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쓴 교회론                                                                                                        

 

글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교회란 과연 어떠한 곳인가? 성경은 교회를 가리키는 데, 다음 몇 가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에클레시아

성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희랍어 '에클레시아'이다. 이 말은 '안에서 밖으로(out of)'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크'와, '부르다(to call)'를 의미하는 동사 칼레오가 합해진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밖으로 불러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밖으로'는 '세상 밖으로', 또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밖으로'를 뜻한다. 그리고 '부르다'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구원에로 불러내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흔히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집합체라고 일컬어져 오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교회는 성도(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교통하는 곳(집합체)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의 교통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피차의 교제(코이노니아)를 통한 성도들 사이의 수평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배와 교제가 있는 것이 교회이다. 예배와 교제가 없으면, 또는 이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축복이나 나누어 가지는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정신 수양원이 아니다. 교회는 사교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한 자선 단체가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어느 한 가정에 모인 사람들이나(고전 16:19, 골 4:15 등), 하나의 독립된 단체를 구성한 사람들에 관계없이 사용되었다(행 5:11, 11:26 등). 그리고 독립된 단체들이 연합하여 모여진 경우에도 사용되었다(행 9:31).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예배를 목적으로 모인 지상의 모든 집합체라면, 그 규모나 형태에 관계없이 교회가 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규모나 형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배와 교제가 있으면, 건물이 없이도 교회이다. 직분자가 없어도 교회이다. 십자가 상이 걸려 있지 않아도 교회이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자기 자신을 교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성경은 에클레시아 이외에도 교회를 가리킬 때, 다음과 같은 많은 비유적인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비유들 속에는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또는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주의깊게 살펴 볼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울께서는 고전 12:27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의미한다. 사도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래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2, 23)라고 하셨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명령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설립자, 또는 특정인의 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교주를 모시는 사이비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만다. 교회는 주님의 교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와 지체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서로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머리되신 주님과 하나이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생각이 같아야 한다. 감정도 같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탄식을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범사에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아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만일 교회는 즐거워하는데 주님의 마음은 아파하시는 일이 있다면 , 그 교회는 심각한 병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교회가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이다.
  
머리는 한나이지만 지체는 많다. 많은 지체들은 각기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체들은 한 머리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와통일을 이룬다. 교회의 성도는 하나 하나의 지체들이다. 서로의 분량과 역할이 각기 다른 지체들이다. 그러나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간에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피리를 부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춤을 추고, 애곡을 하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슬퍼하며 가슴아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체들끼리의 대립이나 견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와 교회들 간에도 지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진정한 몸된 교회들이라면, 교파나 교단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 간에 반목이나 질시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교회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할로 머리되신 주님을 섬겨야 할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던 곳이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그들이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성전, 즉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약은 교회를 가리킬 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나 하늘의 예루살렘, 또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갈 4:26, 히 12:22, 계 21:2).
  
하나님은 무한하시어서 온 우주 어디에나 편재하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늘에 올라 가든지 땅 아래로 내려 가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할 곳은 아무 곳도 없다(시 139: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자신의 지정된 거처로 삼으셨다(합 2:20).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을 찾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에 성전을 찾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반드시 성전을 찾았다. 기도할 때도 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을 찾아갔다. 교회를 예루살렘에 비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이요 보좌이다. 모든 성도들이 마시도록 생수가 흘러나는 생명샘이다. 하나님의 은헤가 시작되는 시은소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함께 모여서 세속적인 행사나 모임 또는 오락만을 즐기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의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마음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손쉽게 모여 교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언제든지 들러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과   비례한다.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서 한 주간에 한 번 정도나 힘들여 찾아가는 곳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복잡한 여건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옮기는 것이 좋다. 아니면 차라리 교회 옆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좋다.
  
성령의 전

교회는 개인 신자의 경우와 더불어서 성령의 전이나 집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고전 3:16, 엡 2:21-22, 벧전 2:5). 교회가 성령, 즉 거룩한 영의 전이라는 말은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곳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세속과 구별이 된 곳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바쳐진 곳이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으로 인쳐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의식들도 세상적인 일들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직 또는 성례라고 부른다. 읽는 책이나 부르는 노래도 세상 것둘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또는 성가라고 부른다. 건물이나 물건들이 겉으로 보기에 세상의 것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세상 것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다. 그러기에 성전 또는 성물(성구)이라고 부른다.
  
