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전도  

 

이태웅(GMTC 원장)


 

서론
선교의 정의가 "전도중심축(evangelism-centric)"에서 "다중심축(multi-centric)"으로 옮겨지는 계기가 된 1974년 로잔 제 1차 대회 이후 세계의 기독교인 수는 아직도 전체 인구에 비하여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1970년대의 전체 인구 중 33.5%가 기독교인인데 비하여 2001년에는 0.5% 감소한 33%만이 기독교인이다.

이런 추세로 갈 때 2025년에는 세계 인구가 78억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는데 비하여 전체 기독교인 수는 26억에 불과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의 증가율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선교가 타문화 전도와 동일시되었던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선교 전략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중심축으로 하는 총체적 선교는 과거 30여년 간의 갈등과 협의를 거쳐 거의 정착되었고 선교 신학적으로도 정립되어 가는 현실이다.

다만 이제 복음주의자들이 어떻게 전도의 초점을 유지하면서 다중심축선교를 하는가에 관심을 쏟아야할 때가 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선교와 전도와의 역동적 관계를 조명하여 보고 전도의 위치를 재설정하는 것은 21세기 선교를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를 위하여 먼저 초대교회에서의 선교와 전도의 관계와, 선교역사 중에 나타난 선교와 전도의 관계와, 현대선교학 운동이후(60년대) 선교와 전도와의 관계를 훑어보겠다.

끝으로 현대에 바람직한 선교와 전도의 관계설정을 시도하겠다.

1. 초대교회에서의 선교와 전도의 관계
구약과 오순절 이전에도 선교와 전도는 존재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눅 24:44-48에서 암시하신 바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선교와 전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후 구속사역이 완성된 이후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교학자들 중 다수는 이전의 구심력적 선교와 차별하여 이를 원심력적 선교라고 불렀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선교와 전도의 정점(혹은 새로운 시작점: climax)은 오순절 이후부터 나타난다.

이후부터는 그리스도의 강림과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 구속이 곧 선교와 전도의 핵심이 된다.

따라서 돋(C.H.Dodd)이 주장하는 소위 사도들의 케리그마(전도내용)가 있었다는 것은 일리 있는 이야기이며 중시해야 된다.

우리는 케리그마가 곧 선교의 핵심내용인 것을 오순절 이후 기록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사도행전이 가장 좋은 예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전도가 수평적 운동, 곧 지역적 및 양적 팽창이었다면, 서신서들은 선교의 수직적 운동(전도후 완전화)을 나타내고 있으며, 계시록은 선교의 완성 곧 전도의 최종적인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서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찾아보려는 우리의 시도는 언제나 성경해석학적인 상식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구약에서도(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도) 선교와 전도에 대하여 나오는가를 묻는 것은 당연하나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성서가 제시하는 선교의 패러다임으로 주장하는 것은 계시의 점진성을 무시하는 격이 될 것이다.

 

신구약 모두 전도와 선교가 나온다. 이는 눅 24:42에서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이다.

예수님은 선교를 전도와 거의 단순비교 하셨다.

그러나 선교가 전도이상이라는 점은 마 28:18이하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과 요 20:21-23에서 예수님의 보내심의 성격을 본받아 우리도 보내심을 받았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서신서는 전도받은 사람들을 육성하는 내용이었고, 또 계시록이 완공된 청사진이라는 면을 통해서도 선교는 전도이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선교에 있어서 언제나 전도가 도외시되거나 축소되는 것은 구속사가 주는 메시지를 외면하는 격이 될 것이다.

구속사를 외면하면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골격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럴 경우 기독교도 결국 구원이 없는 다른 인본주의적인 종교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행 1:8) 오순절 이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그 당시 알려진 온 족속에게 증거하였다.

그들의 선교는 전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언제나 전도가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시급한 선교사역이었다.

바울의 선교여행을 보았을 때 선교와 전도의 관계성은 좀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바울 사도는 4차까지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한번도 전도를 등한시한 적이 없다.

 

물론 전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전도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형성되어 양육받는 일까지 계속 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필요할 때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것처럼 공의회를 열어서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 회의 내용도 전도에 관한 장애물을 없애기 위한 것을 볼 수 있다.

간간이 일어나는 기적을 통해서도 전도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이런 사역은 그의 서신들 가운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로마서 1장의 내용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롬 1:14-17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그의 유언장과 비슷한 디모데후서를 보아도 그의 선교사역의 성격을 볼 수 있다.

그는 디모데후서 4장에서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권고하였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1-5).

