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고고학(Biblical Archaeology)


김영익 교수 편저

총회신학교 출판부


머 릿 말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과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 사실의 흔적을 찾아 성경이 진실임을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 뜻을 둔 탐험가와 연구가들에 의하여 그 흔적들이 알려 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고고학에서는 그 분들이 찾아 낸 흔적과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전문 성경고고학 연구 서적이 아니고 본 총회 신학교 학생들의 성경고고학 교재로 만들었음을 밝혀 둡니다.


이 책은 김 성 교수의 강의와 인터넷의 자료들과 본인이 새새로 모은 자료들로 엮었음을 밝혀 둡니다.
이 책으로 공부하는 여러분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역사적 사실임이 확신되어 생명과 권능의 역사가 공부하는 여러분들에게서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서론

 

1. 고고학


고고학(Archaeology)이란 말은 두 개의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고대"라는 뜻을 가진 "알카이오스"(archaios)라는 말과 말씀, 사건, 기사, 강연 등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고고학이란 "고대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거의 인류가 생활 행위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ㆍ문화ㆍ생활 방법 등을 구명하는 학문이며, 광의의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해석으로 인류의 과거 생활 및 문화의 변천을 밝히는 과학이다.
인류의 과거를 구명하는 실마리로는 유적ㆍ유물과, 문자로 쓴 문헌 사료(文獻 史料)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고고학이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문헌 사학 즉 협의의 역사학이다.


고고학은 문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선사 고고학(先史考古學)과 역사 고고학(歷史考古學)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이 없는 시대는 고고학의 독무대이며, 문헌이 완비된 시대는 문헌 사학의 독무대이다.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고대를 탐구하려고 한 시도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부 나이드 왕(556-538B.C.)이 바빌로니아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샤마슈 신전(神殿)을 발굴하여 아카드 시대의 신전 자리를 발견한 것이 고고학 연구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간간이 고고학적인 발굴은 있었으나 근대적인 학술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고물(古物)에 대한 관심은 16세기 후반부터 고조되기는 했으나 고고학이라고 할 만한 연구는 독일의 J. J. 빙켈만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가 광범위하고 왕성하게 진행된 것은 그리스ㆍ로마의 미술품을 중심으로 한 고고학이며, 이런 종류의 연구에 대해 독일의 C. G. 하이네는 고고학(arkhaiologia)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19세기는 고고학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의 시기였고 20세기 들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고학의 연구 조사는 일대 약진을 이룩하였다. 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대규모 발굴이 있었고,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조사법과 보존법도 눈부신 진전을 이룩했다.

 

고고학의 연구는 연대 결정부터 시작되는 데 상대연대(相對年代)의 판정법에는 형식학적 방법(Pottery Typology)과 층위학적 방법(stratigraphy)이 있고, 절대연대의 판정의 방법에는 문헌을 연구하는 것과 탄소14법(카본 데이팅), 피션트랙법, 연륜연대법 발열분석법(Thermoluminescence), 분광분석법(Spectographicanalysis), 중성자 활동계산법(neutron activation)등이 있다.

 

2. 성경 고고학


성경고고학은 성경 시대, 즉 성경의 시대적 배경과 성경 지역, 즉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지리적 배경에 해당되는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고고학은 성경학의 여러 분야 중 하나라기 보다는 고고학의 한 분야로 분류된다.


오늘날 성경고고학은 성경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초학문 분야로 자리 잡았고, 성경이해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으며, 나날이 증가하는 현장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의 축적으로 끊임없는 성경의 재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경 고고학(聖經考古學/Biblical Archaeology)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기술(記述)과 사실(史實)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으로서 불교 고고학과 더불어 종교 고고학의 일부를 구성하며, 시간적으로는 성경학이 전승과 역사의 최초의 정합성(整合性)을 인정하는 B.C. 2000년 기부터 신약성경이 성립되어 끝날 때까지, 즉 청동기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를 주로 다룬다.


성경 고고학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Biblical Archaeology](Philadelphia:Westminster,1962)의 저자인 라이트(G. E. Wright)는 "성경 고고학은 고고학 발굴 결과 얻어진, 성경을 이해하는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3. 성경고고학의 연구범위


시대적 범위에서 성경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경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까지의 고고학이 된다. 성경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성경고고학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팔레스타인에서 농경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 (서기전 8500-4300년)부터 신약성경의 배경인 초기 로마시대 (서기전 63-서기 135년)까지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는 주로 이스라엘로 국한되며,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인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 이란, 키프로스, 그리스, 및 이탈리아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 연구 범위에 대해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성경 고고학의 연구는 고대 근동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과 러시아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 남단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경과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 한다"고 말한다. 즉 신약성경 시대에 대해서는 로마제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역이 관심의 대상이고 구약성경 시대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페르샤(현대의 이란)까지 포함하는 지역인 것이다.


4. 고고학적 발굴 방법론과 유물분석


성경고고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론인 발굴을 수행하고 나서는 밝혀진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분석 및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고고학에서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들은 첫째,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무엇인가(What)”라는 구체적인 정의와 묘사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출토된 지점과 원래의 출처가 “어디인가(Where)”라는 유적과 유물의 지리적 기원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발굴물의 시대적 기원에 관한 “언제인가(When)”라는 질문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의 유물들의 연대추정에 관한 물음은 고고학적 연구의 최종적 결론인 동시에 성격상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다행히 같은 지점에서 발견된 역사적 문서 및 기록물들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연대추정이 가능하지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는 달리 발굴현장에서 기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서는 자연히 기록물 다음으로 연대추정의 기준이 될만한 특정 유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 텔이란 무엇인가?
성경의 배경 지역들은 대략 오늘날의 중동지역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데, 이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고대의 유적지들은 독특한 형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폐허의 언덕을 아랍어로 텔(tell)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 시작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선택하였다. 첫째, 근처에서 쉽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 둘째, 주위에 경작할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는 곳, 셋째,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  넷째,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 등이다.


텔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등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텔이 언덕처럼 높아진 이유는 대부분 흙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2-30년 만에 한번씩 허물어지고 다시 외부에서 돌과 흙벽돌을 가져와서 새로 짓기 때문이며 무너진 잔해를 완전히 성벽 밖으로 치우지 않는 한 도시의 지반은 점 점 높아지게 된다. 텔은 한 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제한된 발굴 지역에서 수천 년의 주거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서로 얽힌 건물의 기초 벽들을 일일이 확인해주어야 하는 등, 매우 복잡한 주거 층 론(stratigraphy)을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역사적으로 서기전 6세기 이후부터는 고대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더 이상 성벽을 갖춘 “언덕의 도시”를 유지할 명목이 없어졌고, 특히 그리스 시대(서기전 330-63)에 들어와서 그리스 폴리스의 영향으로 텔 근처의 평지에 계획된 그리스-로마식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텔은 그 위치 상 군사적 요새 겸 관망대나 그리스-로마식 신전 등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2) 발굴
발굴이란 문자 그대로 유적지의 땅을 파는 작업인데 파묻혀 있던 유물들을 수집하고 유적을 보존하며 파내려 가는 작업이어서 대부분 사람들의 손에 의해 진행된다.
성경고고학에서는 특별히 로마시대의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흙 언덕인 관계로 독특한 과정을 통해 축적된 텔의 발굴이 주된 방법론이다.


발굴 목적에 부합되는 텔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표조사(surface survey)를 통하여 그 곳의 주거 연대를 확인해야 한다. 다음은 발굴 예산을 확보하고 현장 지도와 분석을 맡을 고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스탭 진과 발굴 작업에 직접 종사하는 일반인들로 구성된 발굴단을 조직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진행되고 있는 텔 발굴은 대부분 건기인 4-11월 사이에 이루어지며 일반 및 대학생 자원 봉사자들의 참여로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발굴이 여러 해 동안 지속되는 만큼 한해의 수집된 유물들을 충분히 분석할 수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고려하여 매해의 발굴 기간이 결정된다.


발굴은 사방 5미터의 정사각형 단위로 진행되며 한 발굴지역 당 4-10개의 정방형(Square)을 파고 전체 텔의 발굴에서는 예산과 규모에 따라 3-6개 정도의 발굴지역(Area)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 기간은 규모에 따라 다양하지만 대부분 연간 4-10주 정도이고 공사 중 파헤쳐진 구원 발굴(salvage excavation)의 경우 외에는 주로 5-10년 정도의 장기적 계획 하에 발굴이 진행된다.

