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경과 외경의 종류
* 정경 (正經, canon)
1)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경전을 가리키는 말.
신·구약성서를 말하며 정전(正典)이라고도 한다. 본래 그리스어(語)의 kanon에서 유래한 말로서, 라틴어 ‘카논’은 ‘표준 ·척도 ·모델’을 뜻한다. 사도 바울로는 이 말을 ‘인간행위의 기준’이라는 뜻으로 썼으며(갈라 6:16), 초대 교회의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 교도의 신앙과 행동의 모범’이라는 뜻으로 썼다.
2)오늘날에는 성경 가운데서 최초부터 교회가 “성령(聖靈)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 인정한 것을 ‘제1정경(Libri Prodocanonci)’이라고 하고, 일부 교회(특히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제2정경(Libri Deuterocanonci)’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의 《토비트》 《유딧》 등 7서와 《에스델서》의 일부분 등 몇몇 부분이 그러한데,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것들은 ‘외경(外經)’으로 여기는 데 반하여, 가톨릭에서는 ‘제2정경’(7권)이라 하여 이것들도 정경으로 삼고 있다. 구약성서의 정경이 지금의 39권(원전에서는 24권)으로 정해진 것은 BC 90년경의 야무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서의 정경이 현재의 것처럼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였다.
* 외경 (外經, Apocrypha)
1) 외경은 성경의 편집 선정 과정에서 제외된 문서들.
2) 시대 : BC 2세기 ~ AD 1세기
외전(外典)·경외경(經外經)이라고도 한다. 정경(正經)과 대비되며, 그리스어 형용사 아포크리포스(apokryphos:감추어진)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구약의 ‘70인역’에는 포함되고 헤브라이어 성서에 들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처음엔 문학적 용어로 일반대중에는 금지된 책이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 쓰여진 14권 혹은 15권의 특별한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속하는 책은 다음과 같다. 《제1에스드라서》 《제2에스드라서》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편지》 《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상(上)》 《마카베오하(下)》 등이다.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 경우 외경은 총 14권이 된다.
외경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명칭도 서로 다른데, 가톨릭 학자들은 외경을 제2정경(正經: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종교적인 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외경의 형성 경위는 이스라엘 역사 중 바빌로니아 포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해야만 하였던 이스라엘인들은 포로기 이후에 성전의 재건과 헤브라이어 성서의 정경화 작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헤브라이어 정경이 율법서(《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예언서(《여호수아서》부터 《12소선지서》까지), 성문서(聖文書:그 이외의 《시편》 《잠언》 등을 대표로 하는 문학서)로 확정되면서 유대인들에게 규범적인 문서로 등장하였다(90년경). 알렉산드로스대왕이 팔레스티나를 정복하면서 그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를 당시 국제공용어로 만든 이후로, 점차 모국어인 헤브라이어를 잊어 가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는데(BC 3세기 중엽), 이 때 원래의 헤브라이어 성서에는 없던, 그리스어의 종교서적들이 삽입되었다. 이 외경의 종교적 가치에 대해서도 신 ·구교가 상이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대 동방교회가 4세기 이래 외경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은 반면, 라틴 교회에서는 외경에 큰 비중을 두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외경에 대한 이해는 루터의 견해를 빌려 설명할 수가 있는데, 그는 “외경, 이는 성서와 동등시될 수 없는 책이지만, 읽어서 유익하고 좋은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외경은 역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구약외경은 특히 신약성서 이해에 큰 공헌을 해왔다.
* 위경(僞經, Pseudepigrapha)
구약성서의 마지막 책이 되는 '말라기'와 신약성서가 시작되는 '마태복음'사이에는 적어도 수 백년의 시간간격이 있다.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곧장 이어진 것은 아니다. 수세기에 걸친 시간의 '다리'를 건너서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교량의 역할을 했던 시대를 보통 '중간시대'(Intertestamenta Period)라고 부른다. 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구약/신약 중간시대'가 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간단히 '중간시대'라고 부른다. 이 '중간시대'에 특기할 일은, 유대인들(유다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과 여러지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이에서 엄청난 분량의 종교적인 문헌들이 양산된 것이다. '중간시대'에 유대인들에 의해서 저작된 엄청난 분량의 종교적인 문헌들을 통틀어 '위경'(僞經)이라고 부른다.