 

또 4:16이하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이런 내용이 바울 사도의 선교사역을 잘 요약해주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선교와 전도의 관계성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우리가 신약을 자세히 다 검토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몇 가지 예만 보아도 초대교회의 선교에 있어서 전도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볼 수 있다.

아마도 전도가 구심점을 이루어 그 결과 교회가 개척되고 그 나머지 일들은 이를 위한 사역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의 시대에 벌써 그 당시 알려졌던 전 세계가 복음을 듣고 각처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곧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며 선교의 패러다임이었다.

 

우리는 이 같은 다이나믹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어디서 잘못 되었는가?

 

우리는 이런 점들을 다시 한번 밝히고 선교와 전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는 균형을 잃은 상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여전히 복음화되지 않은 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원래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여주신 선교에 대한 청사진이 아니다.


Ⅱ. 선교역사 중에 나타난 선교와 전도의 관계
전도가 중시되었던 선교는 4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독교가 정치세력과 결탁되는 중세에 들어서면서 더욱더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선교도 퇴색된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든지 전도가 퇴색되면 결국은 선교도 퇴색된다는 예를 우리는 여기에서도 찾아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을 받은 기독교는 안주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타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독교권 내지는 소위 구조적인 교회에 집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현대선교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18세기까지 사도행전에서 보았던 전도가 중시되는 선교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 일어났다.

몇몇 소수의 위대한 선교사들만 전도를 강조하고, 그 이외에는 군주가 정복하면 국민들은 자동적으로 그 군주가 인정하는 종교를 택하여야 하였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후의 일이지만 그 전에는 기독교 나라에 탄생하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 경우 자연히 전도가 필요 없게 되었다. 선교도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시대가 되었다.

 

전도가 없는 선교는 없는 것처럼 또 동시에 전도가 없는 교회의 신학도 정체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종교개혁이 일어날 즈음에는 세상과 교회는 동일시되고, 신학은 전통에 밀려서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 다시 한번 개혁을 가져온 것이 곧 종교개혁이다.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오직 성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과 더 나아가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개혁자들의 메시지는 다시 한번 세상과 교회의 차별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 같은 차별화로 말미암아 전도가 가능케 되는 신학적 기초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현대선교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신학적 바탕을 마련해놓은 셈이다.

현대선교운동이 일어날 즈음에 윌리암 케리는 "이교도의 회심을 위한 수단을 강구하여야할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조사"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잠자고 있던 교회를 향하여 전도와 선교의 불을 다시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전에는 이미 경건주의자들과 모라비안 교도들이 선교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선교와 전도가 시작된 것은 윌리암 케리를 기점으로 해서 그 이후일 것이다.

 

그 이후 우리가 잘 알 듯이 허드슨 테일러, 아도니람 저드슨, C.T. 스터드, 데이빗 리빙스턴 등 수없이 많은 선교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서 전도하는 것을 중요한 선교의 주제로 삼았다.

 

그 결과 다시 한번 정체되었던 선교는 활발하게 몇 세기 동안 진행되었다.

우리는 그 결실을 지금 보고 있다. 세계 어느 곳이든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이제는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

패트릭 죤스톤이 이를 교회는 당신 생각보다 큽니다(WEC 출판부)라는 그의 저서에서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우리는 선교의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할 것이다.

전도가 강하게 일어났을 때에도 혹자가 생각하듯이 선교가 곧 타문화전도 자체는 아니었다.

 

사실상 전도가 이같이 강렬하게 일어나면서도 부수적으로 다른 사회참여나 사회책임을 지는 일도 함께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부족한 부분도 더러 있었다.

우리가 구원의 시급성을 생각하여 본다면 그런 균형은 별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될 것이다.

 

그리고 불균형이 있었다면 전도를 중시해서 일어나는 불균형이라기 보다는 전도와 더불어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일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균형이라고 보아야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부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복음이 너무 강력하게 전해졌거나 복음만 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후로 이러한 것들을 시정하기 위해서 취해진 많은 조치들이 결국은 강력한 복음전파를 둔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더 나아가서는 복음주의 선교운동과 선교학이 이 일에 기여를 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현재에 와서 인구 비례에 따라 제대로 증가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하는 상태까지 되었다.

 

만일 지금 현재 상태처럼 선교와 전도의 관계가 유지된다면 전세계의 복음화는 계속 구호에 그치게될 것이다.

