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는 기도 

 

글 / 리차드 포스터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이 거하시게 되면 그 사람은 기도를 멈출 수 없다. 성령이 그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잠을 자든, 깨어있든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기도하게 된다. 먹을 때나 마실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기도의 향기가 그의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피어오르게 된다. 마음속에서 생기는 아무리 작은 자극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은밀하게 부르는 말 없는 노래와 같다”

-시리아의 아이작(Isaac the Syrian)-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한 가지 좋은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하나님과 영속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러한 삶을 내가 온전히 누리고 있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러한 삶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며, 가장 온전한 삶의 방식임을 알고 있다고 어느 정도 자부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는 간단하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충만한 삶은 없다.

 

” 래더의 성 요한(st. John of the Ladder)은 “숨쉴 때 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 고 권면(勸勉)하였다. 노리지치의 줄리애나(Juliana)는 “기도는 영혼을 하나님께 결합시켜 준다”고 솔직히 말했다. 비잔틴의 신실한 작가 칼리스토스(Kallistos)는 “쉬지 않는 기도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프랜시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 자체가 된 것 같다”고 말하였다.

 

프랑크 라우바흐(Frank Laubach)는 말하기를, “오, 이렇게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 하나님을 내 생각의 대상으로 삼고 내 대화의 상대로 삼는 것이야말로 내가 일찍이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아마 이것이 당신에게는 불가능하거나 심지어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인생은 그 자체가 매우 복잡하다. 이미 꽉 짜여진 계획위에 또 다른 종교적인 의무를 부과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그것은 너무나 힘들게 보인다. 쉬지않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욱이 누가 과연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면 당신을 격려해 주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금 당장 하나님과 끊임없이 나눔을 갖는 수준에 이르러, 마치 깊은 바다 속에 뛰어들어 이 대륙에서 저 대륙가지 헤엄쳐 건너가는 것 같은 수준을 기대하시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해할 만한 실제적인 삶의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부단히 연습하는 동안 다른 모든 것을 중단하게 된다. 우리는 점차 삶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마음이 집중되며, 또한 차츰 관점이 모아지게 된다. 점점 더 우리는 일상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우리 자신조차 놀랄 만큼 수월하고 차분하게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꾸준하고 신실한 교제는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 방법보다 더 쉽다. 일관성 있게 꾸준히 기도하는 것보다 간헐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것은 마치 오랜 만에 한 번씩 칠 때 좋은 테니스 경기를 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정하지 못한 기도 생활을 하면서 마음과 뜻과 영혼이 모아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정말 생각하는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신의 기도를 하면서 누군가가 모세처럼 친구에게 하듯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관연 믿는가? 아니다. 규칙적으로 관련을 맺을 때 친밀도가 향상된다. 수월성도 역시 발전된다. 왜 수월해지는가? 그 이유는 의의 습관을 점점 쌓아가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이 ‘거룩한 습관들’ 이 통합되는 역사가 일어나 기도가 쉽고 자연스럽고 자발적이 되며, 기도를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워질 것이다.

 

중단 없는 교제

 

성경의 기자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권하면서 로마인들에게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롬12:12)고 말했다. 에베소 사람들에게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6:18)고 했다. 골로새 인들에게는 “기도를 항상 힘스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빌4:6)고 했다. 그리고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고 권고하고 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눅18:1)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영속적인 교제를 나누는 삶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 하느니라”(요5:19).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요5:3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14:11).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즉시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수년 동안 그가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것을 직접 보아 왔기 때문이다(요15:1-11).

 

불타는 열정

 

이 시대에는 쉬지 않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도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흩어진 마음들과 떠들썩한 마음으로 끝없이 연속되는 활동을 하다 보면 숨이 차게 된다.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해지며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아무런 까닭 없이 마음속에서 생각이 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집중이 잘 안 된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실 정신이 산만해진 사람들이다.

 

쉬지 않는 기도는 혼돈된 가운데서도 평화를 말해 주는 면이 있다. 그제 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내심에 대해 조금씩 경험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일그러지고 깨어진 행동들이 서서히 새로운 중심점을 향해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삶이 지향하는 평화와 안정과 고요함과 확고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해야만 하며, 그것도 불타는 열정이 있어야만 한다. 월리암 제임스(William James)는 어디엔가 이렇게 썼다. “종교는 무딘 습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열정으로 존재한다.” 당신의 몸속에 있는 모든 세포가 이러한 생활을 갈구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를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능력이 점점 더 증가하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확신컨대 여기저기서 조금씩 드린 기도는 당신에게 충분하지 않다. 때문에 더 원해야만 하며 훨씬 더 기도에 힘써야 한다. 당신은 영원한 기도의 제단에 꺼지지 않는 헌신의 불꽃을 태우기를 원할 것이다. 단지 우리 모두가 그 방법만 안다면 바로 우리 모두가 이제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단숨의 기도

