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구조조정  

이정석 (국제신학대학원)

한국교회는 1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형성 발전해 나오는 동안 독특한 구조와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오늘날의 경제적 위기상황에서 발전적 미래를 위해서는 단지 미봉책에 그칠 것이 아니라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거국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유례없는 급성장으로 인하여 세계교회의 칭찬을 받았던 한국교회가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성장중지라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으나, 보다 심각한 위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적인 문제에 있었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탁월한 교회의 수적 성장은 시간 문제에 불과하지만, 아무리 비대한 교회라 할지라도 질적으로 부실한 교회는 얼마가지 않아 수적으로도 급격한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질적인 문제는 특히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감정적인 회개나 순간적인 성토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구조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두가지를 유의하려고 한다. 한가지는 특정 교회나 교단의 개별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구조적인 문제만을 다루기 위하여 한국교회 대부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문제만을 다루려고 하며, 또 한가지는 구조 조정에 대한 시류에 편승하여 교회의 재정문제에 치우치는 경제주의나 정치적 민주주의, 혹은 효율위주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하기보다 성경적인 교회론의 조망에서 문제가 되는 구조를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교회는 사회학적 원리로 분석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단체나 종교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신비적이고 영원한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문제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이라고 생각되는, 그리하여 그 개선이 한국교회를 보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되는 일곱가지 구조적 결함을 살펴보고, 그 개선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선교 반세기동안 하나의 교회를 잘 유지해 왔다. 하나의 장로교회, 하나의 감리교회, 하나의 성결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민족의 해방과 함께 정치적 분단이 일어났듯이 교회도 분단이 일어났다. 이조의 유교가 물려준 당파싸움의 전통 때문인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간의 시대적 대립에 자극받은 때문인지 교회의 분리운동이 시작되었으며, 특별히 WCC문제가 야기되면서 50년대말 두 개의 장로교회, 두 개의 감리교회, 두 개의 성결교회로 갈라져 보수와 진보라는 양대 구도가 고착되고 서로 정죄하고 비난하며 만나지 않고 분단되는 양극화 구조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나누어진 두 그룹에서는 보다 선명하고 강력한 보수성과 진보성이 환영을 받으면서 서로 극단으로 치닫는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 두 진영을 화해시키고 구심화하려는 중도적 입장은 양측 모두에게 소외되어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성경적 가르침과 정반대의 경향이며 교회가 하나라는 정통적 교회관에도 배치된다. 이단은 물론 제외되어야 하지만, 천상에서 만난 교제할 형제들을 지상에서 정죄하고 교제하지 않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내세관이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탄적 구조는 교회의 하나됨을 무력화시키고 정치적 남북분단에 대해서는 통일을 외치지만 교회 자체는 분단을 진지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는 모순된 모습을 세속사회에 보여주고 있다. 80년대에 들어 사회적 비난과 정부의 요구에 이끌려 연합단체들이 출현하였으나, 교권의 장악과 분배에만 관심을 가질뿐 진실하고 성실한 하나됨을 향해 노력하지 않고 실제적으로는 분리를 정당하게 생각하면서 입술로는 연합을 기도하는 외식을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보혁의 양극화 구조는 한국교회에 불필요한 경쟁과 불신, 비난과 자만을 일으켜 교회 밖으로 분출해야 될 엄청난 영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대사회적 설득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복음적인 교회들은 독선적인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대동단결하여 대화합을 이루어야 한다. 종말의 교회는 반목상태를 하루 속히 청산하고 하나된 모습으로 주님을 맞아야 할 것이다.


2. 교단주의

교단이란 근대사회의 종교적 관용에 근거하여 발생한 교회들의 집단이다. 교단은 대개 국가단위로 형성되며, 신조와 정치제도라는 양대축으로 구성된다. 유럽국가들은 제한된 교단만을 가지고 있으나, 유럽국가들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에 의하여 수많은 교단들이 미국에 이식되었는데,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의 영향아래 수많은 교파교단이 수입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지도자나 지역, 또는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분리주의적 교단들이다. 신조와 정치제도가 정확히 혹은 거의 동일한데 다른 교단을 형성한다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순간적인 오해나 분쟁으로 분리되었다 할지라도 신조와 정치체제가 같은 교단들은 될 수 있는 한 빠른 시일 내에 분리사유를 해소함으로서 재결합되어야 한다. 특히 그러한 군소교단들은 불필요한 수고를 중단하고 통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됨을 가로 막는 문제가 바로 교단주의라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구조인 것이다. 대교단들은 교단의 담을 높이 쌓고 가입을 거부하거나 어렵게 하고 있다. 오히려 넓은 마음을 가지고 절차를 간소화하여 복귀나 통합을 격려함으로서 교단분열을 영속화하지 말고 하나됨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거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교단의 질적 저하에 대한 우려는 이미 대교단에도 목회자의 질적 다양성이 있으므로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며, 그 교단의 평균교육수준에 모자라지 않는 목회자들은 간단한 심사를 통하여 환영하고 그에 미달하는 사람은 미비된 교육을 추가로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교단의 수는 적을수록 좋다. 머리도 하나요 몸도 하나라고 고백하는 교회가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하고 각자 높은 담을 쌓고 자만심으로 안주한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인 것이다.