기독교 인구는 모든 종파를 다 합쳐서 30-33%의 선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명령을 순종하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선교신학이 제대로 균형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선교의 다변화가 이러한 선교와 전도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21세기를 맞이해서 우리는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전도의 정당한 위치를 선교가운데서 찾게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에 모든 족속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린 양의 잔치에 참여하는 요한계시록의 청사진대로 선교가 이루어져야될 것이다.

Ⅲ. 현대선교학 운동이후 선교와 전도의 관계
현대선교학 운동이라는 말은 선교학적 문헌 가운데 찾아볼 수 없다.

이 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 쓰게된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 선교 운동에서 나온 선교신학 운동을 지칭하여 이 말을 사용하였다.

현대선교신학 운동은 대개 60년대 이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에큐메니칼 선교신학도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세계교회 협의회(WCC)와 세계선교협의회(IMC)가 합병한 1961년 이후에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1960년대가 매우 중요하다.

 

휘튼에서 1966년 선교관계자들이 모임을 가진 것과 또 1966년 베를린에서 세계복음화 대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74년 로잔 제1차 대회는 복음주의 선교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초석(cornerstone)이 되었다.

 

복음주의 진영은 특히 1974년 로잔 대회가 전도와 선교의 관계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1960년대를 현대선교학 운동의 발생 시기로 보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일부학자들은 선교신학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선교와 전도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면 먼저 에큐메니칼 운동의 관점에서 선교와 전도의 관계에 영향을 주는 내용들을 몇 가지만 지적해 보겠다.

첫 번째로 광의적 전도개념(larger evangelism)의 등장이다.

 

이 용어는 아더 죤스톤(Arthur Johnston)이 저술한 세계복음화를 위한 투쟁(The Battle for World Evangelism, Wheaton, Tyndale, 1978)에 언급된 용어이기도 하다.

1938년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에서 헨리 크래머가 하킹을 제압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복음은 단순히 메시지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면을 중시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은 전도를 통해 영혼이 회심하여 구원받는다는 기존의 전도개념과 구별하여 인간전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까지 생각한 총체적인(the holistic evangelism) 전도 개념의 초기형태가 되었다.

 

따라서 이는 곧 전도가 영혼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의 요구까지도 포함하는 것을 의미했고, 가난 문제와 인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복음만 선포한 것은 오히려 총체적인 복음(the whole Gospel)이 아니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남미 출신들에 의해서 강조되는데 일명 극단적인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강조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강조는 전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게 만들었다.

 

따라서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교인들이 선포한 케리그마 내용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의 사회적인 상황이 더 고려된 복음전도 양식이 되었고, 바로 이 같은 주장은 차츰 복음전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복음이 사회참여와 함께 하지 않는 경우 천박한(cheap) 복음이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선교와 전도의 사이는 벌어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세상 중심 신학(the theology of the world)이 에큐메니칼 신학을 지배하기 시작한 1950년 후반부터 선교에 있어서 전도의 의미는 차츰 희석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세상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선교의 어젠다는 세상이 정한다고 공식을 바꾸게 되었다.

 

호켄다익은 바로 이러한 선교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교회보다는 왕국에 대한 개념이 더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때 왕국은 종말론적인 왕국보다는 세상과 동일시되는 왕국이었다.

 

점차적으로 구속의 개념은 사회적인 개념으로 바뀌어졌고 도덕적인 개념으로 바뀌어졌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화 과정이 곧 선교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선교신학적 변화는 선교에 있어서 전도를 약화시키는데 크게 작용을 하였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등장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해야한다는 의미로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아마도 구속을 가장 중시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점차적으로 인간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이 세상의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따라서 선교에 있어서 전도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네 번째로 증거에서 대화로의 전환이 여기에 기여했다.

이 당시 선교신학이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고 포용주의의 영향을 받아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도보다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 배우는 쪽을 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대화는 물론 전도를 하기 위한 대화보다는 전도를 배제한 대화라고 보아야될 것이다. 즉 상대주의적인 대화를 의미한다.

다섯 번째로 해방신학의 출현으로 이제는 선교의 구심점이 전도에서 인간성을 무시하지 않는 사회를 구성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마르크시즘의 방법론을 사용해서 사회 정의를 이루고 가난을 타파하는 것들이 선교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결국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전도를 서서히 배제하고 전도가 아직도 어젠다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중의 하나로서 남아있게 된다.

현재에도 이 노선은 계속 유지되고 있고 따라서 에큐메니칼 신학은 계속 전도를 약화시키거나 거의 배제하는 쪽으로 형성되어졌다.