 

그리스도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려고 애써 왔다. 그래서 그들은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의 두 가지 기본적인 표현을 발전시켜 왔다. 하나는 더 형식적이고 예전적이며 다른 하나는 훨씬 자발적이며 대화적이다. 첫 번째는 동방 기독교 전통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대개 ‘숨을 내쉬는 기도’ 또는 ‘단숨의 기도’라고 일컫는다. 그 사상은 시편에 뿌리를 둔 것으로 반복되는 어구가 우리에게 시 한 편을 전부 생각나게 한다. 예를 들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시139:1)와 같은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개념은 단숨에 말할 수 있는 짧고 간단한 간구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생겨난다. 그래서 그 기도를 ‘단숨의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시나이의 그래고리(Gregory of Sinai)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숨쉬기도 전에 달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단숨의 기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기도’로서 그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이 기도는 자기 의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왔다. 그 비유를 보면 세리가 가슴을 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고 하였다. 그 내용이 지금의 형태로 함께 전해져 왔으며 6세기에 널리 쓰이다가 14세기에 이르러 동방 교회에서 수정되었다.

 

19세기에 익명의 러시아 농부가 <순례자의 길(The Way of a Pilgrim)>이라는 책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 애썼던 자신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단 ‘예수기도’를 배우게 되자 그는 계속해서 그 기도를 드렸으며, 마침내 그 기도가 생각에서 마음으로 이어져서 결국은 전신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그 기도는 내면화되어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고,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늘 그와 함께 동행 하였다. 그 책은 동방 교회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 멀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예수기도’는 단 한 가지 예밖에 없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단숨의 기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어느 날 저녁, 나는 밖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열두 개가 넘는 단숨의 기도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여름날 저녁 쏟아져 나온 기도들 중에 몇 개는 다음과 같다. “오주님, 사랑으로 제게 세례를 베풀어 주소서.” “아버지, 제게 온순함을 가르쳐 주소서,” “예수님, 저로 주님의 은혜를 받게 하소서.” “은혜로우신 주님, 저의 두려움을 없애 주소서.” “오 성령이여, 나의 죄를 밝혀 주소서.” “주 예수님, 저로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소서.”

 

각의 기도가 얼마나 짧은지 주목해 보라. 일고여덟 마디밖에 되지 않는다. 또 하나님과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친밀한지 주목하라. 하나님께 개인적이고도 가깝게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를 의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온순함과 믿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그 기도가 온통 요구하는 것뿐임에 주목하라. 이 기도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자아에 초점을 둔 기도이다. 그러나 단숨의 기도를 통해 구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을 가미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아 중심적인 기도는 아니다.

 

단숨의 기도는 창조되기보다는 발견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에 당신이 당신 자신의 힘으로 단숨의 기도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의 한 가지 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선택해서 가만히 앉아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를 묵상해 보라. 잠시 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시기를 기대하라. 그 다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질문에 기울이라. 이 물음에 간단히 그리고 즉시 대답하라. 아마 단 한마디, 평화, 믿음, 힘 따위의 말이 의식 속에서 떠오를 것이다.

 

어쩌면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 또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 따위의 한 구절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말과 그 구절을 연결시켜보라. 가령 복되신 주님. 아바, 임마누엘, 거룩하신 아버지, 은혜로우신 주님 따위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단숨의 기도를 기록해 놓고 단숨에 편안히 말할 수 있는 그 기도의 내용 속에 거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 다음 몇 날 동안은 하나님께서 다소나마 당신의 기도를 조정하시도록 맡겨드려라. 당신이 “주님, 주님의 진리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록해 두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기도를 이삼 일만 드리고 나면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주님, 주님의 진리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단숨의 기도는 가능한 한 자주 드려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당신의 영혼속 깊이 주시도록 맡기라. 너무 서두러거나 너무 빨리 기도를 바꾸지 말라. 8개월 전 나는 개인적인 단숨의 기도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 이;ㄹ이 끝났다는 표시가 없다. 때때로,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기도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안팎으로 목소리를 낮추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도 계시고, 뒤에도 계시며, 우리 주위에도 계시고, 우리 안에도 계신다. 바로 그때가 하던 일을 놓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해야 할 때이다.

