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청교도 혁명-올리버 크롬웰   

 

영국의 정치가로서 탁월한 재능과 함께 경건한 칼뱅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강인한 성품을 갖춘 인물로 영국내란(청교도혁명 : 국왕 찰스1세의 횡포에 맞서 의회파의 청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왕과 전쟁을 벌인 사건)에서 국왕 찰스 1세에 맞선 의회진영의 유력한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튜어트 왕가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653~58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괄한 공화국의 호국경(호민관이라고도 함)을 지냈다. 호국경으로 있으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쇠퇴의 길에 들어섰던 영국을 재차 유럽 열강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근대 유럽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칼뱅주의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종교적 관용의 가치에 대해서도 깊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와 함께 국내외적으로 그가 거둔 승리는 영국과 북아메리카 모두에서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확대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로써 최근까지도 정치ㆍ사회 생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599년 4월 25일 잉글랜드 동부 헌팅던에서 로버트 크롬웰과 엘리자베스 스튜어드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의회의원을 지냈으며 지주와 치안판사로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아버지는 그가 18세 때 죽었으나 어머니는 89세까지 생존했다.

 

그는 시골에서 그래머 스쿨(초등학교)에 다니다 이후 1년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와 누이들을 돌보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 귀향했으나 한때 런던에 있는 링컨스인 법학원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곳에는 지방 젠트리들이 모여들어 어설프게 법률공부를 하곤 했었다. 1620년 8월 런던 시의 상인 제임스 부처 경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5남 4녀를 두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헨리 8세 통치기간의 수도원 해체로 꽤 득을 본 프로테스탄트 가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크롬웰의 성장과정에서 종교적인 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헌팅던에서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의 학장은 모두 열렬한 칼뱅주의자였으며 반(反)가톨릭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젊은시절 크롬웰은 눈에 띄게 공부에 열중하는 편은 아니었으며 사냥과 같은 야외 운동을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성서를 탐독했으며 월터 롤리 경이 쓴 <세계사(The History of the World)>를 읽고 극찬했다. 그는 스승들로부터, 그리고 도서를 통하여 지상에서 인간의 죄는 징벌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신은 성령을 통해 선택받은 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 나이의 결혼생활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으며 고향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심을 쏟았다.

 

39세 때 외삼촌으로부터 엘리에 있는 토지를 물려받을 때까지는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다른 하층 젠트리처럼 그역시 흉작에 따른 피해와 종류도 가지각색인 세금 및 부과금과 악전고투해야 했다. 1628년 헌팅던 선거구 출신으로 의회에 진출했으나 이듬해 의회는 국왕 찰스 1세에 의해 해산되고 11년간 1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의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 크롬웰과 같은 시골 젠트리들에게는 불만이 쌓여갔다.

 

크롬웰 가문에는 이같이 불만에 찬 젠트리들이 상당수 있었다. 일례로 버킹엄셔 출신으로 부유한 지방지주였던 좀 햄던은 건함세(建艦稅) 부과에 반발해 국왕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바로 크롬웰과 사촌간이었다. 1640년 봄 케임브리지 선거구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서머싯 출신의 노련한 정치가로 군주제에 아주 비판적이었던 좀 핌이 이끄는 많은 친구와 어울리게 되었다. 그런데 구성된 지 3주 만에 해산된 이 단기의회는 거의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크롬웰은 다시 케임브리지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1653년까지 지속되는 이른바 장기의회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공직활동에 들어갔다.

 

