32:5).
  "앗수르의 포위 공격을 받으며 서둘러 행해진 히스기야의 성벽 개수는 오늘날 서 있는 모습 그대로의 성벽에서 분명히 보여진다. 다윗의 성벽과 30피트 떨어져 나란히 세워진 외벽의 기초가 발견되었다"(「할레이의 성서 핸드북」, p. 225).
 

 

67. 느부갓네살에 의한 라기스의 파괴
  "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렙 34:7).
20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 가운데 하나는 라기스의 도기 파편이었다. 이것은 성서의 히브리어로 씌어진 21개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전부 라기스의 고위 지휘관인 아모스에게(어떤 전진기지에 주둔해 있던)호시야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였다. 라기스는 중앙 팔레스틴에서 애굽으로 가는 주요 도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 도시의 잔해와 도기 파편의 자료는 1935년 스타기(J.L.Starkey)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이전에 유다의 상태에 대한 독보적인 견해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세번째 편지는 유다 군대의 이동과 관계된다. 네번재 편지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다.
  "우리는 너희들이 보내는 모든 신호에 따라 라기스의 신호소를 감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즈카의 신호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서신은 또한 성서에 그 이름이 나오는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드기야 왕의 부하인 "그마랴"(렘 29:3), 느부갓네살의 군대장관인 야아사니야(왕하 25:23)와 시드기야 왕의 본래 이름인 맛다니야(왕하 24:17).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서기관인 바룩의 부친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네리야였다(렘 43:3). 물론 이 메시지는 야오스에게 아즈카가 함락되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라기스의 마지막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이제 자신의 공병대원들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산헤립의 물밀듯한 군대가 기원전 701년에 라기스 성벽을 밀고 들어갔는 가를 보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벨론인들이 이어 자행하게 될 파괴행위와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웰컴-마스톤(Welcome-Marston)탐사대와 더불어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1년 반 동안의 끈질긴 발굴작업 끝에 라기스의 처절한 최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애석하게도 1938년에 라기스를 발굴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스타키가 43세의 나이로 살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헤브론 근처에서 아랍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켈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벨론인의 파괴행위를 알려주었던 지층에 대한 조사결과 스타키는 놀랍게도 재를 찾아냈다. 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많은 층들의 두께는 수 야드에 달했으며 2500년이 지났는데도 잔존해 있는 견고한 요새의 성벽보다도 더 높이 쌓여 있었다. 느부갓네살의 공병대원들은 방화하는 기술의 전문가, 즉 대 화재를 일으키는데 노련한 대가들이었다. 그들의 손에 닿을 수 있는 나무는 어느 것이든 목표지점으로 끌고 왔으며, 야기스 주변의 모든 지역에서 그 숲들을 걷어내고 수마일 근방까지 벌목했다. 그리고 성벽 바깥에 장작들을 산더미처럼 높이 쌓고 불을 붙였다. 무수히 많은 올리브 나무 숲이 이를 위해 모두 버려졌다. 재가 쌓인 층에서 숯이 된 올리브 씨들이 발견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밤낮으로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았으며 뭉실뭉실 타오르는 불꽃이 벽꼭대기에서 아래까지 급속하게 번졌다. 포위하고 있는 군대는 하얗게 단 돌이 터져 벽에 구멍이 생길 때까지 계속 땔감을 불길 속에 쌓아올렸다"(「역사로서의 성서」, p. 283).
 

 

68. 여호야긴의 감금과 시드기야의 즉위(왕하 24:10-19 ; 25:27-30).
  "그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왕하 24:10).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왕하 24:15).
  "바벨론 왕이 또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왕하 24:17).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삼십 칠년 곧 바벨론 왕 에월므로닥의 즉위한 원년…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놓아…"(왕하 25:27).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은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5:30).