'위경'이 양산된 기간은 '중간시대'중에서도 주전 2세기 이후 희랍시대. 로마시대의 기간으로 보고 있다.
'위경'을 영어로 Pseudepigrapha라고 부른다. 즉 '위서'(僞書)라는 뜻이다. 그런데 '위경'이나 영어명칭은 정확한 이름이라고 보기 어렵다. '위'(僞)라는 말은 허위(虛僞), 위증(僞證), 위계(僞計) 등의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속임', '거짓'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위경'이라면 '거짓성서', '성서로 속이는 거짓책'이라는 대단히 부정적인 뜻이 된다. '위경'이라는 말 자체는 이 책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저해하고, 다분히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명칭이다.
'위경'에 포함된 책들은 결코 스스로 성경이라고 주장하거나, 허위로 속이는 책들이 아니다. 다만 성서학자들이 '위경'이라는 별로 명예스럽지 못한 명칭을 붙였을 뿐이다. 따라서 '위경'이라는 책의 이름은 그 내용의 진위를 판단하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명칭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새로운 이름으로 대체될 때까지는 이것을사용할 수 밖에 없다.
'위경'의 한가지 특징은 위경을 구성하고 있는 수 많은 책들 중에 한 권의 책도 정확한 저자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위경의 책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그 책의 저자로 내세우고 있다.
예를 들면, 아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솔로몬, 엘리야, 다니엘 등 구약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이름을 빌려서 그들을 저자로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저자들은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뒤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렇게 위경의 책들은 실제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스라엘 역사의 위인들의 이름을 빌려서 쓴 책들이다. 즉 차명서(借名書)들이다. 오늘날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쓰는 차명(借名)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시대에는 흔히 있던 일이었다.
그러면 위경은 어떤 책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1913년 영국학자 P.H.Charles는 당시까지 수집된 위경의 책들을 영어로 번역, 편집하여 두 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책을 출판하였다.
'구약의 외경과 위경'(The Apocrypha and Pseudepigeapha)이라는 제목의 책은 1913년 이후70년 동안 위경의 교과서가 되어왔다. 그러다가 1983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의 Games Charlesworthsms는 그 후에 발견된 위경을 포함하여 새롭게 번역한 두권의 책을 출간하였다(Old Testament Pseudepigrapha). 이 두 학자의 책들은 위경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경신학적으로 볼 때 위경은 부활신앙, 천사론(angelology), 마귀론(demonology) 등을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위경'의 범위와 분류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
내용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참고
외경 논쟁에 대하여
1. 구약 목록의 확정, 얌니야 회의
바빌론 유수기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성서 문헌들은, 유다민족의 운명만큼 파란만장한 운명을 가졌다. 성서 문헌들의 원본은 전부 소실되었고, 히브리인들은 전란의 와중에서 성서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긴 전란은 유다인 민족을 여러 나라에 흩뜨려 놓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유다인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와, 신앙을 차츰 잊기 시작했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유다교의 랍비와 사제들은 성서 문헌의 수집과 보존에 힘쓰고, 또한 이국의 유다인을 위해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70인역은 바로 그 결과로 생긴 산물이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 원본 성서를 두서없이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와중에, 히브리 원본 출처를 알기 어려운 새로운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이 들어가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당시에 번역된 70인역은, 히브리어 원본보다 오히려 그 가짓수가 훨씬 더 많았다. 어쨌든, 이 70인역은 이후 일반적인 성서로서 히브리어를 몰랐던 대다수의 유다인들에게 자리를 잡았고, 유다인들은 70인역으로 공부를 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 70인역은 일반적인 유다교의 성서였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그 성서 인정 목록이 달랐던 것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오경은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성문서나, 예언서의 경우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원전이 남아있는 성서 문헌의 권위는 높았었고, 그 당시 히브리어 원전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비슷한 가치를 인정받는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목록이 어떤 것인지는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외경 논쟁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루살렘 붕괴로, 제사장들과 사두개 계급이 소멸된 가운데, 바리새 랍비들은 성서 목록의 확정작업에 들어간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어 성서 문헌들의 난립으로, 교계 내에서 경전 사용에 혼란을 겪었고, 나자렛파(기독교)등의 유다교내 이단분파들이 발호했기 때문이었다. 즉, 분파주의 덕분에 유다왕국이 멸망당했다고 바리새 랍비들은 인식하였는데, 당시 유다교 내의 최대의 분파주의자들은 바로 나자렛 당(현재의 기독교)이었기 때문이다. 그 들이 택하고 있는 분파주의의 위험요소가 있는 그리스어 문헌들은 경전중에서 당연히 제거대상이 된 것이다.