1628~29년 의회에서 활동하면서 크롬웰은 이미 열렬하고 다소 투박한 청교도로 알려져 있었으며 찰스 1세의 주교들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도 개인이 기도를 통해 직접 신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있으며 성직자의 주된 임무는 설교를 통해 속인들을 감화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순회 설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 일부를 내놓았으며 예배의식과 국교회의 권위를 중시하던 고교회파 지도자인 엘리의 지방주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크롬웰은 국교에 대해 결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영국교회의 전체 성직위계조직에 대해서는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성직감독제도의 폐지를 주창했으며 신자들 스스로가 목회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1641년 11월 존 핌과 그의 동료들이 주교들을 비난하고 성직자의 타락상을 지적하는 한편 의회주권 확립을 요구하는 ‘대간의서(大諫議書)’를 제출하자 크롬웰은 하원이 대간의서를 통과시키지 않을 경우 자신이 가진 전재산을 “다음날 아침까지 모두 처분하고 다시는 잉글랜드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간의서는 찰스 1세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왕과 의회내 비판세력 간의 괴리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1개월 뒤 찰스 1세는 자신의 반대세력 가운데 5명을 반역혐의로 체포하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는데 당시 크롬웰은 여기에 포함될 만큼 두각을 나타낸 존재는 아니었다. 반대파 체포가 실패하자 1642년 찰스 1세는 군사를 일으키고자 런던을 떠나 요크로 도주했다. 의회는 국왕 대권의 포기와 의회 주권을 요구하였으나 왕은 이를 거부하였고 내란이 일어났다.

 

이때 크롬웰은 거리낌없이 말하는 청교도로서뿐만 아니라 조직력과 지도력을 갖춘 실제적인 인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 7월 그는 케임브리지 선거구민들이 방위조직을 구성하고 무장할 수 있도록 하원의 승인을 얻어냈으며 내란이 발발하자 곧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같은 해 10월 23일 에지힐 전투의 마무리 단계에서 크롬웰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크롬웰은 1643년에 군사조직가ㆍ전사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처음부터 그는 의회군은 신중히 선발되어야 하며 적절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충성심과 훌륭한 몸가짐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해 2월 대령에 임명되어 일류급 기병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군대에 좋은 대우와 함께 정기급료 지급을 요구하는 한편 훈련을 엄격하게 실시하고 군기를 바로 잡아 나갔다. 기병연대를 성공적으로 훈련시킨 결과 크롬웰은 전투를 치르고 나서도 이들을 통제해 재조직해낼 수 있었다. 이같은 점이 바로 전투지휘관으로서의 그의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43년 줄곧 자신이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동부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자타가 공인하는 의회파의 아성이 되었다. 7월 28일 링컨셔의 게인즈버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같은 날 엘리 섬의 지사로 임명되었는데 이곳은 왕당파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요새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의회군의 토머스 페어팩스 장군과 함께 전투를 수행했던 크롬웰은 링컨셔 윈스비에서 왕당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며 이후 노팅엄셔의 뉴어크를 포위했다.

 

이에 따라 크롬웰은 이같은 승리에 흡족해하는 하원을 설득해 새로운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동부지역을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진으로 공격을 펴기 위한 군대였다.

 

이러한 성격의 군대는 1644년초 맨체스터 백작 2세인 에드워드 몬터규의 지휘하에 편성되었다. 하원에 모습을 나타낸 크롬웰은 맨체스터 백작을 칭찬하는 한편으로 해이해져 있다고 비난했다. 크롬웰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다른 장교들을 비난하는 데 대해 하원의원 모두가 찬동한 것은 아니지만 크롬웰의 동료의원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1644년 크롬웰은 중장계급으로 맨체스터 백작 다음 서열의 지휘관에 임명되었으며 하루 5파운드의 급료를 지급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이 체결된 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양왕국 위원에 임명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내란기간중 총괄적인 전략을 관장하는 역할을 했다. 1644년 5월 맨체스터 백작의 군대가 링컨으로 진격한 데 이어 북쪽으로 나아가 스코틀랜드 군 및 요크셔 의회파 세력과 합류해 요크를 포위공격했다. 왕당파 군대의 총사령관 루퍼트 공은 포위망을 뚫었으나 7월 2일 마스터 무어 전투에 패배했다. 이로써 잉글랜드 북부는 사실상 의회파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크롬웰은 또다시 이 전투를 통해 성가를 드높였다.

 

그런데 크롬웰 자신은 맨체스터 백작의 꾸물거림과 무기력함을 비판하고 그가 진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다고는 믿지 않았으며 9월 중순경 두 왕국 위원회에 출석해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크롬웰과 맨체스터 백작 사이의 불화는 잠시 가라앉았으나 뉴베리 전투에서 주로 맨체스터 백작이 크롬웰의 기병대에 대한 보병지원을 거부함으로써 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재연되었다.