1955년, 고고학자인 와이즈만(D.J.Wisemen)은 대영박물관에서 어떤 바벨론의 서판을 판독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그것들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발견했다.
  "7년째에…왕(느부갓네살)은 유대인의 성읍(예루살렘)에 대하여 진을 치고…아달월(기원전 597년 3월) 2일에 그것을 정복했다. 그는 왕(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 갔으며 대신에 그의 마음에 드는 자(시드기야)를 왕으로 임명했다. 그는 과중한 공물을 거둬들여 그것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이보다 전에 즉 1934년에 바이더(C.F.Weider)는 1899년에 콜드웨이(Robert Koldeway) 박사가 발굴했던 이와 유사한 바빌로니아 서판을 해독하고 있었다. 할당된 음식물에 대한 서로 다른 4개의 영수증이 있었는데 그 중에 상품의 참기름 영수증에서 그는 우연히 다음과 같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유다 땅의 왕 여호야긴.'
 69. 애굽의 도움을 바라고 바벨론을 쳐부수겠다는 시드기야의 허황된 꿈(렘 37:1,5-11).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렘 37: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렘 37:7).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헬라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언급했듯이 그 당시에 애굽 왕 아프리스의 지휘 아래 나일강으로부터 군대가 실제로 상륙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행선지는 예루살렘이 아니었다. 아프리스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베니게의 항구를 공격하고 있었다. 당시에 애굽 왕이 두로와 시돈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애굽의 기념비 조각들이 증거로 발견되었다.

 

70. 그다랴와 그의 관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렘 41:1-15).
 "…이스라엘과…바벨론 왕의 그 땅 총독으로 세운 바…그다랴를 칼로 쳐죽이고…"(렘 41:2).
   "그가 그다랴를 죽인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이스마엘이…그들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더라"(렘 41:7). 그다랴가 한때 지배했던 고대 미스바의 유적은 베이드(F.W.Bade)의 지휘 아래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 태평양 종교학부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 시대의 암석층에서 그는 상당수의 해골이 들어 있는 깊은 수조를 발견했다.
 

 

71. 예레미야가 애굽의 다바네스에 묻은 큰 돌들(렘 43:8-13).
  "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유다 사람의 목전에서 네손으로 큰 돌을 가져다가 다바네스 바로의 집 어귀의 벽돌 깔린 곳에 진흙으로 감추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 보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 위에 두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렘 43:8-11).


1886년에 패트리(Flinders Petrie)경은 이 길과 애굽 왕의 왕굴을 발굴했다. 그는 집 문 밖에 위치한 벽돌로 쌓은 단을 발견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메시지에서 느부갓네살이 그 위에 큰 장막을 쳤다고 언급한 바로 그 단인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 지역 아래에 묻힌 커다란 돌들이 발견되었다.


1886년 직후에 3개의 원통이 이 지역 부근에서 발견되어 카이로 박물관에 팔렸다. 그것들에는 바벨론에서 느부갓네살이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렸음을 말해주는 비문이 들어 있었다. 느부갓네살왕의 애굽 정벌을 기리기 위해 그것들을 이 지점에 놓았던 것같다.
 

 

72. 바벨론 포로기 중의 유대인의 생활(렘 29:4-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편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편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29:4-7).


베르너 켈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의해 바벨론에 끌려갔던 장로,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온 백성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그의 매우 사려깊은 충고를 따랐던 그들은 '성읍의 평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발견했으며 전혀 고되게 지내지 않았다. 바벨론에 있던 포로들은 모세 당시에 피톰과 람세스에서 나일강에 버려진 이스라엘 어린이의 모진 경험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사 47:6) 과중한 강제부역은 없었다. 그들이 유브라데 강가에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이미 바벨론은 그 당시에 아마 세계 최대였을 벽돌 공장을 경영했다. 느부갓네살 치하에서 만큼 메소보다미아에서 건축사업이 왕성하게 진행된 적은 없었다.


예레미야의 중고를 주의깊게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잘 지내게 되었으며, 어떤 사람은 실로 매우 부유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났던 한 가족은 먼지로 덮인 점토판 위에 사업 서류를 기록하여 후손에게 남겼다. 무라슈 앤드 선스(Murashu and Sons)-국제은행-보험, 양도수속, 대부업-동산 및 부동산-본점은 닙푸스(Mippur)-세계 도처에 지점이 있음-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 말하자면 메소보다미아의 '로이드'사.


 예루살렘 출신의 유민인 무라슈가는 기원전 587년 이후로 자력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들은 오래 전에 마련된 직무에 종사했다. 그들의 회사는 바사 시대에 있어서 조차 메소보다미아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무라슈 앤드 선스사의 장부는 포로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 예를 들면 그들의 이름, 직업, 재산과 같은 정보들로 가득차 있다.