한편, 교회는 불의나 죄와 구별되어진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거룩하심을 이루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장소이다. 여기에는 말이나 행동이나 계획 등이 모두 다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많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이름에 합당하도록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어지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온전히 거룩한 새사람으로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는 개인차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잡음들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잡음 때문에 교회를 오해하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룩해져 가는 흔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최소하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근 우리 주변에는 세상과의 구별을 상실한 교회들이 없지 않다. 생각이나 언어, 행동이나 벌리고 있는 행사에서 세상과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일부 가사를 제외한다면, 동작이나 마음가짐이나 기교 등이 세상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다. 나누는 대화도 세상사 일색이다. 집안이나 직장에서 어른이면, 교회에서도 무조건 어른 행세를 하려 하기도 한다. 교회에서조차 계 모임이 이루어진다. 심지어는 성전이 세속 모임을 위해 대여되기까지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 무리 속에 숨어 있는 염소를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염소 무리 속에 끼어 있는 양을 구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주님으로 하여금 오늘의 예루살렘 보시고 눈물울 흘리시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눅 23:28).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구별된 곳이 되게 해야 한다.
  
진리의 기둥과 터

사도 바울께서는 교회를 가리켜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하셨다(딤전 3:15). 교회를 기둥이나 터에 비유한 것은 교회의 기초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주시려 함이었다.
  
교회의 터는 진리이다. 교회는 오직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 교회가 혈연이나 사업이나 권력 등의 기초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진리되신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다. 혹 성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진리나 교주를 그 기초로 삼고 있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는 아무리 십자가를 내다 붙이고, 그럴싸한 교회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도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형제로 보지 않는다. 이방인으로 여긴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기둥도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진리의 소호자이다. 교회는 진리만을 전하고, 진리만을 가르쳐야 한다. 진리는 타협이나 양보를 허락하지 않는다. 타협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로울 때가 많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할 때도 많다. 이것이 교회가 가야 할 길이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졌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 피를 지키기 위하여 수없이 피를 훌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자기 자신의 생각만을 진리라고 독선적인 주장을 늘어 놓으면서 분쟁과 분리를 일삼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진리는 자기의 생각이나 고집이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양보하면서까지 타협을 모색하시는 것 역시 옳은 일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금 촛대

사도 요한은 교회가 금 촛대로 나타나는 계시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내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교회가 밝히는 빛은 하나님과 진리이다. 하나님이 빛이시요(요일 1:5), 진리, 즉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바로 빛이기 때문이다(요 8:12). 이 빛은 흐려지거나 변하지 아니하는 빛이다. 그러기에 가장 고상한 빛이다. 따라서 교회는 금으로 만든 촛대에 비유가 되었다.
  
촛대에서 빛이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심지가 타지고, 양초가 녹아져야 한다. 자기 희생이 우선하지 않으면 빛은 생겨나지 읺는다. 교회는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나 산 위에 있는 동리처럼 높이 들려져야 한다.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의 수고와 자기 희생을 통해서 진리와 착한 행실로써 세상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교회는 만에 한나라도 허물과 실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린 소자 하나라도 실족치 않게 하려는 세심한 주의를 항상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사도 바울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비유를 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엡 5:22-25).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가 되어진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과 같은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신부로서의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항상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오직 그리스도께만 복종을 해야 함과 동시에, 희생을 아끼지 않는 헌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밤 언제쯤 올 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도 같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둠과 함께 졸거나 잠이 들러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진다 해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진리에 대한 왜곡이 심할수록, 죄악이 관영할수록, 불평이나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귀가 바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재림에 대한 임박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수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참된 역할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나 행사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다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비유되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예루살렘, 성령의 전, 진리의 기둥과 터, 금 촛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1998년 8월호) 
    
교회의 표지란 무엇인가 ?

지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다. 그 중에는 천주교회도 있고, 성공회도 있으며, 개신교회도 있다. 개신교회 안에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교회, 루터교회 등 많은 교회가 있다. 또 그 안에는 각기 많은 교단들이 나뉘어 있다. 그래서 어느 교회가 과연 참된 교회인지를 분별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어려움은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심했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많은 교회들 중에서 참된 교회를 구별해 주는 기준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그 기준을 가리켜서 교회의 표지라고 한다. 교회의 표지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되어진다.
  
말씀과 참된 전파

참 교회를 분별케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또 말씀을 수호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만을 전파해야 한다. 이 말은 교회가 기록되어진 성경 말씀만을 전파해야 함을 의미한다. 성경에 없는 계시를 새롭게 받아 전하려 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역사적인 전통이나 학설들을 전파하려는 교회도 참된 교회가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말씀을 주시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말씀이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그 말씀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서 그 진위 여부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설사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실천함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만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이외의 것을 전해서는 안 된다. 이에 벗어나는 것은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또 좋던 싫던 자신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성경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어렵다고 피해 지나가서도 안 된다.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성경 말씀을 수단화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성경을 사사로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억지로 풀려고 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참되게 전파되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사도신경에 고백된 내용을 그대로 믿고 전파해야 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들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믿고 가르치셨던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 천지창조,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사람되심,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의 용서, 성도의 육체적 부활, 영생, 최후심판 등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이러한 내용들을 그대로 믿고 전파해야 한다.
  
