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 兵士 묘역 戰友 곁에 묻히다

베트남전 당시 초대 주월사령관을 지낸 고(故) 채명신 예비역 중장이 생전 유언대로 28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베트남전 참전용사 병사 묘역에 안장됐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죽어서도 참군인, 병사 곁에 잠들다.’

28일 오후 베트남전 당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의 유골 운구 행렬이 안장식이 열리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병사묘역에 도착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모여든 500여 명의 조문객은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연신 눈물을 흘렸다.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하관(下棺)이 진행됐고, ‘베트남전의 영웅’이자 ‘불사조(不死鳥)’로 불렸던 고인은 그렇게 영원한 안식처에서 잠들었다.

고인의 묘지는 베트남전 당시 채 장군과 동고동락한 고 장상철 상병의 묘지 앞에 마련됐다. ‘장군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죽어서도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과 함께하겠다’는 고인의 숭고한 뜻을 받든 결과다. 이곳은 고인이 파월참전자회장을 맡으며 베트남전에서 산화한 전우들을 추모해온 장소. 병사묘역의 면적(3.3m²)은 장군묘역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장군묘역에 설치되는 ‘가로 106cm, 세로 91cm, 높이 15cm’의 단(壇)도 설치되지 않았다. 묘역 앞 묘비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높이 76cm, 폭 30cm, 두께 13cm’의 화강암으로 세워졌다.

‘육군 중장 채명신의 묘’라고 적혀 있는 묘비 앞에 헌화하려는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그와의 소중한 인연을 간직한 이들은 생전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인을 추모했다. 박희모 6·25참전유공자회장은 “고인은 부하 사랑하기를 당신의 가족보다 더 사랑하고 부하들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훌륭한 지휘관이었다”고 회고했다.

채명신 장군의 영결식이 28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됐다. 가수 패티 김 씨가 조가를 부르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안장식에 앞서 이날 오전에는 고인의 영결식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거행됐다. 영결식에는 권오성 육군참모총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세환 재향군인회 회장 등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과 조사 및 추념사, 헌화, 운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베트남전 당시 자비를 털어 위문 공연을 간 것을 계기로 고인과 40여 년 인연을 맺어온 가수 패티 김 씨가 조가(弔歌)로 찬송가인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불렀다. 고인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권 총장은 조사(弔詞)에서 “‘불멸의 군인’, ‘영원한 지휘관’ 채명신 장군님을 깊이 흠모한다”며 “장군은 오로지 위국헌신의 일념으로 국가와 군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시대의 거인이었다”고 추모했다. 이어 “장군의 뜨거운 나라 사랑의 마음과 군인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겠다”며 “큰 가르침을 바탕으로 국가방위의 소명을 이어가고 정예화된 선진강군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베트남전 영웅 채명신 장군 

             

 

채명신 한국전쟁 당시 20대 나이에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1965년 육군작전참모부장 시절 주월한국군 초대사령관에 임명돼 4년8개월간 지휘했다. 당시 주월 미군으로부터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하고 태권도를 이용한 심리전과 대대급 소규모 작전으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 69년 이세호 장군에게 사령관직을 물려주고 귀국한 그는 군인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지만 3년 뒤 대장 진급이 좌절되며 2군사령관(중장)으로 전역했다. 1926년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일하다 47년 월남한 뒤 육사 5기로 군 생활에 들어섰다. 5ㆍ16 당시 5사단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동대문까지 진출해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전역 후 스웨덴·그리스·브라질대사를 지냈다. 81년 공직에서 물러난 뒤 미국 하버드대 등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하다 88년 귀국했다. 베트남전참전동지회와 6ㆍ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지냈다.

 『베트남전쟁과 나』 『사선을 넘고 넘어』 등의 저서가 있다.