 

교단은 임시적인 것이지 영원하지 않다. 교회의 하나됨을 희생하면서 교단의 영광을 도모하는 구조적 죄악은 소수의 교권정치가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며 거기에 아부하는 일부 어용신학자들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러한 분리주의자들을 배제하고 교단주의라는 파당적 구조를 과감히 청산하여, 신조와 정치체계를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소수의 교단만 존재하도록 정비되어야 한다.


3. 신학교육의 상업화

교회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이 저질화되고 상업화되었다는 사실은 교회나 사회 모두 잘 알고 있으며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교단의 무수한 분열이 수많은 교단신학교를 발생시켰으므로 교단주의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소교단들은 교단의 유지를 위해서 교단신학교가 필요하였으나, 교수나 교사를 확보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부실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신학사상이 유사한 신학교에 공동교육이나 위탁교육을 실시함으로서 해결될 수 있다. 심지어 중형 신학교들도 연합교육을 실시함으로서 교수진과 시설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최소한, 대학원과정만이라도 몇 신학교가 연합한다면 다양하고 전문적인 교수진을 갖춤으로서 국제적 수준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이나 공동 혹은 위탁교육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문제들은 신학교의 다교단 인준화와 정부의 기술적 협조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학교의 저질화는 상업화 때문에 일어났고, 상업화는 교회의 무책임에서 발생하였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각종 선교나 건축 및 후원활동에 적극적이지만 자기들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는 극도로 관심이 없고 무책임하다. 따라서 신학교는 자체 유지를 위하여 신학생을 많이 받아야 했고, 그것은 입학수준의 저질화를 초래하였다. 상업주의 논리는 자연히 교수당 신학생비율을 상승시켜 지도자로서의 인격교육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교육형태는 지성과 덕성과 영성을 겸비해야 하는 성직자에게 있어서는 치명적 결격을 결과하며, 결국 교회가 그 부담을 안게 된다. 실로 신학교육은 모든 교회의 공동교육사업이다. 따라서 모든 한국교회는 신학교육예산을 편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규모는 총회가 먼저 교단신학교의 학생규모를 합리적으로 결정한 후 그 교육에 소요되는 총액을 교단소속교회의 예산총액으로 나누어 편성율을 매년 결정하여 각 교회가 예산편성에 적용하도록 지시하고 총회가 책임지고 모아서 신학교에 전달하는 제도가 정착되어야 하며, 헌신된 신학도들에게 학비를 요구하는 상업논리는 중단되어야 한다. 정원을 교단의 수급상황에 맞게 제한하여야 한다. 실로 목회자의 과잉배출은 심각한 적체현상과 그 부작용을 나타내고 있다. 서구의 교단신학교들은 대개 이런 제도가 정착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부 교단에서 시도되고 있다.

 

그리고, 세상적 기준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라고 가르치는 신학교수들 사이에서 학벌주의나 지방차별이 조장되는 것은 조속히 사라져야 하며, 교수들에 대한 교권적 횡포를 방지하기 위하여 교단의 신조에 서명하도록 하고 그 외의 정치적 입장이나 신학적 방법론까지 시비를 거는 일이 없도록 신조안에서의 신학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4. 개교회주의

지난 20여년동안 한국교회는 경제성장과 함께 급성장하였으며, 이제 한국의 제일종교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교회들간의 무한경쟁은 과거의 오랜 지역중심의 안정적 구조를 깨고 약육강식의 패권주의가 새로운 구조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교단의 예산규모를 뛰어넘는 대형교회들의 출현은 이미 교권투쟁과 교단분열로 불신을 받던 교단을 무시하고 개교회주의를 형성하였으며, 이러한 풍조는 많은 교회에 확산되었다.