둘째, 성경에 무엇을 더한다거나 빼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성경은 조그마한 가감도 허락하지 않는 책이다. 죄인의 구원과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일점이나 일획을 더하게 되면, 재앙을 받게 된다. 성경에서 일점이나 일획을 빼게 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 함에서 제하여 버림을 당하게 된다(계 22;18-19). 이해하기가 어렵다거나 현대 과학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는 일이 있다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궁금하다거나 꼭 필요하다고 하여 새로운 계시를 추가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성경 전체를 편협 됨이 없이 균형 있게 전파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는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다. 죄를 책망하고 저주를 경고하는 부분이 있고, 위로와 내일의 소망을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 내세를 말하는 부분이 있고, 현실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치는 부분이 있고, 가이사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 참된 교회는 이 모든 것들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균형있게 전파해야 한다.
  
넷째, 성경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여겨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그 권위는 그 자신의 권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가진 권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말씀의 전파자를 말씀과 같은, 또는 말씀보다 높은 권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종이 아들한테 하다가는 버림을 당하게 된다. 헤롯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다가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23). 말씀의 전파자가 말씀의 권위를 가로채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말씀의 전파자가 아니라, 그가 주장하는 사상의 교주에 불과하다. 참 교회에는 이런 일이 없다.
  
정당한 성례의 거행

성례(聖禮)란 거룩한 의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자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거룩한 의식들이 행해진다. 예배, 기도, 안수, 결혼, 임직 등 모든 의식물들이 다 거룩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이 모두다 참교회를 구분하게 해 주는 성례라고 보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성례의 종류가 7가지나 된다고 말한다. 영세성사, 성체성사, 고백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종부성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로마교회와 달리,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신약 교회를 위해 보여준 예표도 하례와 유월절 잔치 의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서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다. 주님께서 명하신 성례는 확대나 축소를 할 수가 없다. 선서식 같은 것으로 대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처럼 명령하신 성례를 반드시 말씀 그대로 거행하여야만 참된 교회라고 할 수가 있다.
  
주님께서 교회에 성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효과적인 수단을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성례를 주님의 말씀대로 정당하게 거행하면, 교회는 이를 통해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자체만으로 은혜가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례는 다음의 기준에 따라 행해질 때라야, 은혜의 수단이 되어지고 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진다.
  
첫째,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행해야 한다.
정확한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성례는 성례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방 종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술적인 의식과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성례를 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경 말씀을 통한 그 의미에 대한 설명과 확인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씻어짐을 의미한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쳐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짐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형제와 자매가 되어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 것에 대한 서약을 의미한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그 몸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의한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영양을 공급받게 됨을 의미한다. 그의 죽으심을 땅끝까지 전할 것에 대한 우리의 다짐을 의미한다. 동일한 음식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피차 한 지체들임을 의미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정당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
세례는 먼저 자신의 죄인임과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심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은 후에 행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죄가 용서받아졌음을 인치는 표에 불과하다. 그리고 세례는 반드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한다. 고백이 없이 베풀어진 세례나, 삼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지 않은 세례는 정당한 세례가 아니다.
  
성찬은 먼저 말씀을 통한 의미의 설명이 있은 후에 행해져야 한다. 오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떡을 들고 사례한 후에,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 다음에 잔을 나누어 마신다. 잔을 나누지 않거나 그 순서가 바뀌면 정당한 성찬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성찬에서 가져야 할 결의를 다짐하며, 찬송으로 마친다.
  
셋째, 지정된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성례에는 지정된 재료가 있다.
세례는 물로 베푼다. 물 속에 잠그는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물 속에 잠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을 찍어 바를 수도 있고, 뿌릴 수도 있다. 또 물을 부을 수도 있다. 또 물만 있다면, 특정한 장소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성찬은 누룩이 없는 떡과 포도에서 난 음료가 지정된 재료이다. 우유나 포도와 관계없는 술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반드시 지정된 재료를 사용하여 성례를 거행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재료 자체가 어떤 특별한 효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또 그 재료가 성찬과 함께 특별한 형태로 변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재료를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넷째, 합당한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성례가 아무에게나 행해져서는 안 된다.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유아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아들은 아직 죄나 신앙을 고백할만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례를 예표하는 구약의 할례가 유아들에게도 행해졌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들 중에 유아들이 포함되어 진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성찬은 그 의미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만 받아야 한다. 또 자기를 살펴서 죄를 회개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찬은 은혜의 수단이기보다,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시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유아세례 후, 아직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이나, 범죄로 인하여 징계 중에 있는 사람은 성찬을 받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합당한 사람에 의해서 베풀어져야 한다.
성례는 개인적인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성찬도 주위 몸을 함께 나눔으로서, 서로가 지체됨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례는 공적으로 그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부득이 하다거나 급하다고 하여, 아무나 성례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해서 집사도 성례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빌립은 공궤를 맡은 집사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전도자의 자격으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행 21:8).
  