지난달 30일. 베트남전이 종식된 지 38년이 되던 날이다. 6·25와 베트남전의 영웅 채명신(87·사진) 장군을 만났다. 24세 나이에 백골병단을 이끌고 북한 땅에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39세에 주월한국군사령관에 임명돼 국내 최초의 파병전쟁을 지휘했다. 한 번 겪기도 힘든 전쟁을 두 번이나 지휘한 백전노장이다. 하지만 그는 전쟁광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다. “전쟁은 가장 잔혹하고 가장 비극적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전쟁을 혐오한다. 하지만 안보라는 버팀목 없이 부르짖는 평화주의는 오히려 전쟁을 부추긴다”는 그의 말엔 전쟁의 참혹성을 뼛속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는 “북한 핵에 맞서 핵무장을 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가 없다”며 “북한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전시작전권 전환은 연기돼야 하고 한미연합사는 존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이촌동 채 장군의 자택에서 7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는 장군이 20대 후반 시절 만난 경북 영덕 재력가 집안 출신의 미녀 문정인(부인)씨와의 추억담으로 시작됐다.

-부인이 이화여대 홈커밍 퀸이었다. 결혼한 사연이 궁금하다.
“20대 후반 대령 시절 만났는데 한눈에 반해 엄청나게 쫓아 다녔다. 장인이 납북돼 홀몸이 된 장모는 딸을 내게 줄지 결정을 내리시지 못했다. 답답해진 나는 경북 영덕의 처갓집 어른을 찾아가 큰절을 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고 어머니는 이북에 있다. 내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지만 정인이(부인)를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이 쾌히 승낙하면서 장모를 설득해 결혼할 수 있었다. 나는 장모를 아주 존경한다.”

-장모를 존경하는 이유는.
“당시 대령 월급이 쌀 사고 콩나물국 먹으면 바닥나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장모가 나 몰래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태주며 ‘남편한테 돈 얘기 하지 말라. 그러면 남편은 돈의 노예가 되고, 부패한 사람이 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동기생 김익권 장군이 ‘네 장모 같은 분이 있다면 도시락을 열두 개 싸 들고 다니며 청혼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오늘날 한국 여성들이 우리 장모 같았으면 좋겠다.”

-부인은 어떤 분인가.
“아내도 장모에게 바른 교육을 받았다. 아내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다. 50년 가까이 당뇨병을 앓았지만 합병증이 하나도 없는 건 전적으로 아내 덕이다. 아내는 매일 아침 6시30분이면 내 혈당을 조사하고 먹거리를 철저히 챙겨준다. 아내에게 감사한다.”

-6·25가 터지기 전 북한에서 김책과 김일성을 만났다는데.
“소련군 소좌였던 김책의 주선으로 46년 2월 8일 평양학원 개원식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은 ‘채 동무, 사람이 필요한데 평양에서 함께 일합시다’라고 말했다. 나는 모셔야 할 홀어머니가 있었고, 그와 생각도 맞지 않아 응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호남형이었지만 덧니가 심했다. 나중에 치아를 교정했다고 한다.”

-왜 월남했나.
“45년 8월 해방과 함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기계와 쌀·잡곡을 전부 소련으로 실어 갔다. 젊은이들이 반발하면서 그해 말 신의주에서 처음 학생시위가 터졌다. 소련군은 학생들을 기관총으로 갈겼고 많은 사람이 숨졌다. 그때 도망친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을 조직해 좌익과 싸웠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목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이듬해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양욱 목사가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되면서 기독교를 철저히 부수기 시작했다. 탈북을 결심했다.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삼팔선을 넘었다. 그런데 남한에 오니 여기서도 서북청년단과 좌익이 싸우고 죽이는 게 반복됐다. 조선의 장래는 총칼이 난무하고 피를 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사 5기(당시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응시해 합격했다.”

-6·25를 겪으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49년부터 삼팔선 일대에서 개시된 게릴라전이다. 200여 명의 중대를 이끌고 매복과 기습으로 전공을 쌓아 대대장으로 발령 났다. 그러자 부대원들이 나랑 헤어질 수 없다고 붙잡았다. 상부에 ‘대원들과 함께 있고 싶으니 중대를 대대로 해 달라’고 청했는데 받아들여져 특별 중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25가 터지면서 인민군 복장을 한 ‘백골병단’을 만들어 사선을 넘나들었다. 국군의 체면과 기개를 위해 이북 후방에 침투하는 유격대를 직접 조직한 거다.”

