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교회들은 유행병(流行病)에 걸려있다

 

글 / 황부일 목사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 이라는게 잘 통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현대사회 대중들은 유행 속에서 큰 기대를 가지며 또한 유행 속에서 싫증과 버림을 반복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행 속에 변화가 있고 조화가 있고 자랑과 멋이 있는걸로 생각하지만 유행은 대중들을 적절히 이용하며 속이면서 정신 못차리게 돌아갑니다. 발전하는 대중매체는 유행의 전초기지나 핵심 본부처럼 되어 유행을 창출하며 조절하면서 대중들의 의식이나 시선들을 주목하게 합니다.

 

유행이라는 말의 개념을 찾아볼것 같으면 어떤 행동 양식이나 언어나 문화나 어떤 생활과 모습의 것들이 일시적으로 광범위하게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아서 퍼져가는 일시적인 사회적 동조 행동현상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유행의 특징을 볼것 같으면 외형적이고 일시적으로 바뀌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성은 없고 남을 의식하는 대중성이 가치로 되어 있고 소비와 돈이 세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학평론가의 글에서 언급된 유행에 관한 내용을 좀 인용해 볼것 같으면 “유행(流行)은 한자어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세속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유행은 대중과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자기 존재의 본질이나 이유를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을 사유하고 통찰할 수 없는 현대의 대중은 늘 고독하고 불안하고 두려운 나머지 겉으로 만으로도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하고 선망하는 대상의 것을 성취하려고 환상과 욕망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니까 유행은 대중문화를 움직이는 핵심동력이고 그 세력을 만드는 돈인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행은 상품화 되고 기업은 이것을 대중매체를 통해 이용하여 끊임없이 대중들에게 무엇인가 그를 소비함으로써 뒤처지지 않았다는 거짓 안도감을 만들고 이윤추구를 위해 또 다른 변화로 욕망과 환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점점 짧아지는 유행은 자본주의가 만든 욕망의 산물인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대중과 대중문화의 속성인 유행의 물결이 교계에서도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음을 아십니까?

 

지금 교회들은 심한 유행병에 걸려 있습니다. 유행병은 무턱대고 유행을 따라가는 경향이 심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인들이 세상 대중들을 따라 대중문화의 산물이며 중요한 속성이 되는 세속의 유행을 본받고 그런 일시적이고 덧없는 가치에 빠져 일반적으로 살아가고 있음도 되겠지만 무엇보다 교회가 대중적 속성을 그대로 모방하며 교계 안에 끝없는 유행의 속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세속의 유행을 적절히 이용하는 기업의 본성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큰 문제는 이것을 모르고 무턱대고 따라가는 유행의 흐름으로 인해 교회들은 교회의 본질과 거룩한 속성을 찾아볼 수 가 없게된 것입니다.

 

교계 안에 흐르는 유행의 유형들을 살펴볼 것 같으면 용어적인면과 외형적인면과 운영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세속의 유행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경우와 교계 안에서 만들어져 교회들의 유행으로만 흘러가는 경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요즘 교계 안에 유행되는 용어가 있는데 보면 “비젼”, “영성”,“웰빙”,“건강한”,“열린”,“축제”,“세계적”,“국제적”,등 다양합니다.

 

요새 비젼이란 말이 안들어가면 설교도 목회도 교회성장도 안되는 것처럼 될 정도인데 이제는 사회나 기업등에서 말하는 개념과 별다름 없이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며 대부분 비판없이 따라서 쓰고 있습니다. 또한 영성이란 말도 유행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지 그런 말을 꼭 써야 되는지도 모르고 따라하고 있습니다.

 

원래 영성이란 용어는 중세 카톨릭에서 철학적인 사상적 의미와 신앙의 정신을 합쳐 쓰던 용어인데 언제부터인지 경건이란 용어는 잘 쓰지 않고 영성이란 말이 유행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동안은 웃기는 강사를 통해 시작된 신바람이란 말이 퍼져서 교계 유행어로 신바람 목회니 신바람 교회니 하더니 슬며시 사라졌고 큐티란 말도 한창 유행되더니 들어가 버렸습니다.

 

외형적으로의 유행을 볼것 같으면 예전에는 교회가 부흥하면 큰 예배당 짓고 그 다음은 교육관을 짓는 것이 흐름이었으나 얼마 지나자 수양관이나 기도원을 짓고 세우는 것이 교회 성장의 순서같이 유행하더니 요사이 와서는 비젼센타를 짓는 것이 유행되었습니다.

 

또한 예배당 내부의 유행을 볼것 같으면 예전에는 큰 강대상을 올려놓는 것이 유행이더니 근간에는 크리스탈 강대상이 유행입니다. 예배당 의자는 멀쩡한 것을 치워 버리고 편하고 좋은 것에서 이제는 강의실이나 공연장에 있는 개인적인 의자들이 유행입니다.