 

이로 인한 악순환은 반복되고 심화되어 교단은 점점 더 무력화되고 교권장악과 향유의 장으로 전락하였다. 실로 개교회주의는 현대의 개인주의 풍조가 경쟁적인 자유경제체제 아래서 교회에 정착된 비성경적이고 반교회론적 구조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회보다 자기교회에 더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하는 허위의식과 다른 교회들을 백안시하는 자기중심성은 분명히 기독교신앙에 역행하는 현대적 나르시즘이다.

 

모든 개교회는 아무리 강력하고 비대하다 할지라도 하나인 교회의 적은 지체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독자적 정체성의 추구는 허구적이다. 개교회주의는 그 교회만의 프로그램과 상징을 창조함으로서 그 우위성과 집중성을 강화시키려고 하지만, 그 아성은 오래 가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노력은 교인들을 끝없는 프로그램과 행사에 지치게 만들고 심지어 세속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려 한다.

 

개교회중심주의는 모든 사업이나 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진행하며, 교단이나 연합단체를 무시하고 자기 교회의 영광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개교회의 독자적인 사업이 단순성 때문에 기동력이 뛰어나며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 개교회주의는 매우 비효율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전도나 선교, 교육이나 구제 등에서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사회구조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연합하여 전문조직을 형성하고 관리하며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교단이나 연합기관들은 전문성을 갖추어 개교회들이 할 수 없는 사역들에 있어서 그들을 효율적으로 봉사함으로서 그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여야 한다.


5. 교회들간의 우열의식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은 도시화라는 거대한 변화를 유발시켜 농어촌교회를 약화시켰으며, 도시에서도 치열한 교회간의 경쟁은 크기에 따라서 급수가 결정되는 세태를 연출하였다. 큰 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은 우월감에 넘치는 한편, 작은 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은 열등감에 빠진다. 교회의 평가는 교인의 숫자와 재정적 능력에 의하여 판정되며, 목회자의 대우는 그에 비례한다. 교회의 질과 양은 실제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는다. 농어촌에 헌신한 목회자들은 무능하다고 여겨지고, 더욱이 도시에 있는 적은 교회의 목회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능력이 적다고 평가된다. 이단이라고 정죄했다가도 대형교회가 되면 슬그머니 그 교회를 부러워하고 부담금을 많이 내면 연합단체도 환영하고 우대한다.

 

소수의 대형교회와 목회자들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소형교회와 헌신된 목회자들을 희생시켜 우월감과 특권을 누리며 산다. 마치 세속사회의 부자와 가난한 자, 출세한 자와 힘없는 서민, 대기업과 영세기업같은 관계와 평가가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하나됨과 지체됨을 인식하지 못하는 반교회론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부자 교회가 가난한 교회에 적은 도움을 줄 때도 마치 거지에게 몇푼을 던지듯 비인격적인 대우를 하는 사례가 흔하다.

 

모든 교회는 형제이며, 더욱이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가 더 존경받아야 하는데도, 교회들간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을 가지고 차별하고 우열의식을 가지는 현실은 분명히 타파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대형교회들은 위성중계장치를 설치하여 주변도시를 잠식하고 문어발식으로 지교회를 확장해 나가는가 하면, 대교회교인이라는 긍지에 빠져있던 교인들은 멀리 다른 지역이나, 심지어 외국에 가도 자기들끼리 모여 같은 이름의 지점교회들을 세운다.

 

모든 교회는 한 몸으로서 이러한 세속적 우열의식을 극복하고 일체감을 회복하여야 하며, 재정적으로도 헌금이 그 개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인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한 몸이 섭취한 영양분을 모든 지체가 골고루 분배하듯이 나누는 마음이 필요하다. 서구교회가 오랫동안 실행해 오는 바와 같이, 목회자의 사례는 가족규모나 약간의 경력상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평준화되어야 하며 그 원칙은 교단이 매년 물가와 지역적 편차를 고려하여 자세하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재정적으로 강한 교회는 약한 교회를 의무적으로 책임져야 하며, 그것은 목회자 사례뿐 아니라 전도나 교육, 건축과 구제에서도 교단의 주도하에 필요한 교회들에게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