-‘51년 1월 1일 오후 2시35분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그때 황해도 곡산에서 작전 중이었다. ‘정초에 굶으면 1년을 굶는다’는 말 때문에 사전 정찰 없이 (식량을 구하러) 민가에 들어갔는데 주민의 밀고로 인민군에 포위됐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35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우리가 남한 군인인 줄 아느냐? 위장한 거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밀고자가 인민군들에게 우리가 국군이라고 일렀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부하들에게 ‘손들고 나가 항복하라’고 명령한 뒤 총을 머리에 겨눴다. 부하들에게 ‘하느님의 가호를 빈다’고 말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소리가 났지만 방아쇠가 터지지 않았다. 다시 일발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부하 정영식이 나를 붙잡으며 ‘하느님이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라고 외쳤다. ‘하느님의 목소리’란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빨리 나오라우’ 하며 들이닥치는 적병에게 1탄,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2탄, 따발총을 든 다른 적병에게 3탄을 발사해 모두 세 명을 죽이고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그 집에 있던 젊은 아낙과 어린이는 인민군이 쏜 따발총에 즉사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던 길원팔 노동당 제2비서를 생포한 일화가 유명한데.
“백골병단으로 활동하던 중 인제에서 길원팔을 생포했다. 김일성 작전명령서와 부대 배치도 등 중요 정보도 포획했다. 그런데 길원팔과 얘기해 보니 일본 스가모 고등사범을 나온, 아주 똑똑한 군인이었다. ‘너를 죽이기 아깝다. 너희가 말하는 인민을 위해 진짜 일을 해 보자’고 전향을 권유했다. 하지만 길원팔은 ‘어떻게 너 같은 인물이 썩어빠진 이승만 정권에 충성을 바쳐 게릴라전을 하는지 모르겠다. 네 손에 죽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일성이 자신에게 준 권총으로 자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13세 된 남녀 아이를 남한으로 데려가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총알 한 방을 장전한 권총을 놓고 방 밖으로 나왔다. 길원팔이 그 총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인물됨을 믿었다. 잠시 후 방 안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길원팔을 묻어준 뒤 부하들에게 ‘비록 적이지만 훌륭한 군인이다’고 얘기하고 ‘받들어총’을 시켰다. 그때 데리고 온 아이 2명 중 여자는 숨지고 남자는 살아서 서울대학교까지 공부하도록 도와줬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50년대 후반 백골병단 생존자들과 강릉을 찾았다. 당시 9사단 참모장이 박정희 대령이었다. 박 대령은 ‘죽을 줄 알면서도 이북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하니 대단하다’며 고깃집으로 데려가 위로해 주었다. 피 묻은 내 점퍼를 자신의 털 달린 좋은 점퍼와 바꿔주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5·16에 참여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맡게 됐다.”

-마음만 먹으면 더 높은 요직에 등용될 위치였는데.
“난 내 약점을 잘 안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정치에 필요한 돈과 조직도 없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월남전에 반대했는데.
“전쟁에서 이기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고 지도자가 사심이 없어야 한다. 월맹의 호찌민은 자주독립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월맹·월남 국민 모두에게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반면 월남은 썩었다. 외국이 도와줘도 국민이 따라오지 않는 월남은 진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월남전에 참전한 이유는.
“현실을 직시했다. 월남전이 격화되면 미국은 우리 서부전선의 주한미군 2·7사단 7만 명을 빼갈 것으로 봤다. 당시는 김일성의 군대가 우리보다 강했을 때다. 미군이 2개 사단을 빼간 뒤 김일성이 밀고 내려오면 승산이 없었다. 월남에 파병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조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파병은 정당했다. 또 파병을 통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경제가 일어선 걸 잊어선 안 된다.”

-월남에서 미군 휘하가 아닌 독자 지휘권을 관철했다.
“박 대통령은 미군의 지휘를 받는 게 좋다고 판단했지만 나는 반대했다. ‘사령관에 임명했으니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미군과의 회의석상에서 ‘이 전쟁은 군사전쟁이 아니고 정치전쟁이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 석 달 반 동안 부락 하나 점령 못하고 있다. 다른 대응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군의 지휘를 받지 않는 한국군은 얼굴도 보지 않겠다’던 라슨 장군이 ‘당신 말이 맞다”고 해 독자 지휘권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맹호부대 주둔 지역에 태권도를 보급해 심리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1. 65년 주월한국군사령관에 임명된 채명신 장군(왼쪽)이 베트남 파병길에 오른 병사를 격려하고 있다.