 펜실바니아 대학 출신의 학자들은 닙푸르에서 앞에서 말한 바 있는 사업 증서에 보관되어 있는 몇몇 유대 회사의 행적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당시의 안전 예방책에 따라 역청으로 조심스럽게 봉해진 커다란 진흙 항아리 속에들어 있었다. 기쁨에 차서 이 자료의 내용을 읽은 사람들은 비단 앗수르 학자만이 아니었다.


 '무라슈 앤드 선스'사의 업무는 굉장히 다양하였다. 150년 동안 그들은 대재산, 운하의 부품 혹은 노예 수송이건 간에 고객들의 신뢰를 받았다.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은 누구나 마침내 자신의 서명을 첨가하게 될 때 이름 대신 자기 손톱으로 서류에 날인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글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 증인 앞에서 ×표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자율은 20%였는데 이것은 무라슈가 도입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당시에 통(정) 상적인 이자율이었다.
'무라슈 앤드 선스' 회사는 포로기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된 전형적 직업의 한 실례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특출한 직업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상인 및 무역업자 등의 직업으로 남아 있다. 고국에서 그들은 농부, 정착자, 가축 사육자, 매매인일 뿐이었다. 이스라엘 율법은 상업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즉 그것은 이방인의 직업이었다. '가나안 사람' 이란 말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게 주인' 혹은 '상인'과 동의어이며 예언자는 그들의 죄를 신랄하게 책망하였던 것이다.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호 12:7 ; 암 8:5-6).


 이와 같이 이제까지 금지되었던 직업에로의 전환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현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옛 신앙을 완강히 고수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써 살아남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최후 수단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농부와 거류민들이 이방 땅 전역에 흩어졌을 때, 그들은 다른 종족과 결혼하여 피가 서로 섞였을 것이며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이방에 흡수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이새로운 직업은 그들의 집이 다소 커다란집단이 되어야 함을 요구했다. 즉 그 안에서 그들 스스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의 종교 생활에 전념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응집력과 지속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보다 더 좋은 교육적 훈련은 선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역사로서의 성서」, pp. 287-289).
 

 

73. 느부갓네살의 거대한 신상과 격렬히 타는 풀무(단 3장).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각 도 모든 관원을…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단 3:102).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가로되…엎드리어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단 3:4-6).
 라이트(Fred H.Wright)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느부갓네살의 신상.' 다니엘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형상에 모든 백성이 예배할 것을 명하는 왕의 명령은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왕이 강제했던 일반적인 정책의 일부였다. 울리(Leonard Wooley)경은 갈대아의 우르에서 발굴작업을 하는 동안 이 새로운 정책의 예를 발견했다.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우르에서 성전 예배를 다시 복귀시켰을 때, 그는 성소에서 행해지는 비밀스런 의식에 대한 낡은 규정을 바꾸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제사장이 야외에 있는 제단에 제물을 바칠때,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 뿐만 아니라 그뒤에 열려진 문을 통해 신상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성서에 의거하건대 바로 그 왕이 공공장소에 신상을 마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 예배하도록 명했다고 할 때, 왕은 그가 우르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정책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비밀이었던 것이 이제는 모든 사람 앞에 공개된 것이다. 다른 왕들도 신상을 세웠었지만 느부갓네살이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공중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한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3명의 히브리 젊은이들은 이것에 복종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격렬히 타는 풀무 속으로 던져졌다.


 '바벨론의 격렬한 타는 풀무.' 다니엘이 격렬히 타는 풀무 속으로 던져진 히브리의 새 젊은이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몇몇 성서 비평가들은 민간 전승일 따름이라고 일소에 붙였다. 이말은 그러한 일이 사실상 당시에 일어났었을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은 사람들이 오래 전에 그러한 것을 경험했던 실제적 증거를 발견했다. 바벨론 유적의 초기 발굴자들은 처물을 발굴했다. 이 건물의 용도를 상술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갈대아의 신을 모독한 자를 화형시키는 화형장이다.'


 이러한 처벌 방법이 고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앗수르의 왕인 아슈르바니팔의 비문에서 알 수 있다. 그것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반역한 내 형제요, 나와 겨루었던 사울마기나를 격렬히 타오르는 풀무속으로 던져 그의 목숨을 끊었다'


 더구나 함무라비 왕과 같은 시대 인물인 라르사의 왕이 노예를 풀무 속으로 던지라고 선고한 사실을 보여주는 편지가 발견되었다"(「성서 지역에 있어서 고고학의 하이라이트」, pp. 64-65).