6. 교회의 직제와 운영방식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중심적 기관으로서 그 맡은 바 사명이 중차대하다. 따라서, 그러한 사역들을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하여 능률적인 조직과 운영구조가 필수적이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위임받은 사도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다가, 점차 교회가 성장하고 복잡화되면서 사도와 장로와 집사의 3직제로 확장되었으며, 교회역사상 다양한 정체가 발생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이 구도가 교회직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직제를 도입하였는데, 전도사와 권사, 그리고 1년임기의 서리집사 제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직제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한국교회를 기형화하고 비능률적으로 만드는 구조적 문제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장로제도의 원리를 성경적으로보다 민주주의적으로 이해함으로서 많은 교회들에서 목사와 장로의 대립과 갈등이 교회의 역동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장로들을 마치 국회의원같이 생각하고 당회를 국회같이 오해하여 목사를 견제하는 주체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적 이해와 매우 다르다. 또한 목사도 마치 대통령과 같이 교회의 모든 살림에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같이 생각한다. 물론 사도에게 모든 사역이 위임되었으나, 심지어 사도들도 한계를 느끼고 집사와 장로를 선택하여 사역을 분배 위임하였다.

 

그런데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분업화된 사회에서 목사가 모든 일에 개입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사역은 분명히 구분되어 상호 충돌하거나 중복되는 혼선을 빚지 않도록 성경적 모범에 따라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재정의 관리는 집사에게 일임하고, 장로는 담당 교인들을 심방하고 지도하며, 목사는 설교와 교육, 예배와 성례, 그리고 기도와 상담을 담당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이러한 직제와 사역분담은 전통깊은 서구교회에서 잘 정착되어 왔다. 한편, 교회의 회의제도가 가진 문제점도 개선되어야 한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회의운영방식은 보편적이지만, 교회가 너무 회의에 의존하면서 비능률적으로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성경적 원리는 직분중심제이지 회의중심제가 아니다. 직분자에게 위임된 사역은 그가 크게 그릇되지 않는 한 타인이 간섭할 수 없으며 그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회의란 보조적이며 협의적인 성격을 지닐 뿐이어서, 회의를 통하여 타인의 사역을 간섭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또한, 당회나 제직회, 혹은 공동회의를 비롯한 교회의 제반 회의들이 분명한 안건채택없이 아무 문제나 거론하여 무질서하게 진행된다든지, 정당한 회의법을 따라 절도있게 논의되지 않고 횡성수설하는 가운데 지루하고 언쟁적인 분위기를 유발시켜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7. 교회의 재정운용

구약교회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는데, 그 재정은 주로 십일조에 의존하였다. 십일조는 3년을 주기로 하여 1년분은 구제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2년분은 제사장을 비롯한 레위인들, 즉 성전봉사자들의 생계와 성전보수관리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성전예배가 폐지되면서 전액이 구제에 사용되다가 점차 교회가 안정되면서 성직자의 생계와 선교 및 건물비 등에도 배정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재정사용의 3대영역, 즉 구제와 성직자생계, 및 교회운영중 첫째 부분이 심하게 약화되어 있는 반면, 셋째 부분인 교회운영이 다양화되면서 비대해지는 편중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둘째 영역인 성직자의 생계는 교회에 따라 일부는 지나치게 과대지출되고 많은 소형교회들에서는 과소공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는 구제의 영역을 확대하여 제반 사회봉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이는 이기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와 교육등 교회사업이 마치 모두 돈의 문제인 듯 추진되는 세속적 방식이 지양되고 건물비도 효율적으로 절약함으로서 교회운영의 영역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교회들은 자기 교회를 특성화하기 위하여 특정 사역에 과다한 예산을 설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교인들의 균형있는 신앙형성을 위하여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히려 모든 교회들이 균형있는 예산 편성을 하고 연합기관을 통하여 전문화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리고 목회자의 생활비는 원칙적으로 평준화하고 교회의 대소나 경력보다 필요에 따라 공급되어야 한다. 한 교회의 재정운용은 그 교회의 헌신과 순종을 반영한다. 교회의 재정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그 사용에 있어서도 그 구성원 마음대로가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된 뜻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영적 전투상태에 있으며, 따라서 부단히 내적 전열정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비성경적이거나 비능률적인 구조적 문제가 발견되면 과감히 조정할 수 있는 역동적 순종이 요구된다. 한국교회가 21세기에 부상할 아시아의 선교본부로서, 그리고 7천만 동포의 복음화를 완성하며, 나아가 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임하게 하기 위하여 과감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우리의 내부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의 칼은 무디고 아군끼리 부상을 입히는 오합지졸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는 자체개혁을 필요로 하며, 개혁하는 교회만이 계속 발전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주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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