신실한 권징의 실시

참된 교회를 분별케 해주는 또 하나의 기준은 권징이 신실하게 실시되는 것이다. 권징이란 선한 일은 권장하고, 악한 일에는 징계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된다는 것은 권징이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또는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행됨을 의미한다.
  
교회는 사랑을 내세워 범죄자를 동정하는 나머지 마침내 그 사람을 심각한 죄악에 이르게 하기가 쉽다. 또 작은 쓴 뿌리를 묵인하고 용납하다가 교회 안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쉽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다가 오히려 심각한 상처를 낳게 할 수도 있다. 또 일부 힘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권징이 악용될 소지도 있다. 그래서 교회는 권징을 신실하게 시행해야 한다. 고린도교회는 이 일을 등한히 하고 당을 만들어 분란을 일삼다가 사도로부터 심한 책망을 들었다(고전 5:12).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이 일을 잘함으로 칭찬을 받았다(계 2:23).
  
권징은 단지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교회가 권징을 실시하는 것은 성경의 실예와 교훈을 따른 것이다. 성경에는 교회에 직원들을 뽑아 세운 기록이 있다(행 6:1-7). 감독자와 장로들로 양무리를 치게 했고(행 20:28, 벧전 5:1), 피차에 가르치고 권면을 하여 덕을 세우게 했으며,(골 3:16, 살전 5:11), 필요에 따라 규례들을 작성했다는 기록도 있다(행 16:4).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셨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감독자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행 20:28). 사도 바울께서는 어지러움이 아니라 오직 화평이 되시는 하나님의 교회를(고전 14:33) 질서대로 다스리라고 하셨다(고전 14:40). 사도 베드로께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부득이 함으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치라고 하셨다(벧전 5:2). 또 교회의 순결을 더럽히는 자들과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귀지 말든지(살후 3:14), 내어 쫓으라고 하셨다(고전 5:2,13). 이러한 교훈은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과연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교회의 혼란사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은 권징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권징이 시행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시비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권징을 신실하게 시행하는 것이겠는가.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성경적 표준을 따라야 한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여 혼란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ㄱ르ㅐ서 교회는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조직과 제도와 규범들을 만든다. 예배의 형식과 절차를 만든다. 믿음의 표준이 될만한 신앙고백이나 신조를 제정한다. 권징이나 교육, 또는 봉사를 담당할 직분자의 수, 그 임무와 자격 등을 재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성경적 표준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한 번의 제정으로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어떻게 하면 질서를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항상 연구하고 살펴야 한다. 그래서 오류가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한다. 시대와 환경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있으면 개선을 해야 한다.
  
둘째, 회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
만일 교회 안에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단을 퍼뜨리거나 범죄를 하는 자가 있다면, 교회는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회는 먼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죄인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를 할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와 순결에 치명적인 영향이 있을 경우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주님처럼,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뒤엎어서라도, 성전을 깨끗게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권징을 실시하는 목적은 교회의 순결과 질서를 바로 하기 위함이요, 범죄자를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다. 권징은 결코 어떤 힘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권징이 남용 또는 오용되고 있다면, 참된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셋째,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교회는 권징의 실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 따른 일정한 절차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범죄자에게 공개적인 징계를 가하기 이전에 문제가 된 사실을 정확하게 분별하여서 오해나 실수가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범죄자에게는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두세 차례 회개를 촉구하여서 가급적 조용하게 해결되어지게 해야 한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증인을 세워서 다시 한 번 조용하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 다음에야 공적인 권면이나 책망을 고려한다. 이때는 범죄의 정도나 회개의 여부를 보아서 정직이나 면직을 시킨다. 또 성찬에 참여할 수 없도록 수찬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도저히 회개의 가망이 없을 경우에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서 출교를 명하기도 한다(마 18:15-17).
  
이름이나 소속 교파와 같은 명분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내걸고, 조직은 그럴싸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모두 참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참된 교회가 되려면 말씀을 참되게 전파하고, 성례를 정당하게 거행하고, 권징을 신실하게 실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들이 이러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쉬지않고 경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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