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에스라(Ezra)와 유대 공동체(Jewish Community)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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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보이는 수산성의 폐허

 

 

엘리아십의 아들이자 예수아의 손자인 여호하난이 제사장으로 있을 때인 아닥사스다(Artaxerxes I, 465-524 BC) 통치 제7년 되던 해에 학사 에스라(Ezra)가 예루살렘에 귀환한다(458 BC).

 

에스라보다 늦게 느헤미야는 BC 445년이나 444년경 예루살렘에 도착한다(E. Bertheau). 그리고 12년간 예루살렘의 총독임기를 마치고 아닥사스다 1세 통치인 32년에 페르시아로 귀환한다. 이때가 기원전 433년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두 번째 임기를 보냈다.

 

당시 이집트의 엘레판틴에 거주하였던 유대 공동체 수비대의 한 유대인에 의해 쓰여진 편지에서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아들들인 들라야와 셀레마에게 보낸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는 기원전 407년경으로 추측되는데 산발랏은 느헤미야의 정적으로 그 무렵에는 연로하여 그의 아들들이 그의 지위를 대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자료에서 엘리아십의 손자 요하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엘리아십은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통하여 느헤미야의 후원자가 아닥사스다 1세였음을 알 수 있다(느 12:36).

 

기원전 516년 드디어 제2성전이 완공되고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과 포로로 잡혀 가지 않았던 북왕국 후예들 중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은(대하 30: 11-12) 온갖 이교도적 우상숭배의 행위들을 금지하고 유월절을 기념하는 절기를 성전에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때 학사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1세의 명에 의해 유대 법전(Torah)을 연구하게 하고 절기 회복을 선포하였다(BC 456).

 

포로 생활 귀환자들 가운데 첫 번째 돌아온 지도급 인물들은 개혁적 사고로 무장되어 있던 제사장들이었다. 유민기 이전 시대의 제사장들은 대부분 왕들에 의해 종속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586년 시드기야 왕의 죽음으로 그들은 비로소 독립된 위치로 서게 되었다.

 

비록 솔로몬 성전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특별 섭리속에 완공된 성전 제의의 회복은 그들의 사명감을 뜨거운 열정으로 부활시켰다. 그리고 다윗 왕조의 계보에 속하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는 예루살렘 재건에 대한 중대한 사명이 부여되었다(스 5:2; 학 1:1; 2:4; 12:14).

 

이런 상황에서 스가랴서에 나타나는 왕적 메시아와 제사장적 메시아라는 두 그룹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개념(슥 4:11-14; 6:11)은 당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인 국가 개념의 제의적 관점과 동시에 페르시아의 속주 안에서 제한적 신앙공동체로서 제의적 개념으로 인하여 상당한 갈등 구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갈등 구조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던 중 기원전 445년에서 429년까지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으로 있었던 요하난 2세(Johanan Ⅱ) 시대를 마지막으로 다윗 계열의 지도자는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다윗 계열의 마지막 지도자급 인물은 엘요네이와 아나니였다. 그 후 다윗 왕조 계열의 왕정 재건이라는 꿈은 접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제사장들은 유대 공동체를 이끌 지도자로서 독창적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기에 여호수아와 힐기야의 자손들로 하여금 다윗 자손과 인연을 단절하고 대신 제2성전에서 대제사장 직임이 보장받도록 개혁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유다 신앙공동체(Jewish Community)를 형성시켜 나갔다. 하지만 개혁자 요시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개혁의 구심점은 신명기적 회복을 위한 개혁을 주장하는 집단만 남게 되었다.

 

이들 단체는 더 이상 다윗 왕조의 부활을 원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다윗 왕조가 유다를 통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의 인장반지를 빼어 이방 갈데아 왕에게 줄 것을 예언한 말씀을 기억하라고 백성들을 선동하였다(렘 22:24-25).

 

이 당시 학사 에스라(Ezra)는 제사장이었는데(스 7:12) 그는 대제사장의 후손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586 BC) 처형당하였던 스가랴의 아들이었다(왕하 25:18-21). 그는 강 건너 속주에서 재판을 담당하였던 재판관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로, 범법자를 옥에 가두고 처형할 수 있는 행정관으로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스 7:25-26).

 

이 시기 에스라와 같은 동일 임무를 부여받고 이집트로 파견된 총독 웃자 흐레스넷(Udyahorresnet)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었다(L. Blenkinsopp, “The Mission of Udyahorresnet and Those of Ezra and Nehemiah.” JBL 106(1987) ; 413).

 

당시 지도자 에스라의 사명은 유대 땅으로 귀환한 백성들에게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앙 체계가 필요함을 가르쳤고, 전승(tradition)에 의하면 유다 왕국을 포기하도록 지도하였으며, 다윗의 후손에 의한 왕국 재건은 불가능하다는 시대적 정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이교풍습에 물들지 않고 철저한 신앙회복운동만이 국가가 존재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상을 제공하였다(스 10:1-15).

 

그후 신앙적 지도자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면서 새롭게 귀환한 유다 백성들과 팔레스틴의 남은자(Remnant)들에게 새로운 신앙 집단을 형성하게 한 그룹이 나타났는데 바로 사반(Shaaphan)의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사반의 손자 그달리아와 함께 비 다윗 자손들을 중심으로(왕하 22:3-13) 특별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스룹바벨의 임무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R. de Vaux, Ancient Israel : Its Life and Institution, London / New York Darton(1961) 129-131).

 

이들 사반 계열의 평민계급은 개혁적 제사장들과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적 그늘 아래 보호받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다윗 왕가의 부활을 견제하는 대안이기도 하였다.

 

당시 팔레스틴은 페르시아가 관용적 정책을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특별히 자신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한 유다 국가의 재건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신앙적 제의가 자유로웠던 그 시기에는 신명기적 신앙개혁만으로도 그들은 만족하고 있었다.(R. Albertz, Einleitung, 1992, 472-475).

 

당시 유대 공동체의 사회구조는 페르시아의 총독과 장로위원회, 제사장, 평민 평의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직은 유대자치 행정위원회로서의 성격을 가진 행정 체제였다. 이 길만이 페르시아의 20개 속주 가운데 소수 민족인 유대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보았다.

 

다윗의 후손(Seed of David)으로 이어지는 유다 왕족의 회복운동은 후일 마카비 혁명(The Maccabean Revolt)에 의해 여호야립 가문 제사장 계보 중심의 신앙공동체인 하스모네안 왕가 출현으로 더욱 희박하여져 갔다.

 

만약 에스라 시기에 다윗 왕조가 세력을 얻어 국가 독립을 선언하였다면 페르시아의 강력한 무력 진압으로 유대 공동체는 역사의 현장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R. Albertz, Die Exilszeit,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배희숙 역 경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178).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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