 

3) 발굴 방법론
성경고고학 발굴의 초창기에는 텔을 발굴할 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후시대의 주거 층의 전체를 한 겹씩 벗겨나가는 식으로 파내려 갔지만 한번 발굴된 것은 이미 그 역사적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특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요즘에는 텔의 몇몇 중요한 부분들을 선정하여 수직으로 파 내려가서 특정지역의 시대적 연속성을 규명해 보려는 발굴을 주로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텔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성벽 및 성문 지역, 텔의 중심부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궁전과 신전 및 부속 창고들, 그 외의 일반 주거 지역 등을 중점적으로 발굴하게 된다.


고고학적 발굴은 문자 그대로 땅을 파는 작업인데, 조금씩 파내려 가면서 주거 층의 흙바닥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건물의 기초들을 보존하고, 그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온갖 종류의 유물들을 수집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대부분의 구약시대 도시들의 집들은 돌로 쌓은 기초 위에 흙벽돌로써 벽을 올리고 나무 가지를 걸쳐서 지붕을 엮었기 때문에 집의 무너진 잔재를 발굴하게 되면 불에 탄 지붕재료, 무너진 흙벽돌의 퇴적층, 집 바닥에 널려있던 토기 조각 및 기타 유물들, 그리고 단단하게 눌리어진 집 바닥층 등의 네 층으로 구분된다. 이 네 층을 모두 합쳐서 고고학적 용어로 한 주거 층(stratum)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내에서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산악지대에서는 돌을 많이 사용하였고 저지대나 광야지역에서는 흙벽돌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약간 다른 발굴 방법론이 적용되기도 한다.

 

4)성경고고학의 연구 방법론
성경고고학의 독특한 세 가지 연구 방법론은 주거 층 론(stratigraphy), 유형론(typology), 그리고 토기 연대추정(pottery chronology)이다.
주거 층 론은 텔 자체가 여러 개의 주거 층(stratum)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 하에 상대적으로 밑의 주거 층이 위의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연대추정을 가능케 한다.


유형론이란 주로 발굴에서 수집된 유물에 적용되는 방법론으로서 겉모양이 비슷한 것끼리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지리적 시대적 기원과 발전 등을 유추하는 분석의 한 방법론이다. 이 유형론은 특별히 토기 분류에 결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토기 연대추정은 토기의 모양 중에서도 특히 아구리 부분(rim)이 시대적으로 자주 변천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50년의 단위까지 세분하여 상대 및 절대 연대의 추정이 가능한 일종의 토기 유형론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론이다.


19세기 말 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된 이스라엘 여러 지방의 다양한 시대의 토기들의 유형으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토기 달력(pottery calendar)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라도 비교적 정확하게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성경고고학에서의 가장 믿을만한 시대판단의 기준으로서 ‘비교 토기연대’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토기제작 시기 (서기전 6000년)이래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30-50년 내외의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5. 성경고고학의 역사


초기의 성경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경의 여러 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경의 지명들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작업을 수행했다. 성경고고학이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재구성된 역사 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성경 고고학은 아마도 1799년 8월 나폴레옹이 애굽을 침략했을 때 발견된 로제타 바위(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부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세 줄로(헬라어, 애굽의 상형문자, 후기 애굽의 필기문자의 세 줄)쓰여 졌는데 진 프랑소와, 샴폴리온에 의해 해독되었다. 나폴레옹이 애굽에서 고대 기록들을 발견하게 된 것은 이 나라에서 더 많은 발굴 작업을 벌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5년에 영국에서 결성된 ‘팔레스타인 탐사재단(Palestine Exploration Fund)’은 성지의 고고학, 풍속, 지리, 자연환경 등을 연구하기 위해 당시의 영국 여왕을 후원자로 하여 모금하기 시작했다. 이 기금으로 설립된 학회의 목적은 이 연구단체가 발행하는 학회지에 “성경의 쉬운 이해를 위한 성지의 역사, 고고학, 지리학, 관습 등의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라고 요약돼 있다.

 

과학적 고고학이 팔레스틴에 이르게 된 것은 1890년에 영국의 W. M. 플린더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그의 연구 방법인 "연속적 연대의 연구"를 위한 성층연구법에 따라 수행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견해와 19세기 미국의 E. 로빈슨이 성경 속의 지명을 실지 조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페트리가 텔 엘 헤시(Tell el-Hesi) 언덕을 성경의 라키쉬(라기스)로 착각한 페트리는 이집트에서 쌓은 발굴 경험들을 토대로 주거 층에 따른 토기 모양들의 변화에 착안하여, 주거 층 론과 토기 연대추정을 확립하였다.


페트리를 이어 다음 단계로 발전시킨 사람은 올브라이트(W. F. Albright)로 헤브론 서쪽인 텔 베이트 밀심(Mirsim)을 발굴하였는데(1926-1932), 세심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그릇들의 발전 과정을 완벽하게 확립했다.


성경 고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성경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가 1930년대부터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토기의 형식에 의해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은 영국의 페트리가 텔 엘 헤시 발굴 때 도입하고 올브라이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그 외에도 라이스너와 피셔(C. S. Fisher)가 사마리아에서 새로운 발굴 기술로 발굴 작업(1931-1935)을 벌였으며, 1952년에는 케더린 케년(Kenyon)이 여리고와 그 외의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성경 고고학(또는 팔레스틴 고고학)의 성립은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발전한 과학적 연구 방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 동양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의 교수였던 피셔와 올브라이트의 공헌이 컸다. 올브라이트의 텔 베이트 미르심 보고서는 과거의 연구 방법에 나타나는 주관성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도 이를 연구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라이트는 스승의 고고학적 입장을 견지함과 아울러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신학에 접목시키려 시도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력은 독일계 신학자들의 거센 반발과 함께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성경의 기록만을 진실 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역사에서의 계시"라는 중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결과 성경 고고학은 미국의 성경신학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고 1970년대가 되면서 그 성격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 주장되었던 성경 고고학이라는 용어 대신 "팔레스틴 고고학" 또는 "시리아-팔레스틴 고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성격도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변증하는 입장에서 고대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 연구라는 일반 고고학적 입장으로 변모하였다.

페트리의 발굴 이후에 계속해서
젤린(E. Sellin)의 타아낙(Taanach) 발굴(1902-1904),
마칼리스터(R.A.S. Macalister)의 게제르(Gezer) 발굴(1902-1909)
젤린(E. Sellin)과 바찡어(C. Watzinger)의 여리고(Jericho) 발굴(1907-1909)
하바드 대학팀의 사마리아 발굴(1908-1910)
시카고 대학팀의 므깃도(Megiddo) 발굴(1925-1939)
펜실베니아 대학팀의 벳샨(Beth Shean) 발굴(1921-33),
페트리의 텔 엘-아줄(Tell el-Ajjul) 발굴(1930-1934)
스타키(J. Starkey)의 라키쉬(Lachish) 발굴(1932-1938) 등이 이어지면서 발굴 방법론이 점차 발전했다.

 

2차 대전이후 영국적 발굴방법인 소위 휠러-케년(Wheeler-Kenyon)식이 케년(K.M. Kenyon)의 여리고 재 발굴(1952-1958)에서 적용되어 텔의 가장자리에 깊은 홈(trench)을 파서 주로 주거 층들의 수직적인(연대적인) 상관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규명할 수 있게 됐으며, 한편으로 라이트(G.E. Wright)가 중심이 된 미국 팀의 세겜 발굴(1956-1964)에서는 텔 전체에 산재한 주요 건축물들의 시대적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수평적 개념의 발굴방법이 강조됐다.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의 게제르 재 발굴(1964-1973)에서는 앞의 두 방법론을 적절히 조화시켰으며, 특히 삼차원적으로 규정한 특정 위치의 임의의 공간을 “로쿠스(Locus)”로 독립시킴으로써,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을 위상에 따른 체계적 분류 및 분석이 가능하게 됐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그때까지 축적된 발굴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많은 유적지에서의 대규모 발굴을 수행했다.
야딘(Y. Yadin)의 하솔(Hazor) 발굴(1955-1958)과 맛사다(Masada) 발굴(1963-1965)을 통하여 고고학 발굴 역사상 처음으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한 발굴이 체계화되었다.

 

 

6. 성경고고학의 시대구분


일반 고고학계의 시대구분은 전통적으로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로 나뉘어 지는데 성경고고학에서도 이 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단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일종의 금석 병용시대인 동석기 시대를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

 

1) 신석기 시대(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4300).
   토기이전 신석기 시대 : 서기전 8500-6000.
   토기 신석기 시대 : 서기전 6000-4300.


2)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3) 청동기 시대(Bronze Age: 서기전 3300-1200).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50.
   중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2250-1550.
   후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1550-1200.