 

크롬웰이 하원에 나가 맨체스터 백작의 행위에 대한 불만감을 자세히 털어놓자 맨체스터 백작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상원에서 크롬웰을 비난했으며 그를 ‘선동꾼’이라고 탄핵하려는 계획을 꾸미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언쟁은 다시 진정되었고 12월 크롬웰은 상ㆍ하원의 의원은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하거나 장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며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또한 새로운 군대가 토머스 페어팩스 경의 휘하에 편성되도록 한다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페어팩스 경을 추앙했던 크롬웰은 그를 거명하고 나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는 데 전념했으나 스스로가 하원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부대원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제2사령관직이 공석으로 남았으며 1645년 여름, 내란이 절정에 달하자 페어팩스 경은 크롬웰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크롬웰은 찰스 1세의 마지막 남은 2개 야전부대가 섬멸당하게 되는 네이즈비 전투와 랭포트 전투에 참가했다.

 

1646년 1월 하원은 크롬웰에게 연간 2,500파운드에 해당하는 급료를 지급했고 직책임기를 6개월간 연장해주었으며 따라서 옥스퍼드 포위공격에 참전할 수 있었다. 페어팩스 경이 새로운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하고 무기력한 맨체스터 백작의 지휘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크롬웰은 전쟁의 진행과정에 대해 만족해했다. 전쟁의 승리를 신의 자비로 돌렸으며 충성스럽게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내전이 끝나자 하원은 군대를 가능한 한 빨리 해산시키고자 했으며 이에 실망한 크롬웰은 1647년 3월 페어팩스 경에게 “병사들의 사기가 이같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의회 내 민간인 출신 지도자들이 스코틀랜드인들을 고용해 자신들을 보호하도록 하면서 군대해산을 명령하자 평소 스코틀랜드인들을 싫어하던 크롬웰은 잉글랜드 병사들이 치욕스런 대우를 받아왔다고 생각하고 런던을 떠났으며 6월 4일 동료병사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다.

 

1647년의 나머지 기간에 그는 잉글랜드 내의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나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으며 곧 돈독하던 신앙심이 회의에 빠져들었다. 군대의 동요도 갈수록 심해졌으며 크롬웰이 런던을 떠나던 바로 그날 일단의 병사들이 찰스 1세를 체포했다.

 

크롬웰과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턴은 2차례 찰스 1세와 면담하고 자신들이 의회에 제출하고자 하는 헌법안에 대해 찰스 1세가 동의하도록 설득을 시도했다. 그당시 크롬웰은 왕의 적이 아니었으며 찰스 1세가 자녀들에 대해 무척 애정이 깊은 데 감명을 받았다. 그

 

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왕과 의회 모두를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 군대 내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일반 병사들의 압력에 못이겨 페어팩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런던의 의사당으로 향했을 때 크롬웰은 그래도 의회의 권위는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9월에는 하원에서 앞으로 더이상 국왕에게 청원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크롬웰은 이에 반대했으며 1월 사병대표들도 참석한 군대총회에서 자신은 어떤 특별한 형태의 정부를 구성할 생각이 없으며 또한 왕과 어떠한 밀약을 맺지도 않았다는 점을 납득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것을 우려하면서 왕정과 상원의 폐지, 그리고 보다 민주적인 헌법의 도입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러나 군대와 의회, 그리고 국왕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려던 그의 모든 노력은 찰스 1세가 햄프턴 궁에서 탈출하여 스코틀랜드측과 협상을 하기 위해 아일오브와이어트로 도망감에 따라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1648년 1월 3일 크롬웰은 전에 보유한 모든 지위를 포기했으며 하원에 나아가 “왕은 완고한 사람이며 신이 그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왕에 대해 청원을 내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지지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측과 협정을 맺고 크롬웰이 의회와 군대 사이를 중재하는 데 실패한 것에 고무된 왕당파들은 재차 무장했으며 2차 내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페어팩스 장군은 우선 크롬웰을 웨일스로 파견해 그곳의 봉기를 진압하도록 했으며 이후 북부지역으로 보내 6월에 잉글랜드로 침입한 스코틀랜드 군대와 싸우도록 했다.