이단 분파들이 주로 사용하던 70인역의 권위를 무효화시킨 랍비들은, 원점으로 돌아가서 히브리 원전이 남아있는 문헌들만 성서로서 긍정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전성 부족'의 굴레가 '아가서'에 붙기도 하지만, 이는 히브리어 원전의 존재로서 상쇄되고, 그대로 경전성을 인정받게 된다.
히브리어 원전이 없는 70여권의 그리스어 문헌들은 유다교로부터 경전성을 부정당한다. 그 사유는 일단 원래 대본이 없음으로 인한 '출처 불명확'이었고, 거기에 보충하여 바리새파의 가르침에 반하는 경전들에게는 '경전성 부족'의 사유가 추가되었다.
2. 불가타 번역작업.
기독교는 그리스어를 쓰는 유다인들로부터 성서를 받았으며, 초기 개종자의 대다수를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찾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어 성서(70인역)가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공식적인 성서가 되었으며, 신약 성서에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 히브리 성서 인용들은 바로 이 70인역에서 따온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안에 있는 외경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성서의 일부가 되었으나,이 외경들의 정확한 정경적 지위에 대하여는 이견이 많았다. 사도적 교부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에게는 이 문헌들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그러나 멜리토(2세기 소아시아 사디스 주교)가 작성한 구약 성서 목록에는 그리스어 성서에서 추가된 문서들(외경)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오리게네스(약 185-254년)의 헥사플라는 구약 정경을 엄밀하게 22권으로 제한하고 있다.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의 총주교 다마수스는 라틴어 성서의 확정 작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작업은 당시 그리스어의 권위자였던 히에로니무스에게 떨어졌고,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을 기반으로 라틴어 구약 번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70인역의 많은 내용이 오역되어 있고, 출처가 불명확한 점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 그는, 유다교의 히브리어 본문이 보다 정확하고 믿을만하다는 것을 어필시키며, 문헌적인 근거가 확실한 히브리어 성서를 기반으로 하여 불가타 성서를 번역하고자 했다.
히에로니무스는 그의 생각대로 24권의 히브리 성서 목록을 39권으로 재분류하여 번역을 하였고, 70인역에는 있되 히브리어 원전에 없는 성서 문헌들을 '외경(αποκρυφσ, apocrypha)'으로 부르며 따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 문헌들의 경전성에 의구심을 피력하였지만 그의 주장은 다른 교부들의 공명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력한 반박에 굴복하여 외경의 경전성을 최종 긍정함으로서 초기의 교부갈등은 봉합되었다.
그 이후 아프리카 교회의 초기 공의회들(히포에서 393년, 카르타고에서 397, 419년)은 신약 성서의 목록을 최종 확정함과 동시에, '교회의 책들'(외경)을 성서로서 사용할 것을 긍정하였다.
시리아 동부에서는 7세기까지도 교회가 히브리 정경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집회서(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를 더하고, 역대기, 에즈라, 느헤미야를 제외한 히브리 성서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솔로몬의 지혜, 바룩, 예레미야의 편지, 다니엘 추가본 등이 합쳐지기도 하였다. 6세기 페시타(시리아 본)의 필사본은 암브로시안 사본으로 알려졌는데, 거기에는 마카베오스 3, 4권과 에스드라 2, (때로는 4) 권, 요세푸스의 전쟁사 7권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3.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의 경전확정.