4)철기 시대(Iron Age: 서기전 1200-586).

서기전 586년의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끝나는 철기 시대 이후의고고학적 시대구분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점령 통치했던 주변 강대국들에 따라 각각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바빌로니아 시대(서기전 586-530),
페르시아 시대(서기전 530-330),
그리스 시대(서기전 330-63),
로마시대(서기전 63-서기 330),
비잔틴 시대(서기 330-630)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성경고고학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고고학의 시대구분의 기준에 따라 철기 시대까지만 범위로 넣고 있으며, 그 이후 시대는 역사학과의 밀접한 교류에 따른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포함하는 독립적인 고전 고고학(Classical Archaeology)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전 고고학의 중심지는 역시 현재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성경고고학의 전통적인 시대를 서기전 586년으로 한정시키는 경향도 있다. 좀더 세분된 성경고고학의 각 시대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6000).
이 시대의 문명은 나투프 문명(Natufian Culture)이라고도 불리며 소위 팔레스타인에서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여리고)가 건설되었고, 농업혁명으로 인한 정착경제의 발전과 목축업이 시작되었다.

 

(2)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6000-4300).
이 시대의 문명은 야르묵 문명(Yarmukian Culture)이라고 불리우며 이때부터 비로소 처음으로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토기가 특정지역의 고유한 민족 집단에 의해 독특하게 제작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대구분 및 인종집단 구분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3)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이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금속인 구리가 도구제작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석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요단 건너편 지역 사해 북부의 텔레일랏 가슐(Teleilat Ghassul)에서 이 시대의 거주흔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명을 가슐 문명(Ghassulian Culture)이라고도 부른다. 특별히 엔 게디 남쪽의 미슈마르(Mishmar) 동굴에서 발견된 436점의 구리제품은 이 시대에 벌써 고도의 구리 제련 술이 발달되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4) 초기 청동기 I 시대(EB I: 서기전 3300-3050)
이 시대는 고대근동 전체에 있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고 이의 여파로 정착경제가 가속화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 이집트와의 문물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이집트 토기를 통하여 밝혀졌다.

 

(5) 초기 청동기 II 시대(EB II: 서기전 3050-2700)
이 때부터 본격적인 도시문명이 근동지방 전체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소위 제 1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의 영향으로 가나안 지방에서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6) 초기 청동기 III 시대(EB III: 서기전 2700-2250)
이 시기는 도시문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이며, 조직적인 국제무역의 흔적을 토기나 장신구 등의 물질문명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번창했던 도시들로는, 하솔, 벳 예라크, 벳샨, 므깃도, 아이, 여리고, 야르뭇트, 텔 엘헤시, 텔 에라니, 텔 할리프 등을 들 수 있다.

 

(7) 중기 청동기 I 시대(MB I: 서기전 2250-2000)
서기전 2250년을 전후하여 가나안의 초기 청동기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그 이후 250여 년 동안 일종의 쇠퇴기를 맞게 되며 이집트의 제1중간기(제7-11왕조)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 시대는 수직갱 무덤(Shaft Tomb)이라는 독특한 매장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성행했던 유목민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8) 중기 청동기 II 시대(MB II: 서기전 2000-1550)
이집트의 중 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역사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다. 물질문명의 척도인 토기 제작 면에서도 고속물레(fast wheel)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멀리 이집트까지 수출되었고 파이안스(faience)와 알라바스터(alabaster) 용기들도 가나안 자체의 기술로 대량생산되었다.

 

(9) 후기 청동기 I 시대(LB I: 서기전 1550-1400)
이집트의 제15왕조인 힉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파괴되면서 약 100여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집트 신왕국의 제18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집트는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0) 후기 청동기 II 시대(LB II: 서기전 1400-1200)
아마르나(Amarna)시대라 불리는 서기전 14세기의 가나안은 이집트를 종주국으로 그 지배 하에 근처의 마을들을 통치하는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굴을 통하여 이집트 식 신전 및 궁전이 므깃도와 벳샨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이집트가 이 도시들에 총독부를 두고서 가나안을 직접 다스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1) 철기 I 시대(Iron I: 서기전 1200-1000)
서기전 1200년을 전후해서 고대 근동지방에서 암흑기(Dark Age)라고 불리는 문명의 위기가 발생하는데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는 등의 기상 이변이 가장 중요한 문명붕괴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지중해 연안을 휩쓴 해양민족의 이동으로 막강했던 헷 제국이 몰락하고 시리아와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파괴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의 유입이 발생하고, 가나안 지역에서는 주변의 권력공백을 틈탄 약소민족들이 각각 아람, 페니키아,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목 이음 항아리(collar rim jar)”의 추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진입과 주거분포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12) 철기 II 시대(Iron II: 서기전 1000-586).
다윗왕조의 수립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명이 발전되었으며, 비교적 구약성경의 역사서의 기록과 발굴을 통한 주거분포가 일치하는 등 이 시대는 성경고고학의 중심시대로 간주된다. 북쪽의 단(Dan)에서부터 남쪽의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와 쿤틸랏트 아즈루드(Kuntilat Ajrud)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독특한 양식의 요새가 많이 건설되어서, 이스라엘의 실제적 통치영역과 고유의 물질문명의 지리적 분포를 쉽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13) 농업 혁명(agricultural revolution): (서기전 10,000-8,000)
서기전 1만 년경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야생 농작물의 재배와 야생 동물들의 가축화가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된다. 대규모의 수확이 가능하고 기본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밀과 보리 등의 곡물류의 재배는 연중 강수량이 500밀리미터 이상인 지중해변과 자그로스 산악 지역에서부터 시작됐다. 서기전 1만년경 이 곳의 거주민들은 오랜 기간의 구석기 시대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야생으로 자라던 밀과 보리를 계절에 따른 농사를 통하여 대량으로 수확하면서 농사를 근거로 하는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이러한 생업의 변화를 농업혁명이라 부르며 이 때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다. 또한 정착 생활에서도 쉽게 짐승들을 얻기 위해서 사냥에서 생포한 야생동물들을 가축으로 길들여서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역사상 최초로 길들여진 가축들은 다음과 같다.
개: 서기전 11,000년경, 염소: 서기전 8,500년경, 양: 서기전 8,000년경,  돼지: 서기전 7,500년경, 소: 서기전 7,000년경, 고양이: 서기전 7,000년경, 당나귀: 서기전 4,000년경, 말: 서기전 2,000년경, 낙타: 서기전 1,200년경(아라비아 광야)

 

(14) 도시혁명(urban revolution): (서기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의 발달은 농업혁명의 결과 대규모의 관개사업과, 잉여 농산물의 교환 등을 주도하는 세력이 자연스럽게 건설한 요새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고학적 관점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서 성안에 사람들이 주거지로 사용했던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착지로 규정된다.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근처의 농경지의 실   소유주로서 농사와 목축을 관장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처하며, 농산물의 교환을 주도하는 통치세력을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최초의 도시는 왕을 중심으로 일종의 도시국가(city state)를 형성하였다. 신석기시대부터 원시적으로 발전했던 종교는 도시 안에 건설된 신전을 중심으로 제사장이라는 특정 계층을 탄생시켰고, 이제 신들은 해당도시의 수호신 개념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도시혁명의 결과 교환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품의 목록과 수량의 기록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로부터 단순한 기호들이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 본격적인 문자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 과 제 ▣


1. 고고학이란?
2. 성경 고고학이란?
3. 성경고고학의 연구범위를 쓰라
4. 텔이란?
5. 성경고고학의 연구방법론을 쓰라
6. 성경고고학의 시대구분을 쓰라

 


제2장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

 

1. 베로소스(Berossos)의 바빌로니아학(Babyloniaca)


서기전 340년경 바벨론에서 태어난 후 에게 해의 코스(Cos) 섬에 정착한 베로소스는 모두 세 권으로 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편찬하였다.


하지만 베로소스의 원본은 유실되었고 단지 오늘날 남아 있는 부분은 서기전 1세기 알렉산더 폴리히스토르(Alexander- Polyhistor)의 저서에 인용된 것과 서기 4세기 초 유세비우스에 의해 재인용된 것뿐이다.


베로소스의 바빌로니아 학은 요세푸스에 의해 인용된 마네토(Manetho)의 이집트 학(Aegyptiaca)과 비교될 만큼 아마도 천지 창조에서부터 페르시아 시대까지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리라 추정된다.


