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직분에 대한 이해 (딤전5:17∼25)


 언젠가 새가족 환영회 때의 일입니다. 한 분이 교회의 직분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는 알겠는데 '강도사'는 무엇 하는 사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분은 '강도사(講道)'와 '강도'(强盜)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도(强盜) 다음에는 절도(竊盜)가 나와야 하는데 전도사가 나오니까 좀 헷갈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교단마다 약간다른 용어를 한가지로 통합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해가 소지가 있는 '강도사'(講道)를 '준목'(准牧)으로 통일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교회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에게는 교회내의 여러 직분에 대해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도 교회의 직분에 대한 오해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먼저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직제 구조는 계급적 구조가 아니라 기능적 구조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은 일차적으로 높고 낮음의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의 기능에 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의 직분은 출세나 진급을 위한 쟁취적 성격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를 위한 자원적 성격입니다. 가끔 교회 안에 보면 직분을 출세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쉽게 듣는 말 가운데 "아직도 장로 아닌가?" "그 나이에 권사도 못되었나?" 등등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직분을 교회생활의 진급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은 어떤 환경적 조건보다 은사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은사가 무시된 직분은 언제나 말썽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가 무시된 체 얻은 직분은 그 직분의 효용성을 잃게 됩니다. 언제나 교회의 직분은 은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은사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일하라고 주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초대 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교회의 직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했습니다. 신약 성경을 보아도 당시 교회의 직분은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장로" 혹은 "감독"이라고 불리던 지도자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돕는 "집사"입니다.  빌립보서 1:1에도 보면 이 두 가지 직분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돋 예수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러나 교회의 역사가 발전해 가면서 성경에 없는 많은 직제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시대적인 변화일 수도 있고, 직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작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성도끼리 서로 관리를 해야하는 차원에서 발생한 조직입니다.

지도자의 기능


본문은 장로의 직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장로로 불렀습니다.  

'장로'는 원래 오늘날처럼 목사와 구별된 또 하나의 직분이 아니었습니다.  '장로'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나이가 드신 연장자를 일컫는 말로, 교회에서 존경받을 위치에 있는 분에게 이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란 일종의 인격적인 존경의 호칭이었습니다. 5:1,2절의 '늙은이"라는 단어가 바로 '장로'(프레스비테로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장로'가 교회의 일을 기능적으로 관여할 때는 '감독'이라는 기능적 칭호가 붙여집니다. 그래서 처음 초대 교회에서는 '장로'와 '감독'을 별도의 직분으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교회 안에 기능의 중요성이 인식되게 되자 '감독' 의 의미와 '장로'의 의미를 구분 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감독의 의미를 가진 '목사'와 장로의 의미를 가진 '장로'로 발전되게 된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17절)

본문은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던 장로의 기능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의 기능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입니다. '다스리는 일'은 오늘날 장로의 기능에 해당하는 것이고 '가르치는 일'은 목사의 기능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교인의 대표로써 교인들을 다스리는 것이고, 목사는 교회의 대표로써 교회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이 두 기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의 조직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스림'이 없는 조직체는 조직체로써의 형성이 불가능합니다. 다스림이 없는 조직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스림의 사역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배나 존경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스림의 기능보다는 '가르침'의 기능을 훨씬 더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가르친다는 것은 교회 조직체의 생존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의 사활(死活)이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원한 상태가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다스림보다는 가르침의 사역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사역자들을 더욱 귀히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도행전 6장을 집사직의 기원이 설명된 장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도행전 6장에는 집사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그것이 집사직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세우는 사건이 나옵니다. 왜 일곱 사람을 세우는가 하면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초대 교회가 사역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의 사역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조직의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생존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지혜로움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공동체의 태도


성경은 이러한 교회 지도자들의 기능 때문에 공동체가 지도자들에 대한 태도를 바로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지도자의 기능을 존중하라
성경은 공동체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중하라고 가르칩니다. 왜 존중해야 합니까? 교회의 직분이 분명 계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존중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수행하는 역할 때문입니다.
다스림이 없이는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의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지도자에 대해서 말할 때, 그의 부족함이나 약함을 인하여 그의 역할까지 부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도자로 천사를 세우시지 않고 연약한 인간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그 분의 방법이라면 우리가 세워진 지도자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의 지도력을 무시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자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둘째/ 지도자의 생활을 책임져라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18절)

이것은 구약성경 신명기 25;4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슴을 종종 사역자의 생계문제에 대한 타당한 근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3 이하에서도 바울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셋째/ 지도자의 명예를 지켜 주라
19절을 봅시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19절)

교회의 지도자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할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소문에 쉽게 동조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남의 말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어느 공동체나 그렇지만 특히 교회는 말이 많은 곳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직분자들이 자기의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여서 하늘의 주인에게 충성하는 집사와 장로가 되야하는데 가끔 주의 종이 아니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경우에는 신중을 기하라고 가르칩니다. 특히 지도자에 대한 것은 아주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지도자의 명예를 함부로 실추시키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도자의 허물은 감추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도자의 흔들림은 곧 공동체 전체의 흔들림이기 때문에 함부로, 경솔히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넷째/ 함부로 지도자를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교회의 지도자를 경솔하게 판단하여 함부로 세우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왜 성경은 이 점을 강조합니까? 그것은 한 사람의 지도자가 공동체에 끼치는 영향 때문입니다. 잘못 세워진 한 사람으로 인하여 공동체가 무너지기도 하고, 이단에 빠지기도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기고 축복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는 직분자들의 자질과 자격에 대해서 소상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특히 3:6에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3;6)라고 했습니다. 여기 "새로 입교한 자"라는 말은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없는 자, 또는 믿음이 약한 자를 교회의 지도자로 뽑지 말라는 성경의 경고입니다. 초대교회 일곱집사들이 성령충만한 사람들로 택하여 세웠는데 그중 한사람이 이단의 시초로 니골라당을 만들어서 초대교회가 아주 어려운 곤경에 처했고 예수님도 요한 계시록에 요한을 통하여 니골라당을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뽑는 일이 아닙니다. 운동을 해서 뽑으면 잘못된 일입니다. 친분과 인맥을 동원하여 힘을 행사하는 것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행위요, 성경이 가르치는 바 신앙의 행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지도자의 자질


그럼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20∼2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범죄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지도자의 자질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자질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셋째/ 범죄에 공모하지 않아야 합니다. 넷째/ 자신을 거룩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출처 : 목회정보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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