천주교의 제 2경전에 속하는 70인역의 '외경'들은 힙본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의 성서 확정 이후부터, 별 다른 의구심 없이 경전성을 인정받아 왔지만, 히에로니무스 이후에도 가톨릭 내에서 극 소수의 신학자들이 외경의 경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계속 제기하였다. 한편, 초기 불가타의 목록 중에서 마카베오스 3, 4권, 동방의 그리스도교, 시편 151편의 경전성이 가톨릭 내에서 최종적으로 배제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가톨릭 교리 일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마리아 신심, 성인 성녀의 중보기도, 구원에 있어서의 행실의 중요성, 연옥설 등은 그 주요 타겟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기능하는 토비트서, 집회서, 마카베오스 2서등으로 인해서, 외경 전부는 그들에게 있어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마리아 신심의 경우, 초기 개혁자들보다, 개신교 교리 발전 과정에서 반 가톨릭 경향에 따라서 비판된 경우가 더 많다. 오히려 개혁자들은 마리아 신심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유다교 얌니야 회의의 결정을 그대로 따라, 유다교의 24권 경전(κανων, kanon)을 재분류하여 39권으로 나누는 히에로니무스의 경전 목록을 인정하고, 교회의 책들, 즉 외경들은 경건문학으로 분류하며, 경전성을 부정함으로서 가톨릭의 일부 교리들을 공격하는 포문을 열었다. 14세기 초의 리라의 니콜라스는 히브리 성서 목록을 진리로 규정하고, 라틴어 불가타를 비판하였다. 이런 전통은, 이후 얀 후스, 울리히 쯔빙글리, 마르틴 루터, 쟝 깔뱅, 존 녹스등의 종교 개혁가들이 그대로 계승하였고, 그들의 자국어 성서 번역본들은 '외경'을 '정경'들과 분리해서 수록하였다.
이에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 측의 주장을 억누르고, 내적인 '정경시비'를 종식시키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었다. 주교들의 회의는 계속 이어졌고, 마침내 '사크로 산크타 교령'을 통해서, 교황의 교도권으로 70인역 성서의 목록, 즉 '교회의 책들' 중에서 7권의 문헌을 경전으로 공식 인정하고(제 2경전), 초기 불가타 목록 일부를 제외하여, 구약 46권의 경전을 최종 확정한 것이다. 그 와중에서 에스드라스 3권과, 70인역에 없고 불가타에만 있었던 에스드라스 4권과 므나쎄의 기도는 2경전의 목록에 들지 못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개신교측은 정경 66권만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것을 재확인하고, 성공회와 루터파를 제외한 나머지의 종파는 가톨릭의 사크로 산크타 교령에 저항하여 외경의 교회내 봉독을 금지하였다. 장로교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통해 처음 그 경향을 확정하고, 나머지 종파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동방 정교회측은 예루살렘에 각국 정교회 총대주교와 주교들이 모여 시노드를 개최하고, 외경의 경전성 문제를 논의하였다. '교회의 책들' 중에서 정경과 작성 연대가 비슷하고 초대 교회에서부터 논란 없이 이어져온 4권만을 경전으로서 인정하고, 4세기에 들어서 비로소 불가타 목록에서야 확인되었던 나머지 문헌들은 '외경'으로 둠으로서 경전성을 부정한 것이다.
4. 사해 문서와 외경 논쟁
1947년 사해 문서의 발견은, 종전의 신 구교간의 '외경논쟁'에서 일단 가톨릭 측의 손을 부분적으로 들어주었다. 종전에는 외경(제 2경전)에 해당하던, '예레미야의 편지(바룩)', '집회서', '토비트' 등의 동방 정교회의 2경전 목록에 해당하는 고대 히브리어 필사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얌니야 회의에서 외경 배제의 결정적 사유로서 주장되었던 일부 외경 문서들의 '출처 불명확'의 근본적인 사유가 어느 정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쥬빌리'나, '하가다'등의 개신교의 '위경(ψευδεπιγραφα, pseudepigrapha)'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헌도 발견되었으며, 정경의 문헌들과 비교해 볼때, 외경의 히브리어 문헌들의 보존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출토된 외경 문헌에는 정경 문헌과 달리 미드라쉬의 존재가 없다는 점을 놓고서 개신교에서는 단순한 히브리어 문헌 출토가 경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유다교의 경우에는 아직 사해문서와 얌니야 회의의 결정의 연관성을 놓고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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