제 1권은 창조 신화들을 다루고 있는데 반인반어(半人半魚)의 존재인 오아네스(Oannes)가 바벨론 강변에 도착하여 여전히 야생 짐승들의 생활을 하던 인간들의 조상이 되었음을 다루고 있다.


제 2권은 천지 창조 때부터 나보폴라사르(서기전 747-734)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대홍수 이전의 왕 명단은 수메르의 왕 명단과 비교될 정도로 신빙성이 있다.


제 3권은 나보폴라사르 시대(서기전 747-734)부터 자신의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2. 고대 바빌로니아의 홍수 설화


- 죠지 스미드(George Smith: 1840-1876)와 홍수 설화(1872)-
죠지 스미드는 원래 지폐 조판공이었지만 독학으로 메소포타미아에 관한 연구를 한 끝에 26세에는 쐐기문자에 관한 해설 책을 펴낼 만큼 이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28세인 1868년부터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앗시리아부(部)에서 조수로 취직하여 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토판문서들을 정리하며 읽던 중 홍수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영국인 홀므즈 랏삼(Hormuzd Rassam)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25,000개의 점토판은 영국의 대영 제국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 박물관에서 독학으로 구약 성경을 공부하던 소년 조지 스미스(George Smith)가 깨어진 수많은 점토판을 맞추고 스스로 깨달은 설형문자를 판독하다가 1872년 그 점토판 중에 하나에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의 홍수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다.


1872년 12월 3일 영국 런던의 성경고고학회 세미나에서 대영 박물관의 죠지 스미드(George Smith)는 앗시리아판 노아의 홍수에 관한 토판문서의 내용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것은 길가메슈의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라는 12판으로 된 것 중 11번째 판에 기록되었다. 고대 우룩(성경의 에렉 - 창 10:10)의 왕이요 영웅인 길가메슈가 고생을 무릅쓰고 조상 우트나피쉬팀(Utnapishitim)을 찾아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답할 때 우트나피쉬팀이 들려 준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 것이다. 우트나피쉬팀은 바로 성경에서 노아가 겪었던 홍수 이야기를 거의 비슷하게 진술하고 있다.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의 홍수 이야기도 자기들의 스스로 기록이 아니요 아슈르바니팔 왕이 그들보다 먼저 메소포타미야 하부에 들어와 살던 세계 역사의 최고 민족인 수멜 사람들의 기록을 전래한 것이다. 기원전 1967년 또는 기원전 2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홍수 기록(니플의 문서)이 발굴되었다.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여러 지방 사람들에 의해 와전되기는 했으나 태고로부터 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전래되었음이 확증된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인 키슈(Kish)에서 파낸 점토 기록은 거의 기원전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홍수 전에 살았던 통치자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런 후에 홍수가 세상을 휩쓸었다. 홍수가 휩쓴 후에 왕권이 다시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는데 첫째로 키슈에 왕권이 임했다"고 적혀있다.


노아의 대홍수가 참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 여러 곳에서 저들의 다신교적인 정치 색채로 와전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대로 조상의 전승을 따라 보전되어 내려와서 오늘날 우리로 성경의 노아 대홍수를 확신하는데 문자적인 뒷받침을 하게 되었다.

 

이 길가메쉬 서사시는 창세기의 노아와 필적할 만한 신의 선택자인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 도중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홍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왕조시대로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는 보수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구약성경의 신빙성을 증명할 증거로 여겨지면서 영국의 국민적인 관심이 들끓었다.


당시 영국의 최대 일간지인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지는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찾는데 1,000기니아(guinea)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당연히 스밋트는 이 모험을 자처하고 나섰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한 끝에 티스리스 강변의 모술에 도착하여 고대의 니느웨로 여겨지는 쿠윤직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스밋트는 384개의 토판 문서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 중에는 물론 잃어버린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3. 고대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  


-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
홍수 설화 점토판을 발견한 스미스는 1876년 그가 수집한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의 점토판으로부터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사와 흡사한 고대 바빌로니아 설화를 찾아내었다.


이 점토판은 기원전 1700여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하무라비 대왕(1728-1686 BC)이 자기 나라와 자기들의 신인 말둑(Marduk)을 높이기 위하여 그 이전부터 니플, 앗시리아 등 여러 곳에 있던 기록을 개편하여 쓴 것을 아슈르바니팔 왕이 자기 도서관에 보관하여 둔 것이다. 이 서사시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 뜻은 "태초에"(When above)라는 것으로서 7개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어 창조의 7일을 나타낸 듯이 보인다. 성경 외에도 고대 여러 나라들이 저들의 조상들이 전해 준 창조의 이야기를 불완전하고 왜곡되게 간직하고 있다. 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사실이 객관성이 있는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에 관한 신화는 아카드어로 기록된 에누마 엘리쉬로서 지금까지 니느웨(Nineveh), 앗슈르(Ashur), 키쉬(Kish), 술탄 테페(Sultan Tepe) 등에서 발견됐다. 이들의 기록연대는 서기전 900-200년까지로 다양하며 신화 자체는 7개의 토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1100줄에 달한다. 이 신화의 제목인 ‘에누마 엘리쉬’는 첫 두 단어로서 ‘높이서 --할 때’ ‘When on high’라는 뜻이며 신들의 태어나는 태초의 시간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저 높은 곳의 하늘이 명명되기 이전에 저 낮은 곳의 땅이 이름 불려지기 이전에’


제1세대 : 압수(Apsu): 민물 <--> 바닷물: 티아맛(Tiamat)
제2세대 : 라크무(Lakhmu): 진흙 <--> 갯벌: 라카무(Lakhamu)
제3세대 : 안샤르(Anshar): 구름 <--> 안개: 키샤르(Kishar):
제4세대 : 아누(Anu)
제5세대: 누디무드(Nudimmud)=에아(Ea) <--> 담키나(Damkinna)
제 6세대 : 마르둑(Marduk)

 

제 1-3 세대의 신들은 각각 쌍을 이루면서 자연현상을 대표하는데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늪지대를 연상시킨다. 압수(Apsu)는 젊은 신들의 소란함 때문에 편안히 쉴 수가 없어서 그들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알아차린 에아(Ea)가 압수를 결박하여 죽여 버렸다. 이 때부터 압수는 에아의 전통적인 거처가 되었다.

 

이야기는 남편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티아맛 진영과 이에 대항하는 에아의 아들 마르둑과의 전투로 전개된다. 티아맛은 킹구, 후부르와 함께 그녀가 만든 11 괴물들을 동원하였고 마르둑은 활, 곤봉, 번개, 화염, 그물, 폭풍으로 무장했다. 마르둑은 우선 폭풍으로 티아맛을 제압한 다음 활을 쏘아 죽였고 그녀의 시체와 킹구의 피로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다. (1) 하늘과 땅, (2) 하늘의 성좌: 매달 3개의 성단(constellation): 36 성좌, (3) 달과 태양, (4)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티아맛의 눈물, (5) 인간: 킹구의 피에누마 엘리쉬는 전형적인 바빌로니아의 문학 작품이다.

 

이것의 집필 의도는 마르둑(Marduk)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며 자연과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기전 1750 년경 함무라비가 바빌론을 새 왕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수메르 시대부터 미미한 존재였던 마르둑이 출세하기 시작하였고, 서기전 1120년경 느부갓네살 1세가 신년축제를 통하여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켰다.

 

에누마 엘리쉬는 신년축제(아키투 축제) 제 4일에 마르둑 신상 앞에서 낭독되었다. 앗슈르에서 발견된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마르둑 대신에 앗수르가 들어가 있다. 바벨론의 마르둑교(Mardukism)는 도시, 신전, 신상, 그리고 제의문인 에누마 엘리쉬까지 갖춤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최고로 발전된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 아다파의 전설 - 타락의 역사, 유혹의 장면


니느웨에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의 도서관에서 창세기 3장의 아담의 타락과 유사한 아다파의 신화(The Myth of Adapa)가 발견되었다. 모두 4개의 점토판에 씌여 있는데 3판은 니느웨 도서관에서, 4판은 이집트의 아마르나 왕궁 보관소에서 나왔다. 아다파는 신에게서 지혜를 받아 그 신(Ea)의 성전을 다스리는 자로 임명을 받았으나 실수하여 나중에는 생명의 물과 빵을 먹는 특권을 거절함으로써 내어 쫓겨 영생을 빼앗기고 질병과 불행을 겪게 된다. 아담의 타락 이야기를 반영하는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야 지방 사람들이 쓰던 원주형 도장에 눌려 찍혀진 부각에는 창세기 2장의 유혹의 장면을 보여주는 암시가 있다. 그 그림에는 거룩한 나무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데 하와로 보이는 왼편 사람의 뒤에는 뱀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창세기 2장의 사실을 묘사한 바벨론의 고대 전설로 여겨지는데 이를 "하와의 유혹"이라 부르고 있다.