 

그 결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창하는 진영에서의 선교는 극히 미약해졌으며 특히 미국 등지에서는 그 운동의 주역이었던 대 교단들이 이제 명맥만 유지할 뿐 선교 자체도 소멸된 상태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사실상 로잔 1차대회가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로잔 제 1차 대회에서 전도와 사회책임을 지는 것이 모두 다 선교라는 사실을 명시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후부터 선교와 전도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들을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같은 명시가 있기 전에도 선교는 전도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타문화에서 전도하는 것이 강조된 그 당시에도 사회적 책임을 지는 운동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좀더 신학적으로 정립을 한 것이 로잔 제 1차 대회였다.

 

그 후 이런 결정이 정확히 어떤 선교의 결과를 가져왔는 지는 우리가 비교와 연구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다.

전도가 강조되던 때의 선교와 전도와 사회참여가 동시에 강조되던 때의 선교는 아직 비교하여 연구된 바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선교에 있어서 전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점차 감소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교가 더 이상 전도를 핵심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다원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전도와 상관 없이도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것만으로서도 얼마든지 정당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분위기까지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서서히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전도 이외에 다른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영역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전도와 교회개척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덜 강조하게 되었다.

이는 로잔 제 2차 대회에서의 강조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로잔 제 1차 대회의 연장선에서 로잔 제 2차 대회는 다양한 구제와 사회적 책임을 지는 면을 많이 강조하였다.

물론 전도가 적극적으로 되어가는 과정 중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나 혹은 전도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책임이나 사회참여가 강조된다면 결과적으로 전도의 상승효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전도하기 위해서 사회책임을 지는 것이나 전도의 결과로서 사회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전도와 대등한 입장에서 내지는 독립적인 입장에서 사회참여를 권장하는 격이 되었다.

 

물론 전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규정짓고 있지만 선교가 전도를 중시했던 다이내믹은 서서히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로잔 제 1차 대회 이후 지금까지 세계 복음화의 비율을 보았을 때 진전이 거의 없는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동안 미전도종족 운동과 AD2000 운동 등 일각에서 전도에 대해서 강력히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기독교인구의 비율은 거의 변함이 없다.

둘째로, 선교학이 사회과학화 되어가는 과정도 선교에 있어서 전도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특히 60년대 이후 현대 교회성장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맥가브란 박사의 주도로 말미암아 교회의 중요성과 전도의 중요성이 매우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강조와는 다르게 전도열은 상승된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교회성장학이 주장하는 전도의 양상이 성격상 사회과학적인 연구에 치중되었기 때문에 사도 시대나 초대교회에 가졌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본다.

그리고 교회성장을 공부한 사람들이 그들의 구호와는 다르게 전도의 능력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그렇다.

대개는 통계학적으로나 혹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교회성장과 전도에 관한 연구를 하게되는데 이런 학문의 강조는 곧 전도의 열정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가졌던 내 동족을 위해서는 내 생명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복음증거하기 원한다는 것과 같은 열정을 갖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열정이 식게 만들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성장학파들은 능력전도와 영적 대결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하여 신비스러운 면을 보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자체도 또 하나의 부작용을 가져왔다고 본다.

 

사도들이 전했던 메시지 자체가 가지고 있던 능력보다는 기적적인 면에 치중하다보니까 선포내용이 그만큼 축소되어서 결국은 전도가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여겨진다.

셋째로,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불신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정통적인 교리에 대한 경시사상이 전도를 약화하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대표적인 예로서 지옥에 관한 교리가 약화된 점이다.

 

존 스토트 등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제한적 말살설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고 이는 원래 전통적으로 우리가 믿고있던 지옥에 대한 개념에서의 후퇴를 의미한다.

 이로써 전도의 당위성이 그만큼 줄어들었다고 본다.

 

AD 2000 운동도 날개를 접었고, 세계는 가면 갈수록 다원화되어가고 있고, 현대인들은 절대적인 것을 거부하는 현상이 더욱 팽배해지고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절대적인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 속에 찾아오는 공허함과 불안함은 기하급수적으로 커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종교이든 거머쥐어서 영적 진공상태를 메워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성서에 나타난 대로 선교에 있어서 전도의 위치를 다시 확보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현대인들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가를 선교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전도가 더욱더 선교가운데 높은 위상을 차지하도록 해야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계복음화를 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Ⅳ. 현대 21세기를 위한 바람직한 선교와 전도와의 관계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적 선교신학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선교와 전도의 관계를 명확히 규명한 선교신학적인 시도가 없었거나 극히 드물었다.