 

데오페인(Theophane)이라는 수도사는 단숨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모기들처럼 계속해서 다툴 때, 이 싸움을 없애려면 마음을 단 한 가지 생각에만 고정시켜야 한다. 일 일을 돕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을 짧은 기도이다. 그 기도는 마음을 단순하게 그리고 집중하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두 번째 주요한 표현은 기도의 사람들인 브라더 로렌스, 토마스 켈리(Tomas Kelly), 프랑크 라우바흐가 잘 나타냈다. 그들의 제안에 의하면, 매일매일의 모든 활동을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기쁘게 해나가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찬양과 감사를 속삭이듯이 기도로 올려 드리면 된다. 자신을 ‘온갖 항아리와 냄비의 임자’로 불렀던 브라더 로렌스는 이 생각을 구체화시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하는 시간이 내게는 기도하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주방에서 달 그락거리는 소리와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는 중에도,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각기 다른 것을 요구하는 동안에도, 나는 마치 무릎을 꿇고 복된 성례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매우 고요하게 하나님을 묵상한다.”

 

로렌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의 예배당을 지어서 이따금씩 일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평화롭고 겸손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하라.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직전과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심령의 기도를 드리라.” 또 그렇게 함으로서 “성령으로 계속해서 호흡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철학자였던 토마스 켈리는 그의 짧은 인생 후반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계시의 생수의 샘이 날마다, 시간마다, 꾸준히 모양을 바꾸어 가며 끊임없이 솟아난다.” 또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정신적인 생활을 동시에 두 개의 차원 이상으로 영위하는 방법이 있다. 한 가지 차원으로는 외부 사건의 모든 요구 조건을 생각하고, 토의하고 보고, 충족시키는 것이다. 심층적으로 그 이면에서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노래하고, 경배하며 하나님의 숨결을 부드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프랑크 라우마흐의 일기 속에는 많은 내용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반짝이고 있다. “오늘 오후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나를 너무도 엄청난 기쁨으로 사로잡았다. 처음으로 그런 기쁨을 맛보았다. 하나님이 너무 가깝고 너무 놀랍도록 사랑스럽게 느껴져 이상할 정도의 크나큰 만족으로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그는 또한 1930년 필리핀의 작은 섬 민나다나오에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아주 작은 일에도 하나님과 협력한다는 느낌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한다. 일찍이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이 있다면 이런 시간을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시간을 영광스럽고 부요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할 유일한 일인 것 같다.

 

이로부터 몇 년 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의 뜻에 제 뜻을 맞추려고 애쓰니 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여기 켈커타 역에서 저는 지난 수년간 겪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힘을 느낍니다.”

 

나는 이 세 사람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활의 많은 다른 개척자들의 일지나 편지 따위에 들어 있는 긴급성과 모험심과 추진력을 당신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사람들은 우리 대부분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깨어 있었다. 그들의 글은 새로운 것을 발견한 흥분에 넘쳐 있었다. 토마스 켈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중심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삶은 서두러지 않는 평화와 능력의 삶이다. 그것은 단순하고 고요하며 놀랍다. 그것은 승리의 삶이며 빛나는 삶이다. 시간이 별도로 들지는 않지만 우리의 시간을 다 차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계획들을 새롭고 능력 있게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이런 삶을 살수 있는가? 나는 과연 어떤가? “결코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라. 우리가 처음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쉬울 것이다. 분명히 이런 끊임없는 교제의 삶은 저절로 되거나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례 겁을 먹어서는 안된다. 가치 있는 일은 언제나 노력이 필요하다. 브라더 로렌스는 그가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 완전히 몰두하기까지는 십년이나 걸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라우바흐는 이렇게 밝혔다.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신 일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출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바로 내 뜻을 주님의 능력의 역사에 붙들어매서 주님의 바람이 무한히 휩쓸고 지나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렇다. 힘들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우리가 한 번에 한걸음씩 나아가는 그 과정만 이해한다면 그만큼 더 가능해질 것이다.

 

쉬지 않는 기도의 단계

 

단 한 번의 시도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단계까지 뛰어오를 수는 없다. 일정 기간 동안 한결같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가능하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외적 훈련의 단계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어떤 일에 숙달하게 된다. 능숙한 피아니스트의 경우, 지금은 그의 손이 건반위에서 위아래로 날렵하게 움직이지만 그도 한때는 아주 간단한 연주기법을 가지고도 몹시 괴로워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면서도 눈에 띄는 방법으로, 심지어 인위적인 방법을 써 가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학교 선생님들은 종소리가 울릴 때를 하나님께 단숨의 기도를 드려야 할 시간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좋아하는 색깔이 자주색인 사람은 자주색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임재를 상기하면 된다. 외과 의사들은 수술을 집도하기 전 소독약으로 닦아낼 때마다 기도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면 된다. 은행원들은 창구 앞에 사람이 올 때마다 기도하면 된다. 냉장고나 욕실의 거울, 또는 텔레비전 앞에 보기만 하면 저절로 기도를 할 수 있는 표시를 해놓을 수도 있다. 설거지를 하거나 화단을 가구거나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때,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조깅, 수영, 산책 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간단하다. 프랑크 라우바흐는 그것을 ‘분초와의 경기’라고 하였다. 우리도 그것을 즐거운 경기로 바꿀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얼마나 많은 순간을 거룩한 교제로 바꿀 수 있을까?