2. 72년 전역한 채명신 장군(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주스웨덴 대사 신임장을 받고 있다.

 

 

-69년 월남 전역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했지만 72년 대장 진급에 실패했다. 유신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내가 대통령이라도 나처럼 직언하는 사람은 피곤해서 참모총장으로 안 쓸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내 건의를 다 들어줬지만 한 가지만 예외였다. 장기집권 반대가 그것이었다. 72년 초 대구에서 박 대통령이 ‘한 잔하자’고 해 만났다. 박 대통령은 ‘채 장군, 김대중에게 정권을 맡기면 나라가 잘될까?’라고 물었다. 짐작되는 바가 있어 ‘각하가 스스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채 장군이 정치를 뭘 안다고…’라고 말했다. 나는 ‘3선 개헌 때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눈물까지 흘리지 않았느냐’고 받아쳤다. 두 달 뒤 대구에서 다시 박 대통령을 만났다. ‘채 장군, 아무리 생각해도 집권을 연장해야겠어. 욕을 먹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메야겠어’라고 하더라. 그래서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채 장군은 기독교 신자지… 그 말이 맞아’라고 했다. 나는 ‘장기집권 하지 말라. 루스벨트가 4선을 한 건 국민이 하라고 해서 한 거다. 장기집권은 각하를 죽이는 길이다’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더라. 얼마 뒤 중장 계급 정년일인 5월 30일이 되자 유재홍 국방장관이 나를 불러 박 대통령의 친필서류를 보여줬다. ‘채명신 중장 예비역 편입’이라 써 있더라. 만감이 교차했다. 전역식을 마치고 정문을 나서는데 도열한 장병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됐다. 그해 스웨덴 대사로 부임했고 이어서 그리스·브라질 대사를 했다. 79년10월 26일 브라질에서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었다. 아내가 ‘부부로 산 57년 동안 당신이 그렇게 슬퍼한 날은 없었다’고 하더라. 박 대통령에게 ‘각하를 죽이는 길’이라 말한 게 너무나 가슴 아팠다. 브라질 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북한 핵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북핵을 겁낼 필요 없다. 북한이 핵을 쓰면 북한은 없어진다. 북핵에 맞서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럼 주변의 모든 나라가 핵을 가지려 할 것이고 외국기업들은 다 나가버릴 거다. 북한은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 다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우리가 단독으로 제어할 능력은 부족하다. 북한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전시작전권 전환은 연기돼야 하고, 한미연합사도 존치돼야 한다.”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월남전 당시 장병들이 김치를 먹고 싶어 했다. 그런데 고국에서 온 김치 깡통 뚜껑을 따자 핏물이 나왔다. 기술이 없어서 녹이 슬었던 거다. 나는 ‘여러분이 이걸 안 먹으면 2주 뒤 일본 김치가 도착할 것이고, 김치 값은 일본 사람 손에 간다’고 했다. 그러자 장병들이 ‘핏물이라도 먹겠다. 고국의 부모형제에게 돈이 가게 해 달라’고 했다. 나도 울고 장병들도 다 울었다. 박 대통령께 이 사연을 적어 보냈다. 그러자 기술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질 좋은 김치 통조림과 군화·군복이 공수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애국심으로 일어선 민족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모든 게 만족스럽진 않다. 하지만 권력과 돈이 생기는 자리에 친인척을 쓰지 않는 노력은 평가해 줘야 한다. 대통령이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이) 도와줘야 한다. 또 박 대통령은 월남전 전사자와 부상자, 고엽제 피해자들을 지원해 주면 좋겠다. 호주는 월남전 참전용사에게 매달 2200달러를 준다. 우리도 매달 그 절반인 120만원은 줘야 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적에 포위돼 자결을 결심한 적이 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때마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따랐다. ‘살려고 발버둥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란 신념이 그것이다. 군복을 벗은 오늘에도 그런 마음으로 산다. 후배 군인들도 나라를 사랑한다는 얘기를 입으로 백번 해봐야 소용없다. 애국을 행동으로 실천하라.”

