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시대의 이집트 역사 배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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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셉수트 (모세의 양모)

 

“이집트 신왕국 시대부터 이스라엘 압제 시작”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학예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집트학의 권위자이자, 출애굽을 15세기 연대설로 추론할 때 모세의 양모로 추정되는 하셉수트 여왕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Christiane Desroches Noblecourt)가 ‘미스터리의 여왕 하셉슈트’(La Reine Mysterieuse Hatshepsout)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그 책에 따르면 1829년 샹폴레옹이 이집트의 대표적인 유적지 다이르 알 바흐리(Deir el Bahri) 신전의 잔해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폐허더미에서 나온 고대의 문헌들 속에 하셉슈트 여왕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찾아내어 해독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하셉슈트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집트 여왕으로 20년 넘게 이집트 전역을 통치하였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마리에트(Auguste Mariette, 1821-1881)는 샹폴레옹의 신성문자 해독을 바탕으로 이집트 고고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이집트학의 권위자로 프랑스 브루고뉴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던 마리에트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이집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이집트에 최초로 박물관을 건립하고 고대 이집트 유물을 해외로 반출하는 밀거래를 중단시키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은 고고학자였다.

 

마리에트는 언어학자 샹폴레옹이 다이르 알 바흐리 유적에서 하셉슈트 여왕에 대한 고대 문헌을 해독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 지역의 두 번째 남쪽 주랑 지점에서 폐허의 일부분을 발굴하였는데 이곳에서 여왕의 재직 시기에 전설의 나라 푼트(Punt)와 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100m이상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위치한 이 유적의 북쪽에는 하셉슈트 신전이, 남쪽에는 멘투호테프 2세

(Mentuhotep Ⅱ, 2060-2010 BC)의 신전 폐허가 남아 있었다. 이 유적이 체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면서 역사적 기록을 남긴 주랑 부위의 부조와 일부만 무사한 신전 내부의 모습들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왕가의 계곡에 남아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 반면, 유독 하셉슈트 여왕(Hatshepsut, Queen, 1498-1483? BC)과 관련된 조형물들과 문헌들만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체계적으로 여왕의 통치시대에 관한 흔적을 지워버렸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었다.

 

그밖에도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과 상이집트에 그녀가 세웠던 다른 기념물에도 처참하게 파괴되고 동일하게 조직적으로 훼손한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이러한 파괴를 조직적으로 명령한 이집트의 바로는 다름 아닌 그의 양자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1504-1450 BC)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전의 하셉슈트는 의지가 강한 여왕으로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세력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투트모세 2세(Thutmose Ⅱ, 1518-1504 BC)는 제18 왕조시대(1570-1293 BC)의 제4대 바로였다. 과거 18왕조의 창시자 아흐모세 1세(Ahmose Ⅰ, 1570-1546 BC)는 셈족의 통치자 힉소스족을 몰아낸 영웅이었다.

 

투트모세 2세는 150여 년의 힉소스족 지배 아래 있던 이집트를 해방시키고 강한 이집트를 만들기 위하여 강력한 이집트 건설을 국정수행의 최고의 지표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 세케넨레 2세(Seqenenre Teo, 1574 BC?)는 힉소스와 치열한 전투 끝에 치명상을 입고 전사한 흔적이 그의 미이라에서 발견되었다.

 

세케넨레 2세의 미이라는 1881년 다이르 알 바흐리의 왕실 보관소에서 발굴하였는데 그의 미이라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흔적이 남아있었다(P.A. Clayton, Chronicle of the pharaohs, Thomes and Hudson Ltd. London, 1994, 122). 그 미이라는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 아흐모세 1세에 의해 강력한 제18왕조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힉소스족이 이집트에서 축출된 다음 같은 셈족 계열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1:8).

 

그리고 당시 바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출 1:9-10). 이집트 역사 왕조사 중에서 이 시대를 신왕국시대(New kingdom 1570-1070 BC)로 분류한다.

 

아흐모세 통치 기간은 25-26년 간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25년 4개월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들 아멘호텝 1세(Amenhotep Ⅰ, 1551-1524 BC)는 25년을 통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이집트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그의 미이라는 1881년 왕실 미이라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하셉슈트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Thutmose Ⅰ, 1524-1518 BC)는 선왕 아멘호텝 1세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았던 군인이었다. 그는 아멘호텝 1세의 통치 말기에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였는데, 아흐모세 1세와 네페르타리 왕비(Nepertari Queen) 사이에서 태어난 아흐모세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왕위 계승을 위한 정략 결혼으로 보인다.

 

투트모세 1세는 약 6년 간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는 아비도스(Abydos)에 있는 그의 커다란 석비에 그곳에서 벌였던 광대한 건축 사업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나는 해가 지는 땅 끝까지 이집트의 경계를 넓혔다. 그리고 이집트를 모든 땅 가운데 가장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그 후 투트모세 1세가 기원전 1518년 사망하자 왕권을 계승한 이는 그의 3번째 왕자인 투트모세 2세였다. 그는 선왕과 서열이 낮은 무트네페르트 공주(Mutnefert, Princess) 사이에서 난 아들로, 그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앞서 왕위 계승자였던 두 왕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투트모세 2세는 자신의 취약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투트모세 1세와 아흐모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인 배다른 누이인 하셉슈트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즉 근친 결혼을 한 것이다.

 

이들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가 자신의 짧은 통치기간 동안에 전적으로 건축에 매진하였다는 역사적 자료를 볼 때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자신의 재임 기간에 건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출 1:11).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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