 

74. 느부갓네살의 자만과 바벨론의 거대함(단4장).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고고학자 톰슨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비문이 보여주듯이 실로 자만하고 있었다. 콜드위는 바벨론 도성의 폐허 가운데에서 일부는 벽돌과 돌에, 일부는 진흙을 구워 만든 서판 위에 기록된 수많은 비문 자료들을 발견하였다. 기록된 수많은 문장들은 느부갓네살의 자만심과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비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산처럼 꼼짝 않는 거대한 성벽을 나는 회반죽과 벽돌로 지었노라 심연의 한 복판에 나는 그 기초를 깊숙히 놓았고…나는 그 꼭대기를 산 높이까지 올렸도다. 나는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성벽을 3중으로 만들었도다. 나는 벽돌을 구워 세운 성벽 아래에 거대한 보호벽을 설치하도록 하였도다.'


 위대한 주재 마르둑이 나를 적출자로 일컫고 세상…곧 그의 강력한 도성 바벨론…의 정사를 감독케 하고 거대한 성문을 세우라고 하여 청동으로 만든 힘센 황소와…곧 달려들어 물어버릴듯한 무시무시한 뱀을 나는 세웠노라. 성읍을 회반죽과 벽롤로 성벽을 쌓고 그 주위를 돌아가며 못, 즉 외호를 팠다고 하는 점에서 그 어떤 왕도 하지 못했던 일을 내 부친은 해내셨도다. 나로 말할것 같으면 2번째 것에 이어 세번째의 커다란 외호-성벽을 회반죽과 벽돌로 세우고 그것을 내 부친이 만든 것과 연결시켰다. 심연의 한 복판 깊숙히까지 그 기초를 팠으며 그 꼭대기를 산높이까지 쌓아 올렸노라.


 땅의 소출, 산의 소출, 바다에서 나는 풍요로운 부를 그 성안에 모아들였으며…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곡식을 나는 성안에 쌓아두었노라. 그때 나는 왕궁 곧 내가 거처할 처소를 바벨론에 다시 세웠으며…나는 바벨론의 아름다운 숲에서 지붕 만들 목재를 운반해왔도다….'


여러 신전 가운데 하나에 대해 느부갓네살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내 깨끗한 손으로 레바논의 숲에서 가져온 거대한 재목을 친히 잘랐노라. 번쩍번쩍 빛나는 금을 그 위에 입히고 보석으로 그것을 장식하였도다…헤보 신전의 부속 예배실 그리고 목재로 된 그 지붕을 빛나는 은으로 장식하였노라. 나는 청동으로 거대한 황소를 만들고 그것에 하얀 대리석을 입혔도다. 나는 그것을 보석으로 장식하고 신전 문 입구에 갖다 놓았다'."(「성서와 고고학」, pp. 160-161).
 

 

75. 느부갓네살의 정신이상(단4장).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단 4:33).


 왕의 정신이상은 역사에 의해 확증된다. 요세푸스는 느부갓네살의 이상한 정신병에 대한 바벨론의 사가 베라수스라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기원전 268년의 헬라 사람인 아비데누스의 증거도 또한 있다.


느부갓네살 자신이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도 가능하다. 고고학자인 로울린스(Henry Rawlinson)경은 발굴된 왕의 비문을 해독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년 동안 바벨론의 내 권좌는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나는 나의 모든 통치령에서 권세의 산당을 세우지 않았다. 나는 나의 주이며 마음의 기쁨인 모르닥에게 예배할 때 내 왕국의 보물을 갖다 바치지 않았다. 내가 지배하는 성읍이며 내 제국의 권좌인 바벨론에서 나는 그를 찬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제단을 마련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수로를 소제하지도 않았다."


 

76. 벨사살의 역사성(단 5장).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단 5:1).


 할레이(Henry Halley)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853년 이전까지는 바벨론의 기록에서 벨사살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보니두스(기원전 555-538)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성서 비평가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다니엘서가 역사적이 아니라는 증거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1853년에 신께 바치기 위해 나보니드스가 우르에 세운 신전의 모퉁이돌에서 비문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바벨론의 왕인 나 곧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나의 장남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벨사살의 자기 부친과 공동섭정자로 군대와 왕정을 지배하였으며 키루스에게 정복당한 자가 바로 그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니엘이 어떻게 나라의 '세째 치리자'가 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준다"(단 5:16,29 ; 「할레이의 성서 핸드북」, p. 344).
 