 

예배당은 공연장이나 콘서트장 식으로 꾸미는 것이 유행이고 내부 조명은 찬란하고 무대식이고 입체적 음향이나 영상 시스템으로 과거에 O.H.P에서 이제는 멀티비젼을 갖추는 것이 또한 유행되었습니다. 찬양은 과거 경건함에서 부흥회식으로 이제는 콘서트식이고 축제식 찬양으로 밴드식 악기까지 갖추면서 유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종로의 유명한 악기상가는 한동안 한국교회들로 인해 호황을 누릴 정도 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시작한 목요찬양은 유행되어 온 교회에 퍼졌고 이제는 몸찬양까지 생겨지고 각 교회들은 뒤질세라 그 유행을 따르게 되어졌습니다. 복음송은 세상 유행가처럼 몇 번 불려 지면 사라져 버리고 또한 예배는 말할것도 없이 변하고 변하면서 열린예배로 뮤지컬 예배로 영화영상예배로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영상으로 볼 것 같으면 수시로 돌고 돌 정도입니다. 언젠가는 제자교육이 유행되더니 큐티가 얼마간 유행했고 적극적 사고방식이, 중보기도 운동이나 성시화운동이 수시로 어떤 방식의 전도나 치유선교 목회가 그리고 근간에 와서 사고로 인해 수그러진 단기선교 여행이 심지어 매직쇼까지 유행했고 목회자들이 성경의 인물이름으로 바꾸는 것까지 유행 되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셀목회나 성공회에서 나온 알파코스나 노숙자선교나 노인선교나 이벤트식 행사나 외국 강사를 초빙하여 여는 집회나 영어 프로그램이나 영어예베나 조기 유학 등이 유행인데 그것이 언제까지인지 또 어떤 것으로 바뀌어 질지 모릅니다.

 

교계 안에 흐르는 이런 유행들을 보면 대부분이 국내외 대형교회나 유명한 특색있는 교회들로부터 나옵니다. 이들은 마치 대중매체에 나오는 스타적인 연예인처럼 교계에 유행을 만드는 핵심이나 전초기지와도 같습니다.

 

목회자들의 정보교환은 대부분 그런 변화에 대한 기대에서 모이고 만나고 공감하변서 따라갑니다. 목회자들 대부분이 불안과 조급함에서 자신은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선망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하는 두려움에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구분하거나 비판도 없이 그러는 사이에 대형교회들은 이미 또 다른 프로그램이나 모습을 바꿈으로 변화를 가져 가는데 따라가던 교회들은 항상 뒤져서 그것을 알고 또 따르기 위해 지난 것을 미련 없이 때로는 아쉬움도 있지만 치워버리고 다른 자들과 보조를 맞추려 많은 것을 소비합니다. 스타처럼 크게 성공 했다는 대형교회 모습이나 그들이 한 것을 모방하고 열심히 따르다가 마는 그것이 지금 교회들이 빠져있는 유행병입니다.

 

왜 그런가? 교회들이 개성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분명하고 굳건한 복음 중심의 교회관이 없는 것입니다. 시대를 따르는 변화나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의 뒤바뀜이 교회의 발전이나 성장과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개성이 없고 가치관이 확실치 않은 청소년들의 일시적 발상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 대중들이 따르는 유행적 변화는 마치 새로운 패션을 입고 지나면 또 버리고 또 바꾸고 하는 연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서 변화는 그때 그 기분이나 잠시적인 성취의 느낌에 불과한 것입니다. 끝없는 인간기대의 욕망과 환상을 채워주려는 변화나 바꿈은 한계가 있고 그래서 그런 변화를 가진 유행의 속성은 돌고 또 도는 것입니다. 이런 유행속에 있는 자들은 남들을 따라가다가 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대중문화적인 속성을 가진 유행적 변화가 하나님 나라된 본질과 속성을 가진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패션이 바뀐것 뿐이지 인간의 모습은 그대로인 것처럼 바뀐 의자에 앉아있는 교인들은 또 그런 흐름의 변화만 기대하는 옛사람의 속성을 가진 존재에서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유행을 따르는 교회들의 변화나 발전은 교회를 이루는 모습은 없고 하나님을 통해 세상 나라를 구하는 자들의 숫자나 그리고 그들이 모여 함께하는 공간이나 좋아하는 행사나 프로그램에만 변화를 주는 일시적 발전만 있을 뿐입니다. 커다란 건물과 거기에 사람을 끌어 모으는 확장의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구원을 이루는 교회로서의 참된 변화는 없는 것입니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미 있던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것 뿐이라 했습니다.(전1:9-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진정한 새것이라 했습니다.(고후5;17) 그래서 교회는 세상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로 된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때문에 그 어떤 세상 나라의 것이나 인간중심으로서의 변화나 바꿈이 하나님 나라로의 변화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되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 나라로 새롭게 된 모습과 삶의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새롭게된 교회에게 하나님 나라된 모습과 삶으로서의 변화와 발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오직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인도자들은 날마다 보이고 들려오는 여러 가지 세상의 시대적 흐름이나 주변에 앞서가는 듯이 보이는 교회들의 일시적 모습이나 외형적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을 따를까 저것을 바꿀까 이번에는 어떤 변화를 줄까하는 고민 속에 소비는 많아지고 그래도 항상 뭔가 기대에 채워지지 않는 불안한 염려에 늘 빠져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를 늘 따르고 모방하는 교회는 그 교회를 앞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중심의 교회들은 그리스도로 서 가는 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안맞고 멀어져 갈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십니다.(롬12:2)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쫒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한 가나안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레1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있어 옛시대든 새시대든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정작에 바꾸고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중심의 기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루려는 고민과 불안은 사라지고 주님의 교회 주님이 이루어 가시는 언약을 의지하며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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