 

두 번째 단계는 이 일이 잠재의식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되 그 말한 것을 인식하되 그 말한 것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의 기저(基底)와 그 배경에는 늘 경이로움과 찬양에의 갈망이 쉼 쉬고 있음을 느끼되 하루 종일 콧노래를 부르다가 불현듯 그 곡조를 인식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내적인 기도는 전혀 뜻밖의 순간에 흘러나온다. 교통이 막혔을 때나 소나기가 올 때, 또는 사람이 북적대는 상점가 같은 곳에서 그런 기도가 나온다. 마침내 기도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되면 우리 행동의 변화까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교통이 혼잡해도 짜증이 덜 나고, 집안이나 회사의 사소한 문제꺼리들도 더 쉽게 견뎌 낼 수 있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보다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가 마음속에 박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성과 더불어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감성과 이성이 보다 조화롭게 활동한다. 기도하는 일이 좀더 수월해지고,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며, 점점 더 자연스러워진다. 기도가 부담스럽기보다는 즐겁게 느껴진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의 결정은 좀 더 사랑에 근거한 합리성에 기초하게 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더 민감해진다. 방안에 들어서면 누가 슬프고 외로운지, 또 누가 깊고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잠겨 있는지 즉시 알아본다. 그런 경우 우리는 그들 옆에 슬쩍 다가가서 말없이 앉아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시42:7)는 것을 알고서 그들을 위로하고 이해하고 치료를 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기도가 전인격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기도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되고 피가 전신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기도가 우리 속에서 강렬한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들은 바로는 그렇다.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다. 예로부터 여러 성인들은 그들이 종종 ‘신적인 연합’이라고 하였던 실재에 대해 증언해왔다. 귀용 부인은 확언하기를 우리의 모든 기도와 모든 묵상이 보다 깊은 이 일을 위한 ‘단순한 준비’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들은 끝이 아니라, 끝으로 가는 길일뿐이다. 끝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는 지금 당장으로서는 내게 조금 큰일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을 통해 이 마지막 단계의 실재를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빈곤한가를 알게 된다. 어쨌든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더 자세히 고찰해 보게 될 것이다.

 

두 가지 문제

 

이 장을 마치기 전에 나는 이론적인 문제와 실천적인 문제를 하나씩 제기하고 싶다. 이론적인 문제는 다음 사실과 관련이 있다. 즉 쉬지 않는 기도가 예수님이 금지하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마지막 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사실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당시의 특정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리새인들이 장터에서 큰 소리로 기도함으로써 공개적으로 경건을 드러내던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헛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허영으로 가득 찬 무의미한 말들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쉬지 않는 기도는 골방의 기도이며 은밀한 기도이다. 우리가 그런 기도를 드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다만 아는 것은 우리가 이전보다 행복하고 더 충만하다는 사실뿐이다.

 

반복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통해 끈질긴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셨고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기도하셨다. 아브라함도 여호와께 소돔 성을 위해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했으며,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할 때 그렇게 기도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반복 그 자체가 아니라 기도를 마술적인 주문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반복이다. 우리가 말을 일정한 순서대로 짜 맞추어 바르게 말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생각이 바로 성경에서 거부하는 반복의 개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성격상 실천적인 것에 가깝다. 이 장에서 내가 말한 것은 모두, 우리의 감정이 영적이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좋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분명히 영적이지 못할 때는 어떤가? 가령 자녀들과 반목하거나 부부가 불화할 때는 어떤가?

 

솔직히 말해서, 1장에서 우리가 논의한 결사적인 기도가 있긴 하지만 나는 그런 때에는 기도가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리석게 겉으로만 경건한 체하며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처럼 가장하느니보다 차라리 그런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께 잠시 동안 게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여느 때처럼 은혜로우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신다. 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돌아와 다시 시도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계속해서 실패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아니다. 실패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문제는 오히려 일정 기간 동안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연습하여 습관으로 만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이다.

 

하나님은 영혼의 지성소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귀용부인의 말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끊임없는 내주”를 경험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영접해 주신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기쁨이 있다.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기대 이상으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도

 

오 주님, 나의 주님,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움지요? 묘성과 오리온 성좌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참새와 박새가 그들의 노래를 흉내 냅니다. 온 천하가 대지휘자이신 주님과 화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만물이 화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왜 나만 홀로 불협화음을 내고 싶어 합니까? 나는 분명코 고집스런 피조물입니다.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정말 주님과 더 완전하게 더 자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싶습니다. 정말 나는 끊임없이 주님과의 교제를 지속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나의 소망이 비록 지금 당장은 작고 일시적이더라도, 이 소망을 키워 주시옵소서. 언젠가는 나도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그 하는 일이 다 형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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