 

 

5. 창세기의 안식일과 바벨론의 안식일


창세기 2장 1~3절에는 안식일의 기사가 나온다. 안식일은 큰 복의 날이다. 그런데 로린슨이 판독한 고대 바벨론의 한 점토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제7일은 마르둑과 자르파니트의 축제일이다. 그 날은 악한 날이다. 위대한 백성의 목자는 연기 나는 숯불 위에 구운 고기를 먹지 말 것이니라. 그 몸에 겉옷을 갈아입지 말 것이요 깨끗한 것을 입지 말지니라. 그는 희생 제물을 드리지 말지니라. 병거를 탄 왕은 달리지 말 것이요. 그는 승리를 말하지 말 것이라. 선견자는 거룩한 곳에서 신탁을 말하지 말라. 의사는 환자 위에 그 손을 얹지 말 것이요, 악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느니라. 밤에 왕은 마르둑과 이슈타 앞에 그의 제물을 드릴 것이며 관제(灌際)를 부을지니라. 그의 손을 쳐드는 것은 그 때에 그 신들에게 기뻐함이 될 것이라" (Rawlinson's Cuneiform Inscription of Western Asia Ⅵ, 2nd ed., pl. 32, lines 28-38).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창 2:1-3; 출 20:8-11; 신 5:12-15) 성별하신 안식일에 대한 사단의 훼방을 엿볼 수 있는 흥미 있는 자료가 된다.

 

 

6. 레이야드(Austen Henry Layard: 1817-1894)의 니므루드(Nimrud) 발굴


레이야드는 1839년 7월 10일 런던을 출발하여 인도로 가는 도중에 육로로 유럽 대륙과 소아시아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을 여행하면서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탐사를 이루고자 하였다. 1840년 4월 10일 모술(Mosul)에 도착하여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니느웨라고 알려진 쿠윤직(Kuyunjik)을 탐사하였다. 1842년 7월 10일 콘스탄티노플의 영국 대사관에서 그간의 여행과 탐사의 능력을 인정받아 대사의 비서로 1845년까지 3년 동안 일하면서 모닝 포스트, 모닝 크로니클, 몰타 타임즈 등의 해외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레이야드는 27살인 1845년 11월 8일부터 니므루드 발굴을 시작하였다.


레이아드(Henry Layard)는 1845년 메소포타미야 북부지방에 있는 니므롯 언덕(The Mound of Nimrud)을 파헤쳐 창세기 11장 10절의 도시 갈라를 찾아내었다. 이 도시는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창 10:8)이 건설한 도시이다.

 

그곳에서 레이아드는 지금의 앗시리아의 유명한 왕이었던 아슈르나서르팔(Ashurnasirpal; 884-859 BC)의 궁전 및 살만에셀 Ⅲ세(Shalmaneser Ⅲ)와 에살핫돈(Esarhaddon) 왕의 궁전을 발굴했다. 살만에셀 Ⅲ세는 이스라엘 왕 예후와 접촉했고 에살핫돈은 성경 여러 곳(왕하 19:36, 37; 대하 32:21; 사 37:37, 38)에 등장하고 있다. 앗시리아의 잔인한 왕인 아슈르나서르팔이 니므롯(창세기의 갈라)에 있는 그의 궁전 입구에 세워 두었던 154줄로 된 기념비가 발굴되었다.


이 비문에는 그의 정복 활동 및 건축 활동이 적혀 있다. 그의 새 궁전을 헌당할 때 69, 574명의 손님에게 10일간 베푼 큰 잔치의 식단도 쓰여 있어 다니엘 5장의 벨사살 및 에서더 1장의 아하수에르 왕의 잔치 기록의 신빙성을 보여주고 있다.

 

 

7. 메소포타미아의 셈족의 등장


‘셈족(Semitic, Semitisch)’이라는 용어는 1871년 독일의 쉘쪄(Schelzer)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셈족은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발전하였다.
서기전 4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민족,


서기전 3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서부 셈어족,
서기전 12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아람 민족, 이스라엘 민족,
서기전 200년 이후: 나바테야 민족,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서기 600년 이후: 무슬림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오늘날 셈족의 후예인 모슬렘 아랍 민족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비롯한 북부 아프리카 등 광활한 지역에 살고 있다. 서기전 1 만년 경에 발생했던 농업혁명은 북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지의 야산지대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 주인공들이 셈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농업혁명 이후 그 장본인들이 계속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주인공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셈족은 시리아 광야를 고향으로 하는 아모리 족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시리아 광야, 또는 북부 아라비아 광야를 셈족의 지리적 고향으로 보고 있다.

 

1) 도시국가(City State) 시대 (서기전 4000-3000)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들은 남쪽의 수메르 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기전 4000 년경부터 이 곳에서는 우룩(Uruk), 라가쉬(Lagash), 우르(Ur), 니푸르(Nippur), 슈루팍(Shuruppak), 키쉬(Kish) 등의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2) 왕국(Kingdom)시대 (서기전 3000-2000)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가장 강력한 도시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어 일종의 왕국을 형성했으며, 대표적으로 남쪽의 수메르 왕국과 북쪽의 아카드 왕국으로 분류된다.

 

3) 제국(Empire)시대 (서기전 2000-330)
서기전 2000 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은 좀 더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서기전 1800 년경부터는 하무라비왕이 바빌론 도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고, 북쪽의 티그리스강 유역에서는 샴시-아다드(Shamshi-adad)왕이 앗수르 도시를 중심으로 앗시리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두 세력이 함께 경쟁하며 발전하다가 서기전 1100 년경부터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치하기에 이르렀으며, 서기전 612년에는 신 바빌로니아(Neo-Babylonia)가 그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서기전 539년부터는 이란지역의 페르시아가 이 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서기전 330년경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함으로써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8. 족장 시대의 성경 배경


1) 아브라함과 우르
아브라함은 70여년을 살아온 본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 데라의 만년을 위해 하란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부친을 장사지내고 75세 되던 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믿음으로 떠났다(창 11:31, 32, 12:1-5; 히 11:8).


그 때가 기원전 1875년 경으로 구속의 역사의 새 기원이 되어 이 때부터 215년 후인 기원전 1660년에는 야곱이 애굽에 들어갔고 그 후 215년 후인 기원전 1445년에는 출애굽이 있었다(갈 3:7; 출 12:40). 부조시대를 215년으로 계산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때가 75세이고(창 12:4) 그가 이삭을 낳은 때가 100세였으며(창 21:5) 이삭이 60세 되던 해에 야곱을 낳았고(창 25:26) 야곱이 애굽에 들어가 바로 앞에 선 때가 130세였다(창 47:9).

 

여기에서 산출된 햇수, 즉 25 + 60 + 130을 합하면 215년이 된다.
아브라함의 살던 도시 우르가 1853년 영국인 테일러(J. Taylor)에 의하여 '텔 엘-무카이야'(Tell el-Muqayyar)를 발굴함으로서 드러났다. 후에 대영 제국 박물관과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 합동 발굴대가 울리 박사(C. L. Woolley)의 지휘 아래 1922-1934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아브라함 시대를 밝게 보여 주었다.

 

2) 우르의 생활 모습
우르를 발굴한 결과 아브라함 시대에 해당되는 기원전 1,900년 경의 거주지에서는 해에 말린 고운 진흙 벽돌로 지은 이층집의 폐허가 드러났다. 도기로 깐 안 뜰, 물통과 대야가 놓인 로비, 붉은 도기 배수관을 가진 화장실, 화로와 맷돌이 놓인 부엌,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식 층계, 10여개의 방을 가진 이층, 이 모든 것이 현대식 문화 주택처럼 편리한 구조였다.


이러한 편리한 도시와 안락한 집에서 살던 아브라함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는 큰 믿음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하였다. 울리 박사가 지휘한 1924년의 발굴에서 지구랏(Ziggurat)이라 부르는 벽돌로 쌓은 고탑신전(高塔神殿)을 찾아냈다. 이것은 월신(月神)을 비롯한 우상을 섬기던 장소로 메소포타미아와 여러 나라의 도시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이것은 노아 홍수 직후에 시날 평지에 쌓았던 바벨탑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창 11:1-9).

