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사라진 하셉슈트(Hatshepsout)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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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셉슈트(모세의 양모) 여왕의 군사들 <여왕의 장제전의 벽화>

 

 

“하셉슈트 기록과 함께 모세의 기록도 사라져”

 

 

왕위의 정통을 이은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1457-1436 BC)가 나이가 어렸던 탓으로 하셉슈트 여왕(Hatshepsout, 1498-1483 BC)이 왕국을 다스리는 섭정왕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바로가 되었다.

 

그녀는 하이집트의 경제 수도인 멤피스(Mempis)에서 왕위에 오르고, 종교의 도시 헬리오 폴리스에서 태양신 라(La) 앞에서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공식 취임식을 올렸다(Christian Jacq. L Egypte Ancinne av jour Le Jour, “나일강 위로 흐르는 빛의 도시” 우종길 역, 서울:영림카디널, 1999, 146).

 

공동통치자 하셉슈트의 얼굴은 섬세하였고 걸음걸이는 우아하였고 당당하였으며 의지가 강한 여인으로 자신의 통치 철학에 반(反)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셉슈트 통치 초기에는 남편 투트모세 2세라는 위대한 왕의 아내로 일컬어지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의 권력에 대한 집념은 공동 통치자로서 투트모세 3세가 후일 권좌에 앉는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투트모세 3세는 그녀의 남편 투트모세 2세와 시녀 이시스(Isis) 사이에서 출생한 서자였기 때문이다.

 

하셉슈트의 아버지였던 투트모세 1세는 장군으로서 군대를 편성하고 조직할 때전차병들을 다루는 기마 전차병을 양성하였는데 이러한 전차기술의 도입은 힉소스 족(The Hyksos)을 통해서였다. 병거(Chariot)는 힉소스 군인들의 첨단무기였다(Siegfried H. Horn:Light from the Dust Heaps, 「성서고고학 입문」 장수돈, 오강남 공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7, 55).

 

기원전 1518년 투트모세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셋째 왕자였던 투트모세 2세가 왕위에 오르고 그의 누이이자 아내였던 하셉슈트와 함께 14년을 통치한 후 3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투트모세 3세는 이집트 왕실전통에 따라 왕위에 올랐으나 그의 재위 3년에 하셉슈트가 투트모세 3세로부터 바로의 직위를 찬탈하였다(P.A. Clayton, p. 130).

 

그녀는 왕위찬탈 이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섭정하면서 서서히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사망한 남편의 연인이었던 이시스(Isis)에 의해 태어난 투트모세 3세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대상자에 담겨 떠내려온 어린 모세를 발견하고 양자로 삼아 모든 정성을 아끼지 아니하고 길렀을 것이다(출 2:3-10). 이러한 정황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였으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예언하신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창 12:2; 13:14-18; 15:13-14; 50:24).

 

순교자 스데반은 모세가 성장하는 배경을 이렇게 설교하였다.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한지라”(행 7:21-22).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언급하기를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 11:24)라고 하였다.

하셉슈트는 남편의 통치 11년에서 12년이 되는 해에 네페루레(Nepherure)라는 이름의 딸을 출산했다.

 

한편 투트모세 2세는 부인이자 배다른 누이인 하셉슈트의 지나친 야심을 미리 알고 그가 죽기 전에 아들 투트모세 3세를 후계자로 선포함으로써 그녀의 야심을 꺾으려고 하였다. 결국 투트모세 3세는 어린시절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의 계모이자 고모인 하셉슈트가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함으로써 실질적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투트모세 3세 재위 2년이 되던 해에 하셉슈트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교묘한 정치적 공작에 의해 의붓 아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말았다(G.Dreyer, Eine Studue ThutmosisⅡ aus Elephantine, SAK 11, 1984. 489-99). 이러한 시기를 전후로 하여 하셉슈트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으며 이집트의 최고급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최대한 조치를 취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재위 기간에는 상이집트 변방 지역에 있는 문명국가 푼트와의 교역을 증대하였으며, 그녀의 딸 네페루레를 위하여 시나이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하토르 신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시종일관 정책보좌 역을 맡아 하셉슈트 치세를 빛내 주었던 재상 세넨무트(Senenmut)가 있었다.

 

그녀는 시나이반도에 자리잡고 있던 구리광산을 개발하여 국력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파노피(Paophi) 달의 15일에서 26일까지 나일강의 범람초기가 지난 후 두 번째 달의 열 하루에 걸쳐 오페트(Opet) 축제를 주제하는 대대적인 절기행사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아버지 투트모세 1세를 공경하였으며 아버지를 위한 예배소를 별도로 건축하기도 하였다(H.E.Winlock. Noets on the Reburial of Tuthmosis Ⅰ, JEAXV. 1989. 66).

 

하셉슈트는 힉소스 지배시기에 퇴락하였던 신전건물 개축뿐 아니라 기념물이 파괴된 체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었던 지역을 복구하는데 최대한 노력을 집중하였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오랫동안 힉소스 지배 아래에서 이완되었던 민심들을 수습하기 위하여 민중들 속에 파고들어 왕실과 소통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정치적 지혜들은 민중들의 세세한 불만 사항들도 경청함으로써 여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많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민중을 위한 정책이 하셉슈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셉슈트 치세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 투트모세 3세는 베두윈들의 침략이 잦은 시나이로 원정을 떠나 그들을 몰아내고 돌아온다. 그리고 하셉슈트 집권이후 22년의 치세기간이 끝날 무렵 그녀는 역사 속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그녀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이 기록이 마지막이다. “치세 22년 페르트 절기 두 번째 달 제10일.” 그리고 투트모세 3세에 대한 원정기록 속에 그가 이집트를 지배하였다는 기록이 시작된 때를 기록으로 남긴 문자에는 치세 22년 페레트 절기 네 번째 달 제16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 이후 하셉슈트의 치세에 관한 기록과 문헌들은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이 파괴된 기록 속에 미디안으로 추방당한 모세의 기록도 이집트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으로 유추된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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