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나폴레옹이었던 투트모세 3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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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와 함께 자란 투트모세 3세(룩소르박물관)

 

출애굽기 연대를 1446년으로 추정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모세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1526년으로 추론할 수 있다.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 직전에 모세의 나이를 80세로 언급하고 있고(출 7:7)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의 나이가 120세였다고 신명기서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신 34:7).

 

이집트 제18왕조 시대의 여걸 하셉슈트가 모세를 기른 양모로 본다면 당시에 하셉슈트에 의해 정치적으로 일시 권좌의 위치에서 추출당한 투트모세 3세(Thutmose Ⅲ, 1504-1480 BC)가 모세의 정치적 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투트모세 2세와 시녀 이시스 사이에 태어난 투트모세 3세는 54년을 통치한 바로였다. 그는 통치기간동안 이집트의 영토를 오늘날 터키 국경지대까지 확장한 군주였으며, 모세는 이 시기에 미디안으로 추방당하여 40년 간 족장 이드로의 사위로 광야 속에 묻혀 살면서 후일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으로 이끌 지도자 수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모세의 생애 전반부 40년은 이집트에서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지도자 수업을 이집트 궁전에서 받았다면 미디안 광야 40년의 삶은 자신을 비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격적 수업을 쌓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출 2:15-22).

 

투트모세 3세 통치 초기인 첫 20년은 의붓어머니 하셉슈트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하셉슈트가 갑자기 몰락한 후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실질적인 전권을 다시 찾은 투트모세 3세는 그의 통치 첫해(1504 BC)에 치른 카데쉬(Qadeshi) 전투와 미타니(Mittani) 전투에서 승리한다.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투트모세 3세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양모 하셉슈트를 정적으로 몰아 폐위시켜 명실상부한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바로 왕족의 혈통을 계승하기 위한 정략 결혼의 대상으로 하셉슈트의 딸이자 의붓동생인 네페루레(Nepherure)를 아내로 정하고 왕비로 삼는다. 그러나 네페루네는 공동통치 11년 전에 세상을 떠나 그가 왕위에 오를 때는 아내가 없었다. 실질적인 바로로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 그는 왕녀 메리트레(Merytre)를 제1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녀를 통해 아멘호텝 2세(Amenhotep Ⅱ, 1453-1419 BC)를 얻었다.

 

한편 투트모세 3세가 역사의 무대에 동참하기 이전 하셉슈트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이집트를 다스리고 있을 때 모세는 최고의 지도자 수업을 양모의 보살핌 속에서 받고 있었으며, 투트모세 3세는 많은 시간을 최전선에서 군대와 함께 보낸 것으로 보인다. 하셉슈트가 이집트를 다스릴 때에는 시리아를 비롯한 레바논 지역의 지방제후들이 미타니 왕국에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투트모세 3세가 단독통치를 한 이후부터 이 지역까지 그의 통치가 미치게 되었다.

 

하셉슈트는 기원전 1483년경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여왕으로 제18왕조 전성 시대의 한 페이지를 남겼던 그녀의 죽음은 처절한 권력 낙마의 희생물이었다. 왜 그렇게 처절하게 사라져 이집트 왕조 역사 속에 문헌적 자료조차 지워졌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모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역 현장의 감독자 이집트 관료를 죽인 모세에 대한 정보가 테베에까지 전달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정보를 듣고 투트모세 3세는 그의 의붓어머니를 탄핵하였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지도자 모세를 키워낸 인물로서 하셉슈트의 정치 생명은 이집트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져야 할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투트모세 3세에 의해 하셉슈트라는 이름은 모든 유적과 기록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그동안 그의 미이라는 발견되지 않은 체 20세기 초였던 1920년 그녀의 빈 석관만 발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1903년 하워드 카터(H. Carter)에 의해 왕들의 계곡 제60호 무덤에서 발견된 성명 미상의 여성 미이라를 최근 CT촬영을 통하여 부러진 치아 상태를 발견하게 되었고, 하셉슈트의 이름이 새겨진 빈 석관에서 우연히 발견된 부러진 치아와 내장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치아와 성명 미상의 여성 미이라의 빠진 어금니와 일치하는지 정밀하게 조사를 한 결과 정확하게 일치하였으며, 상자 속 내장의 DNA 검사 결과와 미이라의 DNA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하와스(Hawass) 이집트 최고 유물위원회 사무총장은 이 성명 미상의 미이라가 ‘하셉슈트의 미이라’라고 공식 발표를 하였다(최현묵, “이집트 전설의 여왕 파라오, 미이라를 찾았다”, 조선일보 2007. 6. 28일자).

 

출애굽 역사 15세기설을 주장하는 유진 H. 메릴(Eugene, H. Merrill)에 의하면 모세의 미디안 유배는 그가 40세가 되는 해였던 1486년이었다고 한다. 그후 투트모세 3세는 18년간 보좌에 앉아 있었으며 나이 많은 하셉슈트는 더 이상 자기의 사위이자 조카인 왕을 제거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오랜 유배 생활을 끝내고 이집트로 돌아올 때 투트모세 3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출 2:23; 4:19). 투트모세 3세는 1450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Amonhotep Ⅱ)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1450 BC, Eogene H. Merrill, Kingdom of priests, “제사장의 나라” 곽철호 역, 서울:CLC, 2005, 74-75).

 

투트모세 3세의 재위 기간 동안 내정에 임하는 그의 지도력은 주도면밀하였다. 그는 여러 곳에 신전을 세우고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가지고 신전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투트모스 3세는 그의 재위 50여 년 동안 17번의 원정을 하였으며 19개 지역의 왕들을 정복한 군주로 이집트의 황금기를 이룬 바로였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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