 

77. 바벨론 포로와 벨사살의 처형(단5장).
  "그때에 사람이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단30-31).
구약 히브리어 학자인 우드(Leon Wood)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회반죽(plaster)에 대한 말이 히브리어에서도 사용되는데 '분' 혹은 '석회'를 의미한다(예, 사 27:9). 글자가 나타난 표면은 분명히 회반죽으로 되어 있었다. 바벨론 유적을 발굴했던 고고학자 콜드웨이는 그가 복잡하게 꾸며진 왕궁에서 발견한 방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폭이 55피트, 길이가 169피트였으며 벽에 회분이 칠해져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입구 맞은편에 있는 길다란 벽의 움폭 들어간 곳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추정하기를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 왕이 그곳에 앉아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얗게 회칠한 벽 위에 어떤 검은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다니엘서 주석」, p. 136).


 바벨론 성읍의 실제적인 함락에 관하여 헬라 사가인 헤로도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처음에 바벨론 군대는 진격해 오는 바사 군대와 맞서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으나 곧 바벨론 성벽안으로 후퇴하였다고 한다. 그때 고레스는 그 본래의 강바닥인 바벨론 성벽 아래를 흐르는 유브라데 강의 물길을 돌려 근처에 자신이 파놓은 저수지로 흘러가게 했다. 또 다른 헬라 사가인 크세노폰은 바벨론 사람들이 술에 만취하여 떠들썩한 잔치를 베풀고 있던 바로 그때에 바벨론 성읍으로 진격할 입구가 만들어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78. 다니엘과 사자굴(단6장).
 이제 고고학은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있어서 이것이(화평과 함께) 사형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고 결론내렸다.
 발굴자인 디컬래포이(Diculafoy)는 언젠가 바벨론 유적 가운데에서 작업하고 있는 동안 우물같이 보이는 곳에 빠졌다. 그는 동료 작업반원들에게 구조되었으며 곧이어 그 장소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되었다. 우물의 둘레 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사형장, 이곳에서 왕의 노여움을 산 자가 사나운 맹수에게 찢겨 죽었다."


 수산궁의 발굴작업 중에 사자굴에서 죽은 484명의 고관 명부가 발견되었다. 앗수르 왕 아슈르 바니팔의 한 비문은 그 당시에 이와 같은 관습이 일반적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의 조부 산헤립이 했던 것처럼 나머지 반역자들을 산채로 황소와 사자굴속에 던져버렸노라. 보라, 나는 그것을 본받아 그자들을 그러한 맹수 가운데로 던져 넣었노라."


 

79. 에스더서와 바사 왕 아하수에로.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된 것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 구스까지 일백 이십 칠 도를 치리하는 왕이라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궁에서 즉위하고"(에 1:1-2).
 톰슨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에스더서의 주요 등장인물들인 와스디, 하만, 모르드개는 성서외의 역사서에서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역사적 증거만이 아니라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의해 명백해지는 사실은, 에스더서 가운데에는 저자가 이 이야기의 배경에 대해 소상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다. 전제군주이며, 전적으로 육욕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에스더서의 그에 대한 묘사는 헬라 사가 헤로도투스의 설명과 일치한다. 그는 발굴결과가 보여주듯이, 폐르세폴리스에 첩들이 거하는 궁을 어머 어마하게 확정하였으며 자기 형수와 그리고 후에는 그의 딸과 부끄럽게도 정사를 맺었다.


 빛나는 휘장으로 꾸며진 왕궁에 대한 묘사는 바사인들의 화려한 왕궁 묘사와 아주 유사하다. 수사(성서의 수산)에서 발굴된 것들 가운데는 왕궁 벽이 호화스럽게 장식되었으며 거리에 화려하게 채색한 벽돌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다리오가 최초로 세우기 시작한 이 왕궁은 화려한 용어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특수한 목재로 지어졌으며, 금, 유리, 터어키옥, 은, 상아로 치장되었고 전국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크세르크세스 시대와 잘 맞아떨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20년동안 통치했으며, 이 책의 사건은 그가 재위한지 12년 혹은 13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에 3:7,12). 재위 3년에 있었던 잔치는 크세스세스가 헬라를 침략하기 전에 열었던 대회의와 일치할 수 있다. 또한 에스더가 왕후가 되기 이전의 4년 동안의 공백은 왕이 헬라에 있음으로 해서 부재중이었을 기간과 부합될 수 있다(에 1:3,2:16).