장군 유언 따라 병사묘역에

 

1966년 7월 20일자 중앙일보 1면에 게재된 고 채명신 장군의 사진(위). ‘도착 즉시 국립묘지로’라는 제목 아래 ‘파월전몰장병영령 앞에 눈물을 글썽이며 헌화하는 채명신 장군’이라는 사진설명이 붙었다. 사진 옆 기사에는 ‘20일 귀국한 채명신 주월남 한국군사령관은 이날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방문, 월남전 현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중장으로 승진한 채 장군에게 새 계급장을 달아주었다’라고 씌어있다. 당시 채 장군은 청와대로 가기에 앞서 국립묘지(현 서울현충원)를 먼저 방문해 참배했다. ‘죽어서도 월남전 참전 전우들과 함께하겠다’던 채 장군은 오늘 이곳 병사묘역(아래)에 묻힌다. [김성룡 기자]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2번 병사묘역. 1033명의 병사가 잠들어 있다. 이 중 971기가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한 병사의 묘다.

28일 오후 3시 이곳에 채명신(1926∼2013) 예비역 중장이 묻힌다. 고인은 1965년부터 69년까지 초대 주월(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을 지냈다. 병사묘역에 예비역 장군이 묻히는 건 건군 사상 최초다. 장군묘역이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가는 이유는 25일 별세한 고인의 유지에 따른 것이다.

이날 서울 아산병원 빈소에서 만난 부인 문정인(84) 여사는 “평소에도 남편은 입버릇처럼 집(용산구 동부이촌동)에서 한강 건너 동작동을 가리키며 ‘여보, 나 말이야 전우들과 함께 묻혀야겠어’라고 말해 왔다”고 전했다. 유가족들은 비석 뒷면에 ‘나 채명신은 전우를 사랑해 이곳에 묻혔다’는 글귀를 새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 생략하고 담담하게 여백으로 남겨놓는 방안도 논의했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묘지와 비석 크기는 여느 병사들과 똑같이 만들어진다.

서울현충원에 따르면 고인은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2번 묘역 맨 앞 열의 3.3㎡(1평)에 안장된다. 국가보훈처 국립묘지정책과 김흥남 과장은 “고인의 비석(’육군 중장 채명신의 묘’)도 병사들과 똑같이 높이 76㎝, 폭 30㎝, 두께 13㎝의 화강암으로 세워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장군묘역으로 간다면 26.4㎡(8평)의 묘지 공간을 할당받고 그 위에 봉분을 올릴 수도 있었다. 비석도 병사보다 큰 높이 91㎝, 폭 36㎝, 두께 13㎝짜리다.
 
병사들 옆에 묻히려 했던 이런 고인의 뜻은 하마터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뻔했다.

오늘 서울현충원 안장 … 병사묘역에 장군 처음

문정인 여사는 채명신 장군이 별세하기 전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가 고인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군인과 군무원의 묘역을 장군묘역·장교묘역·병사묘역으로 구분한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13조)’ 때문에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에 문 여사는 고인이 별세하기 3일 전인 지난 22일 고인의 뜻을 담은 편지를 써서 청와대에 전달했다. 결국 27일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분의 유지를 따르는 것이 예의라고 박근혜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며 병사묘역에 안장하겠다는 뜻을 알려왔다. 고인은 박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소장이 61년 5·16을 일으켰을 때는 5사단장으로 동참했으나 이후 유신체제에는 반대했다.

이에 따라 육군은 28일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의 주관(육군장)으로 영결식을 치른다. 국립서울현충원 이순남 주무관은 “동작동의 장군묘역에 355명의 장군이 영면하면서 공간이 남지 않 았다”며 “대전의 장군묘역에는 아직도 302기의 여유공간이 있는데도 고인은 전우들의 묘역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고인이 장군에게 주어진 특전을 마다하고 병사들 곁으로 가면서 보여준 ‘전우애’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실천에 대해 군 안팎에서 반향이 일고 있다. 김지덕 육군본부 인사사령부 중령은 “6·25와 베트남 전쟁의 영웅인 고인이 부하 사랑을 끝까지 솔선수범하면서 후배 장교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신동규(예비역 소령) 재향군인회 부장도 “생전에는 국가와 영토를 지켰고, 죽어서는 국토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 주겠다는 선배 군인의 결단이 신선한 충격”이라고 했다.

신명철 서울남부 보훈지청장은 “채 장군은 마지막까지 참군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글=장세정·정원엽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