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몰락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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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에서 발견된 고레스의 ‘사이러스 실린더’(고대 문서) _ <대영박물관 소장>

 

 

“역사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 보살펴”

 

그리이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 484-425 BC)는 그의 역작 『역사』(Hestoriai) 제3권에서 다리오 1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리오는 제국을 20개 주로 나누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주마다 한 사람의 총독(Sotrap)를 두고 있었는데 지역(Satrapia)마다 신임하는 총독이 있었고 백성들은 그에게 세금을 납부하였다.”

  

기원전 494년 반란의 진원지였던 밀레도(Miletos)를 정복한 이후 4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리오 1세는 이오니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반란을 영구히 진압하기 위하여 원정길에 오른다. 그의 계획은 철학과 교육의 도시 아테네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25㎞ 떨어진 마라톤 평원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은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490 BC). 수많은 전사자를 낸 페르시아는 그 이후 한번도 그리이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후 다리오 1세는 기원전 486년 11월 말경 중병으로 30일간 누워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리오 1세가 죽고난 후 혼란의 와중 속에서 시간은 흘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한 군주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빌립 2세(PhilipposⅡ)였다.

 

빌립 2세는 기원전 358년 기병 600명, 보명 1만 명의 군대를 조직하고 세력을 장악한 지 22년 만에 기병 2,800명 보명 2만 7천명의 정예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보병들을 가리켜 ‘사리사’(Sarissa)라고 부르는 장창(長槍)으로 무장시켰는데, 이 보병들의 밀집대형의 진을 팔랑크스(Phalanx)라고 불렀다.

 

빌립 2세가 다스리는 마케도니아는 시민들이 모두 군인들이었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용사들이었다. 빌립 2세는 평소에 정예 용사들만 골라서 생사를 같이 할 동지를 규합하였는데 그들을 헤타로이(Hetairoi)라고 불렀다.

 

그리이스의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일한 빌립 2세는 기원전 337년 고린도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이오니아 지역의 페르시아 지배권을 되찾기 위하여 국지전(局地戰)을 벌인 끝에 페르시아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때 고레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의 8년 통치는 에집트, 에디오피아를 정복하는 도중에 마감하고 만다(522 BC).

 

다리오 2세는 약 36년간 통치하면서(522-486 BC) 페르시아의 영토를 인도까지 넓혔고 그리이스를 뛰어넘어 동유럽까지 영향권 속에 있게 한 지도자였다. 다리오 1세의 관용은 유대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동기를 부여한 군주였으며 이 또한 언약 역사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스스로 “모든 민족들의 왕이며 세계의 혈통을 하나로 잇는 왕”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고레스 2세와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트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또한 피정복민의 지도자들 역시 페르시아의 군주를 통치자나 압제자로 보지 않았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과 사회질서를 지켜줄 왕으로 보았다. 유대의 율법(Torah)과 이스라엘의 ‘유일신 여호와 신앙’을 인정한 것도 이러한 정책 중 일환이었다.

 

그 뒤를 이어 다리오 1세의 아들 아하수에로(XerxesⅠ, 486-456 BC)가 다리오 2세를 계승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시기를 폭군이 통치하던 시대로 평가하였다. 아하수에로는 편협하고 잔혹할 뿐 아니라 퇴폐적이고 방탕했던 군주로 언급되었다. 그는 자신이 거느렸던 후궁들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처제, 며느리, 조카딸을 포함하여 많은 여인들과 문란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통치기간 동안 속주의 민족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노예신분으로 끌어내렸다.

 

이 시기에 에스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에스더와 모르드게가 아니었다면 유대인 공동체는 와해되었을 것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뿐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공동체의 사활에도 큰 위기가 닥쳐왔을 것이다.

 

기원전 456년 아하수에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아르닥크세르크세스 1세(456-424 BC), 크세르크세스 2세(424-423 BC), 다리오 2세(423-404 BC), 아르닥 크세르크세스 3세(Artaxerexes Ⅲ, 359-338 BC), 아르세스(Arses, 338-336 BC), 다리오 3세(Darius Ⅲ, 336-330 BC)로 이어지는 페르시아의 통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역사의 전설로 사라져갔다.

 

신바벨론 제국은 유대를 48년동안 통치하였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213여년을 지배하였다(539-523 BC). 이처럼 오랜기간 근동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가 작용하였다. 이때 두 제국 통치 기간동안의 관용정책(寬容政策)은 유대인들의 유일신 신앙을 더욱 체계화시키고 국제화시키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나아가 이 관용정책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C)의 관용정책을 더욱 발전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팔레스타인 정복이후 근동지방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슬로건 아래 더욱 발전되어 갔다. 절대적 진리로 고백되어지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러한 토양 아래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확장하였고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롬 11:23).

 

아케메네즈 왕조(Achaemenian Empire) 후반기에는 제국 전역에 걸쳐 반란이 격화되었으며 특별히 소아시아에서는 심각한 반란과 가혹한 진압이 반복되어 아하수에로 왕은 힙겹게 제국을 지켜야만 했다. 아르닥크세스크세스 3세의 뒤를 이어 다리오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336 BC), 그리이스 북부 마케도니아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마케도니아 왕 빌립 2세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며 그리이스 전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빌립 2세는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제국이 무너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제국의 관용주의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후일 이러한 관용이 불관용의 씨앗을 뿌려놓았다고 하는 점이다. 급속하게 뻗어나가는 제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종교나 문화를 사회적인 절대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상과 종교적 이념으로 통일되지 못한 제국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분열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흐름을 페르시아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후일 역사가들은 페르시아의 관용정책을 가리켜 팍스페르시카(Pax-Persica)라고 불렀다. 페르시아를 파라다이스(Paradis), 즉 낙원(樂園)이라고 불렀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의 조직과 제도는 결국 멸망의 길을 가는 것임을 페르시아 멸망의 역사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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