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의 젊은이들은 모두 어디 갔습니까?

 

요즘 세상은 온통 젊은이들의 함성과 문제로 가득 차있습니다.
전교조의 젊은 교사들뿐 아니라 필사적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운동권의 학생들. 그리고 분신자살도 불사하는 파업노조 지도부들을 보면 모두 싱싱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이 땅의 거리가 좁다는 듯이 활보하고 다니는 폭력세력들이나 마약집단들 그리고 향락을 추구하는 세력들도 젊은이들입니다. 입시학원의 건물이 서있는 곳을 가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젊은 재수생들의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바로 이 땅의 젊은이들입니다.


어디를 가나 젊은이들로 가득차있습니다. 야구장이나 축구장뿐 아니라 영화관. 오락관. 전자게임. 만화가게. 술집. 디스코회관 어느곳에나 말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똑똑하고 뜻있는 젊은이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대학부에 가 보아도 별로 없고 청년부에 가보아도 그렇습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전도회는 지극히 활동이 미약하고 모임이 위축되어있는 반면에 여전도회는 활동이 활발하고 모임이 왕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교회를 등지고 떠났고 반대로 세상은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겼을까요. 몇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젊은이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교권이나 교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싸우는 데 바빴고 건물 짓고 교육관 짓는 등 자체 유지나 성장에만 관심을 가져왔읍니다.


단지 젊은이들을 유년주일학교. 성가대 등 교회 봉사의 원동력으로 삼는 데 관심이 있었지 젊은이들에 대한 바른 비전을 가지고 그들을 양육하거나 그들에게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유년주일학교나 대예배는 힘을 주어 강조한 반면에 젊은이들의 예배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둘째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데 대부분의 교회가 실패했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부를 거쳐서 대학에 올라오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이 세상 속에서 수없는 갈등을 겪게 됩니다. 거기에는 사춘기적인 갈등도 있지만 사회적인 갈등과 민족적인 갈등도 있읍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모든 갈등을 극복해낼 수 있는 분명한 복음과 투철한 신앙을 키움받지 못한 채 적당하게 방치되었읍니다. 교회를 떠난 대부분의 청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마디로 '교회에 대한 실망과 환멸' 이란 단어입니다.


세째로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꿈을 주는 데 실패 했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 질서체계가 무너지고 과격한 사회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젊은이들은 어떤 이상과 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야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어했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 때에 그들은 진정한 야망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읍니다.


오늘의 한국 현실인 분단의 아픔이나 통일의 문제나 빈부차이의 문제나 역사의 정통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은 교회로부터 별로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그들의 가장 예민한 특징인 위선, 불의에 대한 분노와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이해받지 못하였고. 내일의 조국과 세계에 대한 꿈과 이상도 가르침 받지 못했습니다.


현실문제에 대해 교회가 던져주는 이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세계선교의 꿈을 안고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교회상도 그들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젊은 이들은 교회를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잃어버린 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크고 웅장하고 화려해도 그것은 폐허와 같은 교회에 불과합니다. 어린이와 노인들과 여자들만 있는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서둘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 모아들여야 합니다.


첫째 교회는 젊은이들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투자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목회자가 직접 뛰어들어 정열을 쏟아야 해결됩니다. 젊은이들을 무서워 말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정열을 불태울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가장 귀한 투자는 건물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젊은이들에 대한 투자입니다. 교회 형편이 가능하다면 대학, 청년부 지도자는 전임 사역자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캠퍼스와 직장에까지 찾아다니도록 해야 합니다. 마치 담임 목사님들이 각 교인의 집을 방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소리가 교회에 들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하며 그들에게 참된 크리스챤의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직업관을 바로 세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성경공부와 함께 개발해야 합니다.
둘째는 젊은이들에게 분명한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화약고와 같습니다. 그들이 잘못되고 과격한 사상에 오염되면 오히려 교회를 파괴하고 교회를 변질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정치 투쟁의 장소로 만들거나 사회사상의 온상으로 삼도록 해서도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을 오염시키기 쉬운 것은 잘못된 신학사조입니다.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고 감성적으로 예민하고 지적 욕구가 많기 때문에 비성경적인 사조에 대해서도 쉽게 긍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바로 젊은이들의 지도자의 자질과 신앙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인격적인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지도자가 아니고서는 젊은이들을 맡겨서는 안됩니다. 비록 목사님이 직접 가르치는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복음적인 지도자를 세울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진정한 모든 사역이 시작되기 때문에 철저하고 분명한 성경교육을 시켜야만 젊은이 사역은 가능합니다.


세째는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초한 복음적인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민족과 세계를 짊어지고 나갈 꿈과 이상을 교회가 심어주는 일입니다.
특별히 성경적인 세계관과 직업관을 세워주는 일은 시급하고 중요하며. 동시에 성경적인 역사관을 세워주어서 민족과 통일과 역사를 보는 눈을 심어주는 일도 그러합니다.
야망과 이상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향략뿐입니다.


동시에 잘못된 야망과 이상을 갖게 된 젊은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이단종파나 아니면 과격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뿐입니다.
지난 20년동안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운동권 계열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실정법을 어기면서 이북에도 가고 퇴학도 당하고 고문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습니까.
반면에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교회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역사에 대해서 어떤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행동합니까.


여기에 우리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참된 야망과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안에 다시 젊은이들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생기 넘치는 발자국 소리가 교회를 진동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게 젊은이들을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교회당을 짓는 일은 연기할 수 있으나 젊은이들을 위한 투자는 연기할 수 없어야 합니다.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가 젊은이들의 소리를 수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 변화해야 합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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