 

스코틀랜군과 북부지역의 왕당파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랭커셔 전투에서 이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스코틀랜드로 진주해 질서를 회복시켰다. 최종단계에서 요크셔로 돌아와 폰티프랙트 포위공격의 책임을 맡았다.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머뭇거리면서 북부지역을 맴돌고 있는 동안 그의 사위 아이어턴과 남부지역 주둔군 소속 장교들이 결정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들은 찰스 1세와의 협상을 비난하는 내용의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고 찰스 1세를 살인자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여전히 입장이 불투명하던 크롬웰은 자신의 군대가 남부지역 주둔군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페어팩스 장군의 명령으로 런던 귀환길에 올랐으나 그가 런던에 도착한 것은 이미 아이어턴과 그의 동료들이 하원에서 국왕과의 협상을 주장하던 인사들을 모두 축출하고 난 다음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던 크롬웰은 아이어턴에게 떠밀려 마침내 크리스마스 무렵 찰스 1세를 살인자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고등법원의 135명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크롬웰은 찰스 1세의 사형집행영장에 서명했다.

 

영국이 공화정을 선포한 후 크롬웰은 단원제 의회의 집행기구인 국무회의의 제1 의장이 되었다. 찰스 1세의 처형 후 3년 동안 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왕당파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수평파(Levllers)와 같은 극단주의적인 청교도 집단의 반란행위를 진압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크롬웰 자신은 1641년 잉글랜드 정착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아일랜드인들이 자행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총사령관 겸 총독으로 나서 아일랜드에 대한 무자비한 원정을 벌였다. 1650년 5월 런던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향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인정된 상태였다. 페어팩스 장군이 취임을 거부했으므로 6월 25일 크롬웰이 페어팩스를 대신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전쟁은 어렵게 진행되었으며 1650년 여름 크롬웰은 병에 걸렸으나 9월 3일 던바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년 후 찰스 2세가 잉글랜드로 진격했을 때도 우스터에서 이를 격퇴했다.

 

이로써 내란은 종식되었으며 크롬웰은 평화와 함께 정치적 안정과 사회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사면법을 통과시켰으나 여전히 의회에 대한 군대의 불만은 더욱 심해졌다. 군대 내에는 의회의원들이 부패했으며 의회가 새로 소집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크롬웰은 양측을 중재하려고 다시 시도했으나 스스로는 군대편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마침내 의회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고 1653년 4월 20일 자기 휘하의 총기병을 소집해 하원에서 의원들을 강제로 축출했으며 2개월 후 자신이 지명한 인사들로 의회를 구성했다.

 

이전의 의회가 굼뜨고 이기적인 성격이 강했던 데 반해 새로 구성된 의회는 지나치게 조급하고 과격한 편이었다. 또한 크롬웰은 의회가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존 램버트 소장과 일단의 장교들이 계획한 쿠데타 이후 1653년 12월 의회의 대다수 인사들이 크롬웰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크롬웰은 3년마다 소집되는 의회와 국무회의의 자문을 받으며 잉글랜드ㆍ스코틀랜드ㆍ아일랜드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Protectorate)에 취임했다.

 

1654년 9월 3일 의회를 소집하기에 앞서 크롬웰과 국무회의는 국내정책에 관한 80가지가 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가 목적한 바는 법률 개혁과 청교도 교회의 확립, 종교적 관용, 교육의 진흥, 통치의 분권화 등이었다.

 

법률가들의 반발이 있기도 했으나 크롬웰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훌륭한 재판관들을 임명했으며 사소한 범죄에 대해 사형을 내리는 관행에 강력히 반대했다. 또한 일부 국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입국을 다시 허용했다. 교육에도 종사하여 옥스퍼드 총장직을 훌륭히 수행하고 더럼에 칼리지를 세웠으며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는 중등학교를 크게 육성했다.

 

1654년 네덜란드와의 전쟁상태가 원만히 마무리되고 나서 군사력의 활용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어 국무회의가 분열되자 그는 프랑스와 동맹하여 스페인에 대항한다는 최종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 원정대를 파견했으며 1655년 5월 자메이카를 정복했다.

 

프랑스와 합세해 스페인령 플랑드르에도 원정대를 파견하여 ?케르크 항을 손에 넣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도 큰 관심을 쏟았는데 크롬웰 스스로는 스웨덴의 카를 10세를 존경했지만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국가적 이익이었다. 경제와 산업정책은 주로 전통적인 노선을 따랐으나 독점제도에는 반대했다.