에스더서에 대한 표준적인 주석서들은 이 이야기 가운데 언급된 수많은 관습이 바사의 실생활을 상당히 따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잔치를 위한 준비(에 1:6-8), 왕과 그의 총애하는 자들 앞에서 행하는 인사(에 3:1), 길일과 흉일에 대한 신앙(에 3:7), 상복 입은 자를 왕궁에서 추방할(에 4:2). 사형방법으로서의 교수형(에 5:14). 왕이 총애하는 자에게 왕복을 입힘(에 6:8), 왕의 조서를 역졸에게부짐(에 3:13 ; 8:10) 등은 분명히 밝혀진 문서로부터 오늘날 잘 알려지게 된 관습들이다. 더구나 이 책에는 상당수의 바사어가 있는데 주로 행정 및 상업용들이다"(「성서와 고고학」, pp. 194-195).
 

 

80. 고레스 왕의 칙령(스 1:1-4).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하늘의 신 여호와께서…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으니…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에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 1:1-3).


고고학적 발견에 따라 이 칙령은 완전히 고증되었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와 고레스의 원통형 도장과 다른 기록 문서를 포함하고 고고학적 발굴은 고레스가 선전의 명수였으며 모든 기회를 자신을 위해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신들을 그들 자신의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유명한 정책을 폈다. 고레스 원통형 도장에는 이러한 정책 시행에 대해 증거하는 글이 있다. "짐은 또한 이주민들을 모으고 과거에 그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도다…짐이 그들의 신성한 성읍에 다시 정주시킨 모든 신들이여, 짐이 장수하도록 벨과 느보에게 간구하소서!"
 

 

81. 다리오 대왕의 역사성(스 6:1-15).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유대 성전)을 필역하니라"(스 6:15).
 성서의 기록 외에 다리오의 존재를 입증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음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이다. 그를 언급하는 주요 이유는 그의 이름이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과 베히스툰 비문으로 알려져 있다.


1835년에 로울린슨(Henry C. Rawlinson)은 바벨론 북동쪽 200마일에 있는 베히스툰 산위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높이 1,700피트의 거대한 바위를 발견했다. 이는 수직 절벽으로, 길에서 400피트 높이에 바위 표면을 반반하게 하고 그 위에 쓰고 등반을 하였으며 소석고를 이용하여 그것을 복제하였다. 그가 이것을 판독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약 1,200행으로 된 이 비문은 고대 앗수르와 바벨론의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사, 엘람, 아카드 3국의 언어로 새겨져 있었다. 이 비문의 내용은 다리오 대왕(기원전 522-486)이 그가 정복한 몇몇 반란 지역에서 어떻게 공물을 거둬들였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베히스툰 비문의 중요성은 그것이 앗수르와 바벨론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입문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82. 느헤미야에 의해 건축된 성벽(느 1-6장).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느  2:17-18).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끝나매"(느 6:15).
영국의 고고학자 케년(K.Kenyon)은 느헤미야의 유명한 성벽 일부를 발굴하였다. 그것은 70년에 디도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그 지역에 예루살렘 성벽으로 남아 있었다.


 

83. 느헤미야의 대적들(느 2,4,6장).
  "산발랏과…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느 2:19).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느 4:1)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느 4:8).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느 6:2).


산발랏이란 이름은 엘레판틴 파피루스 가운데 하나에 나타난다. 이 자료는 애굽에 있는 나일강의 제 1폭포에 위치한 엘레판틴 섬에서 1903년에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그 곳에 정주했던 유대의 거류민에 의해 씌어졌고 사용된 글자는 당시의 외교 및 상업 언어인 아람어이다. 그것들은 기원전 411년경에 있는 유대인 박해 때에 약탈당한 엘레판틴의 유대 성전에 대해 말해준다.


 이 자료에서 산발랏은 사마리아의 통치자로 언급된다. 또한 게셈이란 이름은 아라비아의 헤그라에서 발견된 당시의 비문과 애굽 변경에 있던 한 신전에서 발견된 또 다른 비문 자료로부터 우리에게 현재 알려졌다. 이 신전에서 게셈의 아들이 여신에게 바쳤던 주발이 발견되었다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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