 

3) 아브라함의 애굽 피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 온 후에 그 땅에 큰 기근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창 12:10).
이러한 사실을 밝혀 주는 역사적인 증거가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인 기원전 1,900년경 이집트 동부 사막 지방의 고급 관리였던 크놈헤텝(Khnumhetep)의 베니 하산에 있는 무덤 벽화에서 드러났다. 그 무덤 벽화는 영롱한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37명의 셈족 계통의 아시아 사람들이 이브샤라고 부르는 지도자를 따라 팔레스틴 쪽에서 이집트로 들어오고 있다. 크놈헤텝은 자기 생전에 겪은 인상 깊은 사실을 자신의 무덤 벽화로 남긴 것이다.


큰 강이 없는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들면 아시아 사람들은 나일강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이집트의 동부 쪽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음이 여러 기록에서도 밝혀졌다. 이 벽화가 그려진 같은 시대에 산 아브라함도 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 내려와 기근을 피했다. 거기에서 이집트 대신들과 접촉했고 바로 왕도 알현했다(창 12:10-18). 후에 족장 야곱도 아브라함처럼 기근을 피하여 일가를 이끌고 이집트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당대의 역사와 자연스럽게 조화된다(창 43장).

 

4) 함무라비 법전이 밝힌 아브라함의 가족 문제
1901년 12월과 1902년 1월 사이에 모르강(Jaques de morgan)이 지휘하는 프랑스 발굴단은 페르샤의 옛 수도 수사에서 8피트 높이에 검은 색 섬록암 입석으로 된 함무라비 법전을 발굴했다. 그것에는 39단, 3,624행으로 된 282조의 고대 법문이 새겨져 있었다.

 

바벨론의 아모리 왕이었던 함무라비(1728-1686 BC)의 법전은 바로 아브라함 시대를 전후해서 모세의 법보다 2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이 법전이 발굴됨으로써 아브라함 등 족장 시대의 사회적 배경과 후에 쓰인 모세의 율법(민법)의 역사적, 사회적, 법적 타당성이 상대적으로 입증되었다. 함무라비법 145조에 보면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면 남편은 그와 이혼하든지 낮은 신분의 다른 부인을 얻을 수 있으며, 아내 스스로가 자기 여종 중에 하나를 택하여 남편에게 첩으로 주라는 규정이 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그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준 것은 후자를 택한 당시의 사례인 것이다(창 16:1-3). 후에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준 것도 같은 사례이다(창 30:3).

 

함무라비법 제 170조에 보면 "만약 어떤 사람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그의 여종도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가 자기 생전에 종의 아들들을 '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본 부인에게서 난 아들처럼 간주하면 그가 죽은 뒤 본 부인의 아들들과 여종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규정이 있다. 이러한 규정이 있었으나 사라는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 기업을 주지 말자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이 부당한 요구와 불법적인 처사 때문에 주저하고 깊이 근심하였다(창 21:10, 11).

 

메소포타미야 여러 곳에서 기원전 2천년 안팎의 연대가 씌여진 점토 계약 문서에서 아바라마(Abarama) 아바암라암(Abaamraam) 등으로 불리우는 당대의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났다. 아브람(창 12:1), 후에 개명된 이름인 아브라함(창 17:4, 5)은 모두가 당대의 구음에 어울리는 실제적인 인명 이였음이 입증되었다.

 

5) 구술(口述) 축복
이삭의 만년에 야곱이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받기 위하여 아버지를 속였다(창 27:24-30). 속은 사실을 나중에 깨달은 이삭이 왜 에서에게도 야곱처럼 축복을 되풀이 하지 아니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지의 점토판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구술 축복은 절대 유효해서 법정에서도 효력을 가진다고 했다. 누지의 사례에서 탈미야(Tarrmiya)라는 청년이 주루리쉬타란 처녀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의 형들이 반대했다. 탈미야는 아버지가 그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고 구술로 약속한 사실을 법정에 호소하여 합법적인 허락을 얻었다.

 

6) 장자권 매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버린 이야기가 있다(창 25:27-34). 누지의 법규 가운데 장자권은 합법적으로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출토된 점토 문서의 한 예에서 장자권을 친 형제가 아니라 양자로 된 형제에게 양도한 예가 나온다. 또 다른 예에서 친 형이 양 세 마리를 받고서 동생에게 장자권을 넘겨 준 것이 나온다. 야곱은 에서가 극도로 배고픈 때를 이용하여 싼 값에 장자권을 샀다. 그 당시의 사회법으로는 합당한 것이었다.

 

7) 양자 상속법과 야곱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도망하여 떠날 때 라반이 뒤쫓아 왔다(창 31:20-23). 그는 야곱을 만나 외손자(야곱의 아들들)들을 가리키면서 그들은 자기의 자식이라고 주장했다(창 31:43). "이 자식들은 내 자식들이"라는 주장은 무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1925년 누지에서 발굴된 점토판에서 그 근거가 나타났다. 이 기록들은 그 시대(2000~1500 BC)를 포함하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누구를 양자로 하면 그는 양자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낳은 손자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했다. 누지 법에는 데릴사위가 낳은 자식들은 그 외할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외할아버지의 자식으로 되어 있어야 했다(창 31:28, 43). 라반의 주장은 그 당시 법으로는 정당한 것이었다.

 

8) 드라빔과 라헬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도망하여 나올 때 부인 라헬이 아버지의 가신상(家神像)을 훔친 사건이 있다(창 31:31-36). 드라빔은 당시의 가속신(家屬神)으로 조상과 신의 개념이 섞여진 조상신이었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드라빔을 지니는 것은 그 집의 상속권을 가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라헬이 아버지 집의 가신상인 드라빔을 들고 나온 것은 불법이었으므로 이를 숨기려고 거짓말을 했다(창 31:30-32)

 

 

9. 에블라 발굴과 성경의 진실


1) 텔 마르딕
현재까지 메소포타미아를 고대 히브리인의 문화적 발상지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잊혀진 시리아 제국의 잿더미에서 발굴된,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셈 어(語) 점토판들이 그보다 천년 전에 있었던 고대 세계를 하나하나 벗겨 주고 있다. 필시 에블라 족이 히브리인의 조상이라면, 당연히 에블라 문화는 히브리인의 모(母) 문화가 된다. 이것은 성경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며,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끼칠 영향도 엄청날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1964년 로마 대학에서 근동 지역 고고학 교수로 있던 파울로 마티에가 일단의 고고학 팀과 함께 시리아에 도착하여 고고학적 전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역, 곧 시리아의 북서 지역의 언덕(텔)을 탐사하고 있었다. 이 텔은 폐허가 된 고대의 마을을 의미한다. 동료들은 그에게 이 북서 지역의 '초승달의 옥토'에 관심을 쏟도록 자극하였다. 반면 당시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지역은 흔히 고대의 궁벽했던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24세였던 마티에는 오늘날의 알레포시 남방 30마일 지점에 위치한 가장 큰 텔을 파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텔 마르딕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시리아의 평지보다 50피트 정도로 위로 돌출되어 있는, 그 넓이가 140에이커나 되는 거대한 텔이었다. 이곳은 일찌기 4000년전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에 이르는, 아니 그 이상의 지역을 지배했던 전설적 대 제국 에블라의 수도였다. 이 젊은 이탈리아 고고학자는 이곳을 파내면서도 이곳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에블라 시의 한 왕이 세운 비문을 발견하였다. 텔 마르딕은 고대 에블라임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에블라가 고대 역사가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났다. 가장 초기의 메소포타미야 제국을 이룬 아카드인들은 쐐기 문자 점토판의 입을 빌어 그들이 에블라라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의 수많은 타 지역들이 우연한 주목을 받고 있는 동안 에블라는 큰 마을 이상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텔 마르딕을 10년에 걸쳐 팠을 때, 마티에와 그의 팀은 도자기와 도구, 그리고 보석 장신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발굴하였다. 1974년,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42개의 쐐기 문자 점토판을 캐내었다. 같은 해 그들은 두 개의 방을 발굴했는데, 그 속에는 놀랍게도 16,000개의 점토판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왕실 문서 보관소였다.


마티에 교수는 로마 대학의 언어학자인 그의 동료 기오바니 페티나토를 불렀다. 그는 점토판에 난해하게 그려진 쐐기 문자들을 판독하기 시작하였다. 1세기 이전 것을 해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 언어에 대한 지식은 꽤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페티나토는 곧 수메르어를 읽어 나갔다.

 

에블라는 수메르의 성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메르는 유프라테스 최남단 500마일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페티나토는 약 20퍼센트의 달하는 점토판을 읽고 난 후 수메르어와는 전혀 다른 쐐기 문자를 발견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 북서 지역의 셈어를 '고대 가나안어'라고 명명했다. 에블라의 서기들은 그들의 언어의 전달 매체로서 수메르에서 발달된 쐐기 문자 형식을 빌어  썼음이 틀림없다. 예를 들면 알파벳이 영어는 물론 불어와 독일어의 바탕이 되었듯이 말이다.