처음에는 선교는 전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전도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당연시하였기 때문에 연구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선교의 성서적 기초 같은 것은 선교가 성경에 나와있다는 근거를 마련하는데 급급한 것을 볼 수 있다.

 

동양적인 사고나 한국적인 사고를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탁상공론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성서에서 선교를 하는데 전도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좀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아야될 것이다.

 

가령, 전도를 어떻게 하였는가, 또 선교에 있어서 전도의 중요성과 실천계획 등을 포함한 선교신학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지금까지 이루어진 선교신학의 틀에서 벗어나서 다시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선교신학의 흐름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우리의 위치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를 얽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곧 선교에 있어서 전도의 약화를 의미한다.

 

총체적 복음이라든지 혹은 총체적 선교 등의 용어들은 매우 좋은 용어이지만 모두 다 선교에 있어서 전도를 약화시키는 선교신학적인 개념들로 볼 수 있다.

왜 복음이 총체적인 복음이 되어야하는가?

 

복음을 그런 식으로 규정지어놓으면 단순한 복음 선포는 결국은 얄팍한 선교행위 등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사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변화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그들이 회심했을 때 곧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그 교회는 또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전파를 하였다.

 

이 과정 중에 문화도 기독교화 되었고 또 사회적인 책임도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된 목표는 영혼들을 구원해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왕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목표로 두었다.

그러나 요즈음 와서는 데이비드 보쉬 등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복음주의 내에서도 선교가 하나의 선교분야로 묶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러 가지 패러다임 중에 또 하나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내용을 보았을 때 선교의 목표가 시대별로 바뀌어지고, 패러다임이 새로 생기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구적인 선교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시대적으로 맞게 전도를 하고 또 시대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그러한 필요는 부수적이고 주된 것은 결국 영혼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빼놓고 하는 모든 것은 잘못하면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은 선교는 전도만 해야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전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선교가 사회참여나 인간의 필요에 집중되었을 때 오는 부작용을 우리는 직시해야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대문화에 맞게끔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 고찰도 계속 되어야할 것이다.

윌로우 크릭(Willow Creek) 교회가 미국 중산층 상황에 맞게끔 전도방법을 제시한 것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현대는 지금 복음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있다.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똑같고 그들의 심령 속에 있는 진공은 오직 복음으로만 메울 수 있다.

우리는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따라서 우리는 21세기에 걸맞는 전도학을 구성해야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이런 선교신학이 정립되었을 때 선교사들의 선교행위도 영향을 받게될 것이다.

다양한 사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사역을 하되 그 핵심이 복음전도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영혼들이 회심하는 역사들을 향해서 불굴의 노력을 해야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성경번역과 의료선교와 의료행위를 해야 할 것이며, 개발도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가 형성되고 그 교회가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책임있는 일원으로 양육하는 일도 해야될 것이다.

 

이것은 곧 제자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에 일고있는 제자화가 곧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하며 너무 전도에 치중했기 때문에 세계가 지금 이같이 복음화되지 못했다는 이론은 매우 위험한 면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얘기하는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도를 경시하게 되는 그와 같은 비판은 앞으로 선교를 더욱더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앵글과 더네스 등이 주장하는 "선교는 곧 제자화이다"는 말은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목표는 우리가 받아들이되 방법에 있어서는 우리가 선뜻 과거를 모두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전도가 더욱 강조되는 방법을 통해서 제자화가 더 구체적으로 될 수 있도록 하는 쪽을 우리는 택하여야만 될 것이다.

전도를 위축시키는 것을 통해서 제자화는 있을 수 없다.

 

제자화가 잘 될 때는 반드시 전도도 잘 되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한번 21세기를 접어들면서 선교를 뒤돌아보아야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선교의 좌판을 다시 짜야될 것이다.

현재 우리 선교가 과연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회심케 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8,000여명이 넘는 한국선교사들은 과연 어느 정도 복음을 바울 사도처럼 능력으로 전하고 있는가?

 

우리는 조직과 프로젝트 등으로 일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것이 다 중요하지만 사람을 변화시키는 전도가 없이는 결국은 교회도 개척되지 않을 것이며 교회가 개척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되는 것도 요원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선교와 전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래 의도했던 선교에 있어서 전도의 위치를 되찾아야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21세기를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선교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해야될 것이다.

 

(옮겨옴)

'기독교 이야기 > 선교.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이 전해지는 9단계  (0) 2013.02.18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0) 2013.01.29
시정하여야 할 전도 방법  (0) 2013.01.12
경로당 전도 (노인 전도)  (0) 2013.01.09
어린이 전도  (0) 2013.01.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