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 느헤미야 시대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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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왕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 늘어선 속주국들의 대표 행렬

 

“재건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 확고한 위치 되찾아”

 

 

다리오 1세(DariusⅠ, The Great, 522-486 BC)의 뒤를 이은 왕은 아하수에로(XerxesⅠ, 486-465 BC) 왕이다. 그들의 통치시기에 다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대한 기록은 성문서에 속하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의 시대적 배경을 통하여 조명되고 있다.

 

그는 왕의 직위에 오르자마자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483 BC) 바벨론 지역에도 국지적 반란이 일어났으나 24개 지역의 속주를 연결하고 있는 ‘왕의 도로’(王道;Royal Road)를 통하여 신속하게 제압하였다.

 

특히 메데, 엘람,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데 있어 이 도로는 큰 역할을 하였다. 아하수에로는 그의 정책의 기조가 선왕들과는 달리 속주를 관용정책으로 다스리기보다는 페르시아에서 파견된 총독(Satrap)을 통하여 통치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M.W.Stolpler, ‘The Governor of Babylon and Across the River in 486 BC’ JNES 48(1989); 297). 그리고 페르시아 정책에 위반하는 속주지역에 대하여 재정지원을 단절하여 버렸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의 성전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아각 사람 하만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고 왕비 에스더와 모르드게를 비롯해 유대주의자들을 숙청하려한 하만의 계략에 대한 특별 배려였으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만의 음모를 제거한 이후 아하수에로는 그리스 침공을 위한 원정을 떠난다(BC 481). 아하수에로의 페르시아 대군이 침공하자 그리스 동맹군들은 고린도에 모여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동맹을 결성한다. 이 고린도 동맹은 페르시아군을 맞아 일전을 벌일 장소로 모이다 산맥이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지점에 형성된 협로 데르모필레(Thermopylae)로 정한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Leonidas) 휘하의 300명의 정예부대는 처절한 싸움 끝에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BC 480). 그러나 그후 프라티아 전투(Plataiai)에서 연거푸 아하수에로는 대패하고 만다(BC 479). 결국 전투 중에 사망한 아하수에로의 뒤를 이어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Ⅰ, 465-423 BC)가 왕위에 오른다. 그의 통치기간에 유다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 성벽을 제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제위 기간에도 많은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집트의 반란이 가장 큰 반란이었다(465-455 BC). 그러자 이 전쟁 기간 중 휴전을 선포하고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에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평화조약을 칼리아스 조약(Peace of Kallias)이라고 부른다(449 BC). 이 조약을 끝으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유대 공동체는 아닥사스다 왕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페르시아의 속주정책이 바뀌게 되었다.

 

아닥사스다 통치시기에는 에집트와 그리이스의 평화조약 이후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유대지역을 정략적 완충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요충지역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기원전 445년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기에 이른 것이다(O.Margalith. ‘The Political Role of Ezra as Persian Governto’ ZAW(1986);111).

 

이러한 역사 속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언약공동체를 지키시기 위한 특별 섭리가 있었다. 이 시기는 또한 학사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의 활동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느헤미야는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 앞에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느 1:1-10).

 

당시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대적 세력이 있었다. 즉 느헤미야에 의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그 배경에는 방백 르홈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예루살렘 백성들의 성벽재건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보냄으로써 시련이 시작되었다(스 4:8-16).

 

그러자 성벽 재건은 중단되었고 이렇게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느헤미야는 특별기도를 드린다. 그후 왕께 이 사실을 아룀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닥사스다를 감동시키신다(느 2:8-9). 이후부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과 함께 신앙개혁운동도 병행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황은 칼리아스 평화 협정을 맺은 직후인 관계로 매우 불안한 시대였다. 더욱이 강 서편의 총독 메가비조스(Megabyzos) 반란이 일어난 시대(449-448 BC)였기에 유대 주변의 지역은 세력간의 갈등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 속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원전 516년에 완공된 제2성전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벽 공사를 완공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파송되어 성벽 공사를 완공하는데는 많은 방해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처럼 안팎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느헤미야는 무장병력을 성 주위에 주둔시켜 지키도록 조처하였다(느 4장). 심지어 대적자들은 느헤미야를 암살할 계획까지 세웠으며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대한 모반을 꽤하고 있다고 거짓 소문을 유포하기도 하였다(느 6:1-9).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벽은 52일만에 완공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지 14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되찾게 되었다.

 

느헤미야는 당시대의 레위인들을 성전 안으로 불러들이고 제사장들의 직임도 감당하게 하였다. 또한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고 안식일에 상업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그리고 곡물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 또는 일부의 수입이 되게 하여 레위인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느 13:31).

   

유대민족을 향한 신앙 개혁운동은 이어서 느헤미야보다 3년 전에 귀환한 학사 에스라에게 그 사명이 넘겨지게 된다(457 BC).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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