 

이탈리아 팀은 그들이 발견한 고고학적 지층과 점토판에서 얻어 낸 자료를 근거로 이 언어를 기원전 2400~2250년대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 성경의 최초 기록을 1000년 정도 앞서 잡았다. 더우기 그것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한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에블라에서 발견된 이름과 지명과 제도는 최초로 기록된 구약 성경의 몇 책들과 중요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마티에와 페티나토는 시리아의 북부 지역 일대와 텔 마르딕의 나머지 부분을 탐사하고, 모든 자료들을 분석하려면 2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왕실 기록물들을 번역하여 분류하고 있다. 예상은 했지만 경제와 행정에 관한 것이 가장 많았다. 에블라에서 출토된 점토판들은 식량 배급과 재고 명세서, 세금 명부, 곡물과 가축 문서들이었으며, 어떤 것은 에블라의 수출 특산물인 금속과 섬유 류에 대한 국제 무역 명세서였다. 이러한 것들은 에블라의 상업과 정치 영역을 보여 준다. 그 영역은 놀랍게도 시나이와 남서부의 이집트 국경으로부터 동부 메소포타미아와 북부의 티그리스강 상류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역사의 초기에 이와 같이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한 점토판에서는 당시 에블라의 인구가 260,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많은 사람들이 제국 전역에 흩어져 살았을 터이지만 말이다. 에블라 시는 크게 두 지역, 즉 윗 도시와 아랫 도시로 나뉘어 있었다. 윗 도시에는 정부 관리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아랫 도시에는 그 외의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참으로 이 에블라 점토판들은 성경과의 있을 법한 또는 실제적인 연관 물들을 수도 없이 제공해 준다. 그들의 신 가운데는 '일', 또는 '엘'이라고 불리는 신이 있었다. 물론 그 이름은 어떤 신에게도 붙일 수 있는 그들의 일반적인 말이었으나, '엘'은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부른 말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은 '이스라(과 겨룬 자)' '엘(하나님)'을 뜻한다. 한편 '미카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를 뜻한다. 이와 똑같은 이름들, 즉 '이스-라-엘'과 '미카-엘'이 에블라 점토판에 나와 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위한 가장 엄위한 말은 '야훼(Yahweh)'이다. 틀림없이 이 말의 어원에 해당되는 말이 에블라 점토판에 나와 있다. 에블라의 정복 군주 에브렘이 통치할 때 '야(Ya)'가 신의 이름으로서 갑자기 등장한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미가엘과 같은 이름이 그 때부터 '이스-라-웨'와 '미가-웨'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야'라는 말은 고대 이스라엘 외에서 알려진 바가 없었다고 간주되어 왔었다.

 

또한 이 점토판에는 성경 외에는 전혀 발견치 못했던 에블라 시민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담, 아브라함, 이스마엘, 에서, 사울, 그리고 다윗, 이외 앞서 언급했지만 이스라엘과 미가엘이라는 이름이 나와 있다. 물론 이들이 성경의 인물과 동일 인물은 결코 아니다. 동명이인이다.


에브럼(Ebrum) 왕의 이름을 살펴보자. 에블라어로는 그의 이름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로 읽힌다. 만일 에브-루-움(Eb-ru-um)이 옳다면, 이 이름은 창세기 10장과 11장에 나오는 히브리인의 조상이요 아브라함의 6대조가 되는 성경의 인물 에벨(Ebel)과 똑같은 이름이다. 만일 에브-리-움(Eb-ri-um)으로 읽혔다면 이 말은 '헤브류'(Heb-rew)로 번역이 된다.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이 신화적이라고 주장해 온 성경의 지명들이 나와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에블라 점토판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기록되어 있다. 이 지명은 성경 외의 다른 것에서는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파멸되자, 롯은 소알(창세기 19장)이라는 도시로 피하였다. 그런데 소알 역시 점토판에 나와 있다. 또한 살렘(멜기세덱의 성), 라기스, 므깃도, 비블로스, 시돈, 악고, 하솔, 가사, 돌, 시내, 아스다롯, 그리고 욥바도 나와 있다.

 

'우루 사리마'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과 같은 이름임에 틀림없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발굴할 때 잘 알려지게 된 우르는 그 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이 때 소수의 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고향이 북부의 어느 지역이라고 했었다. 고대에는 우르라는 도시가 둘이었음이 확실한 것 같다. 왜냐하면 에블라의 한 점토판에 의하면 '초생달 형의 옥토'인 북부 지역, 즉 하란에 우르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갈 때 에블라 근처에 있는 하란에 머물렀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고향은 아마도 남부의 우르가 아니라 북동부의 우르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구약 성경과 유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왕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에블라의 창조 기사를 보면 하늘과 땅과 태양과 달이 차례대로, 즉 말하자면 창세기와 비슷한 순서대로 창조되었다. 다른 점토판에는 폭풍의 신 엔린이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증언이 있다. 에블라의 발굴은 성경학자들에게 특히 연대학 분야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자료들을 틀림 없이 제공해 줄 것이다. 부조들은 물론 소돔과 고모라는 연대를 더 이전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얼브라이트 협회 회장인 데이비드 노엘 프리드만 교수는 이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우리는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에 대하여 학자들이 기원전 1,000년 또는 2,000년으로 추산한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기원전 3,000년에 속한 것이다. 또한 부조들, 특히 아브라함은 같은 연대로 추정되어야 한다"

 


과 제


1. 길가메슈의 서사시에 대하여 쓰라
2.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설화에 대하여 쓰라
3. 셈족의 시대별 발전 상황을 쓰라
4. 텔 마르딕에 대하여 쓰라.

 


제3장 출애굽기와 이집트

 

1. 이집트학(Egyptology)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인두스(Indus), 황하와 함께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손꼽힌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서기전 3000년경에 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고등문명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면 인두스는 서기전 2600년부터 1000년 정도 지속되다가 인도 본토로 그 중심 무대가 옮겨졌고, 황하 문명은 이보다 훨씬 더 늦은 서기전 160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자를 사용하는 고등문명의 차원에 도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 사방으로 개방되어 시대에 따라 주인공들이 여러 번 바뀐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트는 광야에 둘려 쌓여 외부와는 고립되었고 오직 나일강이라는 단일 교통로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대 이집트 3000년 역사를 통하여 단일 민족과 문화의 동질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특히 서양문명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그리스 문명의 뿌리가 다름 아닌 고대 이집트라는 사실이 하나 둘씩 밝혀지면서 이집트 문명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1) 이집트 학의 기원과 발달
이집트 학이란 고대 이집트의 언어, 문학, 지리, 역사, 고고학 등을 다루는 총체적인 ‘지역연구’이며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과 탐사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798년 5월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지중해를 통하여 인도에 이르는 영국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대규모의 함대와 3만 5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집트 정복에 나섰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의 유적들을 탐사하기 위한 학자들이 175명이나 포함되었고 그들은 자연과학자, 지리학자, 지도제작자, 건축가, 동양학자, 화가, 그리고 역사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1799년에 지중해변의 엘-라쉬드(로제타)에서 높이가 1.1미터에 달하는 현무암의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를 발견했다.
서기전 196년 3월 27일 기록된 것으로 밝혀진 이 석비에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4세의 대관식에 세워진 일종의 기념비로서 그의 공적이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 상형문자의 흘림체인 민용 문자(demotic), 그리고 그리스어(greek)등 세 부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석비는 프랑스 군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1801년에는 영국의 전리품이 되었지만 이 석비의 탁본을 참고로 프랑스 학자들이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한편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동행했던 탐사단은 프랑스에 돌아와서 약 20년(1809-1828)에 걸쳐 그 결과를 이집트 묘사(Descrption de l'Egypte)라는 제목으로 모두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전집으로 편찬하였다. 1822년 프랑스의 샹폴리옹(Jean François Champollion)이 로제타 석비에 나타난 이집트 상형문자 부분의 카르투쉬 안의 왕의 이름인 프톨레마이오스와 다른 비문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들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중복되는 알파벳의 음가를 하나씩 발견해내면서 비로소 서기 395년 이후 잊혀졌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1400여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됐다.