 

따라서 동인도회사는 독점체제에서 벗어나 3년 동안 완전히 자유경쟁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자 1657년 10월 동인도회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그 대가로 새로운 특허장을 부여했다. 자금을 끌어올 만한 만족스런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 다른 국가의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크롬웰의 공화국 역시 재정적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공화정하에서 의회가 처음 소집되자 크롬웰은 호국경체제가 내란 이후의 국가위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했으며 자신의 정부가 혼란과 사회적 반란을 막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수평파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국교회의 붕괴로 인한 정신적 무정부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법률의 개혁과 같은 일부 측면에서는 급진적이었지만 왕정체제의 전복으로 인한 정치적 붕괴를 우려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다. 공화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인사들이 새로 구성된 의회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이들은 입법에만 전념하지 않고 크롬웰 정부의 전체적인 기반에 의문을 제기했다.

 

크롬웰은 이들에 대해 새로운 체제의 4가지 근본적인 원칙, 즉 한 사람과 하나의 의회에 의한 정부, 의회의 정기적 소집, 양심의 자유 보장, 호국경과 의회 간의 무장군인에 대한 지휘권의 분할 수용을 역설했다. “신이 인정하고 인간이 승인한 이 정부를 멋대로 전복하는 것을 좌시하느니 차라리 무덤으로 굴러가 오명을 쓰고 묻히겠다”고 하면서, 의석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면 호국경과 의회에 대해 충성을 바칠 것과 아울러 체제의 근본 성격을 변경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공화주의로 무장된 100명의 인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의원들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으나 여전히 호국경이 바라던 대로의 법률 개혁보다는 헌법을 새로 작성하는 데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자 크롬웰은 1655년 1월 22일 의회를 해산했다. 1656년 소집된 의회와도 똑같은 문제로 충돌했으며, 1658년 2월 재차 의회를 해산했다.

 

크롬웰은 아일랜드 원정 이후 건강이 계속 악화되었으며 1658년 8월 총애하던 딸 엘리자베스가 암으로 죽은 후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려 런던의 세인트제임스 궁에서 요양할 셈으로 런던으로 돌아왔으나 9월 3일 3시에 화이트홀에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11월 10일 웨스트민스터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으며 장례는 13일 뒤 국장으로 치러졌다. 찰스 2세의 즉위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인 1661년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져 그의 시신은 죄수들이 처형되던 타이번에 내걸렸다. 이후 그의 시신은 교수대 아래 매장되었으나 머리부분은 웨스트민스터 홀의 꼭대기에 내걸린 채 찰스 2세의 집권말기까지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크롬웰은 결코 극단적인 청교도가 아니었으며 천성적으로 잔인하지도 무자비한 인물도 아니었다. 자신의 병사들을 매우 아꼈으며 당시의 장군들이 의견을 달리했을 때 그들을 심하게 징계하지는 않았다. 가족들에게도 헌신적이었다. 음악과 사냥을 즐기고 훌륭한 말을 구분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담배와 술을 즐겼으며 젊은 시절에는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데 빠져 있기도 했으나 위엄을 잃지 않은 통치자였다. 호국경으로 있으면서 그는 젊은 시절의 엄격했던 청교도적 성향에 비해 훨씬 관대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의 이른바 자의적인 성격의 정부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입장이 없었다.

 

찰스 1세의 처형에 앞서 찰스 1세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위에 앉히는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했으며 상원의 폐지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7세기말 그에 대한 평가는, 용기는 있으나 악한 인물이라는 혹평이 우세했지만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18세기 들어서는 메스꺼운 위선자라는 악평이 우세했으나 19세에 와서는 토머스 칼라일의 영향을 받아 찰스 1세의 전제주의를 파괴한 헌정개혁가로 평가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평가가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신의 소명에 대한 그의 확신은 심리학적인 견지에서 분석되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가 무력으로 급진운동을 탄압하고 수평파의 정책에 저항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명분을 저버렸다고 비난한다.

 

대체적인 평가에 있어서 독재자로서의 그의 성격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오히려 내란 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시키고 입헌주의 정부체제의 발전과 종교적 관용에 공헌한 애국적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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