 

* 이집트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이름들: 케멧트, 미쯔라임, 이집트, 콥트의 어원:

 

(1) 케멧트(Km.t)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케멧트(Km.t), 즉 “검은 땅”이라고만 불렀다. 검은 땅이란 다름 아닌 나일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충적토를 말하며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검은 색은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검은 땅 케멧트는 “붉은 땅”을 의미하는 데쉬렛트(Dšr.t)와는 대조를 이루는데 데쉬렛트는 이집트의 광야가 주로 누런색과 갈색을 띤 풍화된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 미쯔라임(םי?צ?)
오늘날 아랍어로 이집트를 “미쎄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같은 셈어 계열에 속하는 성경 히브리어의 미쩨르(ר??)와 연관이 있다. 히브리어로 미쯔라임은 “두 개의 미쩨르”, 즉 “두개의 이집트”를 의미하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북쪽의 하 이집트와 남쪽의 상 이집트를 한꺼번에 지칭하기 때문이다.

 

(3) 이집트(Egypt)
고왕국 시대(서기전 2575-2134)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수도인 멤피스를 그 곳의 신전 이름을 따라 “훗트-카-프타(Hut-ka-Ptah)”, 즉 “프타의 영혼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신왕국 시대에는 멤피스를 “히-카-프타(Hi-ka-Ptah)”로 불렀고, 서기전 14세기 아멘호텝 3세와 4세의 외교 문서인 아마르나 편지에서는 멤피스가 아카드어(Akkadian)로 “히-쿠-우프-타(Hi-ku-up-ta)”로 기록되고 있다. 서기전 8세기경 이집트가 그리스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어로 “에-기-프토스(Αι-γυ-πτος)”로 발음되었고, 라틴어로 에깁투스(Aegyptus), 즉, 이집트(Egypt)로 발전되었다.
훗트-카-프타 --> 히-카-프타 -->히-쿠-우프-타-->에-기-프토스-->에깁투스-->이집트

 

(4) 콥트(Copt)
오늘날 콥트(Copt)는 이집트의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기독교인들과 이집트 기독교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명칭은 이집트의 라틴어식 이름인 에깁투스의 아랍어식 발음에서 비롯되었다.
서기 640년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이슬람 세력의 무슬림들은 이집트를 점령하여 카이로를 건설했고, 그들은 이집트를 “다르-알-깁트(Dar al-Gibt)”, 즉 “이집트인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점령 당시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의 한 식민지로서 국교가 기독교였던 만큼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깁트(Gibt)”로 부르게 되었으며 나아가 “콥트(Copt)”로 발전되었다.  후-카-프타-->에깁투스-->다르-알-깁트-->깁트-->콥트

 

(5) 나일강
이집트는 북부 아프리카의 거대한 광야에 자리 잡고 있어서 원래는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지역이었는데 중부 아프리카 고원지대에서 북쪽의 지중해로 흐르는 나일 강 때문에 그 강변을 따라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나일강은 고대 이집트어로는 이아테루(I3tr.w)라고 불렸는데 그리스 시대에 들어와 네일로스(Νειλος)로 불리며 오늘날 나일강의 어원이 되었다. 나일강은 전체 길이가 67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이다.

 

나일강의 전체 중 오직 1/5만이 이집트 지역을 통과한다. 나일강의 배수유역은 30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나일강의 원류는 열대 우림 지역으로서 비가 많이 오지만 이집트는 거의 비가 오지 않는 광야 지역이다. 오늘날에는 아스완 댐의 영향으로 홍수기인 7-8월을 제하고는 연중 일정한 양의 물이 흐르지만 그 이전에는 갈수기에는 초당 방류량이 120입방미터, 그리고 홍수기인 7-8월에는 약 75배인 초당 9,000입방미터에 달하는 등 연중 수량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졌다. 또한 범람 지역과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의 토양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 결과 연평균 1밀리미터의 충적토가 쌓인 것으로 드러났다.

 

나일강의 물은 7월 초부터 서서히 불어나서 8월 중순 최고 수위에 달했다가 그 후 줄어들기 시작하여 11월 말부터 갈수기에 이르면 1-2월에는 최저 수위에 도달하게 된다. 나일강은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지이자, 해마다 7-10월의 범람으로 새로운 흙을 실어다 주고, 나아가 유일한 교통로로서 이집트 전역을 통일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일강은 지중해로 흘러 내려오면서 해변에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여 넓은 농경지에서 일찍부터 농경 및 목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대부분이 광야이지만 나일강 변과 특히 강 하구의 삼각주 지역에는 해마다 여름철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토로 기름진 경작지를 형성한다.

 

(6) 상 이집트(Upper Egypt)와 하 이집트(Lower Egypt)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강 유역을 따라 전체 국토를 양분했는데, 상 이집트가 나일강 상류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 이집트는 지중해 쪽의 삼각주 지방을 일컫는다. 이 두 지역의 경계는 현재 카이로 남쪽 20 킬로미터 지점의 멤피스(Memphis)이며, 두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집트 고왕국 시대부터 멤피스는 정치적, 종교적 수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두 개의 이집트 개념은 고대 히브리어에서 이집트를 미쯔라임(םירצמ), 즉 두 개의 미쩨르(רצמ = 이집트)로 표기한데서도 그 유래를 잘 찾아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상 이집트는 22개 그리고 하 이집트는 20개의 주(nome)로 구분되어 있으며 멤피스는 하 이집트의 첫번째 주에 속하였다. 서기전 3000년경 상 이집트 세력이 하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통일 이집트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 후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상징물을 이용하여 그들의 왕권을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부조와 조각들을 통해서 밝혀진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의 상징들은 다음과 같다.


상징동물
상징식물
왕명상징
상징왕관
수호신
상 이집트
독수리
연꽃
등심초(sedge)
흰 왕관
셋트(Seth)
하 이집트
코브라
파피루스
꿀벌
붉은왕관
호루스(Horus)


(7) 하 이집트(Lower Egypt) = 나일 삼각주
이집트의 농경지는 삼각주와 나일강 변을 따라 양쪽으로 띠 모양으로 형성되었으며 이 면적은 전체 100만 평방 킬로미터 중에서 3퍼센트의 땅인데 오늘날 이 곳에 전체 인구의 96퍼센트가 나일강 변에 거주하고 있다. 삼각주는 전체 면적이 22,000평방 킬로미터이며 이 지역은 흙과 물과 태양이 일년 내내 충분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농작물도 경작이 가능한 낙원 같은 곳이다.

 

삼각주 지방의 중요한 고대 도시들의 유적은 해마다 나일강의 끊임없는 범람으로 인한 퇴적층의 증가와 농경지 개발로 대부분 파괴되거나 땅속에 묻혀버렸다. 상 이집트와는 달리 이 곳에는 석재가 귀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흙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잘 보존되지 못한 점도 있다. 오늘날까지 약 20여 군데의 유적지에서 이집트 왕조 시대와 그리스-로마 시대에 건설된 도시들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2) 이집트 역사의 시대 구분
 (1) 초기 왕조 시대 (Early Dynastic Period): 제 1-3 왕조 (서기전 2920-2575)
 (2) 고왕국 시대 (Old Kingdom): 제 4-6 왕조 (서기전 2575-2134)
 (3) 제 1 중간기 (First Intermediate Period): 제 9-11 왕조 (서기전 2134-2040)
 (4) 중왕국 시대 (Middle Kingdom): 제 11-13 왕조 (서기전 2040-1650)
 (5) 제 2 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 제 14-17 왕조 (서기전 1650-1540)
 (6) 신왕국 시대 (New Kingdom): 제 18-20 왕조 (서기전 1540-1070)
 (7) 제 3 중간기 (Third Intermediate Period): 제 21-24 왕조 (서기전 1070-712)
 (8) 후시대 (Later Period): 제 25-30 왕조 (서기전 712-332)
 (9) 그리스-로마 시대 (서기전 332-서기 395)

 

 

2. 힉소스 민족과 히브리 족장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집트가 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피난처로 제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었을 때 일년 내내 물이 풍성한 이집트로 내려가서 도움을 요청했고 신약시대 예수의 가족은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노예로 팔려갔다가 총리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요셉이야말로 성경의 이집트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세 이후 이집트를 여행했던 유럽 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요셉의 곡식창고’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저지대인 파윰 오아시스의 호수로 흐르는 하천을 아랍어로 ‘바흐르 유셉’, 즉 ‘요셉 하천’이라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했다 기 보다는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했다. 이 도시의 아피온(Apion)이라 불리는 한 이집트인은 ‘유대인들에 대항함’이라는 글을 통하여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모셔다 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하여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고 그는 이 글에서 서기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 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편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라는 인물은 서기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그리스 시대까지 자기 나라의 역사를 모두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가였다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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